그래서 다들 무대 경험이 풍부할 거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솔로
활동은 2012년도에 발표한 EP 앨범을 통해서 처음이었는데
그때 솔로로 활동하는 아티스트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3분 30초를
혼자 다 이끌어 간다는 게 쉽지 않더라.
맏언니이자 선배로서 부담되는 자리였을 것
같은데.
다행히도 첫 미션부터 박살 났지(웃음).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꼭 제일 잘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알게 돼서.
랩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혹시 UP라는 그룹의 '뿌요뿌요'라는 노래 기억하나? 그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항상 랩 부분을 외우지
못해서 직접 개사해서 랩 부분은 내 마음대로 불렀다. 그리고 그 다음부턴 아예 힙합곡에는 내가 랩메이킹을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자연스러웠다.
랩퍼가 될 거라 생각했나?
사실 가수가 되고 싶었지만 내가 노래를 못했기 때문에 노래에 도전하진 않았고 힙합곡에 가사를 쓰면서 랩스타를
꿈꿨지. 사실 스무살이면 랩스타가 돼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허니패밀리로 활동하면서 그 꿈이 이뤄질 거 같았는데 알다시피 잘 안됐다. 그 이후로 꿈을 접을까 하다가
브라운아이드걸스라는 그룹에서 여자 랩퍼를 구한다고 해서 그렇게라도 음악을 계속 하자고 생각하며 멤버로 들어갔다.
<언프리티
랩스타 3>에 출연을 결정한 이유는?
솔직히 죽을 때까지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프로그램이었다. 주변에서도
진짜 잘해도 본전일 거란 말이 많았다. 그런데 시즌2 때부터
회사에서 나가보자고 하더라. 계속 고사했는데 갑자기 정면돌파하자고 생각했다. 출연하지 않으면 비난도 안 받겠지만 얻는 것도 전혀 없을 테니까. 결국
도전해보고 변화를 느끼고 싶었다.
어린 후배들과 경쟁하는 건 어땠나?
어린 친구들의 패기가 정말 부럽다고 생각하고 인정할 수 있었다. 나도
어릴 때는 그랬으니까. 그래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거 같다.
나이 든다는 것이 두렵지 않나?
여자라서 두려운 건 있다. 아무래도 여자는 좀 더 젊고 어려야 주목을
받게 되니까. 그런데 나이 먹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두렵다고
해서 피할 수는 없으니까. 결국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내가 어떻게 타계해 나가야 할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 같다. 어쩔 수 없으니까.
방송 상으론 상당히 안정적인 느낌이었다.
다들 그렇게 보였다고 하더라. 실제로는 방송 녹화 기간 내내 심리적으로
불안정했다. 다만 카메라 앞에선 계속 마인드컨트롤 했던 거지. 혼자
작업실에서 가사 쓰면서 종종 땅을 치고 울기도 했다. 이걸 내가 왜 한다고 했을까, 이러면서(웃음). 그러다가
마음을 다잡고, 결국 TV로는 마음을 다잡은 상태만 나갔겠지(웃음).
허니패밀리 시절에 함께 활동한 길이 프로듀서로
나왔다.
사실 허니패밀리 출신 오빠들은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첫 미션의 프로듀서부터 길 오빠가 왔다. 그 다음 미션에선 쿠시가 나왔고, 산이나 스윙스도 안면이 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못한 건가. 생각해보니 안면이 전혀 없는 딘의
트랙 미션은 우승한 거 보니까(웃음)? 아무튼 길 오빠가
처음에 나온 덕분에 마음의 준비는 확실히 됐다. 앞으로 어떤 사람이 프로듀서로 나와도 다 받아들이자고, 내가 알던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게 될 거라고, 마음이 단련됐다.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랩 부분은 직접 작사해서
앨범에 작사가로 이름을 올렸다.
랩 파트는 전문적으로 랩메이킹을 해주던 분들이 있었고, 그분들이 만들어준
대로 랩을 했는데 그런 관례를 깨고 싶었다. 그래서 랩 부분은 내가 쓰겠다고 했고, 랩 부분에 대한 저작권도 보장해달라고 주장했다. 사실 기성 작사가
입장에선 원래 본인 몫이었던 저작권을 왠 어린 애한테 내줘야 하는 거니까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내게도
도전이었다. 결국 의사를 관철시켜서 1집부터 작사가로 앨범에
참여했다.
여자 랩퍼는 남자 랩퍼보다 실력이 부족하다는
인식을 어떻게 생각하나?
사실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는 남자나 여자나 공평하다. 의지만 있다면
다 할 수 있다. 다만 여전히 랩퍼가 되려는 여자가 수적으로 적은 것뿐이지. 그러니 당연히 인재풀이 좁아지고, 인재풀이 좁으니 전체적인 실력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거다. 천재적으로 잘하는 친구들이 있다고 해도 평균적으론 어쩔 수 없지. 단지 그 차이인 거 같다.
결국
<언프리티 랩스타 3>에 나간 건 좋은 선택이었을까?
잘한 거 같다. 눈 가리고 모른 척할 수 없도록 지금 내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경험이었고, 덕분에 발전할 수 있는 변화를 얻은 것 같다.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가사를 써본 적이 없다. 아마 태어나서 가장
많은 노력을 한 시기였을 거다.
앞으로의 계획은?
몇 달 간격으로 음원을 지속적으로 발매할 계획을 갖고 있다. 아마
최소한 두 곡씩은 계속 발표할 거 같다.
(ELLE KOREA NOVEMBER 2016 NO.289 'ELLE INTERVIEW')
배우는 작품을 통해 이름을 얻는다. 브라이언 크랜스턴은 50세에 다다라서야 이름을 얻게 됐다. 정말 긴 기다림이었다. 인생의 반환점을 돈 시점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만난 배우의 절정, 어쩌면 이제야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브레이킹 배드>가
내 인생을 바꿨다." 그렇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브라이언
크랜스톤이 <브레이킹 배드>에 출연하는 동안 그의
입지는 확실히 달라졌다. 지난 2013년 다섯 번째 시즌까지
종영된 TV시리즈 <브레이킹 배드>는 2014년 에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하고, 배우 부문에서도 여우주연상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개 부문까지 수상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브레이킹 배드>의 알파이자 오메가라 할 수 있는 월터
화이트를 연기한 브라이언 크랜스턴 역시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브레이킹 배드>에 출연하며 네 번째로 받는 에미상 남우주연상이었다. 이보다
좋은 결말이 없었다.
<브레이킹 배드>는
일개 고등학교 교사였던 월터 화이트가 마약 업계의 거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본래 월트
화이트를 연기할 후보로 물망에 올랐던 건 크랜스톤이 아니었다. 존 쿠삭과 매튜 브로데릭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캐스팅을 고사하면서 크랜스턴에게 기회가 넘어왔다. 제작사
입장에선 크랜스턴이 탐탁지 않았다. <브레이킹 배드> 이전에
크랜스턴은 <말콤네 좀 말려줘>라는 TV시트콤으로 익숙한 배우였기 때문이다. 7년간 악동 같은 네 아들의
장난질에 샌드백처럼 당하기만 하는 아버지 역할을 맡아온 크랜스턴이 선악의 경계를 치열하게 오가는 월터 화이트를 소화해낼 수 있을지 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의 총괄프로듀서인 빈스 길리건은 크랜스턴을 믿었다. 빈스 길리건은 1998년에 연출한 <X파일>
시즌6의 한 에피소드에서 시속 50마일로 달리지
않으면 죽는 남자로 크랜스턴을 캐스팅했고, 그가 어두운 내면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임을 알고 있었다. 크랜스턴 역시 <말콤네 좀 말려줘> 이후로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낼 만한 캐릭터를 거듭 제안 받는 것에 대한 신물이 난 상태였고, 새로운 전환점을 찾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마약계의 대부가 될 남자일
것이라 예상하진 못했지만.
혹시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를
봤다면 크랜스턴이 출연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아마 대부분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라이언 가문의 4형제 중 막내를 제외한 모두가 전사했다는 보고를 받는 육군대령으로 잠시 등장할 뿐이니까. 심지어 엔딩 크레딧에도 '육군대령(War
Department Colonels)'이라는 역할로 표기되는, 이름도 없는 역할이었다. <브레이킹 배드> 이전까지의 크랜스턴의 경력을 보면 그가
할리우드에서도 특별히 언급될만한 배우로 꼽히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를 통해 그의 이름은 할리우드에서도 자주
오르내렸던 것이 틀림없다. 2011년부터 크랜스턴의 필모그래피에 지각변동이 생긴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컨테이젼>(2011)과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2011) 등
주목할만한 감독의 작품에서 연이어 모습을 드러냈고, 1990년도에 발표된 동명 SF고전을 리메이크한 <토탈리콜>(2012)과 벤 애플렉의 연출작이자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스릴러물
<아르고>(2012)에서는 시선을 끄는 역할로 자리하며 배우로서의 경력에 무게를
더했다. 심지어 범죄스릴러물인 <콜드 컴즈 나잇>(2013)에선 포스터에서부터 그에 대한 존재감이 달라졌음을 깨닫게 만든다. 동명 블록버스터를 리메이크한 <고질라>(2014)에서도 비중은 적지만 확실한 인상을 남긴다. 그리고
크랜스턴은 그의 인생에서 두고두고 중요하게 언급될 작품과 조우하게 된다.
전세계가 냉전으로 얼어붙은 1950년대에 매카시즘 광풍이 한창이던
미국을 배경에 둔 <트럼보>는 반공산주의를 표방하며
반자유적인 횡포를 일삼던 정부의 태도에 반기를 든,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에 관한 실화를
다룬 전기물이다. 할리우드의 인기작가였던 트럼보는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겠다는 명목으로
사회적 공포를 주입하는 반미활동위원회에 맞선 인물이다. 덕분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할리우드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된 그는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11개의 가명을 쓰고 B급 영화 시나리오를 대량생산하게 된다. 할리우드의 명품 작가라는
명예 대신 이야기를 만드는 기술자로서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가족을 위해 자신이 추구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된다는 과정이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화이트를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또한 연신 시나리오를
써내며 얻은 스트레스를 가족에게 전이시키며 의도와 달리 가족의 불행을 조장하는 트럼보의 히스테릭한 면모는
<브레이킹 배드>에서 악인의 카리스마에 탐닉하며 가족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월터
화이트의 이중성과 닮아있다. 크랜스턴은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처음 노미네이트됐다.
브래드 퍼먼이 연출한 범죄 스릴러물 <링컨 차를 탄 변호사>(2011)에 출연한 바 있는 크랜스턴은 브래드 퍼먼의 차기연출작인 <인필트레이터: 잡입자들>(2016)에서 주연을 맡았다. <트럼보>와 마찬가지로 실화를 바탕에 둔 이 작품은 콜롬비아의
마약왕이었던 파블로 에스코바의 마약 거래 내역을 확보하고자 5년간 잠입 수사를 펼친 미국의 관세청 특수요원
로버트 마주르에 관한 작품이다.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화이트가 하이젠버그라는 가명으로 신분 세탁을 하며 마약을 제조한 것처럼 <인필트레이터: 잠입자들>의 로버트 마주르는 밥 무셀라라는 가명으로 신분을
위장해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에 접근하고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무엇보다도 <브레이킹 배드>와
<트럼보> 그리고 <인필트레이터: 잠입자들>은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가장의 진심과 그 내면에
잠재된 캐릭터의 양면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브라이언 크랜스턴이라는 배우의 장기를 대변하는 공통분모의 사례처럼 보인다. 온화한 인상 뒤편에 잠재된 폭력성, 윤리적인 언어와 행동의 내면에
자리한 일탈적 본능, 안정을 추구하면서도 때론 쾌락을 탐닉하는 부조리함. 이 모든 이중성을 탁월하게 표현하는 재능이 그가 배우의 삶을 지속해올 수 있었던 비결이었을 것이다.
"캐릭터를 이해해야 한다.
진정으로 캐릭터를 이해하면, 삼투압 되듯이 캐릭터가 스며들 거다. 거기서부터 당신은 캐릭터를 필터 삼아 생각하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거기에 한 가지 방식만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식으로 그걸 이뤄내든 그 방법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크랜스턴은 지난 9월에 열린 에미상 시상식에서 다시 한번 남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된 바 있다. 존 F. 케네디의 암살 이후 국정을 이어받아
대통령직을 수행한 린든 존슨에 관한 실화를 극화한 TV영화 <올
더 웨이>에서의 호연을 인정받은 덕분이다. 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크랜스턴이란 이름이 주는 신뢰감은 보다 명확해졌다. 이제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나아갈 방향에 따라 걸어갈 뿐이다.
<M 트레인>은 록의 대모로 불리는 패티 스미스가 직접 서술한
사소한 나날들에 관한 기록이다. 건조한 바람처럼 감성의 물기를 말리는 문장 사이에서 패티 스미스가 살아가는
나날들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저스트 키즈>는 패티 스미스가 자신의 소울메이트였던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와 함께 보낸 젊은 시절에 관한 기록이다. 패티 스미스의 첫 번째 앨범이자 록음악 역사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데뷔 앨범이기도 한 <Horses>의 커버 사진을 촬영한 주인공인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패티 스미스에게 있어서 다시 만날 수 없는 인생의 조력자였다. 패티 스미스가 노래를 부를
때면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넌 노래를 더 많이 불러야 해”라고
말했고, 패티 스미스가 밴드 투어를 다닐 때에는 그녀에게 전화해 “전시
준비는 하고 있어? 그림은 그리고 있어?”라고 묻곤 했다. 록의 대모라 불리는 패티 스미스가 시인이자 화가이자 연극배우이자 모델이자, 전방위적인
예술가로 거듭난 데에는 그녀의 빛나는 재능을 보다 담금질하도록 부추기고 영감을 불어넣은 로버트 메이플소프와 함께한 나날들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1989년에 세상을 떠났고, 패티 스미스는 홀로 남았다. 하지만 삶은 종착역에 다다르기 전까지
멈추지 않는 기차처럼 흘러갔고, 패티 스미스의 삶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다만 더 이상 아이가 아닌, 어른으로서.
<M 트레인>은 패티 스미스가 살아온 혹은 살아가고 있는 어떤
날들에 관한 수기다. 사실 <M 트레인>에서 기술된 그 날들은 대단히 불명확하고, 불확실하기도 해서
이것이 실제로 그녀가 겪은 것을 기록한 글인지 혹은 그녀의 상상 속에서 부유하는 문장들을 헤매고 있는 것인지, 그
문장 속을 유영하다 보면 이 책을 통해 발을 딛게 된 세상의 실체가 모호해지는 기분이 든다. 어쩌면
이 책에 기술된 나날들 혹은 생각들은 텅 비어 있기에 그 어떠한 것도 얻을 수 없는 이야기를 애써 읽는다는 허무가 느껴지기도 한다. 애초에 책의 시작을 알리는 문장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글을 쓰는 건 그리 쉽지 않아.”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글을 읽다 보면 결국 삶이라는 것이
그 어떠한 날들의 총합으로 채워진 결과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었던 어떤 날 사이에 나이테처럼 깊게 박힌 기억을 통해 재생되고 환원되는 것임을, <M 트레인>은, 패티
스미스는 문득 깨닫게 만드는 것과 같다. 커피를 사고, 하늘을
바라보다 태풍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고, 불쑥 사진을 찍고 싶단 생각에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챙기는 도중에
불쑥 집으로 찾아온 지인과 함께 해변으로 걸어가는 과정에는 그 어떠한 삶의 교훈도 지혜도 없다. 그저
살아가기에 무언가를 하게 되고,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이 지나온 생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동행해온 존재들을 다시 만나게 되고, 그들을 통해
새로운 생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게 된다. 결국 <M 트레인>은 수많은 죽음을 관통해온 패티 스미스가 여전히 살아가야만 하는 불명확한 이유에 관한 기록일 것이다.
<M 트레인>은 당신이 여전히 자신만의 상상을 통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더군요.
사실
저는 그다지 총명한 아이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언어도, 과학도, 수학도 잘하지 못했죠. 그런데 상상력만큼은 늘 풍부했어요. 유년 시절엔 장난감과 나무 또는 칫솔에게 말을 걸곤 했는데 어머니도 그런 제 상상력을 부추기셨죠. 어지러운 방을 정리하게 만들려고 모두 다 깨끗하게 치우지 않는다면 곧 비밀 경찰이 들이닥쳐서 너를 잡아갈 거란
식의 이야기를 믿게 만들고자 하셨죠. 하지만 저는 그게 장난인 걸 알았죠. 그럼에도 그런 어머니의 의도를 좋아했어요.
<M 트레인>에선 당신의 취향을 대변하는 오브제와 패션, 일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요. 독자로서는 이런 취향을 읽어가면서
패티 스미스라는 사람에게 보다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프랑스의
시인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가 쓴 브뤼셀 여행기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먹고 마신 것이 그려지는 기분이었어요.
19세기 프랑스 문학에 어울리는 감성인데 그만의 감성이 좋았어요. 결국 그런 감성이 독자들을
자신만의 세상으로 초대하는 열쇠가 되는 셈이었죠. 결국 앨리스가 토끼굴에 들어가듯이 독자들이 이 책으로
빠져들어야만 저를 따라올 수 있는 셈이니까요.
혹시 로버트 메이플소프와 함께 했던 시절을 다룬
저서 <저스트 키드>의 성공을 기대하셨나요?
전혀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은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그 책이 로버트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죠. 물론 그는 이미 고인이 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 책을 절대 읽지 못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요. 정말 놀라운 점은 그 책이 거의 100만
부나 팔렸고 마흔네 개의 언어로 번역된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이 책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이었죠. 전세계의
거리에서 말이에요. 저와 같은 또래의 사람들에게는 추억이 되고 젊은 사람들에게는 영감의 원천이자 위로가
되는 느낌이었죠.
일찍이 남편과 사별한 이후로 재혼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에서 단 한번의 사랑만 하고 싶었던 건가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물론 제가 아는 이들 중엔 첫사랑이 죽은 뒤에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다시 사랑에 빠졌죠. 결국 주관적인 일이겠죠. 그리고
제게 다른 이를 사랑할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뿐이고요. 어린 아이 둘을 아버지 없이 키워야 했으니, 쉽지 않은 일이었죠. 10년간 정말 외로웠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고독을 좀더 견딜 수 있게 되더군요. 육체적인
욕구도 달라져요. 내게는 아이들이 있고, 일도 있고, 성공도 있어요. 물론 대중적인 성공뿐만 아니라 내가 보기에 만족할만한
성공 말이죠. 게다가 좋아하는 남자 친구들도 많아서 이 친구들과 약간의 로맨틱한 감정을 공유할 수 있어요. 심지어 저는 웬만해선 지루해하지 않는 편이에요. 시와 새로 산 부츠
그리고 연속극에 등장한 수사관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요.
그런데 정말 죽은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온다고 생각해요?
제
주변에는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은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절친한 사진 작가였던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마흔두
살에 세상을 떠났어요. 제 남동생 역시 그와 같은 나이에 떠났고요. 남편인
프레드는 마흔 다섯에 떠났죠.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 모두가 나를 찾아온다고 생각해요. 심지어 로버트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시선을 물리적으로 느끼기도 해요. 비트제네레이션을
이끌던 시인 앨런 긴즈버그의 시선도 그렇고. 반대로 남편 같은 경우에는 좀더 추상적이에요. 다만 남편은 자신을 닮은 아이들을 통해 늘 저를 보고 있죠. 파솔리니는
이런 말을 했어요. 고인이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말을 듣는 방식을 잊은 거라고. 맞아요. 사실 저는 그들의 말을 대부분 들어주는 것뿐이에요. 기도하는 것과 비슷하죠.
젊었을 때 이상하다거나 비정상적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물론, 있죠(웃음). 사는 내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어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과 달랐으니까. 나는 1946년에 아주 평범한 시골의 아주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내가
살던 마을에는 카페도, 갤러리도, 미술관도 없었어요. 유일하게 접촉했던 문화가 로큰롤이었죠. 60년대 소녀들은 모두 헤어스프레이를
잔뜩 뿌려서 머리카락을 위로 땋아 올리고는 결혼해서 미용사나 타이피스트가 되기를 바랬죠. 그러니 키도
크고 삐쩍 말랐는데 긴 머리를 지저분하게 땋아 내린 제가 비웃음을 사리라는 건 분명했죠. 때로는 힘들었지만
그냥 버텼어요. 예술에 관한 책을 충분히 읽었던 터라 고통을 참아내야 시인이나 아티스트가 된다는 것을
확신했거든요. 그래서 가난하고 이해 받지 못할지언정 어떤 틀에 갇히지 않기를 기대했어요. 아주 똑똑하지도 않고 공부를 지속할 수 있을 만큼 부유하지도 않았지만 어떤 신비로운 힘을 갖고 있다는 건 알았거든요. 그 덕분에 아티스트가 될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전혀 상관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뉴욕에 도착했을 때에는 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았어요. 많은 예술가들이 사방에 있었고 모든 이들이 나처럼 옷을 입고 있었으니까요.
남편이나 남동생의 죽음에 대해 말하면서 어떤 상처는
절대 아물지 않는다고 쓰셨는데, 미련 없이 잊는다는 건 불가능할까요?
감정적인 상처는 절대 아물지 않아요. 다만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겨우 배우는 거죠. 때로는 남편을 생각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어떤 때에는 20년 전에 세상을 떠난 남편과 지난 주까지 함께 했던 것 같은 기분이 느껴지기도 하죠. 그러다 보면 정말 미치도록 남편이 돌아오기를 바라게 돼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게 삶의 아름다움이기도 해요.
그토록 많은 기쁨을 느끼면서 동시에 많은 고통을 느끼는 것.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데에는. 하지만 내겐 없었다. 혼자 술잔을 기울일만한 이유가. 개인의 취향은 존중한다. 혼자 술을 마시는 게 좋다면야 그러려니. 하지만 나는 역시 모르겠다. 혼자 술을 마시는 게 뭐가 좋은 건지.
혼자서 밥도 잘 먹고, 영화도 잘 보고, 심지어 공연도 잘 보지만 혼자 술을 마실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밥은
먹어야 하고, 영화도 봐야 하고, 공연도 봐야 하지만 술은
마셔야 할 이유가 없었다. 굳이, 혼자서. 술이 마시고 싶은 건,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서, 누군가와 말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가끔씩은 나이가 드니 술 없이
누군가를 만나기가 힘들단 생각이 들어 서글픈 적도 있었다. 그래서 가끔씩은 최선을 다해 술을 만났다. 그래야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났으니까. 덕분에 가끔은 술이 나를
마셔버려서 힘들었고, 지난 밤의 나를 찾아가 술잔을 든 손을 꺾고 싶기도 했지만 나는 대체로 술을 잘
마신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대체로 잘 마셨다. 하지만 좀처럼
술이 좋아서 술을 마시는 건 아니었나 보다. 술은 그저 거들뿐. 그러니
‘혼술’이란 게 가당치도 않지.
그런데 그것이 일어났습니다. 혼술에 관한 원고 하나만 써주세요. 원고 청탁이었다. 하지만 나는 혼자서 술을 마시지도 않고, 즐기지도 않는다. 그럼 혼자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의 혼술 경험담을
써보는 건 어떨까요? 이것은 주(酒)님의
말씀입니다. 고로 이르시니 행하노라. 그리고 네비게이션을
찍을 만한 장소를 물색했다. 혼자 술 마시기 좋은 곳이란 아무래도 혼자 앉아있기 좋은 곳일 거다. 혼자 앉아있기 좋은 곳이란 사람이 많이 앉아있을 수 없는 곳일지도 모른다. 왁자지껄하기
보단 새침한 곳. 그리고 맛있는 걸 먹자. 어차피 마실 수
있는 술이라는 건 거기서 거기다. 입이 즐거워야 혼자서 즐기든, 견디든
할 것이므로. 한남동에 오사카 요리를 파는 곳이 있다고 했다. 오사카
요리? 오코노미야키? 그보다는 일본식 전골인 스키야키와 우동이
유명하다고 했다. 도쿄에서 먹었던 스키야키가 생각나 침을 삼켰다. 젓가락을
빙빙 돌려 고소한 노른자를 잘 풀어낸 뒤 찍어먹는 고기와 야채 전골의 끈적한 궁합. 전두엽에서 보낸
전기신호가 침샘을 자극했다. 마치 발보다 혀가 먼저 뛰어갈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택시를 불렀다. 아저씨, 한남동으로 가주세요.
막상 가게 앞에 당도하니 어딘가 망설여지는 기분이 들었다. 안을 들여다
보니 테이블 몇 개 없는 자리에 한 쌍의 여자들이 앉아있었다. 자리 있나요? 한 명이에요? 네. 여기
앉으세요. 2인용 테이블에 혼자 앉았다. 가게가 좁다 보니
왼 편에 앉은 이들의 수다가 왼쪽 귀로 들어와 오른쪽 귀로 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키야키 있어요? 스키야키는 예약 주문만 받아서 많이 준비를 안 하다 보니 1인분
밖에 안 남았는데. 그럼 스키야키 1인분이랑 판우동 하나
주세요. 그리고 맥주도 주세요. 맥주가 먼저 나왔다. 꿀꺽. 꿀꺽. 꿀꺽. 세 모금을 내리 삼켰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대화할 사람이 없었고, 당장 먹을 스키야키도 없었다. 맥주잔에 말을 걸 순 없어서 맥주를 두 모금 더 마셨다. 차라리
벽을 보고 앉아있으면 편하겠다. 그래도 옆자리에서 주문한 스키야키 향이 나름 괜찮았다. 그래도 맛있는 걸 먹겠군. 나는 주문을 외웠다. 혼자 밥을 먹으러 왔다고 생각하자. 그런데 사실 나는 반주도 즐기는
타입이 아니다. 오늘은 정말 특이한 날인 셈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간절히 음식이 나오길 기다린 적이 또 언제 있었을까 싶었다. 스키야키가 먼저 나왔고, 우동이 나왔다. 그새 맥주 한 잔을 다 마셔서 한 잔을 더 시켰다. 1인분이라 스키야키는
아예 전골로 익혀서 내주셨다. 젓가락을 빙빙 돌려 노른자를 풀었다. 그리고
고기와 야채를 푹 찍어 입에 넣고 천천히 음미하기 보단 씹고 먹고 맛보고 삼켰다. 그런데 즐겼나? 아, 물론 맛은 있었다. 다만
평소보다 좀 더 열심히 먹는데 집중한 느낌이랄까. 혼자 밥을 먹으러 갔을 때보다도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혼자 술을 마신다니, 도무지 취할 수가
없잖아. 술에 취하는 과정이란 그저 알코올 농도에 지배당해 몸 속의 알코올 분해 요소보다도 정신이 분해되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술에 취하기 이전에 분위기에 취하는 게 더 중요하다. 혼자서 술을 마실 순 있지만 술 마실 맛이 나질 않았다. 만취해도, 적당한 취기를 느껴도, 언제나 분위기에는 취해야 했다. 함께 떠들 친구가 필요했다.
남은 우동을 후루룩 빨아들이곤, 벌컥벌컥 남은 맥주잔을 비운 뒤 빈
잔을 바라보다 전화를 걸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뭐하냐? 별 일 없으면 술이나 한 잔 할까? 그리고 친구와
함꼐 할 2차 장소로 향했다. 그렇게 혼술은 끝났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만 같다. 인생이 아직 길게 남아서 장담할 순
없지만, 아마도, 아니, 확실히.
대만에서 태어나 9살에 미국으로 넘어온 저스틴 린은 영화를 전공했고, 영화감독이 됐다.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었던 미국에서 경계 없는 평범함과 특별함을 영화에 담아낸다.
J.J. 에이브럼스를 통해 현재진행형의 이름으로 거듭난 <스타트렉> 리부트 시리즈 중 세 번째 작품인 <스타트렉 비욘드>(2016)는 올해로 50주년을 맞이한 해에 공개될 프랜차이즈의 신작이다. “처음 J.J.에이브럼스에게 전화를 받은 뒤 이 프랜차이즈를 연출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만 며칠이 걸렸다. 프랜차이즈의 전통적인 팬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모든 것은 가슴으로부터 시작해야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섭고 두려웠다.” 그런 그에게 J.J.에이브럼스는 단호하게 조언했다. “대담해져라. 그리고 그냥 차지해라.” 그는 저스틴 린의 첫 번째 우주비행을 위한 완벽한 멘토였다.
저스틴 린이 <스타트렉 비욘드>를
연출할 수 있었던 건 당연히 <분노의 질주> 시리즈를
블록버스터급 프랜차이즈로 성공시킨 장본인이란 점이 주요했을 것이다. 본래 혈기왕성한 젊은 캐릭터들을
앞세운 스트리트 레이싱을 그린 범죄액션물이었던 <분노의 질주>가
전세계적인 흥행가도를 기록하는 블록버스터로 체급을 올릴 수 있었던 건 저스틴 린의 공이 팔 할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J.J.에이브럼스가 <스타트렉>의 차기 지휘권을 저스틴 린에게 넘긴 이유란 이렇다. “저스틴은 자신이 대단히 뛰어난
이야기꾼임을 스스로 거듭 입증해냈다. 하지만 어떤 것보다 나를 사로잡은 건 <스타트렉>에 대한 그의 진짜 애정이었다.” 그렇다. 그는 <스타트렉>의 전통적인 팬 그러니까 ‘트레키’였다. 그의
부모님은 ‘피시 앤 칩스’를 주메뉴로 한 작은 식당을 운영했는데
보통 저녁 9시에 가게 문을 닫고 10시쯤에 집에 와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저녁식사를 마친 뒤 린과 그의 동생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모두 TV 앞에 모였다. 11시부터 방영되는 <스타트렉>을 보기 위해서였다. “8살부터 18살이 될 때까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집을 떠날 때까지 그건 우리 가족만의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스타트렉>이라는 전통적인 프랜차이즈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의 애정은 시리즈에 새로운 모험의 좌표를 제시하는데 유용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해체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훌륭한 프랜차이즈였고, 50년 동안 지속돼 왔으며 다른 매체들 안에서 여전히 살아있다. 나는
작가로서의 사이먼 페그와 더그 정과 함께 모여 이미 성공한 것과 검증된 것에 안주하지 말자고 했던 게 기억난다.
우리가 사랑했던 것의 DNA를 사용하면서도 앞으로 더 나아가고자 했다.” 그래서였을까. <스타트렉 비욘드>에선 프랜차이즈의 상징과도 같은 엔터프라이즈
호를 완전히 파괴시켜버린다. 오래된 팬들 입장에선 그 자체만으로 이번 작품이 파격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스타트렉 비욘드>에서는 지난 두 전작에 비해 캐릭터의 다양성이 돋보인다. 이는
전통적인 프랜차이즈에서 유지해온 캐릭터들의 다양성을 계승하는 것과 같다. 이는 저스틴 린보다도 더욱
‘트레키’에 가까운 사이먼 페그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프랜차이즈의 리부트가 시작될 때부터 함께 한 스코티 역의 배우 사이먼 페그 말이다. “<스타트렉>을 내 일부라 여길 만큼 애정을갖고 있지만
솔직히 모든 대사를 읊을 순 없다. 에피소드의 모든 제목까지 아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이먼은 가능하다!”
저스틴 린이 할리우드의 흥행감독 대열에 들어선 건 <분노의 질주> 시리즈를 통해서였다. 빈 디젤과 폴 워커를 위시한 <분노의 질주> 프랜차이즈는 국적과 인종을 초월한 다양한
캐릭터들이 팀을 이룬 활약상을 펼치는데 이는 본래 다양성의 가치를 일상적으로 대면할 수 있는 <스타트렉>의 세계관과 닮아있다. 무엇보다도 이는 저스틴 린이 추구하던
본질적인 세계관이 <분노의 질주>에 반영된 결과에
가깝다. UCLA에서 영화를 전공하던 시절 <분노의
질주>(2001)를 본 저스틴 린은 동양계 미국인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깊은 흥미를 얻었다. 하지만 동시에 동양계 미국인이 악역만을 맡았다는 사실에 대단히 실망했다. 그리고
훗날 도쿄를 배경에 둔 세 번째 속편 <패스트 & 퓨리어스-도쿄 드리프트>(2006)의 연출 제안을 받은 뒤 그가 해낸
첫 업무는 불상이나 게이샤 소녀들로 점철된 시나리오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는 일이었다. 단순히
동양을 배경에 두거나 동양계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을 넘어 편견을 뛰어넘는 역할을 주고자 하는 것이 그의 본질적인 목표였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계 미국인인 성 강이 연기한 한은 주인공을 성장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의 궁극적인
페르소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뒤로 저스틴 린이 연이어 연출한 <분노의
질주: 더 오리지널>(2009)과 <분노의 질주: 언리미티드>(2011),
<분노의 질주: 더 맥시멈>(2013)에서도
거듭 한이 등장해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는 것 또한 그렇다.
<베터 럭 투마로우>(2002)는 저스틴 린의 단독연출
데뷔작으로 평범한 동양계 미국인 소년들의 일상과 일탈을 그린 작품이다. 당시 선댄스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이 작품은 큰 호평을 얻었는데 당대의 저명한 영화평론가였던 로저 에버트는 <베터 럭 투마로우>에 대해 “단순한 스릴러도, 단순한
사회적인 다큐멘터리도, 단순한 코미디나 로맨스물도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이고 훌륭하게 완성된 영화”라고 평하며 엄지를
세웠다. 저스틴 린 자신이 성장한 LA교외의 오렌지 카운티의
한 마을을 배경에 둔 이 작품은 부족할 것이 없는 동양계 중산층 가정에서 우등생으로 자란 세 명의 고등학생 소년이 사소한 일탈에 빠져드는 과정을
코믹하게 그려나가면서도 끝내 예측 밖의 끔찍함을 여운처럼 남긴다. 이 모든 과정을 동양계 미국인이 겪는
특별한 상황이라기 보단 보편적인 이들도 저지를 수 있는 특수한 행위로 인식하게 만듦으로써 인종과 문화에 대한 차별 의식을 훌쩍 뛰어넘은 성취에
가깝다. <스타트렉>과 <분노의 질주>라는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의 캐릭터를 통해서도
이런 의식은 공평하게 배분된다.
아마 저스틴 린의 차기작이 <스타트렉>이나 <분노의 질주>가 될 것 같진 않다. 대신 제레미 레너를 앞세운 <본>시리즈의 스핀오프 <본 레거시>(2012)의 속편을 연출할 감독직을 받아들인 상황이다. 전작이
미진한 반응을 불렀던 것과 달리 그가 만들 속편이 얼마나 대단한 반향을 일으킬 수 있을진 미지수다. 하지만
<스타트렉>과
<분노의 질주>를 통해 확인한 그의 재능은 분명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혹시 아는가? <본> 시리즈 최초로 인상적인 동양계 캐릭터가 탄생할 수 있을지, 기대해봐도
좋지 않겠는가.
S.E.S의
바다에서, 가수 바다로 그리고 뮤지컬 배우 바다로, 바다는
언제나 바다였다. 항상 바다라는 이름으로 노래했다. 노래로서
존재했다. 바다를 노래하며 진정한 디바가 됐다. 바다라는
이름으로 완전해졌다.
우연이었다. TV 채널을 돌리다 바다를 보게 된 것은. 한 케이블 채널에서 재방송 중이던 <마이 리틀 텔레비전>(<마리텔>)에서 바다가 나오고 있었다. <캐스트 어웨이> 같은 영화가 연상되는, 모래가 깔린 조악한 세트에서 '생존'이라는 주제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분홍색 파자마를 입고
정신 없음 그 자체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즐기는 바다의 모습을 보며 낄낄거리다가 문득 낯설다는 인상을 느꼈다. 바다라는
이름은 익숙한데 바다라는 사람이 생소했다. 지금 이 TV를
통해 바라보는 저 모습이 진짜 바다일까. 궁금했다. 노래하지
않는 바다는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인터뷰 장소로 약속한 한 카페에서 바다를 기다리는 동안 어떤 질문을
먼저 할지 고민했다. 방금 막 <컬투쇼>에 출연하고 오는 길이라는 바다에게 우연히 <마리텔> 재방송을 봤다고 하자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걸
보셨어요?"라고 되묻고 나서도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 그런 경지까지 온 거죠. 어쩌면 그 지경이라 하는 게 맞을 거 같지만(웃음). 사실 모든 상황에 맞춰서 알아서 대처해야 했기 때문에 정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최선을 다한 거 같아요." 그런데 바다는 왜 <마리텔>에서 생존이란 주제를 선택했을까. "음, 원래 인생이란 게 기본적으로 생존이잖아요." 하이톤의 음성과는
역설적인 진지함이었다. "사실 <마리텔>은 가벼워 보이는 프로그램이잖아요. 그런데 <마리텔>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고, 모두가 그걸 관찰하죠. 그게 마치 이 사회와 인류의 작은 형태나
다르지 않잖아요. 결국 모든 방이 각자의 문화적 형태를 띄는 거죠. 결국
저는 나름대로 무거운 메시지를 담은 문화를 선택한 거고요. 다만 사람들이 가볍게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제가 의외로 철학에 관심이 많기도 하고요."
어쩌면 생존이란 가장 중요한 화두였을지도 모른다. 바다라는 이름을
걸고 지나온 세월 안에서. 대중음악 역사 안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걸그룹 'S.E.S'의 리더로 활동하다 팀의 해체와 함께 솔로로 독립한 뒤 보컬리스트로서 실력을 인정받고 뮤지컬 무대까지
진출해 최고의 배우라는 찬사까지 끌어낸 그녀가 보낸 19년이란 무성하게 가지를 뻗은 영광의 세월이기
전에 깊게 뿌리 내린 생존의 역사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역사는 단지 그녀만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존경하는 패티김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20년만
버티면 자연스럽게 레전드가 된다고. 20년 동안 가수로서 존재할 수만 있다면. 어느새 20년을 앞두고 있다니 실감이 안나요. 그런데 선생님 말씀은 조금씩 이해가 돼요. 요즘 후배들로부터 존경한다는
말을 종종 들어요. 저처럼 20년이 돼도 노래하고 싶다는
거예요. 아이돌 그룹의 리드 보컬들은 대부분 그런 생각을 하겠죠. 저도
그랬으니까. 그러니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인생의 목표라 말할 순 없겠지만 계속 노래할 수 있다는 건 제게도 중요한 의미가 될 테니까요."
지난 6월에 공개된 미니앨범
<Flower>는 데뷔 20주년을 앞둔 바다가 오랫동안 자신의 노래를 들어준
팬들을 위해 준비한 첫 번째 선물이다. 타이틀곡 'Flower'를
포함한 네 곡의 넘버를 담고 있는 이 앨범을 포함해 세 차례에 걸친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무엇보다도
2009년에 발표한 네 번째 정규앨범 이후로 무려 7년 만에
앨범을 발표한 만큼 남다른 감회가 느껴졌다. "앨범을 발표하고 싶다는 갈증은 몇 년 전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그럴 갈증을 느낄 겨를이 없었어요. 당시엔 뮤지컬 무대에 최선을 다하느라 너무 바빴으니까. 목이 타긴 하는데 너무 바빠서 물 먹는 걸 까먹을 정도의 상황이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더 이상은 안되겠다고 생각한 순간 정확히 멈춘 거 같아요. 그만큼 <Flower>는 제게도 반가운 앨범이었죠."
사실 바다는 본래 노래보단 연기에 관심이 많았다. 안양예고에서도 연극영화과를
지원했고, 배우가 되길 꿈꿨다. "가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연기에 관심이 많았죠. 그런데 그 당시
저희 집은 가난했고, 당장 가수가 될 기회가 생겼고, 돈을
벌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니 선택하게 된 거죠. 만약 당장 배우가 돼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면
가수보단 배우를 선택했을 지도 몰라요." 그렇다. 바다보단
최성희라는 본명이 더욱 익숙하던 시절, 명창 조통달의 수제자 중 한 명이었던 소리꾼 출신 아버지는 그녀에게
다양한 취향과 재능을 물려줬지만 그녀를 가난으로부터 보호해주진 못했다. 물론 바다는 그 시절의 가난을
비극적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저 그러한 삶을 통해 나아갈 방향이 있었다는 걸 기억할 뿐이다. "운명을 믿어요. 제가 여기까지 온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어디로 닿는다 해도. 다만 어떤 순간에도
제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싶진 않아요."
물론 운명을 믿는다는 것이 주어진 인생에 순응하겠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실제로
그녀가 바다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오늘은 순종적인 딸의 입장에서 벗어나 자신 스스로가 바라는 인생을 선택하겠다는 최초의 의지를 통해 일군 결과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아버지께서는 제가 수녀가 되길 바라셨어요.
저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중학교 시절부터 수녀가 될 준비를 했고, 수녀가 될 거라 생각했었죠. 하지만 안양예고에 진학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기로 마음 먹었어요. 아버지께서 반대하셨지만 결국 제 의지가 더 강했죠. 만약 그때 제대로
마음 먹지 않았다면 정말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거예요." 그렇다. 덕분에 그녀는 바다라는 이름을, 인생을 얻었다. 만약 그녀가 안양예고에 진학하지 않았다면 축제 무대에서 노래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녀를 발견한 이수만 대표가 가수 제안을 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가
기억하는 S.E.S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바다라는 디바의
노래를 듣게 될 기회도 없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흥미로운 일이다. 그녀의
선택은 단지 그녀의 인생만을 바꾼 것이 아니다. 그녀의 선택을 통해 세상의 기억도 달라진 셈이다. 마치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신비로운 일 아닌가.
사실 바다는 몇 해전 삶에 대해 새롭게 인식할 기회를 얻었다. 헤르만
헤세의 저서 <정원 일의 즐거움> 덕분이었다. 그녀는 이 책을 통해 삶의 균형을 찾았다. "정원일처럼
고된 노동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죠.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도 아닐 테고요. 자연에 맡겨야 하는 거잖아요. 자연과 햇빛을 통해 만들어진 것들
그러니까 어쩌면 신이 기획하고 연출한 신에서 인간은 그냥 스태프로 일하는 거잖아요. 정원일이라는 게." 사실 그 책을 통해 얻은 삶의 균형이란 어머니의 죽음과 맞닥뜨린 뒤 느꼈던 흔들림을 가라앉히는 기술이기도
했다. "그런 일이 닥치니까 막상 당장은 담담했던 거 같은데 다가올 두려움을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커졌어요. 그래서 인생의 순리를 대면하는 듯한 제목이 마음에 와 닿았나 봐요. 사람이 병에 걸리고 죽는 것도 자연의 이치잖아요. 그러니 자식이
부모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자연의 이치인 거 같아요.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의
아픔을 지켜보는 과정도 자연을 대면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아침마다 도드라진 나뭇가지를 자르고, 매일 같이 지켜보면서 정원을 아름답게 가꿔가는 것처럼 삶을 살아가는 것이 비슷해 보였어요. 결국 순리대로 가는 것이니까. 그래서 부정적인 상황에 직면한다 해도
가던 길을 멈춰선 안 된다는 걸 알았어요."
자연의 이치처럼 인생을 받아들인다는 건 삶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최선을 다한 결과에 순응하며 매일 같이 최선을 다해 일상을 채우겠다는 의지가 담긴, 나직한 다짐에 가깝다. 동시에 긍정적인 관점은 그런 깨달음을 일상의
실천으로 밀어 보내는 돛과 같은 역할을 해내는 것 같다. "스스로를 완벽하게 알 수 없으니
인생을 통제하긴 어렵지만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오히려 신날 수도 있잖아요. 마치 빨간머리
앤의 대사처럼. 나를 모른다는 게 괴로운 일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능력이 내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저는 일이 끝나면 '고생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지 않아요. 그 말대로라면 제가 힘든 시간을 보낸 거잖아요. 하지만 저는 항상 즐겁게 일하거든요. 지금도 즐겁게 인터뷰하고 있고요. 그래서 고생했다는 말은 절대 안 쓰려해요." 바다가 생각하는
긍정주의란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기 위한 장벽이 아니다. 오히려 보다 적극적으로 즐기며 살아가기 위해
그녀가 발굴한 동력이자 재능에 가깝다. "긍정성을 타고난 사람도 있겠지만 더욱 노력해서 긍정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살아가면서 부정적인 성향으로 바뀌는 거라 생각해요. 모두가 똑같이 다섯 개의 구슬을 갖고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구슬을 더 얻는 사람이 있고, 잃게 되는 사람이 있는 거죠."
그녀가 지닌 구슬의 양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바다의 긍정주의는 무대 위에서 보다 빛을 발한다. "무대에
서는 건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요. 그러니 열정적으로 해내겠다는 마음을 먹어야만 하죠. 최대한 긍정적으로." 물론 무대 위에서의 긍정주의는 후천적인
경험의 결과다. "아무래도 많이 실패해봤다고 생각하는데 그 덕분에 맷집이 좋아진 거 같아요. 옛날엔 제게 벌어지는 일들을 하나같이 무겁게 받아들였는데 요즘은 가볍게 느낄 수 있는 거 같아요. 노래도 훨씬 편안하게 부르게 됐고요. 사실 디바라는 단어 자체가
무겁잖아요. 그래서 무거운 숙명처럼 느낄 때가 있었는데 이젠 오히려 깃털처럼 가볍게 즐겨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특별한 노래를 부르는 것보다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편안하게 노래하는 이가 진정한 디바라는
걸 요즘 많이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요즘에는 가사가 좋은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그렇게 바다는 세상보다도 자신을 위해 먼저 노래하는 법을 알았다.
바다로서 노래하는 방식을 터득했다.
물론 자신의 무대에 대한 치열함은 별개의 이야기다. 올해 1월 31일까지 무대에 섰던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 역을 맡았던 바다는 이 작품이 생존에
관한 이야기였다고 말했다. "스칼렛 오하라는 모든 것을 가진 부잣집 딸이자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잖아요. 그런데 전쟁통에서 폭풍 같은 세파를 겪으면서 오로지 생존을 위해 삶을 헤쳐나가죠. 그리고 제가 스칼렛 오하라를 연기하게 된 건 아무래도 제게도 그런 기질이 있기 때문일 거 같아요.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편이고, 생존에 대한 의지도 강한 편이라 생각하는데
자연스럽게 그런 특징을 끌어다 연기한 거 같아요." 물론 무대와 현실 사이에서 자신의 균형을
찾는 것도 그녀에겐 자연스러운 일이다. "무대에 서는 저와 일상에서의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에요. 인생을 연기하듯이 살 순 없잖아요. 물론 그렇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분들도 종종 있긴 한데 저는 확실히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 같아요. 다만 다행히도 저는 상상력이 많은
편인가 봐요. 캐릭터 분석을 할 땐 정말 많은 상상을 하는데 최대한 디테일한 상상까지 더해서 인물을
구상해요. 예를 들어 눈썹을 치켜 뜨는 버릇이 있는 캐릭터라면 항상 거울로 자신의 버릇을 봐왔을 테니
눈썹을 최대한 아래로 내려 그렸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 상상대로 직접 그려야 하는 거죠."
사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이후로 뮤지컬 배우 바다의 모습을 볼 기회는 없었다. 대신 가수로서 무대에 오르는 바다를
볼 기회가 늘었다. 바다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린 사진을 보여주며 여전히 설렌다는 듯 말했다. "작년에 처음으로 단독 콘서트를 했어요. 사실 여자 솔로
가수가 혼자서 콘서트를 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관객들이 안 오면 어떡하지 걱정이 많았는데 8천명이나 되는 관객들이 와주셔서 정말 놀랐어요. 정말 너무 감격스러웠죠. 그래서 온 몸을 던져서 공연한 거 같아요. 나중에 공연이 끝나고
보니 무릎에 피멍이 들어있더라고요. 그런데 공연할 때는 아픈 줄도 몰랐어요." 올해 그녀는 콘서트에 보다 매진할 계획이라고 한다. 지난 7월에는 가수 휘성과 함께 조인트 콘서트를 열기도 했고, 앞으로 동료
가수와 함께 설 수 있는 무대를 늘려나갈 예정이란다. "요즘은 제 화두는 콘서트에요. 사실 제가 다양한 것에 집중하지 못하지만 한 가지에 집중하면 끝까지 파는 편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앞에 있던 물잔을 들더니 건배를 하자고 제안했다. "장난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이런 식으로 행운을 비는 거죠. 이렇게
건배를 함으로써 잔 안에 있는 물의 느낌도 달라진다고 생각하거든요. 물 한잔을 마셔도 긍정적인 기분을
느끼려는 거고, 그런 것들이 중요하다고 보는 거예요. 결국
운명을 제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가 중요한 거죠."
벌써 올 한 해도 지나간 시간이 지나갈 시간보다 무겁게 다가온다. 이제
세 달 남짓하게 남은 한해 동안 바다가 무엇을 채울 계획인지 궁금해졌다. "올해에는 가수로서
공연을 많이 하고 싶었는데 연말에는 정말 많은 공연을 하게 될 거 같아요. 그리고 슈퍼주니어의 려욱
씨와 함께 싱글을 발표할 예정이에요. 사실 저도 몰랐는데 려욱 씨가 연습생이던 시절에 연습실 거울을
닦고 있었는데 그 옆을 지나가던 제가 갑자기 거울을 같이 닦아줬대요. 저는 기억이 안 나는데 려욱 씨가
말해줘서 알았어요. 그래서 너무 고마웠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묘한 인연이죠." 어쩌면 그녀는 내일 당장 일어날 일을 알 수 없어서 신나는 인생이라기
보단 뿌린 대로 거둬들이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바다의 시간은 흘러왔다. 그리고 흘러갈 것이다. "활동을 해오면서 하나씩 배우는
거 같아요. 제 노래를 다시 듣다 보면 새삼 깨닫는 것도 있고. 그렇게
제 자신을 다듬어나가면서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도 노래할 수 있는 디바로서 존재하고 있다면 좋겠어요. 그래서
언젠가 다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바다는 그렇게 자신을 위해 노래하는, 바다 자신을 노래하는 디바로서의 미래를 꿈꾸는 법을 깨달았다. 그
누구의 디바도 아닌 바다로서.
이재용 감독의 신작 <죽여주는 여자>는 중의적인 제목이다. 그러니까 <죽여주는 여자>는 감탄사로 쓰이는 '죽여준다'와 동사로 쓰이는 '죽여준다'는 의미로 수식되는 여자의 삶을 그린 영화다. 먹고살기 위해 노인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는 늙은 여성은 과거 자신과 거래한 전적이 있는 남성들이 갈망하는 죽음을 돕는다. 죽여준다던 그 여자가 정말 죽여주는 여자가 된 건 결국 남루한 노인들의 삶이 방치되고 외면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이 존재하는 덕분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여러 모로 귀찮고 성가신 일이 되는 사회에서 노인들은 버겁게 현실을 버티거나 버거운 내일을 지운다.
물론 <죽여주는 여자>를 목격한 10만 명 이상의 관객이 목도한 건 우울하고 괴로운 노년의 초상만은 아닐 것이다. 유쾌한 활기와 따뜻한 정감이 공존하는 영화 속 풍경에는 한국 사회의 여느 구석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소수자들의 표정들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 다양한 생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되짚게 된다. 그리고 다양한 삶의 군상들도 하나 같이 늙어가고,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삶은 결국 죽음으로 수렴되는 여정이다. 다만 죽음이 다다를 때까지 살아간다는 것과 죽음을 향해 찾아간다는 것 사이에는 우주만 한 괴리가 있다. 결국 <죽여주는 여자>는 죽음을 통해 삶을 관통하는, 역설적인 영화일지도 모른다.
전작인 <두근두근 내 인생>은 선천성 조로증에 걸린 아이에 관한 영화였는데, 신작인 <죽여주는 여자>는 노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늙다'와 '죽다'라는 동사가 두 작품의 공통분모라 할 수 있겠다. 원래 <두근두근 내 인생>의 연출을 마음먹기 전에 나이 들어가는 여배우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대중에게 늙어가는 삶을 노출하며 산다는 건 배우의 숙명이지만 여배우가 늙어간다는 건 남자 배우가 늙어가는 것과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 작품을 영화화하기 위해 투자자를 구하던 중에 <두근두근 내 인생>의 연출 의뢰를 받았고, 대중적인 영화를 연출한 경력이 차기작을 제작하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수락했다. 게다가 나이 들어간다는 것과 죽음이라는, 내 관심사와 연결되는 작품이기도 했고.
그런데 <두근두근 내 인생> 이후로 여배우에 관한 영화 대신 <죽여주는 여자>를 만들었다. 여배우에 관한 영화로 돌아가려던 차에 박카스 할머니를 다룬, 노인 성매매에 관한 기사를 접했는데 거기에 좀 경도됐다. 사실에 기반한 현실을 다룰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에 보다 빨리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늙어가는 여배우에 관한 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여배우였을까, 늙어간다는 것이었을까? 그 질문에 답을 하려면 더 앞선 시점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웃음) 2007년에 <귀향>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를 썼는데 실향민 노인이 금강산 관광을 갔다가 자신의 고향인 원산까지 걸어간다는 내용이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15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생명을 부지한 아내 때문에 딸이 시집을 못 가는 것 같다고 생각한 할아버지가 아내의 생명을 끊고 딸을 시집보낸 뒤 자신도 신변 정리를 하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는 이야기였다. <꽃보다 할배>처럼 남자 노인들이 어울려 다니며 낄낄거리는 모습도 묘사되는데 실제로 이순재 선생님을 캐스팅했다. 늙어가는 부모님을 보고, 나 역시 나이 들어간다는 것을 느끼면서 그런 주제를 자꾸 건드리는 것 같다.
<귀향>은 영화로 제작하지 못한 건가? 제작 단계 직전에 금강산 관광이 백지화되면서 촬영이 무산됐다. 그런데 지금도 영화가 엎어졌다고 말하진 않는다.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면 할 수도 있을 테니까.
<죽여주는 여자>의 시나리오를 착안한 건 언제였을까? <두근두근 내 인생>을 끝낸 뒤 2014년 여름쯤 착안했고, 가을쯤 시놉시스를 구상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는데 반향이 있었다. 그래서 그 해 겨울, 윤여정 씨에게 원래 제안했던 나이 든 여배우 이야기보단 박카스 할머니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다. 윤여정 씨는 생각을 좀 해보더니 자신이 여배우라서인지 사람들이 여배우 얘기를 얼마나 현실감 있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박카스 할머니 이야기는 사회성도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여배우 이야기가 더 대중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오히려 <죽여주는 여자>는 소재만으로도 대중영화라 받아들여지기 힘든 지점들이 있으니까.
아무래도 '무겁다'라는 선입견이 생기는 소재이긴 하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죽여주는 여자>를 만들고 싶었다. '더 늦기 전'이란 의미는 시사성 있는 소재를 다룬 만큼 빨리 공론화해야 할 것 같았다는 말이다. 게다가 먼저 구상했던 여배우 이야기는 다른 이가 생각할 만한 시나리오는 아닐 테니까. 어쨌든 실제로 시나리오를 써내려 간 건 2개월 남짓한 시간이었다. 막연하게 이런저런 구상을 하다 작년 3월쯤에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서 후다닥 썼다.
<죽여주는 여자>는 노인과 죽음 외에도 다양한 시사적 화두를 건드리는 영화다. 지난 필모그래피를 돌아봤을 때 현실과 밀착한 시사성을 다룬 작품은 <죽여주는 여자>가 처음인 것 같다. <귀향>이 영화화됐다면 처음은 아니었을 텐데. 남북문제와 실향민 문제 그리고 노인 문제까지 다룬, 시사성 있는 작품이었으니까. 사실 이런 류의 영화를 만들 땐 용기가 필요하다. 투자 여건이나 제작 환경을 고려하면 고심할 수밖에 없다. 종종 농담처럼 누가 돈만 대주면 평생 이런 영화만 찍으면서 살 수도 있다고 하는데 어쨌든 나는 2년에 영화 한 편씩 만드는 일개 감독일 뿐이고, 세월은 제한적이다 보니 쉽진 않은 거 같다.
한국 남자와 필리핀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자녀를 의미하는 코피노와 트랜스젠더, 장애인 그리고 노인 등 우리 사회에서 소외받는 대상들이 이태원의 한 집에 모여 살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존재감이 피력된다. 어떤 면에선 종합 선물세트처럼 나열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늘 영화를 구상하면서 스크랩해오던 소재들이었고 이번 기회에 자연스럽게 녹여보고 싶었다. 이태원은 <귀향>의 주인공 할아버지가 이태원 복덕방을 운영한다는 설정을 두면서 이미 관심을 갖고 있던 동네였다.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서울 안에 자리한 작은 국제도시 같기도 하고 골목마다 정겨운 구석이 있어서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영화라는 게 역사적 기록물이 될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미군 부대 주변에서 생업을 이어나간 경력이 있는 소영(윤여정)의 입장에선 이태원에 머문다는 것이 자연스럽기도 하다.
저마다 만만찮은 사연이 있을 법한 인물들이지만 소영을 제외한 인물들의 과거에 대해선 어떠한 언급도 되지 않는다. 처음 시나리오상에선 도훈(윤계상)의 개인사를 털어놓는 장면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날라리처럼 지냈는데 친구를 태우고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건데 결국 친구는 즉사했고 자신은 다리를 잃어서 죽을 생각까지 했다가 어느 날 문득 그냥 '살아가야지'라는 마음이 생기면서 역경을 극복했다는 사연이다. 결국 시나리오를 각색하며 정리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의 삶이 영화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영화 속의 모든 인물들도 주인공일 순 없다. 티나(안아주)도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로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연과 시련을 겪었겠나. 하지만 어차피 우리가 모든 사람의 사연을 알고 살아가는 건 아니니까 그런 얘기를 다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흔히 비참한 인생일 것이라 여겨지는 소외 계층의 일상을 다루고 있지만 아기자기하고 귀엽게 묘사되는 덕분에 영화가 선택한 소재의 무게감이 버겁게 다가오진 않는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걸 달가워하는 타입이 아닌 것 같다. 내 관심사를 공유하고 싶을 뿐이지, 사람들을 계도하고 싶진 않다. 어떤 주의나 의식을 웅변하고 자각하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없다. 물론 그들의 삶에 비참한 단면이 있을 거다. 하지만 매일을 지옥처럼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그럴수록 어떻게든 살아갈 구실을 만들어내고, 작은 온기에서도 삶의 동력을 얻을 거라 생각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처럼 박카스 할머니를 직접 찾아가 인터뷰하고 취재하는 과정이 있었을 것 같다. 상당히 디테일한 설정들도 묘사되니까. 박카스 할머니를 직접 대면하고 조사하진 않았다. 이미 내 머리 속에 그런 세계가 어느 정도 구축돼 있었고, 윤여정이란 배우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인물이 있었으니까. TV 다큐멘터리나 시사 프로그램을 참고하기도 했다. '연애하고 갈래요?'라는 대사도 거기서 알게 됐고. 그런데 이미 캐릭터들은 어느 정도 구체화된 상황이라 특별한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다.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바빠져서 그럴 여유도 없었고.
실제로 만나서 확인해봐야 할 것 같단 생각이 들지 않던가? 종로를 오가면서 간접적으로 관찰하긴 했다. 처음에는 구분을 못하겠더라. 그냥 마실 나와서 할아버지들과 노닥거리는 할머니 같기도 하고, 매춘하는 할머니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몇 번 보니까 알겠더라. 어딘가 지친 기색이 있고 얼굴에서 빛이 사라진 느낌이랄까. 그러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도 되는 것인지, 혹시 내게 오해는 없는 건지 검증받고 조언을 들어보고자 박카스 할머니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교수님을 만나서 시나리오를 보여줬는데 직접 취재하고 만들어낸 캐릭터가 아니라고 하니 놀라더라. 그래서 안심했다. 실제로도 마음을 열고 이야기해보면 다들 명랑하다고 하더라. '집에 남편 재워두고 나왔잖아'란 식으로 자기 얘기도 서슴없이 하고.(웃음) 사실 자기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이야기하는 것만큼 비참한 일도 없지 않나. 그럼 사는 게 진짜 지옥이 되는 거니까. 다만 어떻게든 살아갈 구실이 필요한 거다. 그리고 구실을 찾아서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극한으로 밀어 넣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상에서 소영이 한 여자를 찾아가 돈을 주는 장면이 두 번 등장하는데 그 전후 과정에 대한 특별한 설명이 없어서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서 오해를 조금 산 것 같다. 원래 소영이 목돈을 빌렸다가 나눠서 갚는 장면이었는데 포주에게 돈을 바치는 것 같다는 추측까지 나오는 걸 보니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다. 소위 말하면 일수 개념으로 빌린 돈을 보름에 한 번씩 갚는 장면인데 영화 상에서 그녀의 모습이 너무 여유롭게만 보일 것 같아서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데 의미가 있는 장면이었다. 실제로는 갚아야 할 돈도 있고, 집세도 내야 하고, 그런 삶을 견디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소영은 유일하게 영화상에서 과거사가 밝혀진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인 소영이 동두천에서 미군을 상대할 때 'So young'이라는 영어를 음역한 것이란 사실은 우연히 만난 옛 동료와의 대화에서 드러나는데 그녀의 과거사가 넋두리처럼 들리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물론 다큐멘터리 촬영용 인터뷰를 빌미로 줄줄이 설명하는 장면도 있지만 구구절절 말할 수 없으니 극 사이사이에 잘 배치하는 게 관건이었다. 아마 결말부를 유심히 본 관객이라면 무연고자 납골당 신에서 소영의 본명인 양미숙의 생년월일이 1950년 6월 19일로 적혀 있다는 걸 확인했을 거다. 만약 그렇다면 그녀가 6.25 발발 일주일 전에 태어났다는 걸 알았을 거다. 실제로 중반부에 '3.8 따라지'라 말하기도 하고. 어쨌든 고아원을 거쳐 식모살이, 공순이, 동두천 양공주까지, 결국 한국 현대사에서 겪을 수 있는 비극을 죄다 경험한 한 여자의 일생으로 점철된다. 사회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한국 현대사에서 여성의 위치를 대변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론 전쟁이 한 여자의 인생을 이렇게 짓밟아놓을 수도 있다는 걸 기저에 깔아놓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쟁이란 남자들이 벌일 수 있는 최상위의 폭력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여자들은 희생자가 된다. 사실 우리가 양공주라 부르는 여성들은 엄밀히 말하면 미군 위안부다. 국가적으로 성매매를 금지해놓고 기지촌에서만 허용한다는 건 사실상 국가가 미군에게 성매매 서비스를 제공한 셈이니까. 결과적으론 그녀들을 외화 벌이의 수단으로 여겼고. 그런데 사회적으로는 미군한테 다리 벌린 여자 취급을 당하며 손가락질만 당했다. 결국 그녀들에겐 자기 목소리를 낼 기회조차 없었던 거다.
몰염치하거나 무책임한 한국 남자들의 군상을 인지하게 되는 부분도 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코피노 문제도 그렇고. 영화에서 코피노 소년 민호의 아빠로 추정되는 의사도 결국 애만 싸질러 놓고 도망친 셈인데 그걸 보고 간호사가 한마디 하지 않나. "한국 남자들은 다 개새끼야." 물론 페미니스트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여성을 다루다 보면 결국 약자로서의 여성성을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다. 현실이 이 모양이니까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남자의 시각으로 씌워놓은 관념들이 워낙 많다. 이를 테면 모성 같은 것? 그래서 자기 죽음 하나 어찌하지 못하는 남자들을 대신해 그들을 죽여주는 소영이 여성성의 화신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여성들이 감내해온 역사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걸 목격하게 만들어주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상대적으로 그녀가 꿋꿋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대단해 보이지 않나. 게다가 그녀가 성을 파는 건 살아남기 위해 폐지나 빈 병을 줍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선택한 방식일 뿐이다.
사실 죽음을 사주하는 남자 중 재우(전무송)도 비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고 여자의 여생을 망쳐버린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마치 자신의 평온한 죽음을 위해 여자의 삶을 산 제물처럼 바쳐버린 느낌이랄까. 맞다.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이다. 솔직히 영화적 설정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가 주길 바라는 요량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소영은 첫 번째 노인의 부탁을 들어준 뒤 재우에게 그런 사실을 감추지 않고 고백한다. 그분이 너무 원해서, 차라리 그렇게 사는 것보다 나을 거 같아서 했다고. 그만큼 소영에겐 공감능력이 있는 거다. 그리고 사람을 죽였으니 자신은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녀의 측은지심이 재우의 결심을 도운 것이라고 해석했다.
<죽여주는 여자>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건 약자가 약자를 돕고, 노인이 노인을 죽인다는 사실이다. 결국 상처를 입어야만 상처를 이해할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한 느낌이랄까. <죽여주는 여자>를 만들 때 부담이 컸던 건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이 영화가 인용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반대로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쳐서 이를 실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 일종의 사회적 발언에 대한 책임감이 있었다. 결국 그런 걱정을 다잡게 만든 건 이런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돼선 안 된다는 마음이었다. 이렇게 그들을 방치해선 안 되는 거니까. 그래서 이 영화를 통해 사회안전망에 관한 문제들이 공론화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존감을 지키면서 잘 죽는다는 건 무엇일지, 이런 성찰도 공유하고 싶었고.
삶보다 죽음을 갈망하는 남자들의 입장에 타당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고민이 있었을 거 같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죽음을 그리는 게 힘들었다. 어떻게 하면 개연성이 생길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다 내가 어떤 상황일 때 죽고 싶을지 고민해봤다. 첫 번째 남자 같은 경우엔 사는 게 창피하다고 하지 않나. 평소 댄디하게 차려 입고 부족함 없이 돈을 써가며 멋지게 살아왔던 사람이 한순간에 제 몸도 못 가누고 침대에 누워 여생을 보내야 된다면 정말 죽고 싶겠더라. 그리고 치매에 걸린 채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떠돌면서 남에게 폐를 끼칠 거라 생각하니 끔찍했다. 마지막으로 의지할 가족들이 모두 떠나갔을 때 무슨 낙으로 살아갈 것인지 막막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노인 자살을 부추기는 전형적인 유형 세 가지라는 걸 알게 됐다. 정확하게는 거기에 빈곤이 겹쳤을 때라더라.
소영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세 노인 중 두 명은 실내에서 죽지만 한 명은 산에 올라가 벼랑으로 떠밀려서 죽음을 맞이한다. 목격자가 발생할 수 있는 산에 올라가서 자살을 위장한다는 건 합리적인 선택과는 거리가 먼 발상처럼 보이는데, 굳이 산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소영이 도훈한테 어떻게 죽으면 고통이 덜할지 물어보는 장면이 있었다. 그리고 떨어져 죽으면 가장 짧게 고통을 느낄 거 같다는 결론에 다다르는데 그 장면을 다 걷어냈다. 어떤 의미에선 산에서 죽는 게 낭만적이라고도 생각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집에서 생을 마감하면 비참할 거 같고. 덕분에 내 영화 특유의 이상한 농담도 넣게 됐는데 이를테면 산으로 올라가면서 "야, 힘들어 죽겠다. 잠깐만 쉬자"라고 하는 대사 같은 것. 죽으려고 올라가는데 힘들어 죽겠다니, 웃기지 않나. 결국 그런 게 사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고.
어쩌면 공간성을 다양하게 고려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그런 바도 있다. 방, 산, 호텔, 이렇게 다양한 장소들을 확보하면 단조로움을 피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주로 도심을 배경으로 둔 영화라 한 번쯤은 확 트인 곳에서 한 템포를 쉬어가는 것도 좋을 거 같았다.
영화적 배경이 가을에서 겨울로 바뀌는데 촬영시기와 영화 속 풍경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인상이었다. 어쩌다 보니 우연과 필연이 잘 겹쳐졌다. 원래 가을에 찍어야 할 영화라고 생각하긴 했다. 늦여름에서 시작해 가을로 물들어가는 남산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그 시기에 맞게 투자가 완료됐고, 그때 빨리 촬영을 끝내야만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출품할 수 있는 스케줄이었기 때문에 부랴부랴 촬영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잘 맞아떨어졌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종로는 실제 박카스 할머니들의 터인데 장충단이나 남산 산책로는 의외의 선택지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곳에서도 그런 성매매가 이뤄지는 걸까? 그렇진 않다. 다만 가끔 남산을 산책하다 보면 거기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한국의 발전을 대변하는 신기루처럼 보였다. 그래서 꼭 그 장소를 넣고 싶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근의 장충단 공원으로 무대를 옮긴 거다. 남산의 한적함과 여유로움 속에서 소영이 홀로 쓸쓸히 배회하는 모습도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 풍경 안에서는 유령 같은 존재처럼 보이니까.
영화상에서 경쾌하면서도 쓸쓸한 선율의 연주음악이 몇 차례 들려지는데 장영규 음악감독에게 물어보니 공간성과 오래된 정서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하더라. 장영규 감독과는 개인적으로 오랜 친분이 있다. <정사>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음악을 함께 작업하기도 했고, 일단 그냥 맡겨도 될 만큼 신뢰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앞선 두 작품과 달리 <죽여주는 여자>에선 명확히 떠오르는 음악이 없었다. 그래서 편집본을 보여주면서 떠오르는 걸 얘기해달라고 하니까 오래된 이탈리아 영화 같은 느낌이 떠올랐다고, 그런데 약간 뽕끼가 있어야겠다고 하더라. 그리고 그가 보낸 샘플 중에서 두 가지 음악을 골랐다.
촬영 면에서 핸드헬드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단 한번도 흔들지 않더라. 흔들 수 없는 영화였다. 3D 영화 제작 지원금으로 만든 영화였으니까.
3D 영화 제작 지원금을 받아서 제작했다면 두 대의 카메라를 리그(Rig)로 연결한 3D촬영 방식으로 영화를 찍었단 말인가? 맞다. '카파(KAFA)'에서 마련한 3D 영화발전기금을 지원 받은 세 번째 영화다. 김태용 감독과 류승완 감독이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신촌좀비만화>가 첫 지원작이었고, <죽여주는 여자>는 <방 안의 코끼리>에 이은 세 번째 지원작이다.
아무래도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 같은데. 카메라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다 보니 카메라가 한번 이동하는 데에만 20분씩 소모됐다. 카메라가 일반적인 촬영 현장에서 사용하는 것보다 3배는 크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산에 끌고 올라가야 하는 건데 산에 올라갈 땐 정말 쉽지 않았다. 게다가 좁은 방 안에서 촬영할 땐 카메라가 너무 크다 보니 화각을 확보하기도 어려웠다. 평소 촬영 현장보다 스태프 수도 15% 가까이 늘었고, 촬영 시간도 더 많이 필요했고 3D 영상 컨버팅부터 색보정 작업, CG 작업 등의 후반작업도 더 복잡했다. 난제가 많았다.
트랜스젠더인 티나 역에 진짜 트랜스젠더를 섭외했다. 일단 아마추어 배우를 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자가 그 역할을 맡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디션을 보니 남자배우들은 다들 클리셰 같은 연기를 하더라. 마치 <개그콘서트>에 나오던 황마담처럼 호들갑스럽고 과장된 느낌으로. 그래서 결국 수소문 끝에 티나를 찾았다. 처음으로 연기한다지만 30년 가까이 무대 생활을 많이 한 덕분인지 끼가 상당했고, 그래서 선택했다.
윤여정 씨와는 <여배우들>, <뒷담화:감독이 미쳤어요>에 이어 세 번째 작업이지만 극영화로 만난 건 처음이다. 지난 두 작품에선 항상 윤여정으로 나왔지만 처음으로 극 안에서 역할을 준 작품인데 특별히 다를 건 없었다. 윤여정이라는 배우가 양미숙이란 이름으로 불리지만 윤여정으로 연기해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처음부터 윤여정 씨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했는데, 그만큼 윤여정이라는 배우의 존재감이 영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로 들린다. 사실 어떤 소재를 떠올리고 어느 배우랑 해야겠다고 생각한 뒤 시나리오를 쓴 건 처음이다. 그만큼 내겐 영감을 주는 부분이 많았다. 윤여정 씨가 평소에 냉소적인 농담을 잘하고 나 역시 그런 농담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농담들이 시나리오에 반영됐는데 그 의미를 물어볼 필요 없이 알아서 다 소화해냈다. 이를 테면 "계산 도와드릴게요"라는 종업원의 말에 "계산해줄 것도 아니면서 도와주긴 뭘 도와줘?"라고 혼잣말을 하는 장면처럼 내가 의도한 뉘앙스를 잘 파악하고 소화해버린다.
어떤 의미에선 윤여정이라는 배우를 통해 익히 예상할 수 있는 바가 있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사실 윤여정이라는 배우는 모든 역할을 윤여정스럽게 연기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하는 배우도 있지만 윤여정은 항상 윤여정으로서 소화하는 것 같다. 그런데 <죽여주는 여자>를 하면서 힘들어한다는 느낌도 받았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가고,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인물을 연기하면서 그런 처지에 놓인 이들의 세계를 알게 되고 그런 감정에 이입하게 되면서 우울해하고 힘들어했다. 그 당시 윤여정 씨 어머니께서도 좀 편찮으셨던 것도 본인에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고.
구강성교 신 같은 경우는 배우 입장에서는 고역스러운 촬영이었을 것 같다. 원래 그 장면에서 등장하는 벌거벗은 남자는 시나리오상에서 하의만 벗은 상태로 묘사했는데 막상 현장에서 보니 작위적인 느낌이었다. 그래서 현장에서 남자 배우에게 전신 탈의를 부탁했더니 흔쾌히 응해줬는데 윤여정 씨 입장에선 그런 남자가 눈 앞에 떡 하니 앉아있으니까 당혹스러워했다. 그래서 그 신을 촬영하면서 테이크를 다시 가겠다고 했을 때의 윤여정 씨는 지금까지 봤던 모습 중에 가장 화가 나 보이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그 장면에서의 표정을 보면 정말 질색하는 표정이 현실감 있게 와 닿는데 그게 단순히 연기적인 표현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주사를 놓을 때 주사기에 공기를 빼는 디테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 테이크를 다시 간 뒤, 주사를 놓은 뒤 서비스를 할 때 살짝 위를 올려다봤으면 좋겠다고 다시 한 테이크를 가겠다고 했다가 지금까지 들었던 윤여정 씨의 음성 가운데 가장 강렬한 소리를 들었다. "왜 이걸 다시 해야 하는데!"하면서 비명을 지르는데 정말 이를 가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잔뜩 독기가 올라 있는 상황이라 정말 실제처럼 느껴지는 연기가 나온 것 같다. 개인적으론 정말 미안했지만 결과적으로 감독으로선 '와, 이거 건졌다'라고 생각했다.(웃음)
그런데 소영이 남자에게 놓는 그 주사의 정체는 대체 뭔가? 주사기로 성기의 정맥에 주사를 놔서 발기하게 만드는, 일종의 발기제 같은 건데 할아버지들이 실제로 맞는 거라더라. 실제로 남자 배우의 성기에 붕대를 감아놓고 주사를 가져다 대는 부분에 십자가를 그려놓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자살을 꿈꾸는 사람은 다 남자다. 반대로 소영은 마지막까지 살아서 여생을 마치고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까지 보여주는데 상대적으로 죽음을 갈구하는 남성들에 비해 더 강인해 보이는 인상이다. 실제로 남편이 죽은 여자들보다 부인이 죽은 남자들의 삶이 더 빨리 무너지고 더 일찍 생을 마감한다더라. 아무래도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공감대가 크고 연대의식이 있어서 함께 모여 생활하는데 능하지만 남자들은 자기 부인이 아니면 잘 연대하지도 못하고 상대적으로 약한 존재가 된다. 생리학적으로도 여자들이 더 오래 산다. 평균 수명도 더 길고.
결말부에 등장하는 죽은 소영의 얼굴에선 종교적인 평온함과 성스러움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그렇게 얘기하는 분이 많더라. 굉장히 성스럽다고. 그녀가 일종의 천사 같고, 성녀 같고, 보살 같다고. 실제로 중국에서 관음보살은 자비의 신이기도 하지만 창녀들의 신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계사에서 소영이 합장할 때 의도한 게 아니지만 그 뒤로 관음상 벽화가 등장한다. 그리고 홍콩영화제에서 <죽여주는 여자>가 상영될 때 중국어로 변환된 제목이 우리말로 <선녀관음>이었다. 그들이 소영은 관음보살 같은 여자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결말부의 교도소 신 이전에 이태원에서 소영이 연행되는 과정으로 영화를 끝냈다 해도 무리가 없는 느낌인데 그랬다면 영화에 대한 감상도 완전히 달라졌을 것 같다. 시나리오 초고에선 교도소 신이 없었다. 이태원에서 연행되면서 영화가 끝나는 거였지. 그런데 너무 쿨해 보이더라. 남루하게 살던 사람의 인생을 너무 쿨하게 다루는 거 같았고, 내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사족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녀의 유골이 무연고 납골당에 안치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인들과 함께 살아왔지만 원래부터 무연고자였고, 마지막에도 결국 혼자 남게 됐으니까. 그렇게 홀로 밥을 깨작깨작 먹어가며 여생을 살아가다 자연사한 뒤, 세상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죽음만을 남긴 그녀가 태어나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그녀의 죽음을 통해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고 싶었다.
결국 죽음을 선택한다는 개인의 자유와 죽음을 방조한다는 사회적 윤리 사이에서 물음이 남는 셈인데, 어쩌면 답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듯한 물음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오래 사는 것이 중요했지만 이젠 남은 인생을 어떻게 잘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대가 됐다. 서구에서는 일찌감치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선택할지에 대한 논의도 시작됐다. 장례식 방식을 넘어서 안락사에 대한 논의까지. 결국 사회가 성숙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죽음도 논의할 수 있는 문제가 되는데 우리는 아직도 죽음에 대한 논의를 터부시 한다. 미리 수의 해놓는 것은 물론 영정사진 찍어놓는 것마저 불길한 짓으로 취급하고. 결국 의식 있는 사람들이 미리 자신의 죽음을 대비하면서 후손들의 고민을 덜어줄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 물론 어려운 문제다. 죽음 자체는 너무 두려운 일이니까. 사형수들도 사형장으로 가는 길에 신발을 슬쩍 벗는다고 하더라. 신발을 다시 신을 시간을 벌기 위해서, 몇 초라도 더 살아보려고, 그런 게 생인가 보더라.
고인이 된 백남기 씨가 물대포에 맞아서 의식을 잃었다는 뉴스 장면이 등장하고, 경찰 조사를 피해 조계사에 머물던 민주노총 위원장 한상균 씨에 관한 플래카드와 경찰들도 영화상에서 목격된다. 시대가 하 수상하다 보니 심상찮게 보이는 측면이 있다. 일단 조계사에서 촬영이 가능한 날짜는 단 하루였는데 그날 경찰들이 대치하는 상황이었고, 우리도 촬영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그대로 영화에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백남기 씨 뉴스도 영화의 배경이 되는 날짜가 2015년 11월경이었고, 그 당시 가장 이슈가 된 뉴스를 찾아보니 그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분위기를 가장 명확하게 대변할 수 있는 사건을 선택해서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라는 것이 기록이 될 수도 있고, 타임캡슐이 될 수도 있으니까. 다만 그런 상황에 대한 해석은 각자의 몫인데, 어쨌든 이게 2015년 11월 14일에 벌어진 일이었다는 현실감을 주고 싶었다.
<인페르노>는
기호학자 로버트 랭던(톰 행크스)을 앞세운, 댄 브라운의 소설을 영화화한 세 번째 탐정물이다. 그런데 <다빈치 코드>와
<천사와 악마>의 로버트 랭던이 기호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중세부터 이어져 오던
종교집단들의 은밀한 광기를 추적해 나간 것과 달리 <인페르노>의
로버트 랭던은 현대문명을 관통하는 인구과잉문제와 연관된 테러리즘에 맞선다. 어떤 의미에서 <인페르노>의 로버트 랭던은 그가 아니어도 될만한 일까지
떠맡은 셈인데 그의 역할을 만들어주기 위해 동원된 건 단테라는 모티브를 통해 구상한 기호학적인 퍼즐이다. 그러니까 <다빈치 코드>와
<천사와 악마>가 로버트 랭던의 개입을 자연스럽게 유도할 수 있는 이야기였던
것과 달리 <인페르노>에선 인위적인 구조적 설계가
필요하다.
<인페르노>의
로버트 랭던은 의문의 사나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기억상실증 상태로 피렌체의 한 병원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가 품은 의문과 관객의 의문은 똑같이 제시된다. 결국 그가 기억을 회복하며 단테의 지옥도에 담긴
의미를 쫓아 피렌체와 베니스, 이스탄불을 누비는 과정에 동참하는 관객의 흥미는 그가 왜 이 사건에 휘말렸는가라는
물음표에 놓여있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인페르노>는 <다빈치 코드>나 <천사와 악마>처럼 로버트 랭던을 탐정처럼 앞세운 지적인
추리극으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미스터리에 더 큰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초반에 제시하는
물음표의 흥미는 중후반부에 다다라 싱거워지는데 아무래도 각본의 내러티브가 완급조절에 실패한 인상이다.
전반부가 정체불명의 물음표로 가득한 호기심을 잉태하는 장이었다면 후반부는 그 물음표의 장막을 벗긴 실체의 위압감을
증명해야 하는 장이다. 문제는 로버트 랭던이 고도의 지적 추리를 통해 추적한 적의 실체가 그리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영화를 지탱하던 의문들이 손쉽게 자기 손을 들어서 정체를 드러내듯 미스터리의
동력이 손쉽게 소진된다. 게다가 극의 향방을 전환시키는 결정적 존재가 자기 정체를 드러낸 직후 그 인물과
관련된 과거사를 제시하는데 그 순간 이 영화가 멜로를 지향했던 것인가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감상적이라 영화의 지향점에 의문이 생길 정도다. 덕분에 영화의 서스펜스를 지탱하던 물음표의 패가 모두 다 열린 극 후반부에선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완전히 증발돼버린
듯해서 클라이맥스의 존재감 자체가 부재한 인상마저 준다.
한편 <인페르노>에서
탁월한 병풍 역할을 하는 피렌체와 베니스, 이스탄불의 풍경들은 아이맥스 카메라의 광대한 시선을 등에
업고 관광영화의 묘미를 극대화시킨다.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두오모돔과 조토의 종루 그리고 베키오
궁전과 우피치 미술관을 아우르는 피렌체부터 베니스의 산 마르코 광장 그리고 이스탄불의 하기스 소피아 성당과 예레바탄 지하궁전까지, 세계적인 유산이라 할만한 풍경이 아이맥스 카메라의 광대한 시선을 통해 중계되는 건 영화적 완성도와 무관하게
그럴 듯한 볼거리를 이룬다. 물론 충분한 기회비용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1.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열광하는 사회의 저변엔 가난한 다수의 불만이 도화선처럼 깔려 있다. 정직한 부에 대한 갈망이 깊다는 건 부정한 부에 대한 인식이 팽배하다는 역설에 가깝다. 결국 부자들을 손가락질하는 이들은 실상 가진 것 하나 없이 증오까지 끌어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결국 그 손가락들은 정작 자신들이 손가락질하는 대상보다 가깝게 닿는 주변의 손가락들과 부딪혀 싸우거나 기형적인 집단 논리로 번져나가기 십상이다. 사회적인 갈등을 야기시키는 건 결국 부의 대물림을 손쉽게 허하고, 빈부 격차의 확대를 방관하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에서 비롯된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으면 억울해지는 사회란 얼마나 불행한가. 그 불행을 개개인의 무능 탓이라고 몰아갈 때 부는 완벽한 권력이 돼서 도처에 깔린 무능을 깔고 앉아 영생을 누릴 것이다. 대를 이어 무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가난한 운명공동체, 완벽한 지옥의 완성.
2. 한때 정치적인 관심도 없고 투표도 하지 않는 ‘20대 개새끼론’이 고개를 들기도 했지만 어쨌든 기성세대가 ‘개판’으로 만들어놓은 사회적 인프라의 최대 피해자는 현재의 10대와 20대다. 고학력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대학 입학금과 등록금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그 외에도 다양한 스펙 요건을 채우기 위한 비용이 요구되는 가운데서 은행에선 학자금 대출로 금리 장사를 하고 있다. 단군 이래 가장 스펙이 좋은 애들이 단군 이래 가장 돈을 못 버는 세대가 되는 아이러니. 이게 말이 되는가.
3. 부유하게 태어난 건 행운이다. 행운을 누리는 건 자유다. 하지만 행운을 실력으로 착각하고, 타인의 가난을 무능으로 규정하는 건 자유가 아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를 자기 실력으로 행사하는 건 보기 드문 꼴불견이다. 그 이전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를 자기 실력처럼 행사하도록 방관하는 사회는, 정치는, 문화는 심각하게 꼴불견이다. 행운을 방치하는 사회는 노력을 간과하게 만들고, 실력을 어지럽힌다. 부모 잘 만난 것이 자랑거리가 되는 사회는 끝내 멸망해도 상관 없다. 아니, 멸망하는 게 낫다. 그러니 우리는 생존할 가치가 있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건강한 목소리를 모아야만 한다. 어차피 우리는 대부분 가난하다. 그런데 가난이 꼭 불행의 동의어가 될 이유는 없다. 부자가 아니라서 행복할 수 없다면 그건 분명 이상한 일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선 안된다.
최근 재개봉작과 관련된 칼럼을 쓰면서 이런저런 자료를 뒤지고 취재를 했다 재개봉작이 주목 받게 된 결정적인 방아쇠는 작년 11월 <이터널 선샤인>이 재개봉하며 30만 이상의 관객을 끌어 모은 덕분이겠지만 그에 앞서 2014년부터 다양성영화 시장이 활성화된 것이 일종의 장전 역할을 한 것 같다. 실제로 2013년에는 다양성영화 순위에서 10만 관객을 넘긴 영화가 6편에 불과했지만 2014년도에는 18편으로 늘었고, 이중에서 20만 관객 이상을 동원한 작품도 10편에 이른다. 심지어 그해에 <비긴 어게인>과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3백만 관객을 돌파하며 그 해의 뻥튀기가 됐지만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역시 7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할 정도였다. 2013년도에 다양성 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 18만여 명을 동원한 <로마 위드 러브>였으니 확연한 차이다. 다양성 영화 시장에 대한 주목도가 남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문제는 그 이후에 다양성영화에 대한 주목도가 상승하면서 약간의 투기 심리가 형성됐다는 것. 실제로 해외 마켓에서 다양성 영화 시장에서 먹힐 만한 영화들을 구입하고자 하는 수입사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해당 영화들의 단가가 두 배 이상 상승했고 결국은 시장 안에서의 수익성 악화로 이어졌다. 2015년도에도 다양성 영화 시장은 나름대로 선방했는데 1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 18편에 달했고, 2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작품도 8편에 이른다. 180만 명 이상을 동원한 <위플래쉬>와 같은 홈런작도 나왔다. 물론 2014년은 거의 마약 같은 한 해였으니 비교불가분이지만 어쨌든 다양성영화의 시장성이 어느 정도 지속되고 있다는 건 확인이 가능하다. 문제는 동일한 시장 규모에서 수입가가 상승한 탓에 시장 전체의 수익률이 상대적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필연적 결과다. 게다가 올해 다양성영화 시장의 전체 시장성은 지난 해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인상이다. 아직 한 해가 끝나지 않았지만 10만 이상의 스코어를 기록한 18편 가운데 2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는 4편에 불과하다. 그만큼 다양성 영화를 통해 재미를 본 수입사가 현저히 줄었을 것이란 예상이 가능하다.
결국 재개봉을 통해 3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이터널 선샤인> 이후로 재개봉작들이 점점 많아지는 현상은 2014년 이후로 다양성 영화 시장이 확대된 덕분이기도 하지만 다양성영화 시장의 과열 이후로 이어진 시장성 악화로 인한 투자심리의 위축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근거로서도 유효한 결과 같다. 아무래도 신작에 비해 10~30% 수준의 수입가로 개봉 판권을 가져올 수 있는 재개봉작은 이미 인지도가 형성돼 있다는 점에서도 마케팅에 유리하다. 물론 모든 재개봉작이 흥행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기본적인 수입가가 현저히 낮기 때문에 투자가치는 충분하다. 마케팅 비용을 절감함으로써 P&A를 낮출 수 있고, 낮은 수입단가 덕분에 BEP 즉 손익분기점도 상당히 낮다. 간단히 말하면 망할 가능성이 굉장히 낮고, 망한다고 해도 그 손실이 신작에 비해 역시 낮다. 투자가치가 충분하다는 판단이 서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이런 재개봉작들이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는 게 아니라 기존의 다양성영화 시장 안에서 새로운 경쟁구도를 형성한다는 점에 있다. 새로운 신작들도 개봉관 확보에 애를 먹고 있는 가운데 재개봉작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인상이 있는데 이를 테면 요즘 단독상영 정책을 펴는 멀티플렉스 입장에선 좋은 상품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브랜딩은 어느 정도 구축이 돼있기 때문에 극장에서 마케팅에 힘을 실어줬을 때 효과를 볼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서는 작품들이 꽤 있다. 반대로 시장의 인지도부터 구축해야 하는 신작 다양성영화들은 역설적으로 상영관 확보가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다. 물론 영화마다 상대적이겠지만 한 회차 상영조차 아쉬운 다양성영화 입장에서 경쟁률이 높아진다는 건 여간 부담이 아니다. 특히 중소 규모의 수입영화를 대거 들여오는 몇몇 수입사의 부담감이 상대적으로 높아진 느낌이다.
동시에 다양성영화 시장도 소모될 가능성이 있다. 한번 구축된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재개봉작이 늘어나고 해당 영화들에 대한 인식이 커지면 다양성이란 단어에 대한 인식이 재개봉작으로 대체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시장성이 급격하게 낡아버릴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이 역시 분명 문제라면 문제다. 사실 재개봉작 시장은 장기적으로 좋은 포석이 될 수 있다. 자본력이 약한 중소 규모 수입사들 입장에선 수익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되고 관객 입장에서도 고전을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 받는다는 점에서 윈윈일 수 있다. 결국 수요와 공급이 얼마나 균형을 이룰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특히 올해처럼 다양성 영화 시장의 위축이 확연히 보여지는 상황을 본다면 특히나 이런 화두는 중요하게 다뤄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