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된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두려운 일이다. 가족을 위한 책임감은
무겁고, 세상의 풍파는 버겁지만 가족 앞에선 강인해야 한다. 그래서
아버지들은 끊임없이 휘청거리고 흔들린다. 그럼에도 아버지로서 한 걸음씩 나아간다. 그렇게 아버지는 성장한다. 그런 성장통을 겪는 아버지들에 관한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능력 있는 아버지는 부족함 없이
아들을 키웠다.아이는
건강했고,집안은
화목했으며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런데아이의 여섯 살 생일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아이가 태어났던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고,병원 관계자로부터 믿을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병원에서 아이가 바뀌었다고. 거짓말 같았지만
참말이었다.아들과
함께 했던 지난6년간의 삶이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 된 마당에서 아버지는 기로에 선다. 6년간
함께 한 정을 선택할 것인가.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유전자를 선택할 것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연출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던지는 물음표란 이렇다.
자식이 태어나면 남자는 아버지라
불린다. 하지만 아버지라 불리는 것과 아버지가 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10개월 동안 어머니의 몸 속에서 성장한다. 엄마와 함께 숨쉬고, 엄마와 함께 먹고, 엄마와 함께 잔다. 모성애라는 진부한 단어를 동원하지 않아도 어머니와
아이의 교감은 아버지가 끼어들 수 없는 한 몸에서 10개월 일찍 잉태되고, 그렇게 어머니가 된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아이란 한 몸이었던 적이
없는 미지의 존재다. 아이가 태어날 때 비로소 아버지도 태어난다. 아버지란
아이와 같은 출발선에서 함께 성장하는 존재인 것이다.
6년간 부자 관계로서 정을 나눈 아이가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 앞에서, 남자는 단호한 결심을 내린다. 친아들을 되찾자. 하지만 6년 만에 만난 친아들은 부유하진 않아도 자유분방한 가풍에서
자랐고, 엄격하게 일상을 통제하는 친아버지의 기대를 손쉽게 무너뜨린다.
좋은 아빠가 되기가 여간 힘들다. 심지어 자신을 길러준,
지난 6년간의 아빠를 찾아 떠나버린다. 그리고
남자는 문득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6년간 자신을 아버지라 부른 아이의 존재를, 새삼 되새긴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자신을 아버지로서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엄격함을 견뎌온 것임을 알게 된다. 어린 아들의 사려 깊음이 자신의 부족한 마음을 되레 채워주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아이가 아버지를
만든다.
<더 웨이>
의사인 아버지는 버클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이수 중인 아들의 미래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은 어느 날 갑자기 박사 과정
이수를 그만 두고 여행을 떠날 것이라 선언한 뒤, 정말 떠나 버린다.
하루 아침에 자신의 인생에 자부심이 됐던 아들이 등을 찌르는 배신감으로 돌변한다. 그런데
황망한 소식이 전해진다. 골프 모임 중 전화를 받은 아버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달려간 뒤 대서양
너머 프랑스 생장으로 날아간다. 아들이 죽었다고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폭풍에 휘말린 탓이라 했다. 아들의 유해를 챙겨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려던 아버지는 아들이
남긴 배낭을 보고 석연찮은 기분을 느낀다. 결국 아버지는 길을 나선다.
아들이 걷고자 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아들의 유골을 안고 대신 걸어가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더 웨이>다.
한때 아버지의 어깨에 올라타있던, 품에 안겨있던, 손을 잡고 있던 자식들은 필연적으로 아버지의 눈높이까지
자라 자기 인생을 논할 나이가 되기 마련이다. 어떤 아버지들은 자식과 대화하는 법을 익히며 진화했지만
어떤 아버지들은 더욱 깊은 침묵을 선택하며 뼈대만 남은 권위를 유지하려 한다. 그래서 자식들도 아버지
앞에선 침묵하는 존재로 성장한다. 하지만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했다. 아버지가 침묵하는 건 자식이 미워서가 아니다. 사랑하는 아들 혹은
딸에게 나약한 아버지로 기억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들은 나이가 들수록 외로워진다. 침묵을 고집할수록 말할 수 있는 길은 요원해지고 전할 수 없는 진심만 고독하게 맺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나선 아버지는
그 길 위에서 여러 번 아들을 마주친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빚어낸 착시겠지만 그 길에서 아버지는
비로소 아들과 대화를 나눈다. 아들이 걸었을지도 모를 길을 걸어나가면서, 아들이 봤을지도 모를 풍경을 보고, 아들이 만났을지도 모를 이들을
만나고, 아들이 느꼈을지도 모를 기쁨과 슬픔을 느낀다. 그렇게
아들을 만난다. 대화를 할 순 없지만 마음을 헤아리고 아들을 이해한다.
그리고 끝내 자신이 몰랐던 세계를 만난다. 자신이 직접 일러주지 않아도 아들이 찾아가려
했던 길을 걷고 알게 된다. 아버지의 이름에 갇혀서 보지 못했던 세계를 만난다. 아들의 마음을.
<이민자>
멕시코 불법체류자 신분인 아버지는
아들을 가난과 범죄로부터 보호하고자 좋은 학교가 있는 동네로 이사 가길 바라지만 불법체류자 신분으로는 하루 종일 녹초가 되도록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아들은 가난하면서도 매몰차지 못한 아버지가 부끄럽고 밉다. 그런 어느 날 아버지는 친척의 도움으로 트럭을 사고 청소 장비를 구매한다. 희망을
품는다. 아들에게도 들뜬 희망을 전한다. 하지만 한 순간의
방심으로 모든 걸 도둑 맞는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가 한심하면서도 걱정스럽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트럭을 찾으러 나선다. 그 와중에도 타인에게
너그럽고 조심스러운 아버지를 보면 울화가 치밀던 아들은 점점 아버지의 진심을 느끼고,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짚게 된다.
전통적으로 아버지는 경제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가난한 아버지는 자식 앞에서 면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가난한 아버지들은 자식에게 곧잘 미움을 받는 존재로 전락한다. 책임감을 떠안고 생업에 뛰어들며 온갖
고생을 견뎌도 여전히 가난한데 좋은 아빠가 될 기회도 아득하다. 자식 역시 밤 늦은 시간에서야 술 냄새를
풍기며 볼을 비비는 아빠에 대한 기억이 아름답기란 요원하다. 그 마음을 언젠가 이해한다 해도 대부분
늦다. 결국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분투하는 아버지의 행위란 필연적으로 외롭지만 견뎌야 하는 일이다. 자신이 추구하던 가치관이 무너지더라도 자식이 굶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자식의
행복이 인생의 우선적인 목표가 된다.
자동차 암시장에서 트럭을 찾은 아버지와
아들은 경비원 몰래 트럭을 빼내기로 결심하고 담장을 넘는다. 망을 보던 아들은 차를 탈취한 아버지가
총구를 겨누는 경비원의 경고에도 굴하지 않고 전진해 끝내 탈출하는 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지른다. 언제나
착해빠져서 답답했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존경스럽다. 하지만 그 환호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경찰의 단속에 차를 세운 아버지는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추방될 위기에 놓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미국인 신분을 취득한 누이에게 아들을 맡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만난 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남긴다. 가난하고 무력하기만 했던
아버지를 미워했던 소년은 아버지가 자신의 인생을 뒤로 제쳐두고 자신을 위해 살았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다.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스스로의 삶을 잊었다. 아니, 그것이 아버지의
삶이었다. 자신을 위한 삶에서 아들을 위한 삶으로 이민을 간 아버지.
어쩌면 모든 아버지들은 <이민자>일
것이다.
지난 20년간,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10편의 영화로 세상에 말을 걸었다. 그리고 답을
얻었다. 자신의 영화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음을. 영화가
언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만난 건 2009년이었다. 배두나가 주연을 맡은 <공기인형>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그를 인터뷰하게 됐다. 질문을 던지면
골똘히 생각한 뒤 차분히 답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주목하는 건 ‘일상의 빛나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의 시간이나 공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 보여주고 싶다”는
그의 답변은 그가 응시하는 세계관이 궁극적으로 나아가 닿길 바라는, 그의 이상을 짐작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의 이상적인 세계의 주인공은 그의 영화 속에 놓여있는 이가 아니다.
그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평범한 일상에서의 시간이나 공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 그의 궁극적인 바람일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누군가의 통증을 맞닥뜨려야만 한다. 그는
결코 손쉽게 행복을 전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위적인 고통을 주입함으로써 행복의 착시 효과를 조장하지도
않는다. 진짜 이 세계에 존재하는 혹은 존재할지도 모를 불행의 단면을 발췌해 주목하게 만듦으로써 자신이
영위하는 일상의 평온함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일 수 있는지 새삼 깨닫게 만든다. 이를 테면 <아무도 모른다>에서 냉정할 정도로 일관되게 유지하는 정서적
거리감이 그렇다.
비극적인 실화를 모티프로 둔 <아무도 모른다>는 부모로부터 버림 받은 것이나 다를 바 없는 네 남매를 응시하는 영화다.
그 시선엔 동정이나 연민 같은 것이 완벽하게 결여돼 있다. 카메라는 그저 그 삶을 철저하게
중계하는 수단에 가깝다. 비극을 통해 눈물샘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살풀이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관객은 그 참담한 상황을 마른 눈으로 끝까지 응시할 수밖에 없다. 눈물을
통해 그 고통에 공감했다는 면죄부를 얻을 길도 없다. 유기견처럼 방치돼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버거운
것인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당연하다는 듯 살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본다는 건 실로 참담한 일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런 식으로 실체가 훼손되지 않은 진짜 비극을 생생하게 목격하도록 만든다. 그럼으로써 ‘일상의 빛나는 순간’을 역설적으로 체감하도록 이끈다. 냉소적인 두 눈으로 고통을 관조하지만 결국 그 고통 안에서 가능한 희망을 건져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초기 극영화에서 TV 다큐멘터리 연출가로서의 흔적이
드러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인물의 감정에 개입하거나 이입하지 않도록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거리감을 두는 카메라의 중립성. 그리고 그는 연출 경력 초기엔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서 단서를 얻어낸
작품들을 더러 만들어왔다. 옴진리교의 테러 사건을 직접적으로 인용하는
<디스턴스>는 마을 사람들의 식수로 사용되는 호수에 독극물을 뿌리고 자살한 테러분자들의
죄책감을 떠안고 살아가야 하는 가해자 유족들의 삶을 그린다. <아무도 모른다>는 도쿄에서 벌어진 아이 방치 사건이 모티프가 된 작품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복수하고자 길을 떠난 사무라이의 화해를 그린 시대극 <하나> 또한 미국 9.11 테러 이후 복수와 증오로 점철돼가는 시대상에
대한 근심에서 잉태된 작품이다. 실제적인 세계의 흐름을 포착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시각이 극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자연스레 이동한 셈이다. 사후세계의 중립지대에서 죽은 자의 추억을 재현해주는 이들을
다룬 <원더풀 라이프>는 당연히 실화를 바탕에
둔 작품이 아니지만 실제에 가깝게 보이는 인터뷰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적인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한 사회적 관심을 바탕에 두고 탁월한 작가적 역량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보다 큰 의의가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걸어도 걸어도>에 대해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겪었던 후회가 반영된 작품이라고 밝힌 바 있다. 지극히 사적인 경험을 영화적 세계관으로 확장시킨 첫 작품이었다. 그
이후로 그는 사적인 경험을 보편적인 세계관으로 확장하는 작가적 역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 가운데서 가장 천진난만한 작품인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보다 오래된 기억을 길어 올린 작품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는
해에 첫눈에 반한 여자를 만나고자 가고시마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잠시 들렀던 사쿠라지마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연기를 뿜는 화산 주변에서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다들 왜 이렇게 태평이지? 화산이 분출하고 있는데”라는 대사로서 영화에 반영됐다. 한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사회파 다큐멘터리 감독의 시선과
사적인 세계에서 보편적인 철학을 발굴해내는 작가로서의 역량이 결합된 작품이다. 다섯 살배기의 딸을 통해서
모성과 부성이 받아들여지는 현격한 격차를 느끼게 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1970년대 도쿄에서 유아가
뒤바뀐 사건을 프리즘 삼아 이를 보편적인 이야기로 투영해보고자 마음 먹었다. 사회를 조망하는 전지적
시점의 관찰자에서 1인칭 시점의 작가로서 개인의 내밀한 심성 안에 잠재된 보편적 세계관을 탐구하게 된
것이다.
“당시 도쿄에서 일어난 사건을 세밀하게 그린 <아무도 모른다>를 본 미국 관객은 우리 동네에서도 그런
사건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스페인에서도, 토론토에서도, 프랑스에서도, <걸어도 걸어도>가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라 이야기하는 관객들을 만났다. 신기한
일이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철저하게 국내적인 걸 파고드는 것이 결국 그 끝에 놓인 보편성과 통하는 게 아닐까.” 단호했다. 일상 속에서 반짝하고 다가오는 특별한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것. 그것이 결국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음에도 모든 세계에 말을 걸 수 있는 비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오는 12월 개봉을 앞두고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최근작인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아마 그의 필모그래피 내에서 가장
보편적인 대중성을 갖춘 작품일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동명 만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그가 처음으로 연출한 극영화인 <환상의 빛>도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었다.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란
점에서 공통분모가 있지만 시작과 끝이라는 대비만큼이나 완전히 상반되는 정서를 품고 있는 작품이다. <환상의
빛>은 어느 날 갑자기 증발하듯 자살해버린 남편으로 인해 깊은 상실감을 체감하게 된 여자의 삶을
주목한다. 갑작스럽게 세상에 홀로 남겨진 자만이 체감할 수 있는 심연의 고통을 찬찬히 살피면서도 그녀가
끝내 생의 궤도를 찾을 것이라는 희망을 넌지시 짐작하게 만든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부모의 도움 없이 한데 뭉쳐 살아가던 세 자매가 배다른 여동생을 맞이하며 네 자매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다. <환상의 빛>이 내면으로 침잠하며 스스로의
외로움을 이겨나가는 내면적 성장의 이야기라면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크고 작은 갈등을 겪는 네 자매가 서로의 존재를 통해서 위로를 얻으며 삶을 찾아나간다는 점에서 외향적 성장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배다른 어린 네 자매의 척박한 삶을 중계하는 <아무도 모른다>의 맞은편에 놓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어떤 식으로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 세계 안에서 새로운 변곡점으로 언급될 것이다.
1995년작인 <환상의
빛>에서 2015년작인 <바닷마을 다이어리>에 다다르기까지,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총 10편의 영화를 연출해왔다. 그 너비만큼이나 영화적 세계관도 크고 작은 변화를 겪어왔지만 확실한 건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일관되게 남겨진
자들의 삶을 살펴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점차 그 삶에 애정을 드리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냉소적이다. 하지만 그 냉소는 결코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을 외롭게 내모는 사회를 향한 냉소다. 최근
발간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에세이집 <걷는 듯 천천히>에선
그가 품은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회에 대한 시각을 보다 명확히 읽을 수 있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실패까지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결국 문화로 성숙된다. 그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망각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에게 동물이 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정치와 언론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강하고, 가장 치졸한 폭력이다.” 이건 지금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결국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를 찾아낸 것이다. 사회에 대한 엄격한 시선과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통해서.
능력 있는 아버지는 부족함 없이 아들을 키웠습니다. 아이는 건강했고, 집안은 화목했으며 문제될 것은 없었죠. 아이의 여섯 살 생일을 앞둔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났던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고, 병원 관계자는 믿을 수 없는 말을 전했습니다. 아이가 바뀌었다는 거짓말 같은 말. 그리고 아이와 함께 했던 지난 6년간의 거짓말 같은 삶. 아버지는 기로에 섭니다. 6년간 함께 했던 정을 선택할 것인가,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유전자를 선택할 것인가. 현존하는 일본의 거장이라 해도 좋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던지는 물음표란 이렇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수면에 물방울을 떨어뜨려 번져나가는 동심원의 파문을 조용히 살피듯이, 무거운 주제를 사소하고 차분한 풍경 속으로 담담하게 떠내려 보냅니다. 그리고 정작 영화는, 엄밀히 말하자면 감독은 그 관계에 대해서 어떠한 할 말이 없다는 것처럼 당사자들의 선택을 객석에서 응시하듯 상황을 그려나갑니다. 이 영화에는 시점숏이란 게 희박합니다. 특정한 인물의 시선을 대변하는 카메라의 시점이란 게 좀처럼 발견되질 않죠. 전지적인 시점에서 이 영화 속의 상황이 중계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고로 사실상 이 영화에 개입하는 존재가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죠. 그리고 영화적 사연에 대한 판단을 극 속의 캐릭터들이 주도하는 상황처럼 그려냄으로써 관객에게도 판단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만 같습니다.
단순히 낳은 정과 기른 정 사이의 갈등을 담아낸 드라마 같지만 영화는 결과적으로 더욱 큰 범위의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객석에서도 어떤 판단에 동참하길 원하면서도 결과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강력하게 어필한다는 말이죠. 이 영화는 생물학적 아버지와 사회적인 아버지 사이에서 후자의 미래 그리고 사회를 보다 존중하고 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대안가족’의 형태라고 할까요. 인간의 갈등을 그리는 개인적인 드라마 같지만 결국 그 사소한 영역의 이야기엔 우주 같은 주의가 담겨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결말부에서 전달되는 거대한 진폭의 감동이 그 강력한 주의를 무의식적으로 환기시키고 증폭시키는 인상마저 듭니다.
물론 이 영화가 주장하는 것이 단순히 아이를 입양하자는 사회운동적인 메시지가 아닐 겁니다. 결국 우리는 사회적인 아버지가 돼야 한다는, 일종의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을 말하고 있는 것이겠죠. 저마다에겐 가족이 있고, 가정이 있겠지만 결국 이 사회라는 거대한 공동체에서 우린 다음세대를 위한 어른이 돼야 합니다. 생물학적 부모가 아니라 해도 부모와 같은 온기와 지혜를 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 영화는 그런 어른의 성장을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대단히 감동적이고, 숭고한 이야기이지요. 그리고 이토록 거대한 메시지를 이토록 사소하고 담백하게 해낼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능력일 테고요.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해낼 수 있다는 것, 고레에다 히로카즈야말로 진짜 어른이 아닐까 문득 생각하게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