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면증을 앓는 원우(김예리)는 이를 걱정하는 어머니가 때때로 못마땅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병이 더욱 싫다. 할머니는 이를 말없이 지켜본다. 혈연으로 엮인 세 여자의 집안을 살핀다는 점에서 여성영화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바다 속으로, 한 뼘 더>는 정적인 가족드라마다. 어머니와 딸의 갈등을 통해 더욱 굳건해지는 모녀의 연대를 차분하게 살피는 시선이 사려 깊다. 심신을 괴롭히는 병세를 극복하려는 소녀나 새로운 로맨스 앞에 마음을 여는 어머니는 각자 자신만의 성장통을 건넌다. 물론 때때로 인공적인 어투가 경직된 찰나를 인식하게 만들고 심심함이 감지되지만 전반적으로 분위기는 산뜻하며 긍정적인 에너지가 귀엽고 섬세하게 찰랑거린다. 온전히 따뜻하지 않아도 포근한 감성이 충만한 독립영화.
귀신의 소리를 듣는다는 소재가 사실 어느 정도 닳은 방식임을 간과할 수 없다. 귀신을 보는 눈이라던가, 귀신을 듣는 귀라던가, 이미 형태적으로 비슷한 동류의 영화들이 많았다. 돌파구는 효과적인 표현 양식이다. <에코>는 스토리텔링에 역점을 두고 효과를 치장하는 공포영화다. 동양적인, 좀 더 확실하게 일본호러의 정서가 문득 보인다. 한을 품은 혼령의 복수라는 게 일면 그렇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에코>는 사회적 교훈극에 가깝다. 결말에 걸리는 메시지는 명징하다. 무관심의 이기가 팽배한 현대인의 소통불가에 대한 의지가 뚜렷하다. 다만 장르적 목적이 희석된다는 게 문제다. 장르적 기능성을 그릇으로 삼는 건 좋지만 그 역할이 무색해져야 쓰나. 때때로 움찔하게 만들지만 그것도 썩 유쾌하진 않다. 기교에 능할 뿐 지배력이 약하다. 물론 심약한 이들을 기분 나쁘게 만들 정도는 된다. 하지만 좀 봤다는 이들에게 <에코>는 식상하기 짝이 없는 호러 영화로 분류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헤비메탈의 하위장르 중 하나인 데쓰메탈은 죽음과 악마 숭상의 뉘앙스를 연출하는 가사와 퍼포먼스라는 외부적 형태가 특성으로 정착된 장르다. 흉악한 가사와 극악한 무대 매너를 통해 광적인 팬덤을 형성한 세기말적인 장르는 그 폭력성을 방출하는 의식적 행위를 통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발생시킨다. 메탈 음악이 메인스트림을 석권한 핀란드나 동유럽의 국가 중 실질적으로 죽음을 추앙하는 데쓰메탈 그룹이 존재한다고 하나 실질적으로 뮤지션 대부분은 무대와 일상이 분리된 이중적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디트로이트 메탈시티>(이하, <DMC>)는 그런 현실성에 착안한 설정을 허구적 캐릭터와 스토리로 발전시킨 작품이다. 특히 장르적 구별 없이 음악산업의 인프라가 전방위적으로 구축된 일본의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일본에서 이를 소재로 둔 만화가 등장했다는 것도 딱히 놀랍지 않다.
스웨디쉬 팝(Swedish pop)과 같은, 자칭 스위트 팝 가수를 꿈꾸는 네기시 소이치(마츠야마 켄이치)는 청운의 꿈을 품고 상경한 도쿄에서 가수가 되기 위해 기획사를 찾아간다. 그러나 스위트 팝이 아닌 데쓰메탈 밴드 ‘디트로이트 메탈시티(DMC)’에서 극렬한 퍼포먼스를 펼치며 악명을 떨치는 ‘크라우저 2세’로 활동하며 신분을 속이며 살아간다. 지극히 소심하고 내성적인 네기시 소이치가 짙은 분장으로 제 얼굴을 감추고 무대에 올라 크라우저 2세로서 과감한 퍼포먼스를 펼쳐낸다는 설정은 욕망과 현실이 괴리된 캐릭터의 부조리를 유머로 치환한다. 특히 와카스키 키미노리의 동명 원작만화의 에피소드를 충실히 영화적 상황으로 반영한 <DMC>는 유치하듯 쾌활하고 황당하듯 기발하다. 물론 때때로 지나치게 진지한 척을 하며 간지러운 페이소스를 주입하는 광경이 발견되기도 하나 전반적으로 엉뚱하게 전개되는 상황의 위트가 독창적인 매력분포도를 이룬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마츠야마 켄이치다. <데스노트>영화판에서도 L을 연기했던 전력이 있는 마츠야마 켄이치는 <DMC>에서도 소심한 네기시 소이치와 과격한 크라우저 2세를 오가며 만화캐릭터 전문배우라 불려도 좋을 정도로 탁월하게 캐릭터를 소화했다. 만화적인 독창성을 훼손하지 않는 동시에 영화적 사실감을 만족시킨다. 자칫 잘못하면 코스프레 수준의 유치함으로 몰락하기 좋은 캐릭터를 영화적 형태로 구현한다. 결국 <DMC>의 특이성을 보장하는 캐릭터가 성공적인 표현력을 갖춘 덕분에 영화적 설정 역시 힘을 얻는다. 또한 영화는 원작의 주요한 에피소드를 영화화에 고스란히 활용하고 있으면서도 독자적인 서사의 변주를 통해 영화적 가능성을 그려나간다.
물론 <DMC>는 유치한 슬랩스틱 개그처럼 가볍고 산만한 웃음을 주는 영화다. 여기서 가볍고 산만한 웃음은 깊이에 대한 지적이라기 보단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수사다. 대단한 교훈에 도달하거나 걸출한 각본으로 승부하는 영화라기보단 재기발랄한 캐릭터와 황당한 소동극으로 무장한 개그콘서트나 다름없다. 원작과 달리 과하게 변주된 드라마가 종종 간지럽지만. 흉폭한 가사의 노래를 부르며 과격한 퍼포먼스를 구사하는 크라우저 2세와 순진하지만 소심한 우엉남 네기시 소이치 사이를 오가는 에피소드는 효과적인 웃음을 제공한다. 단편적인 에피소드로 나열되는 원작과 달리 서사적 형태의 드라마로 변주된 영화는 매니악한 소재를 보편적인 드라마로 엮어낸 원작만큼이나 즐겁다. 취향의 제한이 엄격하지 않다면 음악영화로서의 묘미도 만끽할 가능성이 크다.
최근 몇 년 사이 신예 감독과 중견 감독의 작품에 고루 출연하고 있다.
사실 자신의 나이를 기준으로 배우를 선택하는 감독은 없을 거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아니면 젊기 때문에 선택의 취향이 나뉘는 건 아닌 거 같고, 순전히 작품에 맞을 거 같은 배우를 선택하겠지. 어쨌든 내 입장에서 보자면 좋은 경험이 된다. 베테랑 감독님들과 작업해보고, 떠오르는 신인 감독님들과도 함께 해보면 배우로서 스스로 그에 맞게끔 처신하는 법을 알게 된다. 김유진 감독님은 배우로서 편한 분이다. 일단 아버지 같은 믿음을 줘서 안정적인 느낌이지. 반대로 신인 감독들은 일단 시나리오 단계부터 아이디어나 감성적인 부분이 톡톡 튄다. 아무래도 나보다 경험이 적은 만큼 내가 조언해줄 수 있는 부분도 있고. 양쪽에서 그런 면을 다 배울 수 있다는 게 내겐 플러스가 된다. 어느 한군데 치중하지 않고 폭넓게 대응할 수 있으니까. 나도 아직까진 배우는 단계인 만큼 그런 부분들을 다 흡수할 수 있다면 앞으로도 무형의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김씨표류기>는 기발하고 실험적인 스타일의 젊은 영화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어떻게 받아들였나?
독특하고 디테일하고 세심했다. 가만히 내용을 들여다보면 감독의 철학도 담겨있더라. 다만 그걸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무겁지 않게 다룬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그런 점이 너무 좋았다. 무거운 걸 무겁게 얘기하지 않고, 힘든 걸 힘들게 얘기하지 않고, 유머와 위트로 풀어나간다. 하지만 그냥 웃기려고 만든 작품이 아니라는 게 느껴진다. 예를 들면 ‘만화 삼국지’나 ‘만화 천자문’ 같은 느낌? 나이 있는 분들이 어린 애들에게 ‘삼국지’ 읽었냐고 물어보시잖아. 꼭 읽어야 된다 하고. 그렇지만 어린 애들한테 ‘삼국지’가 너무 길고 어렵다. 그런데 그걸 만화로 풀면 그림이 곁들여지니까 이해가 좀 더 쉽고 재미있게 볼 수 있지. 물론 글로 읽는 것보다 깊이는 얕아질 수 있겠지만 일단 표면적으로 접해보기라도 해야 그걸 생각해볼 수 있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잖아. 두 번 보면 전보다 재미는 떨어지겠지만 오히려 작가가 뭘 말하고 싶었는지 조금 더 분석할 수 있을 테고. 그렇게 의도를 표현하는 방식이 좋았다.
시나리오만으로 어느 정도 결정을 내린 건가?
물론 감독님은 만나보고 결정해야지. 한번도 못 봤으니까. 다만 이럴 땐 감독님이 양아치만 아니면 된다. (웃음) 그런 사람 있잖아. 글만 잘 쓰는 사람. 그럼 또 난감하거든. 어쨌든 감독님을 만나니 생각이 너무 괜찮더라. 이러면 좋지.
<천하장사 마돈나>는 보고 <김씨표류기>를 결정했겠지.
원래 시나리오를 읽고 감독님을 만나보기 전에 미리 봤어야 되는데 그 때 아마 <강철중>촬영이 끝날 즈음이라 영화는 못보고 감독님부터 만났다. 그리고 출연결정을 내린 다음에 영화를 봤는데 역시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 이전에 작품이 어떻고, 상도 많이 받았고, 그렇게 일단 들은 얘기가 있기도 했지만 일단 보내준 시나리오 자체만 봐도 그냥 영화를 안 보고 감독님을 만나도 될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지. 그런데 <마돈나>는 어차피 두 감독이 만들었으니까 사실 누가 만든 건지 잘 모르잖아. 이해영 감독이 만든 건지, 이해준 감독이 만든 건지. (웃음) 사실 난 두 분이 형제인 줄 알았어. 대부분 소문이 형제라고 하기도 하고, <마돈나>자체가 그런 영화니까 둘이 사귀는 거 아닌가라는 소문까지 돌던데. (웃음) 물론 만나기 전엔 진위를 판단하기는 힘들었다. 일단 만나보니 형제도 아니었고 애인도 아니고, 과 동기더라. (웃음) 여하튼 직접 만난 뒤에 <천하장사 마돈나>를 보고 나서 더 확신이 생기더라.
밤섬을 무대로 찍었는데 사실 모든 장면이 밤섬 같진 않더라. 사실은 되게 적은 분량만 밤섬에서 찍었다. 서울시에서 딱 8회 차만 허락해줬다. 우리나라 영화 중 처음이라고 하던데 <괴물>도 협조를 요청했지만 법 때문에 불가했더라. 이번에는 주로 밤섬에 대한 이야기니까 시나리오도 전하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8회 차 이상은 허락이 안됐고 나이트 신조차 허락이 안됐다. 그리고 그 8회 차도 막판에 간신히 허락된 거다. 처음에는 허락이 안 됐거든. 8회 차 빼고 나머지는 충청도 쪽에서 밤섬과 비슷한 곳을 찾아서 부분부분 찍은 뒤에 나머지는 다 CG로 처리했다. 내 분량의 70% 정도에 CG가 들어간다더라.
밤섬이라는 공간의 특이성이 영화의 독특한 양식을 이룬다. 사람이 많은 도심 한 복판에 그런 무인도가 있고 그 안에서 홀로 표류하는 남자라는 설정이 독특하지만 대도시 소시민의 비애가 투영된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정서적 동의가 이뤄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어떤 캐릭터 분석이나 사전준비가 필요 없었다. 내가 김씨가 될 수 있고, 길거리를 다니는 누군가가 김씨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사람이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누구나 한번쯤 그냥 힘들어서 못 살겠다, 짜증나서 못 살겠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잖아. 어쩌면 그런 심정에서 김씨도 죽으려고 했겠지. 그런데 사실 미끄러져서 떨어졌을 수도 있고, 차가 확 지나가는 바람에 놀라서 떨어졌을 수도 있고. (웃음) 사실 떨어지려는 데까지만 보여줬지, 떨어지는 건 안 보여주잖아. 어쨌든 우연히 살아난 김씨가 걸치고 있던 양복을 하나씩 벗어버리면서 그 섬에 적응하는 과정은 어쩌면 정재영이 스태프들 앞에서 옷을 하나씩 벗고 그 상황에 적응해가는 과정 그 자체였다.
스태프들 앞에서 혼자 벗고 있는 게 어색했을 거 같다.
<실미도>를 빼면 이렇게 빤스만 입고 카메라 앞에 서본 적도 없으니까. 그나마 <실미도>는 남자끼리 다같이 잠깐 벗고 항상 러닝셔츠라도 입고 있잖아. 그리고 <김씨표류기>에서 배우는 유일하게 나 혼자였다. 느낌이 달라. 처음에는 딱 찍을 때만 벗고 있었다. 웃통 까는 거 자체가 창피하더라고. 하루 이틀 그렇게 했는데 점점 김씨처럼 익숙해지니까 그냥 분장차에서 벗고 나와서 혼자 빤스만 입고 돌아다녔다. (웃음) 정재영도 완전히 김씨가 됐던 거지. 또 그래야 될 거 같았고. 그러니까 감독님도 좋아하더라. 속으로 ‘김씨가 됐구나.’ 그랬을 걸.
무인도에 표류하는 인물이다 보니 독백에 가까운 대사가 많고, 내레이션 분량도 상당하다. 사실 내레이션이라는 게 간단하게 읽어 내려가면 끝나는 작업 같지만 배우에겐 상당히 고민스러운 부분이 된다.
대본 상에서 읽을 땐 재미있고 와 닿는 감정이 좋았는데 막상 ADR(Automatic Dialog Replacement, 후시녹음)을 할 때 내레이션을 하니까 뭔가 자꾸 잘 맞지 않고 어색하더라. 이게 지금 내가 나한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제3자가 나한테 하는 말인지, 아니면 관객들이 나한테 하는 말인지, 말 그대로 그냥 내레이션인지, 그 톤을 잡기가 되게 힘들었다. 그래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이게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저게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너무 무겁고, 그래서 굉장히 힘들었다. 이걸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알듯 말듯 하다가도 다 붙여놓고 보면 때론 감정이 너무 많이 개입된 거 같고, 어떨 때는 너무 많이 개입되지 않은 거 같고. 결국 어떻게 어떻게 하다 보니까 최종적으로 이렇게 됐다. 처음엔 쉽게 생각했는데 촬영할 때보다 더 까다로웠다.
김씨가 밤섬에 갇힌다는 설정은 나름 기발하다지만 반대로 비상식적인 상황이라 납득의 과정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건 그 섬에서 빠져 나오지 않겠다는 김씨의 결심이지만 그 결심 이전에 섬에서 고립되는 상황을 설득시키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사실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예를 들어서 물에 막 들어가면서 ‘할 수 있다’고 혼자 중얼거리거나 얕은 데서 막 뛰어들고, 그런 모습이 사실 조금 과잉된 감정이거든. 무슨 죠스라도 나올 것처럼 공포감을 갖는다는 게 어쩌면 일반적인 감정이 아닐 수 있지만 그렇게 조금 과잉으로 해야 될 것 같았다. 김씨가 물에 대한 큰 공포감을 갖고 있다는 걸 보여주면 그 다음부터 물에 얼씬도 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테니까. 사실 뗏목을 만들어서 나간다거나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 같다고 느끼기 전에 일단 캐릭터가 물을 통해 원천 봉쇄되는 느낌을 줘야 했다. 그러려면 조금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김씨가 물에 경기를 일으킨다고 느낄 정도의 한방으로 조율해줘야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어진다. 초반에 그 부분을 넘고 나면 이제 김씨가 자연스럽게 이 섬에 있게 되는 거니까, 그 다음부턴 자기가 스스로 나가지 않으려 하니까 문제가 안 되잖아. 그래서 초반이 사실 문제였다. 비현실적인 느낌을 벗어나면서도 어떻게 확실히 설득시킬 수 있을까. 그게 해결되지 않으면 계속 몰입을 못할지도 모르는 문제고.
현실적인 리얼리티보단 상황을 납득시킨다는 게 중요했던 것 같다.
그렇지. 잘못 하면 관객들도 계속 의문에 쌓일 수 밖에 없으니까. ‘왜 안 나가? 나갈 수 있는데.’ 이래 버리면 틀린 거다. 그래서 그 부분을 신경 많이 썼다.
이해준 감독이 무대인사에서 <김씨표류기>를 보고 자장면을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던 만큼 이 영화에서 ‘자장면’은 의미심장한 소품이다. 물론 여기서 ‘자장면’을 먹는다는 건 단순한 식욕의 문제가 아니다.
이해준 감독이 단순하게 얘기했지만 영화가 자장면을 너무 맛있게 보여줘서 자장면이 먹고 싶어지는 건 아닐 거다. 자장면 광고를 보고 자장면을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른 문제지. 결국 자장면을 왜 먹고 싶은가라는 거다. 자장면을 먹고 싶게 만들려고 ‘농심’에서 몇 십억 수표 받고 협약 맺어서 두 시간짜리 광고를 찍은 것도 아니잖아. (웃음) 옛날에는 자장면을 귀해서 못 먹었다. 그러니 무조건 자장면을 먹어야지. 졸업식 때나 무슨 특별한 날이면 무조건 자장면이다. 하지만 요즘 우리에게 자장면은 아무데서나 먹을 수 있는 흔해빠진 음식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자장면이나 먹어볼까, 라고 하는 시대가 됐잖아. 그렇게 자장면의 위치가 변하는 동안 우리가 뭔가를 잊고 살지 않았는지를 생각할 수 있다.
코믹한 상황이 여럿 등장하는데 그게 단순히 기능적인 코미디가 아니더라.
사실 표류 아닌 표류를 하는 김씨의 설정이 황당해서 웃기기도 하겠지만 적어도 보통 사람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걸 보면 그냥 웃자고 만든 거라 느끼진 않겠지. 초심이라던가, 잊고 살았던 작은 것들을 다시 생각해볼 계기도 될 수 있고. 지금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면서 나도 한번 자장면을 먹어볼까 생각하기도 하고. 그런데 그냥 단순히 자장면을 먹고 싶다는 결과만 생각하다 보면 사실 본질이 없어지지. 김씨가 자장면 먹는 걸 보고, “‘농심’하고 뭔가 커넥션이 있구만.”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이제 약간 본질을 흐린 거지. (웃음)
사실 상대의 연기에 능청스럽게 반응하는 리액션이 당신의 장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김씨표류기>는 리액션을 받아줄 상대가 없는 영화다. 마치 일인극의 모노드라마 같은 느낌일 수도 있는데 그 가운데 코믹한 감정을 이끌어내야 하니 다른 방향의 리액션을 모색했을 것 같다. <김씨표류기>는 기존의 <아는 여자>나 <바르게 살자>처럼 코미디를 위한 코미디를 해서는 안 됐다. 그냥 캐릭터 자체가 쌓여서 나오는 코미디, 캐릭터 자체가 어떤 상황에 처해져서 보이는 코미디가 되니까 그냥 코미디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그냥 최대한 절실하게 보이는 상황과 내가 주고 받는 액션과 리액션을 통한 코미디였다. 그러니까 적절한 상황과 맞물린 절실함에 공감하면 관객들이 재미있게 볼 것이고, 절실함이 아니라 과잉이라고 생각하면 처음엔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재미있을 수 있지만 결국 계속 보다 보면 지루해지지. 그래서 김씨의 코미디는 처음엔 덜 웃겨도 그 상황을 지속적으로 밀고 갔을 때 캐릭터의 감정이 쌓이면서 점점 재미있어지는 코미디랄까? 어쩌면 코미디라기 보단 그냥 그 상황에서 해야 될 의무였던 거 같다.
‘자장면이 희망이다’라는 말까지 등장하고. 여자 김씨가 배달시켜 준 자장면을 남자 김씨가 돌려보내는 건 결국 자장면을 먹는 것보다도 자장면을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떤 결과보다도 과정 자체가 인간에게 의미가 된다는 것이 감동을 부르는 측면이 있다. 종종 배우라면 선택의 기로에 설 때가 있지 않을까 싶다. 연기적 성취의 의미가 발견될만한 실험적 작품과 소모적인 연기를 요구하지만 결과적인 흥행성이 보장되는 작품 사이에서 갈등하는 경우는 없었나.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항상 선택의 기로에 있는 거 같다. 사실 지금 세상이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한다. ‘어떻게 만드느냐’보단 ‘뭘 만드느냐’가 중시되는 세상이다. 내 입장에서는 7:3정도. 작품이 먼저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이 완전한 10은 아니다. 흥행적인 부담이 전혀 없다면 그것도 완전히 무책임한 거지. 일단 좋은 과정이 있으면 당연히 좋은 결과가 있어야 인지상정인데, 그렇지 못하면 사실 속상하잖아. 하지만 과정이 후지고 목적도 후진데 결과만 좋으면 그게 더 실망스럽다. 그럼 앞으로는 저렇게 만들어야 되나. 나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냥 흥행만 바라보고 해야 될까. 이렇게 막 해도 되는구나, 싶어지니까.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면 결과가 좋지 않아도 최선을 다했다는 위안이 생긴다. 결과보다 과정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순수한 열정이 남는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잔머리 대충 굴려서 영화 하나 뚝딱뚝딱 만들어놓고 이렇게 하면 영화가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한다.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듯 대충 얼마 정도 들여서 어떻게 기획하면 된다고. 요즘 세상에선 그게 더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속상하고 안타깝지. 흥행배우라는 말도 좋지만 그보단 연기를 잘하는 배우, 진심이 있는 배우, 이런 칭찬에 비해 가치가 떨어진다. 개인적으로 <김씨표류기>를 선택해서 일단 내 한은 다 풀었다. 과정이 너무 좋았으니까.
편수가 늘어가고 입지가 구축될수록 작품을 선택함에 있어서 그런 갈등이 치열해질 것 같다. 아무래도 개인의 욕심만을 생각할 입장도 아니고, 부양할 가족이 있다는 것도 고민의 한 축이 되는 게 아닐까 싶고.
항상 그런 갈등이 있을 때마다 내가 연기를 왜 시작했는지, 왜 연극을 좋아하게 됐는지, 이런 생각을 통해 조금씩 해결해보려 한다. 내가 돈 때문에 연기를 시작한 건 아니다. 돈 못 버는 거 뻔히 알고 시작했으니까. 일단 좋은 연기자가 되기 위해서, 또 좋은 작품을 하기 위해서 시작했으니까, 대단한 건 못해도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싶다. 적어도 자장면을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는. (웃음) 그런 마음을 매 작품 매 순간마다 다시 되새김질하려고 한다. 망각의 동물이라서 자꾸 까먹거든. 어느 순간부터 옛날의 소박한 욕심은 어디 가고, 점점 더 큰 욕심들이 자리잡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잔머리 굴리는 것보다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배우로서 훨씬 더 오래갈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는다. 분명히 그게 정답이다.
‘욕망은 사람을 똑똑하게 만든다’라는 대사처럼 어쩌면 욕망이 배우도 똑똑하게 만드는 것일지 모른다. 배우로서 내외적으로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이 다스려야 할 욕망이 커지는 만큼 그 욕망을 컨트롤할 수 있는 역량도 함께 생길 수 있는 게 아닐까. 먹여 살려야 할 가족들이 있는데 당장 내일이라도 돈 한푼 없는 입장이 되면 작품이고 나발이고, 연기고 나발이고 어디 있어. 그때는 또 생활로 가는 거다. (웃음) 단지 그렇게 타협했다고 해서 이렇게 막 쭉쭉 가보자, 이런 건 아니니까. 어느 정도 최소한의 방편이 되면 그 다음에 또 하고 싶은 걸 해보는 거지. 다만 일단 살아야 뭘 하지. 살지도 못하면서 무슨 작품이 어떻고, 좋은 배우고, 그런 건 없다. 일단 김씨처럼 사는 게 제일 중요해. 산 다음에 자장면이지. 지금 죽을 거 같은데 무슨 자장면이야. 처음에 버섯만 먹다가 그 다음에 생선을 먹게 되니 얼마나 좋아. 그런데 어느 새 새도 먹게 되고, 그러다 보면 물고기 먹을 때를 잊어버린다. 어류보다 조류가 맛있으니까 점점 까먹게 된다. (웃음) 그리고 자장면을 발견한 뒤로 옆에 새가 있어도 자장면에 꽂혀있는 거지. 그리고 (여자 김씨가) 여자라는 걸 알았잖아. 자장면을 먹고 나니까 이젠 여자가 보고 싶은 거지. 남자라면 ‘Who are you?’같은 거 했을까? (웃음) 뭘 보고 싶겠어. 그런데 여자라니까 갑자기 너무 보고 싶은 거다. 이게 인간의 욕망이 진화하는 과정 아닐까. 뭔가 하나가 실현돼야 그 다음에 또 얻고 싶은 게 생기고. 그러다가 그런 욕망들이 한 순간에 다 무너지니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원래대로 한강에서 뛰어내리려 했을 때가 생각나지. 그런데 여자 김씨가 뛰어와서 손 한번 잡으니까 희망이 생기고. 어떤 위기가 닥치거나 고민이 생기면 속상하고 그렇지만 결국 이 삶이 반복되는 거 같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너무 속상해할 필요도 없을 거 같고. 그런 교훈은 선배들의 행보를 통해 배우기도 하지만 후배들에게 배울 때도 있고. 책에서 읽기도 하고, 나름대로 혼자 생각도 해보고, 여러 방면에서 종합적으로 한해 한해 계속 축적되는 거지.
남자 김씨의 이름은 초반에 단 한번 민증을 통해서 드러나지만 영화 내내 이름 없는 사람처럼 불리지 않는 존재로서 나타난다. 한때 당신에게도 지독한 무명배우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누구나 아는 주연급 배우로 이름이 불리고 있다.
사실 지금도 영화를 관심 있게 보는 몇몇 젊은 관객을 제외한 일반 대중들은 나를 그냥 배역으로 얘기하는 경우가 많을 거다. 물론 관계자 분들은 알겠지. 이름이라는 건 항상 표면으로 드러나거나 불려져야 알게 되는데 내 이름은 크레딧에서나 보이고 홍보할 때나 잠깐씩 집중적으로 보일 뿐인데 일반 대중들이 그런 걸 눈 여겨 보진 않거든. 노출이 별로 안되니까 배역으로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은 거 같다. 어디 나왔던 누구, 뭐 이런 식? 그게 속상하지도 않고 개인적으로 이름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겠다는 생각을 여전히 하지 않는다. 그냥 저절로 작품이 쌓이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내 이름을 알아가게 될 거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진 내가 신선하다고 느낄 수 있으니까.
혹시 스스로 배우는 이래야 한다라는 어떤 기준을 갖고 있는 건 아닌가?
이게 옳은 길이다, 이게 배우의 길이다, 이런 건 절대 아니다. 모로 가도 다 서울만 가면 돼. 일단 이름을 알리고 배역으로 가도 되고, 그냥 나처럼 소극적인 사람은 이렇게 쭉 가는 거고, 심지어 스포츠 스타가 배우가 될 수도 있는 거다. 단지 나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후배들이 나를 보면서 저렇게 가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면 정말 끝까지 해먹을 수 있겠구나, 그럴 수 있잖아. (웃음) 무슨 특별한 철학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냥 옷을 입는 취향이나, 차를 타는 취향 같은 거다. 그만큼 다 장단점이 있겠지. 이런 내 모습을 특별한 매력으로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반대로 배우로서 겉멋이 들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단지 나는 그냥 이런 게 편할 뿐이다.
하지만 이젠 적어도 정재영이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 같은데. 이제 한 해마다 한 편 이상씩 영화에 출연해오고 있는 만큼 날 몰랐던 분들도 익숙해지는 거겠지. <실미도>때 날 봤던 분이 만약 <김씨표류기>를 보면, “저 사람 <실미도>에 나왔던 사람 아니야?” 이럴 수도 있고. 다만 내가 나온 작품을 다 볼 순 없잖아. 그건 진짜 영화광이고. (웃음) 앞으로도 계속 영화에 불러줘서 연기할 수 있다면 언젠가 ‘저 사람 진짜 오래하네’, 이런 생각을 하는 분도 생길 거고. 심지어 ‘이젠 그만 나왔으면 좋겠다’, 하면서 질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생기겠지.
배우 이름보다 캐릭터 이름으로 기억되는데 익숙한 것 같다.
사실 그게 배우에겐 제일 행복한 거지.
<아는 여자>나 <거룩한 계보>의 ‘동치성’이란 캐릭터처럼 정재영을 통해서만 떠오르는 캐릭터도 있다.
그것도 이제 몇 번 했으니까. 그 영화를 다 보신 분들은 그게 특이해서 기억하겠지만 그 중에서 한 편만 본 사람들은 또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 일종의 매니아를 위한 이름 짓기랄까.
현재 영화배우들 가운데 무대 출신 배우도 많고 그들 대부분이 중심 배우군을 이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전에 류승룡 씨를 만났을 때 정재영, 황정민과 같이 친한 동기들이 연기자로서 활발히 활동한다는 것이 기쁘다고 하더라. 아무래도 함께 무대에서 활동했던 전력이 있는 만큼 전우애가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무대를 자신의 연기적 뿌리로 두고 있다는 것이 연기자로서 어떤 자산을 남겼다고 생각하나?
지금은 이제 연기적 영역에 있어서 연극과 영화, 방송 사이에 경계가 없어진 것 같다. 80년대처럼 연극연기, 영화연기, 방송연기가 다르지 않고, 이젠 일단 리얼리티가 관건이기 때문에 연극으로 활동했던 배우들의 가능성이 커진 거 같다. 연극에서 잘했던 배우라면 방송이나 영화에 와서 하루 이틀 정도나 헤맬 수 있겠지만 대부분 잘한다. 옛날엔 메커니즘이 많이 달랐는데 이젠 거의 다 똑같아서 새롭게 적응할 필요가 없고. 단순하게 연극에서 출발한 배우가 많을수록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배우층이 두꺼워진다는 건 아주 고무적인 일이다. 그래야 고생하는 후배들도 나 같은 얼굴로도 해나가는 사람을 보고 희망을 갖지. (웃음) 어떻게 보면 시대가 변한 덕이다. 옛날에는 잘 생기면 방송으로 가고 못 생기면 연극으로 갔다. 사실 그런 거야. (웃음) 일단 연기력을 떠나서 얼굴로 밀어붙일 수 있어야 탤런트 시험이라도 보고, 그게 안 되는데 연기를 하고 싶다면 연극으로 가야지.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잘 생겨도 연극을 하고 못 생겨도 방송을 하고, 얼굴에 대한 경계가 점점 더 없어졌잖아. 옛날엔 정말 잘 생겨야 했지만 이젠 리얼리티가 중요한 시대라서 평범한 사람이 주인공을 해도 되니까 나 같은 배우는 편해졌지.
김씨가 자살을 결심해 한강에 뛰어드는 것이 육체적 자살이라면 밤섬에서 표류를 결심하는 건 사회적 자살에 가깝다. 결국 후자 역시 삶에 대한 포기지만 결국 그게 희망으로 연결된다. 어쩌면 배우로서 살아오면서 자신의 삶이 밑바닥까지 떨어지듯 자포자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을 것 같다. 그걸 희망으로 역전시킨 계기도 있었을 것 같고. 20대 초중반 시절엔 그냥 내가 이렇게 무조건 열심히 하면 잘 되겠지, 무조건 잘만 하면 잘 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후반쯤 되니까 조급증이 오더라. 계속 상황에 발전이 없으니까 불안이 생기는데 그걸 나 혼자 계속 짊어지긴 싫잖아. 그러니까 남 탓을 하는 거야. 야, 이거 이러다가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거 아냐? 난 정말 가망이 없나? 난 왜 이렇게 운이 없지? 세상 사람들이 왜 날 알아주지 않는지, 내가 왜 누구보다 떨어지는 건지, 나는 괜찮은데 왜 그러는 건지, 결국 다 운이 없다는 탓으로 돌리게 되는 거야.
그 때가 일종의 고비였을 것 같다. 어떤 극복 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어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다. “운이라는 건 네가 잡으려고 하는 게 절대 아니다. 네가 모르고 지나갔다가 돌이켜봤을 때 알고 보니 그게 운이었던 거지.” 그 순간에는 운인지,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 생각해보니까 역시 운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까지 내 실력이 모자랐던 거다. 내 탓인가 보다, 이렇게 마음을 싹 바꿔버리니까 고민이 덜어지더라. 그렇다고 다시 자신만만하게 그냥 열심히 하고 잘 하면 되겠지, 이런 건 아니었다. 원초적으로 돌아갔지. 내 실력을 더 키워야겠다, 더 공부해야겠다. 이렇게 방향을 잡으니까 극복이 되더라. 돌이켜보면 운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 한두 신 자리 촬영하던, 힘들게 연극했던, 아무것도 모르고 까불었던 그 시절들이 쌓여서 지금 영화를 하는 정재영이 된 거지. 어느 한 순간 때문에, 어느 한 방을 통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니다. 그런 과정이 쌓여왔기 때문에 현재의 내가 있는 거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런 것들이 다 운이었다. 거기에 운이 있었더라.
하지만 종종 진짜 한방으로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젊은 배우 가운데 단 몇 편으로 스타덤에 오르는 친구들도 있다.
어느 한 작품 때문에 대박이 났다고 말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소위 말하자면 이준기 씨 같은 경우, <왕의 남자>한편으로 대박이 났으니까 사람들은 그게 운이라고 생각하지. 그런데 거기서 만약 못했다고 생각해 봐. 사실 <왕의 남자>를 찍을 땐 몰랐을 거야. 얘기 들어보니까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발탁됐고 뭔가 절실했던 만큼 최선을 다해서 촬영했고 결국 작품이 잘 나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모든 과정이 운이 된 거지. 길거리 가다 캐스팅 됐다고 다 배우 되는 건 아니잖아. 어떻게 보면 잘됐다는 거 하나는 운일지 모르겠지만 나머지는 다 실력인 거지.
최근에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무대에 서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연극열전2’같은 경우도 그래서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고. 무대에 설 계획은 없나? 영화나 방송을 통해 인지도가 늘어난 만큼 그 인지도가 연극의 인지도에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지금으로서 정확한 계획은 없다. 연극과 영화, 방송에 활동의 구분을 두진 않는다. 다만 연극이나 방송 섭외는 영화보단 훨씬 적고, 들어온 작품이 괜찮아도 스케줄이나 시기가 맞지 않을 때가 많다. 의도적으로 연극을 무조건 한 편 해야지, 이런 생각은 안 한다. 예를 들어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던가, 아니면 도와주기 위해서라는 의도적인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렇게 동정한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할 수 있거든. 연극은 그런 게 아니고 똑같다고 생각하니까. 잠시 나갔다가 돌아오는 곳이 아니고 영화와 나란히 공존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든지 할 기회가 되면 하는 거지, 일부로 의도적으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어서 되는 건 아니다.
마지막으로 무대에 섰던 작품이, ‘연극열전’ 첫 번째 당시 공연했던 <택시 드리벌>이었다. 그게 마지막이니까 무대에 선지도 벌써 5년 가까이 됐다. 그런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연극판을 특별히 도와주겠다는 의도로 무슨 선물을 준다는 건 아무래도 아니지. 내가 연극할 때도 그랬지만 연극을 계속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누군가 잘됐으니까 돌아와서 도와준다는 느낌을 주면 개인적으론 차라리 오지 말라고 하고 싶어진다. 그런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 지금 영화 하는 것처럼 연극을 할 때가 올 거라고 생각한다.
매년마다 출연작이 한 편 이상은 된다. 그런데 작품마다 기복이 느껴지지 않는다. 연기적인 비난을 얻었던 적도 없었고, 출연작마다 어느 정도 이상의 흥행성적도 거뒀다고 할만하다. 사실 낙관적인 이미지 때문에 그런 결과들이 자연스럽게 얻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좀 더 치열하게 사는 사람 같다. 그게 꾸준한 활동의 의무를 부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 내가 영화 아니면 할 것도 없고, 써주는 데도 없으니까. 유일하게 가족을 제외한 내 모든 것을 걸고 달려들 수 있는 건 영화 밖에 없다. 그러니까 일단 뭔가 해야 되는 입장이란 말이지. 예를 들어서 몇 년 사이 공백이 생기면 안 된다. 적어도 일년에 한 작품은 꼭 해야 한다. 그러려면 나한테 들어오는 시나리오 가운데서 일단 선택해야 된다. <김씨표류기>처럼 보자마자 ‘아, 이건 꼭 해야겠다’싶은 작품만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뭔가 필연적인 선택을 해야 되는 순간도 생긴다. 그럴 땐 최소한 내가 이 작품을 했을 때, 전작 가운데 제일 잘했다는 평가를 듣진 못해도 제일 못했다는 평가는 받지 않아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생긴다. 배우가 매번 최고의 작품을 할 순 없다. 그런 작품이 맨날 나한테만 들어오나. 절대 아니지. 내가 그럴 만큼 최고의 배우도 아니고. 내가 처한 위치에서 나한테 들어온 작품 가운데 나름대로 최대한 욕먹지 않을만한 작품을 하고 있지만 그것도 사실 내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건 아니다. 운도 따라줘야 되고, 여건도 맞아야지. 그럼에도 난 해야 되는 거고.
‘진화는 맛있어지는 과정이 아닐까’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배우에게 있어서 진화는 현명해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지켜야 할 것이 많아지고 성취적 욕망이 깊어질수록 현명해지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일단 나도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알고 싶다. 매 순간마다 너무 궁금하지. 친한 강호 형은 물어봐도 자기만 오래 하려고 안 알려줘. (웃음) 사실 캐릭터를 어떻게 잡아야 된다는 방법은 없거든. 그런데 나도 궁금한 거야. 좀 쉽게 잡고 싶으니까. 배우로서 어떻게 작품을 선택하고, 어떻게 연기를 하고, 연기 외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만나야 되고, 인터뷰는 어떻게 해야 되고, 어느 정도까지 솔직해야 되고, 이렇게 해야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잖아. 과연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해야 될까 생각하지. 연예오락프로 같은 데는 원체 나가질 않으니까 주변에서 요즘은 나가야 된다고, 그게 대세라고 하는데 이럴 땐 나가야 되는지, 안 나가야 되는지 모르겠다.
최소한의 자기 기준이 중요할 거 같다. 배우로서 최소한 지켜야 할 소신 정도는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외적인 게 본질을 해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외적인 게 본질을 해치는 순간 그땐 잘 모르지만 자기도 모르게 점점 더 본질을 갉아먹게 된다. 흥행이 잘되건, 연기를 잘하건, 일단 어딜 나가건, 안 나가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연기자의 본질을 얼마만큼 끝까지 지키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자기가 생각하는 본질을 자신이 죽을 때까지, 아니면 연기를 그만 둘 때까지, 그렇게 끝까지 지킬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가장 현명한 배우가 아닐까. 물론 정답은 없다.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는 본인이 각자 선택하는 거다. 단지 자기가 선택한 그 길에서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끝까지 지키고 가느냐가 문제겠지. 그 안에서 본질이 흐려지지 않는 수준에서 조금씩 타협해가기도 하면서 죽을 때까지 연기에 대해서, 작품에 대해서 고민해야지. 어느 순간부터 내게 익숙해졌기 때문에 이건 이제 쉬워, 내지는 이렇게 하면 된다, 라는 식으로 매너리즘에 빠지면 안 된다. 아는 척하고, 잘난 척하는 순간에 본질은 흐려지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해가는 거지.
과학기술의 진화 속도는 나날이 빨라진다. 그와 함께 과거엔 공상과학의 소재가 되던 이미지들이 현재에선 일상적 산물이 된다. 테크놀로지의 변화와 함께 자연스레 인터페이스도 변한다. 이미지의 변화는 중요하다. 화상전화나 터치스크린 따위가 더 이상 생소한 허구가 아니라는 건 구시대에서 SF적 이미지로 활용되던 산물들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반증이다. 단지 인간을 위협하는 로봇의 등장만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킬 시대는 지났다. LA도심에 뒤엉켜 나뒹구는 변신 로봇의 시대에서 터미네이터의 존재는 희미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아직 못다한 이야기가 남았다는 사실이다. 우려먹든, 개조하든, 프랜차이즈의 수명이 유효하다고 판단될 때 한번이라도 시도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젠 주지사로 활동 중인 아놀드 슈왈츠네거의 왕림이란 점에서 기대를 모았으나 실질적으로 시리즈의 커다란 구멍이란 오명을 남긴 <터미네이터3: 라이즈 오브 더 머신>(이하, <터미네이터3>)이후로 시리즈 자체가 무색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시리즈는 다시 한번 전진을 선언한다.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 Terminator salvation>(이하, <터미네이터4>)은 본래 원제에 포함된 ‘salvation’이라는 단어처럼 시리즈의 구원을 명령 받은 새로운 적자다. 미래의 예언적 영웅을 보존하기 위한 현재의 사투를 그려 온 지난 세 편의 시리즈는 비로소 시간을 지나 그 미래에 도달했다. 사실상 어떤 설정을 만들어내기 위한 껍데기 구실을 하던 본질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낼 기회를 맞이했다는 이야기다. 결코 버릴 수 없는 아이템이다.
<터미네이터3>가 역대 작품 중 가장 형편없는 만듦새를 지니고 있음에도 그 역할을 간과할 수 없는 건 바로 그 위치에 있다. 말로만 듣던 ‘심판의 날(judgement day)’을 실시간의 상태에서 묘사하고 있다는 건 시리즈의 미래를 여는 교두보 역할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터미네이터4>는 그 이미지를 밟고 선다. 2018년, 심판의 날을 지휘하던 슈퍼컴퓨터 스카이넷이 만들어낸 인간들의 지옥 속에서 기계와 인간의 전쟁이 실시간으로 묘사된다. 더 이상 과거의 존 코너를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 전쟁을 이끄는 진짜 영웅 존 코너를 볼 수 있다. 물론 <터미네이터>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었던 아놀드 주지사 님의 순간이동 누드신을 추억으로 떠밀려 보내야겠지만.
서사의 완성 방향은 반대지만 <터미네이터4>는 흡사 <스타워즈>와 비슷한 노선을 걷는 시리즈라 할만하다. 하나의 트릴로지를 완성한 이후로 서사적 공백을 채우는 트릴로지를 계획한다. 다만 트릴로지의 시간적 격차가 크다는 점에서 트릴로지 사이의 영상적 괴리감이 발생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면 이득을 보는 쪽은 <스타워즈>보다 <터미네이터>쪽이다. <스타워즈>가 프리퀄 형식의 서사를 뒤늦게 기획한 탓에 오히려 과거보다 영상기술적 성과가 낮은 미래의 이미지를 보유하게 된 것과 달리 <터미네이터>는 순차적인 서사의 흐름에 놓여있는 덕분에 이미지의 진화 방향에 따른 거부감에서 보다 자유롭다. 게다가 추격의 형태로서 액션장면을 연출하던 전자들과 달리 새로운 시리즈는 거대한 전투씬과 전쟁의 이미지를 그려 넣는다는 점에서 블록버스터로서의 너비가 과거에 비해 광활하다. 과거엔 묘사할 수 없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게 가능해졌다. 시리즈의 탄생 배경은 이런 기술 제반 조건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이미지는 압도적이다. <트랜스포머>가 변신로봇 풀세트를 완비하며 로봇영화의 정점을 찍었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아동 취향의 꿈을 대리 만족시키는 완구로봇의 실사적 성취감에 가까운 성과다. <터미네이터>의 로봇들은 이미지만으로도 인간에게 위협적인 디자인을 갖춘 살상병기란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보존한다. <터미네이터>는 단순한 액션블록버스터에 불과하지 않은, <에이리언>만큼이나 불길한 서스펜스를 발생시키는 스릴러적 취향의 SF영화다. 과거 아놀드 주지사님이 열연하던 시절, 반토막난 T-800 로봇에 추격당하던 사라 코너의 포복 장면이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야기한 건 제임스 카메론의 연출력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금속로봇의 날카로운 손이 주는 위협적 디자인도 중요한 원인이라 할만하다. 이번 시리즈에서도 유사한 기시감이 발생한다. 존 코너(크리스찬 베일)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서는 ‘T-800’의 등장신은 앞선 전례만큼이나 위협적이다.
<터미네이터4>에서 두드러지는 건 새로운 로봇들의 등장이다. 비행기 로봇인 ‘헌터킬러’, 바이크 형태의 로봇 ‘모터 터미네이터’, 물뱀형태의 수중로봇인 ‘하이드로봇’을 비롯해 거대한 ‘하베스터’까지, T시리즈의 인간모델로봇이 아닌 기계적 로봇들이 대거 등장하며 제각각의 쓰임새에 걸맞은 액션을 연출하고 긴장감을 발생시키며 이미지의 가능성을 확대시킨다. 게다가 분리와 합체의 기능마저 전시하는 모습은 마치 <트랜스포머>의 성과가 남긴 유물처럼 인식될 정도다. 무엇보다도 과거 첫 번째 시리즈에서 사라 코너를 구하기 위해 미래에서 날아온 카일 리스의 꿈을 통해 짧게 보여지던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의 이미지가 온전히 펼쳐진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올드팬과 새로운 팬층 모두에게 흥미를 부를만한 지점이다. 육중한 전투씬과 거대한 폭파 장면, 그리고 스피디한 카체이싱과 공중전까지, <터미네이터4>는 전쟁 영화나 재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파괴적인 이미지를 과감하게 전시한다. 물론 단순히 스크린이 스펙타클을 담보로 한 전시관 역할로 기능성이 제한되는 건 아니다. 뛰어난 건 단지 영상을 만들어내는 기술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영상을 구현하는 연출력에 놓여 있다. 특히 일반적인 핸드헬드를 선택하지 않고 고정된 샷 안에서 존 코너의 상하가 역전되는 구도를 묘사하는 헬기추락신의 앵글은 이 영화의 탁월한 장면 연출력을 대변하는 이미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액션 장면들은 훌륭한 연출과 구성을 통해 하나같이 빛을 발한다.
물론 <터미네이터4>에서 중요한 건 액션만큼이나 스토리다. <터미네이터4>는 ‘T-600’이 T-800’으로 진화하는 2018년을 배경으로 둔다. 기존의 시리즈에서 등장했던 ‘T-1000’ 그리고 ‘T-X’와 같은 첨단로봇의 진화는 좀 더 뒤의 일이다. 이는 곧 <터미네이터4>가 어떤 시작점에 있는 이야기이며 시리즈의 가능성을 새롭게 재단해도 좋은 위치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시리즈는 자신의 지난 발자취를 배려해야 한다. 저항군을 이끄는 존 코너와 마찬가지로 존 코너의 존재를 완성하는 카일 리스(안톤 옐친)의 존재는 시리즈의 숙명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마커스 라이트(샘 워싱턴)의 등장은 <터미네이터4>의 선택이다. 존 코너만큼이나 <터미네이터4>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마커스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존엄성이 어디서 발생하는가라는 물음에 도달하기 위한 말과 같다. 동시에 마커스는 과거 <터미네이터>가 지속시켰던 규칙적인 관계를 지속시키는 중요한 캐릭터다. 표적이 되는 인간과 표적을 쫓는 로봇, 그리고 표적을 지키는 로봇이라는 삼각 구도의 유지는 새로운 시리즈를 통해서도 가능해진다. 또한 마커스는 인간보단 로봇에 가까웠던 기존의 인간형 로봇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인간적인 고뇌가 뒤섞인 표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다 매력적인 캐릭터다. 다만 <터미네이터4>의 야심이 관건이다.
<터미네이터4>는 분명 서사의 활용도에 있어서 운명론을 배제할 수 없는 영화다. 과거와 미래의 중간단계에 착륙한 <터미네이터4>에게 선택의 여지란 많지 않다. 다만 어느 정도로 과감해질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마커스는 그 돌파구를 위한 일종의 열쇠다. 개봉 전 세간에 유출됐던 파격적 결말도 그런 가능성에서 출발한 하나의 결과적 형태였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영화는 안정을 추구한다. 새로운 캐릭터를 통해 기존의 인과율을 흔들만한 시도를 감행하느니 적절한 선에서 파격을 선사한 뒤 암묵적 룰을 따른다. 이는 기존 시리즈의 규칙을 위반하지 않는 방식이다. 구원자의 위치에 선 로봇의 퇴장은 시리즈마다 반복된 형태이므로 <터미네이터4>가 선택한 방식 또한 규칙을 준수한 시리즈라 할만하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터미네이터4>를 어떤 가능성 안에 가두는 태도처럼 보인다.
결국 <터미네이터4>는 마커스의 활용을 일회적인 수위에서 멈춤으로써 자신의 운명론을 공고히 다지지만 반대로 그 운명론에 철저하게 갇혀버렸다고 말해도 상관없는 형태로 완성됐다. 이대로라면 결국 카일은 언젠가 과거로 보내질 운명이고, 존 코너는 미래에서 끝없이 진화하는 기계와 맞서야 한다. 정해진 운명론에 속박된 서사의 흐름이 경직될 수 밖에 없다. 물론 기존에 완성된 이야기 구도를 존중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마치 예언을 증명하기 보단 현실을 예언에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다. 덕분에 시리즈 자체의 가능성이 얕아진 인상이다. 게다가 개별적인 작품 자체로서의 스토리도 조금씩 빈틈을 드러낸다. 인과관계를 배려하는 디테일이 부족하다. 심지어 중요한 설정을 설득할만한 배경 자체가 누락된 경우도 적잖게 눈에 띈다. 스토리텔링 자체가 완벽한 수준은 아니다. 지난 시리즈를 숙지하지 못한 새로운 젊은 관객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맥락이 존재한다는 건 오랜 세월의 공백을 둔 시리즈의 인과율에서 비롯된 급소다 .
분명한 건 기존의 시리즈가 발생시키던 묵시록의 기운이 이번 시리즈를 지탱하는 기반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건 이 시리즈가 가상의 서사로 전제하던 막연한 디스토피아의 운명론을 실시간의 현실적 이미지로 묘사하는 단계까지 나아간 덕분이다. 비로소 존 코너는 미래를 위해 생존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미래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캐릭터로 자리잡았다. <터미네이터4>의 의미는 그 지점에 있다. 언젠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 목적지에 도착했다. 시리즈의 명성을 좌우하던 장기 역시 그와 함께 변한다. 묵시록의 예언은 하이브리드 영상으로 대체된다. 상상이 아닌 이미지가 시리즈를 지탱한다. 더 이상 형태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건 불필요하다. 물론 운명적으로 두 세계는 결착되어 도무지 분리할 수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시리즈는 자신이 설계했던 운명의 영토로 들어섰다. 존 코너는 미래의 불안과 싸우는 것이 아닌 그 미래에서 싸운다. 그 운명적인 단계를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 운명을 주체적으로 이끌지 못하고 스스로 운명에 끌려간다. 개별적인 작품 자체의 결말을 지켜보는데 무리는 없겠지만 시리즈의 미래가 위태롭게 느껴진다. 돌파구를 찾아내기 보단 스스로 땅을 파고 들어가는 기분이다. 일시적인 업데이트엔 성공했지만 새롭게 설치된 메인보드의 장기적인 한계가 감지된다. 차후 업그레이드가 관건이다.
밀착한 남녀의 육체가 전후로 흔들릴 때마다 남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희열이 새어 나온다. 막 섹스를 마친 남녀의 표정만으로도 절정의 환희가 느껴진다. 하지만 육체적 쾌락이 끝난 직후, 현실적 고민이 그들의 침대를 덮친다. 현실적 물욕 앞에서 육체적 쾌락의 잔상이 손쉽게 걷힌다. 그리고 30분 후,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남자가 마련했던 어떤 비책은 무참히 실패하고 만다. 되레 끔찍한 상황이 발생하고 비극이 예감된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이하, <악마가>)라는 중후한 제목을 지닌 이 영화는 일그러진 욕망에 사로잡힌 형제의 공모로부터 시작되는 가족의 파멸을 응시하는 작품이다.
비극의 방아쇠는 물질적 욕망이다. 이혼한 전처와 딸로부터 무시당하는 행크(에단 호크)는 자신의 무능력을 극복할 단서를 찾지 못하고 겉도는 신세다. 그런 그에게 형 앤디(필립 세이모어 호프만)가 접근해 솔깃한 제안을 던진다. 동생과 달리 반듯한 직장의 중역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앤디 역시 당장 거액의 돈을 마련해야 할 형편에 놓여있다. 형제는 새로운 출발을 꿈꾼다. 하지만 새로운 출발을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결국 형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로 결심한다. 그저 생각대로 하면 된다. 잠깐의 긴장감을 견디면 인생역전이 가능하다. 그 누구도 다치지 않고 큰 행운을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은 그들의 편이 아니다. 자신들을 구원해줄 꿈이 박살나고 결코 맞이해선 안될 최악의 상황이 눈앞에 드러난다. 형제의 공모가 비밀로 움트는 사이, 가족에게 찾아온 비극이 뿌리를 내려가며 파멸을 향해 무럭무럭 자라난다.
<악마가>는 플래쉬백을 적극 활용하며 지속적으로 서사를 재구성한다. 서사의 변화와 함께 서사를 지배하는 시점이 이동한다. 30분 후로 점프컷하는 초반의 단 한번을 제외하면 영화는 전진하는 서사의 중심에 놓인 인물을 갈아입으며 5번에 걸쳐 플래쉬백된다. 전진하다 뒷걸음질치는 서사는 사건의 전모를 천천히 드러내며 사건에 연루된 인물 제각각의 사연을 수집해나가고 이를 통해 <악마가>는 영화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구축한다. 인물 개개인의 심리를 하나의 면처럼 이어 만든 입체도형의 형태로서 영화를 완성해나간다. 행크와 앤디의 시점이 교차되던 영화가 그들의 아버지인 찰리(알버트 피니)의 시점으로 옮겨 마침표를 찍기까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서사는 원인에 대한 의문을 결과까지 이어나가며 시작부터 끝까지 스토리텔링의 에너지를 보존한다.
<뜨거운 오후 Dog day afternoon>(1975)와 <네트워크>(1976)와 같이 사회를 관통하는 인상적인 작품을 통해 과거의 영예를 누렸으나 현대에선 점차 잊혀지던 시드니 루멧은 2007년에 발표한 <악마가>를 통해서 영광의 시계를 현재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악마가>는 팔순을 넘긴 노장 감독의 영화라는 점이 무색할 정도로 신선한 스타일을 유지하고 기품 있는 연륜이 깊게 배어든 중후한 시선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실로 대단한 작품이다. 시종일관 중후한 극적 무게를 보존하는 동시에 고조된 인물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한다. 특히 심장박동기의 신호음을 이용해 긴박하면서도 정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결말부는 <악마가>의 클라이맥스로써 손색이 없다. 어떤 부족함이나 지나침이 발견되지 않는 배우들의 연기력 또한 백미다. 특히 온화한 미소 너머로 점차 불안의 기색을 방출해내면서도 대범하게 움직이는 앤디를 연기하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표정은 <악마가>의 심리적 깊이를 대변하는 바다와 같다. 반대로 초조하게 흔들리는 에단 호크의 표정은 영화의 불안한 심리를 출렁이게 만들고, 알버트 피니는 단호한 중압감을 더하며 마리사 토메이는 관능과 허무를 동시에 이끈다.
<악마가>는 흉악하고 퇴폐적인 사회를 고발하고 있지만 근엄한 기운을 잃지 않는 중후한 영화다. ‘하나씩 더해도 완벽해지지 않는 삶’을 떠도는 도시의 양자들은 결국 끝없이 더해지는 욕망에 이끌려 천천히 파멸로 한걸음씩 다가간다. 앤디의 제안을 받은 행크의 불안을 잠재우는 건 다름 아닌 지폐이며 행크의 제안을 받은 바비(브라이언 F. 오바이런)의 불안을 잠재우는 것 또한 지폐다. 양심과 공포를 잠재우는 건 물질적 욕망이다. <악마가>는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혀 인간 본연의 존재적 가치를 망각한 이들의 삶이 향한 본질적 비극을 향해 전진하는 가족드라마다. 지독하게 흉악하고 끔찍한 스토리는 현실의 치부를 드러내는 동시에 폐부를 정확히 찌른다.
개인의 몰락이 도미노처럼 이어지며 결국 가족은 붕괴된다. 이는 결국 극악하게 타락한 세태를 대변한다. <악마가>는 결국 중후하고 세련된 영화적 양식을 통해 충격적인 현실의 세태를 놀라운 방식으로 고발하는 영화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천국으로 가 있기를(May you be in heaven a half hour before the devil knows you’re dead).’ 근사하면서도 엄숙한 제목을 포함한 이 문구는 마치 악마의 유혹처럼 흉악한 물질적 욕망에 시달리는 현대인을 위한 비통한 기도와 같다. 그리고 <악마가>는 그 끔찍한 현실을 생생하게 포착하는 뜨거운 시선이자 깊이 전해 들어야 할 비장한 묵시록이다.
“왜 이런 영화를 만드세요? 왜 사람들이 이해도 못하는 영화를 계속 만드시려는 거죠?”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한 장면. 영화학도를 자처하는 학생은 감독인 구경남(김태우)에게 묻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이에 대해서 설명해보자면 마치 이 대사는 그냥 구경남을 위해 마련된 대사만은 아닌 것만 같다. 어쩌면 이 질문은 홍상수 감독 스스로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자승자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음에 나올 대답이 중요하다.
“이해가 안 가시면 안 가는 거죠. 제가 뭐 어떻게 하겠습니까. 전 그냥 영화 만드는 거고, 그걸 느끼는 사람이 있으면 좋은 거겠죠.”급격하게 높아진 언성이 격양된 분위기를 이룬다. 그 뒤로 구경남의 대답이 이어진다. “정말 몰라서 들어가야 하고 그 과정이 발견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수렴하는 겁니다. 체계적으로 미리 가지 않고, 매번 발견하는 겁니다.”누군가는 이 답변이 홍상수 감독의 입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단정할 순 없다. 그냥 관객은 그 상황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거나 나름대로의 입장과 시선을 견지한 채 해석을 시도할 뿐이다. 혹은 그냥 흘려 보내거나. 어쨌든 그 상황의 진심에 대해선 어느 누구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그냥 나름대로의 태도대로 상황을 분석하고 체감할 뿐이다.
2008년 여름, 충청북도 제천에서 뜬금없이 시작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홍상수 감독의 이전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대구와 반복의 형태를 고수하는 영화다. 제천과 제주도라는 공간의 이동을 통해 전후 구조로 나뉘듯 명확히 나열되는 이야기는 때때로 뜬금없고 당황스럽지만 지극히 일상적이라 익숙하면서도 생소하게 인지된다. 기존의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그렇듯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카메라 앵글은 무심하게 던져놓은 시선을 중심인물에게 돌려놓고, 그렇게 상황을 주시하던 카메라는 결정적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인물을 향한 줌업을 반복한다. 그 시야 속에 놓인 인물들은 서로 뒤엉켜 술판을 벌이다 특별한 사연을 만들어내거나 어떤 비밀을 잉태하며 그 과정 속에서 서로의 감춰진 의중이 탐색되기도 한다. 결국 누군가는 흥분해 길길이 날뛰고 그 반대편에 놓인 누군가는 움츠리다 이내 그 자리에서 달아나듯 떠난다.
그 다단한 관계 속에서 유일하게 공존하는 건 구경남이다. 그는 제천국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내려간 제천과 제주영상위원회의 초청으로 특강을 내려간 제주도의 대칭을 이루는 한 점이다. 그는 영화 속의 모든 현장에 위치함으로서 상황에 개입하기도 하지만 수없이 모이고 흩어지는 인물들의 관계와 상황을 관찰하는 위치를 고수해 나간다. 두 시공간에서 등장하는 각기 다른 인물들은 다른 듯 닮은 풍경 속에서 변형된 닮음의 역할극을 펼쳐나간다. 바뀐 공간 속에서도 어떤 대사들은 동일하게 들려오고 이와 함께 펼쳐지는 상황은 변형된 형태 속에서도 구조적 평행과 대칭을 이룬다. 영화제 심사위원을 맡기 위해 내려간 제천과, 영화 특강을 위해 내려간 제주도는 목적만으로도 대구를 이루는 공간이 된다. 그 안에서 구경남의 영화를 둘러싼 성찬의 고백과 비판적 물음이 뒤바뀌고, 충동적으로 발생한 불미스런 관계가 은밀히 폭로되거나 조심스럽게 감지되며, 우연한 계기를 통해 조우한 절친과 은사를 통해 마주한 그들의 부인을 통해 예상치 못한 소동극을 한차례씩 건넌다.
시공간의 변화와 인물의 교체를 통해 전혀 다른 풍경과 표정들이 발견되지만 어떤 기시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건 그 공간을 채우는 인물들의 욕망과 허세가 동일하게 드러나는 까닭이다. 잘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거나 잘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는 인물의 심리는 때때로 모호해서, 혹은 지나치게 명확해서 속물적이다. 가장 흥미로운 순간은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 자신과 타인의 이해차가 존재함을 발견했을 때 발생하는 인물의 표정이다. 자신의 영화로부터 ‘인간심리의 이해 기준을 얻었다’고 말하는 평론가의 고백으로 들뜨던 구경남이 ‘왜 사람들이 이해도 못하는 영화를 만드시는 거죠?’라고 당돌하게 묻는 학생의 질문에 달아오르듯 답변을 토해내는 순간, 인물의 표면과 내면의 온도차를 인식하게 된다.
이런 상황은 구경남 이외의 다른 인물을 통해서도 발견된다. 스스로가 빛이 됐다고 말하는 유신(정유미)과 이를 두둔하는 부상용(공형진) 앞에서 빈정거리는 구경남에게 유신이 정색하고 부상용이 이런 태도를 뒤따를 때나 오랜만에 은사와 만난 구경남이 은사와 관련된 기억을 고백하던 중 그 기억에 대한 서로의 견해차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사소한 갈등에 직면할 때, 스스로가 충분히 알고 있다는 믿음에 대한 반발이나 이견에 대한 당혹스러움이 인물의 표정을 통해 드러난다. 자신과 타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믿음의 간격을 발견하거나 어떤 사실에 대한 이해차가 끼어들 때, 서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아는 척한다고 생각되는 상대를 경멸하면서도 멋쩍은 표정으로 순간을 견딘다. 그 상황의 부조리는 때때로 개인의 스트레스로 발전하기도 하며 종종 상대와의 갈등을 발화시키는 계기로 작동된다. 게다가 이는 단지 영화 내부의 인물들에게 국한된 체험이 아니다. 이런 이해차는 영화와 그 외부에 놓인 관객 사이의 체험으로 확장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는 상황에 대한 불확실성이 담보된 결과들이 묘사되곤 한다. 유신과 부상용에게 파렴치한 인간으로 찍혀 달아나는 구경남의 모습에서 관객은 어떤 불미스런 원인을 예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예상은 영화적 상황이 어떤 원인을 통해 발생한 결과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잠정적으로 내려진 결론에 불과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양천수(문창길)의 불순한 동침을 간접적으로 인지한 관객들은 구경남과 고순(고현정)의 밀회를 발견한 조창우(하정우)가 그 사실을 양천수에게 폭로하는 상황 속에서 뻔한 결과를 예상한다면 의외의 대응을 목격해야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뜻밖의 상황 속에서 추출되지 않는 결과를 통해 관객의 오해를 도모하거나 관객의 입장에서 어떤 결과를 예상케 하다 이내 배반적인 상황을 연출한다. 어떤 상황의 단면을 통해 그 상황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결정하는 건 영화 속 캐릭터나 영화 밖 관객이나 매한가지다.
다채로운 인물들의 소동극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건 고순이다. 그녀는 제 욕망을 가장 충실히 드러내면서도 그 다양한 삶 속에서 가장 솔직한 내면을 드러내 보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방점도 그녀의 마지막 대사에 찍혀있다.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딱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해요.”스스로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타인에 대해서 잘 아는 듯 참견하고 주장하는 인물들의 난장판 속에서 고순은 유일하게 차분하고 담담하게 자신과 상대를 관통한다. 그리고 정곡을 찌르는 대사를 마친 인물이 화면에서 멀어져 갈 때, 카메라의 시선은 고개를 돌려 먼 바다를 차분히 응시하다 비로소 이야기를 멈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가운데 가장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유쾌한 작품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하나같이 이름값을 자랑하는 배우들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적 체험을 위해 헌신하는 광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놀랍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홍상수 감독은 때때로 자신을 겨냥하듯 자학적인 대사를 삽입하고 이를 밀쳐내듯 또 다른 반박을 맞은편에 세운다. 결과적으로 이런 태도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관객에겐 유쾌한 영화임에도 작가 스스로에겐 수없이 오가는 의심과 고민의 산물로 거듭난 작품임을 거듭 깨닫게 만든다.
홍상수 감독의 9번째 영화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낯익은 풍경을 새롭게 인식하는 그의 새로운 대구적 관찰을 통해서 더욱 여유로워진 시야와 한층 깊어진 관점을 인식하게 만든다. 새삼스럽게 홍상수 감독의 10번째 대구에 어떤 풍경이 놓여있을지 궁금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언제나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낯익은 풍경을 낯설게 전시하며 익숙하듯 새로운 관점을 펼쳐놓곤 했다. 그건 마치 매일 아침마다 정갈하게 당일 분량의 대본을 탈고한다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찍기가 그에게 있어서 ‘정말 몰라서 들어가야 하는 과정이자 그 과정의 발견으로 수렴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결국 홍상수 감독의 9번째 발견인 셈이다. 그리고 여전히 홍상수 감독은 10번째 발견으로 수렴해 나갈 것이다. 마치 꾸물꾸물 기어가는 애벌레처럼 느릿하지만 어디론가 나아가는 그 시선의 새로운 약진이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기대할 수 밖에 없는 건 바로 그런 소소하고 재미난 생활의 발견 덕분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오페라라고 한다면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나 ‘천사와 악마’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라 할만하다. 두 작가의 작품은 각각 종교적 음모론을 추적하는 기호학자의 수사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공통분모를 두고 있지만 전자가 철학적 기호를 추출하는 반면, 후자는 대중적 이슈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각기 다른 분자를 지닌다. 물론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가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른 건 단지 기독교의 권위를 뒤흔들만한 이슈를 발생시켰기 때문이라 국한할 순 없다. 종교적 진의에 대한 갑론을박만큼 이야기의 리듬감도 중요한 관건이다.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는 ‘다빈치 코드’보다도 속도감이 빠른 소설이다. 뒤늦게 인기를 얻은 탓에 오히려 스크린에선 속편으로 둔갑한 <천사와 악마>는 <다빈치 코드>와 마찬가지로 장르적 서스펜스와 지적 호기심, 그리고 블록버스터의 스케일까지 선점할 수 있다는 장점을 고루 갖춘 작품이다. 게다가 마치 주먹질하지 않는 '인디아나 존스'를 연상시키는 로버트 랭던(톰 행크스)은 지적인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역동적인 동선을 활보한다는 점에서 복합적인 매력을 두루 얻기 좋은 캐릭터다. 물론 댄 브라운의 소설에 담긴 놀라운 단서들이 관련 분야의 전문가를 자처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고서야 얼마나 믿음직스러운 수집품인가를 판단할 수 있기란 쉽지 않다. 다만 작가의 취재를 기반으로 벌어들인 단서들을 하나의 맥락으로 밀고 나가는 재능이 얼마나 쓸만한가를 확인하는 건 가능하다. 댄 브라운의 두 작품은 때때로 액션처럼 치열하게 공방하는 인물 간의 대화와 위트와 긴장감을 조절하는 캐릭터의 심리를 통해 대중적 호감을 발생시킨다. 영화적으로 표현하자면 댄 브라운은 장르적 연출이 뛰어난 감독에 가까운 작가다. 론 하워드 감독이 댄 브라운의 소설에 호감을 느꼈다면 그런 지점에 매력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빈치 코드>가 영화적 실패로 기억되는 가장 큰 이유는 스크린이 텍스트를 축약하기 위한 전시판의 역할에 국한돼버린 탓이다. 오락적 속도감마저도 상실한 듯한 안이한 형태는 원작의 가능성마저도 간과하게 만들 정도였다. <천사와 악마>의 불안요소도 다름 아닌 <다빈치 코드>의 영화적 전례에 있다. 하지만 <천사와 악마>는 시작부터 <다빈치 코드>와 다른 전철을 밟아나간다. 소설에서 대화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묘사되는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연출하고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몇몇 캐릭터는 제 위치에서 생략되거나 비중이 축소된다. 서사가 재편되고 관계가 재구성된다. 다만 주요한 캐릭터의 관계나 활용성은 대부분 보존한다. <천사와 악마>는 <다빈치 코드>와 달리 영화적 변주에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아무래도 <다빈치 코드>에 비해 소설의 영화화 과정에서 좀 더 과감한 시도가 엿보이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원작이 지닌 속도감은 보존하되 텍스트를 고스란히 이미지로 재연하려는 과욕에서 벗어났다.
<천사와 악마>가 가장 자신있게 선전해도 좋을 요소는 호사스러운 풍경이다. 고대 로마제국과 중세 크리스트교 시대의 영예를 대변하는 로마와 바티칸의 예술적 자취와 건축적 풍광을 관람할 수 있다는 건 분명 특별한 시각적 묘미다. 또한 교황의 서거 이후 교황의 인장이 새겨진 '어부의 반지(Pescatorio)'를 폐기하고, 교황을 추도하는 ‘세데 바칸테(Sede Vacante)’기간 이후 새로운 교황을 추대하는 추기경들의 투표가 이뤄지는 ‘콘클라베(conclave)’까지, 비밀스런 가톨릭 의식을 사실적으로 연출한 장면들 역시 이색적인 묘미를 부른다. 또한 반가톨릭 조직이라는 ‘일루미나티(Illuminati)’의 존재와 거대한 입자가속기에서 ‘반물질(antimatter)’을 추출하는 ‘CERN(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최근 빅뱅 실험으로 논란을 부른-의 존재는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무엇보다도 극의 말미에 등장하는 반물질 폭파 장면은 과학과 신앙이라는 패러다임의 충돌과 융화를 주제로 둔 <천사와 악마>의 클라이막스로 대변해도 좋을 만한 이미지적 성과다.
물론 <천사와 악마>는 원작에 비해 간결해진 스토리와 구체화된 이미지 덕분에 입체감이 보다 떨어졌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대화를 통해 흘러 넘치는 빽빽한 정보를 온전히 이미지로 치환하기엔 무리가 있음을 고려한다면 <천사와 악마>의 선택이 최선이라 단정할 수 없어도 어느 정도 필요악의 순기능을 수행했다고 평할만하다. 물론 <천사와 악마>에서 전달하는 정보가 어느 정도의 사실성을 확보했는가에 대해서 평가하는 건 무리다. 단지 그 정보를 엮어가는 스토리가 얼마나 특별한 오락적 묘미를 발생시키고 있는가를 평가하는 건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천사와 악마>는 어느 정도 무난한 묘미를 발생시키는 오락물로서 인정할만한 영화다. 기적적 체험에 도달하진 못해도 흥미로운 교리를 듣는 묘미 정도는 확보한다. 확실한 건 적어도 <다빈치 코드>보단 낫다는 것.
남자의 눈은 충혈됐다. 그는 지금 자신이 갚아야 할 대출금을 전화로 확인하는 중이다. 발 밑으로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지금 자살을 계획 중이다. 전화를 끊은 남자는 뛰어내린다. 행동은 명확하다. 빠르게 달리는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사이, 남자도 사라진다. 넓은 수면 위로 점 같은 파문이 인다. <김씨표류기>는 한 남자를 옥죈 절망적 피로감에서 시작되는 영화다. 그 남자가 예감한 생의 마지막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남자의 이야기는 사후세계가 아닌 현실에서 계속된다. 남자의 자살은 실패했다. <김씨표류기>는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 한강 한복판에서 표류를 결심하는 남자 김씨(정재영)와 그를 지켜보게 된 여자 김씨(정려원)에 관한 이야기다. 제목 그대로 ‘김씨표류기’다.
사실 한강의 무인도에 표류한 남자라는 설정은 사실 어딘가 무색한 지점이 있다. 수많은 인구가 밀집한 서울의 한복판이라 할 수 있는 한강의 밤섬에 로빈슨 크루소처럼 살아가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아무리 무인도라지만 버젓이 섬 위를 활보하고 불까지 피우는 그 생활이 어느 누구에게 방해 받지 않은 채 몇 개월 간 유지될 수 있다는 설정엔 모종의 설득력이 필요해 보인다. 단지 그 상황의 리얼리티보다도 그 상황 자체를 합당하게 인식할만한 설득력이 필요하다. 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강에서 표류 중인 남자라는 아이디어의 참신함을 활용하기 전에 그 참신함을 온전히 소비할 수 있게 만드는 합리적 설득이 선행돼야 한다.
<김씨표류기>는 심플한 아이디어를 상징적 컴플렉스로 치환한다. 도시 한복판에 고립된 남자, 김씨는 이미 사회로부터 유기된 삶을 살고 있었다. 정지된 카드로 채워진 지갑, 대출상환을 독촉하는 전화, 일방적인 해고 통보와 희박한 취업가능성, 무능력을 이유로 이별을 고하는 애인까지, 김씨의 삶 자체가 죽음을 결심할만한 계기로 작동한다. 하지만 밤섬에 떠밀려와 죽음에 실패한 김씨는 말한다. “죽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습니다.”아이러니하지만 그는 자신을 몰락시킨 도시의 한가운데로 도피해 혼자만의 자급자족적 삶을 꾸려나간다. 하이레벨의 개그나 다름없던 아이디어에 현실적 생기가 돈다. 게다가 그 남자의 고립을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다는 설정에서 사회적 무관심과 도시의 무심함이 읽힌다. 남자가 섬에서 나갈 수 없는 상황보다도 남자가 섬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계기와 그 남자의 삶을 인식하지 못하는 도시의 정서가 부각된다. 이는 아이디어에 설득력을 마련하는 날개나 다름없다.
남자 김씨의 밤섬 표류기가 자리를 잡을 때 즈음, 여자 김씨(정려원)가 등장한다. 여자 김씨는 흔히 말하는 히끼꼬모리에 가깝다. 쓰레기 더미로 가득한 방과 폐쇄적인 일상은 그녀를 규정하기 쉽게 만든다. ‘몇 번의 클릭으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웹 안에서 ‘회원가입’을 통해 ‘얼마든지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아바타처럼 살아가는 그녀는 ‘하루를 열심히 산 것 같은 착각’을 위해 만보기 운동에 열중하기도 하며 세상과 자신을 단절해주는 방안에서 규칙적으로 부팅되고 로딩되듯 일상을 반복한다. 그녀가 유일하게 창문을 여는 건 일년 중 단 두 번, 세상이 멈추는 ‘민방위 훈련’이다. 그때마다 그녀는 DSLR 망원렌즈를 통해 세상을 관찰한다. 그녀는 그 과정에서 우연히 남자 김씨를 발견하고 그의 표류기를 꾸준히 관찰해나가다 결국 그 삶에 접촉을 시도하는 유일한 대상이 된다.
영화의 중추는 단연 아이디어에 있다. 아이디어의 기반은 고립과 진화다. 도시 한복판에서 원시적 자급자족의 삶을 연명하기 시작하는 김씨는 수렵과 채취, 사냥을 거듭하다 종래엔 농경의 단계로 삶을 발전시켜 나간다. 밤섬은 마치 인류의 진화를 대변하는 소우주와 같다. 물론 이 과정의 묘사에서 두드러지는 건 진지함보다도 대사와 행위를 통한 유머다. “어류보단 조류가 맛있다”며 “진화는 어쩌면 맛있어지는 과정이 아닐까”라는 엉뚱한 해석을 펼쳐내는 대사와 나레이션은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좌하는 효과적 유머가 된다. 밤섬을 무대로 상대배우 없이 혼자 극을 끌어가는 정재영의 연기도 탁월하다. 마치 일인극 무대를 이끌어가듯 독백에 가까운 대사를 홀로 주고 받는 정재영의 연기는 설정의 한계를 연장하는 원동력이 된다. 물론 실험적 상상력에 보편적인 설득력을 입히는 건 세심한 스토리와 리드미컬한 연출력이다.
가장 강력한 장기는 소품활용능력이다. 작고 큰 소품들이 더러 등장하는 <김씨표류기>는 귀여운 이미지를 통한 간결한 방식으로 의미로 전달한다. 특히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자장면은 <김씨표류기>를 위한 핵심적 소품이나 다름없다. 우연히 발견한 ‘짜파게티’수프를 통해 자장면을 먹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 김씨는 ‘사람을 똑똑하게 만드는’욕망을 통해 삶을 진화시켜나간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배달된 자장면을 거부하고 자신이 ‘진짜루’만들어낸 자장면을 먹게 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은 이를 지켜보는 재미와 더불어 진솔한 감동을 일궈나간다. 자장면을 거부한 김씨가 ‘자장면이 희망’이라는 결의를 전할 때, 소유가 아닌 성취를 목표로 하는 인간의 결의라는 숭고함이 함께 전해진다. 소유를 위한 소비에 길들여지다 빚더미에 오르는 도시에서 몰락한 김씨가 소박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만드는 자장면은 소품의 기능성을 넘어 의미를 얻는다. 일상적인 소품들이 이색적으로 활용되는 형태만으로도 흥미를 부르지만 효과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로 활용된다는 점에서 특별한 생명력이 더해진다. 다양한 소품들은 의미를 발생시키고 전달하는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두 개의 공간, 밤섬과 방은 고립과 폐쇄라는 심리를 통해 도시의 각박한 정서 그 자체를 대변한다. 전자가 작은 아이디어를 통해 발전된 무대라면 후자는 그 아이디어를 보충하기 위한 인위적 수단처럼 보인다. 남자 김씨의 밤섬과 여자 김씨의 방은 대비적이지만 완전한 균형을 이루는 건 아니다. 밤섬이 하나의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잡은 것과 달리 방은 인테리어처럼 배치된 느낌을 준다. 전자에 비해 후자의 설득력은 다소 연약해 보인다. 그만큼 두 공간의 정서를 연결하는 캐릭터의 설득적 가능성 역시 차이를 드러낸다. 하지만 두 공간은 고립을 결심한 이의 터전이 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 의미를 발생시킨다. 처지가 다르지만 정서적으로 연관된 두 사람의 로맨스가 성립되는 과정에 심리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의미와 무관하지 않다. 단지 후자보단 전자의 공간에 흥미를 유발할 여건이 많다. 후자는 로맨스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인위적 배치의 기능성이 강한 덕분이다.
<김씨표류기>는 결국 남자의 기구한 표류기로부터 기이한 방식의 멜로에 선착하는 영화다. 거짓의 자아를 내세운 웹페이지를 헤매며 지저분한 방에 자신을 가둔 히끼꼬모리 여자는 우연히 관찰한 ‘수줍음이 많으며, 더러운 걸 좋아하고, 모험을 즐기는 변태’에게 짧은 영어로 교신을 시도하며 고립의 보호벽을 차츰 무너뜨려나간다. 마찬가지로 섬에서의 고립을 받아들이고 지저분한 표류에 적응한 남자는 자신에게 접속을 시도하는 여자의 정체를 의식하며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김씨표류기>는 도시의 물질주의 정서 속에서 고립된 남자와 개인주의 정서 속으로 침전한 여자의 연대를 통해 희망을 역설한다. 그 희망은 극복의 대단원적 메시지가 아닌 단순한 마주침으로 얻어진다. 어떤 희망적 결과를 말하는 건 시기상조지만 그 만남은 어떤 희망을 꿈꾸게 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시종일관 웃음을 유발하다 때때로 뭉클해지고 결정적으로 벅차 오른다. 더럽게 웃기다가도 더럽게 슬퍼진다. 기교와 재치로 일궈낸 이야기는 소박한 감동을 수확한다. 그리고 이해준 감독 역시 <김씨표류기>를 통해 성공적인 독립이란 선명한 의미를 얻었다.
“만약 당신이 젊은이로서 파리에서 살아보게 될 행운이 충분히 있다면, 그렇다면 파리는 이동하는 축제처럼 당신의 남은 일생 동안 당신이 어디 가든 당신과 함께 머무를 것이다.”헤밍웨이는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헤밍웨이의 저서인 <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원제, <(A) moveable feast>)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이렇다. 파리는 낭만으로 치환되기 좋은 도시다. 앙상한 철골구조로 이뤄진 기괴한 에펠탑에 낭만의 살점을 붙이는 것도 특별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그 도시의 바닥에 개똥이 가득하고, 광장과 뒷골목에 소매치기가 득실거린다는 것을 침 튀기며 설명한다 한들, 그 환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파리의 풍광이 스크린에 가득 펼쳐지는 <사랑을 부르는, 파리>(이하, <파리>)는 그런 환상을 부추길만한 영화다. 물론 <파리>는 단순히 나르시시즘에 도취된 영화가 아니다. 파리의 곳곳을 누비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표정을 통해 거리의 정서를 수집하고 그들의 동선을 따라잡으며 풍경을 전시하는 <파리>는 그 거리를 채우는 이들의 다양한 표정을 통해 도시의 본심을 드러낸다. 파리라는 도시 구성원의 표정을 통해 천의 얼굴을 지닌 도시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그 얼굴들은 낭만과 거리가 먼 표정을 지으며 삶을 비관하고 한탄함으로써 낭만을 현실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려는 것마냥 구석으로 몰아붙인다.
실제로 그 도시의 주체들은 낭만과 거리를 두듯 삶을 꾸려나간다.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피에르(로망 뒤리스)는 오래 전 사모했던 여인에게 고백을 전하지만 좌절을 경험하고, 그의 누이인 엘리즈(줄리엣 비노쉬)는 자신의 사랑을 비관하다 삶을 염세하는 지경에 다다르곤 한다. 저명한 역사교수 롤랭(페브리스 루치니)은 제자인 래티시아(멜라니 로렌)를 사모하다 스토킹을 저지르고, 끝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할 즈음에 절망에 봉착한다. 심지어 시장의 남녀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때 즈음 죽음으로서 감정을 짓이긴다. 이쯤 되면 파리는 사랑의 메카가 아니라 로맨스의 무덤에 가깝다. 그 도시에서도 사랑은 결코 쉬운 낭만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을 염세하는 이도, 사랑을 갈망하는 이도, 하나같이 사랑을 통해 삶을 꿈꾼다. 오래된 도시는 사람처럼 나이 들어가지만 그들의 감정을 통해 한층 젊어진다. ‘낡음과 새로움이 충돌해서 발생하는 도시의 모더니티’처럼 낡은 이별과 새로운 사랑이 충돌하며 도시의 낭만을 발생시킨다. 혈관처럼 세밀하게 이어진 거리에서 사람들은 산소와 같은 사랑을 나누며 도시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 <파리>는 역설적인 나르시시즘의 영화다. 도시는 사랑을 꿈꾸고 그 꿈은 낭만을 이루고야 만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저마다의 삶을 펼쳐내는 만큼 산만한 구석도 많지만 <파리>는 그만큼 다채롭고 풍만한 영화다. 편견이든, 착각이든, 일방적으로 포장된 도시의 실제적인 표정을 통해 진짜 낭만의 정체를 드러낸다.
영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파리는 낡은 도시지만 그 낡은 풍경엔 오래된 낭만이 깊게 배어 새로운 세대에게 그 혜택을 전한다. 파리는 분명 낭만의 도시다. 그 도시는 분명 낭만을 꿈꾸게 한다. 비록 이방인들을 통해 부풀어오른 허세라 할지라도 그 도시는 분명 한번쯤 누군가가 꿈꿀만한 이미지와 정서를 품고 있다. 물론 우리가 꿈꿔야 할 낭만은 단지 파리로 날아가 해결할만한 것이 아니다. 이국의 낭만을 동경하는 것보다도 그 결핍의 주체가 스스로임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숙제다. 굳이 이국의 로맨스를 꿈꾼다면 낭만은 언제나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 그건 파리지앵들에게도 쉬운 낭만이 아니다. 낭만은 파리가 아닌, 서울에도, 자신의 주변에도 얼마든지 산재해있다. <파리>는 파리라는 도시의 낭만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이들의 낭만이 얼마나 가까운 것인지를 역설한다. 천의 얼굴을 지닌 도시의 낭만에 대한 자부심만큼이나 현명하고 뚜렷한 낭만의 역설적 전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