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데에는. 하지만 내겐 없었다. 혼자 술잔을 기울일만한 이유가. 개인의 취향은 존중한다. 혼자 술을 마시는 게 좋다면야 그러려니. 하지만 나는 역시 모르겠다. 혼자 술을 마시는 게 뭐가 좋은 건지.
혼자서 밥도 잘 먹고, 영화도 잘 보고, 심지어 공연도 잘 보지만 혼자 술을 마실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밥은
먹어야 하고, 영화도 봐야 하고, 공연도 봐야 하지만 술은
마셔야 할 이유가 없었다. 굳이, 혼자서. 술이 마시고 싶은 건,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서, 누군가와 말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가끔씩은 나이가 드니 술 없이
누군가를 만나기가 힘들단 생각이 들어 서글픈 적도 있었다. 그래서 가끔씩은 최선을 다해 술을 만났다. 그래야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났으니까. 덕분에 가끔은 술이 나를
마셔버려서 힘들었고, 지난 밤의 나를 찾아가 술잔을 든 손을 꺾고 싶기도 했지만 나는 대체로 술을 잘
마신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대체로 잘 마셨다. 하지만 좀처럼
술이 좋아서 술을 마시는 건 아니었나 보다. 술은 그저 거들뿐. 그러니
‘혼술’이란 게 가당치도 않지.
그런데 그것이 일어났습니다. 혼술에 관한 원고 하나만 써주세요. 원고 청탁이었다. 하지만 나는 혼자서 술을 마시지도 않고, 즐기지도 않는다. 그럼 혼자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의 혼술 경험담을
써보는 건 어떨까요? 이것은 주(酒)님의
말씀입니다. 고로 이르시니 행하노라. 그리고 네비게이션을
찍을 만한 장소를 물색했다. 혼자 술 마시기 좋은 곳이란 아무래도 혼자 앉아있기 좋은 곳일 거다. 혼자 앉아있기 좋은 곳이란 사람이 많이 앉아있을 수 없는 곳일지도 모른다. 왁자지껄하기
보단 새침한 곳. 그리고 맛있는 걸 먹자. 어차피 마실 수
있는 술이라는 건 거기서 거기다. 입이 즐거워야 혼자서 즐기든, 견디든
할 것이므로. 한남동에 오사카 요리를 파는 곳이 있다고 했다. 오사카
요리? 오코노미야키? 그보다는 일본식 전골인 스키야키와 우동이
유명하다고 했다. 도쿄에서 먹었던 스키야키가 생각나 침을 삼켰다. 젓가락을
빙빙 돌려 고소한 노른자를 잘 풀어낸 뒤 찍어먹는 고기와 야채 전골의 끈적한 궁합. 전두엽에서 보낸
전기신호가 침샘을 자극했다. 마치 발보다 혀가 먼저 뛰어갈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택시를 불렀다. 아저씨, 한남동으로 가주세요.
막상 가게 앞에 당도하니 어딘가 망설여지는 기분이 들었다. 안을 들여다
보니 테이블 몇 개 없는 자리에 한 쌍의 여자들이 앉아있었다. 자리 있나요? 한 명이에요? 네. 여기
앉으세요. 2인용 테이블에 혼자 앉았다. 가게가 좁다 보니
왼 편에 앉은 이들의 수다가 왼쪽 귀로 들어와 오른쪽 귀로 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키야키 있어요? 스키야키는 예약 주문만 받아서 많이 준비를 안 하다 보니 1인분
밖에 안 남았는데. 그럼 스키야키 1인분이랑 판우동 하나
주세요. 그리고 맥주도 주세요. 맥주가 먼저 나왔다. 꿀꺽. 꿀꺽. 꿀꺽. 세 모금을 내리 삼켰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대화할 사람이 없었고, 당장 먹을 스키야키도 없었다. 맥주잔에 말을 걸 순 없어서 맥주를 두 모금 더 마셨다. 차라리
벽을 보고 앉아있으면 편하겠다. 그래도 옆자리에서 주문한 스키야키 향이 나름 괜찮았다. 그래도 맛있는 걸 먹겠군. 나는 주문을 외웠다. 혼자 밥을 먹으러 왔다고 생각하자. 그런데 사실 나는 반주도 즐기는
타입이 아니다. 오늘은 정말 특이한 날인 셈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간절히 음식이 나오길 기다린 적이 또 언제 있었을까 싶었다. 스키야키가 먼저 나왔고, 우동이 나왔다. 그새 맥주 한 잔을 다 마셔서 한 잔을 더 시켰다. 1인분이라 스키야키는
아예 전골로 익혀서 내주셨다. 젓가락을 빙빙 돌려 노른자를 풀었다. 그리고
고기와 야채를 푹 찍어 입에 넣고 천천히 음미하기 보단 씹고 먹고 맛보고 삼켰다. 그런데 즐겼나? 아, 물론 맛은 있었다. 다만
평소보다 좀 더 열심히 먹는데 집중한 느낌이랄까. 혼자 밥을 먹으러 갔을 때보다도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혼자 술을 마신다니, 도무지 취할 수가
없잖아. 술에 취하는 과정이란 그저 알코올 농도에 지배당해 몸 속의 알코올 분해 요소보다도 정신이 분해되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술에 취하기 이전에 분위기에 취하는 게 더 중요하다. 혼자서 술을 마실 순 있지만 술 마실 맛이 나질 않았다. 만취해도, 적당한 취기를 느껴도, 언제나 분위기에는 취해야 했다. 함께 떠들 친구가 필요했다.
남은 우동을 후루룩 빨아들이곤, 벌컥벌컥 남은 맥주잔을 비운 뒤 빈
잔을 바라보다 전화를 걸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뭐하냐? 별 일 없으면 술이나 한 잔 할까? 그리고 친구와
함꼐 할 2차 장소로 향했다. 그렇게 혼술은 끝났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만 같다. 인생이 아직 길게 남아서 장담할 순
없지만, 아마도, 아니, 확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