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흐트러진 머리와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커다란 눈에 가득한 애수. 고독한 한 마리 늑대처럼 나타나 전세계적인 팬심을 자극한 세바스찬 스탠은
우직하면서도 유연한 남자다.
마블 유니버스는 21세기 배경의 신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유럽의 신마저 뉴욕을 밟게 만든 이 맹랑한 세계관은 실제 도시를 배경에 두고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감상에 활력을 더한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2014)를 통해 마블 유니버스로 확실하게 착륙한 세바스찬 스탠 역시 이런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코믹북에 기반을 둔 영화는 신화이지만 어떤 면에선 사람들이 논의하길 바라는 지점보다 더
많은 부분이 현실적으로 반영돼 있다.” 그렇다. 그에게 있어서 마블 유니버스는 진짜는 아니되 진짜를 겨냥하는 세계다. “많은 재향군인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사회에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모른다. 사회는 더 이상 기존과 같은 방법으로 그들을 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속한 사회를 이해하는 것, 그것이 이번 작품에서 이
캐릭터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다. 그는 그 사회에서 어떻게 적응해나갈까?” 여기서 ‘이번 작품’은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를
의미하고 ‘이 캐릭터’는 당연히 스탠이 연기한 버키다. 그리고 그가 남긴 물음표에 대한 답은 마블 유니버스의 차기 라인업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될 거라고는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다.”겸손함이 느껴지지만 스탠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알게 된다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버키는 루마니아를 배경으로 처음 등장한다. 사실 세바스찬 스탠은 흑해 연안의 항구 도시 콘스탄차에서
태어난 루마니아 출신 배우다. 하지만 그는 여덟 살의 나이에 루마니아를 떠나 오스가십트리아의 빈으로 건너갔고, 열두 살이 되던 해엔 미국으로 건너갔다. 어린 시절의 스탠에겐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스탠의 내면을 강인하게 다듬어주는 계기가 됐다. “우리 가족이 세 나라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무엇을 기대해야 하고, 어디로
다다를 수 있는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내 앞에 어떤 길이 펼쳐지든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여겼다. 믿음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스탠이 처음으로
연기에 발을 들인 건 처음으로 국경을 넘어 당도한 빈에서였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오디션장에서
첫 역할을 얻었다. 루마니아의 노숙자 아이들 중 하나였다. 이
경험을 통해 어린 스탠은 배우라는 길에 흥미를 느꼈다고 말한다면 근사한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전철 안에서 촬영한 단편이었는데 도무지 좋아할 수 없었다. 세트장
안에서 긴시간 동안 기다린다는 건너무
지루했다.”그리고 두 번째로 국경을 넘어 정착한 미국 뉴욕에서 그가 배우를
꿈꾸게 됐다는 말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근사한 계기가 찾아온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첫 해에서야
연기를 좋아하게 됐다. 청력 장애가 있었음에도 학교 연극을 모두 책임지던 친구가 있었다. 장애에도 좌절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사실상 나를 도전하게 만들었다.”그렇게 고등학생 시절부터 배우라는 꿈을 품고 오디션에 참가하며
청사진을 그려온 스탠은 뉴저지의 예술학교에 진학하고, 1년간 영국에 있는 극단을 찾아가 연기를 수학하기도
했다. 하지만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선 긴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스탠은 수많은 오디션장을
전전하면서 수없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오디션장에서 마셔왔던 숱한 고배 끝에 맛본
성취가 자신을 키운 자양분이 됐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일들을
돌아보면 굉장히 힘들고, 고통스럽고, 마음 상하는 일이었지만
거기엔 놀라운 것도 있었다.” 그는 2년 동안 한 캐스팅 감독 앞에서 10번이 넘는 오디션을 치렀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는 비로소 그 캐스팅 감독에게서 합격 통보를 받아냈다.
“한 번도 붙지 못했지만, 그 캐스팅 감독님과 연결될 수 있을 때마다 오디션을 봤다. 그랬더니 다음 번엔 나를 기억하더라." 어쩌면 이런 근성이야말로 스탠이 지닌 진짜 재능일지도 모른다.
스탠은 TV시리즈 <가십걸>과 <킹스>에 출연하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조금씩 얻어나갔고
조나단 드미가 연출한 <레이첼, 결혼하다>(2008)나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블랙 스완>(2010)과 같은 준수한 영화에도 이름을 올리며 경력을 확장했으며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를 통해 대중적인 얼굴로 거듭났다. 그런데 전작인 <퍼스트 어벤져>(2011)를 통해 마블 유니버스의 궤도에 진입했다는 사실은 되레 뒤늦게 주목을 얻었다. 당연한 일이다. 캡틴 아메리카가 되기 전 연약한 청년이었던 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를 돕는 버키 반즈는 캡틴의 전우이자
스티브의 절친으로 거듭나지만 영화의 결말부에 다다라 죽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얼굴을 두건으로 가린 채 등장하는 윈터 솔져의 정체는 영화가 공개되기 전까진 철저히 봉인된 상태였다. 물론
원작을 충실히 따라잡은 코믹북의 팬이라면 그의 전사를 명확히 짚고 있었겠지만 일반적인 관객 입장에선 윈터 솔져가 버키일 것이란 예감을 쥐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속편에서 테러 집단의 세뇌를 받고 캡틴 아메리카를 공격하는 빌런 ‘윈터 솔져’로 부활한 버키는 캡틴 아메리카가 던진 비브라늄 방패를
맨 손으로 잡아내는 장면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를 통해 마블 유니버스는 새로운 동력을 확보했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의 대립을 그린다는 점에서
강력한 이벤트였다. 하지만 그 이벤트를 폭발시키는 버튼은 바로 버키다.
세계적인 기대감을 모으는 볼거리에서 가장 강력한 갈등을 유발하는, 그야말로 시리즈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작품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존재감을 과시한 덕분에 세바스찬 스탠의 인지도는 만월처럼 차 올랐다.
그러나 스탠은 대학시절의 은사이자 멘토로 꼽는 래리 모스의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배역을 얻고 인물에 공들이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데서 시작해라'라고
말했다. 결과보다 경험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경험을 점차 늘려나가고 있다. 리들리
스콧의 <마션>(2015)에 출연했던 스탠은 <더 브론즈>(2016)라는 코미디 영화를 통해 새로운
모습을 선보인다. 또한 J.K.시몬스와 맨디 무어가 출연하는
또 다른 코미디물 <아임 낫 히어>(2017)의
출연 계약을 마쳤고, 평소 흠모하는 배우로 꼽던 짐 캐리가 제작하는
TV시리즈에서도 등장할 예정이다. 버키의 여정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세바스찬 스탠 역시 현재진행형의 배우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자신의 좌우명을 따라 걸어왔다. "만약 이 일이 잘되면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보겠다.” 다행히도
이 좌우명은 스탠에게 잘못된 길을 가리키진 않은 것 같다. 그러니 멈추지 않을 것이다. 보다 즐겁게, 더욱 사랑하면서.
왕대륙이라고 했다. 쉽게 잊혀질만한 이름이 아니다. 누군가에겐 여전히 생소하겠지만 왕대륙은
이미 쓰나미 같은 팬덤을 부르는 뜨거운 이름이다. 이 남자가 문득 궁금해졌다.
발음할수록 거대하게 와 닿는 이름이다. 왕대륙이라니, 한반도는 집어삼키고도 남을만한 이름 아닌가. 그 거대한 이름이 심심찮게
들리기 시작한 건 대만영화 <나의 소녀시대>가
국내에서 개봉한 5월 11일부터였을 것이다. 대만에서 역대 흥행 최고 기록을 얻었다는 이 작품은 중국, 홍콩, 싱가포르에서도 차례대로 개봉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도장격파에 나선 무림고수와 같은 행보를 이어나가던 이 영화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국내 영화팬들에게도
심상찮은 반응을 얻었고, 올해 개봉 이후 적은 상영관 수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관객을 몰았다. 결국 대만영화 최초로 40만 관객을 돌파한 흥행작이 됐다.
<나의 소녀시대>는
대만영화뿐만 아니라 근래에 개봉한 중화권 영화 가운데서도 이례적인 흥행작이다. <응답하라 1994>처럼 1994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았고, 학창시절의 우정과 사랑이라는 보편적 경험을 낭만적으로 극화했는데 이를 통해 대만이라는 지역적 정서를 뛰어넘는, 보편적 공감대와 트렌디한 매력을 전파하는데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청춘이란 단어로부터 툭 튀어나와버린 듯한 캐릭터들은 자칫하면 유치하고 뻔하게 읽힐 수 있는 영화의 감정선에 특별한 숨을 불어넣는 생생한 육체가
됐다. <나의 소녀시대>의 흥행이 주연배우들을
향한 팬덤으로 이어진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유덕화의 아내가 되길 꿈꾸는 평범한 소녀 임진실을 연기한 송운화와 교내 최고의 불량학생이자 짱으로 군림하는 소년 서태우를 연기한 왕대륙을 중심으로 태풍의 눈이 형성됐다. 그리고 이런 기류를 감지한 배우들이 내한
의사를 밝히며 팬들의 술렁임도 가속화됐다. 특히 유덕화의 아내가 되길 꿈꾸는 임진실처럼 SNS상에서 왕대륙의 여자친구를 자처할 정도로 지극한 팬심을 내보이길 주저하지 않던 여성팬들의 관심이 지대했다. 지난 6월 5일에 내한한
왕대륙이 <나의 소녀시대> 상영관을 찾아 무대인사
일정을 소화했을 땐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암표까지 판매됐을 정도였다. 이에 왕대륙은 ‘비글’처럼 상영관 곳곳을 분주히 오가며 팬심에 적극적으로 부응했다. 그를 따라잡는 경호원들이 진땀을 흘릴 정도였다. 덕분에 ‘비글미’ 있는 배우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렇게 1박 2일간의
짧은 일정을 꽉 채우고 돌아간 왕대륙은 한 달여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촬영 중인 영화가 있어서 겨우 시간을 내서 온 거라 일정이 빠듯했지만
내가 출연한 영화를 사랑해준 팬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자리를 갖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기분은 좋았다. 한편으론
한국에선 첫 팬미팅이라 긴장됐다.” 왕대륙이 다시 한국에 발을 디딘 건 7월 13일 새벽 1시였다. 그리고 그 늦은 시간에도 왕대륙을 마중하기 위해 인천공항에 모여든 팬들은 왕대륙의 본명인 ‘왕 따루(Wang Ta Lu)’를 외치며 선물 공세를 펼쳤다. 그리고 당일 오후, 650명에 달하는 팬들과 두 시간 여의 팬미팅을
가졌다. 팬미팅 행사가 끝나고 나서도 거의 모든 팬들과 하나하나 사진을 찍어주는데 여념이 없었다는 관계자의
전언을 듣고 그에게 한국 팬과의 만남이 어떤 의미일지 궁금했다.
“미인이 많다.” 대답을
한 뒤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는, 장난끼가 가득 배어 있는 표정에서
<나의 소녀시대>의 쉬타이위가 느껴졌다. 거창한
이름만큼이나 커다란 미소가 짓궂게 느껴지지만 결코 밉지 않은 유쾌함. “사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팬들은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해주는 거 같다. 예를 들면 그저 웃기만 해도 좋아해주고, 작은 애교에도 환호해 주니까. 다만 안타까운 점은 있다. 사실 나는 내 스스로가 굉장히 유머러스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그런 면을 제대로
이해시킬 수 없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팬들 하나하나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것이었을까.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말없이 가만히 서있는 것보다 직접 몸을 움직여서 팬들을 만나는 게 즐겁다. 다른 나라를 가도 그렇다.” 그러니까 진정 ‘비글미’가 넘치는 남자인 것이다.
1991년생인 왕대륙에게 1994년을
배경에 둔 <나의 소녀시대>는 겪어보지 못한 시절이다. 경험해 보지 못한 시절의 주인공이 됐으니 타임머신을 타는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쉬타이위는 굉장히 캐주얼한 캐릭터이고 그에게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상황이 묘사된다. 게다가 러브스토리가 중심에 놓인 영화였기 때문에 1994년이란 시절이
큰 제약으로 다가오는 것 같진 않았다. 결국 내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바탕으로 연기를 했기 때문에
캐릭터에 몰입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물론 거저 먹듯이 연기했다는 말은 아니다. 왕대륙이 연기한 쉬타이위는 문제아들 중에서도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대장 노릇을 하는 인물이다. “현장에서 다른 배우나 스태프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있곤 했다. 패왕
같은 캐릭터라 그에 어울리는 패기나 두목 같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래도 거칠고 사나운
면은 나와 다른 지점이기 때문에 성격을 조절해야 했다.” 그렇다면 반대로 자신과 닮았다고 느낀 점은
없었을까? “장난끼가 많다. 무엇보다도 나처럼 굉장히 귀엽다는
점?”
장난끼가 다분하고 거칠게 행동하는 쉬타이위는 마음을 바로잡고 공부에 매진하지만 심각한 편견에 맞서야 한다. 왕대륙은 그런 쉬타이위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나도 남들에게 잘 공감 받지 못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말로
부정당한 경험이 있다.” 다행히도 왕대륙은 쉬타이위처럼 삐뚤어지지 않았다. “결국 내 의지를 꺾지 않기 위해 더욱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에겐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일곱 명 정도
있다. 그 친구들이 있어서 괜찮았다. 특히 배우로 활동하는
가진동과는 15년 넘게 친구로 지냈다.” 가진동은 지난 2012년에 개봉한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로 왕대륙보다도 한국에 먼저 알려진 대만 출신 배우이기도 하다. “나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남들이 뭐라고 말하는지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주변사람들과 어려움이나 고통을 나누기 보단 즐거움을 나누려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서 코미디를 많이 좋아한다.”
왕대륙은 코미디물에 대한 애정을 적지 않게 언급해 왔다.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주성치를 꼽기도 했다. 그건 배우로서의 재능이 코미디와 가깝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8년 동안 다양한 작품을 소화하면서 코미디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았다. 한번은
진지하게 정극 연기를 하고 있음에도 내가 등장할 때마다 관객들이 많이 웃는 걸 보고 내게 사람을 웃기는 소질이 있음을 알았다. 이런 재능이 있다면 제대로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소녀시대>에서 연기한 쉬타이위를 통해서도 웃음을 주고자 참고한 것이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일본만화를 좋아하는데, <슬램덩크>를 비롯해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코믹한 캐릭터 톤을 많이 참고했다. 실제로
쉬타이위는 <슬램덩크>의 강백호를 닮았다.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저돌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자상하고 따뜻한
남자. 실제로 왕대륙은 얼마 전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강백호의 그림을 게시한 적이 있다. 아무래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왕대륙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8년간의 무명생활을 겪었다고 말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소녀시대>는 왕대륙이 배우라는 궤도에 올라 처음 성공적으로 착륙한 경유지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그에게 지난 무명시절은 어떻게 다가올지 문득 궁금했다. “사실
생각보다 힘들진 않았다. 1년 동안 한 작품도 하지 못했던 적은 없었으니까. 평생 자신에게 어울리는 캐릭터를 기다리는 것이 배우의 운명이란 걸 알았기 때문에 그 시간을 보내는 게 어렵진
않았다. 결국 그 시절이 연기할 수 있는 힘으로 남겨진 것 같다.” 어쩌면
그건 처음부터 대단한 야심을 품고 연기에 도전한 것이 아니었던 덕분일지도 모른다. “로드 캐스팅을 받고
광고를 찍게 됐는데 광고에서의 연기는 짧은 시간만 허락되는 지라 내가 과연 제대로 된 연기를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결국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사실 당시엔 어렸을 때라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물론 지금의 왕대륙은 배우로서 진지한 미래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스물다섯 살에 찾아온 이른 성공에 도취되지 않고자 마음을 다잡는다. “아직 젊으니까
조급해하지 않고 지금 내가 가진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해낼 거다. 천천히 시간을 들이며 다양한
이들로부터 많은 걸 배우고 싶다. 그래서 진짜로 연기하고 싶은 캐릭터를 생각해보고 언젠가는 그에 어울리는
배역이나 스토리를 직접 찾아갈 수도 있을 거다.”
<나의 소녀시대>에서
가장 특별한 이벤트는 유덕화가 깜짝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작품의 제작자로 참여하기도 한 그는 현재 중화권
배우들이 우러러보는 대배우다. 왕대륙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녀시대>에선 유덕화가 젊은 시절에 출연했던 <천장지구>의 주제가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쉬타이위가 그 시절의 유덕화를 따라 하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왕대륙은 실제
유덕화의 모습을 따라잡기 위한 디테일에 고심했다고 설명한다. “청재킷을 똑바로 입으면 안 된다. 어깨에서 벗겨질 것 같은 느낌으로 살짝 걸쳐야 한다. 유덕화는 언제나
그렇게 입었으니까.” 그러면서 익살맞게 코피를 닦는 흉내를 내며 말했다. “유덕화도 한때 거친 남자 역할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왕대륙에게
유덕화는 단순한 별이 아니다. 자신의 위치를 되짚게 만드는 북극성과 같은 존재다. “유덕화도 젊은 시절엔 다양한 역할을 많이 소화했다. 그처럼 멋진
배우가 되려면 다른 배우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왕대륙은 시간을 달릴 준비가 돼있다. “배우로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섣불리 변신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잘 할 수 있는 역할에 집중하고 좀 더 내공이 쌓이면 다른 역할을 시도해보고 싶다.”
<나의 소녀시대>는
학창시절의 아련한 짝사랑에 관한 영화다. 왕대륙에게도 영화 같은 과거가 있다. “어렸을 때 한 여학생을 좋아했는데 문제는 같은 반의 모든 남학생이 그 여학생을 좋아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마음을 고백하지 못했고, 1년 뒤 그녀는 유학을 떠나버렸다. 그런데 그녀가 유학을 간 뒤 한 친구가 그녀도 나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기회가 된다면 그녀와 같이 <나의 소녀시대>를 보고 싶다.” 로맨틱한 사연이다. 그렇다면 왕대륙은 쉬타이위와 달리 우정보단 사랑을 선택할 수 있을까? “만약
친구와 한 여자를 두고 다투게 된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포기할 거다.” 단호했다. 그럼 아무래도 20년 동안 사랑하는 여자를 기다릴 순 없는 걸까? “물론이지. 그건 영화다! (웃음)” 역시 단호했다.
영화 촬영 스케줄 때문에 하루에 서너 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한다는 왕대륙은 한국에서 보낸 1박2일 동안에도
동분서주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인터뷰와 촬영이 끝나면 밤 비행기로 대만에 돌아간다고 했다. 그리고 현재 촬영 중인 무협 판타지 영화 <교주전>의 현장으로 곧바로 돌아갈 예정이다. 게다가 성룡이 출연하는
코믹 액션물인 <철도비호>와 중국의 거장 장이모우
감독의 딸인 장말이 연출하는 판타지물 <28세 미성년>을
준비하는 등 바쁜 일정이 줄줄이 이어질 예정이다. 그러니 서울을 두 번이나 방문했음에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게 그럴만했다. 그러다 문득 서울에서 어딜 가면 좋을지 추천해달라며 왕대륙이
물었다. 하지만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아 생각할 시간을 청했다. 그리고
그와 헤어지고 나서야 답변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니 지금까지 이 글을 읽은 왕대륙의
팬들은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대신 답변을 전해주길 부탁한다. 물론 비글미 넘치게 분주한 일정을 자청하는
그가 다시 한국을 찾았을 때에도 한가하게 여유를 즐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형이 음악을 좋아했다. 집에서 형이 음악을 크게 틀어놓으면 방문 너머로 귀동냥하고는 했다.” 장영규는 형을 통해 자연스럽게 음악을 들었고,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음악 감상에만 관심이 있었던 형과 달리 그는 스스로 연주해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밴드를 결성하기도 했고, 곡을 써보기도 했다. 그리고 장영규에게 음악적 관심을 심어준 형은 음악적 진로를 결정짓는 존재로 거듭났다. "형이 어린 나이에 밴드 활동을 하는 나를 보면서 아버지에게 ‘영규가 저렇게 음악을 좋아하는데, 전자기타 하나 사달라’며 졸랐다. 그 덕에 중학교 2학년 생일 선물로 전자기타를 받았다.” 그렇게 장영규는 고등학교 때까지 쭉 밴드활동을 했다. 하지만 막상 대학에 진학하려니 가고자 하는 학과가 없었다. "그 당시엔 실용음악과가 없었다. 하지만 다들 대학에 가니 학과는 선택해야 하는데 클래식을 전공할 준비가 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부모님 말씀을 듣고 중국어학과에 진학했다."
장영규는 대학에 들어갔지만 중국어에 대한
흥미가 없었으므로 학교 생활에는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 인생을 좌우하는 결정적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무용가 안은미다. "미술을
전공한 사촌누나와 가깝게 지냈는데 당시에 누나는 영화, 연극, 무용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 혹은 그 지망생과 어울려 다녔다.” 그때 만난 이들 중엔 먼 미래에 각자의
분야에서 대단한 역량을 펼칠 인물들이 즐비했다. 이를테면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된 이불과 최정화 그리고
영화감독 이재용 등이었다. “그들은 홍대나 종로 일대의 클럽을 휘젓고 다니며 즉흥적인 퍼포먼스를 펼치며
놀았는데 나는 그들을 쫓아다니며 짐을 들어주거나 촬영을 했다. 그리고 종로에서 록음악을 주로 틀던 ‘오존’이란 바에서는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행위예술을 펼치곤 했는데
별의별 사람이 모여 예술 활동을 하는 걸 보며 ‘이런 것도 있구나’ 싶었다.”
그 중에서도 안은미는 오늘날의 장영규를
각성시킨 자궁 같은 인물이었다. “하루는 LP판 12개를 가지고 와서는 ‘공연에 쓸 음악을 네 마음대로 만들어봐라’고 던져주더라. 집에 가져가서 곡을 이리저리 자르고 붙여 짜깁기해
한 시간짜리 음악을 만들었는데, 그 음악이 마음에 든다며 가져다 쓴 공연이 좋은 성과를 거뒀다.” 1991년 안은미가 제1회
MBC 창작무용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고 이듬해 축하 공연으로 준비한 <알라리 알라리요>였다. 당시 장영규는 심각하게 진로를 고민하던 차였다. “취직을 해야 하나 걱정할 무렵이었는데 안은미와의 인연으로 무용 음악을 시작했다. 하지만 먹고 살기는 빠듯했기 때문에 가수들 공연장에서 세센맨으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하지만 무용 음악은 결국 장영규의 작품 세계를 확고히 다지는 축이 됐다. “당시에
공연 음악 하나 만들고 받은 돈이 10~20만원 남짓이었다. 그
돈으론 작곡가를 쓸 수도 없었고, 컴퓨터도 없으니 기존에 있는 음악을
4채널 짜리 카세트로 짜집기해서 공연 음악을 만드는 게 당시의 관습이었다. 그렇게 음악을
끝없이 자르고 섞었던 작업이 공부가 됐고, 음악 활동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사실 장영규를 대중적으로 알린 건 무대음악보단
영화음악이었다. 그의 첫 영화음악은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이었다. 그 후로 60편이
넘는 영화음악을 작업했고 최근엔 <곡성>의 음악감독을
맡으며 회자되기도 했다. 문득 장영규가 생각하는 영화음악과 무용음악의 차이가 궁금했다. "영화에서는 음악이 딱 짜여진 틀에서 흘러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제약이 많은데 무용음악은 상당히 자유롭다. 이야기가 명확한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 추상적인 작업이다 보니, 어떻게 가든 끝내 한 지점에 도달하기만 하면 된다. 갈 수 있는
길이 수없이 많아 무용 작업이 더 흥미롭다.” 그렇다면 장영규가 원하는 작업 과정 방식은 어떨까? “무용수가 음악에 긴장하게 만드는 작업이 좋다. 연습 기간에는 기본적인
리듬만 작업해 주고, 안무가 완성되면 그때 비로소 곡을 입힌다. 처음부터
명확한 색깔을 만들어 주고 작품을 그에 맞추면 어딘가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처음에는 최대한 색깔을 빼고 마지막에 확 입히는 거다. 그러면 무용수들이 몸에 익은 리듬과 박자임에도 새롭게 들어온 음악적 색을 느끼고 긴장 관계를 이룬다."
한편 장영규는 지난해에 직접 무용을 연출하기도
했다. 국립무용단과 협업하여 국립극장 무대에 올린 <완월>이 바로 그것. 소치동계올림픽 국제아트페스티벌에 공연하러 갔다가
국립무용단이 강강술래를 추는 걸 보곤 영감을 받아 국립무용단에 작업을 제안했다가 오히려 연출을 제안 받고 고민 끝에 이를 수락했다. 사실 장영규가 끌린 건 강강술래의 음악이 아니라 원형의 동작이었다.
"<강강술래>라는 노래에 동작이 갇힌 느낌이었다. 기존의 민요를 걷어내고 새로운 음악을 입히면 현대적인 작품으로 거듭날 거라 생각했다." 음악감독이 아닌 연출자로 참여한 그는 무용 동작의 연출도 관여했다.
"마치 음악 작업할 때처럼 원형의 동작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듯 만들어봤다.”
사실 장영규는 규정하기 힘든 뮤지션이다. 무용, 영화, 연극음악과
역시 규정하기 힘든 밴드 어어부 프로젝트와 국악기를 다루지만 국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닌 비빙 그리고 민요 밴드라 일컫는 씽씽까지, 가히 전방위적인 음악을 섭렵해왔다. 그야말로 소리수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존의 악기와 어디에나 있는 소리로 작업하는 게 지루할 때가 많다. 그래서 그렇지 않은 소리를 수집하여 그걸 근원적으로 쪼개 악기로, 소스로
만들어 작업한다.” 현재 파리를 비롯해 유럽 등지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안은미의 <조상에게 바치는 댄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작업된 음악을
사용한다. 전국을 다니며 수집한 할머니들의 목소리와 노래를 따서 음을 쪼개고 더해 전혀 다른 느낌의
음악으로 만들었다. "음악을 만드는 요소가 다양하겠지만 내가 관심을 갖는 건 화성, 선율보단 소리, 구조, 리듬이다. 언제 흥미가 바뀔진 모르겠지만 지금은 여기 집중하고 있다." 장영규는
오로지 자신의 흥미를 따라간다. 그리고 그 흥미가 세상을 향해 문을 열어주었다. 흥미롭지 않은가.
about
장영규는 전방위적인 음악가다. 무용음악, 영화음악, 연극음악, 시각예술
사운드 작업, 밴드 어어부 프로젝트, 국악기 프로젝트 비빙, 민요 밴드 씽씽 등 한 마디로 규정하기 힘든 다방면의 음악적 작업을 전개하면서도 소리의 해체와 조립이라는 실험적인
스타일을 추구해 나간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며 쳐다봤다. 정작 당사자는 씩씩하게 걷고 웃으며 말한다. "옛날에는 길에서 다 쳐다봤다. 우주복도 아니고,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을 입었는데. 심지어 그때는 머리카락이 있었는데.(웃음) 그럼 내가 씩 웃어줘. 일종의 실천적 참여 작품인 거지. 거리 퍼포먼스! 나는 하고 싶다 생각하면 했다. 그게 내게 큰 힘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 무용가 안은미가 춤을 추게 된 것도 하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섯 살의 나이에 우연히 보게 된 한국무용수가 입은 의상의 색을 보고 춤을 춰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하늘의 계시 같은 것이었다. "춤이라는 게 마치 달나라로 가는 판타지처럼 느껴졌다." 결국 7년간 어머니를 조른 끝에 4천원의 레슨비를 허락 받았다. 시장통 건물 2층에 있는 낡은 무용학원에 발을 딛게 됐다. "무언가를 하는 내가 좋았다. 음악이 나오면 좋고, 내가 춤을 춘다는 게 좋았다." 하지만 8개월 만에 첫 번째 비행은 끝이 났다. 어머니의 뜻대로 무용학원 대신 영어학원을 가게 됐다.
다시 본격적으로 무용을 시작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사실 진로라는 개념보단 좋아서 한 거지. 그러다 무용반
언니들이 대학을 간다 길래 왜 가냐 물으니 무용과가 좋다는 거다. 그래서 나도 대학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도 춤을 직업으로 삼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대학에선 그녀가 추고 싶은 춤을 가르치는 이가 없었다. 안은미는 학교 밖에서, 그리고 무용 밖에서 답을 찾았다. "학점을 따야 하니 학점
받을 만큼은 하고, 저녁에는 내 것을 했다. 내 마음대로
했다. 그리고 무용계에 있는 사람보단 미술하는 사람들과 많이 놀았다.
최정화나 이불, 이영주, 이수경 등 새로운 관점을
찾고자 하는 작가들을 만나서 뭔가 해보자면서." 실제로 그녀는 미술작가 최정화의 작업물과 무용을
잇는 탈경계적인 작업을 해내기도 했다. 그녀에게 춤이란 보여주기 위한 동작이 아니라 세상과 대화를 나누기
위한 언어였다. "무용이 추상적인 언어 같지만 물리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한다. 막연히 아름다운 몸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자연의 균형감각을 삶에 투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안은미는 뉴욕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한국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 자신을 던져 균형을 잡아보고자 했다. "내 몸에 충격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걸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1992년에 한국을 떠나 뉴욕에 당도했다.
안은미는 뉴욕에서 서서히 자기 영역을 구축해 나갔다. 뉴욕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한 30대 무용수는 뉴욕을 근거지로 안은미라는 이름을 각인시켜 나갔다. 맨하튼 예술재단의 안무가 상을 받고, 뉴욕 예술재단의 아티스트 펠로십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뉴욕은 그런 영광으로 점철된 영토가 아니었다. "그저 열심히 재미있게 살았다. 1년에 한번 공연하고, 영어 배우고, <뉴욕 타임스>
읽고, 아메리카노 마시다가 '방세 언제 내지?' 생각이 들면 나가서 일하고. 그렇게 방세 내고 나면 또 놀고. 그렇게 10년을 뉴욕에서 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10년이 짧다는 걸 알았다.
서두르지 말자. 가만히 있어도 10년은 다 내
것이 된다. 아득바득 살 필요 없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그냥 가는 거지." 한국에서도 안은미는 독보적인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무용은 보수적인 한국 사회를 압도하는 놀라움이었다. 그리고
안은미는 2000년 대구시무용단에서 단장직 제안을 받아들이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안은미 컴퍼니에 무용수가 10명 있는데 아마 내가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거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들을 만나러 왔구나 싶다. 우리 팀은 신선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헌신으로 좋은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다. 거기까지 닿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어느 정도 넘어서면 다들 경이롭게 본다. 외국으로
투어를 나가도 이런 팀워크가 없다." 지난 몇 년 사이 안은미 컴퍼니는 유럽 등지를 돌며 춤을
춰왔다. 한국 할머니들의 막춤을 무대에 올린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를 비롯해 여고생과 아저씨가 등장하는 <사심
없는 댄스>, <아저씨들을 위한 무책임한 댄스>가
대단한 반향을 일으킨 덕분이다. 그녀가 이런 막춤을 무대에 올리게 된 배경이 궁금했다. "무용수들과 형식적인 작업을 해오다 보니 안무가로서 만족하면서도 색다른 시각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할머니들의 몸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 나갔고, 한달 만에 270명을 찍었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시각을 얻었다. 할머니들 춤을 막춤이라 부르지
않나. 쉬운 춤이라 생각했는데 카메라를 통해 들여다본 몸에 놀라운 힘이 있더라. 살아오면서 축적된 정서, 배경, 성격
등이 함축된 몸을 흔드는 거다." 막춤 안에 깃든 세월과 세상과 인생을 보았다. 그래서 무대에 올리길 결심했다. 학생들과 아저씨들을 무대에 올린
것도 마찬가지다. "할머니들을 기록하다 다른 세대가 궁금해졌다. 같은 질문을 애들한테 하면 어떨지, 아저씨들한테 하면 어떨지. 애들은 무조건 아이돌 댄스를 춘다. 그리고 아저씨라고 불리는 걸
싫어하는 한국 남자들은 춤추는 걸 부끄러워한다. 그 부끄러움 역시 역사이고, 객관적인 시점이니 그런 몸을 기록했다."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는
무용수들이 춤을 추는 1부와 할머니가 등장하는 20분짜리
영상을 보여주는 2부 그리고 그 영상 속의 할머니가 무대 위로 올라와 막춤을 추는 3부로 구성된다. 그리고 피날레에선 공연을 보던 관객들까지 무대로
올라와 춤을 춘다. "무대는 아티스트의 영역, 객석은
관객의 영역, 이런 틀을 없앴다. 그런데 우리가 봐도 놀라운
정도로, 관객들이 해일이 밀려오는 것처럼 무대로 뛰어올라온다. 그리곤
할머니들과 무용수들과 같이 춤을 춘다. 나이든 국적이든 상관 없다. 언어보다
더 센 표현이 터지는 거다." 춤의 장을 넘어 삶의 장으로 변모한 무대, 그것이 안은미가 춤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리고 춤을
통해 자신을 살리는 방식이다. "예술 하는 사람은 안정감을 가지면 안 된다. 자신을 코너에 세우고 긴장감 있게 살아야 한다. 작가가 결과물을
못 내면 창피한 거잖아. 지구를 떠나야지. 그러니 매일 내
자신을 코너에 밀어 넣는다." 마치 영원히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을 사람 같다. 하지만 언젠가 그녀의 춤도 멈출 것이다. 달나라로 가는 판타지에도
마지막 장은 있을 것이다. 안은미는 말했다. "아마
방전되는 날, 그날 갈 거다. 우주선 타고. 상상만 해도 귀엽지 않나?" 이보다 유쾌할 순 없다.
about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
<사심 없는 댄스>, <아저씨들을 위한 무책임한 댄스>로 유럽 등지를 열광시킨 안은미는 동시대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무용가다. 안은미
컴퍼니 소속 무용수들과 함께 세계를 돌며 무대에 오르는 그녀는 파격보단 자유를 추구하며 행복하게 춤을 추고 있다.
로타(Rotta)라는
가명으로 사진을 찍는 최원석은 보기 드문 팬덤을 지닌 포토그래퍼다. 그는 유명해지길 꿈꿨고, 유명해져서 좋다고 말했으면 더 유명해지고 싶다고 말했다.
<로타의
일본산책>은 출간 전에 이미 예약 판매로 1쇄가 매진됐다. 미소녀 포토그래퍼가 인기에 편승해서 여행사진집을 낸 거 아닌가? (웃음)
옛날부터 일본에 가서 찍은 사진들이 많아서 보여주고 싶은 욕심은
늘 있었다. 그런데 인지도가 생긴 상황에서 사진집을 내고 전시를 하면 확실히 어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다만 기대 이상의 반응이라 신기하다.
첫
사진집인 <Girls(소녀들)>를 내고 인지도가
수직상승했다.
아무래도 사진집과 전시가 이슈가 된 타이밍에 설리 화보 이슈까지
겹쳐서 시너지가 난 거 같다.
미소녀
컨셉트의 사진은 언제부터 찍었을까?
오래 전부터 진행한 작업이었다.
다만 페이스북엔 공개하는 걸 싸이월드에 공개하지 못했던 건 그 당시엔 반응을 가늠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선 이런 사진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한국에선 어려울 거 같았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참고했다. 그러다 한 5년 전부터 타이밍이
괜찮다 싶어 조금씩 노출했지.
공연사진을
찍으면서 포토그래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공연장에서 사진을 찍어 보니 현장감이 너무 좋았다. 지인이 공연장 스태프였던 덕에 무대 근처에서 촬영할 수 있어서 촬영하는 묘미도 있었고. 그러다 내 사진을 좋아하는 분들이 생겨서 적극적으로 찍게 됐고, 자연스럽게
일로 연결됐다. 페스티벌 촬영 의뢰를 받고, 뮤지션들의 앨범
재킷도 찍게 됐고.
과거
싸이월드에서 본 클럽 사진들의 현장감이 인상적이었다.
A 클럽 촬영을 통해 빛을 쓰는 법을 익혔다. 빛을 잘 쓸수록 춤추는 모습도 역동적으로 잡히고, 예쁘게 나오니까. 사실 클럽 사진 찍는 사람이 꽤 많다. 그들보다 더 잘 찍는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열심히 찍었지.
인정욕구가
강한가?
흔히 말하는 '따봉충'이지. (웃음) 옛날부터
꿈은 하나였다. '유명해지고 싶다.' 정말 소박하지 않나? 누군가는 세상을 위한 꿈을 꾸거나 대단한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어떤 기준도 없이 그저 유명해지고 싶다니. (웃음)
유명해지니까
좋은가?
그만큼 재미있는 일이 들어오고,
재미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니까. 사진을 찍는 덕분에 이와이 슌지 감독도 만났고. 물론 실력이 없었다면 그럴 기회가 없었겠지만.
설리에게선
직접 연락이 왔다던데.
사실 긴가민가했는데 만나보고 진짜라는 걸 알았다. 페이스북에 있는 내 사진이 다 마음에 든다고, 그런 느낌으로 찍어보고
싶다고 하더라.
서태지도
직접 연락을 하던가?
그건 아니고. 어쨌든
공연 사진을 잘 찍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연락을 했는데 결국 앨범사진도 찍고, 인터뷰 기사를 비롯한 공식
사진도 찍게 됐지.
무라카미
다카시가 SNS에서 로타의 사진집을 극찬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실 무라카미 다카시의 한국 전시를 촬영했는데 내가 자기 전시를
찍었는지도 모를 거다. 만약 일본으로 찾아가 포트폴리오를 보여주고 적극적으로 어필했다면 관계가 진전됐을
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그 당시에 내가 너무 바빴다. 아쉽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언젠가 기회는 있을 거다.
혹시
유명해져서 불편한 건 없나?
게임할 시간이 없어진 거? (웃음) 사람 만날 일이 많아지니까 개인시간이 너무 없어졌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이 너무 많아지니까 일일이 이름을 기억하기 힘들더라. 그래서 미안하다. 만나는 사람은 많아졌는데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적어지니까 오히려 친한 사람이 생길 기회가 더 없다. 아이러니하지.
유명세를
얻으면서 과거에 로타라는 이름이 '로리타'와 '오타쿠'를 더한 이름이라고 언급한 방송 영상이 뒤늦게 발굴돼서 여성
중심의 커뮤니티로부터 집단적인 공격을 받았다.
처음엔 괜히 그런 말을 했나 싶었는데 지금은 괜찮다. 사실 넓은 범위에서 보면 그렇게 이해해도 어색하지 않은 사진을 찍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반박하는 것도 이상하지. 다만 로리타를 의식하고 작업한 건 아니니까 그런 부분은 확실히 짚고 싶다.
아무래도
말의 무게를 느꼈을 거 같다.
조심해야겠단 생각은 들었지. 솔직히
사진 컨셉트를 설명할 때조차 로리타를 언급해본 적도 없다. 그때 영상을 찍는 PD가 '로리타가 섞인 이름 아닌가요?'란 식으로 장난스럽게 물어봐서 나도 장난처럼 대답해버렸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PD도 조금 얄밉네. (웃음). 물론
그때 현장 분위기도 화기애애했고. 사실 당시만 해도 로리타를 공격적으로 해석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일종의 컨셉트로 받아들이는 느낌이 강했지. 그래서 걱정 자체를 안
했던 것도 같다.
그로
인한 여파가 있었을까?
사실 사진집이 나오기 전에
<프로듀스101> 쪽에서 촬영 제안이 왔다. 걸그룹 '여자친구'의 소속사에서도 왔고. 그런데
로리타 이슈가 터지고 다 무산됐지. 그런데 최근 '아이오아이(I.O.I)'와 광고 촬영을 진행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거 같다.
안티의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두둔해주는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나를 대신해 싸워주는 팬이 생겼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사실 논쟁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본다. 부정적인 의견도 존중하고, 억울한 건 전혀 없다. 그냥 이렇게 찍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주기만
하면 된다. 보고 말하는 건 좋다. 하지만 내 사진도 안보고
나를 욕하는 사람이 있다면 화가 날 것 같다. 모르고 욕하는 거니까.
내 사진을 알고 욕하는 건 상관 없다.
일본에선
이런 사진이 흔하다는 식으로 비하하는 이들도 있더라.
한때 우리나라 만화가들이 대부분 일본만화처럼 그릴 때가 있었다. 그래서 일본만화를 따라 한다는 비난도 많았는데 지금은 다 제 식대로 그린다.
나도 처음엔 일본 그라비아 톤을 따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별로 신경 쓰이진 않았다. 영향을
받은 거지, 베낀 게 아니니까. 사실 요즘 우리나라 포토그래퍼들이
어떤 사진을 찍는지 구별하기 어렵다는 말도 많이 듣는데 최소한 '이거 로타가 찍은 거네'라고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는 건 내 자신감이다. 내 느낌은 존재하는
거니까.
'로타'라는 이름은 본래 로봇 캐릭터를 구상하며 만든 이름이라고 들었다. 정확한
의미가?
특별히 의미는 없다.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로봇 캐릭터를 만들었는데 '로보트'가 연상되면서도
귀여운 이름을 짓고 싶었다. '로'로 시작되는 두 글자의
귀여운 이름을 짓고 싶었는데 '로타'하니까 괜찮게 들렸다.
그
캐릭터는 어떻게 됐나?
넥슨에서 개최한 공모를 위해 만든 건데 안됐지. (웃음) 그런데 최근 넥슨과 미팅이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좋아하더라. 그림으론 인연이 없었지만 사진으론 인연이 생겼다.
일러스트를
그리다 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
대학교 시절에 제대한 뒤 처음
'똑딱이'를 잡았는데 여자친구를 찍어주다 보니 더 예쁘게 찍어주고 싶더라. 그러다 더 좋은 장비로 찍어보니 사진이 더 예쁘게 나오는 걸 알게 돼서 사진 찍는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장비병'이 생겼다. 그런데
점점 잘 찍는단 소리를 듣게 되면서 피사체에 대한 욕심이 생겼고, 실력이 늘면서 기회로 연결됐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그림을 그린 이유나 사진을 찍는 이유에 차이는 없었다.
차이가
없다는 의미가?
그림을 시작한 것도, 사진을
시작한 것도 내가 표현한 걸 남들이 좋아할 수 있도록 만들겠단 마음이었다. 중고등학교 때 그림을 열심히
그린 것도 좋은 반응을 얻는 게 좋아서였는데 카메라를 잡았을 때도 비슷한 욕구가 있었던 거지.
사진
찍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될 거라 확신한 건 언제였을까?
재미있게 하면 대가가 있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사진작가가 될 거란
생각을 해보진 않았다. 취미로 공연을 찍다 보니 일이 됐고, 서태지
사진까지 찍었다. 미소녀 컨셉트가 좋아서 촬영했는데 일로 이어지더니 설리한테 연락이 왔다. 재미있게 하다 보면 뭔가 되겠단 생각은 했지만 돈과 연결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다만 좋아하는 만큼 최선을 다했지.
한
인터뷰에서 '점잖아 보이지만 알고 보면 변태라서 이런 사진을 찍고 있는 거 아닐까'라고 말한 적이 있다. 스스로 변태라고 생각하나?
변태가 아닌 사람은 없다고 본다.
그리고 변태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느껴지지만 유쾌하고 재미있는 단어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박찬욱 감독도 변태적인 성향이 있을 거다. 젠틀하고 고급스러운 언변을 구사하지만 머리 속엔 변태적인
상상력이 있으니까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거지. 나도 사진을 통해 내 안의 변태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셈이고. 하지만 그걸 저질스럽게 표현하고 싶진 않다. 다만
다른 사람보다 상상력이 떨어질 수는 있어도 표현력은 좋다고 생각한다. .
혹시
새로운 미소녀 사진집을 출간할 계획은 없나?
6월말에 나온다. 소니
뮤직과 컬래버레이션 형태로 진행 중인데 사진집을 넣은 2CD 형태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발매된다.
특별한
목표는 없을까?
잠깐, 고민 좀 해보고. 음, 요즘 해외에서도 조금씩 인지도가 생기는 거 같은데 일본이나
동남아, 유럽 쪽에서도 알려지고 싶은 거?
발음할 때마다 반짝이면서도 명료해지는 느낌이다. 권율이란 이름은. 그리고 권율은 반짝이고 명료한 배우가 되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드라마
<싸우자 귀신아>와 영화 <사냥> 홍보를 병행 중이다.
조금 분주하긴 한데 드라마 초반 비중이 크지 않아서 아직은 여유가
있다. 그래도 7월 11일
첫방송 전까진 많이 찍어둬야 한다. 후반작업이 중요한 작품이라.
<싸우자
귀신아>의 주혜성은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역할이란 점에서 중요하다.
지금껏 드라마에서 보여주지 못한 얼굴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된다. 초반에는 반듯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이지만 중반부부터는 전혀 다른 인상일 거다. 게다가 <식샤를 합시다2>(이하, <식샤2>)로 만난 박준화 감독님의 작품이라 주저 없이
선택했다.
전후반부에
다른 성향을 드러내는 인물이니 두 사람을 연기하는 느낌일지도.
시험에 드는 순간들이 있지 않나.
지갑을 주웠을 때, 주인을 찾아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 자체가 본래 두 얼굴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이해를 바탕에 두고 있다.
시험에
들었다고 생각한 순간이 있나?
배우로서 열정적으로 활동하지 못했던 시기? 물론 큰 시험까진 아니었고, 쪽지시험 정도? (웃음) 다만 내 인생을 흔들만한 순간까진 아니었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이겨내고자 노력해왔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라고 느꼈던 건 언제인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사이에 하고 싶은 것들을 많이 못했다. 그 당시엔 괴로웠지만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버텼다.
하고
싶었던 것들이란?
배우로서 하고 싶은 역할이나 작품을 하지 못할 때 자괴감이 들고, 지치더라. 배우라면 누구나 이런 시기를 지나왔겠지. 결국 기다림과 싸워온 시기를 어떤 에너지로 승화시킬 수 있는가라는 마인드가 중요한 것 같다.
Q 부잣집
출신이나 지적인 캐릭터를 자주 맡았는데.
A 드라마에선 그랬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에선 다양한 이미지를 확장해왔다. <잉투기>의 백수 캐릭터나 <피에타>에서 연기한 애달픈 아이 아빠를 비롯해 <명량>이나 <사냥>에서도
모두 다른 인상을 찾았다. 자칫하면 고정될 수 있는 이미지에서 벗어날 기회를 스스로 찾고 싶었다.
Q <잉투기>에서도 부잣집 아들로 출연했지만 유복한 환경에서 빗나가는 캐릭터를 연기하며 배우에 대한 편견을 배반하는
쾌감이 있었다. 배우로서도 즐거운 작업 아니었나?
A 기본적으로 청개구리 기질이 있는 거 같다. '저렇게 생긴 친구가 욕도 잘하고 거침 없구나'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TV 드라마에선 그런 기회를 얻기가 어렵지만 영화에선 가능성이 종종 열린다.
그런데 요즘은 드라마에서도 다양한 얼굴을 찾는 추세이고, 장르적 시도도 활발해서 배우로선
좋은 시기인 거 같다.
Q 6월 29일에 개봉하는 <사냥>에선
비열한 역할을 맡았다데.
A 어린 나이지만 돈줄을 쥔 덕분에 무례하고 건방지게 구는 캐릭터다. 그런데 산속에서 뜻하지 않은 상황을 맞닥뜨리고 생존이 우선시된 상황에서 나약한 내면을 드러내다가 점차 바닥에
있던 본성을 끌어올리는 인물이다.
Q <사냥>과 <싸우자 귀신아>에선
전후의 변화가 있는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A <싸우자 귀신아>는
본인의 의지와 무관한 악을 받아들이는 개념에 가깝지만 <사냥>에선
욕망에 눈이 멀어 자신의 본성을 끌어내 밀고 나간다. <사냥>은
캐릭터의 변화 전후 온도가 비슷하다면 <싸우자 귀신아>는
판이하다는 차이가 있다.
Q <사냥>은 산 속에서 촬영했는데 힘들지 않았나?
A 남자들끼리 모여있다 보니 유치하게 놀게 됐다. 이를 테면 '돌 멀리 던지기'나
'돌로 나무 맞추기' 같은.
이런 소소한 낙으로 힘든 상황을 이겨냈다. 그러다가도 작품에 대해 얘기하면 진지해지고, 그런 상황이 재미있었다.
Q 제작보고회에서
조진웅 씨가 권율 씨 덕분에 많이 웃었다고 하더라.
A 현장 특성상 산에서 어울리는 시간이 많다 보니 배우 선배들과 내외할
정도로 친해졌다. 아무래도 막내 군번이다 보니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했고, 그런 게 좋아 보였나 보다.
Q 현장의
분위기에 많이 좌우되는 편인가?
A 현장이 무조건 밝고 행복한 분위기여야 하는 건 아니다. 배우가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가 중요하지. <명량>에선 힘든 지점도 많았고, 대선배들과 연기하는 부담도 컸지만
선배님들이 그런 부담을 이겨내도록 응원해주시고, 힘을 주셨다. 결국
혼자만의 작업이 아닌 거다.
중대
연극학과 출신이다.
고3때부터 준비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까?
드라마틱한 계기가 있는 건 아니다. 어릴 땐 연출자가 되고 싶었는데 PD가 되려면 신방과에 가야 한다고
하길래 신방과를 생각했지만 성적이 좋아야 된다고 해서. (웃음) 결국
연극영화과를 생각했고 언제부턴가 진로상담을 할 때 자연스럽게 장래희망을 배우라고 말했다.
결국
연극학과에 가서 배우라는 길에 확신하게 됐나?
현실로 확 다가오더라. 전쟁터
앞으로 내몰린 느낌이랄까. 입학하자마자 배우로 활동하는 친구도 있고,
유명해진 애들도 있고. 심지어 후배인데도. 그런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내가 너무 느긋한 건가 고민하게 됐다. 하지만 충분한 실력을 쌓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그래서 20대 초반에 매니지먼트 제안을 거절했나?
일단 겁이 났다. 명확하게
길을 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결정을 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고. 그래서 거리를 두게 됐다.
그
결정을 후회하진 않았나?
안 했다. 좋은 사람을
만나 더 좋은 배우로 성장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엔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고 준비가 필요했던 게 맞다.
자책처럼
들린다.
자책도 하지만, 복기를
많이 한다. 지난 상황을 복기하면서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편이다. 완벽해질 수 없는 걸 아니까 최대한 해보려고 채찍질하는 셈이다. 다만
그런 고민에 매몰되기 전에 버릴 건 빨리 버리고 할 수 있는 걸 판단하려 한다.
외모도
배우에겐 재능이란 점에서 잘 생겼다는 건 분명한 장점이다.
장점이라면 이미지에 부합하는 캐릭터가 있다는 것 정도? 하지만 너무 잘생긴 배우도 많고, 외모에 자신감이 넘치는 것도 아니다. 잘생긴 내면과 연기력을 갖고 싶다.
로맨스물의
주인공에 어울려 보이는 외모랄까.
아무래도 <식샤2>의 삼각관계 로맨스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졌으니까. 일일드라마 <천상여자>에서도 자상한 남자였고, <한번 더 해피엔딩>에서도 로맨스가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쉽게 연상되겠지.
혹시
외모에 대한 불만은 있을까?
배우라면 다들 있지 않을까? 내게
없는 이미지를 갖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한때는 콤플렉스도 있었는데 요즘은 내가 가진 것을
감사하게 여기고 그걸 더 깊게 풀어내는 고민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식샤2>에선 미식의 'ㅁ'자도
모르는 남자였는데, 실제론?
맛있는 거 싫어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특별히 찾아 다니며 먹는 편은
아니다. 입이 짧다면 짧은 편인데 맛보다는 상황이 중요한 거 같다. 김밥
한 줄을 먹어도 다 함께 어우러져서 먹는 게 좋다.
혼자
밥 먹는 건 어렵지 않나?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하셔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혼자 먹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하지만 혼자 먹는데 무덤덤하기도 하다. 단순히 끼니를 때우는 거니까. 다만 그걸 외롭다고 생각하면 너무
힘든 일이고, 그냥 어쩔 수 없이 주어지는 삶이니까 그러려니 해야지.
<최악의 하루>에서 신인배우 역할로 등장하면서 주변을 의식하는 연기가 재미있었다. 실제로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을 텐데 그런 게 부럽던 시절도 있었을 거다.
아무래도 부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지. 하지만 일희일비하고 싶진 않다. 누가 알아보는 게 배우로서 중요한
건 아니니까. 유명세가 좋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부담스러울 수도 있고.
자연스럽게 감당할 상황이 되면 감당하는 거고.
본명인
권세인으로 활동하다 <피에타>에 출연할 때부터
권율이란 예명을 썼다.
세인이란 이름도 예쁘지만 힘이 있는 이름을 선택하고 싶었다. '법 율'자를 썼는데 이름을 받고 보니 힘을 주는 이름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유명한 이름이었다.
그래서 책임감을 갖고 최선을 다하자는 다짐을 하게 됐다. 게다가 진짜 권율 장군의 후손이니까 그 이름에 누가 되진 않아야지. (웃음)
정유정은 끊임없이 악에 주목했다. 그러다 비로소 악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그렇게 <종의 기원>을 관통한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새로운 문장을
떠올리고 있다.
히말라야를
다녀와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이란 에세이를
썼다.
<28>을 마치고 슬럼프가 와서 1년을 쉬었는데 어차피 1인칭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으니 에세이를 쓰면
예행연습이 될 거 같아 히말라야에 갔다. 그렇게 에세이 초고를 써서 돌아오자마자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났다. 순례길이 시작되는 프랑스길에서 산티아고까지 800km를 걸었고, 스페인 땅끝마을이라 불리는 피니스테라라는 마을까지 180km를 더
걸었다. 그렇게 980km를 걸으며 40일 동안 <종의 기원>을
구상했다.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면 사람들과 어울릴까 봐 동네 호텔을 전전하며 혼자 지내다 왔다.
악인을
묘사한 전작들과 달리 <종의 기원>에선 악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한 차원 다른 각오가 필요했을 것 같다.
작품을 발표하면 찬사도, 비난도
모두 작가 몫이다. 조롱거리가 될 수 있다는 압박을 견디고, 내
문장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게 두려웠다. 마지막까지 나를
짓누르더라. 하지만 그런 압박을 견디지 못하면 펜을 꺾어야 한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견뎌낸 내 자신이 대견하다.
전작들과
달리 1인칭 시점의 화자만이 등장한다. 시점이 간결해졌다.
하지만 초고는 복잡하게 나왔다.
덕분에 주인공이 완전히 죽더라. 유진이가 독자를 꼬드기며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는데 내가
끌고 간 거다. 그래서 복잡한 설정을 다 걷어냈다. 유진이를
뺀 나머지 캐릭터는 모두 병풍처럼 만들었다. 유진이의 인기를 빼앗아갈 수 있는 건 전부 감춰버렸다.
거의
모든 사건이 복층 구조의 집 안에서 벌어진다. 전작에 비해 동선도 현저히 작다.
2박3일 동안 주인공의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하니 이야기를 최소화시켜야 했다. 최소한의 인물과 최소한의 공간,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했다. 도입부부터 100페이지 가량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거실에서만 오간 것도 그래서였다.
초반부에선
행위의 진전 없이 동어반복적인 심리만 묘사되니 질식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초반부는 쓰는 것도 힘들었다. 동어반복적으로
자신에게 묻고 또 묻는 과정이 나오는데 사실 싸이코패스는 이런 식으로 갈등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진이는
엘리트고, 교육을 통해 본성을 억압한 부분이 있으니 이 정도 고민이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한편으론 독자들이 앞을 가늠할 수 없도록 묘사한 탓일지도 모른다. 주인공과
동등한 위치에서 상황을 인식하도록 서술해서 독자들은 빨리 뒷장을 넘기고 싶었을 거다.
어떤
경우엔 싸이코패스의 악함을 그리는데 망설인다는 인상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학습된 윤리적 관념이 의외로 강고해서 싸이코패스를
다루는데 충돌이 생겼지. 목에 칼을 넣어보는 장면은 퇴고 과정에서 다섯 번 정도 지웠다가 살렸다. 필요한 묘사라는 걸 알지만 막상 내 윤리적 기준에선 과하게 느껴진 거다. 결국
도덕적 기준을 버리고 싸이코패스의 관점에서 합리적인 기준을 찾고자 애썼다. 그러다 12월쯤에는 처음으로 달리듯이 써내려 갔고 4월까지 미친 사람처럼
달렸다. 그제서야 제대로 되는 기분을 느꼈다.
가족
관계 안에서의 갈등을 방아쇠 삼아 사건을 격발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뭔가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사람을 찾다 보면 결국 가족밖에 남지
않는다. 타인을 위해 나 자신을 던지긴 힘들지만 엄마나 아빠는 자식을 위해 모든 걸 던진다. 결국 가족간의 사랑, 애정에서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끌어낼 수
있다. 한편으로 가족은 가장 믿을 만한 아군이면서도 내 인생을 지옥으로 만드는 최고의 적이기도 하다. 그만큼 가족에게서 파생될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전작에
비하면 여성 캐릭터의 비율이 확실히 높아졌다.
원래 여성 캐릭터를 못 만들었다.
<7년의 밤>의 강은주를 만들 때도 애를 먹었는데 <종의 기원>에서 엄마나 이모를 그리면서 자신감이 붙었다. 처음엔 아빠를 등장시킬까 했는데 그림이 안 나오더라. 엄마여야 끈끈한
감정이 전해질 거 같았다. 그래서 엄마를 잘 그릴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유진이에게 몰입하면서 엄마의
입장이 정리됐다.
정말
엄마라서 그랬던 건 아닐까?
돌아가신 엄마가 ‘타이거맘’이었다. 엄마 앞에서 ‘못해요, 힘들어요’라고 하면 한대 더 맞았다. (웃음) 나를 강하게 키우려고 노력하셨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갈등도 많이 하고
섬세했지만 나한테만 그랬다. 유진이 엄마도 여장부는 아니지만 유진이는 끝장나게 압박한다. 결국 내가 보고 자란 엄마 덕분이다.
실제로
본인은 어떤 엄마일까?
아들은 자유방임형으로 키웠다. 아들이
일본 오사카로 유학을 가서 3년을 살았는데 한번을 안 갔다가 <종의
기원> 초고 쓸 때 처음으로 가서 밥을 해줬다. 하고
싶다는 대로 키웠다.
엄마가
되니 엄마가 이해되던가?
엄마는 나를 의대에 보내고 싶어했고 기어코 기어코 간호대라도 보냈다. 숨이 막혔다. 내 인생을 꽉 틀어쥐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내가 비뚤어지지 않은 건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려도 그건 보인다. 나를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 소설을 늦게 쓴 것도 엄마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이른 나이에 소설을 썼다면 간호사 시절이나 직장 생활의 경험이 없었을 테니 어떤 소설을 썼을지
모르겠다. 운명이라는 게 참 재미있다.
간호사
시절이 지금의 작가관을 만드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신경외과 중환자실에서 일했기 때문에 수많은 죽음을 봤다. 간호사들은 그런 죽음에 휘둘리지 않고자 애를 쓴다. 상처를 받으면
힘드니까. 하지만 내가 본 숱한 죽음들이 내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심지어 엄마도 내가 스물다섯 살 때 근무하던 중환자실에서 돌아가셨다. 간호사
생활 이후 이어진 심사평가원에서의 직장 생활도 소설을 쓰는 토양이 됐다. 그리고 간호학을 공부하며 생물학이나
해부학을 공부한 덕분에 신체적인 묘사가 가능하다는 장점도 얻었다. 작가로서 수고를 던 셈이다. (웃음)
아무래도 <종의 기원>은 세상으로 숨어들어온 악의 여운을 남긴다는
점에서 흉흉한 요즘의 세태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소설이 세상을 바꿀 순 없겠지만 세상의 불길한 징후를 보여줄 순
있다고 생각한다. <종의 기원>을 발표하고 시화호에
시체를 유기한 범인이 잡혔는데 소설 속 군도신도시가 시화호와 송도 신도시를 더한 가상도시라 조금 놀랐다. 살인을
저지른 범인의 얼굴에서 살인범보단 이웃집 청년 같은 인상을 느꼈다. <종의 기원>은 우리 주변에 악이 존재할 수 있단 여운을 남기는데 그런 사건이 발생해서 개인적으론 흥미롭게 생각했다.
영화
제목이 언급되는 작품이 많다. 이번에도 <시티 오브
갓>이나 <버킷 리스트>가 등장한다. 영화를 좋아하는 거 같다.
운이 좋은지 소설과 어울리는 영화가 곧잘 떠오른다. <시티 오브 갓>에서 뻐드렁니를 내놓고 깔깔대며 총질을
해서 사람들을 죽이는 꼬마가 나온다. 나는 그 모습이 웃겨서 웃었는데 옆에선 질색하더라. 화면에서 유혈이 낭자하게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나만 웃으니까 반응이 어긋난 거지. 그걸 싸이코패스의 단서로 인용했다. 물론 나는 싸이코패스가 아니지만. (웃음) 그런데 영화를 정말 좋아하지만 보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유는?
시각적인 정보는 깡패다. 그대로
주입돼서 잊혀지질 않는다. 만약 영화에서 갇힌 방에서 탈출하는 장면을 본다면 나중에 그런 장면을 쓸
때 그 이상의 묘사를 떠올리기 어렵다. 그러니 안 보는 게 상책이다.
극복하기 힘드니까.
자신의
평소 습관을 가져다 쓴 부분이 많은 거 같다.
싸이코패스에게도 습관이 있을 텐데 타인에게 빌려 묘사하는 데엔
한계가 있으니 내 것을 가져다 쓰게 된다. 유진이가 거짓말을 잘한다고 수없이 말하는데 생각해보면 나도
어릴 때 어머니한테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잘했다. 결국 소설은 작가를 벗어나지 못한다.
<종의
기원>은 끔찍한 여운이 남는 결말까지 악으로 그득한 작품이다.
트위터에서 이런 글을 봤다. 나홍진과
정유정 좀 만나게 해달라고. (웃음) 정말 끝까지 내몰긴
했지. 그리고 탁월한 악인을 그렸다기 보단 악의 존재를 정면으로 들여다 본 셈이다. 그러니 노망이 나지 않는 이상 싸이코패스를 주인공으로 둔 소설은 쓰지 않을 거다. (웃음) 다만 사회적인 악에 관해선 할말이 많이 남았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려는 행동이 악이라고 보는데 그런 관점에서 사회적인 악인은 언제든 튀어나올 거다.
<종의
기원>을 쓰면서 애를 먹은 만큼 끝나고 나니 후련하지 않았을까.
기가 드센 소설이라 감당하기 어려웠고, 유진이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하면 어떡할까 두려웠는데 소설을 탈고한 다음날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너무 큰 충격이 오니까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오게 됐다. 건강검진을
하러 2박3일 정도 병원에 입원했는데 느닷없이 밤중에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 한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실감나질 않는다.
<내
심장을 쏴라>와 <7년의 밤> 사이에 작가로서의 기질이 달라졌다. 언젠가 또 다른 전환점이
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올해가 등단 9년차인데
문인들은 보통 등단 10년차까지 신인이라고 본다. 결국 내년이면
신인에서 벗어나는 셈이니 프로로서 원숙한 세계를 보여줘야 한다. <종의 기원>은 신인으로서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고, 악인으로선 극단까지 그려봤으니
하나의 매듭을 지었다고 본다. 내 소설의 테마는 인간의 본성이라 할 수 있는데 인간의 본성엔 악만 있는
게 아니니까 아마 다른 형태의 인간 본성을 그릴지도 모르겠다.
혹시
차기작으로 구상한 이야기가 있나?
재난 소설로 구상하고 있다. 아마
사회나 국가가 개인을 망가뜨리는 상황을 그릴 거 같다. <28>이 자연재해를 다뤘다면 차기작은
인재를 다룬 이야기일 거다.
스케일이
큰 작품이겠다.
소설을 쓰려면 형식을 장악해야 하는데 아직 장악하지 못해서 요즘엔
생각이 많다. 이야기와 개요는 머리 속에 있는데 이 이야기가 어떻게 자리잡고 전개될지 고민 중이다. 아마 내 소설 중에선 최초로 판타지적인 설정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곡성>과 <아가씨>는
중력 같은 영화들이다. 근래 한국영화를 두고 논할 때 좀처럼 발음되지 않았던 언어가 두 영화 주변으로
시끄럽게 모여들었다.
지난 5월 11일에 개최된
칸국제영화제에서 <아가씨>는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곡성>은 비경쟁부문에 초청됐다. <아가씨>는 박찬욱 감독이 미국으로 건너가 완성한 <스토커> 이후 3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이었다. 국내에서 제작된 작품으로선 <박쥐> 이후로 7년만이었다.
<곡성> 역시 나홍진 감독이 <황해> 이후로 6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었다. 두 작품 모두 개봉 전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예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불어오고 있었다. <곡성>은 5월 11일에 개봉했다. 한
달여 만에 600만 관객을 끌어들였다. <아가씨>는 6월 1일에 개봉했다. 2주 만에 300만 관객을 끌어들였다. 흥행작이 됐다. 그리고 여느 흥행작처럼 수많은 감상이 올라왔다. 그런데 근래 여느 흥행작들과는 다른 느낌의 감상들이 쏟아졌다.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넘어서 영화에 대한 해석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영화적 의도에 관한 논쟁이 뜨겁게 오간다. 관객의 시점에서 영화를 평가하기 보단 감독의 시점을 유추해내려는 노력이 두드러진다. 객석보단 스크린 너머에 주도권이 놓인 인상이다.
<곡성>은 감각을
마비시키는 작품이다. 영화를 본 대부분의 관객들은 시속 150km로
날아오는 폭투를 피한 것처럼 넋이 나간 기분으로 상영관을 나왔을 것이다. 너무 세게 맞아서 통증보다
얼얼함이 느껴지는 듯한, 그래서 뒤늦게 깨어난 감각과 함께 살아나는 통증의 정체를 알고 싶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아졌을 거다. <아가씨>는 민감한 소재를 도발적으로 다루면서도 감각을 예민하게 일깨우는 작품이다.
어떤 이는 몸을 휘감고 지나가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고, 어떤 이는 자신의 욕망을 발가벗기고
조롱 당한 듯한 불쾌함과 직면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지지 여부를 사이에 둔, 언어의 전선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두 영화를 둘러싼 언어의
온도는 각기 다르다. 하지만 두 영화가 어떤 식으로든 존중 받고 있다는 건 명확하다. 찬사와 비판 모두 영화의 의도 안에서 이뤄진다. '재미있다' 혹은 '재미없다'는 이분법적인
감상을 넘어 영화적인 의도 자체를 중심에 둔 해석과 논쟁이 야기된다는 건 결국 두 영화가 지닌 '영화적인
힘' 자체를 인정 받았음을 의미한다.
근 몇 년 사이 한국영화는 일정한 억양으로만 발음됐다. 영화에 대한
완성도를 논하는 억양은 여전하지만 영화를 해석하고, 지지하고, 영화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억양은 힘을 잃었다. 소위 말해 '때깔'이 좋은 영화들은 많아졌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별다르게 하고 싶은 말이 없어졌다. 영화들이 너무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최고의 화제작이자 흥행작이었던 <암살>과 <베테랑>을 봐도 그렇다. 두 작품은 우리가 짊어진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사회를 관통하는 수작이다. 보고 나면 우리가 지금 시대에 던져야 할 말에 대해 깨닫게 되는 쾌감이 있다. 하지만 결국 언어도 그 쾌감에 갇힌다. 두 영화가 지닌 영화적 문법을
설명하거나 두 영화가 관통하는 화두의 배경 지식과 사회 분위기를 살필 순 있지만 두 영화를 통해 무언가를 상상하긴 어렵다. 물론 이는 <암살>과 <베테랑>을 저평가하기 위해 동원된 언어가 아니다. 다만 최근의 한국영화 대부분이 그런 장르적 쾌감과 형태적 완성도 그리고 이야기의 완결성에 사로잡혀 무언가를
자꾸 잊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말이다. 형식적으론 꽉 차 있지만 상상하게 만드는 재미가 현저하게 줄어든
인상이랄까. 또 다른 화제작이었던 <내부자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에 대한 호감은 있지만 영화 이상의
호기심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저 이 세계가 돌아가는 부조리한 함수를 상영관에서 확인하고 사회적인 불만과
분노를 대신 일갈하고 때려눕혀준 영화에 대한 대리만족적인 쾌감만 되새김질될 뿐이다.
그런 면에서 나홍진의 <곡성>과
박찬욱의 <아가씨>는 한국영화가, 그리고 한국영화를 본 관객들이 잃어버린 언어를 실감하게 만든다. 인간의
내면적인 호기심을 직설적으로 강타하고, 기이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세계의 은유를 통해 호기심의 외연을
키워낸다. 상영관을 벗어난 순간 맺힌 감상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털어내 버리기 보단 들여다 보고 싶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영화
신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나홍진과 한국영화 신에 지속적인 흥미를 부추기는 박찬욱을 통해 환기된 영화를 향한 언어들은 보다 소중하다.
본래 영화는 보는 재미만큼이나 말하는 재미가 쏠쏠한 매체다. 대중문화의
카테고리 안에 놓인 어떤 매체보다도 말의 힘이 강력하다. 그래서 영화에 관한 리뷰는 플랫폼의 형태와
무관하게 끊임없이 소비된다. 대중문화의 카테고리 안에 놓인 여느 매체보다도 언어로 재생산되는 비율이
현저하고, 관련 커뮤니티도 발달돼 있다. 대중문화 안에서
가장 활발하게 소비되는 매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든 영화를 동일한 가격에 볼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른다는 건 결과적으로 기회비용이 따르는 선택이다. 영화에 대한 말을 듣는다는 건 더 좋은 영화를 소비하겠다는 욕망과 깊게 연관돼 있다. 결국 영화를 말한다는 건 우리가 더 나은 영화를 볼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언어들은 우리가 흥미롭게 여기는 감독들과 작가들의 자궁 노릇을 했다. 영화를 말한다는 건 결국 흥미로운 영화를 볼 수 있는 문턱으로 한 걸음 다가가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한 기회다.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에서도 최초다.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은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이는 한강 홀로 쌓은 탑이 아니다. 그렇다고
한국이 거들었다는 말은 아니다.
지난 5월 17일 <채식주의자>의 작가 한강이 맨부커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단언컨대 한반도에서 맨부커상의 존재 자체를 아는 한국인은 출판 관계자를 제외한다면 굉장히
드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강의 맨부커상이 전국적인 화제가 된 건 이 상이 정말 대단한 상이라는
것을 각인시키는 언론의 헌신적인 보도 덕분이었다. 그 어느 나라보다도 노벨상을 염원하는 한국인들에게
맨부커상이 노벨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에 꼽히는 것이라고 주지되는 순간 한강은 이미 메시아 같은
존재가 됐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문장이니라. 그런데
말입니다. 한강은 어떻게 맨부커상을 수상했을까?
한강이 수상한 맨부커상은 본래 영국의 연방국가에서 출판된 영어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상이었다. 한강이 수상한 부문은 2005년에 신설된 인터내셔널 부문인데 영국의
비연방국가에서 출판된 소설을 영어로 번역한 소설을 후보작으로 선정하고 수상작을 가린다. 그러니까 <채식주의자>를 영어로 변역한 <The Vegetarian>이 맨부커상을 수상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의미다. 그리고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은 원작자와 번역자가 모두 수상자로 호명된다.
소설을 번역한다는 것을 그저 언어의 형태를 바꾸는 수준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언어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는 결과물로서 원작을 집필하는
것과 동등한 위치에 두고 평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국의 정서를 자국의 언어로 이해시키는 작업이란
점에서 번역된 소설은 제2의 창작에 가깝다. 맨부커상은 그
가치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더욱 값지다.
사실 맨부커상을 수상하거나 말거나, 한강은 이미 뛰어난 작가였다. 그래서 한강에게 몰리는 찬사란 새삼스럽지만 이처럼 훌륭한 작가를 제대로 조명할 기회가 왔다는 건 분명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마음이 걸리는 건 열광의 기저에 놓인 어떤 심리들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는
2007년 10월 30일에 발표된 소설이다. 출간 당시엔 그 주의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 20위권에도 들지 못했다. 출판사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맨부커상 수상 직전까지 8년 7개월 동안 대략 6만권의 책이 팔렸다고 한다. 3월에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 타전된 이후 4만부
이상이 판매됐으니 실질적으로 맨부커상과는 무관한 판매량은 2만권 정도인 셈이다. 해외에서 상을 타기 전후의 상황이 극명하게 갈린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인의 하루 독서시간은 6분에 불과하다. 정말 이상한
일 아닌가. 이처럼 소설을 읽지 않는 나라에서 매년마다 한국인 작가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를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물론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이 한국 문학계에 새로운 활기가 될 수 있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다. 최근 신작소설 <종의 기원>을
발표한 작가 정유정을 인터뷰로 만났을 때 그녀는 이와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문학으론 변방국가나
다름 없는데 한강 작가가 기회를 열어준 셈이니 박수를 쳐주고 싶다. 아마 작가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거다." 그러니까 <채식주의자>의 맨부커상 수상이 해외에 번역돼 있는 한국소설을 주목하게 만들거나 한국소설을 번역하고자 하는 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강 작가 덕분에 독자들이 소설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는 정유정의 말 역시 유효하다. 최근 서점가에선 전년 대비
소설의 판매량이 급증했다. 소설에 대한 관심이 소설을 읽는 행위로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얼마나 긴 지구력을 안고 달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누군가가
어느 대단한 상을 수상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한국이 국제적으로 문학계의
변방국가로 분류된다는 것보다도 한국 안에서 문학 자체가 변방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일 것이다.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을 누고 한 신문에선 '맨부커상이 K픽션의 문을 열었다'는 헤드라인을 내걸었다. 언제부턴가 한국사회에선 모든 분야의 앞머리에 K라는 성씨를 붙이면
해외진출이 가능하다는 미신이 생긴 것 같다. 혹은 이뤄졌다는 착시를 느끼는 것 같다. 어느 개인의 노력으로 차린 밥상에 숟가락만 얻겠다는 심리가 읽힌다. 사실
K픽션은 한국에서도, 영국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생소한 말이다. 데보라 스미스는 '소주'나 '만화'를 '코리안 보드카'나 '코리안 망가'로 표현하자는
편집자의 제안을 거절하며 이렇게 설득했다고 한다. "한 국가의 문화를 다른 국가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고 싶지 않다." 이 대목에서 ‘K픽션’은 소주를 코리안 보드카라고 명명하는 행위와 유사하게 보이지 않는가? 실체가
없는 K픽션은 과연 한국문학을 대변하는 언어가 될 수 있을까? 영국소설을 E픽션이라고 부른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럴 리가.
어쨌든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은 대단한 성취다. 게다가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최초의 수상자라는 점에서도 이는 분명 대단한 사건이다. 무엇보다도 맨부커상 수상이 <채식주의자>뿐만 아니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삼은 한강의 또 다른 수작 소설 <소년이 온다>를 더불어 주목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도 바람직하다. 한강이
맨부커상을 수상한 날은 5월 17일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수상소감을 이렇게 시작했다. "깊이 잠든
한국에 감사 드린다." 그리고 다음날 잠에서 깬 한국에서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 소식을 전하는
어느 뉴스의 헤드라인은 이랬다. "한국 문학의 쾌거."
그렇게 한국은 한강이 차린 밥상에 숟가락을 얻게 됐다. 진정한 한강의 기적이다.
조각 같은 외모와 근육질 몸매를 지닌 헨리 카빌은 갈 수 있는 길에서 최선을 다해왔다. 그렇게 슈퍼맨이 돼서 날 수 있었지만 걷는 법을 잊지 않기 위해 역시 최선을 다하고 있다.
헨리 카빌은 정말 잘 생겼다. 만약 지금이 고대 그리스 시대나 로마
시대였다면 많은 시간이 지나 훗날 지금의 시대가 됐을 때 미술 입시 학원에서 헨리 카빌의 얼굴을 본뜬 흉상을 두고 데생 연습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헨리 카빌의 학창 시절 별명이 ‘뚱보 카빌’이었다는 게 짐작이나 되는가. “아이들은 항상 짓궂게 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관점을 갖게 해줘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
이 남자, 관대하다.
하지만 신은 헨리 카빌에게 관대할 생각이 없었나 보다. 브라이언 싱어가
연출한 <슈퍼맨 리턴즈>(2006)의 슈퍼맨 역으로
오디션을 봤지만 슈퍼맨 역에 낙점된 건 브랜든 라우스였다. 물론 이 작품이 혹평에 시달리며 흥행에 고전했던
걸 생각한다면 전화위복일지도 모르겠지만. 한편 <007 카지노
로얄>(2006)에 출연해 제임스 본드가 될 수도 있었다. 감독이었던
마틴 캠벨까지도 그가 제임스 본드를 맡는 것을 지지하며 스크린 테스트까지 진행했지만 영화사에선 조금 더 나이 든 제임스 본드를 원했고 결국 다니엘
크레이그를 선택했다. 반대로 나이가 많아서 출연이 불발되기도 했다.
<트와일라잇>(2008)의 원작자 스테파니 메이어는 <몬테 크리스토 백작>(2002)의 카빌을 보고 에드워드
컬렌 역에 적격이라 생각하며 그에게 역할을 주길 원했다. 하지만 결국
17세 역할을 맡기엔 너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캐스팅 선상에서 제외됐다. 그리고 이미
잘 알려진 대로 기회는 로버트 패틴슨의 것이었다. 카빌은 <해리포터: 불의 잔>(2005)에서도 로버트 패틴슨에게 기회를 내준 적이
있었다. <배트맨 비긴스>(2005)의 배트맨
역으로 거론됐던 건 오디션을 본 것도 아니었으니 앞선 사례들에 비하면 아쉬울 일도 아닐 정도다.
물론 그가 대단한 기회를 상실하면서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카빌에게
유명세를 안긴 건 영국의 문제적 왕이었던 헨리 8세를 다룬 TV시리즈 <튜더스>였다. 헨리 8세와 가까운 사이로서 그의 종잡을 수 없는 행적을 보좌한 찰스 브랜던을 연기한 카빌은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죽음을
맞이한 탓에 오랫동안 캐릭터의 명운을 지키기 힘들었던 이 시리즈가 시즌 4까지 진행되는 2007년부터 2010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남은 희귀한 인물로 등장했다. 그만큼 카빌의 인지도도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인상적인 역할은
아니었지만 매튜 본 감독의 판타지 로맨스물인 <스타더스트>(2007)와
우디 앨런의 코미디물인 <왓에버 웍스>(2009)에
출연하며 할리우드에서 경력을 쌓아나가던 카빌은 마침내 첫 번째 주연작을 얻게 된다.
그리스 신화를 배경에 둔 블록버스터 <신들의 전쟁>(2011)에서 신이 간택한 영웅 테세우스 역을 맡게 된 카빌은 특별한 주문을 받게 된다. 식스팩도 아닌 에잇팩을 만들 것. 금빛으로 반짝이는 화려한 의상과
미장센이 넘실거리는 영화적 분위기와 달리 시종일관 윗옷을 입지 않고 상체를 드러내는 신이 많은 작품에서 그의 몸은 단단한 근육으로 무장한 갑옷과도
같은 역할을 해야만 했다. 결국 체지방 6%대의 조각과도
같은 육체로 거듭난 그는 격렬한 액션신을 소화해 냈지만 심각한 혹평에 시달리며 기대 이하의 반응을 경험해야 했다.
게다가 이듬해에 공개된 액션 스릴러물 <콜드 라잇 오브 데이>(2012)에선 브루스 윌리스와 시고니 위버라는 쟁쟁한 베테랑 배우들과 함께 출연하며 기대를 모았음에도
신랄한 혹평에 시달리며 대중적으로도 좋은 반응을 얻기 어려웠다. 심지어 세계적인 평점사이트로 신선한
토마토와 썩은 토마토로 평점을 매기는 로튼토마토닷컴에선 신선도 5%를 기록하는 수모를 얻게 됐다. 하지만 다행인 건 이 작품들 이후로 카빌에게 큰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2011년, 카빌은 비로소
자신을 각인시킬 수 있는 역할을 제안하는 서류에 사인을 하게 된다. 과거 슈퍼맨이 되고자 했던 카빌은
결국 새로운 슈퍼맨 수트의 주인공으로 낙점됐다. 새로운 슈퍼맨 시리즈이자 DC 코믹스 세계관을 격발하는 첫 번째 실탄이라 할 수 있는 <맨
오브 스틸>(2013)에서 슈퍼맨을 연기하게 된 것이다. “슈퍼히어로의
신전에서 슈퍼맨은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언제나 존경 받는 캐릭터였다. 그가 빅스크린으로 복귀하는 과정의
일부가 될 수 있다니 영광스럽다.”
카빌의 말처럼 영화가 공개되기 전부터 영화화되는 슈퍼맨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지대했고 그 관심은 자연스럽게 카빌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카빌은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 “나는 슈퍼맨이다”라는 주문을 외우며 최선을 다해 역할에 몰두했다. 무엇보다도 신체적으로 슈퍼맨에 걸맞은 체형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흐트러짐이 없도록 만전을 기했다. 그건 단순히 캐릭터에 어울리는 육체적 조건을 만드는 것 이상의 작업이었다. “만약
내가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활보하면 사람들은 슈퍼맨이라 생각하며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책임감이 있다.”
사실 이런 책임감은 지나친 몰입이거나 과한 발상이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슈퍼맨과 같은 세기적인 아이콘을 연기한다는 건 결국 슈퍼히어로의 코스튬 이상의 상징성을 입게 되는 것이다.
<맨 오브 스틸>과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2016)으로 두 번에
걸쳐 슈퍼맨을 연기한 카빌은 새로운 시대의 슈퍼맨으로서 완전히 각인됐다. 마블의 <어벤져스> 격인 DC의 <저스티스 리그>를 영화화한 두 편의 작품도 예정돼 있다. 그만큼 슈퍼맨에 걸맞은 육체를 유지하고 그 이미지를 수호하는 건 프로다운 행위이자 각오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만 작품이 세간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가라는 문제는 배우가 책임질 수 없는 지점이니 배우로서
노력할 수밖에.
물론 카빌이 슈퍼맨 수트만 입는 배우는 아니다. 그가 슈퍼맨으로 분한
두 작품 사이에 공개된 영화 <맨 프롬 엉클>(2015)에선
섹시하면서도 능청스러운 스파이로서의 매력을 발산한 것을 보면 카빌의 야심이 단순히 빨간 망토를 두른 슈퍼히어로에 국한돼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많은 관객들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에 제작자들이 고용하길 원하는 이름 중 하나가
되길 바란다.” 카빌의 말이 단순히 대중에게 인기를 끄는 상업적인 배우가 되길 바란다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대중을
만족시킬 수 있는 연기를 통해 상업성을 인정 받을 수 있는 배우가 되길 원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그리고
올해엔 보다 현실적인 인물로서 스크린에 등장할 예정이다. 그는 이라크 배경의 전쟁드라마인 <샌드 캐슬>(2016)에서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군인으로서
두 발을 땅에 딛고 싸울 예정이다. 카빌에게 슈퍼맨이란 자신이 맡은 하나의 책임감일 뿐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질 수많은 책임감을 위해 마음을 비우고 있다. “할리우드엔
나보다 멋진 사람들과 나보다 나은 배우들이 있다. 나는 그저 그들을 따라잡으며 능가하는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심각하지도, 지나치게 낙천적이지도 않은 진지함, 헨리 카빌의 가능성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