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7.01.19 너의 시대는. 2
  2. 2016.06.27 아시아 문화의 보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
  3. 2015.02.22 소년이 온다, 그 날이 온다.
  4. 2012.11.23 <26년> 단평
  5. 2011.05.18 5월 18일에 서서
  6. 2009.08.22 휴가, 광주, 친구, 추억 2
  7. 2008.05.26 080526

너의 시대는.

도화지 2017. 1. 19. 18:40

초등학교 3학년 때 광주에 내려갔다. 처음은 아니었다. 큰집이 광주에 있었기 때문에 명절 혹은 제사때마다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에 내려갔다. 어릴 때 차멀미가 심해서 귀 밑에 키미테를 붙이고, 버스가 출발하면 제발 이대로 잠들어서 광주에서 깨어나게 해주세요, 라며 빌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언제나 중간에 잠은 깼고, 여지없이 까만 봉투에 머리통을 처박고 흔들리는 오장육부로부터 기여 올라온 것들을 테이프를 되감듯 기워냈다. 다만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다. 완전히 이사를 갔으니까.


어쨌든 광주에서의 삶이 시작됐다. 당연히 전학을 갔다. 지금도 기억난다. 담임선생님을 따라 낯선 교실에 들어가 낯선 아이들 앞에 섰던 기억. 아이들은 시끄러웠고, 선생님은 이상한 발음으로 아이들을 조종했다. '아야, 조용 안 하냐. 인나. 엎쪄. 인나. 둔너. 전학생이 와씅께 조용해봐라잉. 아야, 이름 말허고 자기 소개해부러.' 구체적으론 못 알아들었는데 어쨌든 자기소개라는 단어는 이해했다. 방과 후에 학급 반장이라는 여자 아이 집에 함께 갔다. 몇몇 아이들도 함께였다. 뭔 얘기를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선생님이 직접 반장에게 지시해 학교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했단다. 한 친구가 했던 말은 기억난다. "아따, 너 말 겁나 희한하게 해부러야." 표준어는 광주에서 겁나 희한한 말이었다. 아마 요즘은 이 정도까진 아니겠지만, 당시엔 그랬다.


어쨌든 광주에 살면서 나는 최루탄 냄새에 적응했다. 전집 옆에서 전 굽는 냄새가 나는 것이 당연하듯이 매년 5월 18일 즈음의 광주에서는 최루탄 냄새가 나는 것이 당연했다. 더운 여름에도 창문을 닫고, 익숙하다는 듯이 매캐한 냄새를 견뎠다. 그래서 가끔은 이제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이 아주 간혹 신기하다. 광주 사람들은 두 가지에 열광했다. 하나는 해태 타이거즈. 나도 어린 시절 야구를 좋아했다. 신문의 스포츠란에 야구 기사를 검은색 모나미 볼펜으로 줄을 그으며 볼 정도였다. 선동렬을 좋아했는데, 이종범은 사랑했다. 지금도 나는 그가 신인으로 데뷔했던 시절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한 한국시리즈에서 명백한 안타성 타구를 말도 안 되는 서전트 점프로 잡아내고는 등으로 떨어졌던 광경을 기억한다. 마이클 조단의 페이드 어웨이를 본 것 같았다. 그 뒤로도 지금까지 이종범이란 이름 앞에선 마음이 동하는 것 같다. 물론 그 시절의 해태 타이거즈를 기억하는 덕분에 기아 타이거즈 야구는 목이 막히는 기분이라 좀처럼 보기 힘들어졌지만.


두 번째는 김대중이다. 믿어지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광주 사람이라면 초등학생들도 대선 투표를 밤새워 봤다. 집안 어른들이 다 봤고, 아이들도 따라 봤다. 뭣시 중헌지는 자세히 몰라도 김대중 슨상님이 대통령이 돼야만 한다는 건 남녀노소 불문한 광주의 원기옥이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명확하게 기억나는 대선 투표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격돌한 1992년도였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이라 김영삼이 누군지는 잘 몰랐고, 김대중의 적이라는 건 알았다. 지금이야 개표 방식이 발달해서 개표 몇 시간 만에 누가 유력한 당선 후보인지 알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새벽 3시는 넘겨야 당선 유력 여부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아마 새벽 4시쯤이 돼서야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잠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난 뒤 누가 봐도 침울해 보이는 부모님 표정을 보고 안됐다는 것을 직감했다. 학교에 가니 선생님들도 침울했고, 교실 분위기도 그저 그랬다. "염병, 져브렀어야." 초등학교 친구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아마 나도 비슷한 말을 했던 거 같은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초등학생이 할 말이었던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알다시피 5년 뒤인 1997년에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당시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고, 초등학생 시절보다는 뭣이 중헌지 쪼까 아는 나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좀 더 간절한 마음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는데, 오메, 돼부러써야. 내 기억에 아마 그때 광주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2002년 광화문 광장 같은 것이었을 거다. 학교에 가니 선생님도 신났고, 교실도 신났다. 아마 교내 스피커에서 노래라도 나왔으면 다 함께 어깨에 손을 매고 기차놀이라도 했을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심지어 97년은 해태 타이거즈가 마지막으로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해였다. 사실 96년과 97년은 해태 타이거즈 팬들에게 굉장히 극적인 해였다. 


96년 시즌 당시 선동렬의 일본 진출과 김성한의 은퇴로 시즌 꼴찌까지 예상했던 해태 타이거즈는 이종범과 홍현우가 타력을 지배하며 예상 밖의 선전을 보이다 결국 시즌 중반부터 치고 올라와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달성하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했고, 현대 유니콘스와 붙게 됐다. 그런데 당시 해태가 2승 1패로 앞선 4차전에서 현대는 막강한 마무리 정명원을 선발로 기용하는 초강수를 뒀고 정명원은 해태에 사상 첫 한국시리즈 노히트 노런의 수모를 안기며 해태의 우승이 힘들 것이란 전망까지 부추겼다. 그런데 결국 우승을 맞이했고, 그 여세를 몰아 해태 타이거즈는 97년도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당시 97년도는 이대진이 17승을 올리며 최고 승수를 기록했고, 임창용이 커리어 하이를 찍었으며, 신인 투수 김상진이 한국시리즈 최연소 완투승을 올린 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97년도는 이종범이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마지막으로 우승한 해였고, 해태 타이거즈로서도 마지막 우승이었다. 기아 타이거즈와 해태 타이거즈의 역사는 동일하지 않으니까. 


사실 알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97년도는 IMF 외환위기로 나라 전체가 어지러웠던 해다. 아마 지금의 국정농단 사태를 제외하고 전 국민이 국가 경제와 정치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던 해가 아니었나 싶다. 그 해에 야구장은 텅텅 비었다. 해태 타이거즈가 우승하는 해에 무등야구장이 그렇게 비어있던 것을 본 적이 없다. 당시 해태는 재정 적자에 시달렸고, 우승했던 해에 주요 선수를 타구단에 팔게 된다. 97년에 해태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커리어 하이를 찍었던 임창용이 삼성 라이온즈로 넘어간 것도 이듬해였다. 이종범은 일본의 주니치 드래곤즈에 진출했고, 김상진은 98년 시즌 도중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 중 99년에 사망했다. 당시 해태의 팬들은 팀의 기둥과 반석이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허망함을 느꼈다. 에이스였던 이대진 역시 99년도에 어깨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했고, 장성호와 홍현우만으로 버티기엔 타선이 빈약했으며, 당시 광주일고 출신의 거포로 알려진 이호준은 부진했다. 어쨌든 해태 타이거즈의 역사가 기울어 가는 것을 느꼈고, 아마 나도 그 이후로 한동안 야구를 좀처럼 보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2009년도에 기아 타이거즈가 극적으로 우승했을 때엔 정말 잃어버린 시간을 찾은 기분이었는데, 그건 아마 기아에 이종범이 있어서였던 것 같다. 한국시리즈 7차전 9회 말 5대 5 동점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나지완이 휘두른 방망이에 맞은 타구의 궤적만으로 홈런임을 직감했을 땐 나도 모르게 '아악!' 소리를 냈다. 그리고 우승이 확정되고 모든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뛰쳐나와 얼싸안을 때 이종범의 우는 얼굴을 보며 나도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 덕분에 몇 년 간 기아의 답답한 야구를 보며 한탄하기도 했지만 그 전의 우울함 같은 건 사라진 것 같았다. 이종범이 우승해서 다행이었다고, 이종범이 우승하는 것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러니까 97년도는 내게 있어서 어떤 안녕 같은 해였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고, 해태 타이거즈는 마지막 절정을 보냈다. 물론 그 이후로도 대선이 치러지면 광주는 누군가를 선택했고, 여전히 기아 타이거즈를 응원하는 팬들이 존재한다. 다만 내가 광주를 기억하는 두 가지가 이제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김대중도, 해태 타이거즈도 없다. 그 부재를 통해 어떤 한 시절이 끝났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그리고 최근의 국정농단 사태 이후 광장에서 어린아이들을 목도하게 되면, 심지어 단상에 올라가 또박또박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유년시절 대선 개표 결과를 봤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올해 대선이 치러지게 되면 이 아이들도 TV 앞에 앉아서 개표 결과를 볼까. 그렇다면 이 아이들은 훗날 자신이 그러했다는 것을 기억할까? 궁금하다. 그 미래는 과연 어떤 미래일까. 그리고 너희들이 기억하는 지금은 무엇일까. 너희들의 광주는, 너희들의 김대중은, 너희들의 야구는 무엇일까. 문득 궁금했다. 궁금하다. 이제 나는 사투리도 쓰지 않고, 야구도 보지 않지만 그 시절의 광주와 김대중과 야구가 여전히 선명하기에, 부질없지만 그렇다. 궁금하다. 너의 시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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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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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향의 도시라 불리던 광주에 아시아문화의 허브를 표방하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열렸다. 낮은 자세로 임하듯 자리하고 있지만 놀라우리만큼 꽉 찬 공간이었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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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를 이제야 읽었다. 읽어 내려가며 속도가 붙으니 멈출 수가 없었다.  마음 속에 서리가 앉았다가 천불이 나서 죄다 증발했다가 이를 몇 차례 반복하고 나서 책장의 끝에 다다르니 재 같은 감상이 마음 아래 수북이 쌓였다. 마음 한 구석에서 시리게 얼어붙었던 결정이 끝내 뜨겁게 타버린 재의 형상으로 남아서 흩날려버릴 것 같아 무엇이라도 써서 기록하고 싶었다.

 

5 18일은 문득 잊고 살다가도 그 날이 오면 되새길 수 밖에 없는 그런 날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 부모님을 따라 내려간 광주에서 초, , 고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에 처음 들었던 전라도 사투리는 지금도 선명하다. “아따, 너 말 이상하게 한다잉.” 나는 표준어를 쓰는 이방인이었다. 어쨌든 그 친구들은 나와 함께 자랐고, 나 역시 조금씩 사투리가 점차 자연스러워졌을 무렵이 된 중학교 1학년 시절, 5.18을 보게 됐다. 유치원, 여중, 남중, 여고, 남고, 전문대까지,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꽤나 커다란 학원에 속해 있었고 우리는 종종 350원짜리 육개장 컵라면과 150원짜리 자판기 음료수를 사먹기 위해서 대학교 매점을 드나들었다. 그날도 어느 날과 같이 대학교 매점에 들어섰다. 그리고 벽을 봤다. 그날은 5 18일이었다.

 

어쩌면 얼굴이었으리라. 그러니까 그건 얼굴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는 폭력의 흔적들이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벽을 메우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검지를 엄지손가락에 대고 둥글게 말았을 때만큼의 크기의 사진들이었는데 내 키만큼 높고, 열 걸음쯤 옮겼을 때 끝에 닿을 만큼 넓게 상하좌우로 쭉 나열돼 있었다. 일그러지고 뭉개진 형상들마다 한때 누군가의 체온이 돌고 감정을 담았을 얼굴의 잔상이 미세하게 남아있었다. 그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살벌한 예감에 뒷골이 서늘해진다는 말을 체감했다. “, 글쎄. 사람을 탱크로 밀어버렸당께!” 이미 귓바퀴를 돌아 들어와 흩어졌던 어느 노인의 언성이 메아리처럼 가슴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노인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들이 좀처럼 흩어지지 못하는 연기처럼 매캐하다고 느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원망에는 굴뚝이 없었다. 그래서 아마 노인의 삶도 매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에게도 아궁이가 생겼다. 5 18일에 대해 뚜렷하게 자각하기 시작했다. 직접적으로 겪어보지 못한 내게도 그것은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의문이 됐다. 대체 왜 그랬을까?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어린 시절 매년 5월 즈음이 되면 광주 곳곳에선 최루탄이 터졌다. 충장로나 금남로 시내에서 터진 최루탄 냄새가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두암동의 우리 아파트 창문까지 와 닿을 정도였다. 그러니 그 주변을 지나기라도 한다면 목을 켁켁거리기 일수였지만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연례행사 같은 것이라서 되레 그런 기억이 과거형으로 저물어 아득해졌음을 문득 체감했을 땐 그렇게 됐음이 되레 생소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20대가 되어 광주를 떠나 서울로 다시 올라왔을 무렵에 5.18에 관한 사회적 인식은 조금 변한 것도 같았지만 여전히 노인은 굴뚝을 찾지 못했을 것 같았다. 때때로 '폭도'란 식의 무지한 언변을 뱉어내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건 그들을 탓해봤자 무력해지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건 내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그 이야기가 서울에선 손쉽게 생소해진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한 끔찍한 역사를 안고 사는 사람들의 영토가 있다는 것, 억울했다. 화가 났다. 슬펐다. 달랠 길이 없었다. 굴뚝이 없는 아궁이처럼 타 들어가는 속을 안고 그 시절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는 이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었다.

 

<소년이 온다>를 읽으면서 내가 마주했던 중학교 1학년 시절의 그 벽을 떠올렸다. 누군가에겐 이 소설이 그 벽과 같은 체험이리라. 물론 누군가에게 이 소설은 그저 끔찍하고 과장된 비극적 허구이리라. 하지만 권력의 첨탑 아래 짓뭉개진 얼굴의 반석 위에서 우린 서있고, 살아있다. 살고 있다. 살아서 살고 있다. 소설을 읽으며 나는 나의 무력감과 비루함을 연신 체감하고 되삼켰다. 만약 내가 그 시절에 태어나 광주에 있었다면 과연 나는 총을 매고 누군가를 대신해 내 목숨을 바쳐 순수한 양심을 헌화할 것이라고 다짐하며 기꺼이 행동할 수 있었을까. 나의 양심은 과연 광주에 있었던 그 도청에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 시대적 불의에 저항했다고 평가되는 누군가일 수 있었을까. 나는 대답할 수가 없다. 대답할 수 없어서 고통스러웠다. 여전히 끔찍한 역사는 제 자리를 맴돌고 있고, 뭉개진 얼굴들은 위로를 얻지 못한 채 그 벽 위에 서있다. 나는 여전히 그 벽 앞에 서있다. 5 18일은 올해에도 올 것이다. 그리고 또 지나갈 것이다. 아마도 나는 그 벽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미안하고 불안하기만 한 양심으로 그 벽 앞을 맴돌다 다시 한번 뒤돌아 서서 모른 체 1년을 보낼 것이다. 벌써부터 무력해진 마음이 타 들어간다. 연기가 자욱하다.

 

<소년이 온다>는 좋은 책이다. 이 책을 보고 목격해주길 바란다. 그 벽 앞에 서주길 바란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518일이 통감할 수 역사가 되길 바란다. 사람이 죽었다. 그날 사람을 죽였고, 사람이 죽었다. 그것을 함께 슬퍼하고 분노했으면 좋겠다. 왜 그랬을까?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 벽 앞에서, 함께 묻고, 함께 화를 내줄,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어찌해도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 어찌할 수 없는 물음을 던지며 살아가야만 한다. 그럼으로써 산 자의 삶은 더욱 살아갈 만한 것이 될 것이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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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단평

cinemania 2012. 11. 23. 13:41

강풀 작가의 <26>은 사연이 많은 소재를 장르적인 그릇에 담아서 그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영화는 원작에 비해서 호흡은 짧게 가져가야 하니 각색은 불가피하고, 실사화라는 표현적인 제한도 존재한다. 특별한 재해석 능력을 보여준다면 모를까, 원작의 의미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고자 한다면 본전 찾기도 쉬운 작업은 아니다. <26>은 그런 제약들을 뛰어넘은 영화적 성취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긴 어렵다. 압축된 초반 서사는 성기고, 변주된 일부 캐릭터는 비효율적인 경우가 발견된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뜨거운 감정이 차고 넘친다. 어떤 식으로든 1980 5 18일에 대한 감정이입에서 자유롭기 힘든 탓이다. 어떤 식으로든 냉정하게 보기 힘들다. 보는 내내 울화가 치민다. 미치도록 죽이고 싶어진다. 영화를 영화 자체로 보기 힘들게 만드는 이 놈의 현실이 문제다. 영화 하나가 짊어진 사연이 뭐 이리 무겁고 언제까지 애달파야 하냔 말이냐.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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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에 서서

도화지 2011. 5. 18. 19:44

5 18일이다. 문득 잊고 살다가도 그 날이 오면 되새길 수 밖에 없는 그런 날이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 부모님을 따라 내려간 광주에서 초, , 고를 졸업했다. 덕분에 5.18에 관해서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그건 일종의 한이었고, 넋두리였다. 하지만 그 넋두리에는 해소될 수 있는 굴뚝이 없었다. 5.18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어르신들 입은 좀처럼 흩어지지 못하는 연기 냄새로 매캐했다. 그 실체를 목격한 건 중학교 시절이었다. 유치원, 여중, 남중, 여고, 남고, 전문대까지,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꽤나 커다란 학원에 속해 있었고 우리는 종종 350원짜리 육개장 컵라면과 150원짜리 자판기 음료수를 사먹기 위해서 대학교 매점을 드나들었다. 어느 날과 같이 대학교 매점을 드나 들다 벽에 붙은 작은 사진들을 본 건 5 18일이었다. 그 뒤로 일주일 정도는 그 매점에 가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일그러진 얼굴들, 아니, 그러니까 그건 얼굴이 아니었다. 그냥 한때 얼굴이었던 것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뭉개진 핏덩이가 한때 감정을 담아내던 그것이었으리라는 추측만이 가능한, 그런 것이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크기로 모자이크처럼 붙어서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을 나는 살 떨리게 바라보고 있었다. “, 글쎄. 사람을 탱크로 밀어버렸다니까!” 어느 할아버지가 하던 말씀이 어쩌면 허풍이 아닐 것이라는 신의가 솟아날 정도로, 놀라운 광경들이 내 눈 앞에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내가 5.18에 관해서 인식하기 시작한 건 그 이후부터였다. 직접적으로 겪어보지 못한 내게도 그것은 일종의 울분이며 한이 됐다.

 

어린 시절 매년 5월 즈음이면 광주 곳곳에서는 최루탄이 터졌다. 충장로나 금남로 시내에서 터진 최루탄 냄새가 조금 멀리 떨어진 우리 아파트까지 닿기도 했다.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서 불편하지 않은 지경이 돼서 후에 그런 광경들이 생활로부터 멀어진 이후에는 되레 생소하기도 하였다. 광주를 떠나서 서울로 다시 올라왔을 무렵에 5.18에 관한 국가적 인식은 조금 변한 듯 하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진실은 요원하기만 했다. 때때로 무지한 언변을 뱉어내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건 그들을 탓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건 내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그 이야기가 지금 여기서는 배추도사나 무도사가 들려준다던 그 전래동화들보다도 생소하다는 사실이었다. 기념일이 되지 못할 정도의 그런 역사가 있다는 것 정도, 그것이 5.18에 관한 팔 할의 인식이었다.

 

개념이 없다는 말에는 두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개념을 배울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개념을 가르쳤음에도 개념을 세우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것. 후자는 절망적이나 전자는 희망적이다. 난 여전히 5.18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시간이다. 강물과 같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덩어리진 역사들은 쉼 없이 뒤로 밀려나간다. 우리는 거듭 기억될만한 역사들을 건져서 오늘로 안치시킨다. 5.18도 그 중 하나여야 한다. 5 18일이 아픈 날이 아니라, 기념할만한 역사가 되길 원한다. 전라도의 빨갱이 폭도들이 설쳐대던 날이라는 부지깽이 같은 언어에 휘둘리지 않는 역사관이 자리잡길 원한다. 29만원 짜리 화수분 통장으로 잘 먹고 잘 사는 살인마가 전직 예우를 받으며 살아가는 세상을 원래 그런 것이라며 웃어넘길지, 자유를 갈망하며 총을 들고 폭력적인 군부의 진압에 맞서 죽어나간 이들의 생이 있었던 어제를 지나 그저 오늘을 사뿐히 즈려밟고 살아가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인지, 그리고 어떤 것조차 알지도, 생각하지도 못한 채 그저 살아간다는 것이 옳은 일인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산 자들은 기억해야 한다. 5 18일이 또 한번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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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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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에 광주에 다녀왔다. 휴가라고 해봐야 어디 놀러 가는 취미도 없고, 차라리 오랜만에 친구들이 있는 광주나 다녀오자 싶었다. 세월이 많이 지나서 옛날보단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줄었다. 내 무심함의 탓이기도 했고, 말 그대로 세월 탓이기도 했다. 연락을 자주 못하는 만큼 멀어진 친구들도 생겼고, 세월이 지나 어른이 된 탓에 책임질 일이 많아진 친구들은 쉽게 짬을 내지 못하고 제 생활에 얽매여 있었다. 그 와중에도 많은 친구를 만났고, 하나같이 반갑거나 놀라웠다. 결혼을 앞둔 녀석도 있고, 곧 아버지가 될 친구도 있었다. 종종 연락해와서 어느 정도 근황을 아는 녀석도 있었던 반면,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처음 만나는 친구도 있었다. 많이 컸다. 비로소 실감했다. 내가 참 많이 컸다. 우린 늙어가고 있구나. 비로소 체감했다. 어른이 된 친구들은 제 각각의 방식으로 제 삶을 책임지며 살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갈피를 못 잡은 듯 불안해 보이는 녀석도 있었지만 적당한 확신을 손에 쥐고 앞으로 전진해가는 녀석도 있었다. 3 4, 엄밀히 말하면 3 3일이나 다름없는 일정 가운데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저 반갑기만 했다. 묵혀뒀던 옛 추억들이 세월을 먼지처럼 털고 언어로 재현되고 그때마다 우린 낄낄거리며 또 다른 기억을 파고 들었다.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자리가 즐거웠다. 오랜만에 내려간 광주는 많이 변했고, 친구들도 많이 변했지만 추억은 여전했다. 그것만으로도 즐겁더라. 다시 올라오기 싫을 만큼 행복했다. 그 기분에 취해서 담배를 다시 물게 됐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언젠가 폐암에 걸려 죽더라도 이 날만큼은 유쾌하게 기억하련다. 추억을 통해 또 다른 추억이 자란다. 친구란 그런 것 같다. 3년 만에 만나도 웃을 수 있는, 그리고 그렇게 만나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게 참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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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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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526

time loop 2008. 5. 26. 02:17
담배를 끊은지 1년하고도 3개월 정도 됐다.
참으로 오랜만에 담배 한 대 피고 싶어졌다.

세상이 하수상하면서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광화문과 청계천은 그리도 시끄럽다는데, 이리도 조용한 우리동네에 있으니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것도 같았다.
그 때 광주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문득 처연해졌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얼마나 절실할까, 또 한번 문득 처연해졌다.

몸이 기진맥진해서 혼미해진 정신이 간만에 돌아왔다.
덕분에 일거리는 쌓이고 의욕은 아직 부족하며 심란한 정세까지 눈에 들어온다.
세상은, 그리고 나는 이리 돌아가고 있구나.
밥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기운을 차려야지.
내 방의 평온함조차 지독하게 고요하여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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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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