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내는 절박하다. 모든 것을 잃었다. 그가 걸어온 뒷길에는 좌절의 발자국들이 길게 늘어섰고, 온 몸은 실패로 얼룩졌으며, 인생은 누더기처럼 해진 지 오래다. 한때 축구선수로서 기대를 얻던 몸이었지만 지금은 수많은 실패의 꼬리를 달고 다니는 인생에 불과하다. 발 딛고 선 땅에서조차 밀려나듯 길을 떠나다 보니 다다른 곳은 끔찍한 내전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가난한 영혼들의 땅, 동티모르. 인저리 타임밖에 남지 않은 듯한 인생의 끝자락에서, 여전히 절망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그라운드 복판에서, 회심의 만회골을 노린다.
5년 전, 김태균 감독은 어느 TV프로그램에서 동티모르를 봤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맨발로 공을 차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친다는 한국인 김신환 코치를 만났다. “이상했지만 마음이 끌렸다”는 김태균 감독은 주변의 지인을 모아 후원회를 조직하려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나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자라났다. 동티모르 축구소년들의 히로시마 국제유소년축구대회 우승은 “제대로 된 운동장도 없이 그늘도 없는 땡볕 아래 울퉁불퉁한 땅에서 공을 차던”아이들이 직접 일군 ‘레알’드라마였다. 결성 1년 만에 6전 전승으로 우승한 동티모르 유소년 축구팀의 내막을 아는 김태균 감독은 이를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라 말한다. <맨발의 꿈>은 그 기적에서 시작됐다.
영화 제작 여건에 있어서 불모지나 다름없는 동티모르에서 촬영을 하기 위해 한국으로부터 컨테이너 5박스 분량의 장비를 공수했다. 한국과 일본 대사관의 전폭적인 지원을 믿고 대사관 주소로 장비들을 실어 날랐다. 대사관에서 무대포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현지 소통도 문제였다. 제대로 된 통역사도 없이, 현지 스태프를 섭외하고, 배우 오디션까지 치러야 했다. 덕분에 김태균 감독은 현지 UN경찰로부터 아동 납치 의심까지 얻으며 조사를 당했다. 불안한 치안 상황과 열악한 제반 시설 문제도 만만찮았다. 제일 큰 난관은 현지인과의 정서적 괴리였다. “일을 하지 않는”현지인들의 느릿한 행동과 일처리는 급박한 촬영스케줄의 발목을 잡았다. 현지 한국인이나 대사관에서는 하나같이 “스케줄 안에 영화를 찍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돈을 더 줘서라도 한국식으로 일하게 만든”결과, 현지 스탭들도 “소리 지르고 뛰어다니는 한국인”이 다 됐고, 촬영 일정을 예정대로 마칠 수 있었다.
북한의 가학적인 체제로부터 달아나고자 했던 부자의 파국적 상봉을 그린 <크로싱>에 이어 또 다시 열악한 동티모르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과 한국인 코치의 꿈을 다룬 <맨발의 꿈>은 실화가 바탕이 된 작품들이다. 다만 절망적인 실화의 중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크로싱>과 달리 <맨발의 꿈>은 희망적인 사연을 품었다. “가난하면 꿈도 가난해야 돼?”영화 속 대사처럼 가난은 꿈을 움츠리게 만든다. 가난 아래 목 졸린 꿈 옆으로 용기와 믿음, 의지가 밟혀 눌린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목격한다. 모든 어려움을 딛고 꿈을 이룬 이들의 현실,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건 엄연한 현실이다. <맨발의 꿈>은 그 현실을 드라마로 옮긴 작품이다. 꿈이 이뤄낸 현실의 드라마, 그리고 꿈은 여전히 희망을 향해 달리고 있다.
피와 눈물의 땅, 동티모르
1999년 10월 20일, 동티모르의 독립은 5세기 만에 이뤄졌다. 16세기 포르투갈의 긴 점령과 철수 직후인 1975년 인도네시아의 무력 침입으로 식민지 지배는 계속됐다.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인으로 구성된 민병대를 앞세운 끔찍한 학살로서 동티모르에 심각한 민족분열을 야기시켰다. 결국 인도네시아 정권교체와 함께 동티모르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됐고 압도적인 찬성으로 독립이 결정됐다. 피와 눈물의 땅은 비로소 새 역사를 살고 있다.
김태균 감독 인터뷰
<맨발의 꿈>도 <크로싱>처럼 실화를 바탕으로 둔 영화다.
그 사연들이 내게 감동을 주는 바가 있었다. 기회가 닿는다면 좀 더 사람냄새 나는 이야기들을 해보고 싶다.
전작과 반대로 해피엔딩이다. 개인적으로 위안이 되지 않았나?
<크로싱>은 작은 부분이라도 해피엔딩을 해주고 싶은 유혹이 강했다. 그래야 흥행될 것도 같고. (웃음) 하지만 양심상 못하겠더라. 힘들어도 그렇게 가야 했지. 그래서 이번엔 다행이고.
영화는 히로시마 대회에서 끝났지만 현실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마 그 아이들이 히로시마에서 우승하지 못했다면 아직도 축구를 하고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을 거다. 김신환 감독도 좌절했겠지. 하지만 우승 이후로 그 꿈이 계속 가고 있다. 그때 우승 주역들이 작년 17세 이하 월드컵에서 아시아 16강에 올랐다. 대단한 성적이지.
<맨발의 꿈>이란 제목은 아이들의 꿈이기도 하지만 김신환 감독의 것이기도 하다.
아무 것도 꿈꾸지 못했던 아이들과 꿈이 완전히 꺾인 사람이 만나서 같은 꿈을 향해 뛰어가는 이야기다. 꿈이 이뤄졌다기 보단 꿈을 진짜 꿀수 있게 된 거지.
김신환 감독이란 사람이 궁금하다.
언뜻 보면 사기꾼처럼 보인다. 원래 꿈꾸는 사람은 사기꾼이잖아. 5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세워질 거라던 축구학교를 아직도 못 세웠거든. 동티모르 정부로부터 3만 평의 땅을 받았지만 도내이션을 받지 못했다. 10억이 넘게 필요하다는데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인생의 좌절을 거듭했지만 이제 남을 일으켜 세워주는데 기쁨을 느낀 거다. 그리고 사실 아이들이 그 사람을 살게 해준 거지.
<맨발의 꿈>이 전하고자 하는 바가 뭔가?
진부하고 보편적일지 몰라도 세상 사람들에게 좌절하지 않는 용기를 주고 싶다. 이 세상에 꿈꿀 수 있는 게 너무도 많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특히 우리나라 40대 아버지랑 아들이, 가족이 같이 봤으면 좋겠다. 요즘 다들 인생에 지쳐있잖아. 못 먹고 못 살아도 하루 종일 노는 애들을 보면 우리 애들이 너무 불쌍해.
(PREMIERE Seasonbook 'KOREAN MOVIE PREVIEW' 4월호 No.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