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에게 있어서 아이돌 출신 배우라는 꼬리표는 이제 철 지난 풍문 같다. 배우가 되고 싶어서 무용도 하고, 아이돌도 됐던 이준은 이제 연기만 한다. 드디어 배우가 됐다.
<밀회>를 낳은 안판석 감독과 정성주 작가의 <풍문으로 들었소>(이하: <풍문>)는 주연과 조연을 막론한, 배우들을 위한 발견의 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준 역시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의 절대권력을 주무르고, 집안에서도 왕처럼 군림하는 아버지 한정호의 슬하에서 희대의 반역을 선도하는 아들 한인상을 연기한 그는 ‘아이돌 출신 배우’에서 ‘배우’로, 자신의 수식어를 더욱 간결하게 매만지는데 성공한 인상이다. 사실 아이돌 출신 배우라는 수식어는 낙인과 같다. 팬덤을 등에 업고 손쉽게 기회를 얻어냈다는 혐의와 연기력에 대한 의심이 뒤엉킨 편견이 형성된다. 결국 배우 스스로 가능성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편견의 중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준은 <풍문으로 들었소>를 통해서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무중력 상태로 띄워 올렸다. 중력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워졌다. 스스로에게조차 발견이나 다름없는 성과였다. “처음엔 의아했다. 한인상은 순수하고, 모범적이면서도 억압된 캐릭터인데 나는 자유분방하고 ‘날티’가 나 보인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 기회를 통해서 나를 발전시켜보자고, 성공하면 나로선 굉장한 이익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결과적으론 좋은 선택이었던 거 같다.” 그만큼 배우로서의 욕심도 자라났다. “항상 욕심은 많았지만 확실한 건 앞으로 <풍문>에서보단 더 잘하고 싶다. 다음 작품이 무엇이 될진 몰라도 최소한 퇴보하는 모습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더욱 많이 경험하고, 더욱 많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다.”
이준은 오래 전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연극영화과가 있는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길 희망했다. “연극영화과를 가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는 진학상담 선생님의 면박 속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길을 모색했다. 하지만 당장 진학이 가능한 건 무용과 정도뿐이었다. 그래서 무용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춤을 추면서 어울렸기 때문에 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서울예고에 진학했다. 하지만 서울예고에 연극영화과는 없었다. 그래서 계속 무용을 했다. 그리고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과로 진학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학교를 휴학했다. “갑자기 내가 뭐하고 있나 싶어졌다. 내가 원래 하나에 깊게 빠지는 편인데 무용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4년이 지났더라. 연기를 하고 싶었다는 게 그때 기억났다. 그래서 당장 휴학을 하게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이해가 안가는 짓이다(웃음). 담보 하나 없이 중단한 거니까.” 그렇게 이준은 1년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을 벌고, 틈틈이 오디션을 보러 다녔고, 낙방을 거듭했다. ‘체계적으로 연기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니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비를 만났고, 비와 함께 할리우드로 갔다. <닌자 어쌔신>에 출연했다. 할리우드에서 연기 데뷔작을 찍게 될 것이라곤 이준 스스로도 예감하지 못했다.
“급하게 과외를 받았다. 연기 선생님과 영어 선생님을 붙여서 개인 교습을 받았는데 내가 영어는 못했지만 발음은 좋은 편이었다. 그래서 주입식 교육을 시키면 가능하겠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웃음).” 쉽게 말하면 운이 좋았다. 하지만 이준이 6차에 걸친 오디션을 통과한 비결이 단순히 좋은 영어 발음일 리 없을 것이다. 게다가 할리우드가 그렇게 만만한 곳일 리도 없다. <풍문>을 보다 입체적인 드라마로 만들어준 건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조연배우들이었다. 그들은 이준의 연기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너는 정말 연기를 배우지 않은 애처럼 연기하는 구나. 그런데 그 안에 정말 보석처럼 빛나는 순간이 있다. 그게 네 장점일 거야.” 스스로 ‘연기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이준에겐 기본적인 끼, 그러니까 자신도 모르는 재능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용할 때에도 무용엔 답이 없다고 느꼈다. 연기도 마찬가지인 거 같다. 아직까지 연기를 잘 모르기 때문에 연기를 잘한다는 게 뭔지도 정확히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그냥 관객에게 진심을 전달할 수 있는 배우가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일종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배우라고 할까?” 사실 이준은 일찌감치 연기를 공감대의 영역으로 생각했다. 연기의 ‘연’ 자도 모르지만 연기가 너무 하고 싶었던 이준은 ‘따라하기’를 통해 자신만의 연기적 훈련을 매진했다. 대단한 건 아니다. 인터넷으로 대본을 찾아서 나름대로 실감나게 따라 읽는 것 그리고 배우의 감정을 의심하는 것. “지금 기분이 괜찮은데 어떻게 기분 나쁘게 화를 낼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혼자서 막 화를 내기도 하고, 좀 이상하지만(웃음).” 뛰어난 기교를 익힐 수 있는 훈련은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배우가 구사하는 감정을 이해해야 한다는 공감대 정도는 일찍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준은 최소한 배우는 자세가 된 배우였다.
“작품을 끝내면 만족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아쉬운 부분이 보다 오랫동안 남는다. 결국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사실 어렸을 땐 생각이 없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렇게 생각을 많이 하다 보면 다시 단순해질 수 있을 것도 같다. 자동차에서도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고 하더라(웃음).” 해석하자면 배우로서 보다 욕심이 많아졌다는 말이다. 그럴만하다. 사실 이준이 처음 배우로서 주목을 받은 건 영화 <배우는 배우다>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갑동이>를 통해 배우로서의 궤도를 찾았다. 그리고 <풍문>은 이준이라는 배우가 지닌 가능성의 뒷면을 드러낸 작품이다. 과장된 세기로 치장한 캐릭터가 아닌 일상적인 평범함도 어울리는 배우라는 것을 처음으로 증명했다. 그건 그 누구도 아닌 이준이 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처럼 계산하지 않고, 매번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계산하게 되면 피곤해질 거다. 사실 머리가 좋은 편도 아니라서(웃음). 그리고 본래 나는 뭔가를 할 때 다음을 생각하지 않고 일단 지금 당장 모든 에너지를 쏟는 편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작품을 할 때도 매 신마다 가진 에너지를 다 투자한다. 그러려고 한다. 그래야만 뭔가를 해낸 거 같다.” 피해가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피해가지 않는 방식을 통해 스스로를 단련해왔다. 어쩌면 그렇게 에둘러가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빠른 길을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풍문> 현장에서 이준은 안판석 감독에게서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정신을 차리지 않고 있어서 그랬다기 보단 현장 분위기가 항상 긴장을 요구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확실히 긴장하지 않으면 연기도 이상해진다. 항상 정신 차리고 긴장의 끈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스스로 긴장을 요구하는 건 단순히 배우로서의 책임감 때문만은 아닌 거 같다. “이 직업이 항상 잘될지 알 수 없으니까 살아남기 위해선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된다.” 유년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의 가치를 잘 알고 있다. “남의 탓을 하기보단 스스로의 실패를 인정해야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거 같다. 어차피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는 거고, 그렇게 살아가야 하니까 그에 따른 책임도 내 스스로가 져야 한다는 걸 잘 아는 게 중요하다.” 아무튼 이준은 그렇게 배우로서 방금 막 첫 장을 시작했다. 그러니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타이밍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우직하고 명확하게.
(ELLE KOREA JULY 2015 NO.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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