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망울들이 눈물이 번지듯 이지러진다. 구름이 이동한다. 바람이 분다. 화창한 어느 날, 대기는 평온하다. 17살 여고생 다이아나(에반 레이첼 우드)와 모린(에바 아무리)이 화장실에서 난데없이 찾아온 죽음의 기로에 당면한 그 순간에도 대기는 평온하다. <인 블룸>은 몽환적인 오프닝 시퀀스를 지나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사건 안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다이애나와 모린의 급박한 상황을 비춘 뒤, 그로부터 달아나듯 15년 뒤의 다이애나(우마 서먼)를 등장시킨다.
총기난사사건 15주년 추도식을 예고하는 힐뷰고등학교 교정 앞에 선 다이애나의 얼굴에 그늘이 서린다. <인 블룸>은 15년 전 다이애나가 그 급박한 기로에 닿기까지의 이전에 해당하는 과거완료진행형의 대과거시제와 15년 후 그 상황으로부터 점차 멀어지는 현재진행형의 현재시제 사이를 반복적으로 오간다. 다이애나의 잃어버린 15년은 흔적이 없다. 그녀에겐 단지 15년 전과 15년 후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부터 의문은 시작된다.
<모래와 안개의 집>을 통해 삭막한 부동산 경제 법칙에 고립되고 잠식되어가는 인간의 내면적 갈망을 포착했던 바딤 페럴만 감독의 <인 블룸>은 또 다른 인간의 갈망을 그린다. 학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사건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버지니아 총격사건, 더 앞서서 콜럼바인 총기난사사건이 떠오른다. 좀 더 규모를 키워보자면 그라운드 제로 앞에 묵념하는 미국인들의 포스트 9.11 증후군의 잔상이 어린다. 하지만 <인 블룸>에서 그런 구체적인 현실적 예시문을 언급하는 건 그리 썩 좋은 일이 아니다. <인 블룸>은 현실을 명징한 영화적 소환이라기보단 어느 가상을 통해 고찰하는 현상적 신비다.
현재와 과거가 반복되는 영화적 서술형태는 단지 서사적인 거리감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두 개의 평행적인 서사는 실마리를 알 수 없는 15년 간격의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묘하게 대칭적인 뉘앙스를 풍기거나 서로 간에 꼬리를 물 듯 연계되는 속성을 지닌다. 마치 그건 어떤 염원에서 비롯된 염사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그 15년 전 그 상황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TV에서 들리는 총소리에 조차 거부감을 느끼는 다이애나는 현실에서 자신의 과거를 되새기거나 혹은 현실의 타인에게서 자신의 과거에 보았던 것과 비슷한 일련의 태도나 행위를 목격한다. 또한 현실의 다이애나가 겪는 착시와 환각은 묘하게 과거와 연동되고 과거와 현재 사이를 잇는 씬도 긴밀하게 교차되곤 한다.
영화의 끝은 시작과 같다. 그 끝은 시작의 평온함과 달리 커다란 울림을 동반한다. 15년 전과 15년 후의 균형을 유지하던 그 결정적 순간에 대한 진실이 폭로될 때, 우아하면서도 지독하게 아련하여 서글픈 여운이 슬프고도 고요하게 밀려온다.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기에 심정적인 변화가 극단적으로 실감난다. 죽음 앞에 직면한 자의 삶의 요구가 간절하게 적시된다. 찰나가 영원으로 번져나가고 정체가 모호하던 현실의 환각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 과거를 명확하게 비춘다. 일생은 너무 짧다. 하지만 그 일생의 끝은 너무도 길다. 삶은 죽음을 대면하는 순간 지독하게 간절해진다. ‘만약’은 유령과도 같은 단어다. 그것은 현실에서 이미 죽어버린 시간을 추모한다. <인 블룸>은 그 유령 같은 시간을 처연한 신비에 담아 고찰한다. 구름이 천천히 움직이는 순간에도 꽃은 피고 진다. 고요한 세상 안에서 삶과 죽음은 찰나를 오가며 교차된다. 삶은 죽음 앞에서 더욱 빨갛게 피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