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ime has come
한지민은 시간을 기다려왔다. 자신에게 날개를 달아줄 시간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기다림은 충분했다. 이제 서서히 날개를 펼 때다.
벌써 10년이다. 한지민이 배우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지가 말이다. 우연히 발을 들였던 일이 10년을 결정짓는 일이 될 줄은 몰랐다. “인생은 정말 작은 우연의 계기를 통해서 시작되는 일의 연속인 거 같아요.” 중학교 3학년 시절에 다니던 여자중학교가 남녀공학으로 바뀌면서 평범한 여학생의 삶에 변화가 깃들기 시작했다. 남자학교에서 새롭게 온 한 선생님이 매니저 일을 하던 친척에게 그녀를 추천했고, 결국 TV CF 모델로 데뷔하게 된 것.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배우라는 직업을 갖게 될 거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학교 1학년 시절이었던 2003년, 얼떨결에 오디션을 보고 출연하게 된 미니시리즈 <올인>은 배우 한지민의 인생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송혜교의 아역으로 출연한 <올인>의 촬영 분량은 단 2회뿐이었지만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서서 연기를 한다는 건 대단한 부담감이었다. “사실 연기를 한다기 보단 반복학습에 따른 결과였죠. 정말 연습을 많이 했거든요. 2회 분량 밖에 안 되는 걸 몇 달간 외운 거니까 툭 쳐도 대사가 나올 정도였죠.”
<올인>이 ‘대박’을 친 덕분에 ‘배우’ 한지민에 대한 주목도도 높아졌다. 다음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미니시리즈 <좋은 사람>에서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한지민에게 그 당시 촬영 현장에 대한 기억은 ‘죄책감’이란 단어로 정리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촬영이 끝나길 기다리는데 당연히 죄책감이 들죠. 모두가 피곤한 상황에서 내가 잘하면 금방 끝날 수 있는데 그렇게 되질 않으니까.” ‘연기에 대한 애정이나 열정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 자리를 얻고자 열심히 노력하는 누군가’에 대한 미안함까지 느낄 정도였다. 빨리 10년이 지나서 서른 살로 ‘점프’하고 싶었던 것도 ‘계속 연기를 하다가 10년쯤 뒤엔 지금보단 많은 경험을 하고 감정선도 풍부해질 테니 지금보단 실력이 늘어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1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한지민은 영화 <플랜맨>의 주연배우로 대중 앞에 설 채비를 하고 있다. “작품과의 인연에도 때가 있잖아요. <플랜맨>도 지금이니까 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그녀가 바랬던 것처럼 10년이란 시간은 그녀에게 배우라는 정체성과 연기에 대한 열정을 가르쳐주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나 보다. “잘하고 싶다는 욕심은 누구나 갖고 있고, 누구나 열심히 하잖아요. 결국 잘해야 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똑같은 열정을 갖고 있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건 아니니까 기회에 감사해야죠. 그리고 분명한 책임감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플랜맨>은 초 단위까지 계획적으로 살아갈 정도로 강박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한 남자가 발랄하고 엉뚱한 여자를 만나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코미디다. “단순히 웃기는 장면이 많은 코미디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유발되는 코미디라서 좋았어요. 캐릭터가 저마다 살아있고, 여자 캐릭터에게서도 새롭게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을 느꼈거든요.” 그녀의 대답에서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변화가 느껴졌다. 캐릭터에 대한 욕심과 작품에 대한 기대감. 지난 10년이 그녀를 위한 약속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녀에게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닌지 궁금해졌다. “예전에 출연했던 단막극에서 어떤 한 신을 찍고 나니까 그게 너무 후련했어요. 조금이나마 연기의 쾌감을 느꼈죠. 그리고 첫 영화였던 <청연>의 윤종찬 감독님을 만난 건 정말 감사한 일이었어요. 저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기다려주시고, 대화를 통해서 감정선을 찾아가는 걸 많이 도와주셨거든요. 많은 용기를 얻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드라마는 성장드라마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는 시절은 성장기일지도 모른다. 한지민도 비로소 배우의 성장기를 만났다. ‘피하고만 싶었던 자리’였던 촬영 현장이 ‘부딪혀보고 싶은 자리’가 되는 순간 배우라는 직업이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사실 한지민에게 촬영 현장이 무서웠던 건 어쩌면 가족 탓이다. “부모님으로부터 혼나본 적이 없어요. ‘졸리면 그냥 자라’ 이런 분이거든요. 공부하라고 강요하신 적도 없어요. 그리고 조부모님들도 뭔가를 할 때마다 칭찬만 해주셨어요. 그렇게 칭찬받기 좋아하는 아이로 자란 저에게 촬영 현장이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물론 그렇다고 그녀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건 아니다. 지금도 그녀의 인터뷰 기사를 꼼꼼히 살펴보신다는 할머니는 언제나 손녀에게 ‘책임감을 가져야겠다’고 일러주신다. 그리고 그녀에게 있어서 책임감이란 과거가 아닌 현재 혹은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 같다. “돌아봤을 때 남는 아쉬움은 앞으로 채워나가야겠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물론 작품에 대한 책임감은 점점 커지겠죠. 그러니까 그때마다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미 선택한 건 뒤도 돌아보지 말고 해야죠. 왜 했을까라고 생각하기 보단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야 할 거 같아요.” 무책임한 낙관이 아닌 책임감 있는 긍정이 느껴진다.
한지민은 좀처럼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그녀가 후회하는 일이 하나 있다. “연기는 좀 달라요. 뭔가 연기를 못했다고 생각하게 되면 계속 남는 거 같아요. 그리고 오히려 이런 생각이 연기가 발전하는데 도움이 될 거 같다고 생각해요. 대사를 잘못하면 며칠이나 그 대사를 계속 하게 되는 것도 저만 그런 줄 알았더니 정재영 선배님이 배우는 다 그렇대요.”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현장에서의 성장을 믿는 배우다. “현장에선 항상 배우는 게 많아요. 만약 어떤 배우가 좋지 않은 행동을 하는 걸 보는 것조차도 배울 점이 있는 거 같거든요.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좋은 선배님들은 말할 것도 없죠.” 한지민은 <플랜맨>을 선택한 결정적 이유가 상대역을 맡은 배우 정재영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저 배우와 함께 작품을 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상대 배역이 정재영 선배님이라니 너무 좋았죠. 그래서 선배님 때문에 이 작품하는 거라고 말씀드렸더니 ‘어디서 책임 전가하냐’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정재영과 한지민은 정확히 열두 살 차이 띠동갑이다. <플랜맨>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서 점차 애틋한 감정을 느끼는 사이로 발전해나간다. 실제로 띠동갑 차이의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말이 잘 통하는 친구가 꼭 동갑이 아닌 것처럼 나이가 많다고 해서 다들 어른스러운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나이 차이가 연인으로서 중요한 기준은 아닌 거 같아요. 이민정 씨도 12살 많은 이병헌 씨와 결혼했잖아요(웃음).” 물론 항상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배우이기에 연애라는 것이 마냥 설레는 일은 아니다. “요즘 대중들이 좀 쿨해졌다고 해도 여배우들은 어쩔 수 없이 끊임 없이 고민하게 되는 거 같아요. 아무래도 모든 사생활이 드러나기 쉬운 직업이다 보니까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상대방에게 좋지 않은 일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싶고요. 연애에 대해선 항상 예민할 수밖에 없죠.”
여배우들은 남자배우에 비해서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캐릭터에 대한 경쟁도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한지민에게도 갈망하는 기회가 있다. “조금 막연할지 몰라도 메디컬 전문드라마의 의사 같은 전문직을 해보고 싶어요.” 한지민이 <플랜맨>에서 소정이의 발랄함을 드러냈을 때 주변에선 대부분 그녀가 새로워 보인다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단아한 이미지의 캐릭터로 각인됐는지 제가 조용한 편일 것 같다고 하시는데 원래 활발한 성격이에요.” 한지민은 아직 보여줄 게 많은 배우다. 보여주고 싶은 것도 많은 배우다.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2011)에서 차갑고 섹시한 이미지를 선보였을 때 많은 사람들은 ‘변신’이란 단어를 프리즘 삼아서 한지민의 스펙트럼을 다시 살폈다. 그리고 그녀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에 충실해야 함을 잘 알고 있다.”지금까지 제가 해왔던 작품 중에서 소중하지 않은 작품은 없어요. 지금 해나가는 작품이 있기 때문에 다음 작품을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리고 그녀는 거듭 그래왔던 것처럼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밝은 미소에 깃든 긍정적인 에너지는 어쩌면 그녀가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믿어온 덕분에 얻은 결실일 것만 같다고, 문득 생각했다.
(ELLE KOREA 1월호 NO.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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