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문>을 보기 위해선 전제가 있다.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뉴문>의 전편인 <트와일라잇>은 분명한 취향의 호불호를 체감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누군가는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등마저 굽어버릴 판인데 어느 누군가는 잘도 깔깔거리며 마냥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건 영화적 만듦새에 대한 불평이 좀처럼 합당하게 먹힐 구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뉴문>이 보고 싶은 이라면 그에 따른 명확한 취향의 확신을 판단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셈이다.
전형적인 뱀파이어 영화를 상상했다간 화들짝 놀라다 못해 십자가를 그을 만큼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는 정통 팬들에게 불순하다 못해 이단적인 존재나 다름없다. 여기서 뱀파이어란 단지 10대 취향 팬픽의 비범한 주인공에 가깝다. 태양빛을 받으면 온몸이 반짝거린다는 스와로브스키 협찬 태생의 뱀파이어들과 이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황홀한 시선엔 환상이 어른거린다. 뱀파이어라고 쓰고 아이돌이라 읽어야 한다. 단지 뱀파이어는 거들 뿐, 중요한 건 사랑이고 로맨스다. 그러니까 결국 뱀파이어란 존재는 태생이 다른 인간과의 로맨스에 난관을 부여하기 위해 마련된 이종교배의 삼부능선인 셈이다.
초반부터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를 읊조리는 <뉴문>은 이윽고 에드워드(로버트 패틴슨)와 벨라(크리스틴 스튜어트)를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치환한다. 자신이 곁에 있을수록 벨라가 위험해진다는 판단을 내린 에드워드가 결국 벨라를 떠나게 되고 이를 견디지 못한 벨라가 탈선을 시도하고 자살마저 결심한다. 그 지난한 여정에 동원되는 건 삼각관계다. 남몰래 벨라를 사모하던 제이콥(테일러 로트너)은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내며 자신의 마음을 종종 어필하지만 에드워드를 향한 벨라는 그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 와중에 벨라는 제이콥의 비밀을 알게 되고 벨라도 모르는 위기가 다가온다.
사실상 <뉴문>은 진지하게 눈뜨고 볼 수 없는 영화다. 만약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이라는 소재에 이끌려 상영관을 찾은 관객이라면 팔자를 탓해야 할 일이다. 게다가 귀여니 소설을 읽고 헥토파스칼 킥이라도 얻어맞은 듯한 개념적 충격을 체감했다면 <뉴문>을 보는 130분 간 자기성찰을 하다 못해 득도라도 할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중요한 건 이 영화의 태도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뉴문>은 유아적인 환상으로 점철된 원작 텍스트의 태도를 온전히 이미지로 재생하고 있는 영화다. 열광과 혐오의 기준도 그 지점에 있다. 그러니까 이성적 판단으로서 좌우될 수 없는 취향의 현상인 셈이다.
확실한 건 <트와일라잇>을 보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을 견딜 수 없었다면 <뉴문>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낫다. 하지만 그 반대로 반짝이는 뱀파이어에 도취됐거나 그 오그라듦을 하나의 개그 장르로 이해해버렸던 당신이라면 조만간 티켓을 손에 쥘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뱀파이어고, 늑대인간이고, 로맨스고, 멜로고, 다 해당사항 없다. 그 절실한 대사와 그윽한 눈빛을 의도적인 개그로서 즐길 수 있던가, 슈퍼스타적인 뱀파이어의 외모에 매혹당하던가, 그렇지 않고서야 130분을 견딜 재간이 없을 게다. 물론 여자친구 손이라도 잡고 보게 될 남자라면 극장 문을 박차고 나와서 그 지난한 시간에 대해 불평하는 건 자제해야 할 것 같다. 최소한 반짝이는 뱀파이어에 도취된 여자 친구의 상향평준화된 눈높이를 고려해본다면 조만간 찾아올 크리스마스에 TV리모컨이나 붙잡게 될 확률이 커질 테니까.
구약성서 사무엘상 17장 48-51절은 이스라엘 민족과 블라셋 민족의 전쟁이 벌어진 엘라 계곡에서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전전긍긍하게 만든 블라셋의 거인전사 골리앗을 물매(새총)로 물리쳤다는 이스라엘의 청년영웅 다윗을 그린다. 성서를 통해 전승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그 이후로 현세까지 수많은 이야기꾼들에게 영감을 주며 생명력을 유지해왔다.
2003년, 800여 개의 크루즈 미사일을 동원해 이라크를 초토화로 만든 미군의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 이후, 미국은 국제질서를 지키겠다는 명목 하에 자국의 청년들에게 총을 쥐어준 채 먼 이국 땅으로 밀어 넣었다. 성경구절에 등장한다는 그 전장을 적시한 <엘라의 계곡 In the valley of Elah>은 외박을 나갔다 사라진 아들을 추적하는 아버지와 그 주변인들의 시선을 통해 먼 타국에서 벌어지는 비극의 조우를 소환한다.
군수사관 퇴역장교인 행크 디어필드(토미 리 존스)는 ‘다리가 부러져도 점호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원칙주의자이자 애국주의자다. 그는 자신의 소신에 입각해 두 아들을 모두 군대에 보냈으며 군에서 큰 아들을 잃었다. 그리고 이라크에 파병됐다 귀환환 둘째 아들 마이크(조나단 터커)가 외출 후 미복귀 탈영 중이라는 통보를 받게 된다. 직접 아들의 행보를 수사하고 추적해나가던 행크는 결국 암담한 현실과 대면하며 그 현실의 뒤편을 추적하다 자신의 뿌리깊은 소신마저 뒤흔들만한 진실을 목도하게 된다.
포스트 9.11 이후, 미국과 중동의 갈등관계를 묘사한 작품들은 차고 넘치게 등장했으며 그만큼 그 관계의 폭력성과 이로 인한 증후군에 대한 성찰도 낡고 고루한 것이 됐음을 부정할 수 없다. <엘라의 계곡> 또한 마찬가지다. 이라크로 파병됐다 돌아와 실종된 아들 마이크를 뒤쫓는 행크가 간접적으로 목격하고 수집해나가는 건 먼 이라크 땅에서 아들이 겪어야 했던 폭력적인 경험들이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이라크 땅에서 죽음과 직면하며 살아가는 청년들은 결국 그 공포에 맞서기 위해 괴물로 자라난다. 결국 행크가 찾게 되는 건 아들이 아닌, 아들의 괴물 같은 시절이다. 저 너머에서 벌어지는 참상 속에서 자신의 아들이 견뎌야 했던 끔찍한 비극을 목도하고 자신들이 서있는 현실의 안위가 무엇을 밟고 서있는가를 극명히 깨닫는다. <엘라의 계곡>은 결국 거대한 세계적 음모 속에서 압사당한 어느 개인적 비극을 환기시킴으로써 그 세계에 깊게 뿌리내린 부조리의 실체를 벗겨내고 그 세계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엘라의 계곡>의 목적지가 그 성찰에 놓여있다면 그 목적지로 관객을 유도하는 표지판의 역할은 미스터리적인 추리극의 플롯에 있다. 사라진 아들의 행방을 뒤쫓는 아버지의 행보는 사건에 접근해나가는 흥미를 자아내는 가운데, 사건의 실체를 이루는 뒤편의 진실에 대한 호기심을 점증시켜나가는 구실로서 진전된다. 또한 그 서사적 추이는 허구적인 연출력과 사실적인 정보력 사이의 균형을 잘 메워나가며 적정수준의 몰입도를 유지해나간다.
무엇보다도 <엘라의 계곡>은 시종일관 서로를 팽팽하게 끌어당기면서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신경전을 벌이듯 캐릭터로서 분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실질적으로 메시지 전달에 대한 목적성이 뚜렷한 <엘라의 계곡>에서 배우들의 연기란 그 뚜렷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권태로움을 덜어내는데 공헌한다. 특히 지혜로운 관록과 고집스런 원칙을 담아낸 냉소적 표정으로 보수적인 성찰을 도모하는 토미 리 존스는 <엘라의 계곡>에서 뛰어난 방패와 같다. 의욕이 넘치는 여형사 에밀리 샌더스를 연기하는 샤를리즈 테론의 혈기를 눙치면서도 적절한 긴장을 유지하고 아내인 조안 디어필드를 연기하는 수잔 서랜든으로부터 밀려오는 페이소스의 속도감을 적절하게 줄여낸다.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하지만 이라크는 꽤 위험합니다.” 어쩌면 <엘라의 계곡>은 먼 이국의 현실에 불과할지 모르기에 국내 관객에게 적당한 거리감을 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시에 팍스 아메리카나의 실체에 담긴 지난한 희생을 가리키는 낡은 성조기의 조난 신호는 지정학적인 거리감을 더욱 선명히 구체화시킨다. 하지만 그것이 실화를 모티브로 둔 작품-Inspired by actual events-이라는 점을 밝힐 때 그 허구에 담긴 진의는 우리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국익을 위해 젊은 피를 요구하는 영화 속 미국의 현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네 현실 역시 다를 바 없는 선택을 감행하고 있다.
그 땅엔 괴물이 자란다. 그 괴물은 결국 국가적 영웅주의로 위장한 이 세계의 편협한 음모를 방조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이 세계의 구성원 모두가 키워낸 비극적 산물인 셈이다. 엘라의 계곡에서 골리앗에 맞선 다윗의 영광스러운 승전보 이전에 그 땅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그리고 그 피가 실로 누구를 위한 영광이었는지, 우린 지금 따져 물어야 한다.
오랜 과거부터 인간들은 달을 통해 미래를 읽고, 현재를 파악했다. 영원을 누릴 듯 이글거리는 태양과 달리 순간을 견디지 못할 듯 위태롭게 이지러지다 차오름을 반복하는 달은 그만큼 신비롭되 불길한 것이었다. 1969년,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 발을 디딘 이후로도 그곳은 여전히 낯선 영역이다. 환형의 굴레를 끊임없이 돌고 도는 달을 향한 인류적 호기심이 신비에서 실리로 변모했을 뿐, 그 구체는 여전히 인류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큼 미지수의 창작적 자원량을 보유한 미지의 영토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Where are we now?)”단순하듯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자막으로부터 미끄러져나가듯 이어지는 낮은 음성의 내레이션은 화석에너지를 사용하며 다양한 불협화음에 시달리던 인류가 달의 표면에서 채취한 청정원료 ‘헬륨3(HE3)’를 대체에너지원으로 삼아 새로운 질서를 이뤘다고 전한다. 궁극적으로 이는 그 모든 성과가 전세계 자원소비량 70%를 차지하는 에너지를 조달하는 ‘루나 산업(Lunar Industries LTD)’에 의해 이뤄졌다는 의미를 전하기 위한 것과 같다. 그리고 기업광고에 가까운 그 도입부 영상이 묘사하는 거대한 변화는 인류의 머리맡에 놓인 달에서 시작된 것이다.
마치 덩그러니 버려진 것처럼 놓인 달 기지에서 홀로 헬륨3를 채취해 지구로 보내는 작업을 도맡은 샘 벨은 계약기간이 종료되어 가족을 만나는 날만 손에 꼽은 채 하루하루를 버틴다. 유일한 동료라 할만한 인공지능 컴퓨터 거티(케빈 스페이시 목소리)가 종종 말동무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컴퓨터를 통해 외로움을 달래기란 불가능한 노릇이다. 하지만 그 긴 시간도 어느덧 계약 만료 예정일을 앞두고 있다. 2주가 지나면 자신을 태우고 지구로 갈 수송선이 도착할 것이고 곧 사랑하는 아내와 입을 맞추고 자신의 딸도 안아줄 수 있다. 그런 어느 날, 월면 작업차를 타고 자원채취 현장에 순찰을 나간 샘 벨은 충돌사고를 겪게 되고 이로부터 영화는 조금씩 예측할 수 없는 궤도로 들어선다.
<더 문>은 범인류적 진전을 피력한 그 동영상의 실체 속에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가던 한 남자에 대한 사연을 그리는 SF영화다. 달에서 채취한 에너지를 지구로 전달하는 달 기지 ‘사랑(Sarang)’에서 3년의 계약기간 동안 홀로 그 모든 작업을 도맡는 샘 벨(샘 록웰)에 관한 드라마다. 지구의 중력에 속박된 이상 결코 볼 수 없다는 달의 뒤편에 대한 비밀이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전인류의 편의를 위해 홀로 달에서 외로운 작업을 펼쳐가는 샘 벨의 삶 또한 고립된 비밀처럼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타인의 고독한 현실에 불과한 것이다.
달이라는 미지의 영토에 현대문명의 이기를 착륙시켜 완성한 SF영화 <더 문>은 광활한 우주의 한 점과 같은 달 표면을 독점하기엔 너무도 작은 존재인 한 남자의 광활한 고독을 담은 모노드라마다. 회상이나 영상의 동원과 같은 간접적 방식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를 배제한다면 직접적으로 스크린에 노출된 시공간에 등장하는 인물은 단 한 명에 불과한 <더 문>은 그만큼 정적이지만 좀처럼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작품이다. 엄밀히 말해서 달 기지에 홀로 남아 전인류를 위한 에너지 공급에 중책을 맡고 있다는 샘 벨의 상황은 언뜻 봐도 비상식적이다. <더 문>의 우주는 샘 벨의 정서적 고립을 묘사하기 위해 장치된 광활한 감옥이다. 오로지 단 한 명의 배우가 등장하는 <더 문>에서 달은, 더 넓게 우주는, 궁극적으로 휴머니즘과 멜로를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광활한 모노드라마의 무대다.
일차적으로 묵묵히 일상을 견뎌나가는 인물의 고독을 담담하게 응시하던 영화는, 이차적으로 그 인물을 둘러싼 삶의 실체를 가볍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관객의 시야에 들이밀며 본질적 물음에 접근해나간다. 광활한 우주의 깊은 어둠처럼 평온한 고독을 유영하던 영화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전개하며 이를 대면한 인물의 심리적 공황을 긴장으로 달궈나간다. 마치 대기권에 돌입하며 대기와 마찰하는 우주선의 표면과 내부의 온도가 다른 것처럼 인물의 공황적 심리 밖에 흐르는 차분한 공기를 평등하게 포착함으로써 감정적 역설을 이끌어낸다. 관객은 <더 문>에서 그 거대한 우주를 채우고도 남을만한 고독의 만료를 기다리던 남자의 운명이 행성의 소멸처럼 덧없이 사라질 것이며 그 고독이 끝없이 팽창되는 우주적 너비의 운명과 같은 것임을 눈치채게 될 것이다.
가스와 먼지처럼 형체가 불분명한 연민을 자아내던 샘 벨의 고독은 창작자가 연출한 충돌적 상황을 빌미로 이야기적 자전력과 공전력을 얻어 단단한 감정적 형태를 완성하고 전달해낸다. 샘 벨을 연기하는 샘 록웰의 연기는 <더 문>의 자전력의 기반이 되어 관객의 몰입을 당기는 인력이 되고 창의적인 발상과 전개는 공전력의 기반이 되어 거대한 감정적 은하계를 이룬다. 공기가 없어 소리가 발생할 수 없는 우주의 적막 속에서도 저마다의 자전 궤도와 공전 궤도를 지닌 행성들의 화음이 존재하고 있음을 귀로 확인하는 것과 같이 황홀한 경험적 진경을 전달한다.
결국 도입부의 물음은 여운적 답변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인간은 과연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라는 대의적 진리를 떠올리기 위한 발사대나 다름없다. 심오한 질문과 달리 답변은 명확한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배제하지 않는 삶. 결국 무음의 우주에서 살아남아 유음의 지구로 돌아간 샘 벨은 비로소 삶에 대한 선택권을 얻고 인생에 대한 진리를 깨닫는다. 적막한 무음의 대지에서 번잡한 소음의 대륙에 내린 샘 벨은 그렇게 긴 시간의 고독 끝에 제 삶을 찾아나갈 것이다.
무엇보다도 <더 문>은 최근 개봉된 <디스트릭트9>과 마찬가지로 소재에 대한 응용력과 이야기에 대한 창작력의 자산적 가치를 증명하는 작품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비롯해 지난 SF영화들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배어 나오는 <더 문>은 창조보다도 발굴의 가치를 설득하는 참신한 결과물이다. ‘사랑’이라는 한글로 표기된 달 기지의 이름이나 성조기와 나란히 놓인 태극기가 발견되는 우주복은 분명 국내 관객에게 특별한 감상을 부여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배려가 인상적인 건 그것이 단순히 얄팍한 생색내기에서 비롯된 이벤트가 아니라 자발적인 애정과 관심을 고스란히 보존하는 선물이라 이해될 만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문>을 통해 대한민국에 애정을 표현한 던칸 존스는 무려 데이빗 보위의 아들이다. 어쩌면 그는 <더 문>에 진심을 담아 국내 관객들과 조우하길 원한 것이 아니었을까. 관객이 그 진심에 답할 의무는 없겠지만 적어도 <더 문>을 완성한 던칸 존스의 재능이 그 진심을 빛낸다는 점에서 <더 문>은 분명 국내 관객에게 보다 특별한 작품으로 기억돼도 좋을 만한 가치를 지닌 작품임에 틀림없다.
망가의 신화, 아니메의 전설, 오타쿠의 복음. 신도적인 팬덤에 둘러 쌓여 끊임없이 복기되고 해석되는 묵시록 <에반게리온>은 그 이름에 얽힌 수많은 언어만으로도 반열에 오를만한 작품이다. 단순히 작품의 개별적 가치를 넘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신드롬으로서 이미 하나의 거대한 세계임을 증명했다. <에반게리온>의 매력은 그 세계관의 너비를 짐작할 수 없는 비정형성에 있다. 메카닉 애니메이션의 형태 안에 잠재된 성장담, 그리고 오타쿠 문화의 총아적 이미지까지, 그 모든 요소가 그것을 해석하고 독해하는 이들의 세계관 안에서 거듭 확장되고 이를 통해 다양한 의미를 재생산시킨다는 점에서 <에반게리온>은 진화하는 유기체나 다름없는 작품이다.
신극장판 4부작은 그 유기체적인 특성을 증명하는 새로운 <에반게리온>의 진화적 결과물이다. 정형되지 않은 세계관을 새로운 틀에 넣고 주조한 또 다른 판본이다. <에반게리온>의 조물주 안노 히데아키가 ‘리빌드(Rebuild)’를 천명하며 그 첫 번째 결과물 <에반게리온: 서>(이하, <서>)를 공개했을 때, 이미 그 세계는 뒤틀리고 있었다. 다만 보다 구체적인 파격적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워밍업으로서 <서>를 마련했을 뿐이다. TV시리즈로 상영한 <신세기 에반게리온> 26부작 가운데 6부까지를 변주해 나열한 <서>는 원작에 대한 기시감 속에서 꿈틀대는 파괴적 전조를 드러내며 기존의 팬덤을 또 한번 끓어 올리는데 성공했다. 단순히 질적으로 발전된 이미지를 전시하는 수준을 넘어 기존의 세계관을 융해시키겠다는 잠재적 욕망을 감지하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예고는 <에반게리온: 파>(이하, <파>)에 이르러 본격적인 실체를 드러낸다. <에반게리온>에 탑승한 팬들을 파격적인 파란의 대지로 발진시킨다.
원작의 팬이라면 도입부에 등장하는 새로운 영상만으로도 파격적인 감상을 얻을 것이다. <파>의 곳곳엔 원작의 흐름을 거부하듯 어긋나는 서사의 흔적과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발견적 영상들이 자리하고 있다. 기존의 시리즈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유형의 에반게리온과 캐릭터가 등장하며 이를 통해 서사적 너비를 확장하는 동시에 기존의 형태와 판이한 서사적 진행을 확보해나간다. 기존의 시리즈가 묘사했던 캐릭터의 성격마저 무마시키는 동시에 관계의 틀마저 온전히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고 그 순차적인 캐릭터 등장 시점마저 완전히 무너뜨려버린다. 가장 파격적이라 할만한 지점은 두 편의 시리즈가 남겨진 이 신극장판의 중반부에 다다르는 역할을 하는 <파>의 서사가 이미 지난 시리즈의 결말부에 접근해버린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 끝에서 ‘써드 임팩트(third impact)’의 시작을 언급해버림으로써 그 이후에 지속될 두 편의 서사가 도무지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 그 방향성을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내달려 버렸다. 실로 폭주적인 진화를 거듭한다. 그것을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당황스러울 정도로.
신극장판으로 <에반게리온>을 처음으로 접한 관객들에게 <파>는 단순히 놀랍게 뛰어나거나 이해할 수 없게 난해한 작품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기존의 원작 시리즈에 대한 경험치가 있는 관객이라면, 또한 그 이상의 애정을 지닌 팬이라면 <파>를 통해 충격과 경악의 감상적 지배를 느낄 확률이 크다. <서>가 만들어낸 서사적 오차범위를 통해 변화의 징후를 예감하거나 각오했던 이라 할지라도 <파>가 새롭게 선사하는 파괴적 위력과 건축적 징조들은 그 이후를 예측할 수 없게 생소해서 기다림을 견딜 수 없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원작의 형태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전혀 다른 감정적 관계를 형성하는 결말부의 파격은 이 새로운 신극장판의 궤도가 더 이상 원작 팬의 정보량 안에서 해독될 수 없을 것임을 호기롭게 선언해버린다.
“이번만큼은 신지 네가 원하는 세상을 남겨주겠어.” 카오루의 대사는 신극장판이 던지는 구체적 선언을 대신한다. 기존의 팬덤을 배반하듯 붕괴적인 네거티브를 그려낸 TV시리즈의 결말이나, 보다 서사적으로 완성된 형태를 선보이는 구극장판의 파국적 결말과는 또 다른 차원의 신세계를 기대하게 만든다. 동시에 이번 신극장판이 기존의 오타쿠적 세계를 온전히 망가뜨림으로써 오타쿠적인 팬덤의 질서를 냉소하고 이를 통해 성장과 변화를 촉구하던 성격과 지향점이 달라지리라는 예감도 가능하다. 자신의 선택 앞에 유약하기만 했던 소년 신지는 과감히 자신의 결정을 통해 폭주를 감행하고, 자신의 감정을 침전시키듯 살아가던 소녀 레이는 모성적 본능을 이끌어내며 소년의 성장을 촉매한다. 오래 전 팬덤을 이뤘던 관객들의 성장만큼이나 <에반게리온>도 진화했다. <파>는 에반게리온을 위한 창세기 외전, 아니 신창세기나 다름없다. <에반게리온>의 팬을 자처하는 누구라도 그 끝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탄식이 아닌 탄성이리라. 새로운 복음이 도래한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으라.
Service! Service!
무엇보다도 <파>를 이을 또 다른 복음의 서 <에반게리온: Q>를 예고하는 '서비스! 서비스!'는 꼭 챙길 것. 물론 누구보다도 에바의 팬을 자처하는 팬이라면 자막의 오름과 함께 상영관을 꽉 채우는 'Beautiful World'를 찬송가처럼 듣고 있겠지만. 게다가 그 끝까지 챙겨봐야 직성이 풀린다는 것을 아는 당신에게 그것이 분명 ‘잔혹한 갈망의 테제’가 될 것이라는 사실도 자명하겠지만.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그것까진 알 수 없지만 이거 하난 확실하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디지털 캐릭터의 꿈을 꾼다. <폴라 익스프레스>이후로 3D디지털 이미지에 심취한 저메키스는 이제 더 이상 실사적 세상을 뷰파인더로 관찰하지 않는다. 북유럽 영웅 서사시 <베오울프>에 이어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을 디지털 양각의 세계로 구현한 저메키스는 이제 디지털 세계의 조물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스크루지(짐 캐리)는 마주선 이들을 질색하게 만드는 지독한 수전노다. 그에게 크리스마스란 놀지 못해 안달 난 사람들이 만들어낸 혐오적 하루일 뿐이다. 그에겐 크리스마스 파티는 낭비고, 웃음은 사치이며, 길거리의 찬송가마저 소음일 뿐이다. 그런 그의 삶에 대단한 반전이 찾아온다. 언제나처럼 홀로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을 보내던 스크루지는 7년 전 죽은 동업자 말리의 혼령을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3명의 유령이 찾아올 것이란 말을 전해 듣게 된다. 스크루지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세 유령과 스크루지의 만남을 다룬 <크리스마스 캐롤>의 플롯은 동화적 교훈극의 온화함이 깃들어 있던 원작과 달리 호러와 판타지가 뒤엉킨 환상적 이미지로 재현된다.
배우의 실제적 외모를 스크린의 디지털 캐릭터에게 이양하려는 것마냥 보였던 <베오울프>의 편집증적 시도와 달리 <크리스마스 캐롤>은 그와 반대로 디지털 캐릭터의 불완전한 형태에 실제적 외모를 함몰시켜버린다. 전자가 디지털 체계를 응용해 실제적 이미지를 허구의 세계관에 실현시키고자 한 이입적 시도였다면 후자는 실사적 표현력을 허구적 세계관에 어울리는 이미지로 리모델링하는 디지털 부호의 변환적 시도에 가깝다.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디지털 캐릭터의 특성에 함몰된 실제적 배우의 외양은 희미한 형태를 간직하거나 온전히 자취를 감춘 채 영화적 세계관에 철저히 복무한다.
디지털 캐릭터에 대한 혐오를 의미하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는 언제나 저메키스의 영화를 혐오하게 만들거나 폄하하게 만드는 한계로서 작용한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언캐니 밸리란 음산한 작품의 톤에 어울리는 적절한 장치적 효과로서 성과를 발휘한다. 시체의 눈이라는 비아냥을 얻는 디지털 캐릭터의 눈과 얼굴은 역설적인 효과적 표현력을 얻는다. 디지털 캐릭터의 음산함을 기본적인 요소로서 삼아 호러적 이미지를 확장하는 한편, 판타지적인 입체감을 덧씌운 <크리스마스 캐롤>은 디지털 캐릭터의 기술적 한계마저도 작품을 위한 표현적 질감으로서 설득시키는 적절한 맞춤형 선택처럼 보일 정도다.
다만 <크리스마스 캐롤>이 종종 과욕적 이미지를 선사한다는 것도 부정할 순 없다. 입체적 이미지로서 탁월한 감상을 부여할만한 순간들이 존재하지만 입체적 이미지를 감상하기 위한 시각적 피로감과 맞바꿀 만큼의 기회비용적인 쾌감이 이를 적당히 보충하는가라는 질문에 확답을 내리기 어렵다. 동시에 저메키스가 <크리스마스 캐롤>을 위한 맞춤형 효과로서 3D디지털 비주얼을 활용했다기 보단 지난 실험의 연장선상의 연결고리에서 시도를 거듭하는 가운데 <크리스마스 캐롤>의 효과를 후발적으로 얻어낸 것은 아닌가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저메키스의 실험은 여전히 과도기적이며 그것이 집착을 넘어선 발전적 지향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판단이 불가피하다. 중요한 건 그 도전적 의지를 존중할 수 있는가, 라는 지점이다. 그 여부에 따라 저메키스가 꾸는 디지털 캐릭터의 꿈 역시 가치적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눈에 띄는 건 디지털 캐릭터 아래 놓인 짐 캐리의 흔적이다. 그는 3D디지털 부호의 숲 안에서도 아날로그적인 기본기를 설득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역시 <크리스마스 캐롤>은 진화보다도 답보란 측면에서 유용한 몽상가의 꿈인 셈이다.
삶은 악보가 없는 연주와 같다. 저마다의 일상으로 마디를 채우고, 삶의 악절을 이룬 뒤, 종래엔 하나의 악보로서 인생을 거둔다. 소나타처럼 단정하게 저마다의 멜로디를 보존하는 개인의 삶은 콘체르토(concerto)와 같은 긴장과 이완의 협주적 관계로서 세계의 하모니를 이루기도 하며 어느 누군가는 거대한 심포니처럼 웅장한 울림을 전하고 영원을 산다. 저마다의 인생은 이 세계의 악장을 이루는 크고 작은 악절이다. 멜로디이며, 리듬이고, 하모니다. 그 삶에 준비된 악보는 없다. 누구나 텅 빈 오선지와 같은 시간을 제 삶으로 채워나간다. 누구나 <솔로이스트 The Soloist>로서 삶을 연주해나간다.
2005년 4월 17일, LA타임즈엔 ‘2현으로 세상을 소유한 바이올린 주자(Violinist Has the World on 2 Strings)’라는 헤드라인의 칼럼이 실렸다. ‘포인트 웨스트(POINTS WEST)’를 연재하는 인기칼럼니스트 스티브 로페즈의 글이었다. LA의 ‘펄싱 스퀘어(Pershing Square)’공원에 있는 베토벤 동상 주변에서 들려오는 ‘베토벤 소나타’를 쫓아간 ‘스티브 로페즈(Steve Lopez)’는 2현밖에 남지 않은 고물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나다니엘 안소니 에이어스(Nathaniel Anthony Ayers)’를 만났다. 그 뒤로 스티브는 나다니엘에 관한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도시의 거리 정책에 대한 의견을 쏟아냈다. 결국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고 도시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LA타임즈 기자이자 인기칼럼니스트인 스티브 로페즈(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정신적 질환으로 인해 줄리어드 음대를 중퇴하게 된 거리의 악사 나다니엘(제이미 폭스). 스티브 로페즈가 나다니엘에 관해 연재한 칼럼을 엮어 전기적 소설로 각색한 동명원작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솔로이스트>는 실화와 영화의 협연이다. 단조와 같은 삶 속에서 피로와 권태를 느끼는 스티브는 전환을 위한 쉼표를 갈망한다. 도돌이표와 같은 착란에 갇힌 나다니엘에겐 새로운 삶을 위한 마침표가 필요하다. 나다니엘을 위해 헌신적인 원조를 마다하지 않는 스티브는 나다니엘을 통해 드라마틱한 기사 소재가 아닌 진짜 삶을 정화시키는 감동을 얻는다. 나다니엘은 스티브의 진심을 통해 점차 세상에 마음을 열어나간다.
스티브와 나다니엘의 관계에 망원경을 들이미는 동시에 그들의 개별적 삶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솔로이스트>는 현실에서 얻은 상처를 치유하는 두 사람의 관계를 묘사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 관계적 묘사방식에서 현실적 실화를 스크린에 옮겨 넣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얻어내기 어렵다. 형태적으로 관계를 묘사해나가지만 재현적 이미지 이상의 정서적 감흥에 도달하지 못한다. 제인 오스틴 원작의 <오만과 편견>과 이언 매큐언 원작의 <어톤먼트>와 같이 영국작가들의 텍스트를 풍요롭고 섬세한 이미지로 전환해낸 조 라이트의 감수성 어린 재능도 <솔로이스트>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섬세한 문체를 예민한 영상으로 치환하고 풍요로운 문장을 풍부한 색채에 반영하며 조 라이트의 감각을 비범하게 드러내던 전작들과 달리 <솔로이스트>는 또렷하고 선명한 이미지가 주류를 이룬다. 물론 콘트라베이스 현을 포착하는 클로즈업 광각 샷과 함께 베토벤의 관현악을 듣는 나다니엘의 심상을 빛의 파동으로 치환한 환상적인 장면과 같이 예민한 시선과 풍요로운 감각을 드러내 보이긴 하나 전반적으로 <솔로이스트>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이미지는 그 드라마만큼이나 평이한 결과물에 가깝다.
현실은 때로 영화보다도 영화 같은 감동을 선사한다. 그건 <솔로이스트>가 재현해낸 실화 역시 마찬가지다. 스크린은 단지 현실의 감동을 반영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현실이 이뤄낸 감동의 본위가 스크린에 얼마나 충실히 반영되고 있는지, 혹은 스크린이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발췌해내고 있는지가 주요한 관점으로서 감상을 지배하게 된다. 물론 영화의 끝에 다다라서야 뒤늦게 그 사연의 실체가 된 현실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것이 실화라는 정보를 미리 접하지 못한 관객에게) <솔로이스트>는 허구적 사연을 감상하고 있었다고 판단한 관객의 착시를 보다 강렬한 감상으로 이끌어낼 가능성이 다분한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끝에 걸린 현실성의 환기가 <솔로이스트>에서 가장 강렬한 대목이다. 영화보다도 영화 같은 현실을 통해 완성된 영화라는 점이 <솔로이스트>에 강한 방점을 남긴다. 이는 결론적으로 <솔로이스트>가 부여하는 영화적 감동이 뒤늦게 체감하는 현실에 대한 환기보다 놀라운 의미를 선사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동시에 두 인물의 관계와 함께 개별적 인물의 고독과 혼란을 묘사하는 영화는 두 영역에 놓인 정서를 적절히 다스리지 못하고 저마다 방치하듯 선을 벌려나가는 느낌을 준다. 덕분에 내러티브의 집중력이 응집되지 못해 감상을 흩뜨리고 있다는 인상을 느끼게 만든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제이미 폭스는 호연을 펼친다. 하지만 순차적인 수순을 따르듯 전개되는 드라마 속에서 두 배우의 연기 역시 평범함을 더하는 요소처럼 나열되는 것만 같다. <솔로이스트>는 영화를 뛰어넘는 현실의 가치를 방증하는 작품에 불과하다. 딱히 부족한 인상을 남기는 건 아니지만 특별한 인상을 남기는 것도 아니다. 영화의 말미에 다다라 스티브 로페즈와 나다니엘 안소니 에이어스의 근황을 전하는 자막이 영화적 재현보다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실화적 유산을 넘어서지 못한 재현적 한계의 사례로서 유용해 보인다. 마치 원곡의 울림에 도달하지 못하는 연주력을 선보이는 관현악단의 공연을 보는 것만 같다. 다만 에사 페카 살로넨의 지휘 아래 베토벤 심포니를 연주하는 LA 필하모닉의 공연은 어떤 영화적 얼개와 별개로 좋은 부록의 역할을 한다. 만약 현재에도 그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두 인물의 실제적 모습을 보고 싶다면 LA타임즈 홈페이지에 있는 스티브 로페즈의 칼럼을 검색해볼 것. 칼럼과 함께 첨부된 동영상 너머의 실제적 삶은 재현이 넘볼 수 없는 감동을 전달한다.
의문스런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사건에 연루된 소년과 소녀. 용의자의 자살로 수사는 종결되고 사건은 마무리된다. 그리고 18년 후, 살인사건을 담당했던 형사 사사가키가 성인으로 성장한 소년과 소녀, 료지와 유키호의 행방을 쫓는다. 일본의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이자 대표작으로 꼽히는 ‘백야행(白夜行)’은 밀폐된 인물의 심리와 퍼즐 같은 서사적 진행을 통해 추리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이다. 미스터리한 장르적 구조 속에 내재된 멜로적 감수성은 ‘백야행’의 특이점이라 할만한 지점이다. 은밀하게 감지되는 두 남녀의 감정적 교류가 평행적 거리감을 유지한 채 조각처럼 나열된다. 칠흑의 아스팔트를 얇게 가린 흰 눈처럼 멜로적 감수성을 가린 장르적 연막, ‘백야행’은 추리극의 베일로 감싼 멜로나 다름없다.
원작소설과 동명의 제목을 지닌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이하, <백야행>)는 이런 원작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리메이크에 반영했다. 무엇보다도 <백야행>의 관건은 각색의 완성도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870페이지에 달하는 단행본 3권 분량의 서사를 2시간 여의 러닝타임으로 변환해낸 결과물은 원작을 접한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지점이다. 20여 년의 세월을 밀어내는 서사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과 두 남녀의 주변부를 채우는 다양한 인물들까지, ‘백야행’은 한 편의 영화로 변주하기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지닌 소설임에 틀림없다. 일본에서도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된 바 있는 ‘백야행’의 영화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건 소설의 원형을 온전히 영상으로 변환하기 위해선 긴 호흡이 필요하다는 제약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원작과 달리 영화가 서사의 너비를 14년으로 압축한 것도 어쩌면 서사적 너비를 덜어내기 위한 방편은 아니었을까 추측할만한 단서로서 유효해 보인다.
일단 <백야행>은 인물과 서사를 적절히 생략하거나 도치시킴으로써 원작의 부피를 줄여나간다. 서사적 방아쇠가 되는 살인사건으로부터 격발되듯 순차적으로 나아가는 원작의 순행적 서사와 달리 현재와 과거를 적절히 섞어가는 서사적 구성은 적절한 선택이라 할만하다. 섹스신과 살인신을 교차한 도입부의 영상도 나름의 흥미를 당긴다. 서사를 재배열하는 각색의 측면에서 <백야행>은 어느 정도 성공적인 선택을 이뤘다는 감상을 준다. 다만 서사적 변주와 함께 원작과 다른 뉘앙스가 발생한다.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원작이 차분하게 진전될 수 있는 건 긴 서사적 호흡 속에서 세밀한 묘사를 활용하기 때문이다. 러닝타임의 제약을 염두에 두고 축약과 변주의 과정을 거친 <백야행>은 서사적 부피가 줄어든 반면 정서적 질량은 보다 넘친다. 그만큼 밀도가 높아졌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나열의 방식에서 성과를 거뒀지만 감정을 넘쳐내는 방식이 지나치게 성급하다. <백야행>이 원작과 명확히 달라지는 건 후반부의 감정적 표현에서 비롯된다. 결코 마주서지도, 마주치지도 않는 남녀의 거리감이 명확히 묘사되는 가운데서도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는 멜로적 감수성을 독자에게 인식시키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멜로적 감정을 끝내 직설적으로 호소하고 만다. 구체적으로 후반부에 다다라 두 남녀의 마주침을 묘사하는 몇 번의 과정은 그 자체로 실패적이다. 얇은 비닐에 담긴 물처럼 쉽게 터져서 넘쳐흐를 것 같지만 좀처럼 새어나가지 않는 감정의 내밀함을 유지한다는 것이 원작의 매력이라 한다면 <백야행>은 이를 거부하듯 정반대의 선택을 감행함으로써 신파적 비극성을 과감히 전시한다. 마치 원작에서 가려진 단면을 발굴하듯 두 남녀의 접촉을 노골적으로 묘사한다. 선택은 영화의 몫이다. 그리고 선택에 따른 효과적 책임 역시 영화의 몫이다. <백야행>은 후반부에 다다라 온전히 신파적 눈물을 강요하는 멜로로서 스스로를 가둔다. 감정이 차고 넘친다. 연막과 같은 신비감과 모호한 흥미는 온전히 휘발되고 증발된다. 원작과 다른 형태를 지닌다는 건 리메이크로서 가능한 선택이다. 하지만 원작과 차별화된 장점을 선사하지 못했을 때 그 선택은 오판이 된다.
전체적인 분량도 길다. 137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원작의 부피를 염두에 둔다면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백야행>은 사건의 개연성을 확보하는데 실패한 드라마다. 서사를 직조하는데 급급할 뿐, 인물의 심리를 매만지는데 소홀하고 불필요한 감정을 덧씌워 감상의 사족을 벌려나간다. 사사가키의 대역이라 할만한 동수(한석규)는 원작에서 일종의 중계자 역할을 하던 캐릭터다. 원작으로 치자면 평행적인 거리감을 둔 묘연한 관계 속에 놓인 미호(손예진)와 요한(고수)의 접점을 설명하는 캐릭터다. 이와 달리 영화는 동수를 두 남녀의 입장을 대변하는 중계자 캐릭터가 아닌, 또 다른 감정적 이입의 대상으로서 극에 활용한다. 역시나 다른 선택을 했다는 건 문제가 아니다. 다만 역시나 그 선택이 얼마나 효과적인가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동수가 자아내는 감정은 불필요한 확장이다. 딱히 그 확장된 쓰임새엔 설득력이 없다. 덕분에 감정적으로 집중돼야 할 두 남녀, 미호와 요한의 심리 묘사와 이를 보좌하는 배경적 묘사가 구체화될 너비를 상실하고 낭비적인 감정적 처리만 추가된다. 결말부에 다다라 두 남녀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일종의 강박처럼 보일 정도다. 앞서 해결하지 못한 감정적 충만을 뒤늦게나마 한방에 터트려야 한다는 강박이랄까. 결과적으로 후반부에 다다라 서로에 대한 연민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두 남녀의 태도는 극적인 일관성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형세에 가깝다.
<백야행>은 마치 전반과 후반이 다른 영화 같다. 이성적 형태로 나아가던 영화는 끝으로 다다를수록 눈물을 조장하는데 바빠 보인다. 결말부에 다다라 희미한 신파적 여운을 남기는 원작과 전혀 다른 감상을 부여한다. 원작과 유사한 형태적 결말을 선보이면서 전혀 상반된 감상적 차이를 남기는 건 이 때문이다. 시대적 분위기마저 적극 활용하는 텍스트의 방대한 부피를 이미지에 축약하기 위한 고민은 적당했지만 그 안에서 유지해야 할 감정의 질량적 보존에 무신경하다. 덕분에 전반적인 영화적 밀도마저 느슨해진다. 감정의 선이 불분명한 영화의 태도는 캐릭터들마저 그 감정 안에서 헤매게 만드는 것만 같다. 덕분에 배우들마저도 그 캐릭터의 늪에 빠진 것처럼 기능적인 묘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마냥 보인다.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선사하던 인물의 매력도 온데간데 없어진다.
백열등과 같이 미열한 밝기를 유지하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형광등처럼 깜빡 거리다 이내 환해진다. 덕분에 감정은 숨을 곳을 잃은 채 지나치게 명확히 노출된다. 감정적 명암의 안배에 실패했다. 감춰야 할 것과 드러내야 할 것에 대한 변별력이 온전히 상실된 것만 같다. ‘블랙 앤 화이트’의 대비적 미장센을 부각시키는 것도 좋지만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백야행>은 내밀하게 보존된 감정적 여운을 놓쳐버린 채 구질구질하게 감정적 호소에만 집착한다. 원작과 차별화를 이루지 못하면서 원작의 장점을 놓쳐버린 셈이다. 결국 감상적 명암만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명확한 감상이란 분명 긍정적인 쪽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나약함은 힘을 필요로 하고, 배신은 피를 부른다.” 닌자를 양성하는 비밀 집단 ‘오즈누’의 수장 오즈누(쇼 코스기)의 대사처럼 그곳은 약육강식의 세계다. 그리고 라이조(정지훈/비)는 그곳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자 체제에 대한 반역자다. 일종의 신고식이라 할만한 첫 번째 살인 임무 이후, 조직에 등을 돌리게 되는 라이조는 자신의 삶이 있는 곳이라 믿었던 ‘오즈누’를 떠나 진짜 자신의 삶을 찾아 달아나고 조직에 맞선다. <닌자 어쌔신>은 폭력적 강압을 강령처럼 받아들이며 유지되던 조직 체제에 저항하는 개인의 투쟁을 선혈이 낭자한 살육적 이미지로 담아낸 B급 취향의 액션물이다.
<닌자 어쌔신>이 묘사하는 닌자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초인이나 다름없다. 유년시절부터 고아들을 모아 살인병기로 키워내는 비밀집단 오즈누는 닌자라는 존재감에 신비를 덧씌워 리모델링한 가상적 세계관이다. 은둔과 잠입을 장기로 뛰어난 암살적 능력을 발휘한다는 닌자의 베일적 존재감 자체를 도화지 삼아 상상력을 덧칠하고 스크린에 전시한다. 사실 이는 서양에서 제작된 오리엔탈리즘 소재의 영화들이 범하는 자아도취적 환상에 가깝게 보인다. 다만 그것이 만화적이고 게임적인 세계관 안에서 펼쳐낸 과장이라고 납득했을 때 그 착시적 환상을 인정할만한 수준은 된다. <닌자 어쌔신>을 비현실에서 펼쳐지는 허구적 캐릭터들의 피범벅 액션물이라 이해하고 납득했을 때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충분조건이 성립된다.
사실 낡은 유물과 같은 닌자를 현대시제 안에서 재현했다는 점만으로도 <닌자 어쌔신>은 이미 시대적 현실감을 거부하는 판타지다. ‘오즈누’가 ‘명성황후’시해에도 관여했으며 현대에서도 암암리에 중요한 암살사건에 관여하고 있다는 ‘유로폴(Europol)’ 수사관의 발언은 현재까지 생명력을 유지하는 구시대의 유물의 존재적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한 수순에 가깝다. 비밀조직의 활약상을 구체화시킴으로써 조직의 연원적 깊이를 설명하고 은밀한 활동범위를 인지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허구적 환상을 실제적 세계관에 이입시킬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한다. 다만 ‘명성황후’시해 사건, 일명 ‘을미사변’이 유로폴 수사관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정도로 손쉬운 예시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물론 그것을 (한국 배우가 주연을 맡은 할리우드 영화가 배려한) 이벤트로서 마련된 의도적 삽입이라 인식한다면 심각하게 진지해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 뒤로 등장하는 TV속 한국사극은 일종의 애교다.
물론 <닌자 어쌔신>에 조준된 기대감의 팔할은 액션에 놓여 있을 것이다. 피칠갑을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닌자 어쌔신>은 상업영화의 포맷 안에서 기획되고 제작되는 안전한 액션영화라고 하기엔 강력한 취향을 드러내는 영화다. 도입부부터 고어적 수준의 신체훼손 이미지를 노출하며 그 이후로도 잔인한 장면들을 더러 연출해 보인다는 점에서 B급 취향을 과감히 전시한다. 물론 도입부의 살육신을 포함해 라이조와 오즈누의 일대 다수 대결을 묘사하는 대부분의 액션 시퀀스들은 현란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장치적 효과보다도 육체적 스턴트의 흔적이 두드러지는 <닌자 어쌔신>은 아날로그적 역동성을 만끽하게 만드는 올드한 감성의 액션영화라 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대부분의 액션신이 밤시간과 어두운 실내를 배경으로 묘사되고 빠른 몸놀림을 따라잡지 못하는 카메라엔 잔상이 가득한 경우가 많아 시각적 제약이 뒤따른다. 또한 지나치게 건조한 톤의 감정을 일관적으로 밀어붙이는 탓에 액션을 구경한다는 것 이상의 흥분감이 동원되기 어렵다. 건조하게 스크린 너머의 액션을 담담하게 지켜보게 될 공산이 크다.
<닌자 어쌔신>은 대중적인 할리우드 메인스트림 영화라기 보단 마이너적인 B급 취향의 액션영화라고 칭하는 게 보다 어울려 보인다. 게임이나 만화적 세계관에 심취했다는 워쇼스키 형제의 취향도 배제하기 어렵다. 오즈누에 반발한 라이조가 그에 맞서 조직을 붕괴시켜나가는 과정은 흡사 스테이지를 돌파하는 롤플레잉 게임 캐릭터의 활약상을 스크린에 묘사한 것이나 다름없다. 스테이지마다 적절한 미션을 수행하고 그 끝에 다다라 최종 보스를 격파하면 게임은 끝난다. 그만큼 <닌자 어쌔신>은 단순하고 명확한 영화다. 순차적으로 등장하는 액션신의 향연은 볼거리를 이루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순차적인 수순 안에 놓여있기에 능동적인 예상을 무마시킨다. 예상범위 내에 명확히 갇힌 이야기처럼 그 사연의 진전을 통해 얻을만한 감흥은 얕은 수준이다. 덕분에 클라이맥스가 이루는 감흥의 세기도 상대적으로 낮아진다. 롤플레잉 게임처럼 디자인된 세계관을 품은 내러티브는 단지 게임적 세계관을 작동시키기 위한 에피소드적 장치에 불과하다.
만약 <닌자 어쌔신>을 할리우드 표준 규격의 대중적 액션영화로서 기대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방향를 조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B급 취향의 하드고어 이미지를 저돌적으로 제공하는 영화로부터 취향의 소통불가적 배신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선 그럴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취향을 적절히 감내할 수 있는 관객에게 <닌자 어쌔신>은 적절한 킬링타임을 제공하는 액션영화로서 유효할 만하다. 무엇보다도 정지훈의 할리우드 주연작이란 사실에 기대감을 품은 국내관객에게 팁을 하나 주자면, 터미네이터적인 무표정을 일관하고 감정적으로 봉인된 캐릭터 라이조를 연기하는 정지훈은 묵묵한 액션 캐릭터로서 <닌자 어쌔신>에 철저히 복무하고 있다. 영화적 의도에 적합한 성과를 드러내지만 그 이상의 ‘연기’를 원했을 관객이라면 이 역시 기대적 방향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땅이 갈라지다 이내 꺼진다. 달아날 곳조차 없을 정도로 지반 전체가 요동을 친다. 캘리포니아주 전체가 마치 기울어진 접시 위의 팬케이크처럼 바다 속으로 잠겨버린다. 화산도 폭발하고, 쓰나미까지 밀려온다. 지구상의 대륙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사람이 발붙이고 설 땅이 없어진다. 말 그대로 전지구적 재앙이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2012>는 재난이란 이름으로 명명되는 이미지들의 합집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재앙 블록버스터의 총아다. 재난이라면 보여줄 만큼 보여준 할리우드가 아예 끝장을 보자는 심산으로 영화를 제작한 것마냥 보일 정도로 막대한 규모를 전시하는, 진정한 블록버스터다.
지구의 멸망, 더 나아가서 인류의 멸망을 그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2012>는 바티칸 궁전을 붕괴시키고 리우데자네이루의 그리스도상을 무너뜨리는 등, 전세계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재난적 이미지를 전시해내며 묵시록적 기운을 과시한다. 재난 블록버스터는 현실에서 비극으로 점철될 만한 재앙을 스크린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만듦으로써 엔터테인먼트적 쾌감을 발생시키는 오락적 결과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2>는 분명 대단한 볼거리임에 틀림없다. 눈 앞에 생생하게 전시되는 파괴적인 장관이 즐비한 <2012>는 단지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상을 지배할만한 거대한 시퀀스를 품고 있다.
사실상 <2012>에서 드라마란 재난의 이미지를 연결하기 위한 교각이나 다름없다. 예감하지 못했던 재난의 한가운데 놓이게 된 인간들은 생존을 위해 달리고 비행하며 헤엄친다. 물론 그 이전에 재앙을 미리 점지하는 과학자들과 이를 보고받는 세계적인 권력가들의 침통한 표정을 통해 묵시록적인 엄숙함을 요구하기도 한다. 어차피 <2012>가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즐기기 위한 킬링타임 무비라는 것을 인지한 관객에게 <2012>에서 이미지 이외의 영역을 차지하는 요소들의 역할이란 그 스펙터클을 효과적으로 엄호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2012>는 압도적인 이미지의 너비에 비해 감정적으로 와 닿는 충격적 강도가 기이할 정도로 얕은 영화다.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2012>는 규모 이외에 내세울 것이 없는 볼거리에 불과한 탓이다.
재앙으로부터 탈출하는 인물들은 생존을 위한 절박함보다도 되레 롤러코스터를 타는 이의 아찔함처럼 감정을 표출한다. 그것이 때때로 재앙에 놓인 이들의 사실적 비극을 간과하게 만든다. 재앙 앞에서 생존적 본능을 곤두세우기보단 비범한 휴머니즘을 역설한다. 그것은 감동적이라기 보단 허세적이다.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도는 문제가 아니다. 단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허술한 탓이다. 디테일한 CG를 통해 실물감이 대단한 재앙적 이미지와 달리 재앙을 목전에 두고 대의를 주창하는 인물들의 뻣뻣함이 스펙터클마저 느슨하게 만든다. 서스펜스적인 연출 감각도 부재하다. <2012>의 재난적 광경을 지켜본다는 건 말 그대로 지켜보는 것에 불과하다. 그 상황이 야기할만한 긴장감이 좀처럼 객석으로 전이되지 못하고 스크린 안에서 증발된다. 단지 전인류적 위기와 다수의 죽음을 목격하고 있다는 침통한 감상이 영화와 무관하게 개인의 심상을 지배하고 말 뿐이다.
<투모로우>를 통해 전지구적 재앙을 그렸던 롤랜드 에머리히는 <2012>를 통해 보다 파괴적인 인류적 미래를 그려낸다. <2012>는 어쩌면 대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할리우드의 위력을 대변하는 과시적 결과물이나 다름없다. 또한 그 동안 할리우드가 재난 블록버스터라는 이름으로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을 전시하는 욕망의 분출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2012>는 말 그대로 그 이상의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영화다. 이미 재난 블록버스터라는 이름 안에서 이뤄진 모든 것들을 조합해놓은 편집영상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거대한 몸집에 비해 두뇌가 작은 공룡들처럼 창의력도, 상상력도 부족하다. 물론 재난의 종합전시관이란 측면에서 볼거리는 분명하다. 결론은 (어떤 식이든 <2012>를 보고야 말 관객에게) 스크린이 큰 상영관이 진리다.
햇살이 안온하게 내리쬐는 산뜻한 외관의 풍경과 달리 깊게 그늘지듯 침침한 내부의 정경이 대조적이다. “이런 철창이 있을 곳은 세상에서 2군데 밖에 없다. 동물원과 여기.”대사가 지칭하는 그 ‘여기’란 곳은 바로 교도소다.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교화시켜서 내보내는 곳이기도 하지만 어떤 범죄자는 그곳에서 걸어나갈 수 없다. 교도소는 사형을 집행하는 곳이기도 한 탓이다. 그리고 그곳은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거나, 실행하거나, 확인한 이가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집행자>는 제목 그대로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관들을 중심에 둔 영화다. 사형이라는 소재 내에서 사형수에 대한 인권을 논하기 이전에 그 제도적 행위를 지켜봐야 하고, 실행해야 하고, 확인해야 하는 제3자의 인권을 살핀다. 단순히 사형수에 대한 인륜적인 동정에 천착하지 않고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관들의 심리적 채무와 그 끝에 남겨질 반영구적 상흔을 살핀다. 무엇보다도 <집행자>는 사형이라는 제도의 본질적 문제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작품이다.
사형이라는 제도가 심각한 건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끊음으로써 반인권적인 처벌을 자행한다는 점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그 제도적 차별이 부득이하게 제3자의 심리적 피해를 묵인해버리고 있다는 데서 보다 심각하다. 사형이라는 제도를 결정하는 건 헌법적 약속이지만 결과적으로 대의적 의사에 따른 법치적 행정은 어느 개개인들의 손끝을 통해 이뤄진다. 결과적으로 그 행위에 손을 담근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에 대한 심리적 갈등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셈이다.
그만큼 묵직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고 할만한 <집행자>는 베테랑 교도관과 신참 교도관을 대비시키고, 범죄자에 대한 냉소한 시각과 동정적 시선을 배치함으로써 다양한 프레임을 영화에 장치하고 이를 통해 사건의 양상을 발전시켜나간다. 그 과정에서 체제에 적응해나가는 신참 오재경(윤계상)과 베테랑 배종호(조재현)의 관계는 버디무비를 보는 듯한 흥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체제 속에서 사람의 본성이 어떤 식으로 변질되어가는가라는 고찰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종종 자신이 짊어진 무게감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듯 지나치게 화기애애한 순간을 묘사하기도 하고, 가벼운 웃음을 매복시키기도 하며, 애틋한 감정을 끌어당기기도 한다. 덕분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처럼 어색한 흐름이 발견되기도 하며 불필요하게 확장된 감정적 진화가 감지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집행자>는 소재가 발생시킬 수 있는 다양한 논지들을 단계적으로 나열할 뿐, 창의적인 형태로 발전시켜나가지 못한다. 일차원적인 연극적 상황을 연출해서 단조롭게 의미를 부각시키고 캐릭터를 통해 직설적인 감정을 쏟아내지만 훈육처럼 뻣뻣해서 깊게 마음을 끌어당기거나 흔들어 놓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형을 집행하는 광경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압력은 대단하다. 특히나 사형수 이성환(김재건)과 오랜 벗이 된 김교위(박인환)가 직접 그의 사형집행을 실시하는 순간의 페이소스는 <집행자>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인상적인 감정을 끌어내는 시퀀스라 할만하다. 하지만 그 외에 사족과 같은 서브플롯들은 지나치게 선명해서 되레 균형을 맞추지 못하는 느낌이다. 마치 교도소 안팎의 햇살과 그늘의 경계처럼 연출적 묘미와 의미적 전달을 중화시키지 못한 모양새가 흠이랄까.
플롯을 좀더 과감하게 정리했다거나 인물들의 감정을 지나치게 일반화시키지 않았다면 좀 더 확고하고 흥미로운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이런 사족 같은 감상이 남는 건 결국 어떤 좋은 취지나 의미만으로 영화가 완전해질 수 없다는 문제를 다시 한번 깨닫게 만든다. 좋은 발언만큼이나 좋은 발성도 중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