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제목을 봤을 때 무엇이 맞고 틀리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맞고' '틀리다'보단 '지금' '그때'가 보다 중요하게 느껴졌다. 두 개의 지금 혹은 두 개의 그때. 결국 지금이라서 맞고, 그때라서 틀린 것. 이것은 결국 옳고 그름의 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을 옳고 그른 것으로 판명해주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언제나 지금은 맞지만 언젠가 그때는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시간이라는 마술적 흐름에 관한, 굉장히 사소한 발견의 깊이.

완전히 분절된 데칼코마니 형태의 출발점에서 제각각 시작되는 두 개의 이야기. 홍상수 감독 특유의 대구 구조를 개별화시킨 두 영화는 하나의 시작을 품었으나 두 개의 우주로 분리된다. 아마 홍상수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새로운 전형으로 구별될만한 작품일지도. 개인적으론 <옥희의 영화> 이후로 또 한번의 전환점이라 생각했다. 하나의 시점으로 분리시킨 두 가지 삶의 체험. 정말 놀라운 영화적 경험. 사소한 일상의 톤으로 길어 올린 마술적 리얼리즘. 나는 이 영화에 어떤 찬사도 아끼고 싶지 않다. 놀랍다는 말도 부족하다.

정재영은 두 사람 몫을 하며 영화의 너비를 확장하고, 김민희는 한 사람으로서 영화의 경계를 만든다. 두 개의 정재영과 하나의 김민희가 이 영화의 대구를 완성한다. 두 방향으로서 완전한 하나의 영화. 이 영화가 놀라운 건 영화라는 체험이 삶을 어떻게 예언하는가, 삶을 어떻게 반추하는가, 정반대의 방향성을 지닌 두 가지 질문에 합당한 답을 모두 해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현재는 언제나 옳게 합리화되고, 과거는 언젠가 틀려서 부끄러워진다. 그래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하지만 우린 언제나 지금을 사는 인간이다. 부끄럽지 않고 배길 수가 없다. 그게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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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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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머니께서 누나와 함께 세부로 여행을 떠나셨다. 최근에 하늘이를 잃고 우울해 하시던 차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해외에 나가시는 건 처음이다. 덕분에 인천공항에 가는 것도 처음이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멀리 떠나는 자식 염려하는 부모의 마음을 알 것 같은, 그런 기분. 설레면서도 걱정이 되는 그런 마음. 갖고 있던 300달러를 어머니께 드렸다. 이왕 가는 거 잘 놀고, 잘 쉬다 오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누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어머니께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셨다고. 생각보다 깊게 들어가서 놀랐다고. 그렇구나. 어머니께서도 하실 수 있는 게 많구나. 어쩌면 나보다도. 마음 한 켠에 바닷물이 들이치는 기분이었다. 짠했다. 어머니가 보낸 지난 세월이. 어머니께서 한국에 돌아오시면 수영을 권해볼까 생각했다.


2. 나는 늘 어머니께 종종 말씀드리곤 했다. 엄마는 결혼을 잘못했다고. 세월을 돌릴 수 있다면 아빠 같은 사람과 결혼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그러면 어머니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랬으면 네가 세상에 있었겠냐? 그렇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머니의 결혼 전 사진 속의 어머니와 지금의 어머니 사이엔 굉장한 괴리가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결혼을 해서 아버지를 잘못 만나서 삶이 망한 타입이라고 늘 생각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어차피 존재하지 않을 것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한편으론 완벽한 것일 테니 상관 없을 것이었다. 그 당시 존재했던 이의 존재감이 변질됐다는 결과적 사실이 보다 중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의 선택 이후로 왜곡된 그녀의 시공간을 생각하면 나는 종종 안타깝다. <인터스텔라>를 보면서도 문득 어머니의 삶을 생각했던 건 그래서였다. 그녀의 삶을 희생함으로써 나의 삶이 영위되고 있다는, 운명론적인, 예언적인 시공간의 오류. 왜곡. 변질. 당신은 지금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공허한 안타까움.


3. 오래 전 자취를 했던 여자친구를 사귈 때 그녀에게 가져다 주라며 어머니께서 싸주신 밑반찬을 먹고 여자친구는 말했다. “이러니까 웬만해선 먹을 때 맛있단 말을 안 하지.” 어머니께선 요리 솜씨가 빼어나셨다. 어릴 때부터 내 도시락 반찬은 쉽게 동났다. 연포탕은 그냥 집에서 쉽게 끓일 수 있는 국이 아니라는 걸 서른이 다돼서야 알게 된 것도 그렇다. 요즘은 문득 언젠가 어머니가 해준 밥을 먹지 못할 날을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이렇게 자랐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두려운 일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사라지는 것들 사이에 놓이게 된다는 건 두려운 일이다. 먼저 사라지지 못한다는 건 필연적으로 쓸쓸한 일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인간은 필요 이상으로 오랜 삶을 살게 됐다 하지 않은가.


4. 그래도 어찌어찌 여기까지 삶을 굴려왔다. 수도가, 전기가 다 끊기고, 집이 경매에 넘어가고,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느꼈던 20대 초반에 나는 한번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한남대교 중턱까지 걸어가 한강을 내려다 봤던 기억이 난다. 그때 알았다. 나는 쉽게 자살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한남대교 한가운데서 살 수 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 드라마처럼 생의 의지 같은 것이 북돋아 오르진 않았다. 그냥 알았을 뿐이다. 그 이후로 나는 여기까지 살아왔다. 살아남았다. 살고 있는 것인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아직까진 빌어먹지 않고, 밥벌이를 하며 내일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가끔씩 안도하며 하루하루를 수습하며 산다. 다만 언제나 그러하듯이 긴 계획 따윈 세우지 않을 뿐이다. 내가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딱히 부질 없는 일이라고, 내 지난 세월을 통해 나는 믿게 됐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러니 그냥 오늘을 버티며 살고 봐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오늘을 버텨야 최소한 내일이 있으므로. 그래도 다행히 여기까지 왔다. 다행이다. 아직까진, 그렇다. 최소한 살고 싶다는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이 나를 살게 만든다. 그러면 살 것이다. 최소한 내일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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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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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더 비기닝>은 버디무비로서의 장점이 강한 작품이다. 권상우와 성동일의 케미가 나쁘지 않다. 덕분에 웃음을 유발할만한 코미디로서의 장점이 발휘된다. 능력 없는 민폐 남편이자 구박덩어리로 전락한 권상우의 찌질한 연기를 보는 재미도 있다. 성동일 역시 사회와 가정에서의 이중적인 위세를 지닌 인물이란 점에서 코믹한 극적 장치가 된다. 물론 이게 남성편향적으로 설계된 코미디란 점은 좀 지적하고 싶어지지만.

문제는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추리물이란 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탐정>이라는 제목을 지우고 싶을 정도로 형편 없는 만듦새를 전시한다. 전설적인 강력계 베테랑 형사와 아마추어 추리광이 함께 사건을 풀어나간다는 골자는 흥미롭지만 베테랑 형사는 그 경력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능하고, 아마추어는 그야말로 민폐 덩어리다. 추리를 한다기 보단 완성된 시나리오를 토대로 추리를 끼워맞춘다는 인상이랄까. 추리물이란 장르 안에서 도무지 신뢰가 안 간다. 기이할 정도의 자신감이 묘할 정도.

의외로 이 영화에서 재미있게 여겨지는 건 사건현장이 아니라 각자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부부끼리의 사연이다. 밥벌이에 무능하든, 유능하든 아내보다 약한 남편들의 고충을 나누는 광경이나 밥벌이 제쳐두고 탐정질에 환장한 남편 때문에 힘들어 하는 아내 연기를 하는 서영희의 연기는 <탐정>에서 쓸만한 서브 플롯 노릇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최소한 납득이 가는 추리물로서의 구색을 맞췄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관람을 권하기가 어렵다.

그나마 어설픈 슬랩스틱 따위로 범벅된 쌍팔년도 명절 코미디가 아니라 캐릭터의 특성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코미디를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점은 평가해주고 싶다. 그런 면에선 팝콘무비로서 가볍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 관객들에겐 미덕이 없는 영화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개인적으로 추천하지 못하겠단 거지.

영화가 흥행한다면 누가 봐도 속편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결말이다. 이미 제목부터 '더 비기닝'이란 부제를 품고 있으니 당연히 결말에 대한 야심이 팽배한 것 같은데, 과연 어떨지. 전통적인 관점에서 추석에 먹힐 영화처럼 보이긴 한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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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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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를 보내며

도화지 2015. 9. 9. 00:34

하늘이를 보내주기 위해 김포로 가야 했다. 화장을 하기로 했다. 토요일에 떠난 하늘이를 보내주기 위한 일요일이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지막을 지켜줄 수 있어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데 하늘이 너무 맑고 예뻤다. 하늘이 너무 맑고 예뻐서 마음이 미어졌다.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았다. 눈가를 불로 지져서 눈물샘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하늘이가 담긴 상자를 안고 탄 택시 앞좌석에서 바라보이는 하늘은 너무 맑고 예뻤다. 뒷좌석에 앉은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나는 어머니가 들을까 겁이나 소리를 죽이고 마음 속으로 흐느꼈다. 눈물을 닦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하늘은 계속 맑고 예뻤다. 군데군데 뭉게구름이 하얀 털 같아서 하늘이 생각이 많이 났다. 그래서 조금 울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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