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 시리즈를 이끄는 건 <반지의 제왕>으로 익숙한 피터 잭슨이다. 불가피한 이유로 길예르모 델 토로에게서 메가폰을 넘겨 받았다 해도 <호빗>은 끊임없이 <반지의 제왕>과 비교당할 운명을 타고난 작품이란 것이다. 그리고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는 새로운 트릴로지를 받치는 허리이자 전후를 잇는 다리 역할에 충실해야 할 두 번째 속편이다. 본격적인 서사의 진전이 이뤄진다. 트릴로지의 성패를 쥐고 있는 분수령이 되는 작품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속편 역시 초당 48프레임을 영사하는 하이 프레임 레이트(HFR) 방식으로 제작됐다. 사실 전작인 <호빗: 뜻밖의 여정>에서 HFR은 과욕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서사의 시동을 거는 첫 작품에서 이 특수한 기술이 효율적으로 활용됐다고 말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서사의 주행을 위해서 진로를 설계하는 목적이 강했던 첫 작품에선 액션신의 비중도 적었던 만큼 무언가 특별한 것을 보고 있다는 인상을 부여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역동적인 카메라의 이동을 통해서 공간 전반을 활용하는 몇몇 액션신에선 확실히 HFR의 장점이 부각되는 인상이었다. 스펙터클한 액션신과 이미지의 비중이 늘어난 이번 작품에선 HFR의 장점이 보다 뚜렷해 보인다. 특히 다이내믹한 카메라의 이동과 전방위적인 공간 활용이 빛을 발하는 협곡에서의 추격신은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에서 단연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원작자인 J.R.R 톨킨은 <반지의 제왕>에서 세계관의 자궁 역할을 한 <호빗>의 일부 설정을 수정했다. 피터 잭슨이 톨킨의 <호빗>을 바탕으로 원작과 다른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건 이와 비슷하다. <반지의 제왕>은 톨킨의 원작에 충실한 작품이지만 <호빗>은 오히려 <반지의 제왕>의 프리퀄로서의 목적에 충실하고자 원작을 적극적으로 인큐베이팅해낸다. 원작과의 연관성에 관대해질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는 훌륭한 각색물이자 <반지의 제왕>의 프리퀄로서의 목적을 확실히 달성하는 작품이다. 어떤 면에선 <반지의 제왕>보다도 피터 잭슨의 인장이 보다 확실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기술적 시도와 서사적 의도가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성공적인 트릴로지의 완결이 기대된다.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을 모티프로 제작된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와 마찬가지로 속편임을 자처하는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 2: 신비의 섬> 역시 쥘 베른의 세계관을 토대로 영화적 세계관을 구상했다. <신비의 섬>이 그것. 그리고 <신비의 섬>의 프리퀄에 가까운 <해저 2만리>도 일부 차용됐다. 심지어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와 로버트 스티븐슨의 <보물섬>도 영화적 아이디어에 기여했다. 하지만 전작이 그러했듯이 속편 역시 이 모든 문학적 텍스트를 충실하게 재해석한 작품이라기 보단 쥘 베른을 비롯해서 이 영화에 차용된 고전들의 세계관을 방아쇠로 삼아 3D 롤러코스터를 쏘아 올리는 작품에 가깝다.
전작에서 출연했던 캐릭터의 등장을 통해서 시리즈로서의 연결고리를 잇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 시리즈라는 정체성은 딱히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일단 전작에서 지질학자 삼촌과 함께 우연히 지구 속 여행을 떠났던 숀(조쉬 허처슨)은 조금 더 성장했고, 그는 현재 새로운 아버지 행크(드웨인 존슨)에 대한 거부감으로 갈등을 겪고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보내진 모종의 신호를 파악하고자 노력하던 숀은 그것이 모스 부호임을 알아챈 행크의 도움으로 그 신호가 오래 전 실종된 할아버지(마이클 케인)로부터 왔으며 할아버지가 신비의 섬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그저 쥘 베른의 세계관을 코스프레한, 할리우드발 3D 롤러코스터다. 쥘 베른 소설의 행간의 의미 따위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으며 그저 쥘 베른의 상상력을 테마파크 디자인 용도로 활용한 상업적 기획물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영화가 차용한 고전의 제목들은 사실상 잊어도 무방할 정도다. 그만큼 영화에서 언급할 만한 건 3D 입체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롤러코스터 비주얼인데 이런 측면에서 이 영화는 즐길만한 수준의 볼거리는 된다 말할만하다. 거대한 도마뱀의 추격신이나 거대한 꿀벌의 비행신 등, 3D 롤러코스터로서 최적화된 재미를 갖춘 신들이 종종 등장하며 눈요기를 채운다.
각본은 치밀하지 못하나 영화는 딱히 이런 요소들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관객 역시 이성적인 관람 자체에 대한 욕망을 버릴 때 편해질 수 있는 작품처럼 보인다. 그저 영화의 가이드에 따라서 스크린에 구현되는 테마파크 적인 세계를 체험하는 용도로서 이해할 때 편한 영화랄까. 이는 결국 3D 롤러코스터적 체험에 흥미가 없다면 호기심은 일찌감치 접는 편이 낫다는 말이기도 하다. 거대한 공룡과 같은 오락적 스케일을 그리고 있지만 정작 상상력은 공룡 두뇌만큼 빈곤하다. <달나라 탐험>을 제시하는 예고적인 결말 역시 무리수처럼 보인다.
‘미국의 톨킨’이라 불리는 조지 R. R. 마틴의 5부작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의 최종편 <드래곤과의 춤>이 지난 7월에 발간됐다. 첫 작품 <왕좌의 게임>이 발표된 건 1996년이었다. 그리고 2007년, HBO와 TV시리즈 제작이 논의됐다. 2011년 4월 17일, 10부작 중 첫 회가 방영된다. 약 220만 명의 시청자가 TV 앞에 모였다. 그래프는 내려가는 법이 없었다. 6월 19일에 방영된 최종회는 300만 명을 넘었다. <왕좌의 게임>은 IMDB의 역대 TV시리즈 순위 중 4위에 랭크됐다. 에미상 13개 부문 후보로 지명됐다.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에 비견될 반향이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이제야 한 시즌의 걸음마를 뗀 작품이 이처럼 성대한 환영을 받기란 드문 일이다. 마틴은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의 왕위 쟁탈전이었던 영국의 장미 전쟁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TV시리즈의 제작과 각본을 맡은 데이비드 베니오프는 이를 ‘중간계(middle-earth)의 <소프라노스>’라고 정의했다. 그러니까 <왕좌의 게임>은 악의 제왕을 물리치기 위해 벌이는 영웅전기가 아니란 의미다. <왕좌의 게임>은 ‘웨스테로스’라는 가상의 대륙에 있는 세븐 킹덤의 왕좌를 두고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판타지물이다. 스크린 너머의 가상의 세계는 흡사 중세 봉건주의 사회의 유럽을 옮겨놓은 것만 같다. 전쟁의 위협을 잊은 지 오래인 왕국은 태평성대 속에서 형성된 태풍의 눈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거대한 탐욕의 소용돌이는 드높던 명예를 목 베어 내걸고 조롱한다. 누군가는 이를 되살리기 위해 몸을 팔고, 어떤 이는 그 삶을 판다. <왕좌의 게임>은 이 거대한 세계관 속에서 꿈틀거리는 소돔과 고모라의 징후를 드러냈을 뿐이다. 선악의 대립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알을 깨고 나온 저마다의 욕망들이 눈을 뜨고 날개를 펼 때, 결국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웨스테로스의 여름은 지났다. 이제 본격적인 겨울이다. 냉혹한 전쟁의 계절을 그릴 2시즌 <왕들의 전쟁>은 내년 4월 봄에 방영된다.
(beyond 10월호 Vol.61 '2011 ENTERTAINMENT ICONS - BROADCAST')
이 마지막 편은 (원작을 읽었다면) 누구나 아는 그 결말로 나아간다. 해리 포터(다니엘 래드클리프)는 필생의 적 볼드모트(랄프 파인즈)가 자신의 영혼을 나눠 숨긴 호크룩스들을 찾아내 파괴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신변의 위기를 느끼는 볼드모트는 자신의 수하인 ‘죽음을 먹는 사람들’을 동원해서 해리 포터와 그의 주변 인물들을 압박해 나가고 그 위협은 호그와트까지 번져나간다. 그리고 해리 포터와 그를 위시하는 마법사들은 호그와트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해리 포터>시리즈는 영웅적인 면모를 타고난 해리 포터의 성장통을 다룬 어드벤처 판타지물이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난다.’
바야흐로 10년이다. <해리 포터>시리즈가 스크린에 살아 움직이는 실물로 구현되기 시작한 것이 말이다. 그 10년 사이, 솜털 보송보송한 소년은 거뭇거뭇한 수염이 제법 눈에 띄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 10년이란 세월 동안 어린 마법사들을 성장시킨 호그와트의 풍경도 어둡고 음산한 세기말적인 기운에 지배당했다. 그 호그와트를, 그리고 그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청년이 된 소년들이 악과 맞선다.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2>는 바로 그 대단원의 결전을 향해 나아가 닿는 시리즈의 마지막 장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더 이상 해리 포터라는 아이콘을 기다릴 수 없는, 작별의 인사를 던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
영화화된 여섯 번째 시리즈까지와 달리 2부로 나뉘어진 마지막 편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은 이 시리즈 안에서 가장 좋은 조건을 확보해낸 작품이다. 영화화된 <해리 포터>시리즈가 지닌 최고의 장점이라면 (최소한 원작을 먼저 섭렵한 독자들에게) 스포일러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때때로 단점으로 작동하기도 했는데, 이를 테면 원작에서 느낄 수 있었던 세밀한 요소들의 재미가 서사의 축약 안에서 손쉽게 손실되는 과정이 발생하기도 했던 것이다. 저마다 장대한 서사를 지닌 각 시리즈들이 한 편의 영화로 완성된 것과 달리 시리즈의 마지막을 상하로 나눈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은 긴밀한 호흡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는 야심처럼 보인다. (물론 이는 상품성이 막대한 이 시리즈의 유효기간을 보다 넓게 확보하겠다는 의도로도 읽힌다.)
지난 시리즈들이 언제나 그러했듯이 이번 마지막 시리즈 역시 텍스트를 이미지로 치환해내는 작업에 가깝다. 그리고 전작들에 비해서 보다 너른 러닝타임을 확보한 이번 시리즈는 이를 바탕으로 원작을 텍스트를 보다 충실하게 이미지로 세워 넣는다. 결말을 위한 전초전으로 완성된 지난 1부를 잇는 이번 작품은 전편과 마찬가지로 어둡고 음울하며 비장하게 정해진 결말로 걸어나간다. 그 비장함을 상기시키는 건 어둡고 음울해진 세계 속에서 외롭게 임무를 수행하는 아이들이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데이비드 예이츠는 핸드헬드와 클로즈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스크린에 불길한 심리 속에서도 성숙해진 아이들의 비장한 면모를 새겨 넣는데 주력하고 있다. 특히 호그와트에서 펼쳐지는 격전은 이번 작품뿐만 아니라 전 시리즈를 관통하는 클라이맥스다. 그 가운데서 볼드모트와의 숙명적인 대결을 벌여야 하는 해리 포터가 자신의 생을 걸고 그와 맞서야 하는 외로운 임무를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은 한 소년의 통과의례적인 통증으로 와 닿는다.
제각각 완성도의 편차를 지닌 이 일곱 편의 시리즈가 비로소 마지막 관문에 다다랐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이벤트다. 그리고 해리 포터를 지켜보며 성장한 팬들에게도 이는 남다른 의미를 품게 만든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스크린 진출을 가능케 했던 것이 할리우드 자본의 동원이기 이전에 전세계적인 팬덤으로 이뤄진 시장의 형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식한다면 이 마지막 편을 목도할 팬들의 심정이란 제 자식을 떠나 보내는 어미의 마음과도 비교할만하다. 호그와트에서 마법에 입문한 아이들은 이제 그곳에서 배운 지식과 기술로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 스스로 골고타 언덕에 올라선 아이들은 끝내 자신들의 의지로 세계를 구하며 성장과 성숙의 여정을 완성해낸다. 비로소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영국의 가난한 싱글맘 조앤 K. 롤링을 전세계적인 판타지 작가로 등극시킨, 마법 같은 태생 실화를 지닌 이 소설이 영화화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머글들은 그 세계를 동경하듯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도 여기까지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보고 자란 이들의 감상이 특별할 수 밖에 없는 건 그들이 애정을 담았던 그 세계와 진짜 이별을 고하고 안녕을 기원해야 하는 애틋함 덕분일 것이다.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2>는 그 애틋한 안녕을 고하는 팬들을 위로하는, 진정한 유종의 미다. 마법은 끝나도, 추억은 남는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영화에서 영상기술의 발전은 장르의 개척을 가능하게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SF와 판타지 장르에서 거둔 성과들은 이런 전제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사례일 것이다. CG기술의 발전은 형이상학적인 상상력을 형이하학적인 표현력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들의 표현이 가능해짐에 따라 자연스레 장르 개척의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이 현실에서 가능해졌다. 1982년에 공개된 <트론>의 속편격인 <트론: 새로운 시작>(이하, <트론 2>) 역시 바로 이런 영상기술의 발전을 통해 얻어진 표현의 가능성에서 비롯된 기획이다.
오늘날의 기준에서는 조악한 이미지의 결과물처럼 보여지는 <트론>은 당시만 해도 혁신적인 실험작이라 평가 받는 작품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이미지화한 8비트 게임 영상 수준의 그래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상의 세계는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당대에서는 보기 드문 실험적 작품으로서 평가 받았다. 이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둔 아이디어가 표현 기술의 발전 속도를 앞서 구현된 사례로서도 유용하다. 마치 10년 전에 <아바타>가 나온 것과 비슷한 이치랄까. 이는 결과적으로 실험적인 도전으로서의 가치를 벗어나서 그 조악한 이미지가 이룬 결과적인 성과, 즉 도스 체계로 운용되는 8비트 컴퓨터의 베이직한 프로그램 원리를 비유적인 이미지로서 치환한, 가상의 평행우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컬트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그 조악한 영상이 되레 단순명확하게 컴퓨터의 프로그래밍 원리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트론>(이 제작된 시대)에 비해 진일보된 영상기술을 활용한 <트론 2>는 그런 장점을 통해 전작과 차별화된 감상의 묘미를 발생시킨다. 서사적으로 속편에 가까운 <트론 2>는 전편의 바탕을 이루던 컴퓨터 체계의 평행우주 세계관 ‘그리드’를 비롯해서 ‘광선 바이크’ 레이스나 ‘디스크 배틀’과 같은 볼거리의 이벤트를 동일하게 등장시키면서도 상대적으로 보다 화려해진 이미지의 미장을 통해 리메이크의 의미를 부여해도 상관없을 결과물을 완성했다. 어두운 무채색의 색상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조도가 높은 형광색 띠가 곳곳에 배치한 ‘그리드’의 이미지는 과장된 빛의 황홀경에 가까운 감상을 부여함으로써 가상세계에 대한 환상을 더욱 부추기며 언어 그대로 레이저쇼를 구경하는 듯한 관람의 재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트론 2>는 그 현란한 빛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심심한 영화다. 말 그대로 구경에 가까운 재미라는 건 <트론 2>의 장점이라기 보단 단점에 가깝다. <스피드 레이서>가 연출해낸 비현실적인 레이싱 경기와도 비교해봐도 좋을 <트론 2>의 광선 바이크 레이스는 바이크를 따라 흐르는 빛의 물결을 구경하게 만들면서도 레이스의 속도감이나 긴장감을 차단해버린다. 이는 곧 그 화려한 이미지의 향연이 쾌감의 속성으로 연동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는 <트론 2>를 두른 모든 이미지의 결과적 감상과 연결된다. <트론 2>는 <트론>의 시대보다도 진화된 컴퓨터 프로그래밍 체계를 포섭하며 보다 광활해진 전자신호 시스템의 세계를 보다 화려해진 영상으로 표현해낸다는 점에서 전작의 야심에서 보다 나아간 기획물이다. 보다 진일보된 영상은 이를 대변하는 핵심적인 근거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트론 2>는 조악했던 전편이 얻어낸 컬트적인 의미로부터 차단된, 발전된 이미지를 과시하는 평범한 공산품으로서 퇴보된 작품처럼 보인다. 미학적으로 흥미로운 이미지의 세계관을 설계하고 구상했으나 그 모든 이미지마저도 결국 전작이 마련한 세계관의 발전적 차용에 불과하다는 점에서도 창의적인 결과물은 아닌 셈이다. 눈부신 이미지의 향연 속에는 감흥이 결여돼 있다.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의 세계관과도 비교할 만한 기계와 인간의 대립, 혹은 정보를 독점하는 시스템 속에서 발생하는 정보적 약자들에 대한 억압과 같은 현실 체계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트론 2>는 전작과 일맥상통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하지만 딱히 탁월한 스토리텔링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하기 힘든 전작만큼이나 속편의 기승전결 역시 세심하게 세공되지 못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극적 긴장감의 결여는 전시적 용도로서의 기능성을 뛰어넘지 못하는 이미지로부터 기인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클라이맥스의 구심점을 마련하지 못한 무미건조한 이야기의 흐름이 이를 부채질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게다가 <트론>의 속편으로서 ‘트론’이라는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롤타이틀 무비가 정작 ‘트론’이라는 제목을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의아한 일일 것이다.
17살이 되는 해리 포터(다니엘 래드클리프)를 맞이하는 건 죽음조차 불사해야 하는 고난이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사람’, 볼드모트(랄프 파인즈)를 상대할 희망이라 믿었던 호그와트의 교장 덤블도어(마이클 갬본)는 죽었고, 호그와트는 볼드모트를 추종하는 ‘죽음을 먹는 자들’의 수중에 넘어갔다. 마법부의 존립마저 장담할 수 없는 마법세계로 언론과 권력을 장악한 볼드모트의 공포가 짙게 드리워져만 간다. 그리고 해리포터와 론(루퍼트 그린트), 헤르미온느(엠마 왓슨)는 볼드모트를 제거하기 위해 덤블도어가 남긴 표식을 따라 볼드모트의 영혼이 담긴 ‘호크룩스’를 파괴하는 여정에 나선다.
J.K 롤링이 집필한 판타지소설 <해리 포터>시리즈의 완결편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은 역대 시리즈 가운데 가장 어둡고 암울한 기운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마법세계를 어드벤처처럼 즐기던 호그와트의 소년, 소녀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고난에 대한 갈등에 맞서며 세계를 구하기 위한 막중한 임무를 짊어진 채 세상의 눈을 피해서 고립된 신세다. 볼드모트의 등장과 해리포터의 주변인의 죽음을 묘사하는 <해리포터와 불의 잔>의 결말부터 서서히 시리즈 위로 드리워지던 암울한 기운은 이번 마지막 시리즈를 통해 절정과 대단원의 클라이맥스로 승화된다.
결말의 전초전이라 할만한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1>(이하, <죽음의 성물 1>)은 덤블도어의 유지를 이어나가는 해리와 론, 헤르미온느의 위험천만한 여정을 담고 있다. 지난 6편의 전작에서 나름대로 천진난만한 마법 세계의 병풍이 되던 호그와트의 보호막이 사라진 <죽음의 성물 1>은 그만큼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로 일관된, 심정적인 진통이 거듭 이어질 뿐이다. 이 시리즈와 함께 성장하며 자신의 캐릭터의 역사를 몸소 증명하는 배우들의 외모와 같이 결말에 이르러 확실하게 시리즈의 성숙을 증명해내는 이번 편은 그만큼 이 시리즈에 대한 애정의 여부를 시험에 들게 만드는 최종관문이 될 것임에도 틀림없다.
일단 역대 시리즈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의 시리즈를 두 편의 영화로 나누어 제작했다는 점에서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은 서사적으로 보다 탄탄한 주행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고 할만한 작품이다. 그만큼 이번 영화는 지난 전작들에 비해서, 특히 <죽음의 성물>과 유사한 텍스트량을 지니고 있었던 몇몇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스토리의 집중과 선택이란 측면에서 무리수를 두지 않아도 된다는 혜택을 얻고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말에 다다른 이야기라는 건 곧 이 시리즈가 쌓아온 모든 역사와 정보가 총집결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전작의 스토리와 캐릭터들을 얼마나 잘 기억해내는지에 따라서 재미는 그만큼 늘어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무엇보다도 전작들에서 설명됐던 어떤 장면들이 단순히 보는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결말부의 서사를 수식하기 위한 복선의 요소로서 일찍이 장치된 것들이었음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번 마지막 시리즈는 전작들에 대한 기억력에 따라 보다 많은 재미를 누릴 수 있는 팬서비스의 기능성을 품고 있다. 수많은 인물들이 언급되거나 등장하고 이내 사라진다는 점에서도 이는 보다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동시에 내년에 후속편의 개봉을 예고하고 있는 이 불완전한 작품이 끝까지 고통과 번민으로 일관하고 있음은 (이미 원작을 예습한 독자들이라면 잘 알고 있겠지만) 곧 이어질 후속편의 클라이맥스에서 선사할 반전의 롤러코스터를 위해 마련된 ‘골고타의 언덕’임을 명심해야 한다.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과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를 연출한 데이빗 예이츠는 지난 전작이 얻었던 호불호와 무관하게 나름대로 이 세계관을 묘사하는 방식에 대한 일관성을 확보한 듯한 인상이 든다. 또한 결말로 치닫는 시리즈의 연출을 한 감독에게 연속적으로 맡긴 것이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수순을 밟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게끔 만든다. <죽음의 성물 1>은 전체적으로 암울해지는 마법 세계의 절정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 안에서 이 세계를 주시해온 팬들의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고 있으며 시리즈 자체의 흐름 안에서도 원숙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만한 위치에 놓여 있다.
물론 이 방대한 정보량을 품은 결말 시리즈를 고스란히 묘사하기 위해 140여분의 러닝타임을 지닌 두 편의 시리즈를 마련했다는 것마저도 완전한 만족감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하지만 러닝타임의 한계에서 보다 여유로워진 만큼 서사의 운용력은 확실히 나아진 인상이며 서사에 대한 이해도 한층 간결해진 인상이다. 특히 호그와트의 대전투를 그릴 최종 클라이맥스를 앞둔 이번 작품이 묘사하는 몇 번의 대결신은 적절한 서스펜스를 부여한다는 점에서도 이례적이다. 역대 시리즈 가운데 핸드헬드와 클로즈업을 가장 많이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캐릭터와 함께 성장한 어린 배우들은 아픈 만큼 성숙해진 캐릭터의 내면을 대변하고 있다 할만한 표정을 선보이고 있으며 이런 정서에 밀착하듯 표정을 잡아내는 영화는 그 자체만으로 이 시리즈의 성숙을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소년은 성장했고, 운명에 다다랐다. 달아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끝없이 고뇌하고 갈등하는 소년은 비로소 자신의 기구한 팔자가 비범한 숙명 안에 놓여 있음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씩 잃어가면서도 멈출 수 없는 여정을 계속해 나가야 하는 소년의 숙명과 그 숙명을 둘러싼 환경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이다. 먹구름과 같이 세계 위로 악은 쉽게 드리운다. 그 아래서 고군분투하는 작은 선이 서서히 빛을 밝힌다. 악에 잠식당한 세계가 불안에 떨 때, 작은 선이 서서히 불을 밝힌다. 어두운 세상에서 소년은 홀로 빛을 옮긴다. 이미 소년의 운명은 자명하다. 우리가 기대하는 바로 그 대단원으로 이야기는 옮겨가고 있다.
미국의 인기 애니메이션 <아바타-아앙의 전설 Avatar: The Last Airbender>를 영화화한 <라스트 에어벤더>는 물, 불, 흙, 공기로 세상이 이뤄졌다는 플라톤의 4원소설을 기초로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동시에 <라스트 에어벤더>의 세계관은 사실 현대 문명에 대한 우화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문명의 발전과 함께 자행되는 자연의 파괴, 그리고 제국주의의 정복적인 역사관에 대한 비판에 가깝다.
물의 왕국, 불의 제국, 흙의 부족, 공기의 유목민으로 이뤄진 <라스트 에어벤더>의 세계는 제국주의적인 야심으로 가득한 불의 제국과 대항하는 타부족인들의 저항을 그리는 영화다. 균형을 이루던 4개의 세계는 100년 전, 막강한 힘을 발판으로 전쟁을 일으킨 불의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혼란을 겪게 되고 억압에 억눌린 타부족인들은 물, 불, 흙, 공기를 모두 다스릴 수 있다는 에어벤더, 즉 아바타(Avatar)의 재림을 꿈꾼다. 그리고 어느 날, 남극의 빙하에서 한 소년이 발견된다. 아앙(노아 링어)이란 이름을 지닌 이 소년은 스스로가 아바타임을 밝히고 자신을 사로잡으려는 불의 제국 왕자 주코(데브 파텔)로부터 달아나며 모든 요소를 다루기 위한 수련에 매진한다.
M. 나이트 샤말란은 일찍이 초자연적인 신비에 대한 취향을 자신의 영화적 세계관에 적극적으로 반영해 왔다. 그가 <라스트 에어벤더>에 흥미를 느낀 것도 그 취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일관적으로 미스터리 장르에 가까운 필모그래피를 축적하던 샤말란이 <라스트 에어벤더>에 흥미를 느낀 건 아무래도 장르적 도전에 의미를 두고 있다기 보단 자연적인 요소를 기초로 둔 초자연적인 판타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라스트 에어벤더>는 샤말란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이례적인 동시에 이질적인 작품으로 기억될 것임에 틀림없다.
<라스트 에어벤더>에서 두드러지는 건 단연 볼거리일 것이다. 물과 불, 흙, 공기를 이용한, 즉 ‘벤딩 액션’이라고 부르는 <라스트 에어벤더>의 액션신은 CG를 이용해서 완성한 비주얼을 통해 시각적 재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라스트 에어벤더>는 지나치게 안이한 스토리텔링을 방관하듯 만들어진 영화다. 캐릭터의 등장부터 캐릭터간의 관계를 이루는 과정이,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모든 서사가 온전히 쉽고 편하게 진전된다. 간단한 설명만으로 진전되는 모든 인과관계의 흐름에는 정서적인 동의를 얻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결여됐다. 이는 곧 감상자로 하여금 영화에 감정적으로 참여할 가능성을 모색할 수조차 없도록 완벽하게 영화로부터 괴리시켜 버리는 과오나 다름없다.
물론 국내 개봉 전에 이미 북미에서 <라스트 에어벤더>에 대한 기록적인 혹평이 쏟아진 것에 비하면 이 영화의 만듦새는 꽤나 양호한 편으로 분류할만하다. 이는 샤말란이라는 작가적 감독에 대한 비아냥으로 읽힌다. 그의 필모그래피의 흐름과 함께 하락했던 평가의 관성들이 이 영화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어 일종의 묘한 경쟁으로 발전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만큼 샤말란이 여전히 주목 받고 있는 감독이란 사실을 역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 모든 외부적 분위기와 무관하게 <라스트 에어벤더>는 완전한 범작 혹은 그 이하다. 3부작을 완성하겠다는 샤말란의 야심 또한 백일몽에 불과하다 느껴질 정도로, 딱히 인상적인 성과도, 샤말란의 아이덴티티라는 인장도 발견되지 않는다. 작가주의적인 면에서도, 상업주의적인 면에서도, 온전한 실패다.
<트와일라잇>과 <뉴 문>에 이은 속편이라니, 적어도 두 편의 전작 가운데 하나라도 관람한 기억이 있는 당신이라면 이미 알아차렸어야 한다. 그것이 당신에게 즐길만한 것인지, 혹은 견딜 수 없는 고문인지. <이클립스>는 사실 더 이상 할 말이 필요한 작품이 아닐지도 모른다. 앞선 두 편의 작품, 특히 전작인 <뉴 문>은 이 시리즈의 방향성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가이드나 다름없는 작품이었다.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은 거들 뿐, 중요한 건 결국 틴에이저 할리퀸 로맨스라는 것. 평범한 소녀를 둘러싼 훈남들의 삼각구도 경쟁 구도라니, 이를 지켜보는 여인들의 마음에 지펴질 훈훈한 로망과 남정네들의 오그라든 손가락 위로 내뿜어질 냉담한 한기의 대립 구도가 되레 볼만한 구경거리가 될만한 것일지도 모를 이 시리즈의 관람 포인트란 다시 말해 이렇다.
<이클립스>가 전편과 마찬가지로 북미 오프닝 박스오피스 신기록을 경신해버렸다는 사실은 이 시리즈를 지지하는 만만찮은 팬덤의 실체를 가늠하게 만든다. 대단한 인기를 누린 원작팬들을 고스란히 상영관으로 끌어들인 이 시리즈의 저력이란 원작의 텍스트가 노골적으로 서술해내던 할리퀸 로맨스가 영상으로서 스크린에 투영된다는 점 정도랄까.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 시리즈가 누리는 대단한 인기의 저력 그 자체나 다름없다. 원작소설의 팬덤이 영화화된 작품으로 이어져 오는 과정은 단순히 계승이 아닌 폭발로서 위력을 더했다. 말 그대로 이건 현상이다. 작품의 기본적인 완성도를 놓고 <이클립스>가 어떤 작품인가를 설명한다는 건 꽤나 무력한 짓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경쟁 구도는 보다 심화되고, 이와 함께 특별한 혈통을 지닌 두 훈남 에드워드(로버트 패틴슨)와 제이콥(테일러 로트너) 사이에 놓인 소녀 벨라(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어장관리 능력은 보다 강화된다. 마치 햄릿만큼이나 심각하게 ‘뱀파이어냐, 늑대인간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고민을 오가는 벨라를 사이에 두고 전전긍긍하면서도 자신의 경쟁자를 향해 양 눈 가득 힘 준 두 청년의 러브스토리란 누군가가 보기에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인 동시에 낭만적인 것이 될 게다. 그리고 아주 간혹, 그리고 극의 말미를 잠시 지배하는 액션신은 이 시리즈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액션 따위는 필요 없어.
정리하자면 이렇다. 두 손을 모아 <이클립스>가 개봉되기만을 학수고대한 당신이 아니라 단순한 호기심에 상영관을 찾았다면 그 죽일 놈의 호기심을 판돈처럼 건 자신의 이성을 탓하시라. 게다가 이 시리즈는 여기서 끝이 아니며 그것도 단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원작의 최종편인 <브레이킹 던>은 두 편으로 나뉘어 제작된다 하니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기괴할, 하지만 폭발적일 이 현상은 앞으로도 당분간 유효할 것이다. 마치 제 몸을 갈라도 되레 두 개의 생명으로 분화되는 플라나리아를 보는 것마냥 끈질기게 등장할 이 시리즈에 발을 들일 것이라면 일찌감치 자신의 취향을 잘 판단하거나 혹은 시험에 들기 전에 각오라도 하시던가.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조언은 선택은 자유지만 책임도 자신의 몫이라는 것. 악마적인 매력에 헤어나지 못하던가, 악마의 유혹에 2시간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느끼던가, 빠져들거나 혹은 오그라들거나, 판단도 감당도 셀프다.
유년 시절 동명의 원작 게임을 즐긴 이들에게는 이름만으로 추억이 되겠지만 그 제목의 형태 이상의 의미는 염두에 두진 말 것. 마치 올드한 아케이드 어드벤처 게임을 상기시키듯 올드 패션한 어드벤처 무비를 완성시킨 것마냥 촌발 날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적당한 합의는 거둔 오락영화랄까. 투박하지만 활극적인 묘기에서 발생하는 서커스적인 재미를 즐길 수 있다면 그럭저럭. 하지만 그 빤하디 빤한, 종종 막무가내처럼 흐르는 서사와 액션을 즐길 수 없다면 맙소사.
제우스가 만들어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올림푸스의 신들도 욕망하는 존재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신의 군상이란 현대적 의미에서 당시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구적 세계관 속의 가공적인 캐릭터에 가까운 것이다. 곧 그리스 신화란 오늘날에 있어서 내러티브가 존재하는 판타지의 소스로서 유용하다. 인간을 탄생시켰다지만, 인간에 의해 창작되었고, 인간을 지배한다지만, 인간에 의해 완성된, 인간사의 또 다른 판본이나 다름없다. 특히나 창작력의 고갈에 다다를 정도로 컨텐츠의 소비가 극대화되고 리메이크가 득세하는 요즘의 시대에서 그리스 신화와 같이 방대한 세계관은 분명 아이템에 목마른 창작자들의 구미를 당길만한 화수분의 세계일 것이다.
1981년에 개봉된 <타이탄 족의 멸망 Clasf of the Titans>을 리메이크한 <타이탄 Clash of the Titans>은 시대의 변화만큼이나 영상기술이 진보했음을 뽐내는 작품이다. 원작이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스톱모션 기법을 활용하며 눈속임에 성공했던 것과 달리 근작은 근사한 CG를 동원하며 비현실성을 현실감 있게 표현해내는데 성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타이탄>이 원작을 보다 근사한 이미지로 재활용하는 작품으로서 유효한 것만은 아니다. <타이탄>은 원작을 비롯해서 그리스 신화의 내러티브 자체에 일부 변형을 시도하고, 이를 통해 근본적인 메시지를 얹어내려 한다. 그리스 신화 가운데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스만큼이나 잘 알려진 영웅 페르세우스(샘 워싱턴)에 관한 서사를 스크린에 펼쳐낸 원작처럼 <타이탄> 역시 페르세우스의 영웅담을 현대에 재생한다. 다만 신화의 플롯을 충실히 재현하는 원작과 달리 <타이탄>은 그 플롯을 활용하되 재가공한 뒤, 재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신과 인간의 혼혈아인 반신반인 ‘데미갓’ 페르세우스는 제우스(리암 니슨)로부터 물려받은 혈통을 범상한 재능이 아닌 저주 받은 운명처럼 여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망친 신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하데스(랄프 파인즈)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자신에게 닥쳐오는 운명의 과업들을 하나씩 헤쳐나간다. <타이탄>은 마치 <반지의 제왕>과 <스타워즈>를 비롯해서 갖가지 영웅의 성장물을 뒤섞은 클리셰 범벅의 영화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 영화에 반영된 것이 그리스 신화란 점을 염두에 둔다면 앞선 작품들의 연관성을 비교하는 건 딱히 효과적인 설명이 될 수 없다. 그리스 신화야말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서사에 깊게 관여한 스토리텔링의 원형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타이탄>은 페르세우스의 영웅담 가운데 중요한 맥락들을 원형에 가깝게 묘사하면서도 그 의미를 조금씩 변주한다. 메두사의 목을 베고, 페가수스를 타고 하늘을 날며, <타이탄>에서는 크라켄이라 소개되는 괴물을 물리치고 안드로메다 공주를 구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모든 에피소드는 페르세우스를 장식하는 무용담으로서 기능을 국한하지 않는다. <타이탄>은 마치 헤브라이즘에 저항하는 헬레니즘적인 영화처럼 보인다. 신의 폭정에 저항하는 인간들의 세계에서 신의 피를 물려받은 페르세우스가 그들의 구원자로서 활약하는 과정은 영웅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동시에 휴머니즘의 의미를 역설한다. <타이탄>이 비범한 일관성을 완벽하게 유지하는 영화라고 말하기란 어렵다. 캐릭터의 감정이나 태도는 종종 엇나가거나 방향을 잃고 그 진전을 무시한 채 무리한 선회를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타이탄>은 재능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천부적으로 대단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그 재능을 경멸하는 건 끔찍한 낭비라는 것을, 그리고 그 재능의 활용이 공공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이는 재능의 가치 자체에 대한 설득에 가깝다.
3D 비주얼을 내세우고 있지만 <타이탄>은 굳이 3D로 관람할 이유가 없는 영화다. 편광안경으로 인해 전반적인 색감이 훼손당하는 동시에 3D 입체효과가 이 영화를 유니크하게 만들 만한 뚜렷한 기능적 값어치를 해내지 못하고 있다. 물론 <타이탄>이 만들어내는 그리스 신화의 이미지들은 (종종 유치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괜찮은 볼거리가 된다. 사막에서의 전갈과의 전투나 메두사와의 대결 신을 비롯해서 크라켄이 등장하는 후반부 신은 액션 블록버스터로서 강력한 한 방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적절하다. 최근 할리우드의 블루칩으로 떠오르는 샘 워싱턴은 터프하면서도 강직한 영웅적 면모를 온 몸으로 드러낸다. 신의 세계에서 영웅이 된 인간의 활약상은 비주얼의 성과와 함께 텍스트로서의 흥미를 이끌어낸다. 그리스 신화가 현대에서 오락적으로 유용하다는 걸 증명한다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