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은 나의 힘, 자이언트 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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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은 나의 힘, 자이언트 핑크
우승 축하한다.
고맙다.
'자이언트 핑크'는 무슨 의미인가?
랩퍼가 많아서 흔한 이름은 기억하기 어렵다. 그래서 특별한 이름을 생각하다가 사람들이 나보고 자꾸 크다고 하니까 '자이언트' 그런데 여자니까 '핑크' 그럼 '자이언트 핑크?' 이래 놓고 빵 터졌다. 그래서 이거다 싶더라.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 나를 '자핑'이라 부르고 있고, 신기했다. 그리고 이름이 입에 달라붙더라. 사실 원래 <쇼미더머니 5> 나가기 전에 이름을 바꿀까 생각했거든.
이유는?
소속사에서 이름이 약간 외설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해서. 사실 나는 그런 생각을 못해봤는데 사람들 생각이 다양하니까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이름에 애착이 남더라. 고집이 생겼다. 그래서 욕 먹더라도 나는 자이언트 핑크를 하겠다고 했다. 욕 먹는 것도 사랑이라고, 내 이름이 기억해주는 게 어디야.
랩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너무 소심해서 시작한 거 같다. 사실 학창시절에 상당히 뚱뚱한 편이었는데 그래서 자존감이 떨어졌다. 이렇게 뚱뚱한데 누가 나랑 친구를 할까 싶어서 항상 남들 비위를 맞춰주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를 풀 곳이 없더라. 그래서 가사를 써서 친구에게 들려줬다. 나한테는 그게 통쾌했거든.
가사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어떻게 시작했나?
원래 R&B 힙합을 좋아했는데 아무래도 스무 살 때 자연스럽게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글을 쓰듯이 짜증나는 것들을 썼는데 그렇게 쓰다 보니 랩으로 해볼까 싶어서 과감하게 막 욕도 섞어서 썼다. 그러다 보니까 재미가 생기더라. 그러다가 가끔씩 친구한테 들려주기도 했다.
랩을 하면서 소심함이 극복되던가?
그런 거 같다. 아직도 소심함이 남아있지만 많이 나아졌다. 이젠 기분 나쁘면 할말은 한다.
과거의 본인에게 지금의 본인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겠다.
아무래도 옛날에는 남들 앞에서 노래하고 공연한다는 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거다. 심지어 옛날에는 남들 앞에서 잘 부를 수 있는 노래도 못 부르는 척했다. 그러면 사람을 웃길 수 있을 거 같고, 그러면 재미를 줄 수 있으니까. 옛날 성격은 이랬다.
랩을 한다고 하니 부모님께선 놀라지 않으셨나?
일단 화를 냈다. 왜 그렇게 욕을 많이 하냐고. 그리고 나는 당시에 랩을 잘 모르니까 그냥 무조건 욕을 해야 하는 줄 알았다(웃음).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거더라.
결국 랩퍼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계기는?
아무래도 랩을 하면 좋아해주니까. 사실 한때는 허스키한 목소리 때문에 좋은 말을 못 들었다. "여자 목소리가 왜 저래? 쇠 먹었나?" 이런 식으로(웃음)? 그런데 이젠 시대가 바뀌면서 이 목소리가 먹히더라. 듣기 싫은 보이스가 아니라 개성 있는 보이스로 인정 받게 되고.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하게 됐다. 아무래도 칭찬에 훅 올라가는 타입이라, 자신감이 생겼다.
<언프리티 랩스타 3> 초반에는 우승 후보 0순위였는데 후반부에는 탈락 위기까지 몰렸다.
사실 댓글을 많이 보는데 초반에는 칭찬이 많아서 좋기도 했지만 부담도 됐다. 그래서 잘 하려고 가사 쓰는데 공을 들이면서 점점 가사 고치는데 시간을 많이 쓰다 보니 외울 시간이 모자라게 됐다. 다음엔 안 그래야지 싶다가도 사람 욕심 때문에 또 그렇게 되고. 사실 3일마다 트랙 미션을 하나씩 수행하면서 가사 쓰고 무대에 올라가는데 항상 '이 주제를 내가 어떻게 풀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날 뽑아줄까?'란 고민을 하게 됐다. 욕심과 부담감 사이에서 숨막히는 대결을 거듭하니 너무 힘들었다. 그러다 결국 7번 트랙까지 음원 하나 따지 못했다. 그래서 파이널 무대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했다.
결국 파이널 무대는 완벽하게 소화했다.
관객들 앞에서 공연할 때랑 프로듀서 앞에서 경연할 때랑은 기분이 다르다. 일단 긴장감부터 환경이나 분위기까지. 일단 즐기면서 랩을 해야 하는데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고 있다는 느낌 자체를 즐길 수 없으니까 불편했다. 랩을 하는 게 아니라 프로듀서 님이 원하는 걸 들고 왔다는 느낌이라 부담감이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언프리티 랩스타 3>에 참가했을 때 트랙을 따는 것도 중요했지만 큰 무대에서 열리는 파이널 공연을 너무 하고 싶었다. 그런데 자꾸 실수를 하면서 끝까지 갈 수 있을지 불안하더라. 그래도 다행히 끝까지 왔고 최대한 즐긴 것 같다.
만약 우승을 못했다면?
아무래도 자신감이 떨어져 있지 않았을까? 사실 나는 서바이벌에는 잘 안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걸 즐기는 애들도 있긴 하더라. 특히 연습생이나 아이돌 출신들은 항상 경쟁해온 애들이라 익숙해 보였다. 나는 누굴 이기려고 해본 적도 없고, 항상 혼자 해왔기 때문에 쉽지 않더라.
앞으로의 계획은?
당장 구체적인 건 없는데 아직 앨범을 낸 적이 없어서 앨범을 내고 싶다. 최대한 빨리.
(ELLE KOREA NOVEMBER 2016 NO.289 'ELLE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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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호랑이가 다시 신들린 음주 랩핑을 시작한다. 타이거 JK가 돌아왔다. 드렁큰 타이거가 나가신다. 그러니 손 머리 위로. 소리 질러!
마치 피사체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플래시가 번쩍일 때마다, 모니터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살아 숨쉬는 기분이었다. 타이거 JK의 에너지가 스튜디오를 기분 좋게 점령했다. 4년 만에 드렁큰 타이거라는 이름을 건, ‘드렁큰 타이거 with 윤미래 & 비지(BIZZY)’의 이름으로 낸 앨범 <살자(The Cure)>로 돌아온 타이거 JK와 비지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개인적으로 모아온 드렁큰 타이거의 모든 앨범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신기하다는 듯이 앨범을 집어들고 살피던 타이거 JK는 감회가 새롭다는 듯이 말했다. “내 인생이 여기 있네.” 잠시 상념에 젖었다가 입을 뗐다. “솔직히 지난 앨범을 꺼내서 듣는 일은 드물지만 가끔 내가 그 랩을 하던 그 시절이 궁금해서 꺼내볼 때가 있다. 그 시절에 얼마나 랩을 잘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트랙을 노래했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서.” 타이거 JK에게 드렁큰 타이거의 앨범은 목으로 써내려 간 일기장과 같다. 직접적인 기록 혹은 간접적인 기억의 매개체로서 그 모든 앨범에 지난 세월이 깃들어있다.
그러니까 1999년이었다. 뉴 밀레니엄이 온다고, 1년만 지나면 자동차가 날아다닐 것마냥 떠들썩했던 그 해에 드렁큰 타이거가 나타났다. “낯이 익지도 않았지만 같이 마치 달콤한 연인 같이 하나되는 우릴 봤지. 너를 원해. 이말 전해. 나를 너무도 원하는 너만의 눈빛이 내 눈에 정말 너무 훤해”라며 씨부렁거리는데 기똥차게 라임이 꿰이고 현란하게 오르내리는 플로우가 쌈박했다. 노래 제목부터 패기 넘치게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라고 하는데 정말 힙합이 이런 것이라면 한번 제대로 들어보자 하여 음반을 구입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당시만 해도 힙합이라고 하면 언더그라운드에서나 유행한다던 마니아 장르 같은 것이라 아는 애들은 너무 잘 알았고, 모르는 애들은 너무 몰랐던, 그야말로 호랑이가 랩하던 시절이었다. 힙합이란 단어가 그리 생소한 시절도 아니었는데 드렁큰 타이거는 어딘가 낯설었다. ‘낯이 익지도 않았지만 같이 마치 달콤한 연인 같이.’ 정통 힙합을 표방한 드렁큰 타이거의 1집 앨범은 대중적으로 실패했지만 힙합의 역사에서 오버그라운드와 언더그라운드의 교두보 역할을 톡톡히 해낸 음반으로서 회자될만한 것이었다. 훗날 힙합신의 역사 안에서 회자될 ‘위대한 탄생’이었다. 2009년이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동안 드렁큰 타이거라는 이름 아래 나온 앨범만 8장이다. 강산도 변했지만 드렁큰 타이거도 변했다. ‘하나하면 너와 나’라고 했을 때 ‘너’였을 것 같았던 DJ 샤인이 5집 앨범을 끝으로 탈퇴하고 타이거 JK 혼자 남아 음주 랩핑을 이어갔다. 그 사이 혈기 왕성한 도전자들 사이에서 힙합신에 군림하는 챔피언이 됐다. 다이나믹 듀오, 리쌍, 에픽 하이, 슈프림 팀 등 날고 긴다는 랩퍼들이 한데 모인 더 무브먼트 크루의 첨탑에 서서 힙합신을 아울렀다. 그 과정엔 순탄치 않은 삶이 깃들어있었다. 드렁큰 타이거의 앨범은 그 삶에 대한 녹록하지 않은 기록이다. 완치가 불가능하다는 척수염을 앓고 두 발로 설 수 없다는 진단까지 받으며 만신창이가 되는 와중에도 삶은 전진했다. 랩퍼이자 뮤지션인 윤미래와 결혼했고, 아들 조단이 태어났다. 삶은 피고 지고 다시 폈다. 2013년, 여전히 자동차는 날아다니지 않지만 힙합이란 단어는 가끔 그것이 그것이었는지 깜빡할 정도로 흔한 것이 됐다. 룰라가 힙합이었던 시대의 무지와는 또 다르게 질적으로 평준화된, 영혼이 증발된 힙합들이 저마다 왕이 나셨다며 전도 활동에 한창이던 시대에 드렁큰 타이거가 돌아왔다. 4년 만의 부활이었다. 지난 2009년에 발매된 드렁큰 타이거의 8집 정규앨범 <Feel gHood Muzik> 이후로 파도를 타듯 오르내리는 타이거 JK의 플로우에 취했던 것이. 하지만 드렁큰 타이거라는 활자가 선명한 신보 <살자(The Cure)>는 드렁큰 타이거만의 것이 아니다. ‘드렁큰 타이거 with 윤미래 & 비지(BIZZY)’의 첫 앨범이다. <1945 해방>이라는 타이틀로 홀로서기에 나섰던 타이거 JK에겐 아내이자 든든한 아군인 윤미래가 곁에 있었고, 척수염의 고통을 비롯해서 믿을만한 지인이 아니고서야 말할 수 없는 사연들로 주변의 관계가 낙엽처럼 떨어져나가는 가운데서도 DJ 샤인의 빈 자리를 든든하게 백업해준 랩퍼 비지가 마지막 잎새처럼 관계의 가지를 지켰다.
호랑이는 원래 무리 지어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새끼를 기를 때만큼은 모여 산다. 타이거 JK와 윤미래는 이름만 대도 누구나 알만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한국 힙합계의 실력자다. 그들 사이에 자리한 비지는 분명 잘 알려지지 않은 랩퍼다. 타이거 JK는 자신을 믿고 따라온 비지를 어떤 식으로든 ‘책임지고 싶었다.’ 마치 호랑이가 자기 새끼를 키우듯이. “사실 자신의 스타일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냥 네가 가진 것들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어야 진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로 해선 알 수 없었던 것 같다. 이젠 어느 정도 자신의 길을 찾은 거 같다. 대단히 실력 있는 친구다.” 그리고 올해 초 비지, 타이거 JK, 윤미래가 함께 했던 프로젝트 유닛 MFBTY를 통해서 비지의 진가는 어느 정도 드러났다. 이 세 사람이 주도한 기획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멤버 개개인의 스타일에서 벗어난 일렉트로니카 베이스의 팝적인 센스가 돋보이는 넘버들이 탄생했다. “함께 하다 보니까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스타일이 나왔다. 저마다의 솔로 앨범에 넣기엔 어울리지 않은 넘버들이었지만 함께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 나왔다. 재미있었다.” 딱히 활동을 염두에 두고 만든 곡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특별한 활동을 펼치지 않았지만 비주얼 아티스트 룸펜스의 비현실적인 비주얼 작업을 통해 완성된 뮤직비디오가 해외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덕분에 프랑스 칸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음악축제 ‘미뎀 페스티벌 2013’에 초청됐고, 무대에 올라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빌보드 공식 홈페이지의 메인 페이지에도 MFBTY가 점령했다. 아프리카부터 싱가포르까지 지구 반바퀴를 도는 팬덤이 형성됐다. 비지, 타이거 JK, 윤미래가 삼위일체로 지구를 흔들었다. 사실 비지, 타이거 JK, 윤미래가 함께 한 신보 <살자(The Cure)>는 계획에 없던 경로였다. 갑작스럽지만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과업이었다. <살자>라는 타이틀은 타이거 JK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염원이다. 갑작스레 쓰러진 아버지에게 내려진 암 선고를 희망적인 음악으로 이겨내고 싶다는 열망. LP를 연상시키는 크기의 페이퍼 패키지 한가운데에 적힌 ‘살자’는 타이거 JK의 아버지 서병후가 직접 썼다. 삶에 대한 의지와 염원이 담긴 타이틀처럼 <살자>엔 새롭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이나 다름없는 넘버들로 시작된다. 암 투병 중인 아버지의 회복을 기원하는 ‘살다(The Cure)’를 비롯해서 평생의 반려자가 된 아내 윤미래와의 결혼을 통해서 깨닫게 된 아름다운 인생에 관한 송가 ‘Beautiful Life’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에 대한 진심을 담은 ‘첫눈에 설레였던 꼬마아이(Time Travel)’까지, 드렁큰 타이거의 타이거 JK가 아닌 남편이자 아버지이자 아들인 타이거 JK가 저마다의 트랙 속에서 살고 있다. 드렁큰 타이거라는 이름 아래 이례적일 정도로 삶의 온기를 담아내고 있다.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현실적이지 않고 싶었다. 왜냐면 현실적이라면 아버지가 아플 테니까. 꿈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허망함이 아니라 희망이어야 했다. 멋부리지 않고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직설적인 메시지를 라이브하게 전달하고 싶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살자)’ 이런 가사가 너무 진부하고 지루하게 느껴질지는 모르겠지만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담아보고 싶었다.” 타이거 JK는 <살자>를 통해서 자신이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인생을 노래한다.
“리허설할 때와 공연할 때는 천국에 있는 기분이다. 콘서트에서 리허설할 때 사람들은 가끔 취한 줄 알더라. 미친 놈처럼 놀고 있으니까. 공연이 끝나고 들어가야 되는데 좀 더 하자 그러고. 어제도 공연을 하면서 깨달았다. 내가 정말 행복해서 이 일을 하는 거라고.” 타이거 JK는 무대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무대를 향한 팬들의 함성과 환호 속에서 자신이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본다. 그 가운데서 자신이 살아갈 무대에서의 삶의 방향 또한 고민하고 가늠한다. “법으로 정해진 건 아니지만 힙합에는 나이 제한이 있다고 본다. 빠져줘야 하는 나이가 있다. 그 빈자리에 젊은 보이스를 채워야 한다. 그리고 지금 새로운 길이 열리는 거 같다. 힙합을 버린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가보고도 싶다는 말이다. 지금 미래를 점칠 순 없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이란 게 두 개 정도는 남아있는 느낌이고, 그 방향으로 끌려가는 기분을 느낀다.” 타이거 JK는 올해 드렁큰 타이거로서 낸 마지막 정규앨범 타이틀을 상호명으로 옮긴 ‘필굿뮤직(Feel Ghood Music)’이란 회사를 차리고 독립했다. 혹자는 타이거 JK가 혼자 다 해먹겠다고 회사를 차렸다고 말하지만 의정부의 집에 있는 지하실에 묵음실을 꾸리고 리허설 녹음을 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특유의 낙관으로 미래를 내다 본다. 여전히 척수염으로 약 없이 버틸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저 넉살 좋게 웃으며 말한다. “언젠가 치료제가 나오겠죠.” 타이거 JK는 낙관적인 특유의 성격으로 주변의 비극마저 유쾌하게 왜곡시켜버린다. 세상에 유쾌한 에너지를 전파한다. 다시 일어서기 힘들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이 무색하게 두 발로 세상을 걷고 있는 타이거 JK는 말한다. “기적을 믿고 싶다. 그렇게 살 거다.” 지금 못다한 이야기도 언젠가 웃으면서 털어낼 수 있는 그날까지, 가라. 타이거 JK.
(ELLE KOREA 10월호 NO.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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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하이, 다시 뛴다.
Music makes Epik High!
오랜만이다. 세 남자가 무대 위에서 마음껏 뛰는 모습이. 살다 보면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긴다지만 지난 3년은 이들에게 분명 지나치게 가혹했다. 그래서 반가웠다. 데뷔 9년차에 7집 앨범을 발매한 에픽 하이가 다시 전하는 에너지가.
다시 활동하는 기분은?
투컷(이하; 투) 알다시피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앨범이 나오고 매일매일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즐겁다. 솔직히 예전엔 스케줄이 너무 많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이젠 온종일 바빠도 즐겁다. 스케줄 하나 잡히면 그저 좋다.
타블로(이하; 타) 나도.
미쓰라(이하; 미) 쉬는 동안 생각만 많아져서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우린 그게 행복하니까. 새로운 노래를 빨리 들려주고 싶었고, 셋이 뭉쳐 뭐라도 생기면 당장 나오고 싶어서 빠른 속도로 작업했다.
오랜만에 세 멤버가 모여서 무대에 서는 느낌은?
타 아직은 좀 어색하다.
미 처음엔 너무 어색했다. 새로 시작하는 느낌? 그래도 경험이 있어서인지 적응은 빨리 되더라. 오랜만이라 더 재미있기도 하고.
타 이렇게 다시 뭉친지도 5개월 정도밖에 안됐고, 다 같이 하는 무대는 3년만이라서 떨렸다. 하지만 난장판처럼 뛰어놀 수 있는 노래라서 막상 시작하니 그런 기분은 다 잊혀졌다. 다시 무대에 선 만큼 최대한 이 순간을 즐기려 한다. 긴 워밍업이라 생각한다. 시동을 거는 상황이지. 다만 오랫동안 걸어야 된다. 한 1년 동안 작업실 안에서만 걸으면 답이 없다. 관객들을 만나야 된다. 빨리 나오고 싶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무대 위에서 신곡과 옛날 노래도 하면서 다시 관객들을 만나야 시동이 걸릴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이 활동 자체가 하나의 큰 워밍업이다.
앨범 타이틀 <99>의 의미는?
타 너무 단순해서 놀릴 수도 있는데. 9주년인데 9곡, 끝.
투 마케팅 팀에서 너무 단순하다고 해서 진지한 의미를 우겨 넣었지만 진짜 의미는 그거다.
9년 전, 처음 데뷔할 때 기분이 들지 않나?
타 우리를 베테랑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린 꼭 신인 같다. 예전에도 확실한 우리 색깔을 찾기까지 몇 년 걸렸다. 처음 두세 장 앨범을 내기까지 이것저것 해보면서 멤버들의 조화를 찾아가던 과정이 다시 온 것 같다. 우린 활동 기간보단 항상 지금 시작한다는 데 의의를 뒀다. 이 시점에는 이렇게 해야 된다는 강박이 전혀 없었다. 지금도 며칠 전에 시작한 애들 같다.
미쓰라는 살이 많이 빠졌다.
미 이번 앨범을 준비하면서 많이 뺐다. 3년 만인데 뭐라도 변해서 나와야 재미있을 것 같고.
미쓰라마저 결혼하면 국내 유일의 유부남 힙합 그룹이 탄생할지도(웃음).
타 진짜 없나?
미 없을 걸? 타 그런데 난 에픽하이나 내가 힙합 신에 속해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다. 힙합 외에도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해왔고, 멤버들도 그렇게 활동해 왔으니까. 힙합 신을 이끌어갈 권리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다. 다만 50대가 돼서도 랩을 잘했으면 좋겠다. 할아버지가 돼서 랩 앨범을 낸다고 생각해 봐. 재미있겠지(웃음).
투 주책처럼 보이지만 않으면.
타 그때 랩 좀 한다는 애들과도 별반 차이가 느껴지지 않으면 정말 재미있겠지.
미 물론 열심히 뛰는 음악은 못하겠지. 심장이 버틸 수 있을지 모르니까(웃음). 그때 어울리는 진지한 깊이가 생길 수도 있고.
타 나중에 손주가 친구랑 대화하는 데 이러는 거야. “너네 할아버지 뭐 해?” “랩 하셔(웃음).” “잘해?” “상당하셔.”
미 “너네 할아버지 뭐하셔?” “집에서 랩 녹음하고 그래.” “뭐?”
타 “우리 할아버지 펀치 라인이 죽여(웃음).”
이번 앨범을 작업하기 위해서 모이는 과정은?
타 난 이미 녹음실에 들어가 있었고, 얘들이 합류했다.
투 일단 혼자서 작업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자연스럽게 커피 한잔하면서 어떻게 만들까 얘기하기 시작했다. 미 제대했을 땐 이미 곡이 많이 나온 상태였다.
그린 데이의 <Dookie> 앨범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들었다.
타 ‘Don’t hate me’가 그랬다. 주변에서 많이 물었다. 힙합 그룹이 90년대 풍의 록을 지금 왜? 그냥 그런 노래 하나 만들고 싶었다. 그냥이란 단어말곤 할 말이 없다. 그런 노래로 무대에서 뛰어놀고 싶었다.
미 정말 신나게 뛸 수 있는 걸 원했다. 제일 재미있는 게 내가 뛰고 관객들도 뛰는 거니까 그런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9년 전과 체력 차이는 느껴지지 않나?
타 신기한 건 20대 초반 데뷔 시절엔 1시간만 공연해도 힘들었다. 그 정도 공연하면 누구나 힘들다. 계속 뛰니까. 그런데 이번 앨범 발매 후 클럽 공연에서 앵콜 무대만 1시간 반을 했다. 전체적으론 2시간 반에서 3시간 정도였고.
투 그때 절실히 느꼈다. 우리가 정말 쉬는 동안 맺힌 게 많았구나. “우리 집에 좀 보내주면 안돼요?”라고 했지만 말만 그랬지, 계속 하고 싶었다.
타 끝난 뒤에도 별로 지쳐 있지 않았다. 한두 시간 더 할 수 있을 거 같더라. 이대로라면 10년은 괜찮겠다.
투 운동 선수 인터뷰 같은데(웃음). 미 향후 10년은 문제없다. 더 뛸 수 있다. 함부로 은퇴를 논하지 마라(웃음).
타 아직 거뜬하다. 아이를 키워보면 알겠지만 아이들 에너지를 따라갈 수가 없다. 그걸 따라갔으니까 무대 정도야(웃음).
‘춥다’로 첫 음원을 공개했을 때, 전반적인 음반의 분위기가 그럴 줄 알았다.
타 일단 ‘춥다’가 가장 먼저 만든 노래였다. 사실 어둡거나 슬프게 만들려고 했던 노래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쓸쓸하게 나왔다. 우울한 음악을 만들면 그 못지않게 더 우울해진다. 지금 그런 음악들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때부터 앨범의 방향이 많이 달라졌다.
활기찬 넘버들로 구성됐지만 마냥 신나게 듣지 못하겠더라.
미 우리가 겪은 일이 있으니까 그렇게 보일 순 있겠지. 그런 생각들이 내재돼 있는 상태에서 우릴 볼 테니까.
타 실제로 밝은 게 아니고 너무 힘드니까 애써 밝은 음악을 만들었다는 분들도 있더라. 그 말도 어느 정도 맞다. 밝은 음악을 만들면서 우리가 좀 더 즐거웠던 것도 사실이고.
투 무대 위에서도 즐겁다. 그러려고 만든 앨범이라 생각해도 된다.
한동안 타블로의 상황을 옆에서 지켜본 멤버들의 심정이 궁금하다.
투 솔직히 다신 팀으로 활동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인데 어떻게 도울 수 없으니까 미치겠더라. 현실이라는 게 꿈 같았다.
그런 사건들이 음악에 미치는 영향은 없었나?
타 우울한 음악은 하기 싫었고, 좀 웃으면서 할 수 있는 방향으로 결정됐다는 거? 그 외엔 없다.
음악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없었나?
타 그것 때문에 하겠다기보다 음악을 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음악을 하고 싶다는 이유로 아끼는 이들에게 피해를 줘야 한다면 계속 하는 게 맞을까 싶었다. 나 하나만 그만두면 되니까. 하지만 내가 아끼는 사람들을 챙겨주고, 그사람들에게 보답하고,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도 음악 밖에 없더라.
전반적으로 보컬 비중이 늘었다. 멤버들의 보컬도 많아졌고.
타 사실 몹쓸 짓인데(웃음). 무대에서 다시 한 번 뛰어노는 게 가장 중요했다. 피처링을 많이 쓰면 그게 어렵거든. 노래방에서 뛰어놀아도 자기가 불러야 재미있잖아.
투 제한되는 부분이 많지. 미 일단 한 번 해볼 순 있는 거고, 딱히 심하게 거북해하지 않으면 다음에도 가능하겠지. 그런데 딱히 별 말이 없더라. 타 난 솔로앨범에서 발라드도 불렀어(웃음).
YG 엔터테인먼트 소속 프로듀서들의 참여도 눈에 띈다.
타 내가 요청했다. 공동 작업은 처음이다. 요즘 내가 음악을 만들면 무조건 우울해진다. 피아노를 치고 코드만 들었을 땐 분명히 밝은데 완성하면 우울해진다. 그게 굉장히 짜증났다. 밝다고 만들었는데 암울하다고 하니까 스트레스지. 멤버들도 무겁고 진지한 것보다 밝고 신나게 갔으면 좋겠다고 했기 때문에 지원군을 찾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밝고 신나는 에너지를 더해달라고 요구했다.
투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했다. 사실 우리끼리 앨범을 만들 땐 굉장히 진지하고 우울하다.
타 우리 작업할 때 와보면 분위기가 굉장히 안 좋다고 느낄 거다.
투 되게 예민하고 찌든 애들 있잖아. 스튜디오에 사람들이 와서 자기들끼리 농담하고 있으면 쫓아내버렸다. 그런데 이번엔 활기가 넘쳤지.
타 평상시에 작업할 땐 폐쇄적이고, 날카롭고, 분위기가 좋지 않았는데 이번엔 거의 놀면서 했다.
미 옛날에 작업할 땐 아무도 못 들어오고 우리 셋만 딱 들어가 있었지. 이번엔 누가 놀러오면 다 들어오라고 하고, 다른 사람들 의견도 참고하고, 녹음실에서 뛰어놀면서 유쾌하게 작업했다.
타 원래 “이건 어때?”라고 물으면서 작업하는 게 우린 불가능했거든. 언쟁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의견이 달라도 얘기하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본다. 워낙 예민하니까.
누군가 중재하는 역할을 하지 않나?
타 나랑 (미)쓰라가 붙으면 투컷이 하고, 나랑 투컷이 붙으면 쓰라가 한다. 미쓰라랑 투컷은 음악 작업 때문에 붙진 않는다. 음악 때문에 일어나는 언쟁은 거의 나 때문이다. 솔직히 내가 문제다(웃음).
투 나랑 미쓰라는 아예 분야가 다르지만 타블로는 아무래도 곡도, 가사도 쓰는 포지션에 있으니까.
타 멤버들도 답답할 거다. 난 음악 할 때 약간 돈키호테 같거든. 누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해도 그냥 끝까지 간다. 그렇게 고집해서 밀어붙였는데 결과가 좋으면 괜찮지만 좋지 않으면 정말 미안해서 우울증까지 온다. 좋아도, 좋지 않아도 결국 내 탓이다(웃음). 그래서 항상 말한다. 만약 에픽하이 앨범이나 노래가 마음에 안 들면 타블로를 욕하라고. 아마도 내 탓일 테니까(웃음). 투 이제 우리도 그걸 잘 알아서 내버려둔다(웃음).
미 예전엔 많이 다퉜는데 이젠 나이가 들고 서로를 이해하니까. 요즘은 잘하라고 독려해 준다. 뭐가 나올지는 끝까지 가봐야 아니까.
타 그래도 이번엔 내가 너희들 의견을 어느 때보다 많이 들어줬지(웃음). 먼저 사람들의 의견을 묻고 다녔잖아. 물론 난 여전히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런 사람이다. 이번 앨범에선 그걸 놓은 것뿐이지.
오랜만에 복귀한 만큼 새롭게 감지되는 음악 신의 변화는 없나?
미 음원 사이트의 흐름이 정말 빨리 바뀌는구나 싶더라.
투 예전엔 CD 판매량을 집계하는 한터 차트가 중요했는데 요즘은 음원 차트가 가장 중요하더라. 그리고 실시간 차트가 생겼다는 거. 타 실시간 차트가 있다는 건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세상에 어느 차트든 최소한 1주일에 한 번씩 집계되잖아. 어떻게 음악이 나온 지 1시간 뒤에 차트가 만들어지는 건지, 그게 어떻게 중요한 차트가 된건지 놀랍다.
투 마라톤 중계 보는 거 같고.
타 우리는 1년 동안 작업해서 앨범을 낸다. 그런데 지금 시장에선 앨범을 내면 안 된다. 투 타이틀 곡만 알려지고 나머지 곡들은 쉽게 묻히니까. 타 20곡을 미친 듯이 만들었는데 19곡이 그냥 묻힌다고 생각해 봐라. 그래서 디지털 싱글을 많이 발표하는 추세다
투 그게 현재 시장에 딱 맞다.
타 그렇다고 이 상황에 불만이 있다는 건 아니다. 어쨌든 소위 음악으로 먹고 살려면 거의 두세 달에 한 번씩 신곡을 내는 게 영리한 방법이다. 그런데 우린 앞으로도 그렇게 못할 거 같다. 그러니 결국 무식한 음악 메이킹을 고집해야 한다.
90년대 음악 스타일이 많이 반영했다.
타 우리와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90년대는 또 다르더라. 우린 스매싱 펌킨스나 너바나나 그린 데이를 생각했지만 전람회를 떠올리는 분들도 많다. 사실 나는 클론이나 서태지와 아이들이나 ‘잘못된 만남’ 같은 노래가 생각나기도 하고.
투 어떤 분들에겐 H.O.T일 수도 있고.
타 다시 한번 들어보니까 그렇게 90년대처럼 들리진 않더라. 역시 내 탓이다(웃음).
에픽하이의 음악적 자양분이 다채롭다고 느꼈다.
타 첫 앨범을 다시 만들면 힙합 그룹이란 얘긴 하지 않을 거다. 그게 굴레처럼 느껴지고 답답할 때가 있다. 물론 우리가 힙합을 할 땐 확실히 힙합이다. 힙합 팬들은 그 노래를 듣고 우리를 힙합 그룹이라고 생각할 거다. 1을 갖고 99를 판단하는 거다. 우리의 감성적인 곡을 좋아하는 분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우릴 규정짓는다. 각자가 생각하는 에픽하이가 워낙 다르니까 우리로서는 뭘 해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둘 다 좋아할 만한 음악을 고민하긴 힘들다. 과거로 돌아가면 우린 그저 팝 그룹이고, 랩이나 힙합도 잘할 자신이 있다고 얘기할 거다(웃음). 처음부터 우리 입으로 얘기한 것도 아니었다. 힙합 전사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어서(웃음).
미 힙합이란 단어가 붙으면 다 전사가 되는 시대였다.
타 힙합을 미친 듯이 좋아한다. 그런데 누군가 나를 힙합 뮤지션이라고 얘기하면 이게 정확한 카테고리인지, 그렇게 끼여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앨범상을 받는 건 좋지만 힙합 부문 상을 받을 땐 정말 미안하다. 장인 정신처럼 오로지 힙합이란 두 글자를 고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래서 항상 알려지지 않은 래퍼들을 피처링으로 많이 쓰려고 했다. 우리가 힙합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런 친구들이 알려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
이번 앨범의 트랙 수가 예전 앨범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다.
타 5~6년 전 시장과 지금의 시장은 다르다. 지난번에 나왔던 솔로 앨범도 10곡이었다. 그 중 한 곡은 짧은 인터루드였으니 실질적으로 아홉 곡이다. 앨범에 수록한 노래들이 다 사람들에게 전달된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이젠 앨범을 사지 않는 사람들에겐 그 노래들의 존재를 알리기 힘들다. 방송에서 보여주는 것도 한계가 있고, 뮤직비디오를 다 찍을 수도 없다. 투 앨범 만들 때 모든 곡에 쏟는 정성은 똑같다. 비싼 비용이 들어가는 스트링 편곡이 필요하다면 한다. 그런 노래들이 발매되자마자 사장되는 거다. 타 타이틀 곡만 클릭해서 들으니까.
투 누굴 탓하는 게 아니라 그냥 허탈하다. 열심히 만들었는데 들려줄 방법도 없고.
타 아는 사람은 알 텐데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만드는 사람 입장에선 다르다. 솔로 앨범도 파트 1, 2로 나눴던 건 10곡을 한꺼번에 들려주면 소화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도 140자로 쓰는 현실에서 남의 생각을 오랫동안 들어줄 시간이 어디 있겠나. 일단 5곡부터 듣고 마음에 들면 다음 5곡도 들어달란 거지. 대부분의 뮤지션들이 공감하는 이야기다. 어떤 이들은 그게 상업적이라는데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내 노래를 더 많은 사람들이 듣게 만들고 싶은 게 순수한 뮤지션의 마음 아닌가.
투 상업적이라면 차라리 앨범보단 디지털 싱글을 내겠지.
타이틀 곡이 3곡이다. 많은 곡을 들려주고 싶은 욕심 때문일까?
타 어차피 다 우리가 만든 곡이니까 타이틀은 뭐가 돼도 상관없다. 다만 방송마다 다른 노래를 부르고 싶은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이 기사가 나올 때면 아마 이미 우리가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했을 텐데 그 무대도 타이틀 곡 완곡 대신 메들리로 준비했다.
내년이면 10주년이다. 특별한 계획이라도?
타 커리어에서 정점이라 꼽힐 만한 앨범을 만들고 싶다. 데뷔 앨범만큼 중요한 앨범이라 생각한다. 지난 9년은 다 연습이었다고 생각할 만큼 충격을 주고 싶다. 최선을 다해야지.
미 물론 늘 그래왔지만.
타 이번 활동은 11월 말이면 끝날 것 같다. 그리고 산에 들어간다는 생각으로 시작해야지. 사실 지금 다시 열정이 불타기 시작했다. 왜 하필이면 앨범 나온 다음에 음악을 만들고 싶은 욕구가 불타오르는지 모르겠다(웃음). 무대에서 관객들을 만나니까 하고 싶은 음악들이 파도처럼 몰아친다. 오늘부터 장비를 바꾸기 시작했다. 이번 활동이 어쩌면 그걸 위한 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미치겠다. 떠오르는 것도, 해보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아서 잠도 안 온다. 지난 앨범들에 비해서 미쓰라나 내가 평소보다 랩을 조금 덜해서인지 랩이 다시 프레시하게 들린다.
새롭게 해보고 싶은 게 생겼나?
타 솔직히 하고 싶은 건 다 해본 거 같다. 잘하는 걸 더 잘해야 할 때가 된 거 같다. 그리고 결국 해야 되는 음악을 하고 싶다. 다시 잘한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도록 스텝 업을 해야지.
(ELLE KOREA 12월호 No.242 'ELLE interview')
영화 저널리스트 &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 13인의 감독 인터뷰집 <어제의 영화. 오늘의 감독. 내일의 대화.>를 썼습니다. mingun@nate.com by 민용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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