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스펙터>를 보고

cinemania 2015. 11. 11. 22:51

멕시코 시티의 죽은 자들의 축제를 배경에 둔 <007 스펙터>의 오프닝 시퀀스는 정말 멋있다. 상당히 유려하고 우아한데 거의 10여분간 몇 마디 대사만 존재할 뿐, 상당히 과묵한 시퀀스가 이어진다. 그리고 초반 5분 가량은 원신원컷에 가까운 편집술로 광장에서, 호텔 안으로 그리고 다시 호텔 난간을 넘어 옥상으로 제임스 본드의 동선을 미끌어지듯 따라잡는데 정말 홀리듯이 봤다.

 

<007 스펙터>죽은 자가 돌아온다(The dead is alive)’라는 자막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처음에는 조금 뜬금 없었지만 그 의도가 상당히 궁금했다. 결국 이 작품은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 역을 맡은 이후의 <007> 시리즈, 그러니까 <007 카지노 로얄>, <007 퀀텀 오브 솔라스>, <007 스카이폴>까지의 전작들을 갈무리하는 마침표처럼 보인다. <다크나이트 라이즈>와 같은 맥락의 영화라는 말이다. 시리즈의 마지막 퍼즐과 같은 것. 그만큼 앞에서 언급한 전작들을 보지 못한 입장에선 감상의 밀도가 조금 떨어질 가능성이 다분하다. 다니엘 크레이그 판본에서 빨래줄 같은 역할을 하는 베스퍼 린드의 이름은 <007 스펙터>에서도 당연히 언급되고 그 아래 지난 전작 세 편에 등장했던 악당 세 명 그리고 주디 덴치의 M까지, 그러니까 제임스 본드에 의해 죽은 자들과 그를 위해 죽은 자들이 모두 언급되고 간접적인 이미지로 노출된다. 지난 세 전작들이 전작과의 연결성을 중시한 경향이 있다면 이 작품은 그 세 전작의 여정을 완전히 갈무리하는 마지막 종착에 가깝다. <다크나이트 라이즈>와 같은 것이다. 결국 독립적인 작품의 만듦새만으로 이 작품을 감상하는 건 반쪽짜리 재미가 될 가능성이 크다.

 

사실 다니엘 크레이그의 판본 이전까진 이만큼 사적인 <007> 시리즈가 존재한 적도 없었다. <007 카지노 로얄>부터 <007 스펙터>까지 베스퍼 린드라는 이름이 계속 언급되는데 그만큼 공무를 수행하는 더블0, 세븐(007)’보단 제임스 본드라는 안티히어로의 숙명적인 다크나이트적 행보가 눈에 띄는 작품이면서도 <007 스카이폴>에 다다라서는 마치 제임스 본드라는 인물 탐구에 가깝게 변형된 인상도 있었다. 심지어 <007 스카이폴>에선 제임스 본드의 고향이라는 스카이폴에서 악당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한다. <007 스펙터>는 제임스 본드의 사유지로 변모한 시리즈의 숙명을 완전히 완수하는 작품이면서도 그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주디 덴치에 이어 새로운 M이 된 랄프 파인즈와 Q 그리고 머니페니 등 서브 캐릭터의 역할이 보다 활발해진 것도 그런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 같다. 팀워크가 돋보이는 후반부에선 마치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의 팀플레이를 보는 느낌이기도.

 

개별적인 작품으로만 보자면 전체적인 스케일은 상당히 팽창한 느낌이지만 밀도가 조금 떨어진다는 인상이. 멕시코시티, 로마, 오스트리아, 모로코의 탕헤르, 런던까지 상당한 규모의 로케이션 촬영이 추진됐는데 그만큼 상당한 볼거리가 존재하지만 동시에 각각의 도시마다 하나의 에피소드를 치고 빠지는 느낌이라 그 여정을 쫓아가는 것이 살짝 피로하다는 느낌도. 게다가 에피소드를 갈무리하는 방식에서 기이할 정도로 나사가 풀렸다 싶을 정도로 의도로 지나치게 간편해 보이는 사건 해결 방식을 보여주거나 갑작스런 전개를 보여주는데 그 중에서의 백미는 제임스 본드가 새로운 본드걸인 레아 세이두와 급작스런 베드신에 들어가는 상황. 물론 베드신은 안나온다. 베드신이 있었을 거라는 강렬한 전조 증상만 노출할 뿐. 아무튼 역대급 강적과 주먹다짐을 벌이고 겨우내 살아난 제임스 본드가 새로운 본드걸인 레아 세이두와 단도직입적으로 에로스의 욕망을 불태울 때는 상당히 웃겼다. 그런데 정말 웃기라고 넣은 것 같기도 하다. 최선을 다해서 치밀해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적인 느낌도 있고.

 

전작인 <007 스카이폴>을 생각해보면 제임스 본드가 한 마디로 내뱉는 단어가 있는데 부활(Resurrection)’이다. <007 스카이폴>은 이 키워드를 통해 영화를 함축한다. 자신의 어두운 기억이 잠재된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다시 살아나오는 제임스 본드를 그림으로서 완벽하게 부활이란 키워드와 맞아 떨어진다. 이번 작품에서 제임스 본드가 한 마디로 내뱉는 단어는 본능(Instinct)’. 이번 시리즈는 그만큼 본능적으로 사건을 해결하고, 육감에 따라 상황을 판단하고, 실제로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이끌려 에로스를 폭발시키는 장면까지 등장하는데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들도 이성적인 치밀함보단 동물적인 본능과 육감에 의한 결과로 점철된다. 그런 의미에서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해 보이는 이 작품의 부분적 헐렁함이 살짝 이해가 됐다. 생각해 보면 고전적인 <007> 시리즈들도 그렇게 치밀한 작품들은 아니었다. 마티니와 본드걸로 회자되던 시리즈가 이처럼 하이퍼 리얼리즘 스파이물로 변모한 건 결국 다니엘 크레이그의 판본 덕분이고 그런 이미지를 얻은 역사는 전체적인 시리즈의 역사에 비해 상당히 짧았다는 것이다.

 

어쨌든 결말은 소문대로 다음 시리즈 출연이 불투명해 보이는 다니엘 크레이그가 쏙 빠져도 상관 없을 만한 모양새다. 아쉽긴 하지만 한편으론 어차피 그 혼자서 끌어갈 수 있는 시리즈가 아니란 점에서 박수칠 때 떠나는 타이밍이기도. 확실히 얼굴에서 이제 피로감이 보인다. 어쨌든 궁금한 건 이후의 <007> 시리즈인데 언제든 제임스 본드 역을 갈아치워도 상관 없었던 역대 시리즈와 달리 지금처럼 완전히 사유화된 상태의 <007> 시리즈 이후에 이 시리즈는 또 다시 리부트의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 것 같기 때문. 007이라는 살인면허의 발급자를 시치미 떼고 다른 얼굴로 이양하기엔 다니엘 크레이그의 인상이 너무 강렬하게 남는다.

 

아무튼 개별적인 작품 속성에서 걸작이었던 <007 스카이폴>을 제외하고 <007 카지노 로얄> <007 퀀텀 오브 솔라스>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작품 자체의 모양새는 <007 스펙터>가 조금 떨어진다는 인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시리즈의 갈무리로서 제 몫을 해내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다크 나이트 라이즈>와 같은 것이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를 따라온 이들이라면 발을 디뎌야 할 마지막 다리라고. 그러니까 안 보고 배길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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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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