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시대는.

도화지 2017. 1. 19. 18:40

초등학교 3학년 때 광주에 내려갔다. 처음은 아니었다. 큰집이 광주에 있었기 때문에 명절 혹은 제사때마다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에 내려갔다. 어릴 때 차멀미가 심해서 귀 밑에 키미테를 붙이고, 버스가 출발하면 제발 이대로 잠들어서 광주에서 깨어나게 해주세요, 라며 빌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언제나 중간에 잠은 깼고, 여지없이 까만 봉투에 머리통을 처박고 흔들리는 오장육부로부터 기여 올라온 것들을 테이프를 되감듯 기워냈다. 다만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다. 완전히 이사를 갔으니까.


어쨌든 광주에서의 삶이 시작됐다. 당연히 전학을 갔다. 지금도 기억난다. 담임선생님을 따라 낯선 교실에 들어가 낯선 아이들 앞에 섰던 기억. 아이들은 시끄러웠고, 선생님은 이상한 발음으로 아이들을 조종했다. '아야, 조용 안 하냐. 인나. 엎쪄. 인나. 둔너. 전학생이 와씅께 조용해봐라잉. 아야, 이름 말허고 자기 소개해부러.' 구체적으론 못 알아들었는데 어쨌든 자기소개라는 단어는 이해했다. 방과 후에 학급 반장이라는 여자 아이 집에 함께 갔다. 몇몇 아이들도 함께였다. 뭔 얘기를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선생님이 직접 반장에게 지시해 학교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했단다. 한 친구가 했던 말은 기억난다. "아따, 너 말 겁나 희한하게 해부러야." 표준어는 광주에서 겁나 희한한 말이었다. 아마 요즘은 이 정도까진 아니겠지만, 당시엔 그랬다.


어쨌든 광주에 살면서 나는 최루탄 냄새에 적응했다. 전집 옆에서 전 굽는 냄새가 나는 것이 당연하듯이 매년 5월 18일 즈음의 광주에서는 최루탄 냄새가 나는 것이 당연했다. 더운 여름에도 창문을 닫고, 익숙하다는 듯이 매캐한 냄새를 견뎠다. 그래서 가끔은 이제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이 아주 간혹 신기하다. 광주 사람들은 두 가지에 열광했다. 하나는 해태 타이거즈. 나도 어린 시절 야구를 좋아했다. 신문의 스포츠란에 야구 기사를 검은색 모나미 볼펜으로 줄을 그으며 볼 정도였다. 선동렬을 좋아했는데, 이종범은 사랑했다. 지금도 나는 그가 신인으로 데뷔했던 시절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한 한국시리즈에서 명백한 안타성 타구를 말도 안 되는 서전트 점프로 잡아내고는 등으로 떨어졌던 광경을 기억한다. 마이클 조단의 페이드 어웨이를 본 것 같았다. 그 뒤로도 지금까지 이종범이란 이름 앞에선 마음이 동하는 것 같다. 물론 그 시절의 해태 타이거즈를 기억하는 덕분에 기아 타이거즈 야구는 목이 막히는 기분이라 좀처럼 보기 힘들어졌지만.


두 번째는 김대중이다. 믿어지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광주 사람이라면 초등학생들도 대선 투표를 밤새워 봤다. 집안 어른들이 다 봤고, 아이들도 따라 봤다. 뭣시 중헌지는 자세히 몰라도 김대중 슨상님이 대통령이 돼야만 한다는 건 남녀노소 불문한 광주의 원기옥이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명확하게 기억나는 대선 투표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격돌한 1992년도였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이라 김영삼이 누군지는 잘 몰랐고, 김대중의 적이라는 건 알았다. 지금이야 개표 방식이 발달해서 개표 몇 시간 만에 누가 유력한 당선 후보인지 알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새벽 3시는 넘겨야 당선 유력 여부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아마 새벽 4시쯤이 돼서야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잠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난 뒤 누가 봐도 침울해 보이는 부모님 표정을 보고 안됐다는 것을 직감했다. 학교에 가니 선생님들도 침울했고, 교실 분위기도 그저 그랬다. "염병, 져브렀어야." 초등학교 친구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아마 나도 비슷한 말을 했던 거 같은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초등학생이 할 말이었던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알다시피 5년 뒤인 1997년에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당시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고, 초등학생 시절보다는 뭣이 중헌지 쪼까 아는 나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좀 더 간절한 마음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는데, 오메, 돼부러써야. 내 기억에 아마 그때 광주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2002년 광화문 광장 같은 것이었을 거다. 학교에 가니 선생님도 신났고, 교실도 신났다. 아마 교내 스피커에서 노래라도 나왔으면 다 함께 어깨에 손을 매고 기차놀이라도 했을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심지어 97년은 해태 타이거즈가 마지막으로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해였다. 사실 96년과 97년은 해태 타이거즈 팬들에게 굉장히 극적인 해였다. 


96년 시즌 당시 선동렬의 일본 진출과 김성한의 은퇴로 시즌 꼴찌까지 예상했던 해태 타이거즈는 이종범과 홍현우가 타력을 지배하며 예상 밖의 선전을 보이다 결국 시즌 중반부터 치고 올라와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달성하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했고, 현대 유니콘스와 붙게 됐다. 그런데 당시 해태가 2승 1패로 앞선 4차전에서 현대는 막강한 마무리 정명원을 선발로 기용하는 초강수를 뒀고 정명원은 해태에 사상 첫 한국시리즈 노히트 노런의 수모를 안기며 해태의 우승이 힘들 것이란 전망까지 부추겼다. 그런데 결국 우승을 맞이했고, 그 여세를 몰아 해태 타이거즈는 97년도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당시 97년도는 이대진이 17승을 올리며 최고 승수를 기록했고, 임창용이 커리어 하이를 찍었으며, 신인 투수 김상진이 한국시리즈 최연소 완투승을 올린 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97년도는 이종범이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마지막으로 우승한 해였고, 해태 타이거즈로서도 마지막 우승이었다. 기아 타이거즈와 해태 타이거즈의 역사는 동일하지 않으니까. 


사실 알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97년도는 IMF 외환위기로 나라 전체가 어지러웠던 해다. 아마 지금의 국정농단 사태를 제외하고 전 국민이 국가 경제와 정치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던 해가 아니었나 싶다. 그 해에 야구장은 텅텅 비었다. 해태 타이거즈가 우승하는 해에 무등야구장이 그렇게 비어있던 것을 본 적이 없다. 당시 해태는 재정 적자에 시달렸고, 우승했던 해에 주요 선수를 타구단에 팔게 된다. 97년에 해태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커리어 하이를 찍었던 임창용이 삼성 라이온즈로 넘어간 것도 이듬해였다. 이종범은 일본의 주니치 드래곤즈에 진출했고, 김상진은 98년 시즌 도중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 중 99년에 사망했다. 당시 해태의 팬들은 팀의 기둥과 반석이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허망함을 느꼈다. 에이스였던 이대진 역시 99년도에 어깨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했고, 장성호와 홍현우만으로 버티기엔 타선이 빈약했으며, 당시 광주일고 출신의 거포로 알려진 이호준은 부진했다. 어쨌든 해태 타이거즈의 역사가 기울어 가는 것을 느꼈고, 아마 나도 그 이후로 한동안 야구를 좀처럼 보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2009년도에 기아 타이거즈가 극적으로 우승했을 때엔 정말 잃어버린 시간을 찾은 기분이었는데, 그건 아마 기아에 이종범이 있어서였던 것 같다. 한국시리즈 7차전 9회 말 5대 5 동점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나지완이 휘두른 방망이에 맞은 타구의 궤적만으로 홈런임을 직감했을 땐 나도 모르게 '아악!' 소리를 냈다. 그리고 우승이 확정되고 모든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뛰쳐나와 얼싸안을 때 이종범의 우는 얼굴을 보며 나도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 덕분에 몇 년 간 기아의 답답한 야구를 보며 한탄하기도 했지만 그 전의 우울함 같은 건 사라진 것 같았다. 이종범이 우승해서 다행이었다고, 이종범이 우승하는 것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러니까 97년도는 내게 있어서 어떤 안녕 같은 해였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고, 해태 타이거즈는 마지막 절정을 보냈다. 물론 그 이후로도 대선이 치러지면 광주는 누군가를 선택했고, 여전히 기아 타이거즈를 응원하는 팬들이 존재한다. 다만 내가 광주를 기억하는 두 가지가 이제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김대중도, 해태 타이거즈도 없다. 그 부재를 통해 어떤 한 시절이 끝났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그리고 최근의 국정농단 사태 이후 광장에서 어린아이들을 목도하게 되면, 심지어 단상에 올라가 또박또박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유년시절 대선 개표 결과를 봤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올해 대선이 치러지게 되면 이 아이들도 TV 앞에 앉아서 개표 결과를 볼까. 그렇다면 이 아이들은 훗날 자신이 그러했다는 것을 기억할까? 궁금하다. 그 미래는 과연 어떤 미래일까. 그리고 너희들이 기억하는 지금은 무엇일까. 너희들의 광주는, 너희들의 김대중은, 너희들의 야구는 무엇일까. 문득 궁금했다. 궁금하다. 이제 나는 사투리도 쓰지 않고, 야구도 보지 않지만 그 시절의 광주와 김대중과 야구가 여전히 선명하기에, 부질없지만 그렇다. 궁금하다. 너의 시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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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에 대한 단상

도화지 2016. 10. 21. 18:06

1.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열광하는 사회의 저변엔 가난한 다수의 불만이 도화선처럼 깔려 있다. 정직한 부에 대한 갈망이 깊다는 건 부정한 부에 대한 인식이 팽배하다는 역설에 가깝다. 결국 부자들을 손가락질하는 이들은 실상 가진 것 하나 없이 증오까지 끌어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결국 그 손가락들은 정작 자신들이 손가락질하는 대상보다 가깝게 닿는 주변의 손가락들과 부딪혀 싸우거나 기형적인 집단 논리로 번져나가기 십상이다. 사회적인 갈등을 야기시키는 건 결국 부의 대물림을 손쉽게 허하고, 빈부 격차의 확대를 방관하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에서 비롯된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으면 억울해지는 사회란 얼마나 불행한가. 그 불행을 개개인의 무능 탓이라고 몰아갈 때 부는 완벽한 권력이 돼서 도처에 깔린 무능을 깔고 앉아 영생을 누릴 것이다. 대를 이어 무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가난한 운명공동체, 완벽한 지옥의 완성.


2. 한때 정치적인 관심도 없고 투표도 하지 않는 ‘20대 개새끼론’이 고개를 들기도 했지만 어쨌든 기성세대가 ‘개판’으로 만들어놓은 사회적 인프라의 최대 피해자는 현재의 10대와 20대다. 고학력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대학 입학금과 등록금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그 외에도 다양한 스펙 요건을 채우기 위한 비용이 요구되는 가운데서 은행에선 학자금 대출로 금리 장사를 하고 있다. 단군 이래 가장 스펙이 좋은 애들이 단군 이래 가장 돈을 못 버는 세대가 되는 아이러니. 이게 말이 되는가.


3. 부유하게 태어난 건 행운이다. 행운을 누리는 건 자유다. 하지만 행운을 실력으로 착각하고, 타인의 가난을 무능으로 규정하는 건 자유가 아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를 자기 실력으로 행사하는 건 보기 드문 꼴불견이다. 그 이전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를 자기 실력처럼 행사하도록 방관하는 사회는, 정치는, 문화는 심각하게 꼴불견이다. 행운을 방치하는 사회는 노력을 간과하게 만들고, 실력을 어지럽힌다. 부모 잘 만난 것이 자랑거리가 되는 사회는 끝내 멸망해도 상관 없다. 아니, 멸망하는 게 낫다. 그러니 우리는 생존할 가치가 있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건강한 목소리를 모아야만 한다. 어차피 우리는 대부분 가난하다. 그런데 가난이 꼭 불행의 동의어가 될 이유는 없다. 부자가 아니라서 행복할 수 없다면 그건 분명 이상한 일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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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낭비하자

도화지 2016. 1. 28. 00:53

인류의 팔 할, 아니, 팔 할이 뭐야. 9.9할은 위대하지 않다. 그리고 위대해지지 않아도 사는데 지장은 없다. 위대한 사람이 돼야 한다는 강박은 위대한 사람을 보다 위대하게 만드는 것 이상의 효용성이 없다. 그리고 지구를 망치는 인간으로 분류되는 9.9할의 패륜적 존재들도 위대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인간의 종류에서 나온다. 지금의 청와대 꼴을 봐라. 아마도 스스로 자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이 드러누운 게 아니고서야 저 모양 저 꼬라지일리가 없다. 고로 위대한 사람이 되지 못할 바에야 자기 몸 건사하는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해 시간을 낭비하고 마음껏 써대는 것이 인류 역사에도 도움이 된다. 인생을 낭비해라. 어차피 당신은 위대해질리 없다. 덕분에 그로써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1인 정도는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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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미래다

도화지 2015. 11. 30. 00:53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예의에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보다 먼저 중요한 건 능력이다. 아랫 사람에게 존경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예의라는 위장막부터 걷어차고 내 마음 속의 꼰대를 꺼내 보이기 시작한다. 이를 테면 제 꼴린 대로 가보겠다고 조직 체계를 빡빡하게 굴리는 것이 첫 번째 징후.

사실 모든 것을 알 필요도 없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해낼 줄 아는 이의 역할을 존중하고 거기에 효과적으로 기댈 줄만 알아도 능력 있는 상사가 된다. 하지만 그것도 뭘 알아야 하는 거지. 그게 능력이다. 그래서 그런 능력을 갖춘 상사를 자리에 박아넣을 수 있다는 건 조직 입장에선 정말 중요한 일이다. 조직의 비전을 만들어줄 직원들을 보존해줄 수 있는 상사야말로 조직이 얼마나 너르고 깊은 비전을 가질 수 있는가의 지표를 마련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직의 비전도 바로 그 지점에서 결정된다. 맞다. 사람이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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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화장하는 여자는 추하다'라는 논조의 <조선일보>발 칼럼을 보았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지하철 앞자리에 앉아서 화장에 열중하는 여자 앞에 앉아있다 보면 민망하다. 목격하고 싶지 않은 풍경이기 때문이다. 굳이 내가 생면부지 여자의 화장하는 풍경을 목격할 이유는 없지 않나. 비슷한 예로 어쩌다 만원지하철에서 목격하게 되는 누군가의 스마트폰 문자 내용 같은 것도 있다. 나도 모르게 타인의 프라이버시 안에 발을 담궈 버리게 되는 상황의 난처함. 곤란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추하다'라고 공적으로 발음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에게 물리적 피해를 주는 행동이 아니므로. 그 여자가 화장하는 것을 보고 내가 미쳐버린다 한들 그렇다. 그렇게 보기 싫으면 지하철 칸을 옮기던가. 지하철에서 화장하는 여자는 추하다고 생각하는 건 개인의 자유이지만 지하철에서 화장하는 것 역시 개인의 자유다. 자유와 자유 사이엔 어떠한 우위가 없다. 평등한 일이다. '보기 싫다'라는 이유로 불가해한 타인의 행위를 억압하는 건 어떤 식으로든 옳지 않다. 결코 동의할 수 없고,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할 대상이다. 지하철에서의 화장이 추하다는 그 마음보다 추한 것도 세상에 보기 드물 것이다. 그걸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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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루트의 참사에 애도하지 않는 이들이 파리의 참사를 애도한다는 비판을 보았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건 베이루트의 참사를 알고도 모른 척하다 파리의 참사를 알고 애도했느냐는 것이다. 그럴 리가. 그렇다면 베이루트의 참사에 대한 무지를 비양심적 행위로 규정할 수 있는가. 내 상식으론 타인의 무지를 양심의 문제로 치환할 순 없는 노릇이다. 나는 그래서 그러한 양식으로 비판의 논조를 세우는 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묻고 싶다. 파리를 향한 애도가 글렀다는 것인가. 베이루트에도 관심을 갖자는 것인가. 만약 후자라면 그딴 태도로 설득이 되겠는가.

베이루트에서의 참사와 파리에서의 참사를 두고 비극성의 무게를 재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세상은 베이루트보다 파리에 더 관심이 많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베이루트를 잘 모른다. 베이루트가 어디 붙어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하지만 파리는 최소한 에펠탑의 이미지로나마 구체화된다. 두 발을 디뎌보지 않았더라도 파리를 낭만의 유사어로 손쉽게 치환한다. 베이루트와 파리는 피부로 닿는 온도조차 다른 곳이다. 그만큼 두 도시의 참사에 대한 공포 또한 각각의 온도가 다를 것이다. 베이루트보다 파리에서 기관총이 난사되고, 폭탄이 터져서 무방비 상태의 수많은 사람들이 삽시간에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것이 더욱 큰 공포로 와닿는 건 그럴 일이 결코 없을 것이라 믿었던, 항상 안전하리라 생각했던 영토에서도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충격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는 것 같다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는 불길한 징후, 징조, 증상. 그것이 중요하다. 파리에 대한 연대를 보내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서다. 우리 집 안방이 안전하다는 믿음을 회복하고자 하는 염원이다. 그런 이들에게 파리 바깥의 폭력에 무지한 주제에, 란 식으로 비판하는 건 또 다른 의미의 폭력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폭력을 비난하는 방식으로서 폭력을 방관한다는 비난은 적절하지 않다. 그건 그저 상처를 헤집기 좋아하는 이들의 수작에 가깝다.

어쩌면 이번 참사를 통해서 전세계적인 테러리즘의 공포를 환기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세계는 나날이 보다 가깝게 연결돼 가고 있다는 것을. 국경이라는 물리적인 거리감이 좁아지는 시대를 넘어 예전보다 빠르게 개개인의 정서에 링크를 걸고 감정을 전송하는 세상이 됐다는 것을. 정서를 공유한다. 통증을 공유한다. 그렇게 알게 된다. 우리가 그 통증을 통해서 서로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가 교감하는 통증을 통해 서로를 치유하고 더 나아가 이 세계를 치유할 수 있는 개개인의 연대에 자신도 모르게 힘쓰게 된다. 그렇게 종교도, 민족도, 국가도 초월하는 개개인의 연대적 세계관이 알게 모르게 성립된다. 결국 그것만이 이 세상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파리를 향해 기도하는 목소리가 결국 이 세계를 향한 첫 번째 기도가 될 수 있길 바란다.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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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에서 국민은 오랫동안 고자였다. 100여 년 전만 해도 개인의 자유란 일부 계층만 세울 수 있는 권리였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국가가 명하지 않으면 자유를 세울 생각조차 못했던, 발기부전의 시대를 살아왔다. 민주주의라는 비아그라를 찾기 전까진.

그러니까 이것도 국가다. 국가란 이렇게 좆 같을 수도 있단 말이다. 결국 국민의 권리를 세우는 문제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에게 달려있다. 저항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자유란 그저 자위다. 평생 민주주의라는 딸딸이나 치면서 억압 속에서 사는 것이다. 다시 고자가 되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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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를 보내며

도화지 2015. 9. 9. 00:34

하늘이를 보내주기 위해 김포로 가야 했다. 화장을 하기로 했다. 토요일에 떠난 하늘이를 보내주기 위한 일요일이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지막을 지켜줄 수 있어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데 하늘이 너무 맑고 예뻤다. 하늘이 너무 맑고 예뻐서 마음이 미어졌다.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았다. 눈가를 불로 지져서 눈물샘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하늘이가 담긴 상자를 안고 탄 택시 앞좌석에서 바라보이는 하늘은 너무 맑고 예뻤다. 뒷좌석에 앉은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나는 어머니가 들을까 겁이나 소리를 죽이고 마음 속으로 흐느꼈다. 눈물을 닦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하늘은 계속 맑고 예뻤다. 군데군데 뭉게구름이 하얀 털 같아서 하늘이 생각이 많이 났다. 그래서 조금 울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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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특정한 폭력적 범죄를 두고 페미니즘 논쟁을 벌인다는 건 예비군 훈련 사격장에서 3사로에 누워 있던 격발자가 4사로 과녁의 한 가운데를 보기 좋게 관통하는 것과 같다. 페미니즘 논쟁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다. 다만 여성 범죄는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해석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제도적 예방을 요구하는 것이 보다 현명하고 옳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이미 여자는 남자보다 약자다. 그리고 어떤 사회든 당연히 약자를 보호하는 제도적 안전망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것이 옳다. 복지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하지만 여성 특정 범죄에 대한 해법에 페미니즘 논쟁으로 접근하면 너무나 당연한 공적 환기가 희한한 방식으로 붕괴된다. 여성과 남성의 대립 구도로서, 개인과 개인의 갈등으로 손쉽게 사유화시킴으로서 제도적 권태에 대한 지적을 자연스럽게 무마시켜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러기엔 너무 심각한 일 아닌가. 심지어 세금도 더럽게 많이 내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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