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이트를 타거나 죽거나’라는 제목 그대로 <스케이트 오어 다이>는 스케이트를 타고 사선을 넘나 드는 두 소년의 도주를 그리는 작품이다.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줄거리는 간단명료하다. 우연히 살인 현장을 목격한 두 소년이 스케이트 보드에 의지한 채 자신들을 추격하는 범인들로부터 달아나고 경찰의 도움을 받고자 하지만 그들을 쫓는 적의 정체를 알게 된 뒤, 자신들이 믿을 만한 상대가 경찰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는 것.
음모론의 플롯을 아우른 범죄영화지만 <스케이트 오어 다이>는 새로운 전형을 제시하는 장르물이 아니다.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특이점은 서사가 아닌 묘사에 있다. 무엇보다도 <스케이트 오어 다이>가 실제로 스케이트 보드를 잘 다루는 어린 배우들을 캐스팅함으로써 사실적인 스턴트 액션을 연출해낸다는 것은 이 영화의 목적이 어디에 놓여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대변하는 바나 다름없다.
추격과 도주의 도구가 되는 스케이트 보드는 단순히 이 영화의 소재 이상의 존재감을 자랑하는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킥 플립과 같은 기본적인 기술을 비롯해서 다양한 고난도 기술을 선보이는 배우들의 스케이트 보딩을 본다는 건 이 영화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묘미이자 이 작품의 핵심적 의도나 다름없다. 스케이트 보드를 이용한 스피디한 추격전과 지형을 이용한 스케이트 보드 액션은 볼거리로서 유용한 결과물이다.
동시에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또 다른 특이점은 이 영화의 배경이 프랑스 파리라는 사실이다. <택시> <스틸> <13구역> 등 파리를 배경으로 둔, 파리에서 제작된 스피디한 액션 영화들의 새로운 계보를 이루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스케이트 오어 다이>는 프랑스 상업영화들이 익스트림 스포츠를 소재로 둔 스턴트 액션에서 꾸준히 소재를 발굴해내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파리라는 고도시를 배경으로 삼아 펼쳐지는 스피디한 추격전은 동류의 할리우드 영화와 다른 차별화된 재미를 선사한다.
하지만 <스케이트 오어 다이>는 유사한 소재를 활용한 동류의 장르물 가운데 신선하다고 평할 만한 위치를 차지할만한 작품은 아니다.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장점과 단점은 그 지점에 놓여 있다.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둔 익스트림 스포츠 킬링타임 무비라는 특이점을 지니고 있으나 활극적인 재미의 자극이 떨어지는 후반부에 다다르면 서사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동시에 음모론을 축으로 둔 범죄영화로서의 내러티브가 탄탄하거나 깔끔한 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한 흠이다. 결국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성패는 영화 속에서 질주하는 스케이트 보드와 ‘함께 달아나거나 멈춰서 구경하거나’에 달렸다는 말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빠른 속도감도 결국 익숙해지기 마련이라는 것.
좋은 햇살을 받고 정제된 소금과 맑고 깨끗한 천연의 물, 기름진 토양 위에서 자란 콩. 깊은 맛이 우러나는 좋은 된장을 만들기 위한 기본적인 재료들. 하지만 이 모든 재료들이 마련된다 하여 꼭 좋은 된장이 빚어질 수는 없는 법. 이 모든 재료를 빚어낼 손의 정성도 중요하고, 오랜 시간 제 몸에 된장을 품을 장독대가 튼실해야 하며 풍부한 햇살과 적절한 바람을 맞을 시간이 필요하다. 그 모든 조건을 완벽히 갖춘다면 필히 깊고 풍부한 맛이 담긴 된장을 빚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모든 조건을 다 갖췄다 해도 다다를 수 없는 궁극의 맛을 선사하는 특별한 된장의 비결 그것은 무엇일까.
탈옥 후 5년 동안 잡히지 않았던 희대의 살인마 김종구는 결국 경찰에게 검거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를 검거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강력반 김형사도, 이형사도 아닌, 된장이다. 그러니까 사연인즉슨 된장찌개를 먹다가 자신을 검거하러 접근하는 형사들도, 자신을 겨눈 총부리도 인식하지 못한 채 마저 된장찌개를 밑바닥까지 긁어먹고서야 넋이 나간 표정으로 수갑을 찬 채 경찰차에 올랐다는 것이다. 이 기막힌 사연을 전해들은 특종PD 최유진(류승룡)은 이를 취재 조사하던 중, 그 신비한 된장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된장녀, 장혜진(이요원)의 존재를 알게 된다.
너무도 익숙하기에 낯선 제목인 <된장>에서 ‘된장’은 일종의 미끼이자 핵심이다. 희대의 살인마의 경계를 일순간 해체시켜버린 된장찌개의 비밀을 쥔 여인의 정체를 탐문해나가는 영화의 내러티브는 곧 그 된장에 얽힌 물음표의 실체에 접근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 의문 너머에 자리한 사연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는 수순으로 관객의 흥미를 이어나간다. 마치 후각을 통해 얻어진 식욕이 미각적인 만족으로 이어져 나가듯 <된장>은 소재 자체가 발생시킨 일종의 흥미를 이야기 본연의 감동으로 승화시켜나가는데 성공했다. 이는 단지 소재를 통해 완성해낸 이야기의 완성도가 탄탄한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된장이라는 소재의 특성을 이야기에 착안해낸 기획력과 그 기획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낼 것인가라는 구성력이 이를 든든하게 지원하고 있는 덕분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된장이라는 소재를 되레 심오하고 세심하게 다룸으로서 소재에 의외적인 특이성을 부여하고 흥미를 유발시킨 뒤, 이를 내러티브의 추진력으로 밀고 나간다. 기본적으로 완급조절이 탄탄한 스토리텔링을 능수능란한 연출로 구사하는 <된장>은 안정적인 배우들의 연기에 힘입어 이야기가 품고 있었던 가능성을 실현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좋은 된장을 만드는 비결이 단순히 이상적인 환경 조건을 공식처럼 더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정성과 기다림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된장>은 뛰어난 이야기란 것이 단지 좋은 소재와 완결성의 구조의 조합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맛있는 이야기는 많아도 숙성된 감동을 지닌 이야기를 찾기란 쉽지 않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질려도 감동은 질리지 않는다. 그리고 <된장>은 질리지 않는 감동을 맛있게 이야기하는 진국과 같은 작품이다.
절대무공을 자랑하던 고수 라마가 죽어서 남긴 시신을 소유할 수 있는 자는 대단한 능력을 얻게 된다는 소문과 함께 강호에 피바람이 분다. 두 조각으로 나뉜 그의 시체를 소유하고자 절대고수들이 쟁탈전을 벌이기 때문. 그 가운데 잔인한 고수 문파로 알려진 흑석파가 시신을 보유한 한 가문을 급습해 부자를 죽이고 시신의 절반을 얻는데 성공하지만 그 시신을 소유하게 된 여성 검객 세우는 자신의 그런 삶에서 벗어나 평범한 삶을 살고자 도주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바꾸는 성형에 성공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고 흑석파는 그녀의 뒤를 좇게 된다.
앞선 문맥은 <검우강호>의 본격적인 서사가 시작되기까지의 여정을 설명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검우강호>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프롤로그 시퀀스와 CG컷을 동원한 오프닝 시퀀스가 포함된 10분여의 러닝타임을 할애하며 이를 설명해낸다. 이는 빠르고 효율적인 선택이다. <검우강호>는 무협물로서 기초적으로 빤한 소재나 줄거리를 공들여 설명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다소 유치한 무협물 특유의 설정을 비범하게 포장하지 않은 채 단지 내러티브의 정보로서 전시되는 이 압축적인 도입부는 <검우강호>가 오락물의 하위 장르로서의 기능성에 충실한 작품임을 기대하게 만든다.
<검우강호>는 할리우드의 영향력이 감지되는 작품이다. 무협의 코드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고전적인 웨스턴 무비의 정서와 특정한 스파이물 영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캐릭터와 플롯까지, 단연 할리우드의 영향력이 감지되는 영화다. 오우삼 자신의 작품인 <페이스오프>의 흔적부터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와 같은 스파이물의 영향력이 깊게 감지되는 <검우강호>는 현대적 소재의 장치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기도 하는 작품이다. 동시에 비범한 대의를 표방하는 무협물의 정서와 달리 물질적인 욕망과 개인적인 삶에 천착하는 인물들의 태도가 보다 현실적으로 그려지는, 무협물의 포맷 안에서 이례적인 정서적 묘사를 선택한 작품이기도 하다.
빼어난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검우강호>는 자신의 노선을 확실히 파악하고 목적지에 다다르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어떤 의의를 전파하기 보단 자신의 기능성을 확실히 인지하고 그 역량을 전시하는데 능한 가공품으로서 유용하다. 다양한 캐릭터들은 저마다의 욕망을 표현하고 갈등을 야기시키는 내러티브의 소모품으로서 유용하게 등장하고 퇴장한다. 시종일관 거듭되는 유려한 액션신을 기대했을 어떤 관객에게는 <검우강호>의 액션신이 양적으로 만족스럽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나 후반부를 장식하는 액션신의 완성도는 분명 즐길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검우강호>는 레일을 깔고 그 위를 달리는 기차와 같은 작품이다. 기차가 지나는 역을 살피기 보단 전진하는 기차의 방향이 보다 뚜렷하게 눈에 띈다. 어떤 특별한 철학적 의미를 발췌해내기 보다는 영화가 발생시키는 장르적 쾌감과 이야기의 진전에 방점을 둔 작품이다. 대단한 장르적 성취를 이뤘다거나 새로운 기원을 여는 작품이라기 보단 제 목적을 이루고 오락적 성과를 제공하는 무협물로서 유효하다. 취향의 문제만 아니라면 딱 눈감고 시간을 죽일 만한 유용한 롤러코스터적 무협물일 따름이란 말이다.
마치 내친 김에 달린다는 말처럼 박훈정은 시나리오 작가에서 연출자로 성큼 올라섰다. 김지운이 연출한 문제작 <악마를 보았다>와 현재 제작 중인 류승완의 차기작 <부당거래>의 원작자로서 유명세를 탄 박훈정의 <혈투>는 단순히 그 유명세의 상승곡선에 올라탄 기획이 아니다.
원래부터 제목이 <혈투>였나? 가제는 없었나?
원래 <북극의 변>이라는 가제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어렵다는 의견이 있어서 직관적인 제목으로 바꿔보자고 하더라. 결국 제작사에서 <혈투>가 어떠냐 하길래 나쁘지 않아서 그렇게 갔다.
시대극이지만 시대적 재현이 많이 중요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시대극으로서 고증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텐데.
글을 쓸 때는 필연적으로 자료조사를 많이 할 수 밖에 없지만 촬영에서 고증이 요구되는 건 비주얼 때문이다. 복장부터 시작해서 객잔의 건축양식도 확인했다. 엄밀히 따지면 역사적인 고증과 틀린 부분들이 없진 않다. 의도한 부분도 있지만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부분도 있다.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하면서도 우리 미술팀에게 강조한 건 의상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 딱히 고증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혈투>에서 나오는 객잔이란 공간의 위치가 만주로 설정됐지만 어떤 특정한 공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 무시하고 영화적 느낌을 살리기 위한 창의력을 최대한 발휘해준다면 좋을 거라 생각했다. 광활한 곳에 놓인 버려진 공간처럼 느껴지길 원했다. 결론적으로 객잔이 세 인물의 무덤처럼 보였으면 좋겠더라. 역사적인 배경에 기대서 갈 뿐, 보이는 것까지 다 정확해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광해군 11년이라는 시대상이 명시되지만 병자호란 이후 북벌론이 대두되던 시대상을 반영한 팩션영화라고 해도 상관이 없겠더라. <혈투>에서의 시대적 배경은 세 인물의 갈등을 야기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처럼 보였다.
의도했던 바다. 역사적인 사실을 상기시키는 게 아니라 단지 영화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정확하게 광해군 11년을 적시한 건 이야기의 설정과 가장 가까운 배경이 바로 그때였기 때문이다. 광해군 7년 즈음에 대북과 소북의 대립으로 옥사사건도 일어났고, 이로 인해 집권층이 바뀌지 않았나. 광해군 11년에 명의 강압으로 인한 출병 사실도 있었으니 이 이야기에 가장 어울리는 그림으로서 적합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런 배경 안에 놓인 세 인물의 사연이었다.
도입부와 결말부를 제외하면 객잔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영화의 8할이다. 한정된 공간이란 점에서 묘사의 한계가 발생하는 셈인데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 저예산 사극을 생각했다. 아무래도 저예산으로 가려면 한정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적합하다. 문제는 이게 상업영화로 기획되니까 방금 지적한 것처럼 공간의 한계가 약점이 될 수 있겠더라. 한 공간만 비춰지면 관객들이 지루해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공간을 바꿀 수는 없지 않나. 그건 <혈투>가 아닌 다른 영화겠지. (웃음) 결국 공간활용에 있어서 고민이 많아졌다.
대안은 어디서 찾았나?
다양한 해석을 얻을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비주얼을 구상했다. 어떻게든 그 한정된 공간에서 긴장감과 재미를 뽑아내고자 했다. 영화적으로 얼마나 잘 표현이 됐을지 모르겠지만 그 안에는 조선도 있고, 명도 있고, 청도 있고, 심지어 벌판도 있다. 세 사람의 관계도 그 공간 안에 표현돼 있다. 세 사람의 자리를 보면 도영은 객잔 안쪽의 객실을 등진 채 앉아있고 헌명은 문과 창문 쪽에 앉아 있다. 그리고 두수가 앉아 있는 곳은 깊은 안쪽이다. 헌명은 어떻게든 객잔에서 나가서 돌아가야 하는 인물이라 문과 가깝게 자리하면서 자주 밖에 나가본다. 하지만 도영은 어차피 갈 곳도 없고 객잔에서 끝장을 봐야 한다. 두수는 어느 쪽이나 붙을 수 있는 인물이다. 이렇게 장치적인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만들어놓고 보니까 사람들이 거기까진 신경 쓰지 않겠구나 싶더라. (웃음)
액션도 하나의 주요한 볼거리다. 하지만 어둡고 한정된 공간에서 액션이 촬영된다는 점도 하나의 과제였을 것 같다.
시나리오를 봤으니 알겠지만 <혈투>에서 필요한 건 화려한 액션이 아니다. 처음에는 그럴싸했던 액션이 점점 찌질해진다. 머리 잡아당기고, 귀나 손 물어뜯고, 그런 싸움에서 비주얼은 필요가 없지. (웃음) 막판에 어두운 아래층에서 싸울 즈음에는 인물들의 감정이 극까지 치닫지 않나. 나는 거기서 액션보단 사람의 감정이 주는 느낌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관객들이 화면을 통해서가 아닌 눈 앞에서 보는 느낌의 싸움을 묘사해야 한다고 느꼈다. 덕분에 촬영팀이 고생했지. 배우들이 연기하는 바로 앞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찍었으니까. (웃음) 조명의 조절도 중요했다. 처음에서 마지막 싸움으로 갈수록 어두워지는데 이는 공간의 변화와 관계가 있다. 광활한 만주벌판에서, 객잔에서, 객잔 지하로 들어가니까. 어차피 세 인물은 만주에 죽으라고 보내졌고, 만주 벌판은 거대한 관이다. 그 관에서 살겠다고 도망쳐서 객잔을 발견했지만 그 객잔에서 셋이 맞닥뜨렸을 때 그곳은 다시 보다 작은 관이 된다. 결국 지하에서 남은 두 사람이 부딪힐 때 그곳은 더 작은 관이 된다. 액션은 그런 공간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한 동선의 수단과도 같았다.
갈등의 축은 헌명과 도영이고, 두수는 그 갈등에 끼어드는 중간자다. 그런 의미에서 두수는 정말 중요한 인물이면서도 소모적으로 그려질 가능성도 있는 인물이다.
<혈투>는 세 인물의 밸런스가 깨지면 끝나는 영화다. 두수는 도영과 헌명의 확실한 대립 구도에 끼어드는 만큼 잘못하면 불필요한 인물처럼 보이거나 헌명과 도영의 균형을 무너뜨릴 가능성도 있었다. 반면 도영과 헌명의 방향추 역할을 하거나 관계의 돌발변수로 작용하기도 한다. 두수는 엄밀히 말하면 헌명과 도영이 속한 지배층 집단의 피해자다. 두수가 직접 말하는 것처럼 여기서 이 꼬락서니로 죽어가야 하는 이유는 결국 얘네 탓인 거다. 두수는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서 뭐든 할 수 있는 인물이므로 가장 중요한 건 생존과 귀향이다. 그런 부분에 집중하고자 했다. 동시에 두 사람의 긴장감으로 채워진 이야기에 약간의 위트를 가미하며 조금 숨쉴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할 수 있게 해주는 인물이다.
두수가 관객으로부터 가장 큰 연민을 얻을 것 같다.
덕분에 제작할 때도 그런 소리 많이 들었다. “(결말을) 바꾸면 안될까요?” (웃음) 사실 두수가 최고의 피해자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나는 그게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적인 설정이기 전에 진짜 그런 상황 속에서 그것이 바로 두수의 현실인 셈이다. 그걸 뒤집으면 판타지가 되는 거고.
결국 계급적 갈등이 <혈투>의 본체인 것 같다.
계급투쟁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헌명, 도영이 지배층이라면 두수는 피지배층이다. 그리고 지배층 가운데서도 권력을 쥐고 있는 쪽과 권력을 쥐지 못한 쪽을 주류와 비주류로 나눌 때, 헌명은 비주류다. 결국 주류였던 친구의 가문을 팔아서 새롭게 주류가 되는 쪽에 붙어보려 하는데 그쪽에서도 사실상 얘를 자기 식구라고 생각해준 적이 한번도 없는 거다. 사실 헌명은 자신에게 파병 가라고 할 때부터 인지했을 거다. 다녀 오면 자신에게 예조 자리를 봐주겠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예조 자리란 굉장한 노른자 자리인 탓에 예조정랑 자리를 놓고 권력을 쥔 자들이 치열하게 다투던 판인데 그 자리에 넣어주겠다는 말 자체가 이미 꾀는 말인 거지. 헌명 정도 머리를 지닌 애라면 분명 자신이 팽 당한다고 느낄만한 사안이었을 거고. 다만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후에 도영의 입을 통해서 정확하게 확인을 받게 되니 폭주하게 되는 셈이다. 계급적 한계를 뛰어넘고자 친구도 팔았는데 결국 다시 그 지경이니까. <혈투>를 보고 나서 이런 부분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길 바라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런 갈등을 직접 연기하는 배우들이 중요했을 것 같다. 배우들이 의도대로 그런 갈등들을 잘 연기해준 것 같나.
결과적으로 배우들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솔직히 첫 촬영 때는 조금 당황했다. 왜냐면 지금까지 내가 써오고 그려왔던 게 있으니까. 하지만 연기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잡아온 것들이 있었고, 그것들이 처음에는 조금 낯설더라.
그 첫 촬영에서 낯설었던 그 배우는 누구였을까. (웃음)
진구였다. (웃음) 크랭크인 이후 첫 신이라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점점 그 모습에 적응해가니까 되레 그것이 진구라는 배우에 어울리는 도영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촬영이 진행되면서 도영이라는 캐릭터를 수시로 손보게 됐다. 고창석 선배도 초반에는 너무 연극적이다 싶어서 고민을 했었는데 금방 도영이나 헌명의 분위기에 맞춰나가더라. 덕분에 지금도 어쩌면 이렇게 캐스팅이 잘 됐을까 생각한다. (웃음)
개인적으로는 진구가 도영 역에도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처음에 진구 씨를 만날 때 배역을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도영 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도영은 영화상에서 감정을 절제하고 내뱉는 진폭이 가장 큰 역할이기에 젊어 보이는 친구지만 기본적으로 연기가 되는 배우이길 바랬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그걸 염두에 두고 만났지만 배역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하지 않았는데 미팅이 끝나고 나가면서 진구 씨가 이런 말을 하더라. “저는 두수 역할도 좋습니다.” 그 순간 그것도 괜찮겠다 싶어졌다. 물론 결과는 예정대로 갔지만.
헌명은 가장 입체적인 감정을 품은 인물이다. 그 감정을 잘 살리는 것이 <혈투>라는 영화의 성패나 다름없었을 거다.
이야기의 단초 자체가 헌명으로부터 출발하니까 중요할 수 밖에 없었지. 사실 헌명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깊은 인물로 그려졌다. 덕분에 영화도 깊어진 것 같고. 사실 헌명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걱정이 있었다. 시나리오를 봐도 알겠지만 헌명은 이미 다 드러난 인물이다. 그래서 전형적이고 단순하게 보여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희순 선배가 역시 잘하더라. (웃음) 헌명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표현하는 게 중요했고, 이게 표현이 안되면 영화 자체가 애매해지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의문을 남기게 될 거라 걱정했다. 하지만 희순 선배가 연기하면서 되레 누가 봐도 헌명이 짠하게 느껴지도록 완성됐다. 사실 헌명을 하고 싶어하는 배우가 좀 있었는데 나는 희순 선배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잘 해주시더라. 하지만 희순 선배는 고생이 많았지.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면 안되니까 자꾸 누르고, 누르고, 그러니까 너무 힘들었을 거다. 그렇게 감정 잡기도 힘든데 액션은 개싸움이고, 또 눈에 피를 떡칠하고 다니니까 눈도 아프고, 나중에 그러더라. “이 영화는 액션도 힘들고! 액션 안 해도 힘들어!” (웃음) 내가 봐도 고생이 많았다.
이 영화의 일등공신이다. (웃음)
늘 우리 스태프들이나 배우들과 함께 있으면 하는 얘기지만 시나리오보다 콘티가 잘 나왔고, 콘티보다 영화가 훨씬 잘 나왔다. 배우들이 굉장히 큰 몫을 해준 덕분이다. 물론 촬영을 비롯한 나머지 부분도 다 좋았지만 기본적으로 배우들이 연기를 잘 해준 만큼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포기해야 하거나 반대로 살을 붙인 부분은 없나.
애초에 약간 미스터리적인 요소를 생각했었지만 조금 저예산영화 같은 느낌이 강해져서 그 요소를 걷어냈다. 그리고 걷어낸 부분에 살을 붙였지. 원래 서현이라는 캐릭터는 없었다. 원안에서는 철저하게 남자들만 나왔지. 제작사에서 디벨롭(develop)하면서 헌명이 지닌 신분상승과 출세의 욕망에 그 나이대 남자들의 욕망 중 하나인 여자에 대한 소유욕을 포함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 부분이 포함되면서 헌명이라는 인물의 갈망이 더 살아났다고 본다.
촬영과정 중에는 그런 부분이 없었나?
현장에서 고친 건 없다. 거의 시나리오와 콘티대로 찍었다. 배우들이 직접 대사를 해보니까 입에 안 붙거나 씹혀서, 혹은 어떤 상황에서 맞지 않는 톤이란 판단이 들었을 때 즉석에서 대사를 고친 건 있지만 그 외에는 고쳐진 부분이 없다. 이건 우리 스태프들에게 고마운 바인데 스태프들이 대본과 콘티를 보고 많은 준비를 해줬다. 적어도 준비가 안됐거나 뭔가 좋지 않아서 뜻하지 않게 고쳐야 했던 부분은 없었으니까. 물론 연출을 하다가 ‘이걸로 한번 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지만 만약 그렇게 갔다가 나중에 톤이 튀어버린다거나 그러면 뒷감당이 안될 것 같아서 그냥 제대로 갔다. 촬영 전에 이 날 이 신을 찍겠다고 모든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약속했는데 그걸 현장에서 필이 왔다고 바꿔버리는 건 여러 사람 힘들게 하는 짓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연출에 대한 감이 부족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약속은 어지간하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입봉작이다 보니까 그런 바도 없진 않겠지. (웃음)
원래 연출을 희망했었나?
영화를 꿈꾸는 누구나 그렇듯 연출을 희망했다. 하지만 감독이 된다는 게 만만한 일이 아니지 않나. 나는 심지어 전공이 그쪽도 아니었고. 우리 때만 해도 전문적으로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도 드물었다. 동숭아트센터 지하에 있는 ‘키노’라는 서점에서 시나리오 전집을 팔았는데 그걸 사서 보기도 했지. 결국 글 쓰는 걸 좋아해서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막연하게 언젠가 연출을 하자는 뜻을 품고 일단 시나리오 작가로 자리잡은 뒤 돈이나 많이 벌자 생각했다. 어이없는 생각이지. 돈 벌려면 다른 걸 했어야지. (웃음)
영화를 전공해볼 생각은 없었나?
중학교 때까지는 만화가가 꿈이었다. 만화를 곧잘 그렸지. 그런데 고등학교 때부터 그림이 늘지 않아서 만화는 아닌가 보다 싶었고 다른 걸 생각했다. 내가 영화나 소설을 보고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결말을 고쳐 쓰길 좋아했다. 그리고 사진이나 음악도 좋아했는데 앞으로 뭘 해야 할까 생각하다 보니까 내가 좋아하는 걸 다 할 수 있는 게 영화더라. 하지만 좀 막연했지. 연극영화과 시험도 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어머니께서……. (웃음) 아무래도 어른들의 편견이 강한 시기이기도 했고, 내가 공부를 못하는 편이 아닌 덕에 부모님의 꿈이 크셨던 것 같다. (웃음)
최근 개봉된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와 제작 중인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의 원작자로 유명세를 탔다. 그런데 왜 <혈투>를 연출작으로 선택한 건가.
사실 <혈투>는 2006년에 쓴 시나리오다. 오래 전에 썼지만 넘기지 않은 이유는 개인적인 애착이 많았던 작품이었던 탓이다. 이 작품을 원했던 제작사나 감독님들이 있었지만 그 분들이 만들고자 하는 방향이 나와 맞지 않더라. 그래서 이건 내가 갖고 있다가 기회가 되면 직접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기회가 온 거다. ‘비단길’에서 시나리오를 몇 개 보여달라고 해서 <북극의 변>을 별생각 없이 보여줬는데 대표님이 다음날 보자고 하더라. 그리고 보자마자 그랬다. “연출 안 해볼래? 이거?” 이건 작가로서 쓴 시나리오가 아니라 감독으로서 쓴 시나리오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사실 그렇다고, 언젠가 직접 해보고 싶어서 쓴 거라고 답했다. 결국 그렇게 하게 된 거다. 물론 갑작스런 제안에 당황스러워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했지. 만류하는 사람도 좀 있었다. <악마를 보았다>나 <부당거래> 덕분에 가만히 있어도 주가가 더 높아질 텐데 기다렸다가 나중에 해도 되지 않겠냐는 거였지.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다. 일단 좋은 기회이기도 했고, 제작사에 대한 신뢰도 생겼다. 결국 하루도 안돼서 하겠다고 전화했지.
어떤 점에서 신뢰가 생긴 건가.
내가 작가로서 10년 동안 활동하며 여러 제작사를 겪어 보고 각색도 많이 해봤지만 정확하게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지 알고 제안하는 회사는 드물다. 올라가볼 수 있는 산이 10개면 10개를 다 올라가봐야 된다. 그러다 결국 다 아니면 다시 첫 번째 산으로 올라간다. 하지만 여긴 그게 아니었다. 너무 명확하게 제시하더라. 나는 제작자가 가장 정확해야 한다고 본다. “이건 재미있지만 작품으로 만들 때 이 부분만 손보면 좋겠는데?” 이래서 내가 괜찮겠다고 하면 가는 거다. 반대로 내 생각이 다르면 그 간극을 좁히던지, 아니면 서로 다른 사람과 해야겠지. 그런데 내가 겪어본 제작사가 열이라면 그 중 일곱은 그게 흐리다. “이게 재미있긴 한데……이렇게 한번 해볼까요?” 이런 식이랄까. (웃음)
<악마를 보았다>는 김지운 감독이 처음으로 자신이 쓰지 않은 시나리오를 연출한 작품이면서도 굉장히 센 작품이다. 영화를 봤을 텐데 어떻게 봤는지 궁금하다.
내가 쓴 시나리오였지만 이게 만들어지면 조용히 넘어갈 영화는 아닐 거라 생각은 했다. 어쨌든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고 개인적으로는 만족한다. 다 떠나서 작가로서 내 시나리오가 내 손을 떠나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시나리오 작가는 주재료를 공급해주는 사람이다. 그 재료를 가지고 구워서 스테이크를 만들던, 회를 뜨던, 삶아먹던, 어떻게 만드는 건 순전히 요리사인 감독 몫이다. <악마를 보았다>는 김지운 감독님 영화고, <부당거래>는 류승완 감독님 영화인 거다.
예전에는 재료만 공급했지만 직접 요리까지 하게 됐다. 자신의 요리에 대한 만족감은 묻지 않겠다. (웃음) 다만 이 경험이 당신에게 남긴 소회 정도는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선택한 재료로 내가 하고자 하는 요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다. 그리고 그 요리를 기다리는 분들에게 직접 맛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그게 맛이 있던지 없던지, 내가 책임질 수 있고, 그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좋은 것 같다. 다만 작가로서 스토리만 만들고 글만 쓸 대는 머리 속으로 상상만 하면 되니까 안 되는 게 없다. 하지만 직접 연출을 하고 촬영을 하면 안 되는 게 있다. 내가 생각했던 그림이 실제로 이렇게밖에 안 나온다면 결국 타협해야 한다. 게다가 내가 내 돈으로 내 영화를 찍으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버릴 수 있겠지만 남의 돈으로 영화를 찍었으니 최소한 손해는 끼치면 안 되겠지. 이런 상업영화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기본적인 뼈대는 건드리지 않는 한에서 관객에게 재미를 줄 수 있는 살을 붙이고자 노력했다. 직접 요리를 하다 보니 이런 스트레스를 받더라. 그리고 내가 단순한 편이라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못한다. <혈투>에 1년 정도 매달려 있다 보니까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쓸 수가 없어서 생기는 스트레스도 있었다.
당장 글부터 쓰고 싶겠지만 감독으로서의 욕심도 생겼을 것 같다.
일단 욕심은 난다. 그런데 내가 쓴 시나리오는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라서 쓴 것이겠지만 그걸 잘 찍을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 같다. 정말 자신 있다면 내가 직접 만들겠지만 내가 잘할 수 없는데 괜히 욕심 부리기 보단 다른 감독에게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저마다 성향이나 취향이 있으니까. 분명 나는 또 연출하고 싶고, 그렇게 하려 하겠지만 욕심을 부리지는 않으려 한다.
<악마를 보았다>나 <부당거래>, 그리고 <혈투>를 보면 공통적으로 복합적인 인물의 심리가 그려지고 이에서 비롯된 갈등이나 충돌이 복잡한 플롯의 사건을 만든다.
내가 원래 사건 중심 영화보다 캐릭터 중심 영화를 더 좋아하긴 한다. 그리고 어떤 사건이 벌어지더라고 결국 그 사건을 벌이는 건 사람이다.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왜, 우리가 재미있어하는 이야기도 눈으로 보이는 사건의 뒤에 있는 이야기지 않나. 원래 사람 관찰하는 게 우리 일이기도 하고, 그렇게 보면 결국 사건이 보인다. 나는 영화를 보고 난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고 싶다. 한두 시간 즐겁게 보면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영화도 좋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나와 어울리는 재주가 아닌 거 같다. 영화를 보고 상영관을 나가서 아무 말없이 집에 가서 씻고 누웠더니 자꾸 생각하게 되는, 그런 잔상을 남겨주고 싶다. 적어도 뭐든 하나 던져주고 싶다. 그런 걸 좋아하니까.
전세계적인 인기와 명성을 얻은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영국에서 살지 않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와 줄리엣 역시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태어난 선남선녀다. 그리고 베로나는 실존하지도 않았던 셰익스피어의 희곡 속 인물들의 덕분에 실존의 전통을 얻었다. <레터스 투 줄리엣>은 바로 그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남긴 실물적인 전통을 소재로 둔 현대적 로맨스물이다.
뉴욕의 출판잡지사에서 팩트체킹, 즉 기사에 대한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근거를 조사하는 기자인 소피(아만다 사이프리드)는 자신의 글을 쓰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개업을 앞둔 약혼자와 함께 이탈리아 베로나로 여행을 떠나지만 다양한 음식과 와인에 정신이 팔린 약혼자와 떨어져 자신만의 일상을 보내던 중, 줄리엣에게 자신의 구애상담을 전하는 편지 이벤트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줄리엣의 비서들이라 불리며 그 편지에 답장 업무를 행하는 이들과 함께 누군가의 절실한 구애에 선의의 거짓말을 답신하던 중, 50년이 지난 편지를 발견하게 되고 이에 답장을 보낸 뒤, 예상치 못한 방문을 맞이하게 된다.
<레터스 투 줄리엣>은 허구적인 로맨스를 통해 현실적인 이벤트를 발생시킨 베로나의 관습을 이어받은 허구적인 로맨스다. 셰익스피어의 허구로부터 발생한 문화적 전통이 <레터스 투 줄리엣>의 기반이 됐다는 사실은 허구와 실재의 전이와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식상하듯 흥미로운 지점이다. 물론 이는 영화 외적인 문제다. 단지 <레터스 투 줄리엣>이라는 결과물을 놓고 말하자면 이런 접근은 사족이다. 이 영화는 새로운 화두를 던지는 로맨스물이라기 보단 진정한 사랑을 논하는 전형적인 로맨스물들의 궤 안에 놓인 또 하나의 낭만적 일탈극일 따름이다.
이는 어떤 지적의 의미가 아니다. <레터스 투 줄리엣>이 품은 전형성이 영화를 해치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레터스 투 줄리엣>은 자신의 사랑이라고 믿었던 이와의 여정 속에서 결핍을 겪게 되는 여인이 우연과 필연의 경험 끝에서 새로운 결심을 품게 된다, 라는 일종의 판타지를 허구적인 세계 위에서 적절한 낭만을 곁들이며 담백하게 진전시켜 나간다. 덕분에 <레터스 투 줄리엣>은 운명이라는 단어가 발생시키는 환상성과 함께 그 특별한 성격 자체의 전형성을 동시에 설득시키는 작업으로서 적당한 성공을 불렀다 말할 수 있는 동시에 장르적 기성품으로서 제값을 해내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가 되는 동시에 그 허구적 명성을 실제적인 전통으로 승화시킨 베로나의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피렌체 인근에 자리한 시에나 와이너리의 풍요로운 자연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음미하기 좋은 식단처럼 풍성한 시각적 만찬이나 다름없다. 동시에 아만다 사이프리드와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이루는 신구의 조화는 영화의 균형감각을 이루는 자질과도 같다. 딱히 새롭거나 빼어난 영화라 추켜세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허구적인 환상과의 타협은 적절하며 기본적인 현실성을 망각하지 않는다. 마치 허구로부터 새로운 현실적 가치를 창출해낸 베로나의 오늘처럼 환상과 현실의 접점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며 타협을 성사시킨 느낌이랄까.
오래 전부터 인간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운명을 점쳤다. 그리고 오늘날의 인류는 매일 같이 뜨고 지며 차오름과 이지러짐을 반복하는 달에 수많은 사연을 담아왔다. 오늘도 달이 차오른다. 그러니 가자. 우주에 매혹 당한 영화 속으로.
<스타워즈>
1977년, 모든 것이 변했다.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4 – 새로운 희망>으로 서부극 일색의 1970년대 할리우드에서 우주시대를 열었다. 사실 많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 시리즈는 루카스의 취향이 총 집약됐다 말해도 좋을 ‘스페이스 오페라’다. 대학시절부터 우주전쟁영화를 꿈꾸던 루카스가 집필한 대하드라마 초안 중 하나의 에피소드가 영화화된 뒤, 대단한 흥행을 거둠으로써 <스타워즈> 시리즈의 역사는 시작됐다. 광선검을 휘두르는 ‘제다이’들은 사무라이 영화의 영향력을, 우주에서 전투를 벌이는 ‘X-윙’의 곡예는 전쟁영화의 공중전을 떠올리게 만든다. 또한 셰익스피어를 연상시키는 비극적인 스토리와 캐릭터들의 관계도 분명 흥미로운 것이다. 무엇보다도 디테일한 미니어처를 비롯해서 자동으로 작동되는 모형 로봇을 제작하고 다양한 크리처 디자인을 선보이는 등, 일일이 수작업을 거쳐 완성된 대부분의 특수효과는 이 시리즈의 아이덴티티를 대변하는 동시에 새로운 영화적 미래를 제시한 ‘새로운 희망’ 그 자체였다.
<아폴로13>
1969년,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 발을 디디기 직전까지 전세계의 인류는 흑백TV 앞에 모여들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가 달에 남긴 발자국은 인류에게 새로운 열망을 부여했다. 그리고 다음해, 역사적인 두 번째 발걸음을 꿈꾸며 우주로 날아간 아폴로 13호의 승무원들은 우주의 미아가 될 위기에 처했다. 미연방항공우주국 나사의 역사상 최악의 실수로 꼽히는 우주사고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아폴로 13>은 지구로 귀환하기 위해 나흘 간 무중력과의 사투를 펼치는 우주비행사 3인의 ‘성공적인 실패’를 다룬 SF휴먼드라마다. 자신들이 꿈꾸던 달과의 조우를 앞두고 설레는 감정을 감추지 못하던 세 우주비행사는 불의의 일격과도 같은 기체 고장으로 인해 원대한 꿈을 뒤로 하고 귀환을 위한 생존의 레이스를 펼친다. 수동으로 기체를 조종하며 대기권 진입의 마지막 고비를 넘긴 세 인물이 지구로 귀환하기까지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인물들의 노력과 헌신은 인간의 집념과 의지가 한데 모여 이루는 감동의 화음과도 같다.
<콘택트>
소녀는 어려서부터 미지의 영역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했다. 자신이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존재할 누군가와의 교신을 바라며 단파방송기 앞을 떠날 줄 몰랐던 소녀는 자신이 따르던 홀아버지마저 여읜 뒤에도 단파 통신을 멈추지 않으며 자신의 꿈을 키워나가고 결국 천체물리학자로 성장한다. 저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집필한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콘택트>는 과학적 진리가 절대적인 것이라 간주하는 여성 과학자 앨리(조디 포스터)의 신비한 체험을 통해 그 너머의 가치를 되묻는다. 자신이 추구하던 과학적 명제 너머의 무언가를 목격하지만 결국 자신의 체험을 증명해내지 못하는 앨리는 곧 자신이 추구하던 가치의 비좁은 가능성을 깨닫는다. 이는 보이는 것만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이 세계의 신비를 증명하는 영화적 설득과도 같다. “단지 이 우주에 인류만 존재한다면 대단한 공간의 낭비가 아닐까.” <콘택트>는 자신이 머문 이 세계의 신비를 가늠하지도 못한 채 한 세기 안에서 소멸하는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영험한 성찰을 부른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갑자기 지금 우리가 두 발을 붙이고 사는 지구가 소멸한다면? 더글라스 애덤스의 장편 SF소설을 동명 그대로 영화화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이 뜬금없는 물음이 과감히 실현되는 이상한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허무맹랑한 우주기행기다. 미래 세계를 건축하겠다는 실현성의 야심을 품거나 비범한 예언적 의지로 무장한 대부분의 SF영화들과 달리 이 작품은 그저 우주와 외계라는 미지의 세계를 우스꽝스럽고 껄렁한 농담 따먹기의 장으로 활용하는데 주력한다. 대단한 과학적 이론을 읊어대는 비범한 SF작품들과 달리 밑도 끝도 없는 상상을 허풍선처럼 떠들어대는 이 작품은 설명이 불가능한 상상력을 마음껏 나열하고 확장해나가는 낙관적 태도를 통해 유쾌한 매력을 자랑한다. ‘로키산맥을 칠하는 페인트공과 대서양에 물을 채워 넣은 인부들이 없었으면 지구가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랑스러운 상상력으로 도배된 이 작품은 마치 우주로 나가는 산책처럼 가볍고 편안한 웃음의 유영으로 당신을 인도한다.
<더 문>
화석에너지의 고갈로 위기에 직면한 가까운 미래의 인류는 달에서 채취된 청정에너지 ‘헬륨3’를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새로운 인류의 희망은 곧 한 남자에게 거대한 고독을 안겼다. 달에서 자원을 채취해 지구로 발송하는 업무를 홀로 해내는 샘 벨(샘 록웰)은 광활한 우주를 메워버리고도 남을 만큼의 고독을 품은 채 하루하루를 힘겹게 밀어낸다. <더 문>은 드넓은 우주의 한 점과 같은 달에서, 역시 한 점처럼 작은 존재에 불과한 한 남자의 광활한 고독을 담은 모노드라마다. 거대한 우주의 풍광이 목격되는 달 위에 놓인 남자의 모습만으로도 가늠할 수 없는 고독이 체감되는 <더 문>은 예측할 수 없는 궤도로 들어서는 스토리를 통해 가스와 먼지처럼 불분명한 호기심을 단단하게 다진다. 적막한 달 위에서 홀로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일상을 역설적인 서스펜스로 달구다가 끝내 진한 페이소스로 띄워 보낸다. 데이빗 보위의 아들인 신예 감독 던칸 존스의 <더 문>은 창의력이란 단어의 의미를 대변하는 좋은 예시다.
‘OB’근육질 마초들이 동창회라도 열 기세로 한 자리에 모여 액션을 펼친다. <익스펜더블>은 단적으로 시대착오적인 촌스러운 기획물이다. 여전히 몸으로 뛰고 발로 구르는 액션물이 멸종한 것은 아니지만 아드레날린과 안드로겐으로 점철된 근육 마초의 시대는 분명 한 물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익스펜더블>의 유효성은 그 ‘한 물 갔음’에서 비롯된다. 한 물 간 역전의 용사들이 패기 대신 관록을 입고 새로운 시대에서 오래된 시절을 되새기게 만든다.
적어도 확신할 수 있는 건 <익스펜더블>의 출연진을 본 사람들 가운데 눈이 동그래진 이와 심드렁한 이의 차이가 세대에서 비롯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주지사 이전에 뭘 해먹고 살았는지 잘 알지 못할 세대에게는 정체불명의 3류 액션물처럼 보일 이 영화가 어떤 세대에게는 초호화 캐스팅이 된다는 역설이야말로 <익스펜더블>의 존재 가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강의 용병들로 구성된 ‘익스펜더블스’의 리더 바니 로스(실베스터 스텔론)로 출연하는 동시에 이 모든 이야기를 기획하고 메가폰까지 쥔 실베스터 스텔론이 겨냥하는 건 오래 전 그 시절이다. 바로 과거의 영광이 놓여있던 그 시절의 사연 속에 자신들이 설 자리를 만드는 것. 죽여도 싼, 혹은 그렇다고 믿어질 만한 대상을 찾아 생사를 건 활약상을 전시하고 끝내 그들을 처단한 뒤 영웅이 되어 관객의 앞에 늠름하게 걸어나오던 그 시절의 위상을 되살려 보자는 것. <익스펜더블>은 명확하게 그 위치로 노장들을 되돌려 보내고자 하는 눈물 겨운 기획인 셈이다. 그리고 캐스팅만으로도 이미 이 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질 관객의 팔 할은 그 눈물 겨운 기획에 기꺼이 지갑을 열 준비가 된 이들일 것이다.
하지만 <익스펜더블>은 그 촌스러운 장점을 고스란히 자신의 단점으로 끌어안는 영화다. 단순함 이하의 결점들이 수두룩하게 들어선 이야기는 때때로 노장들의 여운이 담긴 대사에 깃든 낭만들을 희석시키는 동시에 영화의 얄팍한 의도를 적나라하게 들춘다. 결국은 추억의 유무에 따라 관대함의 여부도 달라질 것이다. 단지 그들이 온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용서될 수 있는 관객은 스토리텔링 따윈 필요 없어, 라 할지라도 그 반대의 경우에 <익스펜더블>은 시대착오적인 막무가내 액션물로 낙인 찍힐 가능성도 농후하달까. 이 영화에서 대단한 화력을 전시하는 액션은 그 기대감을 배려하는 일종의 축포나 다름없는 동시에 공갈과도 같다.
동시에 홍보 전단지에 나란히 선 액션배우들의 다양한 면모가 실상 영화에서 일부에게 편중된 형태임을 알게 됐을 때 ‘최강’의 특공대에 대한 기대가 어떤 실망감으로 치환될 것인가라는 예측 또한 변수에 가깝다. 어쨌든 한 시절을 추억하게 만드는 근육질 마초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과거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건 특별한 이벤트다. 다만 그 이벤트 수준 이상의 무언가를 증명하지 못한다는 건 그만큼 씁쓸한 일이다. 결국 자신들이 설 곳이 없음을 스스로 나서서 증명하는 꼴이랄까.
한 여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 실종된 여자가 발견됐다. 흐르는 강물 안에서 머리만 덩그러니 남겨진 채로. 국정원 경호실장이자 그녀의 약혼자인 수현(이병헌)은 결심한다. 그녀가 당한 모든 것을 그 놈에게 되돌려주겠노라고. 그리고 수현은 비로소 놈을 만난다. 연쇄살인마 경철(최민식) 앞에 수현이 나타난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악마가 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뒤바꿔가며 상대를 파멸시키기 위한 게임을 거듭해 나간다.
사실 이런 류의 이야기, 즉 복수를 그리는 여타의 스릴러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악마를 보았다>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과율을 통해 구동되는 장르적 형태의 스토리텔링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는 단순히 스릴러 영화의 컨벤션으로 규정될 수 없는 불균질한 기질들로 ‘치장’된 작품이다. 극의 시작부터 후더닛 구조에 대한 미스터리 자체를 포기해버린,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해버린 <악마를 보았다>는 그 관계를 이루는 두 캐릭터, 그리고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두 배우의 표정과 가학적인 행위를 통해 장르적(이거나 말거나 애초에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는) 스토리텔링의 동력을 밀고 나가(려)는 영화다.
개봉 전부터 제한상영가 판정 문제로 도마 위에 오른 <악마를 보았다>에서 가장 부각되는 건 아무래도 폭력성의 강도일 것이다. 일단 <악마를 보았다>가 묘사하는 폭력의 수위는 특정한 장르물에 단련되지 않은 관객들이 손쉽게 견뎌낼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감상의 결과값은 단지 그 폭력의 물리적 전시만으로 얻어지는 결과적 감상은 아닌 것 같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묘사되는 폭력은 대단한 물리적인 질량감을 자랑하지만 그 폭력성을 더욱 깊게 체감하게 만드는 건 그 물리적 폭력을 간접적으로 체감하게 만드는 관객을 구석으로 몰아 넣는 심리적 압력이며 그 압력의 여백을 채우는 허무가 보다 강한 절망을 체감하게 만든다.
폭력이라는 행위를 묘사하는 방식도 가혹하지만 그 폭력으로부터 유린당하는 대상이 느끼는 수치감과 모욕감,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무화시켜버릴 만큼의 거대한 폭력에 압사당한 개인의 무력감이 극렬하게 전이된다. 사실 이 폭력성의 체감을 극대화시키는 건 배우들의 연기다. 짐승과 같이 동물적인 욕망과 본능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연쇄살인마를 연기하는 최민식과 살해당한 자신의 약혼녀에 대한 복수를 위해 역시 무자비한 폭력적 행위를 불사하는 냉혈한의 면모를 선보이는 이병헌의 연기는 영화에서 정서적 온도차의 극단적인 대비를 이룸으로써 폭력적 심도와 너비를 극대화시킨다. 짐승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인간성이 결여된 듯한 연쇄살인마 경철과 그 폭력성에 맞서서 보다 강한 폭력을 구사하며 상대를 구석에 몰아가는 수현은 양극단에서 영화의 폭력성을 극단적으로 증폭시켜 나간다.
<악마를 보았다>는 일종의 게임이다. 짐승 같은 인간을 대면하게 된 어느 사내는 스스로 악마가 되어 자신의 분노를 상대에게 완전히 방출해내려 하지만 좀처럼 비워지지 않는 분노는 되레 허기처럼 채워지고 그 끝에 남겨진 건 파괴적인 절망에 가깝다. <악마를 보았다>는 마치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의 하드보일드적인 복기이자 선문답처럼 보인다. 스릴러라는 장르적 양태에서 시작되는 <악마를 보았다>는 극단적인 폭력을 전시하며 장르적인 긴장에서 발생하는 쾌감과 거리를 벌린다. 특히 <악마를 보았다>는 극의 진행과 함께 초현실적인 시퀀스로 캐릭터들을 몰아넣으며 장르적 리얼리티라는 인력을 철저하게 거부해 나간다. 이는 마치 폭력에 대한 거창한 철학으로 위장된 가학과 피학에 대한 실험극처럼 보인다. 단지 폭력이라는 행위 자체의 발생을 포착한다라는 인상을 벗어나 어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과감한 폭력들을 거듭해서 연출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력하게 부여한다.
이는 <악마를 보았다>에서 양날의 검이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어떤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 극단적인 폭력의 시각적 체감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말 그대로 어떤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폭력을 거듭해서 보고 있다라는 직감 때문일 것이다. <악마를 보았다>가 전달하는 폭력의 위력은 가학자에 대한 공포보다도 피학자가 느끼는 모욕으로부터 깊게 체감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폭력이 체감되는 방향 이후로 무엇이 진전되고 있느냐는 것. <악마를 보았다>는 어느 개인의 복수를 빌미로 인간성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동시에 제도적 체계에 대한 강렬한 불신을 던진다. 다만 그 포장이 지나치게 비범하다. 단적인 예로 중반부의 산장신은 온전히 리얼리티로부터 이탈해버린 듯한 부조리극의 무대 위에서 연출되고 있으며 이는 이 영화가 제기하는 모든 물음들을 선문답의 영역으로 띄워 보내고 있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남는 건 단지 폭력을 치장하는 극단적 이미지뿐이다. 극단적인 폭력의 연출은 문제가 아니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어쩌면 이 현실 어딘가 누군가에게 예기치 못하게 벌어질 수 있거나 혹은 이미 벌어진, 끔찍한 예언이자 재현일 수 있다. 다만 그 이미지들이 뭔가 대단한 어떤 의미의 담보처럼 전시되고 있음에도 결과적으로 그 결과치에 다다르지 못한다면 그것을 지지할 수 있을까. <악마를 보았다>를 비범하게 포장하는 대사와 표정들은 그 결말에 다다라서 완벽하게 휘발되고 말 것들에 불과하다. 악의로 가득한 이 영화는 극단의 폭력을 구사하고 있지만 폭력에 대한 지독한 혐오를 품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아이러니를 전시할 뿐, 자신의 아이러니에 답하지 못한다. 그 지독한 폭력들을 버티게 만든 영화 뒤에 남는 게 고작 허세 가득한 선문답적인 허무라니, 이런 낭비적인 복수가 어디 있나.
추억이 애틋한 건 그 지나간 기억으로부터 여전히 느껴지는 체온 때문일 게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당연스럽게 흘러가고, 그 시간 안에서 우린 스스로 모른 채 많은 것들을 흘리고 뒤돌아 줍지 못한 채 떠밀려 나간다. <토이 스토리 3>는 바로 그 잃어버린 시간에 관한, 즉 추억들에 대한 애틋한 드라마다. 세 번째 속편에 다다른 이 시리즈는 언제나 그렇듯 주인에게 버려질까 전전긍긍하는 장난감들의 좌충우돌 활극을 그린다. 1999년, 그러니까 21세기 전에 나온 전편과 10년이 넘는 격차를 두고 거듭된 세 번째 속편이지만 <토이 스토리 3>는 어느 속편들처럼 새삼스럽거나 안이한 기획물이 아니다.
지난 두 편과 마찬가지로 <토이 스토리 3>에서도 스토리텔링의 요건을 이루는 건 버려지길 두려워하는 장난감들의 활극이다. 다만 한 가지 다른 건 다른 장난감에 밀려나거나, 부서져서 버려지는 신세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 영원히 폐기되는 것. 이유는 바로 자신들의 주인인 앤디가 더 이상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않는 나이로 자라버렸기 때문이다. <토이 스토리 3>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대단한 극적 몰입도를 발생시킨다. 픽사가 제작했던 지난 작품 <업>이 극 초반부에서 젊은 남녀가 만나 함께 늙어가다 사별하기까지의 과정을 대사 한 마디 없는 몽타주 신으로 탁월하게 재생시켰던 것과 같이 <토이 스토리 3>의 오프닝 시퀀스는 몽타주를 활용하며 앤디의 성장과 그 성장을 함께 했던 장난감들의 추억을 환기시킨다. 이는 전편들을 경험하지 못했던 관객들을 위한 배려로서 손색이 없는 동시에 지난 전작을 추억하는 관객들에게는 훌륭한 선물이나 다름없다.
<토이 스토리 3>에서도 탁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이야기다. 언제나 그렇듯, 혹은 최근 들어 더욱 대단한 성과를 자랑하는 것처럼 픽사는 또 한 번 올해의 이야기를 완성했다. <토이 스토리 3>는 또 한 번 픽사의 장기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우연의 연속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또 한 편의 완전한 스토리를 창작해냈다. 픽사가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링에 대단한 극찬을 부여할 수 있는 건 단지 뛰어난 내러티브를 완성할 줄 아는 능력 때문만은 아니다. 픽사의 스토리는 체온을 품고 있다. 넉살스러운 캐릭터들은 능수능란한 유머를 구사하며 활기를 더하다가도 끝내 눈시울을 붉히게 만드는 사랑스러운 찰나를 발견하게 만든다. 진짜 ‘감동’의 결정을 아로새긴다. 그리고 <토이 스토리 3>는 픽사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결정이다.
우디와 버즈를 비롯한,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그 장난감들의 모험담에는 인간의 희노애락이 모두 담겨 있는 동시에 실로 형형하게 구현된 그 감정들을 응집시켜 이룬 압도적인 클라이맥스가 존재한다. <토이 스토리 3>에서 내러티브의 흐름은 결코 안주하거나 자만하는 법이 없다. 유머 감각이 뛰어난 캐릭터들은 때때로 만만찮은 서스펜스로 관객을 일순간 끌어들이고 결국 좀처럼 외면할 수 없는 페이소스로 관객을 빠뜨린다. 두 번째도 아닌, 세 번째 시리즈인 <토이 스토리 3>는 ‘전편보다 나은 속편이 없다’는 속설을 실로 무색하게 만드는 문제작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영역을 넘어서 감히 영화사 안에서도 가장 훌륭한 트릴로지로서 손꼽힐만한 시리즈랄까. 심지어 <토이 스토리 3>는 픽사의 창작 비결이 마법이 아닐까 호들갑 떨고 싶게 만들 정도로 보는 이를 벅차오르게 만드는 감동의 진경으로 인도한다. 감동의 결정을 품은 이야기의 정수를 선사한다.
최근 몇 년 사이 픽사가 만들어낸 작품들은 하나 같이 걸작이었다. <라따뚜이> <월-E> <업>까지, 매년 1편씩 걸작을 만들어내겠다는 각오라도 품은 것인양 대단한 이야기와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을 완성해 왔다. 사실 <토이 스토리 3>는 픽사의 아이디어 뱅크라 할 수 있는 존 라세터, 앤드류 스탠튼, 피트 닥터 등 지난 시리즈를 완성해낸 주역들이 한 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만든 야심작이기도 하다. 마치 자신들의 지난 추억을 꺼내들듯이, 그리고 자신들에게 지금의 영광에 다다르게 한 일등공신과도 같은 작품을 새롭게 닦아 내듯 정성스럽게 이야기를 직조하고 캐릭터를 어루만졌다. 대부분의 속편들이 창작자들의 무신경한 태도 속에서 흉물스럽게 망가지는 것과 달리 픽사의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보물 위에 쌓인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내고 닦아내듯 정성을 다해 완벽한 속편을 완성했다. 장담하건대, 적어도 당신이 <토이 스토리 3>를 보게 된다면 그 사연의 끝에서 적어도 두 번은 울컥할 것이다.
사랑스럽다는 말을 부끄럽지 않게 만드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창작자들에게 전할 수 있는 건 그저 고맙다는 말이다. 픽사의 작품이, <토이 스토리 3>가 바로 그렇다.
어두운 전당포에 박힌 채 사는 탓에 ‘전당포 귀신’이란 별명을 얻었다는 그 사내는 말수도, 표정도 없다. 좀처럼 과거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전당포 주인 사내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은 일면식 없는 남자에게 붙이기 쉬운 ‘아저씨’라는 호칭으로 적당한 거리감을 둔 채 접근할 뿐이다. 하지만 그 호칭의 거리감을 쉽게 무시하는 유일한 상대가 있다. 술집에서 댄서로 일하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소미(김새론)는 네일 아티스트로 일하겠다는 야무진 포부를 갖고 살아가는 씩씩한 소녀다. 소미만이 아저씨라 불리는 그 사내, 태식(원빈)의 전당포로 들어설 수 있다. 매일 같이 전당포를 찾아오는 소미는 태식의 말벗이 되고 자신의 외로움도 달랜다.
폭력적인 환경에 노출된 소녀와 유일하게 소녀의 아지트가 되어 주는 정체불명의 사내. 소녀와 사내의 관계는 서로에게 정서적 공백을 채워주는 유일한 위안이나 다름없다. 무신경한 태도로 상대의 경계를 무너뜨리듯 아무렇지 않게 태식의 전당포로 들어서는 소미와 무덤덤하게 문을 열어주는 태식은 서로 알게 모르게 모종의 단단한 정서적 연대를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극의 후반부에 드러나는) 태식의 과거는 소미에 대한 감정을 더욱 애틋하게 매만지고, 아버지가 없는 가운데 폭력을 거듭 목격하고 자란 소미에게 태식의 존재는 일종의 대리적인 안위를 부여한다. 그런 어느 날, 두 사람의 현실을 위협하는 모종의 사건이 발생하고 위기에 놓인 소미를 구하기 위한 태식의 고군분투가 시작된다. 그 남자 거침없다.
고독한 킬러와 어린 소녀의 우연한 관계를 담아낸 <레옹>의 내러티브에 과격하면서도 저돌적인 <테이큰>의 아버지를 사내로 치환해 격투신을 연출하고 홍콩느와르적인 스타일을 덧씌우면 <아저씨>가 된다, 는 말은 조금 비약적이지만 앞에서 열거한 요소들은 분명 <아저씨>를 설명하는 도구로서 유용하다. 무엇보다도 <아저씨>는 가족애를 느와르적인 비정성의 기폭제로 장치한 이정범 감독의 차기작이란 점에서 보다 주목받을만한 필모그래피다. 이정범은 <아저씨>를 통해 정서적 이해를 넘어 보다 직접적으로 느와르적인 비주얼 감각을 마음껏 뽐낸다. 비정성의 선을 넘는 동시에 평정심을 유지하는 악랄한 캐릭터들을 통해 현실적인 비극성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상대적으로 보색에 가까운 심성을 지닌 주연 캐릭터의 비장한 감성을 적극적으로 설득시킨다.
불분명한 정체성을 지닌 덕분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연 캐릭터 태식의 가려진 단면들은 <아저씨>에서 스토리텔링의 탄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느와르적인 관성을 보다 매끈하게 기름칠하는 자질로서 유용하다. <열혈남아>에서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가린 채 재문(설경구)을 보좌하던 치국(조한선)이 극의 후반부에 다다라 폭발적인 정서적 페이소스를 이끌어내는 것과 같이 <아저씨>가 태식의 과거를 드러내는 방식은 서사적인 흥미 속에서도 매몰되지 않는 캐릭터적 호기심을 유지하며 이야기를 보다 손쉽게 밀고 나가며 주입시키는 방편이 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저씨>는 <열혈남아>에 비해 보다 높은 체온을 지닌 작품이다. 피비린내가 밑바닥에서 진동하는 잔혹한 느와르적 세계관의 끝에 휴머니즘의 위안을 품었다.
무엇보다도 <아저씨>에서<본>시리즈의 그것을 연상시키듯 정교하게 디자인된 액션신의 묘미는 발견에 가깝다. 협소한 공간에서 분각을 다투듯 스피디하게 팔과 다리를 뻗고 비트는 인물들의 효율적인 동작 속에서 발생하는 묵직한 타격감을 놓치지 않는 중반부의 액션신은 인상적이다. 특히 화려한 동작 대신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실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상대를 제압해 나가는 인물의 동작을 통해 보다 강렬한 긴장감을 제공하는 후반부의 일대 다수 격투신은 단연 백미라 해도 좋을 것이다. 생사가 결정되는 찰나의 긴박감을 냉정하게 포착하며 감각적인 소비재가 아닌 생동감 있는 진짜 폭력을 포착해낸다. 종종 그 핏빛 시퀀스의 잔혹함이 대단한 수위를 자랑하기도 하지만 과하다기 보단 확신이 대단한 연출 방식을 선택했다고 판단할만한 완성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분명 성취에 가깝다고 추켜세워도 좋을 만한 결과물임에 틀림없다.
지나치게 비장한 대사를 던지는 탓에 감정적으로 넘치는 몇몇의 찰나를 제외하면 원빈은 <아저씨>의 비현실성을 완벽하게 영화적 리얼리티로 승화시키는 이미지로서 완전하다. 지독하게 암담한 악의로 무장된 ‘비정성시’의 뒷골목에서 선의를 향해 비장하게 분투하는 이상적인 ‘그림’ 그 자체다. 그 그림에 휴머니즘적인 감정적 동의를 부추기는 김새론의 연기는 그녀의 나이를 고려하자면 꽤나 영악하게 느껴질 정도로 인상적인 것이기도 하다. 또한 평소 코믹한 이미지로 어필하던 김희원의 악랄한 연기는 <아저씨>의 세계관을 단단하게 다지는 미장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선악의 경계를 완벽하게 구축하는 훌륭한 기자재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