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 너머로 본심을 가린 채 가족을 위협하는 이방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악마적 캐릭터, <오펀: 천사의 비밀>은 기시감을 부르는 영화다. <오멘>과 같은 악마적 아동이 등장하는 오컬트를 비롯해서 <케이프 피어>와 같은 가족지키기 스릴러까지, <오펀>이 흡수한 장르적 전례는 차고 넘친다. <오펀>이 영리한 영화라 말할 수 있는 건 그 덕분이다. <오펀>은 새로운 전형이라기 보단 뛰어난 응용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악한 유아적 캐릭터를 통해 장르적 착시를 발생시킨 뒤, 관객의 호기심과 긴장감을 동시에 유발한다. 무엇보다도 에스터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점차 본심을 드러내는 순간마다 연출되는 긴장감이 서사의 진행과 함께 두텁게 쌓여나간다. 결과적으로 <오펀>이 이룬 장르적 성취의 팔 할은 절대적으로 에스터를 연기하는 이사멜 펄먼의 연기력에 얹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말부에 다다라 내던져진 반전 역시 호불호의 차이를 발생시킬 가능성은 존재하나 이야기의 흐름 안에서 적절한 흐름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확실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말미에 다다라 난투극으로 변질되는 양상이 영화를 단순화시킨다는 인상도 들지만 역시나 그 순간조차도 절대적인 긴장감이 발생한다. 인상적인 캐릭터와 흥미로운 스토리텔링, 그리고 효과적인 연출력까지, 수준 이상의 만족감을 부른다.
결혼을 약속했던 연인 제프(소지섭)로부터 이별을 통보 받은 뒤 시름에 빠져 있던 만화가 지망생 소피(장쯔이)는 복수를 다짐한다. 미모의 연기자 안나(판빙빙)와 눈이 맞아 자신을 차버린 제프의 관심을 다시 자신에게 이끌고 시원하게 뻥 차버리는 것. 게다가 안나와 모종의 과거를 지닌 사진 작가 고든(허룬동)을 만나 우여곡절 끝에 든든한 지원사격까지 약속을 얻어낸다. 이른바 ‘소피의 복수’를 담은 <소피의 연애매뉴얼>은 좌충우돌의 명랑한 로맨스를 묘사하는 순정만화적인 로맨틱 코미디다. 5단계의 챕터로 구성된 스토리와 알록달록한 풍선껌과 같은 미장센, 그리고 과잉된 감정을 표출하는 캐릭터, <소피의 연애매뉴얼>은 온전히 순정만화의 컨셉이 반영된 영화적 결과물이나 다름없다. 귀엽고 깜찍한 이미지를 연출하기도 하지만 때때로 손발이 오그라들 만큼 간지러운 장면이 여럿이며, 단순히 순정만화적인 느낌을 벗어나 유치한 스토리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게 만든다. 아무래도 남자보단 여자들을 배려한 취향의 영화라는 것 정도는 인지하거나 각오해야 한다. 장쯔이의 과잉된 연기보다도 차분하게 슬랩스틱을 선사하는 소지섭의 간지 버린 표정이 더욱 인상적이다.
폐쇄적인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의 외모는 신분을 초월하는 수단이자 때때로 국가의 존망을 좌우할 정도로 막강한 것이기도 했다. 신분상승을 위한 수단으로서 여성의 외모는 유효한 재능이었다. 물론 오늘날에도 여성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은 유효한 수단이다. 다만 선천적 한계가 그 가능성을 좌우하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엔 후천적 선택에 따라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많다.
과거의 여성보다 현대의 여성이 보다 큰 미적 욕망을 품을 수 있는 것도 그 가능성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의 접근 가능성에 있다. 더 이상 아름다운 외모란 물려받지 못하면 포기해야 할 것이 아니다. 다이어트와 성형이 지배하는 현대의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여성에게 있어서 아름다운 외모란 특수한 재능의 영역에서 점차 필수적 덕목의 수준으로 이해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가학원>은 그런 세태를 반영하는 영화다. 최고의 쇼호스트였던 효정(유진)이 미스코리아 출신의 후배에게 밀려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고, 자신의 위치에 위기감을 느끼다 외모적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과정은 특수한 직장의 분위기를 담보로 연출된 보편적 이미지에 가깝다. 동시에 비밀스럽게 운영되는 요가학원에 참여하게 되는 효정을 비롯한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외모에서 비롯된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벌인다.
<요가학원>의 설정에 일면 그럴 듯한 구석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도 관계의 설득력에 있다. 단 한 명에게 주어지는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여성들의 관계는 권력적 욕망에 가깝게 묘사되고 있으며 질환적 수준의 광기를 표출한다는 점에서도 시대적 증후를 표면적으로 노출한다. 요가학원이라는 집단의 형태 자체가 시대적 광기를 표출하는 공포의 근본 지점이나 다름없다. 아름다워지기 위한 그녀들의 선택은 부질 없는 집착을 넘어서 필연적 본능에 가까운 절박에 가까운 요구량이기 때문이다.
시대적 증후를 장르적 공포로 치환한다는 아이디어는 분명 쓸만하다. 하지만 <요가학원>은 명확하게 그 아이디어 이상의 결과물에 도달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영화다.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로 같은 공간과 우아함과 불길함을 동반한 미장센이 시각적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눈길을 끄는 디자인의 본질적 의도는 철저하게 망각된다. 지극히 예상범위를 맴도는 자극적 영상이 권태롭게 전시되고, 평면적인 사연을 담아내기 위한 캐릭터들이 덧없이 나열되다 차례로 퇴장한다. 그 가운데서 무기력하게 낭독되는 일차원적인 메시지가 설득력을 얻지 못한 채 귓가를 맴돈다.
입체적인 이야기 구조로 건축되지 못한 사연들은 손쉽게 와해되며 확실한 방점을 찍지 못하고 뜸만 들이는 장르적 분위기는 결말에 다다라 차갑게 식어버린다. 어느 지점에서도 방점을 찍지 못한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판력도, 흥미를 유발할 만한 장르적 성취도, 좀처럼 발견하기 어렵다. 그 와중에 보상받을 길이 막막한 배우들의 육체적 노고만이 안쓰럽게 눈에 밟힌다.
신출귀몰한 전법으로 은행을 털고 유유히 FBI를 따돌리던 갱단의 리더 존 딜린저(조니 뎁)가 검거됐다. 존 딜린저를 구치소로 이송하는 차량 주변에 수많은 군중이 몰려 환호를 지른다. 존 딜린저를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의 환호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열광에 가까운 것이다. 존 딜린저가 수감될 예정인 미네소타 구치소에 몰려든 취재진의 열기도 뜨겁다. “은행 하나를 터는데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나요?”“1분 40초 정도면 가능하지.”기자가 던진 가벼운 질문이 농담으로 튕겨져 돌아온다. 악명 높은 범죄자를 목전에 둔 긴장감 따위란 없다. 마치 유명인을 눈 앞에서 두고 본다는 들뜬 기분이 현장을 장악한다. 그 사이에서 여유로운 미소로 현장을 장악한 존 딜린저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퍼블릭 에너미>는 그 표정 너머의 시대를 관찰하기 보단 그 표정을 통해 시대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발견하는 영화다.
영화의 도입부, 스크린에 명시된 한 줄 자막에 따르면 미국 경제대공황이 4년째에 접어든 1933년에 존 딜린저의 삶은 절정에 달했다. 1930년대, 미국 경제대공황기에 전성기를 누렸다는 갱스터 존 딜린저의 전기적 실화를 다룬 <퍼블릭 에너미>는 전설적인 갱스터의 일생 가운데 절정을 이뤘다는 마지막 1년을 발췌하는 작업이다. 인물의 생애 안에서 가장 드라마틱하다고 회자되는 한 시절이 스크린에서 재현된다. 경찰에 검거돼 인디애나 주립교도소로 이송된 존 딜린저가 수감 중이던 동료들과 함께 교도소로부터 도주하는 광경을 통해 출발하는 <퍼블릭 에너미>의 서사는 바이오 그라프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던 존 딜린저가 FBI의 포위망 속에서 사살되는 1944년까지, 약 1년 여간의 생을 스크린에 재연한다. 인물을 조명하는 전기적 서술이 서사적 뼈대를 이루는 동시에 인물을 둘러싼 시대적 공기가 갱스터 무비의 육체와 멜로드라마의 감성을 입고 유려하게 포착되고 수집돼나간다.
고집스런 리얼리즘 영상 <퍼블릭 에너미>는 사실주의적인 재현을 통해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원론적 고집과 노고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존 딜린저와 FBI의 총격전이 벌어진 실제장소인 ‘리틀 보헤미안 롯지’에서 이뤄진 로케이션 촬영과 FBI의 포위망에 걸려든 존 딜린저가 총에 맞아 즉사한 장소인 ‘바이오 그라프 극장’을 고스란히 재현한 세트 촬영은 그 객관성의 자질을 구체화하기 노고에 가깝다. 실제 은행강도 범죄전력이 있는 ‘제리 스칼리스’를 고용하면서까지 실제적 완성도를 고려했다는 은행강도 신 역시 리얼리티를 최우선으로 삼은 연출적 고집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퍼블릭 에너미>가 이루는 리얼리즘 이미지의 대부분은 총격신에 걸쳐있다. 특히 극초반부에 등장하는 인디애나 주립교도소 탈주 신은 <퍼블릭 에너미>의 지향점을 드러내는 극명한 이정표나 다름없다. 선명한 디지털 색감이 이루는 생생한 질감의 영상 너머로 역동적인 핸드헬드가 연출하는 현장감과 외부적 사운드의 유입을 차음(遮音)하고 현장음을 고스란히 노출시키는 총격전 이미지는 다큐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현장성에 의존된 연출력을 선보인다. 그 뒤로 리틀 보헤미안 롯지에서 존 딜린저와 멜빈 퍼비스(크리스찬 베일)가 지휘하는 FBI의 야간 총격신 역시 <퍼블릭 에너미>가 추구하는 연출방식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사례다.
도심 총격신의 바이블로 꼽혀도 손색이 없는 <히트>를 비롯해 <퍼블릭 에너미>와 기종이 다른 HD카메라로 촬영된 <콜래트럴><마이애미 바이스>등을 통해 생생한 질감의 총격신을 연출한 마이클 만은 <퍼블릭 에너미>에 이르러 더욱 거칠고 역동적인 동시에 광범위한 클래식 총격신을 디지털 장비로 연출했다. 디지털 카메라의 또렷한 색감은 재현이라는 객관성을 공고히 다져나간다. 또한 정적인 분위기 안에서 극대화된 총성과 역동적인 동선을 구사하는 카메라 워크는 영화의 외부적 위치에 놓인 관객의 감정적 침입을 차단하듯 현장성을 극대화시키며 목격으로서의 감상을 극대화시킨다. 물론 <퍼블릭 에너미>가 시종일관 현장성이 극대화된 흔들림으로 가득한 핸드헬드의 기록적 영상만을 전시하는 건 아니다.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라는 인물의 기록적인 범죄행적을 따라잡는 동시에 존 딜린저라는 개인의 독립적인 사연을 연출한다. 일종의 서브 플롯에 가깝게 보이지만 실상 <퍼블릭 에너미>를 관통하는 건 이 독립적인 사연, 즉 존 딜린저와 빌리 프레셰(마리안 코티아르)의 로맨스다. 그 로맨스는 <퍼블릭 에너미>의 사실주의적 풍경으로부터 자제되는 영화의 감정적 근간을 발생시킨다.
영웅적 환상성이 반영된 논픽션
1933년과 1934년 사이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퍼블릭 에너미>는 대공황기의 혼란 가운데서도 낭만을 확보하는 존 딜린저의 모습을 통해 시대적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대공황의 주범이라 지목됐던 은행과 연방정부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시민들이 은행을 털고 시민의 돈을 갈취하지 않는 존 딜린저에게 환호를 보낸 건 그의 범죄적 행위가 그들의 반정부적 불만을 대리적으로 해소해주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퍼블릭 에너미>는 시대를 관통하기 보단 시대의 한 이미지를 영화적 배경으로 선택한 작품이다. 대공황기의 주효한 이미지를 찾아보기 어려운 <퍼블릭 에너미>에서 시대적 궁핍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는 건 존 딜린저에게 환호를 보내는 군중의 모습에서다. 갱스터에게 열광을 보내는 군중의 이미지에서 낭만의 유희를 상실한 대중의 곤궁한 정서가 읽힌다. 동시에 <퍼블릭 에너미>는 종종 존 딜린저를 마치 유령처럼 묘사되는 시퀀스를 등장시키곤 하는데 특히 존 딜린저가 극장에 앉아 자신의 수배 영상을 보는 광경과 자신의 검거전담반이 있는 경찰서 안을 휘휘 도는 광경은 <퍼블릭 에너미>의 의도가 반영된 연출적 결과물에 가깝다. 명성에 도취된 채 실체를 망각한 시대적 증후, 대중은 실체를 짐작하기 보단 명성에 도취되어 환호하고 그 이름을 쫓는 공권력은 도리어 실체 없는 악명에 짓눌려 겁쟁이처럼 눈을 돌린다. 그 한가운데서 갱스터는 대중의 환호를 얻는 판타지 스타이자 공권력을 조롱하는 히어로가 된다.
사실상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라는 갱스터의 족적을 배려한 전기물이라기 보단 존 딜린저라는 갱스터가 만들어낸 영웅적 환상성이 반영된 논픽션에 가깝다. 존 딜린저라는 인물로부터 새어나오는 낭만성이 시대를 장악하고 객관적으로 위장된 연출적 풍광의 영향력을 넘어서 관객을 도취시킨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을 건져 올려 그 인물을 둘러싼 시대의 특수한 단면을 도려낸 뒤, 해석적 연출을 가미한다. 연출력이 극대화될 수 있는 액션신을 리얼리즘에 가까운 영상으로 구사하는 건 <퍼블릭 에너미>가 신에서 발생할 만한 극적 흥미보다도 그 이미지에서 발생할만한 해석을 객관적으로 위장시키는데 치중하고 있다는 증거다. 또한 <퍼블릭 에너미>는 이런 해석적 위장을 통해 범죄자를 미화하고 있다는 혐의에서 풀려나는 영화다. 관객에게 인물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인지를 거듭하면서 인물로부터 배어나오는 매력적인 분위기마저 객관적 형태로 이해시킨 뒤, 영화가 연출하는 시대적 공기 안에서 관객을 만취시킨다. 동시에 <퍼블릭 에너미>는 조니 뎁이라는 배우의 캐릭터 연출이 많이 반영된 영화이기도 한데 존 딜린저와 빌리 프레셰의 멜로 플롯이 이루는 로맨틱한 분위기가 영화의 전반을 지배하게 되는 건 그 플롯의 비중에서 비롯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모든 영향력의 전반은 조니 뎁이 연출하는 캐릭터의 뉘앙스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멜로적 잔향을 남기는 결말부의 여운 역시 <퍼블릭 에너미>가 궁극적으로 느와르보단 멜로적 감수성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만하다. 궁극적으로 <퍼블릭 에너미>에 방점을 찍는 정서는 로맨틱한 무드를 연출하는 멜로 그 자체에 놓여있다. 그 멜로적 분위기는 존 딜린저라는 인물의 매력을 연출하는 밑그림이기도 하다.
인물의 퇴장이 고하는 시대적 종언 존 딜린저가 죽음을 맞이한 바이오 그라피 극장에서의 결말부는 <퍼블릭 에너미>에서 궁극의 이미지라 할만한 광경이다. <맨하탄 멜로드라마>(1934)를 감상하는 존 딜린저가 스크린 너머의 클라크 게이블과 명확히 조응하는 눈빛으로부터 <퍼블릭 에너미>의 클라이막스가 형성된다. 한 시대의 끝을 예감하는 인물의 눈빛에서 비장한 영웅적 면모가 연출된다. 스크린 너머에서 단호하게 퇴장을 선택하는 배우의 표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비장하게 다짐한다. 존 딜린저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는 결말은 실상 한 인물의 생이 마감되는 순간이라기 보단 한 시대의 종말에 가까운 의미를 연출한다. 명예라는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 시대로부터 뒤쳐져 버린 인물이 자신과 조응할 만한 캐릭터의 비장한 결말에 도취될 때, 자신이 지배하던 시대의 끝을 직감한 인물의 느와르적 예감이 스크린을 지배한다. 어쩌면 결말부에서 중요한 건 존 딜린저의 죽음이 아니라, 끝을 직감하는 존 딜린저의 표정인 셈이다. 여기서 끝이란 죽음이라기 보단 자신의 시대에 가깝다. 그 시대로부터 어떻게 퇴장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영웅적 면모가 고독하게 돋보인다.
존 딜린저의 죽음을 담아낸 영화의 결말부는 범죄자에 대한 사살이라기 보단 비겁한 공모적 암살에 가깝게 연출된다. 그 순간, <퍼블릭 에너미 Public Enermies>, 즉 ‘공공의 적’이라는 제목은 명확히 반어적인 언어로 전복된다. 고독한 영웅적 면모를 선보이는 갱스터가 무리 지어 모인 FBI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광경은 아이러니하게도 비장한 페이소스를 연출한다. 시대적으로 퇴물이 되어가는 갱스터의 낡은 영광이 영면에 든다. 겁쟁이처럼 숨어서 존 딜린저를 기다리던 수사관들은 그가 주검이 된 뒤에야 그 얼굴을 대면한다. 겁쟁이들을 평정한 영웅의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거대한 인물의 죽음을 마주한 뒤에서 시대의 종언을 체감한다. 떠나간 사람을 추모하며 뒤늦게 한 시대의 끝을 체감하는 오늘날의 우리처럼 그렇게 시대의 끝은 뒤늦게 직감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겁쟁이들이 끝없이 사라지는 것과 달리 영웅은 이야기를 통해 영생을 누린다.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다'고 믿었던 낭만주의적 영웅은 시대를 넘어 스크린에 부활된다. <퍼블릭 에너미>에서 '존 딜린저'는 전설적인 갱스터의 고유명사라기 보단 진정한 낭만주의적 영웅을 대표하는 실존적 육체에 가깝다. 결국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의 육체를 통해 영웅의 시대를 기리며 낭만의 부활을 꿈꾸는 영화인 셈이다.
잘 키운 캐릭터 하나면 시리즈가 보장된다. 특히 캐릭터의 매력이 중시되는 애니메이션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드림웍스가 자사의 프랜차이즈 캐릭터들을 우려먹으며 시리즈를 거듭해나갈 수 있는 것도 그런 덕분이다. 하지만 최근 <슈렉3>, <마다가스카2>와 같은 기대 이하의 속편을 공개하며 도태되는 드림웍스의 작품들이 증명하듯 단지 잘 나가는 캐릭터의 인기 하나만으로 시리즈를 지속할 수 있다는 믿음은 망상에 가깝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캐릭터의 매력도 함께 닳고 닳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아이스 에이지3: 공룡시대>(이하, <아이스 에이지3>)는 의미 있는 속편이다. 의미 있는 애니메이션을 창작해내는 픽사의 정반대의 영역에서 나름의 의미를 추구했다 해도 좋을 만한 <아이스 에이지3>는 순수 엔터테인먼트의 야심으로 점철된 코믹 어드벤처 애니메이션이다. 지난 두 편의 전작이 보유했던 캐릭터들의 매력이 고스란히 보존되는 동시에 새로운 캐릭터를 수혈하며 새로운 스토리를 보충한다. 물론 전작과 마찬가지로 <아이스 에이지3>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위기에 빠진 친구를 구하러 가는 이들의 모험담에서 가족주의적 서사는 지극히 뻔한 사연에 불과하다.
그 뻔한 바탕에 특별한 묘미를 새겨 넣는 건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의 유머와 시각을 공략하는 이미지다. 특히 디지털 3D로 제작된 이번 작품은 입체적 영상의 묘미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노골적인 이미지가 곳곳을 메우고 있다. 또한 빙하기 동물 캐릭터들의 입심 좋은 유머와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은 쏠쏠한 오락적 묘미 그 자체다. 특히 새로운 시리즈에 걸맞게 새롭게 등장한 캐릭터 벅(사이몬 페그)은 기존의 캐릭터와 함께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새로운 사연에 어울릴만한 필연적 매력을 발생시킨다.
순수한 오락물이라는 측면의 의미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가치가 없다고 평할 수 있는 <아이스 에이지3>는 말 그대로 자신의 의도 자체를 명확하게 관철시키는 작품이다. 세 편의 시리즈를 이어나가는 가운데서도 좀처럼 도태되지 않는 오락적 감각은 분명 이 시리즈가 지닌 최고의 매력이자 동시에 이 시리즈의 존재 이유를 위한 설득적 가치에 가깝다. 전작들로부터 물려받은 순수 엔터테인먼트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새롭게 발전시키는데 성공했다. 최소한 자신의 장기가 녹아 내리지 않게 만드는 동시에 새로운 매력으로 더욱 두터워진 시리즈란 점에서 미덕이 있다.
<소년 탐정 김전일>에서 모티브라도 얻었는지 몰라도 학원 추리물을 표방한 <4교시 추리영역>이 적어도 ‘추리’라는 장르적 밸류에 어울릴만한 기본급 수준이라도 갖췄다면 좋았겠지만 영화는 좀처럼 염치없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중고등학생 주머니 좀 털어보겠다는 심산으로 만든 영화 같은데 요즘 애들 수준을 무시하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결과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재미라도 즐기겠다는 확고한 본전 의식이라도 없다면 안구에 쓰나미가 밀려오는 걸 막을 재간이 없을 게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밑도 끝도 없이 최악의 수사를 동원하게 될 테니 여기서 그만. 다만 유승호 소속사는 이걸 알아야 한다. 일찍부터 스타덤에 오른 어린 배우로 장사를 하고 싶은 건 알겠는데 주연작이란 타이틀에 혹해서 시나리오 꼴도 확인하지 않고 설익은 배우를 막 굴리다간 결국 낭패를 보게 될 거다. 예언하자면 <4교시 추리영역>은 분명 올해 최악의 개봉작 후보 0순위를 차지할 거다. 유승호에게 벌써부터 안습의 이력이 하나 지워진 셈이다.
이윤기 감독의 신작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촬영 때문에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국가대표> 이후로 4편의 영화에서 하정우란 이름이 보이더군요. 이미 촬영이 끝난 <페럴렐 라이프>를 비롯해서 현재 촬영 중인 <티파니에서의 아침을>, 그리고 나홍진 감독의 신작 <황해>와 전계수 감독의 차기작으로 예정된 <러브 픽션>까지, 정말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배우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웃음) 쉴 틈도 없어 보이는데 체력적인 부담은 없나요?
체력적인 문제는 없어요. 일단 저와 프로덕션끼리 서로 약속했던 부분만 잘 맞아떨어져서 계획적으로 촬영이 준비되고 이뤄지기만 한다면 스케줄은 물리적으로 전혀 무리 없이 돌아가니까요.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건 지난 캐릭터를 복제하지 않고 잘 변주해 나가면서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해낼 수 있는가라는 부분이죠. 배우로서 얼마나 소비되지 않느냐가 최고의 관건이랄까. 상업적인 설득력을 염두에 두면서도 기존에 있었던 영화보다 새롭거나 실험적인 프로덕션, 제작 방식을 생각하면서 작품을 선택하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러브 픽션>은 굉장히 새로운 영화에요.
어떤 점에서 말인가요?
대사의 템포나 리듬, 톤 자체가 굉장히 만화적이에요. 우리가 영화상에서 만나는 일반적인 캐릭터들의 대사 속도보다 2배 정도 빠르거든요. 과거 ‘하워드 혹스’의 작품이나, ‘우디 알렌’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의 대사만큼이나 빨라요. 그런 점에서 유니크(unique)한 면이 있죠. 지금은 제작이 딜레이(delay)돼서 언제 촬영에 들어갈지 미지수지만 분명히 언젠가는 꼭 전계수 감독님과 찍어내고 싶어요.
지금 찍고 있는 <티파니에서 아침을>로 이윤기 감독과 두 번째 만났고, 이미 <황해>를 통해 나홍진 감독과 두 번째 작품을 약속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윤종빈 감독이나 김기덕 감독과도 이미 두 차례씩 작업했죠. 한 감독과 다시 만나서 작업하는 경우의 장점을 그만큼 많이 느끼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물론 엄청난 신뢰가 생기죠. 전작을 통해서 지지고, 볶고,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고, 모니터를 통해서, 어떤 시간과도 바꿀 수 없는 많은 부분을 공유했으니까요. 감독이 창조해낸 세계와 내가 연기했던 인물이 있는 한편의 영화를 우리가 만든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젠 전반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서 베스트를 뽑기 위해 같은 단계에서도 더 위에 있는 문제들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거죠. 거두절미 할 수 있는.
나홍진 감독의 차기작은 언제 결정하신 건가요?
<추격자>를 끝내고 나서 나홍진 감독님과 윤석이 형하고 같이 또 다른 그림을 그려보면서 이런 거 하면 재미있겠다 싶었던 게 있었는데 그게 <황해>였어요. 작년 여름에 결정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생각해오면서 준비하고 있죠. 당장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부터 준비해야지, 하는 게 준비가 아니잖아요. ‘구남’이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감독님을 만날 때마다 얘기를 나눠가면서 장기적으로 자연스럽게 준비를 해나가는 거죠. 이렇게 하다 보면 1년에 많게는 주연작 3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지속적으로 몸을 달궈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한편으론 또 일상 안에서 몸을 식히는 것도 중요할 것 같고요. 배우로서 에너지를 끊임없이 소비하는 만큼 일상에서 재충전할 수 있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배우 하정우로서의 삶과 김성훈으로서의 삶에 분명한 차이를 두려고 해요. 예를 들면 연예인이 아닌 일반적인 친구들과 축구팀을 만들어서 조기축구회 아저씨들과 부딪혀보기도 하고, 그 사람들과 같이 밥도 먹는 건 그 안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죠. 3~40대, 많게는 50대까지, 지금의 남자들이 무엇을 얘기하는지, 무엇을 통해서 삶의 체증을 해소하는지 직접 느끼고 저도 30대 초반의 남자로서 같이 얘기를 나누다 보면 많은 것들이 리프레쉬(refresh)되는 것 같아요. 그만큼 발란스(balance)를 맞춰주는 게 가장 중요하고 이런 생활을 통해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다작을 하는 만큼 차기작 선택에 있어서 전작과의 캐릭터적 차별성이 중시되지 않을까 싶군요.
매번 다른 거 같아요. 어떤 배우가 ‘메소드(method)’ 연기를 한다 했을 때, 메소드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잖아요. 또 다르게 ‘스타니슬라브스키(Stanislavski, 1863~1938)’식의 연기를 할 수도 있고요. 자기의 경험으로 회귀해서 그 안에 놓인 자신만의 무언가를 끄집어내서 표현할 수도 있고, 연기 하나하나를 기술적인 표현 방법으로 구사하며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방법도 가능하죠. 우는 장면에서도 제 감정을 끌어올리기 보다는 철저하게 기술적으로 우는 연기 자체를 만들어내는 거에요. 이렇게 다양한 표현 방법을 염두에 두는 건 최소한 1년 이상의 장기적인 플랜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국가대표>라는 상업적 작품이 여름에 떡 버티고 있기 때문에 그 이전에 <보트>라는 저예산 예술영화를 찍어도 보완될 수 있는 측면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 조합을 생각하고 나니 더욱 큰 무리는 없겠다는 생각도 들고.
종종 보면 상당히 본능적으로 연기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분석적으로 연기에 접근한다고 들었습니다. 단지 캐릭터의 역할 뿐만 아니라 신 자체의 분석을 통해서 그 안에서의 역할 자체의 높낮이를 제한할 만큼 계산적인 연기를 한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감독의 연출 스타일에 따라서 연기적 표현 양식이 달라지는데요. 홍상수 감독님은 좀 예외적인 케이스지만, 윤종빈 감독님, 이윤기 감독님, 김영남 감독님, 다들 극사실적인 연출 방식을 선호하는 분들이잖아요. 그런 영화 안에서 배우가 해야 할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 일단 감독의 연출 스타일이 그렇다면 배우는 철저히 도구이자 오브제(objet)로서 관객들에게 그 신을 잘 설명하고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봐요. 감독들이 컷을 쪼개는 스타일에 따라서 종종 빈 공간이 많이 생기기도 하는데, 쉽게 얘기해서 마가 뜨는-일반적으로 촬영 현장에서 대사와 대사, 액션과 액션 사이에 시간적 공백이 생길 때 ‘마가 뜬다’고 표현한다.- 부분이죠. 그 부분에서 관객에게 얼마나 효과적인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봐요. 윤종빈 감독님은 원신원컷을 너무나 좋아하는데 종종 인물을 따라잡으며 팬(pan, 카메라를 좌우로 회전시키는 기법)을 하기도 하거든요. 그러면 팬을 하기까지 1, 2초 정도 마가 뜨는 장면이 생겨요. 그렇게 마가 뜨는 장면에서 감독이 원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내가 할 몫이 무엇이 있을지 생각하게 되는 거죠. 내가 그 안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는 것 같거든요. 캐릭터가 변질되지 않고, 스토리가 피해 받지 않게끔 시나리오 상에 명시되지 않은 애드립을 넣어줘도 될 것 같아요. 그 지점에서 내 개성을 조금 더 드러내는 것이 허용되는 것 같고요.
영화에 대한 이해가 없고서야 불가능한 작업이기도 하겠죠. 직접 찍은 단편 영화가 한편 있다고 들었습니다. 직접 카메라를 잡아본 연출적 경험이 연기적 관점에 작게나마 일조한 측면이 없을까요?
어떤 신하고 신을 유기적으로 연결해서 극적 흥미를 높이면서 찍고자 한다면 그 신에서 마지막 컷이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연기를 끝냈는지 신경 쓴 후에 그 다음 신의 첫 번째 컷을 구상하죠. 예를 들어서 완전 풀샷으로 끝나는 신이 있어요. 그 풀샷에 제 모습이 담겨있고, 그 다음 신에서 윤석이 형의 타이트 바스트나 타이트 클로즈업이 들어가요. 그럼 여기서 내가 어떻게 연기해줘야 윤석이 형의 타이트 샷이 잘 붙겠다 계산하는 거죠. 캐릭터의 연기를 떠나서 영화적 재미를 주는 극적 연출의 영역까지 고려하는 연기가 가능하면 더욱 극적으로 신이 넘어가는 효과가 생겨요. 아무래도 그런 걸 느낄 수 있었죠.
하지만 모든 연기가 정확하게 계산과 맞아떨어질 수는 없는 일일 겁니다. 때때로 그런 계산의 오차를 메우기 위한 본능적인 반응이 필요할 때도 있을 거고요.
영화 안의 신마다 초(初)목표가 있잖아요. 각 신마다의 흐름에 따라서 발란스를 맞추는 가운데서도 각 신마다의 초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 거죠. 계산적인 합을 잘 맞춰서 도달해야 할 신이나 장면이 있고, 어떤 건 그냥 현장에서 그때 그 기분에 한번 맡겨보자, 하게 되는 지점도 있는 거 같아요. <추격자>에서 심리 분석관과의 대질 신은 정확히 3번 째 촬영일에 가서야 촬영할 수 있었어요. 왜냐면 처음엔 그분하고 뭔가 톤이 안 맞았고, 두 번째는 제가 못했어요. 이상했거든요. 그 장면만큼은 계산하지 않았던 장면인데 그 전에 파출소에서, “안 팔았어요, 죽였어요.”하는 장면이나 그 다음에 이 형사가, “그 여자 어떻게 했어.” 물으면 정으로 찍고, 아킬레스를 따서 어쩌고 하는 장면, 그리고 여자 형사에게 냄새 비리다고 하는, 어떻게 보면 중요 포인트가 반복되고 있어요. 그래서 이건 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템포까지 계산하면서 연기했지만 마지막에 클라이막스 지점에선 어떤 계산이 설 수 없잖아요. 그래서 그건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래서 이건 그냥 현장 가서 내 느낌대로 찾아가서 해봐야겠다, 싶었죠. 계산대로 해보면 뭔가 너무 작위적이 될 거 같아서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너무나 흔한 취조 신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사실 꽃이죠. 스릴러의. (웃음) 그렇기 때문에 무모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 있게 내 필대로 가봐야겠다, 했는데 두 번이나 안된 거에요. 두 번째엔 감독님한테 정말 정중하게 오늘 못 찍겠다 사과드리기도 했죠. 한번 테이크를 갔는데 하고 나니까 너무 작위적이라 민망한 거에요. 그러니까 감독님이, “정우, 너 이제 어떻게 할래. 그만 찍을까.” 하시길래 마지막 한번 더 기회를 달라고 했죠. 결국 그 날 안 찍고 세 번째 날에 촬영장에 갔는데 사실 그날도 느낌이 별로 안 좋았어요. 몸 상태도 안 좋았고. 그런데 거기서 딱 느낀 게, ‘그래. 지영민도 지금 피곤하겠지. 그렇게 시달리고 밤을 새고 얻어터져서 지금 새벽 4시까지 왔는데, 지치겠네. 얘기하기도 싫겠네. 나도 연기하기 싫은데, 부담도 되고, 이걸 써봐야지.’ 했는데 통한 거에요.
<국가대표>는 시나리오도 보지 않고 작품을 결정했다고 들었습니다. 내심 걱정되는 바는 없었나요? 그런 지점과 비슷한 걱정은 있었죠. 시나리오 자체가 많이 거칠었거든요. 스토리는 분명하고, 어떤 상황인지는 알겠는데 그려지는 인물들이 많아서 그런지 조금 산만한 부분들이 있었고요. 하지만 김용화 감독님에 대한 100%신뢰가 있었고, <국가대표>가 상업영화로서 분명한 미덕이 있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어요. 그리고 예전에 스키점프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에 분명히 이 종목을 영화로 만든다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시나리오가 거칠긴 하지만 그걸 100배 이상 덮어줄 장점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처음에 감독님한테 시나리오를 받기 전에 이런 소재에 대한 얘기를 듣고도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판단했고요.
사실 <국가대표>는 하정우 씨가 찍은 첫 상업영화라 명명해도 될 것 같습니다. <추격자>가 5백만 관객을 동원하며 상업적인 인정을 받았지만 사실 <추격자>가 처음부터 그 정도로 대단한 인지도를 얻을 것이란 기대감에서 기획된 영화는 아니니까요.
(손을 모으면서) 그렇죠.
그런 점에서 <국가대표>는 전작들과 다른 연기적 접근성이 요구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김용화 감독 같은 스타일에서는 분명 달라져야죠. 일단 컷 수가 너무 많고 편집에 따라서 인물의 입체감이 너무 많이 달라지니까요. 그랬을 땐 최대한 표현을 자제하고 노멀하게 감정의 발란스를 유지해야죠. 일단 과잉수준으로 넘어서면 안 돼요. 이렇게 작품 색깔이나 연출 스타일에 맞게 변할 수 있다면 우려할만한 조건들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그런 점에서 애초에 상업영화임을 인지하고 작품에 들어간 영화는 <국가대표>가 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데요. 그런 이해가 연기에 미치는 영향력이 없었을까요?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국가대표>에서는 내러티브 위로는 절대 나오면 안 된다는 원칙이 있었어요. 철저하게 기능적인 역할이라 생각했죠. 다른 배우들을 위해서 희생했다거나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냥 앙상블을 위해서 노력했어요. 표면상으로 중심축은 저였지만 영화의 내러티브 안에서 인물의 변화를 표현하는 절반은 사실 방 코치의 몫이기도 했고요. 이런 발란스를 생각했을 때, 사람들과 부딪히고 갈등 관계를 그리는 각 신마다 수위조절을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었어요. 두 번째로 <국가대표>엔 유난히 바스트 샷이 많았고, 김용화 감독의 영화는 음악이 유난히 많은 편이기도 하고, 교차편집도 굉장히 많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조금 더 튀어 보여서 개성이 드러내면 굉장히 언발란스해질 것 같았죠. 그만큼 감정을 최대한 비워내려고 노력했어요. 장면에서 흐르는 음악이 제 감정의 옷처럼 입히게끔, 혹은 편집이나 영화적 장치들로 과장시킨 감정들이 저를 거치면 과잉이라고 보이지 않게끔 제가 서 있는 것, 제가 쳐다보는 것, 이런 행위 속에 담길만한 감정도 비워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최대한 덧붙이지 않으려고, 뭔가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프레임 안에서 후반 작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여지나 여백을 열어놓으려고 했고요.
<국가대표>는 연기 이전에 스키점프 선수로서의 자태를 몸에 익히는 작업이 배우들에게 먼저 요구되는 스포츠 영화입니다. 완벽한 기술력을 몸으로 전시할 수 있을 때 설득력 있는 연기도 가능한 영화니까요.
사실 스키점프라는 장면을 담아내기 위해 배우가 맡은 역할은 10%정도 뿐이었어요. 어차피 선수들이 스키점프 장면에서 대역을 맡았고, 배우들은 점프하기 전까지의 모습을 스키점프 장면에 잘 연결시키는 역할이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최대한 어깨 높이는 맞춰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스키를 들고 있는 모습이나, 부츠를 만질 때조차 어색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했죠. 점프복을 내 몸이 익숙하게 느끼도록 노력했어요. 그래서 직접 점프복을 갖고 다니면서 집에서도 점프복을 입고 러닝머신을 많이 뛰었고요. 심지어 부츠도 갖고 다녔고. 그런 생활적인 익숙함까지 일반관객들이 디테일하게 느낄 순 없겠지만 거기서 중요한 건 지금 배우가 선수로서 연기하는 것에 대해서 동기 부여를 주는 거죠. 결국 이런 게 대사 연기나 다른 부분에서 분명히 파급 효과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그것 역시 메소드의 기본적인 방식이죠.
그런데 사실 모든 연기라는 게 다 그런 거 같아요. 로버트 드 니로가 <택시 드라이버>를 위해서 3개월 간 택시 운전을 했다는데 그걸 하고, 말고에 따라서 과연 어떤 연기적 차이가 있었을까요. 제 생각에 제일 큰 차이는 그렇게 3개월을 했기 때문에 택시 운전자에 대해서 알 것 같다는 자신감과 확신이 생기고 연기적으로 더 확실한 표현이 가능하게끔 동기부여를 형성해주지 않았을까라는 거죠. 그런 심리적 요인이 가장 큰 효과라고 생각해요.
사실 <국가대표>의 밥은 전작에서 맡았던 캐릭터들보다 평면적인 캐릭터란 생각이 듭니다. 감정의 표현에 있어서도 보다 직설적인 느낌이 들고요. 사실 하정우 씨가 좀처럼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캐릭터들을 연기해온 덕분이기도 하고요. (웃음)
김용화 감독님의 훌륭한 점 가운데 하나는 매 장면마다 디렉션의 스타일이 다 다르다는 거에요. 감독이면서도 철저하게 관객의 입장에서 쇼트를 바라보고 있는 거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사랑하는 남자가 오랜만에 돌아와서 정말 행복해하는 여자의 표정을 비추는 쇼트가 있는데 감독이 처음에 여주인공한테 그 표정을 주문했을 때는 원했던 표정이 잘 안 나왔대요. 그래서 감독이 “당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성관계 후에 오르가즘을 느낀다고 상상해보고 그 표정을 한번 만들어봐라”. 그랬더니 여배우에게 기막힌 표정이 나왔다고 하죠. 그런 것처럼 김용화 감독도 매 적재적소마다 디렉션의 스타일이 달라요.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 현실적인 요소도 생기고, 배우가 자신의 연기를 끌어내게끔 움직일 수 있게 유도하는 거 같아요. 예를 들어서 <국가대표>엔 기존에 제가 했던 연기적 표현 방식들과 달리 감정이 굉장히 풍부해져서 간지러운 부분이 있죠. 마지막에 버스를 내린 뒤 공항에서 나와서 눈물 흘리는 장면이 있는데 사실 전 그러기 싫다고 했어요. 솔직히 너무 간지러웠거든요. 공항에서도 과연 그렇게까지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지, 처음에 감독님에게도 그렇게 질문했어요. 그런데 감독님께서 말씀하셨죠. “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많은 대중들은 이렇게 연기를 해줘야 터칭(touching)을 좀 받는다.” 그래서 납득이 했어요.
<추격자>나 <멋진 하루>처럼 두 명 정도의 인물을 중심으로 서사가 진전되는 영화는 배우들의 반응 하나하나가 묘미가 됩니다. 그러나 <국가대표>처럼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에서는 전체적인 조화가 중요하죠. 다양한 캐릭터들이 모여서 이루는 입체감이 관건이기도 하고요. <국가대표>를 보면서 <비스티 보이즈>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리더라는 역할 때문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런데 <비스티 보이즈>는 매니저로서의 느낌이라면 <국가대표>는 맏형 같은 느낌의 차이가 있었죠. 사실 현장에서 또래 배우들 가운데 실제로 맏형 노릇을 했을 거 같은데요. 선배로나 형으로서나 후배들을 지켜보는 입장이 어땠을지 궁금하군요.
같이 연기하는 친구들과 4~5년 정도의 나이차가 있었는데 그만큼 제 나이가 많은 거 같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비슷비슷한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같이 연기하는 친구들이 저를 선후배가 아닌 동료나 친구로 느낄 수 있길 바랬고요. 그들을 도와준다기 보단 편하게 같이 어울리려고 노력했어요. 도리어 그들을 더 높여주고,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조언을 한번 구해보기도 하려고 노력했죠. 어쩌면 <멋진 하루>에서 느낀 바가 많았기 때문에 저도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도연 누나가 저를 계속 서포팅(supporting)해줬다고 느꼈는데 제가 도연 누나로부터 느꼈던 걸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싶었거든요.
아무래도 본인이 경험했던 부분이라 더욱 그 중요성을 느낄 수 밖에 없겠죠. <추격자>와 <멋진 하루>의 하정우 옆에 김윤석과 전도연이라는 좋은 배우가 있었다는 사실이 어쩌면 정말 엄청난 기회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히트>에서 고현정 누나도 마찬가지였어요. 덕분에 어떤 캐릭터로 만나서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한다기 보단 자연스럽게 형, 누나, 하면서 인간적인 유대감을 형성하는 게 어쩌면 배우들의 앙상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키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죠.
하정우 씨 스스로도 자신과 가장 닮은 캐릭터는 <멋진 하루>의 병운이라고 밝혔던 것으로 아는데 정말 실질적으로 병운이 닮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 그래요? (웃음)
제스처라던가, 세세한 몸의 움직임 자체에서 발생하는 뉘앙스가 언뜻 병운을 연상시켜요. <비스티 보이즈>에서의 대사처럼 느낌이 있어요. (웃음) 그런데 사실 연기는 자신이 지니지 못한 것을 창작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자신을 고스란히 투영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자신이 모르는 것들을 연기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경우는 없었나요?
(손뼉을 치면서) 아! 지금 갑자기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데, 어쩌면 <국가대표>의 밥, <보트>의 형구, 그리고 대표적으로 <추격자>의 지영민, 이 세 인물은 사실 제 힘으로 연출해낸 캐릭터 같아요. 그리고 <비스티 보이즈><멋진 하루>는 그냥 저에게 있는 그대로 했던 거 같고요. 제가 요즘 채플린 얘기를 많이 하는데 <모던 타임즈>(1936), <위대한 독재자>(1940), <키드>(1921), 이런 작품들을 보면 채플린이 감독이기도 하면서 본인이 직접 그 인물을 연출하기도 하잖아요. 저도 그럴 수 있다면 되게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 그대로 캐릭터 자체를 하나의 창작으로서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해도 될 것 같군요. 사실 채플린은 방랑자적인 캐릭터를 계속 연출하고 사용해왔죠. 하지만 <라임라이트>(1952)같은 경우에는 그냥 있는 그대로 늙은 인간 채플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단 말이에요. 그랬을 때 이런 양면성이 공존해서 캐릭터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면 정말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전자의 부분은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고, 복제 논란이 많을 수 있을 거에요. 그래서 관객들이 그런 의미를 좀 알고 제 연기를 본다면 굉장한 재미가 있을 거 같아요. 감히 말씀 드려보자면 이 시대의 채플린, 이런 캐릭터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면 좋을 거 같아요. 짐 캐리가 <에이스 벤추라>같은 영화에서 보여준 재미난 부분들이 있잖아요. 그 배우의 어떤 한 부분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영화를 봤을 때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닐까요. 너무나 영화적인 캐릭터니까요. 도리어 저의 것을 보여주는 게 또 영화적일 때도 있고요. 그런 의미에서 <추격자>의 지영민, <보트>의 형구, <국가대표>의 밥 같은 경우는 저의 또 다른 다채로움이 반영된 캐릭터라는 점, 만약 그걸 알고 저와 제 영화를 보신다면 충분히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사실 <국가대표>의 밥은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점에서 <보트>의 형구와 교차되는 지점이 있는 캐릭터입니다. 이렇게 종종 지난 캐릭터와의 연속성이 느껴질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하정우 씨처럼 한 작품을 끝내고 바로 차기작에 들어가는 경우, 이렇게 전작의 캐릭터와 연관성이 존재하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 캐릭터적으로 기시감이 크지 않나요?
사실 제가 연기한 캐릭터마다 거의 다 비슷한 점이 있는데요. 전부 다 약간 방랑자 같단 생각이 들어요. 쉽게 예를 들자면 집이 없고, 가족이 불투명하고, 인물의 성장환경이 좀처럼 노출되지 않으면서, 그런 식으로 뭔가 여지가 있어 보이는, 개인적으로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면 재미를 느끼는 거 같아요. 영화를 찍을 때 저도 제가 재미있어야 연기를 할 수 있거든요. 만약 그런 연관성이 없다면 재미가 없을 거에요. 아니면 반대로 완전히 다른 뭔가가 있어서 느껴지는 재미도 있겠죠. 앞으로 다른 캐릭터를 만나보고 찾아 보면서 그런 재미를 열어나가다 필모그래피가 좀 쌓이다 보면 그 때 또 한번 정리해서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겠죠.
연기뿐만 아니라 피아노, 그림, 무용, 등 정말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고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관심은 호기심에서 출발하지만 적당한 관심에 머무르는 경우도 많죠. 그래서 어느 정도 자기 기준 안에서 적당히 성취를 이뤘다 싶으면 쉽게 만족하고 손에서 놓기도 하고요. 마치 이건 이 정도면 됐어, 라는 식이랄까요. 하지만 하정우 씨에게 연기는 아무래도 단순한 관심 이상의 욕망처럼 보입니다. 성취에 대한 깊이 자체가 다르다고 할까요. 어쩌면 다른 관심들이 그만큼 그 연기적 성취를 위해 할애되는 부차적 노력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다 굉장한 연관성이 있어요. 쉬운 얘기로 영화를 찍거나 배우로 살아가는 건 종합예술을 하는 거잖아요. 제가 그런 순수예술에 많이 기대고 영감을 얻게 되는 거 같아요.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어떠한 지점에서 더 이상 파고들지 않는 건 충분히 거기에 대해서 얻은 바가 충분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고요. 만약에 미술을 한다, 사진을 찍는다,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그 가운데서도 어떤 일부분에서만 영감을 얻어요. 어쩌면 그게 다 저를 치우치지 않게 하는 지점일지도 모르죠. 그러한 것들이 오로지 제가 연기를 하고 영화를 찍는데 집중할 수 있게 도움이 되는 것들이죠. 만약 주객이 전도돼서 제가 그 발란스를 놓치고 다른 것들에 빠져들면 일단 묘미는 있겠죠. 가치는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연기가 아닌 다른 분야에 치우치는 건 제가 생각하는 방향 안에서 빗나가는 부분이기 때문에 단지 그것들은 제가 계속 연기적으로 영감을 받고 재료를 얻을 수 있는 부분으로서 가치가 있어요.
사진을 찍는다고 하셨는데 왠지 풍경보단 인물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표정에서 느껴지는 다양성이 캐릭터의 내면을 표정으로 구사하는 배우에겐 좋은 영감을 부를 것 같거든요.
인물 사진을 굉장히 좋아해서 종종 사람들을 찍으러 가요. 많이 찍었고 많이 확보하고 있어요. 종종 어떤 인물들을 봤을 때 특이점들을 많이 발견하게 되는 거 같아요. 사실 배우가 가장 멋지게 보일 때는 그 배우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한테 연기적 영향력을 굉장히 많이 주셨던 대학 교수님한테도 그런 얘기를 들었거든요. 배우는 무표정의 힘이 제일 중요하다. <대부3>에서도 알파치노가 시칠리아로 넘어가서 아들의 연주를 회상하는 장면 있잖아요. 알 파치노는 아무 것도 안 해요. 선그라스 낀 얼굴로 무표정한 알 파치노의 얼굴에서 회상 장면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알 파치노 컷으로 돌아오면 안경 벗고 가만히 있죠. 아까 초반에 말씀 드린 것처럼 어쩌면 그 무표정이 그 회상 장면을 넣을 공간을 마련해주는 거라고 볼 수도 있고요. 어쩌면 무표정이라는 건 그 사람의 제일 솔직한 모습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얼굴의 안면근육을 다 풀고 가만히 있는 게 좋아요. 사진을 찍을 때도 사람들에게 최대한 무표정으로만 찍어달라고 얘기하기도 하고요. 그 사진들을 보면 너무 재미있어요.
어쩌면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얼굴을 발견할 때라고 할 수도 있겠죠.
맞아요. 사실 우린 어떤 강박 속에 있는 거 같아요. 그림을 그릴 때 사람들은 잘 그려야 된다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실사와 똑같이 그려야 된다라는 강박으로 이해해요. “그림 잘 그리세요?”라고 물어보면, “아, 그림은 젬병이에요.” 어떻게 보면 그림 자체가 그냥 자기 마음대로 그리는 거잖아요. 자기가 생각하는 자동차를 그리고, 자기가 생각하는 꽃을 그리는 건데, 어렸을 때부터 잘 그리고, 못 그리고, 에 대한 말도 안 되는 기준을 갖고 있는 거 같아요. 전 그게 말도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연기도 마찬가지 같아요. 분명히 모든 사람이나 모든 배우들이 자기만의 매력 포인트를 갖고 있는데 그걸 어떤 이상한 기준에 자꾸 맞춰가려고 하는 거 같거든요. 배우로서 어떤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선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자신만의 매력 포인트로 삼아야죠. 그림을 그린다면 제가 생각하는 그림을 계속 그려나가는 거에요. 그 안에서도 자신과 엄청나게 싸우게 돼요. 내가 그리는 이 꽃이 남이 봤을 때 꽃이 아닌 거 같은데, 이 색은 남이 보면 어딘가 대비가 맞지 않다고 말할 거 같은데, 생각하죠. 하지만 결국 그게 풀리게 되면 제가 원하는 걸 자유로운 의식의 흐름대로 그릴 수 있는 결과에 도달하게 돼요.
누군가의 기준을 쫓아가기 전에 자신의 기준에 따라 모든 걸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예. 그렇죠.
사실 전작들은 대부분 감정적 여운을 남기고 끝나는 경우가 많았죠. 그만큼 배우 스스로도 감정적인 해소를 느끼지 못하고 영화에서 빠져 나와야 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국가대표>는 결말의 스키점프 신을 통해 모든 감정을 증발시키는 느낌입니다. 배우에게도 그만큼 명확하게 감정을 해소해주는 쾌감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맞아요! 그랬어요. 그래서 그 마지막 장면을 너무나 좋아해요. 스키점프로 날아가는 장면이나 그 장면에서 나오는 음악이나, 뭔가 해소됐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감독님은 밥이 자기 인생에 통찰을 했고 모든 걸 받아들였다고 하셨는데 저도 개인적으로 이번 <국가대표>를 통해서 많은 걸 받아들인 부분이 있었어요. 밥이라는 인물을 만나고 나니까 제가 이전까지 연기한 캐릭터들은 너무나 방황하거나 방랑하면서 겉돌지 않았는지 고민하게 됐어죠. 이젠 좀 더 제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제대로 된 직업도 있는 캐릭터를 만나야겠다 생각도 들었고요. 어쩌면 그 장면 자체가 주는 속 시원함이 지금 저에게 어떤 쉼표가 될 수 있는 게 아닌지, 배우로서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는 건 아닌지, 인생의 1라운드를 정리할 수 있는 지점은 아닌지, 이런 생각이 들어요.
촬영 중에 큰 부상도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사실 그 마지막 장면이 촬영 때 살이 제일 많이 올라왔던 신이었어요. 살 퉁퉁 쪄가지고, 감독님께서 “너 때문에 컷이 안 붙는다. 어떻게 겨울하고 여름 사이에 8kg차이가 나냐.” 하소연하셨죠. (웃음) 제가 그때 팔이 부러져서 한달 반 동안 운동도 못하고 스트레스 받다 보니까 먹기만 했거든요. 그래도 다행인 게 그 솔트레이크 장면만 남았었죠.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하는 느낌이 있잖아요. (웃음)
<두번째 사랑>같은 경우는 미국에서 영어로 연기를 했고, <보트>에서는 일본에서 종종 일본어로 대사를 하기도 합니다. 사실 국내 배우가 타지에서 타국어로 연기를 하거나 자국어를 쓰는 외국배우와 호흡을 맞춘다는 건 흔한 기회는 아니죠. 어떤 면에서는 도전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되게 단순하게 받아들인 거 같아요. 일단 제가 새로운 경험을 마다하지 않는 거 같고요. 어쩌면 지금까지 무모하게 계속 추진해나가고 있었는데 이젠 다져나가야 할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경험을 축적해야 되고 이를 통해 뭔가를 더 학습해나가야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굉장히 웃긴 얘기일지 모르지만 나중에 뭔가 정말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를 위해서 지금 나이부터 계속 쌓아나가야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그런 새로운 경험들을 마다하지 않고 도전해 나가야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어요.
<국가대표>가 개봉했으니 이제 하정우 씨가 또 한번 떠나 보낸 작품이 됐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찍고 있으니 다시 새로운 작품을 맞이한 셈이죠. 이렇게 항상 영화를 보내고 맞이하는 시기가 짧은 만큼 전작과의 친밀감을 덜어내는 것이 새로운 작품에 임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관건이 아닐까요?
제 몸이 재료라면 재료를 달궈놓은 상태에서 또 시작할 수 있는 셈이니까 그것만으로 되게 좋은 거 같아요. 사실 저는 한 작품을 끝내고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는, 계속 이렇게 작품을 거듭하는 부분에 있어서 좋은 기억을 갖고 있어요. 옛날에 <카르멘>이라는 연극을 했었는데 그때 엄청난 상처를 받았었어요. 친했던 선배가 공연을 보고 나서 막말을 하는 거에요. “너 연기하는 거 보고 정말 실망했다. 난 네가 연기를 좀 하는 줄 알았는데.” 민망해서 쫑파티도 못 갔어요. 그때 연출자하고도 사이가 안 좋기도 했고, 어린 나이에 여러 가지로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죠. 대인 기피증까지 올 정도였어요. 그런 피해의식이 있었는데 그걸 풀어준 게 <고도를 기다리며>였어요. 그렇게 위축된 상태에서 소극장 공연 한번 재미있게 해보자는 동기들과 함께 무대에 서봤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에요. <카르멘>때 했던 고민과 막막함이 완전 풀렸어요. 아, 이게 치유가 되는 구나 싶었죠. 최주봉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작품으로 상처를 받으면 다시 작품으로 치유해야 된다. 대신 기 기간을 더 두면 안 된다.” 스키점프도 마찬가지거든요. 스키점프에서도 점프하다 넘어지면 코치가 바로 다시 가서 뛰라고 해요. 왜냐면 그 기억을 없애주려고. 매번 작품을 찍다 보면 슬럼프가 분명히 와요. 상처도 생기고요. 제가 알게 되는 실수에 대해서 쪽팔리고 부끄러워서 견디지 못할 정도로 힘든 지점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러면 늘 다음 작품에서 두 번 실수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러면서 다음 작품 찍다 보면 예전에 했던 고민들이 녹을 때가 있죠.
어쩌면 지난 고민들을 녹이기 위해서 끊임없이 다음 작품을 찾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사무엘 베케트가 <고도를 기다리며>를 쓴 기간이 보름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사랑하는 여자랑 몇 날 몇 일 섹스를 하다가 ‘아, 써야겠다’ 해서 제 방에 들어가서 몇 일만에 만들었다고 하죠. 베케트가 그랬듯이 잭슨 폴락도 필이 왔을 때 밤 새도록 그림 그렸다 하고, 그렇게 필이 올 땐 계속 하고 싶잖아요. 지금이 아무리 저에게 다지는 시기다, 그렇게 말하게 된다지만 그냥 지금 저는 너무 하고 싶은 욕망이 충만한 상태 같아요. 저한테 어떻게 이런 다작이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단순히 너무 하고 싶어서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거 같아요.
드림웍스가 자사의 프랜차이즈 캐릭터들을 우려먹으며 속편 증후군에 빠진 것과 달리 폭스의 <아이스 에이지3: 공룡시대>(이하, <아이스 에이지3>)는 다시 한번 캐릭터의 위력을 톡톡히 이어나간다. 의미 있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 픽사의 정반대 영역에 놓인 듯한 <아이스 에이지3>는 순수 엔터테인먼트의 야심으로 점철된 코믹 어드벤처 애니메이션이다. 지난 두 편의 중심캐릭터들이 여전한 매력을 과시하는 가운데 새로운 캐릭터가 신선함을 더한다. 단순한 스토리에 양념 같은 유머를 가미하고 효과적인 이미지를 치장시킨다. 특히 3D 방식으로 제작된 이번 시리즈는 그만큼 이미지를 통해 건져 올린 오락적 묘미가 쓸만하다. 입심 좋은 캐릭터란 면에서 성인에게 어필할만한, 빙하기의 동물 캐릭터의 귀여운 이미지는 아동들에게 어필할만한, 단순한 스토리에 딴지를 걸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만큼 순수한 오락적 자질이 충만하다. 무엇보다도 기존 시리즈로서의 매력이 녹아 내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속편이라 할만하다.
사라진 동생 소진(심은경)을 찾아나서는 희진(남상미)이 맞닥뜨리는 상황을 대변하는 건 형사 태환(류승룡)의 잦은 대사다. “그게 말이 돼?’당연히 말이 될 리가, 좀처럼 믿을 수 없는 일 앞에서 당연한 질문. 하지만 그게 말이 되건 말건 간에 누군가는 믿을 수 없는 일을 겪는 세상. 말 그대로 불신지옥, 누군가가 믿어줄 수도 없는 일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사람의 삶이란 이토록 괴롭고 처연하다. 지독한 믿음을 지닌 자들이 만들어낸 지옥에 믿을 수 없는 자가 갇히게 되는 상황은 공포 그 자체다.
<불신지옥>은 자신의 광기를 전도하는 자들의 믿음이 만들어낸 지옥도다. 믿는 자들의 광기에 치여 사는 인간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때때로 공포가 된다. 건조한 톤으로 내려앉은 영화는 시종일관 서늘한 낯빛으로 긴장감을 조성하고 복도식 아파트와 지하실과 같은 한국적 풍경을 적극 활용한 호러적 연출은 꽤나 인상적인 이미지를 구축한다. 무엇보다도 <불신지옥>이 ‘(한국식)기독교’와 ‘무속신앙’을 묘사의 대상으로 삼은 건 형태적으로 전혀 무관해 보이는 두 종교가 사실상 한국 사회 내에서 뿌리깊은 병리적 맹신을 전도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형 체육관에 모여 통곡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나 종을 울리고 춤을 추며 굿판을 벌이는 행위는 실상 그 믿음의 외벽에 놓인 자들에게 기괴한 감상을 부르는 병리학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믿는 자들이 만들어낸 광기는 믿지 않는 자들의 눈에 공포를 비춘다.
믿을 수 있는가, 믿을 수 없는가의 물음은 종교와 신앙이라는 단어 안에서 반복돼왔다. <불신지옥>은 그 물음에 답변할 개인적 권리를 침해하는 자들의 광기를 공포로 치환한다. 믿음의 본질과 무관하게 그 형태 자체에 미쳐버린 자들은 자신의 주변에 놓인 자들을 파괴하는 형태로 그 믿음을 전도해나간다. <불신지옥>은 연출적 면모와 주제적 접근 모든 면에서 주목 받을만한 작품이다. 초자연적인 분장을 빌리지 않고 실생활의 표정만으로 섬뜩한 공기를 형성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다만 지나치게 모호한 해석을 부르는 결말이 조금 아쉽다. 마치 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입을 급하게 다무는 느낌이랄까. 강한 이미지적 자극을 원하는 관객이라면 정적인 영화의 분위기에 지루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그럼에도 <불신지옥>은 근래에 보기 드물었던 장르적 성취를 드러낸다. 뛰어난 연출력과 연기력을 기반으로 소재의 특성을 세계관에 반영하는데 성공했다. 근 몇 년간 국내 관객을 질식시키던 수준 이하의 호러를 잊어도 될만큼 인상적이다.
선혈이 선명한, 상흔이 뚜렷한, 공포에 질린 소녀가 공장지대에서 발견된다. 신체 곳곳에 학대의 흔적이 가득한 소녀는 좀처럼 말문을 열지 않는다. 소녀가 발견된 공장지대 건물 내부엔 가학적 증거들이 즐비하다. 의문에서 출발하는 이야기. 과연 그 안에선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다큐적 질감의 영상 너머로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연이 펼쳐진다. 본격적인 사연은 다시 한번 충격과 공포를 동반한 의문으로 시작된다. 의문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또 다른 의문을 증폭시키고 좀처럼 빠져나갈 수 없는 물음표의 미로를 만들어 관객의 시선을 스크린에 봉쇄한다.
눈을 감고 싶을 정도로 잔혹한 이미지가 전시되는 스크린을 응시할 수 밖에 없는 건 그러니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라는 물음을 외면할 수 없는 까닭이다.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이하, <마터스>)은 실로 잔혹한 영화이기 전에 강한 의문을 발생시키는 영화다.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가학적 사연을 짐작하게 만드는 시작 이후로, 역시나 근본을 알 수 없는 무참한 학살신이 시선을 장악하고 그 지점부터 충격이 고스란히 쌓여나간다. 모든 의문의 주체인 루시(밀레느 잠파노이)가 눈물을 동반한 학살을 자행하고, 정체불명의 괴인으로부터 근본을 알 수 없는 공격을 당하고 쫓기게 되는 순간까지, 관객은 이유도 모른 채 자신을 공략하는 서스펜스에 난도질 당해야 한다.
쏘고, 베고, 찌르고, 가르는 고문적 이미지가 생생하게 눈앞을 오가는 광경은 치가 떨릴 만큼 잔인한 감상을 부른다. <마터스>가 핸드헬드로 포착한 혼란의 도가니를 통해 캐릭터의 공황적 심리에 동참하고 있다고 믿게 됐다면 공포에 질린 캐릭터의 얼굴을 관찰하는 외부자의 위치를 문득 깨닫고 캐릭터가 내지른 비명과 함께 저만치 다른 편으로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말 것이다. 폭풍우처럼 거세게 몰아치는 서스펜스의 여정이라 할만한 중반부까지의 과정은 장르적 연출 면에서 가히 탁월하다 칭해도 좋을 만한 수준을 일관하는 동시에 극한적인 체험에 가까운 공포를 깊게 각인시킨다. 하지만 그 이후로 정체를 드러내는 극악한 세계관은 앞선 시각적 자극을 잊게 만들 정도로 참담한 심경을 안긴다. <마터스>의 본질은 그 지점에서 발효된다.
탁월한 장르적 연출과 극한의 가학적 이미지를 동원한 중반부까지의 과정은 사실상 후반부를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수련과 같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편적인 이미지즘의 총합을 통해 전가되는 서스펜스의 즉물적 자극을 넘어서 좀처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품게 만드는 공황적 충격이 엄습한다.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의문에서 시작해 감정을 후벼 파는 서스펜스가 거칠게 휘몰아치고 나면 후두부를 강타하듯 충격적인 세계관이 머리를 들고, 밑도 끝도 없는 근본적 물음이 제기된다. <마터스>는 불순하게 여겨도 무방할 정도로 극악한 영화다. 의문을 품게 만드는 극단적인 참상이 거칠게 전시되고 나서야 베일을 벗는 끔찍한 세계관의 정체는 결과적으로 그것의 의미에 대한 해석적 빌미를 전혀 제공하지 않으면서 제 스스로 물음표를 파기한다. 그것은 선의의 여운이라기 보단 악의적 도피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대체 뭘 본거냐. 하지만 끝난 영화는 말이 없다. 참혹한 기분과 어지러운 심정이 모든 감정이 휘발되듯 창백해진 심리 안으로 어지럽게 맴돈다.
끝없는 의문 사이로 감탄과 탄식이 명확히 동반되는 <마터스>는 어떤 의미로든 분명 놀라운 영화다. 장르적인 방식 안에서도 뛰어난 연출적 자질을 선보이고, 좀처럼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서사의 저력이 대단하다. 동시에 그 끔찍한 이미지를 전시하는 방식 역시 관습을 잘 따르면서도 창의적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깊게 파고 드는 참담함 너머로 내려앉은 의문에서 헤어날 수 없다. 그게 좀 마음에 걸린다. 공포를 넘어 극한의 불순함을 선사한다. 그 불순함을 좀처럼 잊을 길이 없다. 그래서 더더욱 끔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