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가한 오후, 아내가 정성껏 차린 저녁식사를 기다리며 어린 딸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던 클라이드(제라드 버틀러)의 집에 두 명의 괴한이 침입한다. 그들에게 린치를 당한 클라이드는 가까스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지만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아내와 딸의 죽음을 잊을 길이 없다. 범인들은 경찰에 의해 검거됐지만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검찰은 자신의 동료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겠다는 한 명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의 처벌을 방임한다. 담당검사 닉(제이미 폭스)의 설명을 듣게 된 클라이드는 망연자실하고, 법정의 무죄선고에 굳은 표정으로 법정으로부터 뒤돌아 선다.
(본래 작품과 무관한 일이지만) 정직한 제목이 우스꽝스럽게 읽히는 <모범시민 Law abiding citizen>은 문제의식이 뚜렷한 주제를 품고 있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제도가 정의적인 질서를 구현하지 못할 때 그 제도적 맹점에 희생된 개인으로부터 체제적 위기가 도래한다. 법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 그 법을 따르는 개인의 배신감은 거대한 복수심으로 변질된다. 선량한 모범시민은 지독한 괴물로 변태한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모범시민>은 근래 개봉작 가운데 <다크 나이트>와 비슷한 함의를 품고 있는 작품이다.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 채 뼈대만 앙상한 제도적 권위 속에서 사회를 지탱하는 건 부조리한 힘과 폭력이다. 개인의 사소한 억울함이 방치되거나 외면당할 때 제도적 정의는 일거에 무산된다. 직접적으로 비교하자면 <모범시민>의 클라이브는 <다크 나이트>의 투페이스나 다름없는 셈이랄까. 그만큼 문제제기의 측면에서 나름대로 비범한 현실적 고민을 품은 작품이라 인정할만한 지점이 있다.
하지만 <모범시민>은 그 주제의식의 가능성을 발전시키지 못한다. 제도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낼 뿐, 그 결함에 대한 논의는 좀처럼 진전되지 않는다. 물론 문제의식을 전하는 작품이 그 대안을 제시하는 의무까지 짊어질 필요는 없다. 다만 스스로가 표한 그 문제의식은 효과적으로 전달할 필요는 있다. <모범시민>은 문제의식을 손에 쥐고 있지만 단단하게 주무르지 못한 탓에 손가락 틈새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지 못하는 영화다. 클라이브가 표하는 분노엔 실체가 있다. 그러나 <모범시민>에서 그 실체는 단지 액션적인 이미지를 연출하고 스릴을 그리기 위한 미끼에 불과하다.
분노로 표방되는 감정적 진화를 설득하지 못하는 것과 무관하게 단순히 사건을 발전시키고 비밀의 규모를 키워나가는 방식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거대하게 부풀려진 비밀 너머의 진실이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비유하자면 거대한 빌딩을 붕괴시킨 것이 도끼질의 위력이었다 고백하는 것과 같다. 결과적으로 <모범시민>은 어떤 방식으로도 이성적 합의를 전달하지 못하는 작품이다. 제도적 맹점에 대한 개인의 분노는 화풀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을 빌미로 발화된 이미지도 인상적인 용도로 활용되지 못한다.
제이미 폭스와 제라드 버틀러를 비롯해 배우들은 적절히 제 역할을 해낸다. 특히 역할에 걸맞은 위엄을 전하는 비올라 데이비스는 인상적이다. 하지만 배우들의 열연만으로 영화의 빈틈을 메우기엔 역부족이다. 양심을 팔아서 재미도 보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모범시민>은 의미도, 재미도 얻어내지 못하는 모범적인 실패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