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된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두려운 일이다. 가족을 위한 책임감은
무겁고, 세상의 풍파는 버겁지만 가족 앞에선 강인해야 한다. 그래서
아버지들은 끊임없이 휘청거리고 흔들린다. 그럼에도 아버지로서 한 걸음씩 나아간다. 그렇게 아버지는 성장한다. 그런 성장통을 겪는 아버지들에 관한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능력 있는 아버지는 부족함 없이
아들을 키웠다.아이는
건강했고,집안은
화목했으며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런데아이의 여섯 살 생일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아이가 태어났던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고,병원 관계자로부터 믿을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병원에서 아이가 바뀌었다고. 거짓말 같았지만
참말이었다.아들과
함께 했던 지난6년간의 삶이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 된 마당에서 아버지는 기로에 선다. 6년간
함께 한 정을 선택할 것인가.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유전자를 선택할 것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연출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던지는 물음표란 이렇다.
자식이 태어나면 남자는 아버지라
불린다. 하지만 아버지라 불리는 것과 아버지가 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10개월 동안 어머니의 몸 속에서 성장한다. 엄마와 함께 숨쉬고, 엄마와 함께 먹고, 엄마와 함께 잔다. 모성애라는 진부한 단어를 동원하지 않아도 어머니와
아이의 교감은 아버지가 끼어들 수 없는 한 몸에서 10개월 일찍 잉태되고, 그렇게 어머니가 된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아이란 한 몸이었던 적이
없는 미지의 존재다. 아이가 태어날 때 비로소 아버지도 태어난다. 아버지란
아이와 같은 출발선에서 함께 성장하는 존재인 것이다.
6년간 부자 관계로서 정을 나눈 아이가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 앞에서, 남자는 단호한 결심을 내린다. 친아들을 되찾자. 하지만 6년 만에 만난 친아들은 부유하진 않아도 자유분방한 가풍에서
자랐고, 엄격하게 일상을 통제하는 친아버지의 기대를 손쉽게 무너뜨린다.
좋은 아빠가 되기가 여간 힘들다. 심지어 자신을 길러준,
지난 6년간의 아빠를 찾아 떠나버린다. 그리고
남자는 문득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6년간 자신을 아버지라 부른 아이의 존재를, 새삼 되새긴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자신을 아버지로서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엄격함을 견뎌온 것임을 알게 된다. 어린 아들의 사려 깊음이 자신의 부족한 마음을 되레 채워주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아이가 아버지를
만든다.
<더 웨이>
의사인 아버지는 버클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이수 중인 아들의 미래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은 어느 날 갑자기 박사 과정
이수를 그만 두고 여행을 떠날 것이라 선언한 뒤, 정말 떠나 버린다.
하루 아침에 자신의 인생에 자부심이 됐던 아들이 등을 찌르는 배신감으로 돌변한다. 그런데
황망한 소식이 전해진다. 골프 모임 중 전화를 받은 아버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달려간 뒤 대서양
너머 프랑스 생장으로 날아간다. 아들이 죽었다고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폭풍에 휘말린 탓이라 했다. 아들의 유해를 챙겨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려던 아버지는 아들이
남긴 배낭을 보고 석연찮은 기분을 느낀다. 결국 아버지는 길을 나선다.
아들이 걷고자 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아들의 유골을 안고 대신 걸어가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더 웨이>다.
한때 아버지의 어깨에 올라타있던, 품에 안겨있던, 손을 잡고 있던 자식들은 필연적으로 아버지의 눈높이까지
자라 자기 인생을 논할 나이가 되기 마련이다. 어떤 아버지들은 자식과 대화하는 법을 익히며 진화했지만
어떤 아버지들은 더욱 깊은 침묵을 선택하며 뼈대만 남은 권위를 유지하려 한다. 그래서 자식들도 아버지
앞에선 침묵하는 존재로 성장한다. 하지만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했다. 아버지가 침묵하는 건 자식이 미워서가 아니다. 사랑하는 아들 혹은
딸에게 나약한 아버지로 기억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들은 나이가 들수록 외로워진다. 침묵을 고집할수록 말할 수 있는 길은 요원해지고 전할 수 없는 진심만 고독하게 맺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나선 아버지는
그 길 위에서 여러 번 아들을 마주친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빚어낸 착시겠지만 그 길에서 아버지는
비로소 아들과 대화를 나눈다. 아들이 걸었을지도 모를 길을 걸어나가면서, 아들이 봤을지도 모를 풍경을 보고, 아들이 만났을지도 모를 이들을
만나고, 아들이 느꼈을지도 모를 기쁨과 슬픔을 느낀다. 그렇게
아들을 만난다. 대화를 할 순 없지만 마음을 헤아리고 아들을 이해한다.
그리고 끝내 자신이 몰랐던 세계를 만난다. 자신이 직접 일러주지 않아도 아들이 찾아가려
했던 길을 걷고 알게 된다. 아버지의 이름에 갇혀서 보지 못했던 세계를 만난다. 아들의 마음을.
<이민자>
멕시코 불법체류자 신분인 아버지는
아들을 가난과 범죄로부터 보호하고자 좋은 학교가 있는 동네로 이사 가길 바라지만 불법체류자 신분으로는 하루 종일 녹초가 되도록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아들은 가난하면서도 매몰차지 못한 아버지가 부끄럽고 밉다. 그런 어느 날 아버지는 친척의 도움으로 트럭을 사고 청소 장비를 구매한다. 희망을
품는다. 아들에게도 들뜬 희망을 전한다. 하지만 한 순간의
방심으로 모든 걸 도둑 맞는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가 한심하면서도 걱정스럽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트럭을 찾으러 나선다. 그 와중에도 타인에게
너그럽고 조심스러운 아버지를 보면 울화가 치밀던 아들은 점점 아버지의 진심을 느끼고,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짚게 된다.
전통적으로 아버지는 경제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가난한 아버지는 자식 앞에서 면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가난한 아버지들은 자식에게 곧잘 미움을 받는 존재로 전락한다. 책임감을 떠안고 생업에 뛰어들며 온갖
고생을 견뎌도 여전히 가난한데 좋은 아빠가 될 기회도 아득하다. 자식 역시 밤 늦은 시간에서야 술 냄새를
풍기며 볼을 비비는 아빠에 대한 기억이 아름답기란 요원하다. 그 마음을 언젠가 이해한다 해도 대부분
늦다. 결국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분투하는 아버지의 행위란 필연적으로 외롭지만 견뎌야 하는 일이다. 자신이 추구하던 가치관이 무너지더라도 자식이 굶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자식의
행복이 인생의 우선적인 목표가 된다.
자동차 암시장에서 트럭을 찾은 아버지와
아들은 경비원 몰래 트럭을 빼내기로 결심하고 담장을 넘는다. 망을 보던 아들은 차를 탈취한 아버지가
총구를 겨누는 경비원의 경고에도 굴하지 않고 전진해 끝내 탈출하는 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지른다. 언제나
착해빠져서 답답했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존경스럽다. 하지만 그 환호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경찰의 단속에 차를 세운 아버지는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추방될 위기에 놓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미국인 신분을 취득한 누이에게 아들을 맡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만난 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남긴다. 가난하고 무력하기만 했던
아버지를 미워했던 소년은 아버지가 자신의 인생을 뒤로 제쳐두고 자신을 위해 살았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다.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스스로의 삶을 잊었다. 아니, 그것이 아버지의
삶이었다. 자신을 위한 삶에서 아들을 위한 삶으로 이민을 간 아버지.
어쩌면 모든 아버지들은 <이민자>일
것이다.
“나는 인생의 위기를 좋아해. 펀치를 맞아주는 거지. 계속 구석에 몰리다가 마지막에 한 방을 날릴 수 있게 해주니까.” <라라랜드>에 등장하는 이 대사는 감독 데미안 차젤레의 의지를 대변하는 것처럼 들린다. 학창 시절, 재즈 드러머가 되길 꿈꿨던 데미안 차젤레는 재능의 한계를 체감하고 하버드 대학교 영화 연출 관련 학과에 진학했다. 일찍이 뮤지컬 영화에 매혹됐던 그는 대학 시절부터 구상했던 <라라랜드>의 영화화를 꿈꿨다. 하지만 유명한 오리지널 넘버가 없는 뮤지컬 영화에 투자할 영화사는 없었다. 결국 자신의 경험을 투영해 만든 <위플래쉬>를 연출했고, 잭팟이 터졌다. 330만 달러에 불과한 제작비를 훌쩍 뛰어넘는 500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거둔 것이다. 이 성공은 <라라랜드>를 위한 담보로서 값어치가 충분했다.
데미안 차젤레는 <라라랜드>에서 과감하고 도전적인 신을 구상했다. 특히 원신원컷으로 구현된 오프닝 시퀀스부터 압도적이다. 대부분의 관객은 이 신이 어떤 트릭으로 구현된 것인지 궁금해하겠지만 이 신은 오롯이 진짜다. 세 개의 쇼트를 연결해 원 테이크 신처럼 보이게 만든 절묘한 편집술이 활용됐지만 크레인을 동원한 고공 촬영술과 무용수들의 열연만으로 완성했다. 주말 이틀 동안 LA 외곽의 고가도로를 통제하며 수많은 인파와 차량을 동원해 시간에 쫓기듯 촬영했지만 끝까지 원 테이크 촬영을 고수하며 진행했다. 촬영 전 고가도로에서의 동선을 대비해 무용수들과 숱한 리허설을 거듭해야 했고, 첫 촬영 중에 무용수가 카메라를 매단 크레인에 머리를 부딪힐 뻔한 아찔한 상황도 있었지만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과 무용수들의 집념이 진짜 스펙터클을 만들어냈다. “전통적인 할리우드 뮤지컬을 사랑하며 자란 만큼 우리가 지금 진부하다고 생각하는 당시의 영화 제작 형식을 반영해 영화를 제작하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오늘날 그 활기를 되찾고 싶었다.” 그렇다. 데미안 차젤레의 꿈이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지방 소도시에 있는 테마파크 비슷한 것을 연상시키는 <라라랜드>라는 국내 개봉명은 <LA LA LAND>라는 영문 제목을 음역한 것이다. 보다시피 제목에 LA가 세 번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는 캘리포니아 남부의 LA, 직접적으론 할리우드에 대한 은유적인 별명이다. 할리우드는 기회의 땅이다. 수많은 이들이 스타가 되기 위해 부푼 꿈을 안고 할리우드로 향하지만 대부분은 잡을 수 없는 별의 높이와 인생의 쓴맛만 체감한다. 그래서 ‘라라랜드’는 ‘환상의 세계’ 혹은 ‘비현실적인 허상’을 의미하는 단어가 됐다. 하지만 <라라랜드>는 비현실적인 허무 속에서도 별처럼 반짝이는 꿈을 안고 신음하는 영혼들을 위한 송가에 가깝다.
정체된 고가도로 위에 멈춰 선 차를 수평으로 지나치며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오프닝 시퀀스의 카메라 너머로 각기 다른 차 안의 풍경이 스쳐 지나간다. 저마다 다른 음악을 듣고 흥얼거리는, 각기 다른 얼굴의 사람들. 그렇게 수평으로 이동하던 카메라가 사선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한 여성의 얼굴을 비추자 기다렸다는 듯이 경쾌한 멜로디가 시작되고 그 여성이 차에서 나와 노래를 부르며 카메라를 향해 걸어온다. 동시에 내린 모든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춤을 추고 노래를 이어받는다. 우연히 스크린 속 풍경에 매혹된 열일곱 살 무렵의 기억을, 자신을 이 번잡한 도시까지 다다르게 만든 유년 시절의 꿈을, 그리고 언젠가 영화의 주인공이 될 자신을, 그렇다면 열일곱 살의 나와 함께 영화를 봤던 네가 나를 보게 될 것임을. 그렇다. <라라랜드>는 꿈에 관한 영화다. 그런데 단지 꿈을 이룰 ‘나’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꿈을 이룬 나를 보게 될 ‘너’를 위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라라랜드>는 관객에게 말을 거는 영화란 말이다.
만약 <라라랜드>를 봤다면, 영화가 시작될 때 정사각형 비율인 흑백의 화면이 좌우로 넓어지며 컬러로 바뀌는 것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스크린을 꽉 채운 영문의 세 단어를 목격했을 것이다. “Presented in cinemascope(시네마스코프로 제공됩니다).” 여기서 시네마스코프는 1950년대에 유행한 영화 상영 비율을 의미한다. 원래 1950년대 이전까지의 영화는 대부분 1.37:1의 비율, 그러니까 정사각형에 가까운 프레임으로 상영했지만 1950년대에 급속도로 발전한 TV 산업에 위협을 느낀 할리우드에서는 영화만의 장점을 보여줄 수 있는 전략이 필요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시네마스코프다. 정사각형 비율의 TV 브라운관과 차별된 스펙터클을 구현하기 위해 스크린의 가로 폭을 늘린 2.55:1의 상영 비율을 선택한 것. 결국 시네마스코프는 영화만의 어떤 것을 대변하는 선언이었다. <라라랜드>가 이를 재현하는 것도 그렇다. 지금 객석에 앉아 있는 당신에게 특별한 영화를 보여주겠다는 선언. 관객을 매혹시키는 꿈이 될 것이라는 약속.
흥분의 도가니라 할 만한 오프닝 시퀀스 이후 천연덕스럽게 차분한 현실로 돌아온 고가도로 위로 시선을 들이미는 카메라에 두 남녀가 차례로 등장한다. 그 이후로 <라라랜드>는 미아(엠마 스톤)와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의 꿈과 사랑을 좇아간다. 미아는 볼더시티라는 한적한 도시에서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할리우드로 넘어와 오디션을 전전하는 여자다. 재즈를 사랑하는 피아니스트인 세바스찬은 대중에게 외면받는 스탠더드 재즈의 현실을 개탄하며 정통 재즈를 연주하는 클럽을 열겠다는 꿈을 꾸는 남자다. 미아와 세바스찬이 사랑에 빠지는 건 단지 서로를 매력적인 이성으로 인지했기 때문이 아니다. 미아와 세바스찬은 서로의 꿈을 이해하고 응원한다. 배우가 되기 위해 시시껄렁한 오디션을 전전하는 미아에게 세바스찬은 루이 암스트롱이 되라 말한다. 단순한 트럼펫 연주자가 아닌 자신의 음악을 통해 전설적인 뮤지션이 된 루이 암스트롱처럼 당신의 이야기를 쓰고 연기해보라 권한다. 그래서 미아는 직접 무대에 올라 연기할 수 있는 희곡을 쓰기 시작한다. 언젠가 재즈만을 위한 클럽을 열겠다는 세바스찬의 꿈도 미아의 신뢰를 통해 고무된다. 자신을 위해 재즈 클럽의 이름까지 짓고 그 꿈을 응원하는 미아로 인해 삶을 긍정하게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희망을 불어넣는다. 함께할 수 있는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이뤄지지 못한 꿈은 위태로운 현실을 건너야만 한다. 오래전 함께 음악을 했던 친구의 권유로 새로운 밴드의 키보디스트로 활동하게 된 세바스찬은 이상과의 괴리에 잠시 갈등하지만 안정적인 내일을 구상할 수 있다는 합리로 이를 인내한다. 재즈를 꿈꾸던 세바스찬에겐 미아라는 꿈이 생겼고, 무엇보다 소중해졌다. 그래서 안정적인 현실을 위해 잠시 꿈을 외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세바스찬을 흔들어 깨우는 건 미아다. 미아는 세바스찬에게 다시 꿈을 꾸라 말한다. 하지만 세바스찬은 이것이 나의 현실이라고 역설한다. 그러다 결국 무명 배우의 주제 넘은 참견이라는 뉘앙스를 남긴다. 선을 넘었다. 순간적인 화를 이기지 못한 폭언은 진심이 아닐지 몰라도 금이 가버린 마음은 진실로 각인된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서로의 꿈이 서로를 사랑하게 만들었지만 사랑을 지키기 위해 꿈을 포기했다는 진심이 되레 사랑을 무너뜨린다. 본래의 진심은 속절없을 뿐이다.
<라라랜드>의 결말이 가슴을 저미는 건 그래서다. 우연히 들어선 클럽에서 오래전 자신이 응원하던 꿈의 징표를 보게 된 미아의 얼굴에서, 클럽의 무대에 올라 객석에 앉아 있는 미아를 발견하고 잠시 말문을 잊게 되는 세바스찬의 얼굴에서 지나간 계절이 떠오른다. 겨울에서 봄으로, 여름으로, 가을로 계절이 지나며 쌓아온 그 시절의 꿈과 사랑이 거짓말처럼 지워졌다는 것이 실로 형형해진다. 처음으로 함께 걸어 올라간 언덕에서 티격태격하다 함께 발을 맞추고 구르며 노래하던 순간의 흥겨움이, 처음으로 함께 간 영화관에서 가까스로 손을 잡고 입을 맞추려던 떨림이, 늦은 밤에 들어선 천문대에서 함께 날아올랐던 우주의 황홀함이, 피아노에 나란히 앉아 노래하며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빛나고 있다’며 활짝 웃던 그 미소가, 배우라는 꿈과 재즈라는 꿈이 너와 내가 함께하는 우주 안에서 형형하게 빛날 것이라 믿었던 어떤 미래가. <라라랜드>의 결말부가 마음을 미어지게 만드는 건 그래서다. 그들이 함께 꿈꾸던 미래가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렸다는 사실을 목도할 때 보는 이의 억장도 함께 무너진다.
그럼에도 <라라랜드>의 결말은 보는 이의 감정을 무중력으로 띄워 올린다. 벅차오르는 환희를 체감하게 만든다. 오랜만에 재회한 두 사람의 비통한 눈빛이 끝내 미소로 다다르는 순간, 비애와 환희로 감정을 수놓는 불꽃놀이 같은 여운이 폭발한다. <라라랜드>를 비범한 결과물로 되새기게 만드는 건 아무래도 결말부다. 한때 당연하리라 믿었던, 우리라는 우주로 삶을 팽창시키진 못했지만 결국 서로가 응원하던 꿈을 완성해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는 별이 됐음을 확인하는 마지막 순간, 우리의 지난 사랑이 값진 세월을 일궈낸 것이라는 위안을 얻게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의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그 사랑이 너와 나를 별처럼 빛나게 만드는 꿈이었음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열정에 끌리게 돼 있어. 자신이 잊은 걸 상기시키니까.” 그렇다. 우리는 <라라랜드>를 통해 벅찬 꿈을 꾸던, 뜨겁게 사랑했던 계절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있던 그 계절 덕분에 나와 당신이 빛나는 오늘을 맞이할 수 있었음을, 당신과 함께한 그 시절 덕분에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믿게 만든다. 꿈꿀 수 있다는 용기와 사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양손에 쥐여준다. 그러니 용기와 희망을 쥐고 살아가야 한다. 다시 또, 꿈꾸고 사랑하기 위해서.
(Esquire Korea No_256 JANUARY 2017 'The Big Bite FILM')
포털사이트에서 '바람'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봤다. 놀라웠다. '아빠랑 바람 핀 여자가 계속
도발해요.' '유부녀와 바람 피우다 걸렸어요.' '바람 피우는
사람의 증거를 확보하고 싶습니다.' 바람을 피우는 남편 혹은 아내 심지어 부모를 어찌해야 할지를 묻는
하소연이, 바람을 피우다 걸렸을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묻는 절절함이, 바람 피우는 아내 혹은 남편을 응징하는 방법에 대해 질문하는 단호함이 차고 넘쳤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온라인상이라 해도 사적인 치부가 드러날 만한 질문을 불특정 다수에게 던진다는 건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리도 많은 절박함이라니, 가히 바람
잘날 없는 사회라 해도 좋겠다.
흥미로운 통계가 있다. 지난
2015년, 한 일간지에서는 기혼자 2000명을
대상으로 불륜경험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 중 484명이 불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그리고 40대와 50대의
불륜 비율이 20대와 30대에 비해 현저히 높고,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비율이 높아졌다. 그렇다면 다들 어디서, 누구와 바람을 피우는 걸까. 채팅사이트나 나이트클럽처럼 새로운 곳에서
만난 사람이 가장 높은 비율인 37.2%에 달했다. 유흥업소
관계자(29.5%)와 직장 동료(25.6%) 그리고 동창
등 친구(17.1%)와 동호회 사람(11.6%)이 그 뒤를
이었다. 여기서 남성은 유흥업소 관계자나 새로운 곳에서 만난 이성에 응답한 이들의 비율이 75% 이상으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니까 한국의 기혼남성들 가운데
바람을 피우는 이들 중 8할 가까이가 자신의 취미나 사생활과 무관하게 여자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바람을 피우는 확률이 현저히 높다는 의미다. 정리하자면 바람을 피울 준비가 된 남성들이 바람을 피울
확률이 높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그렇다면 취미생활이 있는 남자와 불륜 가능성의 연관성은 존재할까? 물론
존재할 것이다. 다만 취미생활의 종류에 따라, 취미생활을
즐기는 이들의 성비에 따라, 집단적으로 함께 하는 취미인지에 따라서.
간단히 말하면 취미생활을 영위하면서 남녀가 만날 확률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바람 피울 수 있는 가능성 여부가 천차만별일 것이다. 예를 들어 목공에 취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특별히 동호회 활동을 하지 않아도 홀로 작업을 배울 수 있는 경로가
많고, 어느 정도 숙련된 상태라면 혼자서 취미를 영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외도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을 것이다. 또는 동호회 활동을 통해 지속하는 운동 같은 경우도 남자의 비율이 많은 경우엔 역시 가능성이 0에 수렴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누군가를 만나지 않아서 바람을
피울 일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애초에 취미 자체에 몰입하는 이들은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간다
해도 바람을 피울 확률이 떨어질 것이다.
반대로 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있는 이들이 있다. 이를 테면 소위
외롭고 심심해서 취미생활을 찾는 이들 중에선 취미생활보다도 누군가와의 관계를 통해 일상의 외로움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그러니까 취미활동 이후의 뒤풀이를 기대하며 동호회를 찾거나 모임에 나가는 이들 말이다. 이런 이들에겐 애초에 동호회 모임 자체가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채팅사이트이거나 나이트클럽에 가깝다. 게다가 취미생활을 영위한다는 점에선 배우자에게도 그럴 듯한 핑계를 댈 수 있는 셈이니 어떤 의미에선 공작 활동도
수월해진다. 그리고 남자나 여자나 그런 이유로 동호회 활동을 시작한 이들이 있을 것이다. 크로스핏보다, 사이클보다, 산행보다, 스포츠댄스보다, 영어회화보다, 그
이후의 뒤풀이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그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그리고 취미생활을 통해 일탈의 알리바이를
확보한다.
물론 모두가 다 그래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저 반복적인 일상이 지겨워서
새로운 흥미를 찾기 위해 동호회를 찾아 자기계발을 해나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평소 즐기던
취미생활을 타인들과 함께 영위하기 위해 동호회를 찾았다가 우연히 만난 이성과 친근해져 대화를 나누고, 술도
한잔 하고, 그렇게 편안한 사이가 돼서 어쩌다 보니 서로에게 이끌려 본의 아니게 충동적인 관계로 발전하고
전전긍긍하는 이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이건 사람의 문제다.
바람은 차가운 곳에서 따뜻한 곳으로 불어간다. 누군가의 체온을 갈망하는 이가 그 손길을
원할 확률이 크다. 그러니까 바람 피울 사람은 바람을 피우게 돼있다.
너무 단호한 표현인가. 아니다. 단언컨대 취미는
문제가 아니다. 취미생활이 있어도, 없어도, 바람 피울 사람은 피우게 돼있다. 다만 취미생활이 있다면 취미를
통해서 피울 것이고, 취미가 없다면 없는 대로 피울 것이다. 바람
앞에서 취미는 그저 취미일 뿐, 결국 사람의 문제다.
누군가는 선물하는 것이 쉬운 일일지 모르겠지만
선물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물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끌리는 건
그것이 비단 남을 위한 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주 어린 시절이었다. 대략 5살쯤? 어쨌든 크리스마스에 부모님으로부터 선물을 받길 내심 기대하는
나이였고, 부모님 역시 선물을 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팽배했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 미취학 아동들 사이에 유행했던 장난감 로봇이 있었다. '코볼
로보트'라는 이름으로 당대 어린 남자애들 사이에선 우주의 기운을 모아서라도 갖고 싶은 장난감이었다. 소위 말하는 깡통로보트처럼 생겼지만 리모콘으로 조종을 하면 투명한 플라스틱 내부의 머리 부분에서 불이 번쩍거리고, 평평한 바닥에 조립된 바퀴로 전진과 후진도 가능한 것이었다. 소리도
났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훗날 나이가 먹고
나서야 그것이 <스타워즈>에 나오는 R2D2를 베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 시절에는 코볼 로보트가 너무 갖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우주까지 전해진 것 같다.
크리스마스 당일 아침에 눈을 떴는데 머리맡에서 우주의 기운이 느껴졌다. 알록달록한
포장지에 싸인, 그럴싸한 크기의 네모난 선물상자가 있었다. 그렇다. 코볼 로보트였다. 아마 그 날 이후로 엄마, 아빠도 못 알아보고 한동안 코볼 로보트만 보고 살았던 것 같다. 다만
그 관심이 언제 시들해졌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을 뿐이다. 그 이후로 부모님이 주셨던 선물 중 기억나는
건 중학교 시절에 받았던 농구공이었다. 당시 나는 농구에 한창 빠져있었고, 농구공을 받은 이후로는 어머니께서 후회할 정도로 농구만 했다. 사계절을
가리지 않았다. 아마 부모님께서 사주신 선물이 이것만은 아니었을 테지만 그 이외의 선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 건 내게 대단히 마음에 드는 선물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선물을 받은 당시에는 기분이
좋았겠지만 그것이 기억될만한 기억으로 세월을 관통해 살아남지 못한 데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간절히
바라지 않았거나 부모님께서 우주의 기운을 외면하셨거나. 그러니까 결국 누군가에게 마음에 드는 선물을
준다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란 말이다.
간단히 말하면 누군가에게 마음에 드는 선물을 줄 수 있는 확률이란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얼마나 잘 아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확률과 유사하다. 물론 그 누구라도 좋아할 것이라 짐작할 수 있는 귀한 물건을
선물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 역시도 그의 형편이나 일상에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면 역시 계륵처럼 여겨질 것이다.
이를 테면 면허도 없는 이에게 고가의 드라이빙 슈즈를 선물한다면, 상당한 기회비용이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선물을 준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타인에
대한 취향을 배려하는 동시에 가끔은 자신의 취향도 충족시켜야 하는 일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싶은 동시에 스스로가 만족할 만큼 좋은 것을 사고 싶은 일이다. 게다가 우린 스스로의 취향을 아는 데에도
인색하다. 내 취향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타인의 취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건 정말 고역일 것이다. 그러니 선물을 한다는 건 항상 누군가에게 의견을 구하고 기대야만 하는 일이 된다. 포털사이트에 선물이란 단어로 검색해봐도 선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과 선물을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알려주는 팁들이 넘친다.
개인적으로 태어나서 가장 많은 선물을 받았던 건 아마 결혼할 무렵이었던 것 같다. 결혼식을 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가까운 지인들은 축의금 대신 선물을 주겠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필요 없는 물건을 받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받고 싶은 선물 리스트를 작성해 제시했고, 지인들은
그 리스트에서 적절한 가격대의 선물을 선택해 전달했다. 그 리스트에 있었던 건 대략 두 가지 부류였다. 누군가가 선물을 했을 때 가격대가 부담스럽지 않지만 꼭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것 혹은 갖고 싶지만 직접 사기는
망설여지는 것. 결국 그 당시에 받은 모든 선물들이 하나같이 쓸모 있게 활용되는 건 아니지만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 혹은 갖고 싶었던 것을 받았기 때문에 최소한 지금 살고 있는 집 안에서 그때 받았던 선물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상황은 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선물을 할 때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물어보기 힘든 경우도 존재한다. 심지어 잘 모르는 상대에게 선물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원하는 선물을 물어본다는 것 자체가 겸연쩍은 일이다. 예를 들어 업무상 출장이건 개인적인 여행이건 해외를 나갈 일이 생기면 직장 동료들에게 무언가를 사다 줘야 할
것 같다는 압박을 느끼게 된다. 사실 간단히 해결할 수도 있다. 기념품
가게에서 열쇠고리 같은 것을 종류별로 사서 공평하게 나눠주고, 공항 면세점 같은 곳에서 파는 대용량
초콜릿 같은 것을 사서 함께 나눠줘도 좋겠다. 하지만 조금 더 그럴싸한 것을 사다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대단히 보편적이고 공평하지만 성의 없어 보이는 것을 선물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사로잡히면 어느 순간 이러려고 선물을 하기로 했나 자괴감이 들고 괴로울 수도 있다. 나는
그랬다. 그래서 가끔은 마땅한 것을 찾지 못해 선물을 포기한 적도 있었다. 어줍잖게 초콜렛 같은 것을 사서 돌리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그럴싸한
것을 찾지도 못했다. 하지만 포기하면 마음은 편하다. 그런데
한편으론 아쉬움이 남는다. 받지 못한 이들의 아쉬움보다도 주지 못한 이의 아쉬움이라는 게 크게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탁월한 무언가를 찾아 나설 때도 있지만 어디서 문득 무언가를 봤을 때
그것에 어울리는 누군가가 생각나 선물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럴 때 문득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애정이란 것이 물리적으로 구체화돼 눈앞에서 보인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니까 선물이란 너와
나의 연결고리를 우주의 기운으로 느낄 필요 없이 물리적으로 전달하고 체감할 수 있는 수단인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마음으로 품고 있었던 누군가에 대한관심을 확인하는 길인 셈이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했을 때 상대방으로부터
꼭 마음에 든다는 반응을 얻게 되는 건 그래서 기쁜 일이다. 필요한 물건을 줬다는 만족감 이상으로 당신을
생각하는 내 마음이 제대로 전달됐다는 뿌듯함. 이는 받는 이도 마찬가지다. 언어 그대로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았다는 놀라움도 있겠지만 정말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게 된다면 그 상대가
평소에 자신을 얼마나 관심 있게 지켜보고 고민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마음과 마음이
교류하는 감동을 물리적으로 체감할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우리가 선물을 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그런 감동을 느끼고 싶다는 욕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벌써 한 해가 간다. 올해에는 어느 해보다도 심신을 고단하게 만드는
사건이 많았고, 여전히 많은 고단함이 남겨진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저마다 묵묵하고 성실하게
제 자리를 지키며 한 해를 잘 지나고 버텨왔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올 한 해의 끝에 다다르면 지금껏
함께 잘 버텨온 이들과 함께 수고했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서로의 마음을 더욱 돈독하게 다지며 세상을
견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세상이 흉악해질수록 개개인은 아름다운 것을 보며 저항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니, 세상의 한파를 견디게 만드는 온기가 내 주변에도 자리하고 있다고 더더욱 확인해보고
싶은 요즘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어쩌면 나를 위한 진정한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타인에게 전하고 싶은 온기를 마음에 품었을 때 이미 스스로의 마음부터 따뜻해지는 법일 것이니. 선물하고 싶은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벌써부터 올 겨울이 따뜻해질
것만 같다.
영국 출신 배우답게 또박또박한 발음이 인상적인
펠리시티 존스는 유년시절부터 배우가 되길 꿈꿨고, 꿈을 이뤘다. 그리고
이젠 세계가 사랑하는 배우로 거듭나고 있다. 보는 이를 기분 좋게 만드는 커다란 미소만큼이나 큰 재능과
매력으로.
“레이저 블래스터는 대단히 신나는 경험이었어요. 스톰트루퍼의 공격을
피하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스톰트루퍼는 정말 빨리 움직이기 때문에, 적응하는데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지만 말이죠!” 테마파크에 다녀온 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어린 소년의 상기된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가. 사실 이는 <스타워즈> 시리즈 안에서 최초로 기획된 스핀오프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이하,
<로그 원>)의 촬영을 마친 펠리시티 존스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이다. 그녀는 최근 미국 ABC채널의 나이트쇼인 '지미 키멜 라이브'에 출연해
<로그 원>에서 연기한 진 어소의 레고 피규어가 나왔다며 자랑하기도 했다. 그럴만한 일이다.
올해 12월말에 공개될 예정인
<로그 원>에서 펠리시티 존스가 연기한 '진
어소(Jyn Erso)'는 우주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독재적인 권력을 장악한 제국군에 대항하는 반란군
특공대에 가담해 제국군이 건설 중인 전투용 인공행성 '데스 스타'의
설계도를 탈취하는 작전을 수행한다. "진 어소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자라왔고, 신체적으로도 작고 왜소하지만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신념이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자신의 동료에게 힘을
불어넣고 동기부여를 줄 수 있다. 결과적으로 큰 용기를 갖게 만든다."
펠리시티 존스의 말처럼 진 어소는 아웃사이더에 가까운 신분을 갖고 있지만 강인한 믿음을 통해 악에 맞서고 선의에 힘을 불어넣는, <스타워즈> 세계관의 새로운 아이콘이 될 인물이다. 흥미로운 건 작년 12월에 공개된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와 마찬가지로 <로그 원>에서도 세상을 구할 새로운 영웅상으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스타워즈> 세계관에서의 여성이란 여왕 혹은 공주로서 타고난 신분을 견뎌야 하는 숙명에 갇혀 있었던 것을 염두에 둘
때 이는 가히 세계관의 진화에 가깝다. 그러니까 펠리시티 존스는
<스타워즈>라는 전설적인 시리즈를 현재진행형의 우주로 띄워 올리는 핵심 동력인
셈이다.
<로그 원>을
연출한 감독 가렛 에드워즈는 펠리시티 존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강인함, 부드러움 혹은 풍부한 감수성, 대부분의 배우들은 이중 한 가지 요소만을
지니고 있지만 펠리시티 존스는 이 모든 것을 갖고 있다. 누구나 친구가 되고 싶어지는, 매우 친근한 매력을 갖고 있다." 대단한 찬사다. 그리고 펠리시티 존스에 관해 이토록 대단한 찬사를 남긴 건 가렛 에드워즈만이 아니다. 2011년 선댄스영화제 특별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멜로드라마 <라이크
크레이지>의 메가폰을 잡은 감독 드레이크 도리머스 역시 펠리시티 존스에 대한 특별한 첫인상을 언급한
바 있다. “그녀의 얼굴을 클로즈업해보니 그 동안 캐릭터가 겪어왔을 것이라 짐작되는 온갖 슬픔이 그
얼굴에 담겨있었다. 우린 다같이 ‘오 마이 갓, 바로 그녀야!’라 말했다."
펠리시티 존스가 출연한 최근작 중 하나인 <인페르노>의
감독 론 하워드 역시 마찬가지다. "펠리시티 존즈는 지적인 반짝임으로 가득한 배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근하면서도 편안하게 인상으로 다가온다."
2014년에 공개된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은 스티브 호킹과 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제인 와일드의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었다. 제인 와일드는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의 인문학과에 진학해 물리학도였던 스티브 호킹을 만나 연인이 됐고, 그가 루게릭병을 앓으며 시한부 선고까지 받았음에도 모두의 만류를 무릅쓰고 결혼을 선택한 여인이었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은 제인 와일드가 쓴 동명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영화화한 작품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제인 와일드를 연기한 펠리시티 존스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는 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루게릭병으로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스티브 호킹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만큼이나 그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는
제인 와일드의 서사가 중요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제인 호킹 역을 맡은 펠리시티 존스는 생애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로 노미네이트되는 영광을 얻었다. "제인 호킹을 만난다는 건 굉장히 흥분되고
초조한 일이었다. 항상 그녀를 존경해왔는데, 밝은 성격과
뛰어난 결단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굉장히 관대한 느낌을 받았다. 결국 제인과 스티븐은 용기 있는 방식에
대한 생각을 전환시켜준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펠리시티 존스가 말하는 제인 와일드가 앞서서 감독들이
말한 펠리시티 존스와 유사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지적이면서도 편안한 인상으로 풍부한 감정을 연기한다는
펠리시티 존스와 밝고 관대하면서도 뛰어난 결단력을 지닌 제인 와일드 사이에는 거리감이 없어 보인다.
아마 펠리시티 존스가 지적인 느낌을 주는 건 실제로 그녀가 지성을 겸비한 배우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드럽고 세련된 옥스퍼드 액센트를 구사하는 펠리시티 존스는 옥스퍼드대학의 단과대학 중 하나인 워드험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차석으로 졸업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런 그녀가 배우로서의 꿈을 갖게 된 건 그녀
어머니 덕분이었다. 영화와 연극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어머니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많은 영화와 연극을
보게 됐고, 자연스럽게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됐다. 그리고
유년 시절부터 연기 수업을 받으며 12살 무렵부터는 TV영화와
드라마, 연극 무대에서 아역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부터 연기를 시작한 건 굉장한 행운이었다. 20여 년의 경험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으니까. 주목 받지 못했던 시절에 실수를 만회하는 방법들을 알게 됐다는 것도.” 그리고
이제 만인이 주목하는 배우가 된 그녀는 자신이 경험하는 그리고 더욱 크게 경험하게 될 유명세에 대해서도 단단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무슨 일을 하든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책임감을 갖는 방식이니까.”
아마 올해 12월에 <로그
원>이 공개된 이후로 펠리시티 존스의 입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스타워즈>라는 신화적 세계관의 아이콘이 되어 전세계를 누비게 될 그녀는 훌륭한
가능성을 지닌 배우에서 전세계가 사랑하는 배우로 거듭날 것이다. 게다가 시고니 위버와 함께 출연한 신작
판타지물 <몬스터 콜>, 니콜라스 홀트와 함께
출연한 액션 스릴러물 <아우토반>까지 그녀의 다채로운
매력을 다양하게 제시할 작품들이 연이어 줄을 서있다. 그리고 그녀의 미래가 보다 기대되는 건 그녀가
이 모든 과정을 진지하면서도 성실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배우로서 산다는
게 특권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지는 일이란 없다. 영화란 수많은 사람들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에 늘 쉽게 선택할 수 없고, 결과적으로 내가 선택한 작품에 대한 해법을 스스로 고민하며 발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녀는 이미 자신만의 공식을 찾았고, 답을 찾아가고 있다. 한 걸음씩, 정직하게.
타자는 참아야 한다. 노리는 공이 들어왔을 때 비로소 휘둘러야 한다. 물론 헛스윙을 할
수도 있다. 빗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그래야 언젠간 안타를 칠 수 있다. 민우혁은 참았다. 그리고 지금 1루에서 2루로
뛰고 있다.
본래 야구 선수였다고 했다. 운동을 하다 뮤지컬 배우가 됐다는 게
이상하진 않았지만 호기심이 동했다. "관심이 다른 데에 있었다. 동료들이 거울 보면서 스윙 연습하는데 나는 H.O.T나 젝스키스
춤을 따라 하고 있었다. 훌륭한 야구선수가 되겠단 생각보단 앨범을 내고 싶단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그러니까 민우혁에게는 끼가 있었다. 그리고 그 끼를 남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열망도 컸다. 그라운드는 무대 같았고, 더욱
큰 환호와 열광을 받고 싶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2~3학년을
부상에 시달리며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을 겪게 됐고, 한 프로구단의 제안으로 제주도에서 재활 훈련을
하던 중 되레 발목인대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그래서 3개월
동안 깁스를 한 채 고민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 길은
아닌 것 같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영등포에서 월세 15만원 짜리 고시원방을 잡고 길거리 캐스팅이라도
될까 압구정 로데오 거리를 서성이던 민우혁은 모델 학원 오디션 공고를 발견했다. 하지만 오디션에서 탈락했다. 너무 뚱뚱해서라고 했다. 두 달 동안 이를 악물고 살을 뺐다. 108kg에서 35kg을 줄였다.
결국 오디션에 합격했다. 그리고 우연히 노래를 할 기회를 잡았다. 2003년에 방영한 드라마 <요조숙녀>의 OST에 참여했다. 청사진을
그렸다. 그러나 긴 기다림 속에서 서서히 지워졌다. 무명시절에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노래가 하기 싫었다. '차라리
야구를 할 걸'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다." 그러다 문득 친한 친구 어머니가 연극배우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부탁했다. 연기를 배우고 싶다고. 아침마다 찾아가 연기를 배웠다. 물론 그때에도 미래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인생이란 뒤돌아볼 수 있는 것이지, 내다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내 과거를 아는 분들은 뮤지컬을 하려고 노래도 하고, 연기도 배운 거라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시절이 긍정적으로
보인다." 그렇다. 민우혁의 어제는 지나갔다. 그는 지금무대에 올라 내일을
본다. 진짜 청사진이다.
올해에만
<레미제라블>, <위키드> 무대에
섰고 <아이다> 무대가 기다리고 있다.
야구로 치면 봉황기, 황금사자기, 청룡기
결승전에 올라가는 기분이랄까.(웃음)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상황인데 마치 누군가가 나를 위해 자꾸 상을 차려주는 느낌이다.
물론 길가다 동전 줍듯이 얻은 기회들이
아니다. 대작 뮤지컬에 연이어 출연하는 만큼 오디션의 치열함도 더욱 크게 느낀 한 해가 아니었을까?
소위 A급이라 꼽히는, 대극장
뮤지컬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이름을 들었을 때 위압감을 느낀다. 그런데 최종 오디션 명단에서 내 이름이
그런 이름들과 함께 있는 거다. 그러니까 어느 프로구단 테스트를 보러 갔는데 류현진이랑 같이 서 있는
느낌?(웃음) 그래서 마음을 많이 비웠다. 목표는 단 하나, 강렬한 인상을 남기자. 캐스팅이 안돼도 다음에 새로운 작품을 준비할 때 민우혁이라는 배우를 떠올릴 수 있도록 하자고, 그러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캐스팅됐다.
그러니까!(웃음) <아이다> 오디션은 <레미제라블>
공연할 때 진행됐는데 사실 그때 인대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해서 일주일간 공연을 못했다. 심지어
성대결절까지 온 상태였다. 그런데 하필 <아이다> 2차 오디션까지 겹쳤다. 그래서 결국 오디션 참석이 어려울
것 같다고 연락했는데 감독님이 감안하고 보신다니 걸을 수만 있으면 와달라는 거다. 그래서 일단 병원부터
갔다. 성대결절이라도 조금이나마 나아졌으면 해서. 그리고
다음날 목발을 짚고 오디션을 봤는데 합격했다. 그래서 3차
오디션에선 깁스를 풀었다. 절뚝거리더라도 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걸 보고 오리지널 연출자인 키이스 배튼이 엄지를 척 들더라.(웃음)
<아이다>에서 연기할 라다메스는 이집트 장군인데 상당히 남성적인 캐릭터다.
그래서 강인한 장군 역을 맡기엔 얼굴이 너무 선하고 어려 보인다는 지적도 받았다. 심지어 라다메스가 열여섯 살이라 해서 최대한 어려 보이면 좋을 것 같아 앞머리도 내리고, 캐주얼한 복장으로 3차 오디션 현장에 갔다가 그게 독이 될 거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본격적인 오디션이 몇 시간 정도가 남았을 때 바로 미용실을 찾아가 머리를 짧게
자르고 옷도 새로 사 입었다. 그랬더니 키이스 배튼이 다시 엄지를 척.(웃음) 덕분에 자신감이 확 올라와서 인대가 아프다는 것도 잊고 오디션에 열중했다. 그래서
캐스팅된 게 아닐까 싶다.
라다메스 역에 더블 캐스팅된 김우형은 2010년에 공연한 <아이다>에서도
라다메스를 연기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아무래도 비교될까 봐 긴장되지 않나?
사실 오늘도 우형이 형이 연습하는 걸 보면서 하루 종일 감탄하다 왔다.(웃음) 원래 열정이 과해서 빡세게 연습하는 편인데 우형이 형은 더한다. 마치
처음 하는 사람처럼. 그래서 나 역시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그
와중에 나를 잘 챙겨준다. 보통 더블 캐스팅되면 그러기 쉽지 않은데 정말 나한테 다 퍼준다. 덕분에 든든하다. 몸은 힘들지만 너무 행복하다. 우형이 형을 보면서 저런 선배가 돼야겠단 생각을 많이 한다.
<위키드>에서 연기한 피에로와 <아이다>에서 연기할 라다메스는 삼각관계에 빠져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캐릭터마다 감정을 느끼는 원인이 다르니까 피에로의 감정은 완전히 지워버리고, 심지어
내 관점에서의 감정도 최대한 버리려 노력하고 있다. 아무래도 내 입장에서 다가가면 <위키드>의 피에로나
<아이다>의 라다메스나 비슷해 보일 것 같아서 라다메스가 왜 아이다를 사랑하는지
이해하려 노력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다.
피에로는 요즘 말로 '금수저'라 방탕하고 사치스럽지만 내면에는 공허함이 가득한 인물이다.
피에로가 지독하게 외로운 캐릭터라 생각했다. 그래서 피에로는 자신의
외로움을 방탕한 생활로 감췄는데 엘파바는 자신의 외로움을 다 드러낸다. 그래서 피에로가 엘파바를 사랑하게
된 것이라 생각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피에로가 엘파바를 사랑하는 게 설득력이 없다고 느꼈다.
이유는?
솔직히 금수저 물고 태어난 왕자인 피에로가 초록색 마녀인 엘파바를 사랑한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본을 열심히 봤는데 피에로 입장에선 도저히 모르겠더라. 그러다
엘파바를 보기 시작하면서 피에로의 감정이 보였다. 왜냐면 나도 어렸을 때 피에로처럼 외로운 감정을 위장하며
살았으니까. 그런 외로움을 이해하니 피에로를 연기하는 게 수월해졌다.
본인은 어떤 외로움을 감춰온 건가?
10년 동안 야구를 하면서 감정을 위장하는데 익숙해졌다. 운동을 하면 합숙을 하니까 어머니와 떨어져 살았는데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천연덕스럽게
잘 숨겼다. 본래 긍정적인 성격이기도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길들여지니까 누구에게도 내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속 얘기를 털어놓으며 울어본 기억도 없고. 그런데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를 공연할 때 처음으로 감정이
폭발하는 경험을 했다.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는 실화 바탕의 야구 뮤지컬이라 소재면에서 익숙했을 것 같은데, 감정이 폭발했다는 의미는 뭘까?
전국민이 다 아는 이승엽과 함께 청소년대표팀으로 활약했던 김건덕이란 선수를 주인공으로 둔 작품인데 마치 내 인생처럼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막상 눈물을 흘려야 하는 신에서 도저히 못 울겠더라. 모든 감정을 쏟아내며 울어야 하는데 단 한번도 남들 앞에서 울어본 적이 없어서 힘들었다. 그런데 막상 첫 공연 때 완전히 몰입해서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다음
신 진행이 안될 정도였으니까. 사실 그때 너무 행복했다. 누군가를
앞에 두고 그렇게 울어본 건 처음이었고, 이런 감정을 견디며 살아왔다는 게 느껴져서.
선수 시절 포지션이?
투수였다.
투수는 경기를 책임지는 포지션이다. 무대에 서면 비슷한 책임감을 느낄 때가 있을 것 같다.
맞다. 그리고 배우는 인내심이 필요한 직업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쫓으면 눈 앞에 좋은 배역이 없을 때 무너지기 쉽다.
꾸준히 어떤 역할이라도 열심히 해나가야 기회가 찾아오는 거 같다. 운동을 한 덕분에 기본적인
인내심을 배운 것 같다. 기다리는 건 어렵지 않다.
TV나
영화에서도 연기를 해보고 싶단 의견을 종종 피력했다.
무대에서의 연기가 좋고 관객들로부터 전해지는 리액션이 좋아서 공연을 좋아하지만 연기에 대한 욕심이 늘면서 TV드라마나 영화에도 도전해보고 싶어졌다.
이젠 노래보단 연기에 더 관심이 많아졌나
보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은 간혹 목소리가 갈라지고 음이 떨어져도 그 노래의 감정을 정확히 전달한다. 결국 좋은 배우가 되려면 노래 실력만으로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옛날에는 피아노를 쳐가면서 노래 연습을 했는데 지금은 가사를 한번 더 보게 되는 것 같다.
올해
11월부터 내년 3월까지 <아이다> 무대에 서야 한다. 긴 시간 동안 무대에 오르려면 자기 관리에도
만전을 기해야 할 텐데.
공연에 들어가면 개인적인 생활 자체가 없다. 공연 끝나면 곧장 집으로
가고, 쉴 때에는 말도 줄인다. 예전에 주인공은 무대에서
절대 '삑사리' 내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한때는 우스갯소리처럼
여겼지만 이젠 그 의미가 무겁게 다가온다. 비싼 돈을 내고 공연을 보러 온 관객 입장에서 삑사리를 듣고
몰입이 깨져서 티켓값을 아깝게 생각해버릴 수도 있으니까. 정말 조심해야 한다.
영화를 예매하려다 시간 여행을 떠나는 기분을 느꼈다. 10년 전에
극장에서 봤던 영화들은 왜 다시 극장으로 돌아온 걸까?
<인생은 아름다워>,
<이터널 선샤인>, <500일의 썸머>,
<죽은 시인의 사회>, <파이트 클럽>,
<포레스트 검프>, <유주얼 서스펙트>,
<매트릭스>, <벤허>. 두서
없이 나열한 이 영화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근래에 극장에서 다시 상영된 영화들,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재개봉작이다. 그런데 왜 이 묵은 영화들은
다시 극장에서 상영된 걸까? 2015년 11월에 재개봉한
<이터널 선샤인>은 무려 32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2005년 개봉 당시 16만여 명의 관객이 이 영화를 봤으니 재개봉으로 두 배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한 것이다. 이는 대단한 사건이었다. 해외에서 수입한 영화를 개봉할 수 있는
판권 계약 기간은 보통 7년에서 10년 정도다. 2015년에 <이터널 선샤인>의
개봉판권을 가진 수입사는 2005년의 수입사로부터 소멸된 개봉판권을 재구입해서 재개봉시켰다. 재개봉 판권의 가격은 신작 판권의 10~30%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2015년에 재개봉된
<이터널 선샤인>은 2005년에 개봉됐을
때보다 월등히 싼 가격으로 수입했지만 두 배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으니 수배에 달하는 수익을 거둔 셈이다. 재개봉작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된 것이다.
사실 2013년에도 <레옹>과 <러브레터>가
재개봉했고 각각 4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재개봉작을 블루칩으로 여기지 않았다. 시장 상황이 판이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200개 미만의 상영관에서 개봉하는 영화들이 다양성 영화로
분류된다. 중소 규모의 해외 수입영화들과 저예산 독립영화들이다.
2013년 다양성 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작품은 약 18만 명을 동원한 <로마 위드 러브>였다. 이
작품을 포함해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은 다양성 영화는 불과 여섯 편 정도였다. 그런데 2014년엔 다양성 영화 중 18편이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심지어 2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작품도 10편이나 된다. 다양성 영화 시장은 금광이 됐고, 영화 수입사들 간의 골드 러시도 시작됐다.
다양성 영화의 수입단가는 지난 2년 사이 무려 두 배 이상 상승했다. 덕분에 평균적으로 1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면 수익 실현이 가능했던
중소 규모의 수입 영화들은 2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해야만 본전을 얻을 수 있다. 상영관 수는 한정돼 있고, 할리우드 대작이나 한국 상업영화들이 70~80% 이상의 상영관을 싹쓸이하는 국내 실정에서 다양성 영화들의 각축전만 치열해지고 있는 양상이란 것. "아트하우스 영화시장이 과열되면서 다양성 영화들의 수입가가 많이 상승했다. 결국 인지도가 떨어지는 수입영화들은 흥행이 어려우니 재개봉작을 싸게 들여와 개봉하는 건 상대적으로 안전한 일이
된다. 게다가 이미 인지도도 존재해서 홍보비용도 절감된다."
영화수입배급사 유로커뮤니케이션 이재진 본부장의 말처럼 신작에 비해 단가가 낮고 수익성이 충분한 재개봉작이 주목받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이는 아트하우스 영화를 수입하는 중소 규모 영화사들에겐 부담스러운 일이다.
"다양성 영화관은 한정돼서 다양성 영화들의 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에서 매주 재개봉작까지 개봉관 확보에 뛰어들다 보니 인지도가
떨어지는 신작들은 상대적으로 버티기가 어렵다." 영화사 진진의 마케팅팀 장선영 팀장의 말처럼
인지도가 형성된 재개봉작들의 시장 유입이 거세지면서 되레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수입영화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게다가 최근 멀티플렉스들이 다양성 영화의 단독 개봉을 유치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데 인지도 높은 재개봉작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만큼 개봉관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영화수입사들의 신작 수입영화들과 관객들의
접점이 좁아진 것이다.
"재개봉작들도 다양성 영화시장에서 좋은 콘텐츠가 될 수 있다. 관객 입장에선 재개봉작도 영화의 다양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다만
재개봉작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변별력이 사라지는 건 아쉽다. 수요와 공급 조절이 필요한데 소화가
안될 정도로 과잉 공급돼서 적절한 프로그래밍도 어렵고, 관객들의 피로감도 가중될 것 같다." 영화수입배급사 그린나래미디어의 유현택 대표의 말처럼 재개봉작도 다양성 영화의 한 축이 될 수 있다. 다만 긴 안목이 필요하다. 명성이 자자한 과거의 개봉작들을 극장에서
다시 만난다는 건 영화팬 입장에서도 귀한 기회다. 수입사 입장에서도 효율적인 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산업 안에서 좋은 동력이 된다. 어차피 영화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잊혀질 뿐이다. 결국 시대를 넘어 관객을 만나는 영화가 존재한다는
건 일종의 귀감이 된다. 좋은 영화는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귀감. 재개봉작들은
그런 미덕을 품고 있다. 그러니 혜안이 필요하다. 지금의
영화와 과거의 영화가 공생할 수 있고, 그 중에서도 좋은 영화는 오래 살아남을 기회를 줄 수 있는, 혜안 말이다.
랩퍼가 많아서 흔한 이름은 기억하기 어렵다. 그래서 특별한 이름을
생각하다가 사람들이 나보고 자꾸 크다고 하니까 '자이언트' 그런데
여자니까 '핑크' 그럼 '자이언트
핑크?' 이래 놓고 빵 터졌다. 그래서 이거다 싶더라.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 나를 '자핑'이라
부르고 있고, 신기했다. 그리고 이름이 입에 달라붙더라. 사실 원래 <쇼미더머니
5> 나가기 전에 이름을 바꿀까 생각했거든.
이유는?
소속사에서 이름이 약간 외설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해서. 사실 나는
그런 생각을 못해봤는데 사람들 생각이 다양하니까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이름에 애착이 남더라. 고집이 생겼다. 그래서 욕 먹더라도 나는 자이언트 핑크를 하겠다고
했다. 욕 먹는 것도 사랑이라고, 내 이름이 기억해주는 게
어디야.
랩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너무 소심해서 시작한 거 같다. 사실 학창시절에 상당히 뚱뚱한 편이었는데
그래서 자존감이 떨어졌다. 이렇게 뚱뚱한데 누가 나랑 친구를 할까 싶어서 항상 남들 비위를 맞춰주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를 풀 곳이 없더라. 그래서
가사를 써서 친구에게 들려줬다. 나한테는 그게 통쾌했거든.
가사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어떻게 시작했나?
원래 R&B 힙합을 좋아했는데 아무래도 스무 살 때 자연스럽게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글을 쓰듯이 짜증나는 것들을 썼는데 그렇게 쓰다 보니 랩으로 해볼까 싶어서
과감하게 막 욕도 섞어서 썼다. 그러다 보니까 재미가 생기더라. 그러다가
가끔씩 친구한테 들려주기도 했다.
랩을 하면서 소심함이 극복되던가?
그런 거 같다. 아직도 소심함이 남아있지만 많이 나아졌다. 이젠 기분 나쁘면 할말은 한다.
과거의 본인에게 지금의 본인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겠다.
아무래도 옛날에는 남들 앞에서 노래하고 공연한다는 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거다. 심지어 옛날에는 남들 앞에서 잘 부를 수 있는 노래도 못 부르는 척했다. 그러면
사람을 웃길 수 있을 거 같고, 그러면 재미를 줄 수 있으니까. 옛날
성격은 이랬다.
랩을 한다고 하니 부모님께선 놀라지 않으셨나?
일단 화를 냈다. 왜 그렇게 욕을 많이 하냐고. 그리고 나는 당시에 랩을 잘 모르니까 그냥 무조건 욕을 해야 하는 줄 알았다(웃음).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거더라.
결국 랩퍼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계기는?
아무래도 랩을 하면 좋아해주니까. 사실 한때는 허스키한 목소리 때문에
좋은 말을 못 들었다. "여자 목소리가 왜 저래? 쇠
먹었나?" 이런 식으로(웃음)? 그런데 이젠 시대가 바뀌면서 이 목소리가 먹히더라. 듣기 싫은
보이스가 아니라 개성 있는 보이스로 인정 받게 되고.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하게 됐다. 아무래도 칭찬에 훅 올라가는 타입이라, 자신감이 생겼다.
<언프리티
랩스타 3> 초반에는 우승 후보 0순위였는데 후반부에는
탈락 위기까지 몰렸다.
사실 댓글을 많이 보는데 초반에는 칭찬이 많아서 좋기도 했지만 부담도 됐다. 그래서
잘 하려고 가사 쓰는데 공을 들이면서 점점 가사 고치는데 시간을 많이 쓰다 보니 외울 시간이 모자라게 됐다. 다음엔
안 그래야지 싶다가도 사람 욕심 때문에 또 그렇게 되고. 사실 3일마다
트랙 미션을 하나씩 수행하면서 가사 쓰고 무대에 올라가는데 항상 '이 주제를 내가 어떻게 풀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날 뽑아줄까?'란 고민을 하게 됐다. 욕심과 부담감 사이에서 숨막히는 대결을 거듭하니
너무 힘들었다. 그러다 결국 7번 트랙까지 음원 하나 따지
못했다. 그래서 파이널 무대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했다.
결국 파이널 무대는 완벽하게 소화했다.
관객들 앞에서 공연할 때랑 프로듀서 앞에서 경연할 때랑은 기분이 다르다. 일단
긴장감부터 환경이나 분위기까지. 일단 즐기면서 랩을 해야 하는데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고 있다는 느낌
자체를 즐길 수 없으니까 불편했다. 랩을 하는 게 아니라 프로듀서 님이 원하는 걸 들고 왔다는 느낌이라
부담감이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언프리티 랩스타 3>에 참가했을 때 트랙을 따는 것도 중요했지만 큰 무대에서 열리는 파이널 공연을 너무 하고 싶었다. 그런데 자꾸 실수를 하면서 끝까지 갈 수 있을지 불안하더라. 그래도
다행히 끝까지 왔고 최대한 즐긴 것 같다.
만약 우승을 못했다면?
아무래도 자신감이 떨어져 있지 않았을까? 사실 나는 서바이벌에는 잘
안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걸 즐기는 애들도 있긴 하더라. 특히 연습생이나 아이돌 출신들은
항상 경쟁해온 애들이라 익숙해 보였다. 나는 누굴 이기려고 해본 적도 없고, 항상 혼자 해왔기 때문에 쉽지 않더라.
앞으로의 계획은?
당장 구체적인 건 없는데 아직 앨범을 낸 적이
없어서 앨범을 내고 싶다. 최대한 빨리.
(ELLE KOREA NOVEMBER 2016 NO.289 'ELLE INTERVIEW')
그래서 다들 무대 경험이 풍부할 거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솔로
활동은 2012년도에 발표한 EP 앨범을 통해서 처음이었는데
그때 솔로로 활동하는 아티스트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3분 30초를
혼자 다 이끌어 간다는 게 쉽지 않더라.
맏언니이자 선배로서 부담되는 자리였을 것
같은데.
다행히도 첫 미션부터 박살 났지(웃음).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꼭 제일 잘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알게 돼서.
랩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혹시 UP라는 그룹의 '뿌요뿌요'라는 노래 기억하나? 그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항상 랩 부분을 외우지
못해서 직접 개사해서 랩 부분은 내 마음대로 불렀다. 그리고 그 다음부턴 아예 힙합곡에는 내가 랩메이킹을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자연스러웠다.
랩퍼가 될 거라 생각했나?
사실 가수가 되고 싶었지만 내가 노래를 못했기 때문에 노래에 도전하진 않았고 힙합곡에 가사를 쓰면서 랩스타를
꿈꿨지. 사실 스무살이면 랩스타가 돼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허니패밀리로 활동하면서 그 꿈이 이뤄질 거 같았는데 알다시피 잘 안됐다. 그 이후로 꿈을 접을까 하다가
브라운아이드걸스라는 그룹에서 여자 랩퍼를 구한다고 해서 그렇게라도 음악을 계속 하자고 생각하며 멤버로 들어갔다.
<언프리티
랩스타 3>에 출연을 결정한 이유는?
솔직히 죽을 때까지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프로그램이었다. 주변에서도
진짜 잘해도 본전일 거란 말이 많았다. 그런데 시즌2 때부터
회사에서 나가보자고 하더라. 계속 고사했는데 갑자기 정면돌파하자고 생각했다. 출연하지 않으면 비난도 안 받겠지만 얻는 것도 전혀 없을 테니까. 결국
도전해보고 변화를 느끼고 싶었다.
어린 후배들과 경쟁하는 건 어땠나?
어린 친구들의 패기가 정말 부럽다고 생각하고 인정할 수 있었다. 나도
어릴 때는 그랬으니까. 그래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거 같다.
나이 든다는 것이 두렵지 않나?
여자라서 두려운 건 있다. 아무래도 여자는 좀 더 젊고 어려야 주목을
받게 되니까. 그런데 나이 먹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두렵다고
해서 피할 수는 없으니까. 결국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내가 어떻게 타계해 나가야 할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 같다. 어쩔 수 없으니까.
방송 상으론 상당히 안정적인 느낌이었다.
다들 그렇게 보였다고 하더라. 실제로는 방송 녹화 기간 내내 심리적으로
불안정했다. 다만 카메라 앞에선 계속 마인드컨트롤 했던 거지. 혼자
작업실에서 가사 쓰면서 종종 땅을 치고 울기도 했다. 이걸 내가 왜 한다고 했을까, 이러면서(웃음). 그러다가
마음을 다잡고, 결국 TV로는 마음을 다잡은 상태만 나갔겠지(웃음).
허니패밀리 시절에 함께 활동한 길이 프로듀서로
나왔다.
사실 허니패밀리 출신 오빠들은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첫 미션의 프로듀서부터 길 오빠가 왔다. 그 다음 미션에선 쿠시가 나왔고, 산이나 스윙스도 안면이 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못한 건가. 생각해보니 안면이 전혀 없는 딘의
트랙 미션은 우승한 거 보니까(웃음)? 아무튼 길 오빠가
처음에 나온 덕분에 마음의 준비는 확실히 됐다. 앞으로 어떤 사람이 프로듀서로 나와도 다 받아들이자고, 내가 알던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게 될 거라고, 마음이 단련됐다.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랩 부분은 직접 작사해서
앨범에 작사가로 이름을 올렸다.
랩 파트는 전문적으로 랩메이킹을 해주던 분들이 있었고, 그분들이 만들어준
대로 랩을 했는데 그런 관례를 깨고 싶었다. 그래서 랩 부분은 내가 쓰겠다고 했고, 랩 부분에 대한 저작권도 보장해달라고 주장했다. 사실 기성 작사가
입장에선 원래 본인 몫이었던 저작권을 왠 어린 애한테 내줘야 하는 거니까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내게도
도전이었다. 결국 의사를 관철시켜서 1집부터 작사가로 앨범에
참여했다.
여자 랩퍼는 남자 랩퍼보다 실력이 부족하다는
인식을 어떻게 생각하나?
사실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는 남자나 여자나 공평하다. 의지만 있다면
다 할 수 있다. 다만 여전히 랩퍼가 되려는 여자가 수적으로 적은 것뿐이지. 그러니 당연히 인재풀이 좁아지고, 인재풀이 좁으니 전체적인 실력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거다. 천재적으로 잘하는 친구들이 있다고 해도 평균적으론 어쩔 수 없지. 단지 그 차이인 거 같다.
결국
<언프리티 랩스타 3>에 나간 건 좋은 선택이었을까?
잘한 거 같다. 눈 가리고 모른 척할 수 없도록 지금 내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경험이었고, 덕분에 발전할 수 있는 변화를 얻은 것 같다.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가사를 써본 적이 없다. 아마 태어나서 가장
많은 노력을 한 시기였을 거다.
앞으로의 계획은?
몇 달 간격으로 음원을 지속적으로 발매할 계획을 갖고 있다. 아마
최소한 두 곡씩은 계속 발표할 거 같다.
(ELLE KOREA NOVEMBER 2016 NO.289 'ELLE INTERVIEW')
배우는 작품을 통해 이름을 얻는다. 브라이언 크랜스턴은 50세에 다다라서야 이름을 얻게 됐다. 정말 긴 기다림이었다. 인생의 반환점을 돈 시점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만난 배우의 절정, 어쩌면 이제야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브레이킹 배드>가
내 인생을 바꿨다." 그렇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브라이언
크랜스톤이 <브레이킹 배드>에 출연하는 동안 그의
입지는 확실히 달라졌다. 지난 2013년 다섯 번째 시즌까지
종영된 TV시리즈 <브레이킹 배드>는 2014년 에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하고, 배우 부문에서도 여우주연상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개 부문까지 수상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브레이킹 배드>의 알파이자 오메가라 할 수 있는 월터
화이트를 연기한 브라이언 크랜스턴 역시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브레이킹 배드>에 출연하며 네 번째로 받는 에미상 남우주연상이었다. 이보다
좋은 결말이 없었다.
<브레이킹 배드>는
일개 고등학교 교사였던 월터 화이트가 마약 업계의 거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본래 월트
화이트를 연기할 후보로 물망에 올랐던 건 크랜스톤이 아니었다. 존 쿠삭과 매튜 브로데릭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캐스팅을 고사하면서 크랜스턴에게 기회가 넘어왔다. 제작사
입장에선 크랜스턴이 탐탁지 않았다. <브레이킹 배드> 이전에
크랜스턴은 <말콤네 좀 말려줘>라는 TV시트콤으로 익숙한 배우였기 때문이다. 7년간 악동 같은 네 아들의
장난질에 샌드백처럼 당하기만 하는 아버지 역할을 맡아온 크랜스턴이 선악의 경계를 치열하게 오가는 월터 화이트를 소화해낼 수 있을지 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의 총괄프로듀서인 빈스 길리건은 크랜스턴을 믿었다. 빈스 길리건은 1998년에 연출한 <X파일>
시즌6의 한 에피소드에서 시속 50마일로 달리지
않으면 죽는 남자로 크랜스턴을 캐스팅했고, 그가 어두운 내면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임을 알고 있었다. 크랜스턴 역시 <말콤네 좀 말려줘> 이후로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낼 만한 캐릭터를 거듭 제안 받는 것에 대한 신물이 난 상태였고, 새로운 전환점을 찾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마약계의 대부가 될 남자일
것이라 예상하진 못했지만.
혹시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를
봤다면 크랜스턴이 출연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아마 대부분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라이언 가문의 4형제 중 막내를 제외한 모두가 전사했다는 보고를 받는 육군대령으로 잠시 등장할 뿐이니까. 심지어 엔딩 크레딧에도 '육군대령(War
Department Colonels)'이라는 역할로 표기되는, 이름도 없는 역할이었다. <브레이킹 배드> 이전까지의 크랜스턴의 경력을 보면 그가
할리우드에서도 특별히 언급될만한 배우로 꼽히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를 통해 그의 이름은 할리우드에서도 자주
오르내렸던 것이 틀림없다. 2011년부터 크랜스턴의 필모그래피에 지각변동이 생긴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컨테이젼>(2011)과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2011) 등
주목할만한 감독의 작품에서 연이어 모습을 드러냈고, 1990년도에 발표된 동명 SF고전을 리메이크한 <토탈리콜>(2012)과 벤 애플렉의 연출작이자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스릴러물
<아르고>(2012)에서는 시선을 끄는 역할로 자리하며 배우로서의 경력에 무게를
더했다. 심지어 범죄스릴러물인 <콜드 컴즈 나잇>(2013)에선 포스터에서부터 그에 대한 존재감이 달라졌음을 깨닫게 만든다. 동명 블록버스터를 리메이크한 <고질라>(2014)에서도 비중은 적지만 확실한 인상을 남긴다. 그리고
크랜스턴은 그의 인생에서 두고두고 중요하게 언급될 작품과 조우하게 된다.
전세계가 냉전으로 얼어붙은 1950년대에 매카시즘 광풍이 한창이던
미국을 배경에 둔 <트럼보>는 반공산주의를 표방하며
반자유적인 횡포를 일삼던 정부의 태도에 반기를 든,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에 관한 실화를
다룬 전기물이다. 할리우드의 인기작가였던 트럼보는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겠다는 명목으로
사회적 공포를 주입하는 반미활동위원회에 맞선 인물이다. 덕분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할리우드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된 그는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11개의 가명을 쓰고 B급 영화 시나리오를 대량생산하게 된다. 할리우드의 명품 작가라는
명예 대신 이야기를 만드는 기술자로서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가족을 위해 자신이 추구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된다는 과정이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화이트를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또한 연신 시나리오를
써내며 얻은 스트레스를 가족에게 전이시키며 의도와 달리 가족의 불행을 조장하는 트럼보의 히스테릭한 면모는
<브레이킹 배드>에서 악인의 카리스마에 탐닉하며 가족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월터
화이트의 이중성과 닮아있다. 크랜스턴은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처음 노미네이트됐다.
브래드 퍼먼이 연출한 범죄 스릴러물 <링컨 차를 탄 변호사>(2011)에 출연한 바 있는 크랜스턴은 브래드 퍼먼의 차기연출작인 <인필트레이터: 잡입자들>(2016)에서 주연을 맡았다. <트럼보>와 마찬가지로 실화를 바탕에 둔 이 작품은 콜롬비아의
마약왕이었던 파블로 에스코바의 마약 거래 내역을 확보하고자 5년간 잠입 수사를 펼친 미국의 관세청 특수요원
로버트 마주르에 관한 작품이다.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화이트가 하이젠버그라는 가명으로 신분 세탁을 하며 마약을 제조한 것처럼 <인필트레이터: 잠입자들>의 로버트 마주르는 밥 무셀라라는 가명으로 신분을
위장해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에 접근하고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무엇보다도 <브레이킹 배드>와
<트럼보> 그리고 <인필트레이터: 잠입자들>은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가장의 진심과 그 내면에
잠재된 캐릭터의 양면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브라이언 크랜스턴이라는 배우의 장기를 대변하는 공통분모의 사례처럼 보인다. 온화한 인상 뒤편에 잠재된 폭력성, 윤리적인 언어와 행동의 내면에
자리한 일탈적 본능, 안정을 추구하면서도 때론 쾌락을 탐닉하는 부조리함. 이 모든 이중성을 탁월하게 표현하는 재능이 그가 배우의 삶을 지속해올 수 있었던 비결이었을 것이다.
"캐릭터를 이해해야 한다.
진정으로 캐릭터를 이해하면, 삼투압 되듯이 캐릭터가 스며들 거다. 거기서부터 당신은 캐릭터를 필터 삼아 생각하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거기에 한 가지 방식만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식으로 그걸 이뤄내든 그 방법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크랜스턴은 지난 9월에 열린 에미상 시상식에서 다시 한번 남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된 바 있다. 존 F. 케네디의 암살 이후 국정을 이어받아
대통령직을 수행한 린든 존슨에 관한 실화를 극화한 TV영화 <올
더 웨이>에서의 호연을 인정받은 덕분이다. 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크랜스턴이란 이름이 주는 신뢰감은 보다 명확해졌다. 이제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나아갈 방향에 따라 걸어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