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걷는 남자>는 말 그대로 하늘을 걸었던 남자 펠리페 페팃에 관한 영화다. 그는 1974년 뉴욕 세계무역센터, 즉 쌍둥이 빌딩이라 불리던 그 고층건물 두 동의 110층 옥상에 나란히 와이어를 매달아 그 위를 걸었다. 이는 2008년에 공개된 다큐멘터리 <맨 온 와이어>에서 영상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두 영화를 나란히 감상하면 상당히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맨 온 와이어> <하늘을 걷는 남자>가 얼마나 사실적인 근거를 바탕에 두고 영화화된 작품인가를 증명하는 기록적 그림자에 가깝다. 고로 두 작품을 교차해 볼 수 있다면 상당히 입체적인 감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맨 온 와이어> <하늘을 걷는 남자>가 그 대단한 경험을 기록한 사실에 기반한 영화라는 육체적 증거가 될 것이다. <하늘을 걷는 남자> <맨 온 와이어>가 기록하지 못한 감각을 객석에 전이시키는 영혼적 증거가 될 것이다. 같은 것을 보고 있지만 다른 것을 느낄 것이고 궁극적으론 깊고 너른 감흥을 얻게 될 것이다.

사실 <하늘을 걷는 남자>의 영화화 계획이 발표됐을 때, 3D 입체 영상의 장인인 로버트 저메키스가 이 영화에 혹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110층 높이의 빌딩 꼭대기에 설치한 와이어 위에 선 남자의 주변부를 채우는 뉴욕시의 풍경만큼이나 광대한 원근감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하늘을 걷는 남자>는 단순히 3D 입체 영상을 위시한 볼거리에 국한된 영화가 아니다. 객석에 앉아서 영화를 보는 관객과 스크린 사이의 안전한 경계를 무마시켜 버리는 체험으로 수렴시키기 위한 마술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실화를 바탕에 둔 영화이길 넘어 기록을 읽던 관객을 기록의 현장으로 세워버리고자 하는 체험으로서의 영화에 가깝다. 와이어에 선 필리페 페팃이 줄에 서는 그 순간에 느낄 수 있었던 그 심정에 포개질 순 없겠지만 그 줄에 선듯한 기분을 공유할 수 밖에 없는 광대한 숏 앞에서 경건한 긴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시각적 스릴을 넘어선 육감적인 떨림. 그 지점에서 이 영화는 어떤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무엇을 보는가. 무엇을 겪는가. 무엇을 체험하는가. 그리고 그런 질문을 받을 때 우리는 영화의 영혼을 느낀다. <하늘을 걷는 남자>에선 그런 영혼이 느껴진다. 뉴욕에서 필리페 페팃의 곡예를 본 사람들이 느꼈을 기적적인 감동. 영혼을 지닌 영화는 그런 감동을 전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을 나는 남자>는 단순히 볼거리로서의 영화가 아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단순히 뉴욕 세계무역센터 꼭대기를 와이어로 건너는 남자의 이미지만으로 언급될 만한 작품도 아니다. 어떤 영화는 남다른 모험담을 묘사하며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지를 논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런 모험 아래 놓인 모두를 모험하지 않는 인물로 규정하기도 한다. <하늘을 걷는 남자>는 결국 필리페 페팃의 도전기를 다루지만 그것이 우리 모두가 본받을만한 어떤 경지처럼 떠받들지 않는다. 반대로 누군가가 행한 그 모험이 대다수의 사람에 게 어떤 감동과 흥분을 줬는지 표정을 읽게 만든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화란 것이 줄 수 있는 감동에 대해서 역설한다. 우린 대부분 영화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 없을 것이다. 그게 당연하다. 그래서 우린 영화를 본다. 다행히도 영화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 같은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린 모두 이 세상의 중심에 설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세상의 중심에 서지 않아도 좋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어울리는 영화도 있을 것이다. 그 자리에 어울리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에겐 저마다를 위한 영화가 필요할 뿐이다. 고로 영화는 존재한다. 고로 우린 영화를 본다. <하늘을 걷는 남자>는 바로 그런 영화의 존재를 되묻고, 되짚게 만드는 영화다.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그 시대의 공기를 호흡하게 만든다는 것이기도 하다. 필리페 페팃은 자신의 행위가 쿠데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조력자가 되길 자처하는 이들은 하나 같이 기꺼이 그 흥분에 동참한다. 그 시대는 워터게이트로 닉슨의 광기가 절정에서 내려오는 시대였고, 히피들의 전성기가 지났지만 반체제적인 자유와 평화의 여운이 마지막 그림자를 드리우던 시대였다. 어떤 의미로든 무언가 한 시대가 지나가는 징후가 나타나던 시대였다. 그 시대의 끝에서 뉴욕 한복판에 110층 높이의 세계무역센터가 건설됐다. 하나도 아닌 둘 씩이나. 사람들은 땅으로 내려온 필리페 페팃에게 말한다. "다들 저 타워가 마음에 든대. 네가 저 타워에 숨을 불어넣었어." 나는 문득 김춘수의 시 <>이 생각났다. 펠리페 페팃은 완공 직전의 세계무역센터에서 하늘을 걸었고, 이는 결국 이 빌딩을 물리적 랜드마크 이상의 영혼적 상징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일이 됐다. 그리고 다시 그 형체를 스크린에 소환할 수 있는 사연이 됐다. 지금은 사라진 그 두 빌딩이 나란히 선 풍경을 스크린에서 목도하는 건 결국 사라진 이름을 다시 되새기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이 결국 불리어지지 않더라고 이름이 존재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일일 것이다. 완전히 다른 영화지만 마찬가지로 세계무역센터를 마주한 채 엔딩크레딧을 올리는 스필버그의 <뮌헨>과 유사한 여운이 남는 것도 그래서다. 영화를 통해 가능한 마법이란 이런 것이기도 하다. 사라진 시대의 공기 속에서 호흡하고 잊혀진 것을 다시 제 자리로 돌려 놓는 소환술. 물론 모든 영화가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영화는 그럴 수 있다. <하늘을 걷는 남자>는 바로 그런 영화다. 하늘을 걷는 남자와 함께 그 시대를 걷고 호흡할 수 있는, 마술적 체험의 영화. 마음이 벅차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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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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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제들>을 보고 나서 설레발을 주체할 수가 없어졌다. 지쟈스 크라이스트. 어쨌든 본격 설레발 시작.

<검은 사제들>은 전율이란 단어의 의미를 명확히 체험시킨다. 사실 한국에서 이렇게 우아하고 강렬한 게다가 한국적인 엑소시즘 영화가 나올 줄은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검은 사제들>은 국내 장르물의 새로운 한 뼘을 정복한, 오롯이 홀로 선 수작이다. 무엇보다도 엑소시즘을 기반에 둔 오컬트 호러를 국내산 로컬 엑소시즘으로 건져낸 느낌인데 결과적으로 월척이다. 웹툰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장르적 느낌을 실사로서 설득력 있게 구현했다. 최후반부에 판을 살짝 키운다는 느낌은 있지만 딱히 거부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요즘 심심찮게 나오는 수입산 장르 코스프레물이 아니라 국내산 배양에 성공한 느낌.

무엇보다도 장르물에 성장드라마의 서브 플롯을 잘 녹였고, 캐릭터물로서도 상당한 매력이 있다. 전반적인 연출 리듬도 상당히 좋다. 특히 본격적인 엑소시즘 초반 신은 정말 매혹적이었달까. 빠르게 컷을 편집해 이어붙이면서도 슬로 템포로 카메라 앵글을 틀면서 줌인아웃을 거듭하는데 긴장감을 고조시키면서도 차분하고 세련된 리듬감으로 평온한 몰입감을 보장하는 느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 신만 떼서 계속 보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었음. 각본과 연출이 모두 괜찮은 인상인데 이 모든 것이 장재현이라는 신예 감독의 물건이라니, 이게 온전히 그의 역량을 뿌리 삼아 나온 결과물이라면 정말 그 이후를 닥치고 기대하겠다.

캐릭터 연출과 연기가 상당히 좋다. <검은 사제들>을 집에 빗대면 김윤석은 기본적인 골조의 틀을 잡아주고 강동원은 그 구조 안에 탁월한 풍경을 마련해주는 인상. 그리고 영신 역의 박소담은 그 풍경 안에 자리한 강렬한 소품. 사실상 캐릭터의 세기만으로 배우의 역량이 과대평가될 수 있는 배역인데 그 한계를 뚫고 스크린에 이름 석자를 박는 느낌. 그야말로 발견. 단언컨대 그녀는 새로운 바람이 될 것이다.

이미 알았지만 <검은 사제들>을 보고 백퍼 확신. 강동원은 그냥 그 자체로 장르다. 비현실, 초현실, 초자연은 다 강동원이란 이름 석자 앞에서 긍휼해진다. 강동원이란 필터를 거치면 판타지가 하이퍼 리얼리즘으로 걸러짐. 지쟈스 크라이스트 강동원느님. 앞으로 강동원의 모에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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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 물음표를 따라 나아가는 삶

도전자라기 보단 방랑자에 가깝다. 맞선다기 보단 궁금해서, 김지운은 항상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정복자가 아니라 개척자로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삶을 산다. 그 여정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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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을 옮겼다. 20대 직원이 많은 회사였다. 낯설었다. 한편으론 흥미로웠다. 하지만 확실한 각오는 필요했다. 나잇값을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배 나온 아저씨도 되지 말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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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은 이제 싸우지 않는다

인간은 노동한다. 먹고살기 위해서. 그런데 가끔은 노동하기 위해 먹고사는 것 같다. 먹고사는 인간이 사라진다. 최규석의 <송곳>은 바로 그런 인간의 사라짐을 묻는 작품이다. 날카롭고, 정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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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배달 음식 전성 시대다. 집에서 미식을 즐길 수 있다니, 얼마나 편리한가. 하지만 그 식사가 과연 즐거웠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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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기 인터뷰

interview 2015. 10. 25. 03:49

NEVER FIGHTING JUST LIVING

이준기는 항상 편견과 싸우는 배우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싸우지 않았다. 맞서지 않았다. 그저 견뎌냈다. 단단하고 유연하게,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배우로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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