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중, 71명의 학도병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했다는 포항에서의 실제 전투를 극화한 <포화속으로>는 초반부터 현장감 넘치는 시가전 신을 연출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것만 같다. 하지만 사실감 넘치는 전투신을 목격하기 보단 ‘전쟁 화보’를 구경하는 듯한 기분이다. <포화속으로>는 재현보다도 포장에 능한 작품이다. 물량공세를 퍼붓는 전장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좀처럼 긴박감이나 비장함을 발견할 수 없는 건 그 덕분이다. 캐릭터의 비장함도, 전쟁의 참혹함도, 하나 같이 흉내내기에 여념이 없는 것처럼 <포화속으로>는 전쟁의 껍데기를 두른 마초 화보 영화처럼 보인다. 한국전쟁 60주년 기념 반공영화라도 만들 심산이었을까. 그렇다면 북한군 전차에 파란색 매직으로 ‘1번’이라도 적어놓았다면 보다 효과적이었을 것을.
<춘향전>은 언어에서 시작되어 문장으로 옮겨진 작자, 연대 미상의 구비문학이다. 대부분의 구비문학들은 다양한 근원설화로부터 그 명맥이 이어져온 것이라 추정되며 <춘향전>역시 <도미설화>나 <박색설화>와 같이 그 근본을 짐작하게 만드는 다양한 근원설화를 지닌 판소리 문학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아는 그 <춘향전>은 입과 입을 거쳐나가며 다양한 형태로서 변주되고 오늘날의 형태로서 정착된 결과물인 셈이다. 무엇보다도 그 종래적 형태를 결정짓는 요인은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다. 정절과 정조의 아이콘이라 불려도 좋을 춘향의 일편단심을 그리는 <춘향전>은 당대 사대부 양반들이 중시하던 유교적인 풍속을 대변하는 결과물로서 종착된 작품이다.
‘장안 건달 세계의 1인자 이서방’이라 불리는 방자(김주혁)가 ‘통속소설의 1인자’ 색안경(공형진)을 만나 춘향(조여정)과 몽룡(류승범) 사이에 놓인 자신의 과거를 소설화시켜줄 것을 제안하는 오프닝으로 출발되는 김대우 감독의 신작 <방자전>은 <음란서생>의 그것처럼 입을 빌어 전달되는 구비문학의 뉘앙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음란선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방자전>은 조선이라는 신분제 사회의 폐쇄적 풍속의 외관 안에 담겨있을 법한 ‘비공식 야사’를 조명한다. 이는 조선이라는 당대 시대에 대한 전형적 이미지 안에서 도발에 가까운 시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로 다양한 서민 문화가 향유됐던 당시 시대상을 떠올린다면 보다 자연스러운 묘사로서 이해될 만하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건 <방자전>이 지금 현재 이 시대 안에서 유효한 시도라는 점이다.
<방자전>은 한국영화가 사극을 다루는 근 몇년 사이의 경향을 대변하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상한 시대를 바탕으로 둔 풍기문란한 상상, 즉 체통을 중시하는 계급시대를 배경으로 둔 섹스어필한 야사는 근래 사극을 표방한 한국영화들의 어떠한 전형이라 불려도 좋을 만큼 거듭 시도되고 시행되는 이야기적 방법론에 가깝다. 또한 <춘향전>을 비롯한 다양한 구비문학들이 그 시대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주되어 전승되고 명맥을 유지했던 것처럼 <방자전>은 오늘날에 있어서 <춘향전>의 유효성을 상기시키는 새로운 변주적 형태가 될 수 있음을 어필할만한 작품이다. 이는 근래 개봉됐던 <전우치>와 함께 한국 고전 소설의 현대적 쓰임새로서 비견될만한 이야깃거리로서 유용하다.
춘향과 몽룡의 서사를 중심으로 둔 <춘향전>과 달리, 그 제목처럼 방자를 중심에 둔 <방자전>은 기본적으로 <음란서생>과 유사한 서사적 리듬을 두르고 있는 작품이다. 섹스어필한 코미디를 골자로 풍자와 해학의 골계미로 치장된 전반부의 서사는 후반부에 다다라 비극적인 분위기를 두른 진지한 멜로드라마로서의 분위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방자전>은 그 제목 자체만으로도 감지되듯 스토리텔링과 캐릭터 설정에 대한 변주적 묘미를 즐길만한 작품이다. 원작이 품고 있던 열녀 춘향의 절개를 적절히 뭉개고 덧댄 뒤, 절대적 규약에 가까운 계급사회의 풍토를 비틀며 적절한 도발과 풍자의 미덕을 채워나간다. 전작에 비해 과감해진 노출 수위는 파격적이라기 보단 적절한 감상적 자극을 야기시킬 만한 전시적 효과를 거둔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다. 다만 <음란서생>과 마찬가지로 애틋한 감상을 강박적으로 얹혀놓은 것처럼 멜로적 취향을 한껏 들어올리는 결말의 감정선은 조금 민망하다. <춘향전>의 기원에 대한 풍자적인 발상으로부터 자아나는 위트가 짙은 멜로적 뉘앙스 안에서 침전되는 기분이랄까.
무엇보다도 <방자전>은 캐스팅의 조합으로부터 숙성시키는 맛이 괜찮은 영화다. 캐스팅부터 묘한 감상을 부르는 주연배우들이 기본적인 음식맛을 유지하는 식재료 역할을 한다면 조연배우들은 특별한 맛과 향을 더하는 양념으로서 탁월하게 영화에 배어든다. 언제나 인상적인 캐릭터를 선사하는 오달수의 연기는 백문이불여일견이며, 그 누구보다도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송새벽은 영화의 히든카드로서 인상적인 방점을 찍는다. 아름다운 색감을 자랑하는 미장센은 덤이다.
제목만으로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동명의 고전 어드벤처 PC게임을 연상하는 이들이 많겠지만 사실 <페르시아의 왕자: 시간의 모래>(이하, <페르시아의 왕자>)는 그것과 시간차를 두고 있는 후속작에 가까운 롤플레잉 콘솔 게임을 모티브로 완성된 작품이다. 추억을 연상시키는 제목이며 실제로 그 양자에 가까운 후속 모델을 모티브로 완성된 작품이지만 실상 그 추억은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 <페르시아의 왕자>는 제목 그대로 <페르시아의 왕자>이되, 그 누군가가 기억하는, 혹은 반가워할 그 게임과는 직결되지 않는 동명의 타이틀을 지닌 영화에 가깝다.
고아였지만 우연히 페르시아 제국의 왕의 눈에 띄어 샤랴만 왕의 아들로 입양된 다스탄(제이크 질렌홀)은 왕가의 막내 왕자로서 활발하고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라난다. 그러던 중, 신성한 도시라 불리는 ‘알라무트’가 위험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첩보를 듣게 된 왕자들은 도시를 공격하고 다스탄의 활약으로 도시를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공주 타미나(젬마 아터튼)를 만난 다스탄은 곧 함정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기며 도망자로 전락하게 된다.
<페르시아의 왕자>는 올드한 고전의 명성처럼 근래 보기 드물게 올드 패션한 영화다. 스턴트와 파쿠르, 야마카시 등으로 채워진 액션 신의 팔 할은 서커스적인 재미를 부여하며 활극적인 기운을 부여한다. 하지만 일관적으로 뛰고, 구르는 액션으로 이뤄진 역동적인 움직임을 응시하다보면 굉장히 활동적인 가운데서도 느슨하게 벌어져 가는 지루함을 떨쳐내기 어렵다. 그것은 그 역동적인 움직임들이 때때로 실소를 부를 정도로 과장된 액션으로 이뤄져 있으며 그 액션의 줄기를 이루는 서사가 막무가내에 가깝게 흐르는 덕분이기도 하다.
단검에 채워진 모래로 인해 시간을 되돌리고, 이로 인해 운명의 수정과 보완이 가능하다는 설정은 영화에 적절한 흥미와 신비를 부여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서사의 흐름과 소재의 활용은 과거적이라는, 그러니까 향수를 자극할만한 수단으로서 감상을 부추기기 보단 언어 그대로 오래된, 그러니까 무언가 낡은 것을 보고 있다는 인식을 부풀린다. 마치 오래된 아동용 디즈니 영화가 성인용 오락 블록버스터의 흉내를 내고 있는 형태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고 할까.
조금 기묘한 감상을 낳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페르시아의 왕자>는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던 시절의 정세를 상기시키는 설정의 묘가 발견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위험한 살상무기가 존재한다는 이유로 신비의 도시를 침공했지만 정작 그 전쟁을 발발시킨 무기는 발견되지 않으며 권력에 눈이 먼 권력자의 야욕에 의해 왕가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현실을 겨냥한 교훈 따위와는 거리가 먼 영화라는 것. 철저하게 제리 브룩하이머 식의 엔터테인먼트로 가득 채워진 <페르시아의 왕자>는 스케일을 통해 대단한 오락적 너비를 확보하는 특유의 방법론을 적극 활용한 어드벤처 무비로서의 기능성만을 염두에 둔 오락영화라고 말해도 좋은 작품이다. 그러니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오락영화로서의 만족감일 것이다. 뭔가 거창하고 날렵한 것을 보고 있는 듯하지만 반복적이고 느슨한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추억은 재미를 보장하지 않는다.
‘픽사(PIXAR)’가 늘 수준 이상의 성적을 유지하는 모범생이라면 ‘드림웍스(Dreamworks)’는 머리는 뛰어나지만 때때로 노력이 부족해서 열등한 모습을 드러내곤 하는, 게으른 우등생 같다. 마치 ‘좋은 예’와 ‘나쁜 예’가 뚜렷하다고 할까.드림웍스의 신작 <드래곤 길들이기>는 그 중에서도 좋은 예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버크섬은 바이킹 부족의 고향이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자신들의 가축을 약탈하고 목숨을 노리는 용과 맞서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강인하고 용맹한 전사가 되는 건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꿈이자 업이었다. 부족 내에서 가장 용맹한 전사로 통하는 바이킹 족장 스토이크는 용을 괴멸시키기 위해 그들의 거주지를 찾아내길 원한다. 하지만 그 전에 더욱 더 큰 고민은 그의 아들 히컵이다. 도무지 전사와는 거리가 먼 체격과 성격을 지녔음에도 아들은 용과 맞설 수 있다고 주장하며 번번이 사고만 치니 말이다. 하지만 어느 날, 스토이크의 고민은 말끔히 해결된다. 약골이라 용과 맞서기 어려울 것이라 믿었던 아들이 그 누구보다도 용을 다루는 재능이 대단하다는 것. 하지만 덕분에 히컵에게는 아버지가 모르는 고민이 하나 생긴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드림웍스라는 브랜드의 네임밸류 안에서 잉태된 기존의 작품들과 다른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슈렉>시리즈의 성공 이후로 드림웍스 애니메이션들은 의인화된 캐릭터들의 활약상에 초점을 맞춰 왔다. 동물의 탈을 썼을 뿐, 인간이나 다름없는 캐릭터들의 활동을 통해 위트를 건져내는 방식으로서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은 유효했다. 하지만 <드래곤 길들이기>는 명확하게 인간과 자연의 대비를 그리는 작품이다. 용과 대립하는 인간들의 세계관을 통해 두 대상 간의 교감을 그린다는 점에서 자연과 인류의 경계가 중첩적이던 전작과 뚜렷하게 다른 지향점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드래곤 길들이기>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아바타>의 대단한 흥행 이후로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확산되고 있는 3D영상의 구현이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아바타>이후로 스크린에 가장 탁월한 3D영상을 구현하는 작품이라 자부할만한 작품이다. 물론 두 작품 사이에 간극은 있다. 실사를 바탕으로 구현한 <아바타>의 3D영상과 달리 <드래곤 길들이기>는 기본적으로 CG애니메이션의 툴을 바탕으로 제작된 3D영상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두 작품의 완성도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드래곤 길들이기>는 분명 <아바타>이후로 3D영화라는 포맷 안에서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좋을 작품임에 틀림없다. 3D기술을 볼거리로서 충분히 활용하는 동시에 단순하고 명료한 스토리에 적절한 감동적 요소를 삽입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작품 자체에 대한 감상적 몰입도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드림웍스의 전작인 <몬스터 vs 에이리언>이 습작과 같은 3D애니메이션이었다면 <드래곤 길들이기>는 완성형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드래곤 길들이기>는 드림웍스의 메인 프랜차이즈였던 <슈렉>시리즈의 뒤를 잇는 포스트 드림웍스 시리즈로서 빈자리를 채울만한 작품이라 단언해도 좋다. 이미 새로운 시리즈 제작에 착수한 <쿵푸팬더>처럼 <드래곤 길들이기>의 시리즈 기획 역시 이미 공표된 상태다.다만 그 동안 드림웍스가 시리즈를 거듭하며 작품의 완성도를 유지하지 못했던 전례들을 생각해본다면 불안한 예감이 동반되는 것도 사실이다. 데뷔에 성공한 캐릭터를 밑천으로 삼아 방향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무작정 서사적 레일만 깔고 전진해나가듯 시리즈를 거듭하는 방식은 <쿵푸팬더>와 <드래곤 길들이기>를 통해 새로운 국면 전환에 성공한 드림웍스가 고민해야 할 지점이라 할만하다.
물론 차후의 고민을 떠나서 현재의 성과, 즉 <드래곤 길들이기>는 상당히 인정받을만한 성과에 가깝다. 명확한 기승전결로 이야기의 줄기를 뚜렷하게 세우고, 교감과 성장이라는 테마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통해 명료한 감동마저 거둔다. 또한 다양한 디자인과 개성을 캐릭터와 순발력 있는 위트를 통해 탁월한 오락적 재미를 더한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오락영화로서의 평형감각과 기술과 연출의 균형감각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대한 큰 스크린을, 3D상영관을 찾길 권한다. 지갑을 열수록 재미는 극대화될 것이다.
유년 시절 동명의 원작 게임을 즐긴 이들에게는 이름만으로 추억이 되겠지만 그 제목의 형태 이상의 의미는 염두에 두진 말 것. 마치 올드한 아케이드 어드벤처 게임을 상기시키듯 올드 패션한 어드벤처 무비를 완성시킨 것마냥 촌발 날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적당한 합의는 거둔 오락영화랄까. 투박하지만 활극적인 묘기에서 발생하는 서커스적인 재미를 즐길 수 있다면 그럭저럭. 하지만 그 빤하디 빤한, 종종 막무가내처럼 흐르는 서사와 액션을 즐길 수 없다면 맙소사.
사람들은 더 이상 시를 읽지 않는다. 어쩌면 그건 더 이상 사람들이 시를 믿을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각박한 세상에서 시상은 더 이상 운율 위로 흐르지 못하고 메마른다. 참혹한 세태 속에서 시구는 마치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은 씨앗처럼 감성을 잊은 듯 단단하게 메마른인간의 마음에 뿌리 내릴 수 없는 것마냥흩날려 간다. 물기를 잃어버린 것처럼 메말라버린 세상 속에서 시쓰기를 절실히 갈망하면서도 좀처럼 시상을 떠올리지 못하는 어느 여인은 그 대신 험악한 세상의 단면만을 거듭 목격하고 체험해 나갈 뿐이다.
물 흐르는 소리만이 가득한 강가에서 흙을 만지는 아이들, 그 중 한 아이의 시선이 강물 위로 머문다. 그 시선을 따라잡은 카메라 너머로 수면 위로 무언가가 점차 스크린 너머의 객석을 향해 떠밀려온다. 한적한 자연풍경과 대비적인, 참혹한 광경이 눈앞으로 실체를 드러낸다. <시>는 대사 한마디 없는 풍경만으로 유려하고 명징하게 이 세계의 단면과 이면을 발췌해 관객의 눈 앞에 들이민다. 안온한 풍경 안에서 쉽게 표정을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불쑥 머리를 들이미는, 참담한 실체의 고요한 등장. <시>는 직설적인 문체와 서정적인 운율이 동반된 한편의 시처럼 아름다운 형태를 두르고 있지만 그 내면에 담긴 끔찍한 직설과 비통한 은유를 찌르고 머금는 영화다.
직장문제로 부산에 내려가 지내는 딸 대신 홀로 손자(이다윗)를 키우며 할머니 미자(윤정희)는 시를 쓰고 싶어한다. 어느 날, 어꺠결림 때문에 찾아간 병원에서 치매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간 미자는 강으로 투신해 자살했다는 소녀의 어머니가 넋나간 듯 딸을 찾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잊지 못하던 미자는 그것이 곧 자신과 가장 가까운 혈육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된다. 강으로 투신한 소녀가 대면해야 했던 폭력은 끔찍하게 매듭지어졌지만 그 폭력의 당사자들은 일상 속에서 자신들의 가해를 쉽게 희석시키고, 그 당사자들의 부모는 위로나 슬픔의 감정보단 해결과 처리의 이성적 방안을 마련한다. 그 이성적인 해결방안은 미자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지만 그녀는 그 안에서도 시상에 몰두해나간다.
어떤 일상은 파문처럼 번지듯 조용히 떠밀려와 삶을 출렁이게 만들고 흘러 넘쳐 채울 수 없도록 흔들어대지만 실상 삶은 그렇듯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다시 제 삶을 이룬다. <시>는 사건의 단면을 끌어내며 감정을 진동시키기 보단 사건을 품은 일상의 풍광을 고스란히 지켜봄으로서 감정을 억누른다. <밀양>이 일상을 파헤치고 삶을 도려내어 그 생의 심층을 관찰하는 영화였다면 <시>는 일상으로 덮여가는 삶의 진행적인 너비가 결국 가닿을 수 밖에 없는 생의 영토를 살피는 영화다. 담담하게 떠밀려 내려와 삶을 위협하는 현실 위로 일상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릴 것 같지만 실상 그 삶은 쉽게 내려앉지 않은 채 켜켜이 시간의 중력 위로 떠밀려 내려가 새로운 일상을 쌓아나간다.
그 어떤 날, 우연히 스쳐 지난 타인의 일상이 제 일상의 발목을 붙잡듯 운명은 어떠한 예감도 없이 너비를 펼쳐 생을 덧없는 것으로 몰아가고 일상은 당연스럽게 생의 너비를 밀어낸다. 그 흐름에 순응하듯 인간의 생은 무력하게 유지되지만 그 삶의 흐름마저도 하나의 보편적인 진리처럼 차분히 이 세계 속으로 안착한다. 아름다운 일상의 총합만으로 이뤄질 수 없는 삶의 너비는 마치 물처럼 흐르는 일상 속에서 점차 정화될 수 밖에 없는 기억처럼 고요히 흐름을 지속해나갈 뿐이다. <시>는 <밀양>처럼 어떤 종교적인 엄숙함을 감지하게 만드는 영화지만 그것은 삶에 대한 체념적 체험이 아닌 갈망적 의지로서 보다 숭고한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둔탁하고 거친 각운의 경험이 남긴 심상의 상흔은 결국 삶의 운율 속에서 보다 깊고 고요한 문체가 되어 삶을 정화시킨다.
<시>는 아이러니와 딜레마를 통해 보다 명징한 통증과 수려한 슬픔을 각인시키면서도 끝내 그것이 아름답다 말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경이로운 영화다. 이미 존재 자체로서 시나 다름없는 여인은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거나, 시를 흉내내는 속물들의 세상 속에서 시를 되묻는다. 그리고 결국 한편의 시를 완성한다. 통증의 세상에서 깊게 침전해 내려가는 감성의 운율은 아련하다 못해 시리고 창백해서 아프고 고결해 소중한 것이다. 이창동은 정적이면서도 첨예하게 파고 드는 문체를 구사하는 가운데, 윤정희는 그 안에서 자신만의 화법을 동원하며 독자적인 운율을 보존한다. 세상은 메마르고, 삶은 시리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살아야 한다. 그래서 영화는 되묻는다. 당신은 시를 쓸 수 있는가. 저마다의 삶은 모두가 그렇듯 스스로 돋아나고, 자라나는데 세상은 이처럼 채워지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시상을 어렵게 떠올리고 쓰는 사람이 적어지는 것처럼 삶을 아름답게 떠올리고 써내려 가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탓이 아닐까. 그래도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있더라도, 살아서 만나기를.
악의는 연기처럼 피어나 세상을 어지럽힌다. 개인의 삶을 흔들고 때때로 세상을 무력하게 옥죈다. 그럼에도 아직 세상이 살만하다 말할 수 있는 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몰래 자라나는 선의 덕분이다. 쉽게 피어나고 흩어져 나가는 악의와 달리 선의는 조심스럽게 피어나 눈에 띄지 않게 자라난 뒤, 세상을 치장한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바로 그 선의에 관한 이야기다. 선의에서 비롯된 현실의 사연은 텍스트로 옮겨진 뒤, 이미지로 재현된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실제 미식축구의 경기 장면과 이를 설명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미식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쿼터백(Quarter Back)이다. 각팀에 자리한 쿼터백의 전술을 통해 자신의 러닝백을 터치라인에 접근시키느냐, 상대의 러닝백을 터치라인으로부터 밀어내느냐, 에 따라서 승운이 갈리는 게임이다. 전진패스가 불가능한 미식축구에서 득점을 올리기 위해서는 상대 선수의 저돌적인 태클을 피해 공(pigskin)을 안고 터치라인으로 돌진해서 터치다운을 이루기까지의 모든 전술을 지시하는 쿼터백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그만큼 쿼터백의 보호도 중요하다. 미식축구 프로리그(NFL)에서 쿼터백 다음으로 레프트 태클(Left Tackle)이 고액연봉을 받는 것도 그 덕분이다. 레프트 태클의 임무는 바로 그 쿼터백의 보호다. 쿼터백을 향해 태클을 걸 상대 선수들의 진로를 차단하고 쿼터백의 진로와 시야를 여는 것이 바로 레프트 태클의 임무다. “모든 주부들이 알겠지만 첫째로 돈이 많이 드는 곳이 주택융자금이라면 두 번째는 보험료죠.” 산드라 블록의 내레이션은 미식축구에서 쿼터백과 레프트 태클이 차지하는 포지션의 비중을 명확하게 설명한다.
<블라인드 사이드>의 오프닝 시퀀스는 두 가지 기능성을 품고 있다. 만약 미식축구의 룰을 모르는 관객이라고 해도 그 오프닝 시퀀스를 통과한 관객이라면 <블라인드 사이드>가 묘사하는 미식축구 장면에서 고개를 갸우뚱할 일은 없을 것이다. 동시에 이는 이 영화의지향점으로 안내하는 일종의 팁이다. 영화의 타이틀이기도 한 <블라인드 사이드 Blind side>는 중의적인 의미를 품었다. 미식축구 경기장 내에서 레프트 태클이 보호해야 할 쿼터백의 ‘사각지대’를 의미하기도 하고, 다른 의미에서는 우리가 접근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선의의 ‘사각지대’를 의미한다.
결손가정에서 자라나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한 155kg의 거구 마이클 오어(퀸튼 아론)는 리 앤(산드라 블록)을 통해 부유한 투오이 가족과 함께 생활하게 되며 이를 통해 삶의 기회를 열어나간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쿼터백이 터치라인을 향해 팀을 전진시키듯, 정해진 결말을 향해 전진해 나가는 영화이자 단순명료한 룰처럼 명확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영화다. 중요한 건 단순히 그 결말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그 결말의 의미를 명확히 다져나가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이 터치라인이라면, 그 결말에서 얻어져야 할 의미는 터치다운이다. 미식축구가 터치다운을 통해 승패를 가늠하는 게임이듯, <블라인드 사이드>의 성패도 실화가 품은 의미를 영화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영화인 셈이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마이클과 투오이 가족, 그 중에서도 리 앤과의 관계 묘사에 있어서 인상적인 감상을 끌어낸다. 부유한 백인 가정이 열악한 환경에 놓인 흑인 소년을 자신의 울타리로 편입시켜 그가 품은 가능성을 발굴하고, 그의 인생을 보다 나은 궤도에 올려놓는다. 이 모든 과정의 근거는 리 앤의 선의로서 설명되며 이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가치관 안에서 이해될만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블라인드 사이드>는 단순히 그 선의를 있는 자의 여유 안에서 해석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 선의가 어디서 비롯되고 발전해나갈 수 있었는가의 문제다. 단순히 ‘봉사활동’과 같은 의무적인 행위와는 구별될만한 지점이다. 이런 묘사가 <블라인드 사이드>를 드라마틱한 재현 드라마의 수준을 넘어 실화에 담긴 진심을 포착하고 그 실존적인 감정의 원형을 스크린에 덧입히는데 성공한 작품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사실상 마이클과 리 앤의 관계는 명확하다. 리 앤은 베풀고, 마이클은 받는다. 이는 표면적으로 가진 자가 나누고, 갖지 못한 자가 받는, 강자와 약자라는 구도와 유사한 일방향적인 소통의 관계에 가깝다. 하지만 <블라인드 사이드>는 단순히 선의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의가 낳은 관계의 소통과 발전적 가치를 묘사하는 영화다. 마이클에 대한 리 앤의 헌신이 동정의 수순을 넘어 소통의 관계로 거듭날 때 삶의 의미는 확장되고 진심은 체온을 얻는다. 리 앤과 마이클은 테네시 주의 멤피스에 거주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리 앤은 마이클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이 보지 못했던 사각지대를 깨닫게 된다. 마이클은 리 앤을 통해 자신이 꿈꾸지 못했던 사각지대의 희망을 품게 된다. 마이클과 리 앤은 서로에게 있어서 ‘블라인드 사이드’를 열어주는 관계다. 결국 리 앤이 마이클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마이클 역시 리 앤의 삶을 변하게 만든다.
리 앤의 선의가 마이클에게 통할 수 있는 건 리 앤의 선의가 헌신적이기 이전에 마이클이 그 선의를 받아들일만한 자격이 되는 인물이자 선의가 통할 수 있는 선의를 지닌 인물인 까닭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블라인드 사이드>에서 선의가 위협받는 건 당사자가 아닌 제3의 인물들을 통해서다. 당사자들의 진심은 타인의 의심을 통해 흔들리거나 위협받지만 결과적으로 그 선의의 가치를 보존하는 건 당사자들의 진심에 있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선의가 살아남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작품이자 이를 통해 선의의 가치에 대해서 설득한다. 선의를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건 결국 선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개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며 그런 개인이 모인 사회에서 선의의 가능성은 보다 높은 생존 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그렇게 선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의식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셈이다. 진심이 담긴 선의가 살아남듯, 드라마를 살리는 것도 그 진심이다.
쿼터백의 지시에 따라 모든 선수들이 터치다운의 활로를 뚫어내는 것처럼, <블라인드 사이드> 역시 실화가 품은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크고 작은 요소들의 공헌도가 돋보이는 영화다. 간결하고 매끄럽게 이어지는 내러티브는 진심을 담아내기 좋은 형태로서 완성됐다. 저마다 적절한 감정의 깊이를 자아내고 관계의 너비를 구축하는 배우들의 앙상블도 좋은 감상을 부른다. 특히 최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산드라 블록은 (그 수상자격에 대한 의심 따위는 상관 없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완성한다. 무엇보다도 <블라인드 사이드>는 선의의 재현을 넘어 보존이란 측면에서 보다 높은 가치를 품고 있다. 선의는 이렇게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가 되어 감동을 보존한다. 이는 우리에게 선의의 발굴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설득하는 동시에 그 가치의 보존이 영화라는 매체의 가치를 증명하는 또 하나의 방식임을 증명한다.
그녀는 인형이다. 다만 순수한 동심을 배려하기 위해 태어난 인형이 아니다. 그녀는 성인 남성을 위해 마련된 인형이다. 보다 직접적으로 설명하자면 성인 남성의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마련된 성인 용품이다. 흔히 말하는 섹스돌(sex doll)에 가까운 공기인형(air doll)이다. 물론 인형에게 운명이나 인생이란 단어는 마땅치 않다. 그렇기에 인형의 용도를 가혹하다 설명하는 것도 마뜩찮은 일이다. 일반적인 상식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공기인형>에서의 인형만큼은 운명이나 인생이란 단어를 동원해야 한다. <공기인형>은 사람의 마음을 얻게 된 인형에 관한 영화이므로. 이는 <공기인형>이 묘사하는 세계의 정서 안에서 분명 역설적인 감상을 부를 만한 것이다. 마음을 나누지 못하는 인간들의 세상에서, 마음이란 것 자체를 담아낼 수 없는 텅 빈 그릇이 된 인간들의 세계에서, 되레 마음을 얻게 되버린 인형의 운명이라니, 분명 역설적이다.
노조미(배두나)는 웨이터로 일하는 독신남 히데오(이타오 이츠지)가 소유한 인형이다. 그는 인형을 마치 자신의 애인처럼 대하며 온갖 정성을 다하고 자신의 성욕을 해결한다. 인형은 결국 마음을 빙자한 인간의 소유물로서 행위의 대상에 불과하다. 대상화된 물체에 불과하다. 하지만 주인이 집을 비우면 인형은 살아난다. 주인이 매만진대로 죽은 듯이 누워있던 인형이 일어나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며, 말을 배우고, 행동을 익힌다. 구체 관절로 인해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눈에 띄게 움직이지만 인형은 점차 사고하며 세상을 관찰한다. 그리고 마음을 얻는다. 그 마음이란 우리가 익히 말해온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사랑이 인형을 욕망하게 만든다. 우연히 들른 비디오샵에서 만난 직원 준이치(아라타)를 보고 감정을 얻게 된다.
고레이다 히로카즈는 언제나 잔잔한 수면처럼 평온한 표정을 지닌 풍경을 전시한다. 하지만 그 풍경의 수심 밑바닥에는 고도의 갈등과 소통의 불화가 켜켜이 쌓여 암초처럼 머리를 내민 부조리들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종종 평온한 현실의 풍경 위로 머리를 내민 부조리들은 어느 개인의 삶을 좌초시키거나 소통을 막아서고 서로 선회하게 만든다. 밀도는 변하지 않지만 온도가 변한다. 그 안온한 풍경 뒤로 내면의 갈등이 첨예하게 도드라진다. 대표작이라 할만한 <아무도 모른다>를 비롯해 근작인 <걸어도 걸어도>까지, 고레이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은 표정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그 틈새로 새어나오는 이상 체온의 발화점을 색출해낸다.
<공기인형>은 인형이라는 이방인의 관점을 빌려 인간들의 세계를 관찰해내고 진단하는 영화다. 도쿄라는 특정한 지정학을 배경으로 두르고 있으며 그 환경이 연출하는 갖가지 특이점들을 묘사하고 있지만 굳이 <공기인형>이 묘사해내는 모든 병리학적인 풍경들을 굳이 도쿄라는 지정학에 매몰시킬 필요는 없다. 로케이션의 풍경은 이질적이되, 그 안에서 발생하는 감정적 양태는 현대 도시라는 보편적 정서 속에서 일반적인 것이다. 노조미가 관찰하고 접촉하는 도쿄의 사람들에게 내재된 상실감이나 공허함은 익히 보편적인 현대인들의 감정적 재해나 다름없다. <공기인형>은 인형이라는 이방인의 눈은 익숙한 풍경들을 낯설게 재현하는 프리즘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공기인형>에서 인형이란 세상을 적나라하게 바라보는 눈이자 그 세상을 채운 다수의 사람들의 곁에 선 대조군의 역할로서 유효하다.
부자연스러운 인형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서 감상의 특이점을 확보해낸다. 시간의 흐름과 경험의 축적 속에서 변화하는 인형의 움직임과 일상적 태도를 관찰하는 건 그 자체로서 흥미롭다. 하지만 <공기인형>이 묘사하는 세계관의 진풍경은 진부한 측면이 있다. 히끼꼬모리를 비롯해, 변태적인 성욕자, 노쇠한 늙은이, 외모에 예민한 여인 등, <공기인형>에서 인형이 마주치고 상대하는 인간들의 모습이란 하나같이 상징적인 나열의 의미를 품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풍경은 익히 진부하다. 익히 현실적인 문제들을 품고 있지만 그 특수한 개별적 이미지들의 합산으로 완성된 결과값은 그만큼의 의도에 부합될만한 의미를 전하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스펙트럼의 너비보다도 프리즘의 형태가 흥미롭다는 건 <공기인형>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하지만 <공기인형>은 단지 그 세계를 중계하는,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활보해 나가는 공기인형의 형태만으로도 인상적인 작품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인형의 관점을 통해 현대인간들의 공허를 관통해 나가는 <공기인형>의 표면적 의도는 해석의 수순으로 넘어갈 필요 없이 관찰의 수순에서 해결될 만큼 영화의 표면을 떠다니는 공기의 입자와 같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의도의 깊이를 압도하는 형태적인 이미지가 두드러지는 영화에서 그 형태의 완성을 가늠하는 건 <공기인형>에서 중요한 대목이나 다름없다. 공기로 채워진 노조미의 반투명한 비닐 재질의 몸이 빛을 반투명하게 관통하고 이를 노조미가 관찰할 때, 그 이미지 자체만으로도 영화는 비범해진다.
무엇보다도 공기를 채우며 일상을 거닐던 인형이 자신의 몸을 타인의 숨으로 채운 뒤, 그 숨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낼 때, <공기인형>이 나열한 군상의 표정을 동원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의미는 명확해진다. 타인의 숨결을 통해 생동하는 삶이란 이처럼 아름답고 애처롭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아름답고 애처로운 삶으로부터 도피할 때, 인형이 그 삶을 선택함으로서 지금의 세계와 그 안의 사람들이 마주한 공허의 너비가 실체를 드러낸다. <공기인형>은 단순히 멜로영화라는 장르적 평가 안에서도 상당히 이례적이고 독자적인 성취를 이룬 영화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꿈꾸면서도 그 비극적 종결을 예감하지도 못한 채 자신의 상식 안에서 마음을 쏟아내고 이를 통해 비극을 체감하는 인형은 그 담담한 표정을 통해 되레 그 현상적 파국의 너비가 품은 감정적 여운의 가능성을 마음껏 확장한다.
무엇보다도 <공기인형>은 배두나가 연기한 공기인형의 육체만으로도 인상적인 작품이다. 배두나는 <공기인형>의 충분조건이 아닌, 필요조건으로서, 그 존재 자체로서 영화를 이룬다고 할만한 연기를 선보인다. 배두나의 연기 자체의 탁월함은 물론이고, 인형이라는 이방인으로서 존재하는 대상이 배두나라는 비일본인의 신분으로서 연기된다는 점만으로도 그것을 관찰하는 이에게 특별한 감상을 부른다. 평온한 표정으로 체온을 연출하지만 냉정한 낯빛으로 세계의 환부를 적출하는 고레이다 히로카즈가 <공기인형>에서 배두나를 선택했다는 것만으로도 <공기인형>은 이미 탁월한 가능성을 품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배두나는 단순히 육체의 움직임만으로도 공허한 세상을 채우는 인형의 꿈을 생동감 있는 현실로 승화시킨다.
제우스가 만들어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올림푸스의 신들도 욕망하는 존재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신의 군상이란 현대적 의미에서 당시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구적 세계관 속의 가공적인 캐릭터에 가까운 것이다. 곧 그리스 신화란 오늘날에 있어서 내러티브가 존재하는 판타지의 소스로서 유용하다. 인간을 탄생시켰다지만, 인간에 의해 창작되었고, 인간을 지배한다지만, 인간에 의해 완성된, 인간사의 또 다른 판본이나 다름없다. 특히나 창작력의 고갈에 다다를 정도로 컨텐츠의 소비가 극대화되고 리메이크가 득세하는 요즘의 시대에서 그리스 신화와 같이 방대한 세계관은 분명 아이템에 목마른 창작자들의 구미를 당길만한 화수분의 세계일 것이다.
1981년에 개봉된 <타이탄 족의 멸망 Clasf of the Titans>을 리메이크한 <타이탄 Clash of the Titans>은 시대의 변화만큼이나 영상기술이 진보했음을 뽐내는 작품이다. 원작이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스톱모션 기법을 활용하며 눈속임에 성공했던 것과 달리 근작은 근사한 CG를 동원하며 비현실성을 현실감 있게 표현해내는데 성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타이탄>이 원작을 보다 근사한 이미지로 재활용하는 작품으로서 유효한 것만은 아니다. <타이탄>은 원작을 비롯해서 그리스 신화의 내러티브 자체에 일부 변형을 시도하고, 이를 통해 근본적인 메시지를 얹어내려 한다. 그리스 신화 가운데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스만큼이나 잘 알려진 영웅 페르세우스(샘 워싱턴)에 관한 서사를 스크린에 펼쳐낸 원작처럼 <타이탄> 역시 페르세우스의 영웅담을 현대에 재생한다. 다만 신화의 플롯을 충실히 재현하는 원작과 달리 <타이탄>은 그 플롯을 활용하되 재가공한 뒤, 재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신과 인간의 혼혈아인 반신반인 ‘데미갓’ 페르세우스는 제우스(리암 니슨)로부터 물려받은 혈통을 범상한 재능이 아닌 저주 받은 운명처럼 여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망친 신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하데스(랄프 파인즈)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자신에게 닥쳐오는 운명의 과업들을 하나씩 헤쳐나간다. <타이탄>은 마치 <반지의 제왕>과 <스타워즈>를 비롯해서 갖가지 영웅의 성장물을 뒤섞은 클리셰 범벅의 영화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 영화에 반영된 것이 그리스 신화란 점을 염두에 둔다면 앞선 작품들의 연관성을 비교하는 건 딱히 효과적인 설명이 될 수 없다. 그리스 신화야말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서사에 깊게 관여한 스토리텔링의 원형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타이탄>은 페르세우스의 영웅담 가운데 중요한 맥락들을 원형에 가깝게 묘사하면서도 그 의미를 조금씩 변주한다. 메두사의 목을 베고, 페가수스를 타고 하늘을 날며, <타이탄>에서는 크라켄이라 소개되는 괴물을 물리치고 안드로메다 공주를 구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모든 에피소드는 페르세우스를 장식하는 무용담으로서 기능을 국한하지 않는다. <타이탄>은 마치 헤브라이즘에 저항하는 헬레니즘적인 영화처럼 보인다. 신의 폭정에 저항하는 인간들의 세계에서 신의 피를 물려받은 페르세우스가 그들의 구원자로서 활약하는 과정은 영웅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동시에 휴머니즘의 의미를 역설한다. <타이탄>이 비범한 일관성을 완벽하게 유지하는 영화라고 말하기란 어렵다. 캐릭터의 감정이나 태도는 종종 엇나가거나 방향을 잃고 그 진전을 무시한 채 무리한 선회를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타이탄>은 재능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천부적으로 대단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그 재능을 경멸하는 건 끔찍한 낭비라는 것을, 그리고 그 재능의 활용이 공공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이는 재능의 가치 자체에 대한 설득에 가깝다.
3D 비주얼을 내세우고 있지만 <타이탄>은 굳이 3D로 관람할 이유가 없는 영화다. 편광안경으로 인해 전반적인 색감이 훼손당하는 동시에 3D 입체효과가 이 영화를 유니크하게 만들 만한 뚜렷한 기능적 값어치를 해내지 못하고 있다. 물론 <타이탄>이 만들어내는 그리스 신화의 이미지들은 (종종 유치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괜찮은 볼거리가 된다. 사막에서의 전갈과의 전투나 메두사와의 대결 신을 비롯해서 크라켄이 등장하는 후반부 신은 액션 블록버스터로서 강력한 한 방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적절하다. 최근 할리우드의 블루칩으로 떠오르는 샘 워싱턴은 터프하면서도 강직한 영웅적 면모를 온 몸으로 드러낸다. 신의 세계에서 영웅이 된 인간의 활약상은 비주얼의 성과와 함께 텍스트로서의 흥미를 이끌어낸다. 그리스 신화가 현대에서 오락적으로 유용하다는 걸 증명한다고 할까.
2003년 3월 19일, ‘충격과 공포’라는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미군은 전폭기를 동원해 바그다드 상공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했다. 미군의 총공세로 바그다드는 초토화됐고 미군의 진격으로 도시는 점령됐다. 미국은 ‘대량살상무기 보유’를 명목으로 이라크에 무력을 행사했고, 정부를 무력화시켰다. 부시는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했지만 상황은 끝나지 않았으며 애초에 그것은 전쟁처럼 시작되지도 않았다. 미국이 주장했던 대량살상무기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그 허구적 주장이 대량살상의 참상을 만들어냈을 뿐이다.<그린 존>은 명확하게 그날을 재현하는 데서 출발한다. <본 슈프리머시>와 <본 얼티메이텀>을 연출하며 확고한 팬덤을 형성한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다시 한번 맷 데이먼을 앞세워 ‘진짜’ 미국의 치부를 들춘다.
로이 밀러(맷 데이먼)는 제이슨 본의 이란성 쌍둥이 같은, 다르지만 유사한판본이다. 그는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를 수색하는 ‘MET-D’ 팀에서 ‘국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미육군 소위다. 정부의 주장대로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음을 의심치 않는 그는 매번 ‘정보와 현장 상황이 다른’ 임무수행 과정을 겪어나가며 점차 의혹을 품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종의 확신을 통해 상부에 이의를 제기하는 그에게 돌아오는 건 ‘이행할 뿐, 분석의 의무가 없다는’ 상관의 냉소적인 답변 뿐이다. 하지만 밀러가 품은 의혹은 더욱 짙어지고 이를 눈여겨보던 CIA요원 마틴 브라운(브렌단 글리슨)은 그에게 모종의 제안을 던지고 진실의 은폐를 도모하는 국방부 요원 파운드스톤(그랙 키니어)이 그들의 행보를 주시하기 시작한다.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했다는 미국의 주장은 어디에서도 증명되지 않았다. 명백하게 드러난 사실 아래 명분은 온전히 퇴색됐다. 9.11 테러가 만들어낸 트라우마로부터 달아나듯 이라크를 공격하고 스스로를 위무하듯 그승리를 자축하던 미국은 그 뒤로 깊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수렁에 빠졌다.그리고포스트 9.11이후, 그로부터 잉태된 파괴적징후는 수많은 영화들을 통해 동어반복적으로 지적되고 보다 넓은 범위로 확장되어왔다. 그런 면에서 사실그모든 징후들의 시발점이 된 그날을 되새김질하며 그 뒤에 자리한 음모론을 폭로하는 건 분명 새삼스러운 일이다. 이미 지난 9.11테러와이라크전으로부터 생산된징후들은 수 차례에 걸쳐 관찰되고 진단되어 왔으며 그 재현 방식 또한 다양한 형식을 빌려 보다 너른 텍스트로 확장돼 왔기 때문이다.
미군의 이라크 점령 이후로 7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세계평화와 독재의 타도를 위한 이라크 점령을 주장한 미국의 해명을 여전히 무색하게 만드는 사안이다. 이라크 전쟁은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는 미국의 ‘세계평화’적 결의가 아닌 ‘석유전쟁’의 일환이라는 것도 공공연하게 제기된 진실이나 다름없다. ‘대량살상무기’의 제거가 아닌 ‘석유’의 수급을 위해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했다는 설은 공공연한 사실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를 끊임없이 부인하는 당사자들이 존재하는 한, 사실은 사실로서 확증되지 못한 가설에 불과할 뿐이다. <그린 존>이 그려내는 풍경은 분명 새삼스럽지만 그 풍경 너머의 현상은 여전히 유효한 사건이다. 폴 그린그래스는 <그린 존>을 통해 진지하고 심각하게 되묻고 있다. 2003년에 벌어진 참상은 2010년의 현실에서도 미결의 과제인 것이다.
폴 그린그래스는 현장감을 연출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자랑하는 감독이다. 두 편의 <본> 시리즈를 비롯해서 <플라이트 93>과 <블러디 선데이>를 통해 선사한 현장의 이미지는 가히 체험적인 감상을 제공한다. 역동적인 핸드헬드와 긴박감을 제공하는 빠른 컷의 전환, 그리고 적절하게 치고 빠지며 찰나의 몰입을 도모하는 줌 인의 타이밍. 폴 그린그래스는 특유의 장기를 활용해 <그린 존>에서 전장의 사실감을 극대화시킨다. 미군의 바그다드 폭격신이 등장하는 도입부부터 대량살상무기 수색에 나서는 미군의 시가전을 다루는 초반부부터 현장감을 극대화시킨 연출을 통해 극에 대한 몰입도를 극대화시킨다.
<그린 존>을 통해 사실적인 전장을 묘사하는 폴 그린그래스가 목표한 것이 단순히 그 현장성의 재현이었다 해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그린 존>은 그 재현 자체만으로도 다이렉트한 쾌감과 명확한 감상을 발생시키는 작품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린 존>의 야심은 그 현장감의 재현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린 존>이 재현하는 긴박한 현장감은 결과적으로 그 현장의 기저에 웅크리고 있는 음모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한 키워드나 다름없다. 관객은 <그린 존>이 부여하는 리얼리즘의 시선을 통해 진짜 진실의 너비를 함께 목격한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볼모로 둔 그 참혹한 현장의 진실을 향해 날렵하게 움직이되 첨예한 시선을 유지해낸다. 위기일발의 전장을 누비는 미군들과 그 안에서 매일같이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는 이라크인들의 참상과 대비되는 ‘그린 존’의 과소비적인 정경은 이 세계의 불편한 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뼈 있는’ 풍경이다. 정의와 평화의 이름을 내건 강대국의 대의적 논리가 세계의 질서를 유린하고 인간 개개인의 삶을 농락하는 소수 권력자의 야욕임이 고발한다.
<본> 시리즈가 그랬던 것처럼, <그린 존>은 그 모든 부조리가 잉태되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부조리의 청산을 주장하고설득한다. 음모론의 대가토니 길로이의 각본에 비해 <그린 존>이 설계한 음모론의 그물망은 보다 평면적이지만 폴 그린그래스의 사실적인 연출력과 맷 데이먼의 우직한 표정은 진실의 무게감을 훼손하지 않은 채 진실로 전진하는 날카로운 눈과 단단한 두 다리를마련했다. 이라크의 현실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 시작점이다. 폴 그린그래스는 <본>시리즈를 통해 말했던 것처럼 모든 딜레마의 출발점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그린 존>을 통해 첨언하고 있다.첫 단추를 잘못 채운 누군가가 이를 바로잡지 못할 때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정확하게 다시채워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린 존>은바로 그 의미의 원점을명확하고 통쾌하게 관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