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예의에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보다 먼저 중요한 건 능력이다. 아랫 사람에게 존경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예의라는 위장막부터 걷어차고 내 마음 속의 꼰대를 꺼내 보이기 시작한다. 이를 테면 제 꼴린 대로 가보겠다고 조직 체계를 빡빡하게 굴리는 것이 첫 번째 징후.
사실 모든 것을 알 필요도 없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해낼 줄 아는 이의 역할을 존중하고 거기에 효과적으로 기댈 줄만 알아도 능력 있는 상사가 된다. 하지만 그것도 뭘 알아야 하는 거지. 그게 능력이다. 그래서 그런 능력을 갖춘 상사를 자리에 박아넣을 수 있다는 건 조직 입장에선 정말 중요한 일이다. 조직의 비전을 만들어줄 직원들을 보존해줄 수 있는 상사야말로 조직이 얼마나 너르고 깊은 비전을 가질 수 있는가의 지표를 마련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직의 비전도 바로 그 지점에서 결정된다. 맞다. 사람이 미래다.
'지하철에서 화장하는 여자는 추하다'라는 논조의 <조선일보>발 칼럼을 보았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지하철 앞자리에 앉아서 화장에 열중하는 여자 앞에 앉아있다 보면 민망하다. 목격하고 싶지 않은 풍경이기 때문이다. 굳이 내가 생면부지 여자의 화장하는 풍경을 목격할 이유는 없지 않나. 비슷한 예로 어쩌다 만원지하철에서 목격하게 되는 누군가의 스마트폰 문자 내용 같은 것도 있다. 나도 모르게 타인의 프라이버시 안에 발을 담궈 버리게 되는 상황의 난처함. 곤란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추하다'라고 공적으로 발음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에게 물리적 피해를 주는 행동이 아니므로. 그 여자가 화장하는 것을 보고 내가 미쳐버린다 한들 그렇다. 그렇게 보기 싫으면 지하철 칸을 옮기던가. 지하철에서 화장하는 여자는 추하다고 생각하는 건 개인의 자유이지만 지하철에서 화장하는 것 역시 개인의 자유다. 자유와 자유 사이엔 어떠한 우위가 없다. 평등한 일이다. '보기 싫다'라는 이유로 불가해한 타인의 행위를 억압하는 건 어떤 식으로든 옳지 않다. 결코 동의할 수 없고,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할 대상이다. 지하철에서의 화장이 추하다는 그 마음보다 추한 것도 세상에 보기 드물 것이다. 그걸 알았으면 좋겠다.
베이루트의 참사에 애도하지 않는 이들이 파리의 참사를 애도한다는 비판을 보았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건 베이루트의 참사를 알고도 모른 척하다 파리의 참사를 알고 애도했느냐는 것이다. 그럴 리가. 그렇다면 베이루트의 참사에 대한 무지를 비양심적 행위로 규정할 수 있는가. 내 상식으론 타인의 무지를 양심의 문제로 치환할 순 없는 노릇이다. 나는 그래서 그러한 양식으로 비판의 논조를 세우는 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묻고 싶다. 파리를 향한 애도가 글렀다는 것인가. 베이루트에도 관심을 갖자는 것인가. 만약 후자라면 그딴 태도로 설득이 되겠는가.
베이루트에서의 참사와 파리에서의 참사를 두고 비극성의 무게를 재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세상은 베이루트보다 파리에 더 관심이 많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베이루트를 잘 모른다. 베이루트가 어디 붙어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하지만 파리는 최소한 에펠탑의 이미지로나마 구체화된다. 두 발을 디뎌보지 않았더라도 파리를 낭만의 유사어로 손쉽게 치환한다. 베이루트와 파리는 피부로 닿는 온도조차 다른 곳이다. 그만큼 두 도시의 참사에 대한 공포 또한 각각의 온도가 다를 것이다. 베이루트보다 파리에서 기관총이 난사되고, 폭탄이 터져서 무방비 상태의 수많은 사람들이 삽시간에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것이 더욱 큰 공포로 와닿는 건 그럴 일이 결코 없을 것이라 믿었던, 항상 안전하리라 생각했던 영토에서도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충격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는 것 같다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는 불길한 징후, 징조, 증상. 그것이 중요하다. 파리에 대한 연대를 보내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서다. 우리 집 안방이 안전하다는 믿음을 회복하고자 하는 염원이다. 그런 이들에게 파리 바깥의 폭력에 무지한 주제에, 란 식으로 비판하는 건 또 다른 의미의 폭력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폭력을 비난하는 방식으로서 폭력을 방관한다는 비난은 적절하지 않다. 그건 그저 상처를 헤집기 좋아하는 이들의 수작에 가깝다.
어쩌면 이번 참사를 통해서 전세계적인 테러리즘의 공포를 환기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세계는 나날이 보다 가깝게 연결돼 가고 있다는 것을. 국경이라는 물리적인 거리감이 좁아지는 시대를 넘어 예전보다 빠르게 개개인의 정서에 링크를 걸고 감정을 전송하는 세상이 됐다는 것을. 정서를 공유한다. 통증을 공유한다. 그렇게 알게 된다. 우리가 그 통증을 통해서 서로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가 교감하는 통증을 통해 서로를 치유하고 더 나아가 이 세계를 치유할 수 있는 개개인의 연대에 자신도 모르게 힘쓰게 된다. 그렇게 종교도, 민족도, 국가도 초월하는 개개인의 연대적 세계관이 알게 모르게 성립된다. 결국 그것만이 이 세상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파리를 향해 기도하는 목소리가 결국 이 세계를 향한 첫 번째 기도가 될 수 있길 바란다. 그랬으면 좋겠다.
1. 장모님께서 서울에 올라오셨다.
그래서 장모님을 뵙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윤보선 전대통령의 생가이자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 윤보선가 고택에서 묵으셔서 겸사겸사 구경도 할 수 있게 됐다. 가는 길에 경복궁역에 즐비한
경찰을 보았다. 역 안까지 이미 경찰이 들이 차있었다. 경찰차들은
절묘한 주차술로 인도와 차도 사이를 빈틈 없이 막아서고 있었다. 안국역에서도 경찰을 보았다. 역 안에서도, 역 밖에서도. 정말
많았다. 대부분 어려 보였다. 팔할이 의경들일 것이다. 어린 청년들이 국가의 방패 노릇을 하는 풍경을 가로질러 내 갈 길을 갔다. 그
풍경을 뒤에 두고 나의 일상을 영위한다는 것이 부끄럽다. 그 부끄러움에 화가 난다. 내 일상이란 것이 그렇게 보잘것없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정말 치욕적인
국가다. 사회다. 정부다.
진저리가 난다. 삼청동에서, 잠실에서 광화문을
생각했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2. 아침 일찍 파리의 테러 소식을 들었다. 파리와 테러라니, 좀처럼 링크가 걸리지 않는 두 단어의 간극이 사라진
풍경이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한 자리에 머문 이후의 참혹한 결과를 타전하는
수많은 메시지를 보며 문득 절망감이란 것은 멀고 아득한 방식으로도 우리를 멸망시킬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내
삶이 당장 무너지지 않았지만 세계의 한 축이 무너지고 있다는 선명한 절망감 같은 것이 지워지지 않을 얼룩처럼 마음에 새겨졌다. 테러의 소행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번 테러가 세계의 양분화와 공포의 전염 그리고 당장의 시리아 난민
사태에 얼마나 악영향을 미칠지 많은 생각을 했다. 괴롭다.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이 세계의 커다란 아픔과 증오 앞에서 개개인의 위로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불이 꺼진 에펠탑으로부터
전해지는 선명한 상념 앞에서 화도 나고, 슬프다가도 무력해지는 개인을 보게 된다. 어찌될지 모르겠다. 세계는, 우리는.
3. 당장 내년 2월에
파리에 가기로 했다. 항공 예약은 완료했고, 필립 스탁의
마마 쉘터에 묵기로 해서 매우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무섭다.
그때 설마 별일이야 있겠냐는 낙천적인 생각의 좌우로 무심결에 공포가 따라 붙는다. 어제
파리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없었을 거다. 폭력의 결과란 이렇다. 세상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게 만든다. 정말 무서운 일이다. 폭력이란 것이 어떤 식으로든 이해될 수 없다는 건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폭력을 통해 낭만을 주검으로 만드는 건 한 순간이다. 끔찍하다. 실로. 고로 이러한 폭력을 이겨내기 위한 세계의 위로란 실로 중요하다. 응징을 다짐하는 오바마의 지지 선언만큼이나 파리의 테러현장 앞에서 존 레논의 ‘Imagine’을 연주하는 청년의 모습에서 얻는 용기가 만만치 않다.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허물어지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절실하다.
4. 폭력은 지구 반대편의 파리에서만 선명한 것이 아니었다. 광화문에도 폭력이 있었다. 집회 중인 시민 한 명이 경찰의 물대포에
직격타를 당해서 뇌손상이 있었다고 했다. 동영상이 돈다. 플레이를
눌렀다. 욕지기가 나왔다. 경찰의 물대포는 카운터 같은 것이었다. 복싱에서도 쓰러진 사람에게 주먹을 날리진 않는다. 경찰은 쓰러진
사람을 확인하고도 물을 쏘고 있었다. 그를 구하러 간 사람에게도 물을 쏘고 있었다. 쓰러진 사람을 싣고 병원에 가기 위해 대기 중인 구급차에도 물을 쏘고 있었다.
재미있었을까. 흡사 게임처럼, 시민을 맞추면
점수를 주는 룰이라도 존재했던 것일까. 그 속을 알 수가 없지만 그 속을 어떤 식으로든 참혹한 내면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인간으로서 어떤 인간의 참혹한 속을 짐작해야 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인간이란 것이 이토록 참혹한 존재였던가라는 절망감. 폭력이 인간을
파괴하는 방식은 이렇다. 되갚고 싶게 만든다. 인간적이지
않은 상대를 통해 인간적이지 않은 존재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자아의 상실감. 괴로운 일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어려운 시대에서 산다는 것은.
5.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경복궁역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주변의 고성을 들었다. 멈춰선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올라가며 입구를 좁게 막아선 경찰들을 보았다. 올라가는 쪽도, 내려가는 쪽도 불편해 보였고, 불편했다. 격렬하게 항의하는 이의 목소리가 지하철역 안으로 울려
퍼졌다. 경찰은 미동이 없었다. 에스컬레이터 끝으로 올라서서
밖으로 나가려는데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이 마주쳤다. 사람은 둘인데 지나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였다. 가고자 하는 방향은 다른데 갈 수 있는 방향은 하나였다. 그때 앞에
서있던 경찰이 말했다. “내려가는 분 먼저 보내겠습니다.” 어린
친구였다. 의경이겠지. 한참을 서서 내려가는 사람을 보내다
언제까지 기다릴 순 없어서 틈을 봐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말했다. “욕본다. 건강해라.” 그 청년은 나의 적이 아니다. 어쩌다 보니 서로 다른 방식으로 욕보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억울함
정도는 알았으면 좋겠다. 너의 좆 같음이 내가 아니라 너를 방패로 세우려 하는 이들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집으로 올라가는 골목까지 서있는 경찰을 보면서 욕이 들끓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오늘 보고 느꼈던 즐거움을 생각했다. 그렇게 일단 오늘을 견뎌야만 한다. 그렇게 나를 불행하게 만들려 애쓰는 세상을 이겨야 한다. 이기고
싶다.
인류 역사에서 국민은 오랫동안 고자였다. 100여 년 전만 해도 개인의 자유란 일부 계층만 세울 수 있는 권리였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국가가 명하지 않으면 자유를 세울 생각조차 못했던, 발기부전의 시대를 살아왔다. 민주주의라는 비아그라를 찾기 전까진.
그러니까 이것도 국가다. 국가란 이렇게 좆 같을 수도 있단 말이다. 결국 국민의 권리를 세우는 문제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에게 달려있다. 저항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자유란 그저 자위다. 평생 민주주의라는 딸딸이나 치면서 억압 속에서 사는 것이다. 다시 고자가 되고 싶진 않다.
멕시코 시티의 ‘죽은 자들의 축제’를
배경에 둔 <007 스펙터>의 오프닝 시퀀스는
정말 멋있다. 상당히 유려하고 우아한데 거의 10여분간 몇
마디 대사만 존재할 뿐, 상당히 과묵한 시퀀스가 이어진다. 그리고
초반 5분 가량은 원신원컷에 가까운 편집술로 광장에서, 호텔
안으로 그리고 다시 호텔 난간을 넘어 옥상으로 제임스 본드의 동선을 미끌어지듯 따라잡는데 정말 홀리듯이 봤다.
<007 스펙터>는
‘죽은 자가 돌아온다(The dead is alive)’라는
자막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처음에는 조금 뜬금 없었지만 그 의도가 상당히 궁금했다. 결국 이 작품은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 역을 맡은 이후의 <007> 시리즈,
그러니까 <007 카지노 로얄>,
<007 퀀텀 오브 솔라스>, <007 스카이폴>까지의 전작들을 갈무리하는 마침표처럼 보인다. <다크나이트
라이즈>와 같은 맥락의 영화라는 말이다. 시리즈의 마지막
퍼즐과 같은 것. 그만큼 앞에서 언급한 전작들을 보지 못한 입장에선 감상의 밀도가 조금 떨어질 가능성이
다분하다. 다니엘 크레이그 판본에서 빨래줄 같은 역할을 하는 베스퍼 린드의 이름은 <007 스펙터>에서도 당연히 언급되고 그 아래 지난 전작
세 편에 등장했던 악당 세 명 그리고 주디 덴치의 M까지, 그러니까
제임스 본드에 의해 죽은 자들과 그를 위해 죽은 자들이 모두 언급되고 간접적인 이미지로 노출된다. 지난
세 전작들이 전작과의 연결성을 중시한 경향이 있다면 이 작품은 그 세 전작의 여정을 완전히 갈무리하는 마지막 종착에 가깝다. <다크나이트 라이즈>와 같은 것이다. 결국 독립적인 작품의 만듦새만으로 이 작품을 감상하는 건 반쪽짜리 재미가 될 가능성이 크다.
사실 다니엘 크레이그의 판본 이전까진 이만큼 사적인 <007> 시리즈가
존재한 적도 없었다. <007 카지노 로얄>부터 <007 스펙터>까지 베스퍼 린드라는 이름이 계속 언급되는데
그만큼 공무를 수행하는 ‘더블0, 세븐(007)’보단 제임스 본드라는 안티히어로의 숙명적인 다크나이트적 행보가 눈에 띄는 작품이면서도 <007 스카이폴>에 다다라서는 마치 제임스 본드라는 인물
탐구에 가깝게 변형된 인상도 있었다. 심지어 <007 스카이폴>에선 제임스 본드의 고향이라는 스카이폴에서 악당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한다.
<007 스펙터>는 제임스 본드의 사유지로 변모한 시리즈의 숙명을 완전히 완수하는
작품이면서도 그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주디 덴치에 이어 새로운 M이 된 랄프 파인즈와 Q 그리고 머니페니 등 서브 캐릭터의 역할이
보다 활발해진 것도 그런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 같다. 팀워크가 돋보이는 후반부에선 마치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의 팀플레이를 보는 느낌이기도.
개별적인 작품으로만 보자면 전체적인 스케일은 상당히 팽창한 느낌이지만 밀도가 조금 떨어진다는 인상이. 멕시코시티, 로마, 오스트리아, 모로코의 탕헤르, 런던까지 상당한 규모의 로케이션 촬영이 추진됐는데
그만큼 상당한 볼거리가 존재하지만 동시에 각각의 도시마다 하나의 에피소드를 치고 빠지는 느낌이라 그 여정을 쫓아가는 것이 살짝 피로하다는 느낌도. 게다가 에피소드를 갈무리하는 방식에서 기이할 정도로 나사가 풀렸다 싶을 정도로 의도로 지나치게 간편해 보이는
사건 해결 방식을 보여주거나 갑작스런 전개를 보여주는데 그 중에서의 백미는 제임스 본드가 새로운 본드걸인 레아 세이두와 급작스런 베드신에 들어가는
상황. 물론 베드신은 안나온다. 베드신이 있었을 거라는 강렬한
전조 증상만 노출할 뿐. 아무튼 역대급 강적과 주먹다짐을 벌이고 겨우내 살아난 제임스 본드가 새로운
본드걸인 레아 세이두와 단도직입적으로 에로스의 욕망을 불태울 때는 상당히 웃겼다. 그런데 정말 웃기라고
넣은 것 같기도 하다. 최선을 다해서 치밀해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적인 느낌도 있고.
전작인 <007 스카이폴>을
생각해보면 제임스 본드가 한 마디로 내뱉는 단어가 있는데 ‘부활(Resurrection)’이다. <007 스카이폴>은 이 키워드를 통해 영화를 함축한다. 자신의 어두운 기억이 잠재된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다시 살아나오는 제임스 본드를 그림으로서 완벽하게 부활이란
키워드와 맞아 떨어진다. 이번 작품에서 제임스 본드가 한 마디로 내뱉는 단어는 ‘본능(Instinct)’다. 이번
시리즈는 그만큼 본능적으로 사건을 해결하고, 육감에 따라 상황을 판단하고, 실제로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이끌려 에로스를 폭발시키는 장면까지 등장하는데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들도 이성적인
치밀함보단 동물적인 본능과 육감에 의한 결과로 점철된다. 그런 의미에서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해 보이는
이 작품의 부분적 헐렁함이 살짝 이해가 됐다. 생각해 보면 고전적인
<007> 시리즈들도 그렇게 치밀한 작품들은 아니었다. 마티니와 본드걸로 회자되던
시리즈가 이처럼 하이퍼 리얼리즘 스파이물로 변모한 건 결국 다니엘 크레이그의 판본 덕분이고 그런 이미지를 얻은 역사는 전체적인 시리즈의 역사에
비해 상당히 짧았다는 것이다.
어쨌든 결말은 소문대로 다음 시리즈 출연이 불투명해 보이는 다니엘 크레이그가 쏙 빠져도 상관 없을 만한 모양새다. 아쉽긴 하지만 한편으론 어차피 그 혼자서 끌어갈 수 있는 시리즈가 아니란 점에서 박수칠 때 떠나는 타이밍이기도. 확실히 얼굴에서 이제 피로감이 보인다. 어쨌든 궁금한 건 이후의 <007> 시리즈인데 언제든 제임스 본드 역을 갈아치워도 상관 없었던 역대 시리즈와 달리 지금처럼
완전히 사유화된 상태의 <007> 시리즈 이후에 이 시리즈는 또 다시 리부트의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 것 같기 때문. 007이라는 살인면허의 발급자를 시치미 떼고 다른 얼굴로 이양하기엔 다니엘 크레이그의
인상이 너무 강렬하게 남는다.
아무튼 개별적인 작품 속성에서 걸작이었던 <007 스카이폴>을 제외하고 <007 카지노 로얄>과 <007 퀀텀 오브 솔라스>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작품 자체의 모양새는 <007 스펙터>가 조금 떨어진다는 인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시리즈의
갈무리로서 제 몫을 해내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다크
나이트 라이즈>와 같은 것이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를 따라온 이들이라면 발을 디뎌야 할 마지막 다리라고. 그러니까 안 보고 배길 수 있나.
폴 러드에게 있어서 앤트맨 수트를 입는다는
건 새로운 도전이자 설레는 경험이었다. 동시에 이 또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앤트맨 수트도, 영화도 아니었다.
마블 스튜디오의 총제작자인 케빈 파이기는 <앤트맨>(2015)에 폴 러드를 캐스팅한 것에 대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수트를 입고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가 하찮은 사기꾼 출신인데, 그가
폴 러드 같은 사람이라고 보자. 그는 다른 사람의 집에 침입하는 등 다소 불미스러운 행동을 해도 여전히
매력적일 수 있고, 당신이 응원할만한 사람이기에 그의 구원을 만족하게 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앤트맨>을 관람했거나
관람하게 된다면 이 의견에 대해서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연기한 <앤트맨>의 스콧 랭은 케빈 파이기의 말처럼 응원할만한
매력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앤트맨>의 스콧 랭은 마블 코믹스의 세계관의 영화적 세계관을 의미하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히어로들 가운데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스타로드(크리스 프랫)에 비견될 수 있을 만큼 유머 감각이
차고 넘치는 캐릭터다. 동시에 MCU 안에서 유일하게 부성애를
지닌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앤트맨>은 폴 러드에게 개인적으로 진지하고 긍정적인 의미를 남긴 작품이었다. “이 영화를 내 아이들과 함께 볼
수 있을 거라는 점이 정말 마음에 든다. 내 딸은 다섯 살이라 아마 별 관심이 없을 거 같은데 열 살짜리
아들은 재미있게 볼 거다. 아이들이 촬영장에 온 적이 있는데 아들이 수트와 헬멧을 보고 정신을 못 차렸다. 정말 멋진 일이라 생각했다고 하더라. 아들과 나란히 앉아서 영화를
볼 거다. 정말 좋을 것 같다.”이건 폴 러드가 아니라 <앤트맨> 속의 스콧 랭이 하는 대사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까 케빈 파이기가 보는 눈이 있었단 말이다.
혹자는 ‘이런 배우가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을까?’ 궁금하겠지만
사실 폴 러드는 아주 오래 전부터 할리우드에서 활동해온 배우였다. 그렇다고 그가 변변찮은 무명 시절을
견딘 불운한 배우였던 건 아니다. 다만 그는 망가짐을 두려워하지 않는,
되레 뻔뻔하게 즐기는 코미디 배우로서 오랜 경력을 쌓아왔다. <앤트맨>의 캐스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진 <앵커맨>(2004)은 웰 페럴과 스티븐 카렐이 출연하는 코미디물이다. 이미
두 배우의 출연만으로도 성격이 명확하게 보이는 이 코미디물에서 폴 러드는 예측불허의 얼간이 짓을 일삼는 방송뉴스팀의 직원으로 등장한다. 큼지막한 콧수염까지 붙인 채로 등장한다. 진지함이라곤 1g조차 없어 보이는 <앵커맨>의
폴 러드는 <앤트맨>의 폴 러드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면서도 종종 닮았다. <앤트맨>의 스콧 랭은
언제나 긍정적인 방향을 모색하는 인물이다. 무모하게 여겨지는 상황에서도 최선의 방향을 찾아 달려나가고
백치미 돋는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진정시키는 힘이 있다. <앤트맨>이 기존의 마블 히어로물들과 달리 가족드라마적인
안정감을 선사하는 것도 폴 러드라는 배우가 품은 그런 자질과 무관하지 않다.
앞서 언급한 <앵커맨>의 제작자였던
주드 아패토우의 연출작인 <40살까지 못해본 남자>(2007)와 <사고친 후에>(2007)에서도 폴 러드는 선하지만 어딘가
덜 떨어진 인상의 남자들과 어울리며 하향평준화된 삶을 마냥 즐기듯 전전한다. 비록 한가운데 서서 주목을
독점하는 주연 캐릭터는 아니지만 그 주변부에서 타인의 삶을 진지하게 경청하면서도 백치미 넘치는 태도로 위로를 전한다. 심지어 <아워 이디엇 브라더>(2011)에선
우울증을 호소하는 경찰에게 천진난만한 태도로 대마를 한 움큼 쥐어주다 감옥에 수감돼서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물을 연기한다. 인간적인 공감대를 쥐어주는 것이 그에겐 무엇보다도 중요한 기준이다. “캐릭터를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이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앤트맨>의 스콧 랭 역시 슈퍼히어로로서 보여주는 기상천외한 활약상만큼이나 돋보이는 건 공감할만한 진심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멋진 격투신이나 화려한 시각효과가 눈엔 즐거울지 몰라도 깊이는 떨어진다. 캐릭터들과 공감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이 영화는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멋진 액션신은 물론 격투신들은 정말 최고다. 이전엔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볼 수 있을 거다. 일부 기술은 최초로
사용된 기법이기도 하고, 정말 획기적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정말 기억했으면 하는 것은 캐릭터들과 그들간의 관계다.”
물론 슈퍼히어로가 되는 과정이 그저 마음을 다스리는 것만으로 가능했을 리가. 하지만
다채로운 고생문을 열고 닫았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에 비해 폴 러드의 답변은 일관되게 유쾌한 톤을 유지한다. “촬영하는
것은 매우 즐거웠다. 솔직히 말하면 싸우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싸울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트레이닝과 액션신들을 준비하는 것 자체로도 정말 즐거웠다.” 다만 유일하게 불편한 건 와이어의 안장이었다. “원치
않는 곳으로 파고들어서. 그걸 빼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재미있더라. 공중에 매달려서 ‘이게 내 일입니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죠’라고 말하는 경우도 꽤 많았다.” 또한 스태프의 도움을 받아서 입는
데에만 30분의 시간이 소요되는 디테일한 수트를 입고 연기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독특한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의상을 입게 되면 캐릭터 표현에 굉장한 도움이 된다.
서는 자세부터 다르고 생각하는 것마저 달라진다. 처음볼 땐 너무 좋아서 아찔했다. 헬맷을 처음 써봤을 땐 어린 시절에 봤던 스톰트루퍼 헬맷이 생각났다. 만약
어린 나이로 돌아가면 많은 그림을 그렸을 거다.”
한편
<앤트맨>에서 폴 러드는 단순히 연기에만 참여한 것이 아니다. <앵커맨>의 연출을 맡았던 감독 아담 맥케이와 함께 시나리오
각본에 참여했다. 사실 폴 러드에겐 이미 영화 기획과 각본, 제작
경력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앤트맨>은 그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이런 작업은 항상 저예산 코미디
작품에서 경험했던 거다. 이런 스케일에서는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그에겐 당연히 의미가
있는 도전이었다. “각본에 참여하면 모든 캐릭터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항상 캐릭터의 의도를 생각하고 내 선택이 다른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처음보다 스토리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덕분에 우린 이토록 유쾌한 앤트맨을 만날 수 있게 됐다. “우리가 만드는 건
영화일 뿐이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웃는 거다.
정말 진심으로 웃는 일 말이다.” 폴 러드의 말을 따르자면 그에게 있어서 영화란 인생의 낙을 찾는 여정에 가깝다. 그러니까 웃음을 찾아가기 위해 건설하는 기차 레일과도 같은
것이랄까. 참고로 폴 러드는 계약상 앤트맨 수트를 세 번 이상 입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토록 유쾌한 히어로를 볼 기회가 최소한 두 번 이상 더 남아있단 말이다. 이보다 좋을 수 있겠는가.
<내부자들>을 봤다. 잘 알려진 대로 윤태호 작가의 동명 원작 웹툰을 스크린에 옮겼다. 아무래도 원작을 직접 본
관객은 드물 거 같은데 원작과의 비교 선상에서 보다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건 영화 입장에선 유리한 면이 있지 않을까 싶다. 결과적으로 원작과는 다른 형태로 완성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정경유착과 밀실정치의 행태에 관한
르포르타주를 기반에 둔 원작 웹툰의 극사실적인 묘사는 영화 안에서 현실 정치에 대한 폭로극으로서의 쾌감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사실적인 이미지로 적극
활용된 것 같다. 다만 원작의 극사실적 묘사는 그 자체를 본다는 것만으로 완벽하게 현실정치를 폭로한다는 의미가
있었는데 영화에선 그런 사실적인 묘사가 극적인 쾌감을 극대화시키는데 기여하는 장치에 가깝다. 원작에서 중요한
게 밀도였다면 영화에서 중요한 건 부피와 중량이었던 것 같다. 그만큼 원작에 비해 극적이고,
현실적인 타협을 최대한 수용했다. 이를 테면 결국 관객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최대한
영리하게 보여주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달까.
뿌리 깊은 정경유착과 밀실정치가 지배하는 이 사회에 대한 무기력한 수긍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는 점에선 <부당거래>의 묘사가, 폭력적인 하드보일드한 세계관을 지배하는 권력자들을 전복시킬 야심가들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지켜봐야 한다는 점에선
<신세계>의 정서가 연상되는 작품이다. 결말은 <베테랑>과 같은 싸가지 없는 권력
때려잡기 류의 쾌감에 가깝다. 그만큼 새롭고 참신한 작품은 아니지만 자기가 그린 세계관의 입구와 출구를 명확히
세우고 닫는 작품이란 점에서 평가될만한 가치가 있다. ‘물리고 뜯길수록 더 큰 괴물이 되는’
이들을 상대로 물리고 뜯기다 결국 더 큰 괴물이 되는 방법을 찾아가는 ‘내부자들’의 악전고투를 그리는 과정의 기승전결이 단단하게 세워지고, 권력의 위엄 아래 잠재된 추잡한
민낯과 권력의 그림자 속에 기생하는 폭력의 본체 그리고 그 패악한 세계의 본질을 음흉하게 드러내는 대사들의 찰진 은유로서 폭로적인 흥미를 유발한다.
그러니까 이 세계의 그림자를 스펙터클하게 드러내는 묘사와 함께 이상적인 낭만이 가미된 결말의 쾌감은 상호보완적이다.
다만 이야기의 리듬이 잘 정리된 인상은 아니다. 덕분에 몇 차례 높은 파도를 타듯
기승전결의 흐름을 견뎌야 되는 느낌이라 그 과정에서 피로감을 느낄 가능성도 존재할 것 같다. 개인적인 집중력
차이에서 비롯되는 사안일 수도 있겠지만 연출과 묘사의 세기에 집중한 인상이라 상대적으로 그런 감상적 흐름을 간과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이병헌의 연기는 그야말로 점입가경.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양아치 건달 역을 맡았는데 숱한 조폭영화 상의 유사한 역할들과 비교해도 이만한 사례가 없었던 것 같다. 살기와 백치미를 양쪽 주머니에 차고 필요할 때마다 마음껏 꺼내 쓰는 느낌. 흥행 결과가 어찌될지는
모르겠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이 와 닿을 정도랄까.
물론 조승우와 백윤식도 확실히 배우 본연의 신뢰감을 수성한다. 그야말로 메소드 연기의
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이 세계를 흔드는 밑바닥의 실체를 목도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건
결국 배우들의 그런 대단한 연기 덕분이다.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