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갈라지다 이내 꺼진다. 달아날 곳조차 없을 정도로 지반 전체가 요동을 친다. 캘리포니아주 전체가 마치 기울어진 접시 위의 팬케이크처럼 바다 속으로 잠겨버린다. 화산도 폭발하고, 쓰나미까지 밀려온다. 지구상의 대륙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사람이 발붙이고 설 땅이 없어진다. 말 그대로 전지구적 재앙이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2012>는 재난이란 이름으로 명명되는 이미지들의 합집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재앙 블록버스터의 총아다. 재난이라면 보여줄 만큼 보여준 할리우드가 아예 끝장을 보자는 심산으로 영화를 제작한 것마냥 보일 정도로 막대한 규모를 전시하는, 진정한 블록버스터다.
지구의 멸망, 더 나아가서 인류의 멸망을 그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2012>는 바티칸 궁전을 붕괴시키고 리우데자네이루의 그리스도상을 무너뜨리는 등, 전세계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재난적 이미지를 전시해내며 묵시록적 기운을 과시한다. 재난 블록버스터는 현실에서 비극으로 점철될 만한 재앙을 스크린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만듦으로써 엔터테인먼트적 쾌감을 발생시키는 오락적 결과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2>는 분명 대단한 볼거리임에 틀림없다. 눈 앞에 생생하게 전시되는 파괴적인 장관이 즐비한 <2012>는 단지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상을 지배할만한 거대한 시퀀스를 품고 있다.
사실상 <2012>에서 드라마란 재난의 이미지를 연결하기 위한 교각이나 다름없다. 예감하지 못했던 재난의 한가운데 놓이게 된 인간들은 생존을 위해 달리고 비행하며 헤엄친다. 물론 그 이전에 재앙을 미리 점지하는 과학자들과 이를 보고받는 세계적인 권력가들의 침통한 표정을 통해 묵시록적인 엄숙함을 요구하기도 한다. 어차피 <2012>가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즐기기 위한 킬링타임 무비라는 것을 인지한 관객에게 <2012>에서 이미지 이외의 영역을 차지하는 요소들의 역할이란 그 스펙터클을 효과적으로 엄호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2012>는 압도적인 이미지의 너비에 비해 감정적으로 와 닿는 충격적 강도가 기이할 정도로 얕은 영화다.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2012>는 규모 이외에 내세울 것이 없는 볼거리에 불과한 탓이다.
재앙으로부터 탈출하는 인물들은 생존을 위한 절박함보다도 되레 롤러코스터를 타는 이의 아찔함처럼 감정을 표출한다. 그것이 때때로 재앙에 놓인 이들의 사실적 비극을 간과하게 만든다. 재앙 앞에서 생존적 본능을 곤두세우기보단 비범한 휴머니즘을 역설한다. 그것은 감동적이라기 보단 허세적이다.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도는 문제가 아니다. 단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허술한 탓이다. 디테일한 CG를 통해 실물감이 대단한 재앙적 이미지와 달리 재앙을 목전에 두고 대의를 주창하는 인물들의 뻣뻣함이 스펙터클마저 느슨하게 만든다. 서스펜스적인 연출 감각도 부재하다. <2012>의 재난적 광경을 지켜본다는 건 말 그대로 지켜보는 것에 불과하다. 그 상황이 야기할만한 긴장감이 좀처럼 객석으로 전이되지 못하고 스크린 안에서 증발된다. 단지 전인류적 위기와 다수의 죽음을 목격하고 있다는 침통한 감상이 영화와 무관하게 개인의 심상을 지배하고 말 뿐이다.
<투모로우>를 통해 전지구적 재앙을 그렸던 롤랜드 에머리히는 <2012>를 통해 보다 파괴적인 인류적 미래를 그려낸다. <2012>는 어쩌면 대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할리우드의 위력을 대변하는 과시적 결과물이나 다름없다. 또한 그 동안 할리우드가 재난 블록버스터라는 이름으로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을 전시하는 욕망의 분출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2012>는 말 그대로 그 이상의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영화다. 이미 재난 블록버스터라는 이름 안에서 이뤄진 모든 것들을 조합해놓은 편집영상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거대한 몸집에 비해 두뇌가 작은 공룡들처럼 창의력도, 상상력도 부족하다. 물론 재난의 종합전시관이란 측면에서 볼거리는 분명하다. 결론은 (어떤 식이든 <2012>를 보고야 말 관객에게) 스크린이 큰 상영관이 진리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그건 몰라도 이건 확실하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디지털 캐릭터의 꿈을 꾼다. <폴라 익스프레스>이후로 디지털 캐릭터와 3D비주얼에 올인 중인 로버트 저메키스는 북유럽 영웅 서사시를 디지털 이미지로 구현한 <베오울프>에 이어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을 디지털 부호로 재생시킨다. 지독한 구두쇠로 악명을 떨치는 스크루지(짐 캐리)가 자신이 혐오하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7년 전 사별한 동업자 말리를 만나게 되고 그 이후로 3명의 유령을 만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게 된다는 플롯은 저메키스를 통해 환상적인 디자인을 입고 재생된다. 배우의 실제적 외모를 스크린의 디지털 캐릭터에게 이양하려는 것처럼 보였던 <베오울프>의 편집증적인 시도와 달리 <크리스마스 캐롤>은 디지털 캐릭터의 특성 안에 실제 배우의 외모를 함몰시켜버린다.
전자가 디지털 부호를 통해 현실을 가상에 안착시키기 위한 극사실적인 전이적 실험이었다면 후자는 디지털 부호를 통해 현실적 형태를 지워내고 새롭게 창조된 가상적 리얼리티를 극대화시킨 변환적 실험에 가깝다. 전자가 재생을 위한 수단으로서 기술을 활용했다면 후자는 창조를 위한 수단으로서 기술을 활용한 셈이다. 이는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을 만한 성공적 방식이다. 디지털 캐릭터에 대한 혐오를 의미하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조차도 음울한 영화의 톤에 어울리는 효과처럼 인식될 정도로 <크리스마스 캐롤>은 허구적인 가상성에 어울리는 디지털 캐릭터의 음산함을 구축하고 이미지의 입체적 환상성을 적절히 활용한다. 다만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3D비주얼이 필수적인 의상인가를 염두에 둔다면 그것이 때때로 과욕적 활용처럼 보인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때때로 입체적 이미지로서 탁월한 감상을 부여할만한 장면들이 존재하지만 그 전체적인 형태가 과도한 시각적 피로감과 맞바꿀 만큼의 기회비용을 설득하는 것으로 가득 채워진 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로버트 저메키스의 이상이 단순히 <크리스마스 캐롤>에 대한 맞춤형 효과로서 3D 비주얼과 디지털 캐릭터를 활용했을까, 라는 의문도 동원될 필요하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실험은 여전히 과도기이며 때때로 그것이 집착을 넘어서는 발전적 지향이라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답하기 쉽지 않다. 결과적으로 그 도전적 의지를 존중할 수 있는가, 라는 지점에서 로버트 저메키스의 꿈 역시도 판단가치를 얻을 만한 산물인 셈이다. 물론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눈에 띄는 건 짐 캐리다. 그는 디지털 캐릭터와 3D비주얼의 숲 속에서도 유효한 아날로그적 기본을 설득한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은 진보보다도 답보란 측면에서 유효한 몽상가의 꿈인 셈이다.
<어떤 방문>은 매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기획하는 ‘디지털 삼인삼색’의 2009년 판본이다. 일본의 가와세 나오미와 한국의 홍상수, 필리핀의 라브 디아즈가 참여한 이번 시리즈는 방문이란 소재를 최소한의 공통분모로 둔, 세 감독의 시선과 역량이 차별적으로 반영된 세계관의 합집합이나 다름없다. 가와세 나오미의 <코마>와 홍상수의 <첩첩산중>, 라브 디아즈의 <나비들에겐 기억이 없다>까지 세 단편을 나열한 단편 옴니버스 <어떤 방문>은 그만큼 작품간의 감상적 편차가 큰 작품인 셈. 세 작품 중 유일하게 핸드헬드가 적극 활용된 가와세 나오미의 <코마>는 전반적으로 느슨하게 진행되는 이야기 흐름 끝에 멜로적 심상이 깊게 걸리는 작품으로서 깊은 여운을 남긴다. 아무래도 세 편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영화라 할만한 홍상수의 <첩첩산중>은 홍상수의 영화 가운데 유일하게 여자의 시점과 나레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특이점을 제외하면 여지 없는 홍상수 작품이다. 얽히고 설키는 남녀관계 속에서 속물적 본성과 이중적 태도가 수다스럽고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소동극은 말 그대로 홍상수스럽다. 마지막으로 가장 지난한 감상을 부를 만한 라브 디아즈의 <나비들에겐 기억은 없다>는 척박한 필리핀의 현재적 세태를 반영하듯 롱테이크와 흑백필름의 질감을 통해 지독하게 건조한 정서를 화면에 담아냈다. 디지털이라는 매체적 속성에 대한 탐구와 하나의 소재를 다양한 양식으로 완성한 감독들의 개별적 세계관에 흥미를 느낀다면 수집하고 목격할만한 체험이라 할만하다. 물론 말 그대로 그 반대편에 놓인 관객에겐 일종의 고문이 될 확률도 배제할 수 없겠지만.
햇살이 안온하게 내리쬐는 산뜻한 외관의 풍경과 달리 깊게 그늘지듯 침침한 내부의 정경이 대조적이다. “이런 철창이 있을 곳은 세상에서 2군데 밖에 없다. 동물원과 여기.”대사가 지칭하는 그 ‘여기’란 곳은 바로 교도소다.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교화시켜서 내보내는 곳이기도 하지만 어떤 범죄자는 그곳에서 걸어나갈 수 없다. 교도소는 사형을 집행하는 곳이기도 한 탓이다. 그리고 그곳은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거나, 실행하거나, 확인한 이가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집행자>는 제목 그대로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관들을 중심에 둔 영화다. 사형이라는 소재 내에서 사형수에 대한 인권을 논하기 이전에 그 제도적 행위를 지켜봐야 하고, 실행해야 하고, 확인해야 하는 제3자의 인권을 살핀다. 단순히 사형수에 대한 인륜적인 동정에 천착하지 않고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관들의 심리적 채무와 그 끝에 남겨질 반영구적 상흔을 살핀다. 무엇보다도 <집행자>는 사형이라는 제도의 본질적 문제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작품이다.
사형이라는 제도가 심각한 건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끊음으로써 반인권적인 처벌을 자행한다는 점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그 제도적 차별이 부득이하게 제3자의 심리적 피해를 묵인해버리고 있다는 데서 보다 심각하다. 사형이라는 제도를 결정하는 건 헌법적 약속이지만 결과적으로 대의적 의사에 따른 법치적 행정은 어느 개개인들의 손끝을 통해 이뤄진다. 결과적으로 그 행위에 손을 담근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에 대한 심리적 갈등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셈이다.
그만큼 묵직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고 할만한 <집행자>는 베테랑 교도관과 신참 교도관을 대비시키고, 범죄자에 대한 냉소한 시각과 동정적 시선을 배치함으로써 다양한 프레임을 영화에 장치하고 이를 통해 사건의 양상을 발전시켜나간다. 그 과정에서 체제에 적응해나가는 신참 오재경(윤계상)과 베테랑 배종호(조재현)의 관계는 버디무비를 보는 듯한 흥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체제 속에서 사람의 본성이 어떤 식으로 변질되어가는가라는 고찰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종종 자신이 짊어진 무게감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듯 지나치게 화기애애한 순간을 묘사하기도 하고, 가벼운 웃음을 매복시키기도 하며, 애틋한 감정을 끌어당기기도 한다. 덕분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처럼 어색한 흐름이 발견되기도 하며 불필요하게 확장된 감정적 진화가 감지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집행자>는 소재가 발생시킬 수 있는 다양한 논지들을 단계적으로 나열할 뿐, 창의적인 형태로 발전시켜나가지 못한다. 일차원적인 연극적 상황을 연출해서 단조롭게 의미를 부각시키고 캐릭터를 통해 직설적인 감정을 쏟아내지만 훈육처럼 뻣뻣해서 깊게 마음을 끌어당기거나 흔들어 놓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형을 집행하는 광경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압력은 대단하다. 특히나 사형수 이성환(김재건)과 오랜 벗이 된 김교위(박인환)가 직접 그의 사형집행을 실시하는 순간의 페이소스는 <집행자>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인상적인 감정을 끌어내는 시퀀스라 할만하다. 하지만 그 외에 사족과 같은 서브플롯들은 지나치게 선명해서 되레 균형을 맞추지 못하는 느낌이다. 마치 교도소 안팎의 햇살과 그늘의 경계처럼 연출적 묘미와 의미적 전달을 중화시키지 못한 모양새가 흠이랄까.
플롯을 좀더 과감하게 정리했다거나 인물들의 감정을 지나치게 일반화시키지 않았다면 좀 더 확고하고 흥미로운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이런 사족 같은 감상이 남는 건 결국 어떤 좋은 취지나 의미만으로 영화가 완전해질 수 없다는 문제를 다시 한번 깨닫게 만든다. 좋은 발언만큼이나 좋은 발성도 중요한 법이다.
한류 붐에 편승해 ‘텔레시네마7’이라는 타이틀로 일본 TV방영을 목표로 제작된 7편의 TV영화가 국내 극장에 상영된다. <내눈에 콩깍지>는 그 7편 가운데 첫 번째 주자다. 그 내용인즉,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킹카 훈남인 강태풍(강지환)이 갑작스런 차 사고 후유증으로 일시적인 시각장애를 겪고 덕분에 미의 법칙을 거꾸로 거슬러 (영화적 주장에 의하면) 폭탄과 같은 외모를 지닌 동물잡지기자 왕소중(이지아)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것.
좀처럼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단지 말이 되지 않음을 이유로 지구상의 모든 영화들을 쥐고 흔든다면 실상 남아날 작품이 몇이나 되겠냐는 비약적인 안도감을 안은 채 <내눈에 콩깍지>의 설정을 받아들인다면 못할 것도 없다. 심지어 그 인위적인 뻐드렁니를 앞니에 끼워넣고 주근깨도 좀 찍었다지만 이지아의 외모가 고스란히 보존된 왕소중을 탈레반적 폭탄 취급하는 것도 웃어넘길 수 있다. 동시에 강태풍의 제스처나 대사로부터 넘쳐흐르는 과도한 허세적 태도가 단지 손발이 오그라드는 재미를 의도한 영화적 고의라고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내눈에 콩깍지>는 명백하게 극장용이라 내걸고 티켓값을 요구하기엔 부끄러운 작품이다. 흥미를 자아낼 가능성이 지극히 얕은 사연이 잘게 쪼개지고 늘여뜨려진 형태로 2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사연을 방출하는데 여간 피곤한 느낌이랄까. 단순히 3~4편 정도로 나뉘어서 방영된 형태로서 관람할 수 있었다면 오히려 2시간 동안의 장기전에서 오는 지루함은 덜했을지 모를 일이다. 전반적으로 딱히 흥미롭게 관찰될만한 사건이 부재하며 인물들의 감정적 정리는 설득력이 완벽하게 결여된 느낌이다. 만화적인 캐릭터와 사연은 팬시하지만 그 가벼움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나태하고 안이하다.
일시적인 시각적 장애란 소재도 딱히 설득적이지 않지만 그것을 간과한다 해도 그 너머로부터 진전되는 감정적 갈등과 진화가 좀처럼 설득력 있는 수준을 유지하지 못한다.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민망하게 과장된 대사와 제스처조차도 그 끝에 다다라서는 그냥 손발이 오그라든다. 좀처럼 끝나야 할 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사족이 굴러다닌다. 나름대로 적정량의 역할을 충당한 배우들에게 동정심이 배어날 정도로, 게다가 순차적으로 개봉될 6편의 차기 작품에 대한 불신지옥에 빠질 정도로, 그렇다.
땅이 꺼진다. 화산이 폭발한다. 쓰나미가 밀려온다. 지구 전체가 요동을 친다. 사람이 발붙일 곳은 없다. <2012>는 해볼 만큼 해보다 못해 끝장을 보는 재앙 블록버스터다. 아마 지구에서 재앙이라고 할만한 이미지들은 죄다 나올 거다. 그것도 전세계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시원하고 화끈하게 파괴적 장관들을 그려낸다. 마치 큰 스크린이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라 훈수 두는 것마냥 그렇다. <2012>가 그려내는 무지막지한 이미지는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엄청난 볼거리다. 그럼에도 그것이 심심함을 느끼게 만드는 이유는 <2012>가 규모 외에 내세울 것이 없다는 상대적 초라함 덕분이다. 사실상 <2012>에서 드라마란 거대한 이미지를 이어나가기 위한 교각에 불과하다. 문제는 그 교각이 부실해 다음 이미지로 건너가는 과정이 순탄치 않다는 점이다. 재앙의 주변부에 놓인 캐릭터들은 생존적 리얼리티보다도 휴머니즘을 구현하겠다는 연기적 일념으로 충만하듯 인위적 상황 속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게다가 그 파괴적인 장관들은 볼거리 이상의 긴장감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저 바라만 보게 만들 뿐, 결코 위협적이지 않다. 서스펜스에 대한 연출적 감각이 부재하다. 물론 인류의 멸망적 위기를 관람한다는 건 묘하게 침통한 감상을 부른다. 그건 <2012>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이를 묘사하는 이미지의 우월함 덕분이다. 말 그대로 <2012>는 CG팀의 공헌도가 팔 할인 영화다. 딱히 롤랜드 에머리히를 칭찬할 구석은 많지 않다. 마치 부모 잘 만난 자식의 사치를 보는 것 같다. 돈 있는 할리우드나 되니까 이 정도로 무모한 짓도 가능하단 말이다. 그만큼 그 막대한 자본을 좀 더 현명한 곳에 쓸 수 없었을까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딱히 2시간 40여분에 육박해야 할 만큼 필연성이 느껴지지 않는 스토리는 명백한 필름 낭비다. 다 떠나서 (어차피 볼 당신이) 큰 화면에서 봐야 한다는 건 진리다.
작두 타고, 굿판을 벌이며 온몸으로 귀기를 발산하던 전통무속과 달리 요즘 점집은 캐주얼하고 멀티플렉스적이다. 무당과 타로 마스터가 한 건물에 입주해서 팀웍을 이룬다. <청담보살>은 그런 트렌드를 소재적으로 반영한 로맨틱 코미디물이다. 운명적 배필을 만나야만 삶이 풀린다고 믿는 미녀보살 태랑(박예진)은 비전이 전무해 보이는 백수 승원(임창정)이 자신의 운명적 상대임을 알게 되고 작업(?)에 착수한다. 사실상 과장된 상황극이 주를 이루는 <청담보살>은 연출력이나 개연성보다도 순발력에 의존하는 코미디다. 덕분에 나름대로 진지하게 멜로적 감정에 몰입하는 배우들의 감정은 좀처럼 와 닿지 않으며 전반적인 사연 역시 유치하게 건들거리는 탓에 로맨스 자체가 사족같다. 재치를 발휘하는 배우들의 애드립에 의해 유머가 작동하지만 그 찰나를 벗어나지 않는다. 덕분에 운명적인 상대에 천착하던 보살이 결국 그 운명을 스스로 극복하게 된다는 외피적 설정에 진지하게 접근하는 후반부는 온전히 넌센스다. 단지 몇몇 배우들의 애드립에 만족할 수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못한 관객에게 2시간 여의 러닝타임은 좀 길어 보인다.
사형은 그 제도적 처벌이 부득이하게 제3자의 심리적 피해를 묵인하고 있다는 데서 보다 심각한 문제를 품고 있다. 사형이라는 제도의 존폐가 심각하게 고려돼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형수에 대한 인권을 논하기 이전에 그 제도적 행위를 지켜봐야 하고, 실행해야 하고, 확인해야 하는 3자의 인권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집행자>는 분명 특별한, 그리고 중요한 시각을 제시하는 영화다. 단순히 사형수에 대한 인륜적 동정에서 벗어나 사형을 집행하는 자들에 대한 인권을 조명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묵직한 소재를 다루는 <집행자>는 종종 그 무게감을 떨쳐내려는 듯 화기애애한 순간을 묘사하기도 하고 애틋한 감정을 끌어당기기도 한다. 덕분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처럼 과한 웃음을 짊어지기도 하고, 지나치게 의미를 확장하는 상황으로 이야기를 벌려나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되레 영화는 상투적이다. 무언가 해보려고 애쓰기 때문에 오히려 식상해진다. <집행자>는 분명 의미 있는 영화다. 동시에 체제에 적응해가는 신참과 그 체제에 신참을 훈육시키는 베테랑의 관계가 흥미롭게 묘사되는 버디무비적 영화이기도 하다. 단지 교도소 안팎의 햇살과 그늘만큼이나 연출적 묘미와 의미적 전달을 잘 중화시키지 못했다는 게 흠이랄까. 보다 심플하게 서브 플롯을 자제했어야 하거나 인물들의 감정을 지나치게 일반화시키지 않았다면 좀 더 확고하고 흥미로운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이런 사족과 같은 감상이 남는 건 의미만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다.
코끼리를 보고 싶다는 인물의 머리 위 하늘에 코끼리가 날아다닌다. 일순간 망각을 더듬어 기억을 재생하는 인물의 머리 속 두뇌 피질의 형태가 화면에 드러난다. <펜트하우스 코끼리>는 무의식적 추상을 이미지적으로 구체화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점철된 것만 같은 작품이다. <펜트하우스 코끼리>라는 제목에 내포된 허상처럼 영화는 디자인과 인테리어에 속박된 인물들의 공허한 심상을 끊임없이 겉돌아 나간다.
사진작가 현우(장혁)와 성형외과 전문의 민석(조동혁), 그리고 외국계 금융 전문가 진혁(이상우). 유년시절의 추억을 공유한 세 남자를 중심으로 사건을 확대해나가는 영화는 개별적인 사연을 진전시키는 동시에 종합적인 형태로서 사연들을 엮어나간다. 실연의 상처에 시달리는 동시에 코끼리를 찾아 헤매는 현우와 질환적 수준으로 성적 집착과 여성 편력에 빠진 민석, 그리고 12년 간 외국으로 떠났다 친구들 곁으로 돌아와 사랑을 갈구하는 진혁까지, 세 남자의 사연이 평행하게 전시되듯 흘러간다. 그 와중에 남편과 첫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수연(이민정)과 불현듯 등장해 실연당한 현우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정신과 의사 장선생(황우슬혜) 등의 여성캐릭터가 세 남자의 사연에 깊게 연관되어 사건의 형태를 벌려나가기 시작한다.
시쳇말로 시크와 엣지라는 허세적 단어가 떠오를 만큼 스팽글하고 럭셔리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세 남자들은 저마다 여유로운 삶 속에서도 공허와 허무라는 사치를 떠돈다. 텍스트로 기록된 상상적 이미지를 구체화시키듯 직설적으로 시각화된 이미지들이 적나라하게 활용된 <펜트하우스 코끼리>는 말 그대로 인테리어에 공을 들인 작품임에 틀림없다. 중요한 건 그 인테리어적 디자인과 이미지의 기능성이다. <펜트하우스 코끼리>는 그 공들인 디자인과 이미지가 무엇을 위해 영화에서 복무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에 좀처럼 답을 주지 못하는 영화다. 단지 전시적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시종일관 강박적으로 추상(抽象)을 구상(具象)으로 변주해나가는데 치중한다.
동시에 두서 없는 145분 간의 사연은 장황함을 넘어 지난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낭비다. 물질적 욕구가 팽배한 가운데 정신적 허무에 시달리는 오늘날 젊은이의 삶을 그렸다, 라는 박제적인 문구가 떠오르는 영화의 형태는 정작 그 삶의 본질이 무엇을 갈구해야 하는가라는 지표를 드러내지도 못한 채 이미지만 둥둥 띄워 스크린에 드러내기에 급급하다. 흡사 자신의 미술숙제를 엄마에게 자랑하고 싶은 유아적 욕망처럼 칭찬받고 싶어서 안달 난 느낌이랄까. 흡사 영화적 스크린이 아니라 시각디자인 전시장의 쇼윈도 너머에 앉아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이미지적 강박만큼이나 세 인물을 둘러싼 사연의 흐름 역시 허세로 가득하다. 뭔가 비범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정작 잡히는 알맹이는 없다. 구조적으로 불완전하고, 내용적으로 지나치며, 의미적으론 모호하다. 그저 허상에 갇힌 전시적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 채 와 닿지 않는 선문답처럼 코끼리만 찾아 헤맨다.
아이러니한 감상을 부여하는 건, 영화와 무관하게 장자연의 얼굴이다. 대담하고 발칙한 홍보문구 따위가 낚시인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육체적으로 착취되는 캐릭터라 할 수 있는 장자연의 이미지는 살아있는 자의 감상을 숙연하게 만든다. 안타깝게도 유작이 돼버린 이 영화에서 그녀가 남길 이미지들은 좀처럼 안쓰러워 보는 이를 침통하게 만들만한 것이다. 심지어 영화는 때때로 그녀를 비춘 앵글을 낭비적으로 활용하기도 하는데, 구체적으로 그녀의 캐릭터가 자살한 채 욕조에 몸을 누운 시퀀스에서 지나치게 그녀를 앵글에 수집해 넣는지 알 길이 없다. 그 장면을 삭제할 순 없었겠지만 그 이미지가 그렇게나 자주 스크린에 잡혔어야 했을지 모를 일이다. 불순함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그만큼 <펜트하우스 코끼리>는 뭔가를 더 보여주고 싶은 강박에서 허우적거리는 영화일 뿐이란 이야기다. 그 강박이 지나치다. 그리고 지난한 사연은 질식할 만큼 길고 더디다.
결혼을 하루 앞둔 신부가 예기치 않은 죽음에 터진다. 우발적인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된 예비신부 히로코(우에노 주리)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시체를 유기하기로 결심한다. 히로코는 평생 꼴찌로 살아왔다는 열등감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이상형과의 결혼식을 포기할 수 없다. 결국 시체를 트렁크에 담아 집을 나선 히로코는 그 와중에 길에서 빠친코 전단지를 돌리던 코미네(코이데 케이스케)의 차를 탈취해 산에 오르지만 자살을 희망하는 여자 고바야시(키무라 요시노)의 엉뚱한 동행을 받아들인다.
산으로 가는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닌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시종일관 엉뚱한 인물들의 등장을 통해 이야기의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범위로 틀어댄다. 뮤지컬적 특성이 강하게 반영된 도입부 시퀀스를 비롯해 때때로 스릴러나 호러적인 연출이 가미되는 등 다양한 장르적 형태가 순열적으로 전시되는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기본적으로 코미디를 목적으로 둔 산만한 소동극이다. 새로운 삶을 꿈꾸던 여자가 우발적인 사건으로 인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길을 떠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많은 사건을 겪은 뒤 비로소 성장을 맞이한다는 성장담이기도 하며, 새로운 삶을 꿈꾸는 두 여자의 버디무비이자 캐릭터 무비이기도 하다.
두서없이 진전되는 산만한 전개와 과장된 감정을 표출하고 상황을 연출하는 캐릭터들은 고의적으로 의도된 코미디의 양식에 가깝다. 시종일관 비현실적인 태도로 일관되는 상황은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이 현실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품었다는 사실로부터 멀리 달아나기 위한 방편처럼 보일 정도다. 무엇보다도 백치미스러운 캐릭터를 연기하는 우에노 주리의 캐릭터 소화능력은 영화적 과장마저 자연스러운 설정으로 이해시키는 윤활유에 가깝다. 사실상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우에노 주리의 매력에 기대고 있는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낙관에 대한 강박이 지나친 영화다. 소재적으로 <달콤, 살벌한 여인>을, 캐릭터적으로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을 떠올리게 만드는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앞선 두 영화와 마찬가지로 허구적 사연에 현실적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그러나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형식적 열거에 치우친 나머지 본질적인 감정의 밀도를 채우는데 실패한 영화처럼 보인다. 감정이 탈색된 백치미적 사연의 끝에 자리한 성찰적 태도마저도 또 하나의 형식적 나열처럼 보일 뿐, 그에 앞서 전개된 사연의 총합이 이루는 결과적 에너지로서 작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엉뚱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매 시퀀스마다 순간적인 에너지를 발생시키지만 저마다 파편화된 형태로 굴러가는 시퀀스들은 결과적으로 응집된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하고 곧장 휘발되듯 소모된다. 결국 여정의 나열 끝에 걸리는 캐릭터의 성찰은 딱히 인상적인 감상을 남기지 못하고 어색하게 자리할 뿐이다. 좀처럼 와 닿지 못하는 낙관의 비현실성이 마음에 걸린다. 우에노 주리를 비롯해 과장된 상황에 몰입하는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재미는 쏠쏠하다. 결국 그 과장된 상황의 연속적 나열이 부여하는 소동극이 나름의 재미를 부여하지만 전반적인 흐름을 통해 농익어야 할 성찰은 헐겁다. 백치미적인 웃음을 나열하는 것도 좋지만 낙관적 성찰마저 백치미적이라 너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