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을 건너다, 소설가 정유정
정유정은 끊임없이 악에 주목했다. 그러다 비로소 악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그렇게 <종의 기원>을 관통한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새로운 문장을 떠올리고 있다.
히말라야를 다녀와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이란 에세이를 썼다.
<28>을 마치고 슬럼프가 와서 1년을 쉬었는데 어차피 1인칭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으니 에세이를 쓰면 예행연습이 될 거 같아 히말라야에 갔다. 그렇게 에세이 초고를 써서 돌아오자마자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났다. 순례길이 시작되는 프랑스길에서 산티아고까지 800km를 걸었고, 스페인 땅끝마을이라 불리는 피니스테라라는 마을까지 180km를 더 걸었다. 그렇게 980km를 걸으며 40일 동안 <종의 기원>을 구상했다.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면 사람들과 어울릴까 봐 동네 호텔을 전전하며 혼자 지내다 왔다.
악인을 묘사한 전작들과 달리 <종의 기원>에선 악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한 차원 다른 각오가 필요했을 것 같다.
작품을 발표하면 찬사도, 비난도 모두 작가 몫이다. 조롱거리가 될 수 있다는 압박을 견디고, 내 문장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게 두려웠다. 마지막까지 나를 짓누르더라. 하지만 그런 압박을 견디지 못하면 펜을 꺾어야 한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견뎌낸 내 자신이 대견하다.
전작들과 달리 1인칭 시점의 화자만이 등장한다. 시점이 간결해졌다.
하지만 초고는 복잡하게 나왔다. 덕분에 주인공이 완전히 죽더라. 유진이가 독자를 꼬드기며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는데 내가 끌고 간 거다. 그래서 복잡한 설정을 다 걷어냈다. 유진이를 뺀 나머지 캐릭터는 모두 병풍처럼 만들었다. 유진이의 인기를 빼앗아갈 수 있는 건 전부 감춰버렸다.
거의 모든 사건이 복층 구조의 집 안에서 벌어진다. 전작에 비해 동선도 현저히 작다.
2박3일 동안 주인공의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하니 이야기를 최소화시켜야 했다. 최소한의 인물과 최소한의 공간,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했다. 도입부부터 100페이지 가량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거실에서만 오간 것도 그래서였다.
초반부에선 행위의 진전 없이 동어반복적인 심리만 묘사되니 질식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초반부는 쓰는 것도 힘들었다. 동어반복적으로 자신에게 묻고 또 묻는 과정이 나오는데 사실 싸이코패스는 이런 식으로 갈등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진이는 엘리트고, 교육을 통해 본성을 억압한 부분이 있으니 이 정도 고민이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한편으론 독자들이 앞을 가늠할 수 없도록 묘사한 탓일지도 모른다. 주인공과 동등한 위치에서 상황을 인식하도록 서술해서 독자들은 빨리 뒷장을 넘기고 싶었을 거다.
어떤 경우엔 싸이코패스의 악함을 그리는데 망설인다는 인상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학습된 윤리적 관념이 의외로 강고해서 싸이코패스를 다루는데 충돌이 생겼지. 목에 칼을 넣어보는 장면은 퇴고 과정에서 다섯 번 정도 지웠다가 살렸다. 필요한 묘사라는 걸 알지만 막상 내 윤리적 기준에선 과하게 느껴진 거다. 결국 도덕적 기준을 버리고 싸이코패스의 관점에서 합리적인 기준을 찾고자 애썼다. 그러다 12월쯤에는 처음으로 달리듯이 써내려 갔고 4월까지 미친 사람처럼 달렸다. 그제서야 제대로 되는 기분을 느꼈다.
가족 관계 안에서의 갈등을 방아쇠 삼아 사건을 격발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뭔가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사람을 찾다 보면 결국 가족밖에 남지 않는다. 타인을 위해 나 자신을 던지긴 힘들지만 엄마나 아빠는 자식을 위해 모든 걸 던진다. 결국 가족간의 사랑, 애정에서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끌어낼 수 있다. 한편으로 가족은 가장 믿을 만한 아군이면서도 내 인생을 지옥으로 만드는 최고의 적이기도 하다. 그만큼 가족에게서 파생될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전작에 비하면 여성 캐릭터의 비율이 확실히 높아졌다.
원래 여성 캐릭터를 못 만들었다. <7년의 밤>의 강은주를 만들 때도 애를 먹었는데 <종의 기원>에서 엄마나 이모를 그리면서 자신감이 붙었다. 처음엔 아빠를 등장시킬까 했는데 그림이 안 나오더라. 엄마여야 끈끈한 감정이 전해질 거 같았다. 그래서 엄마를 잘 그릴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유진이에게 몰입하면서 엄마의 입장이 정리됐다.
정말 엄마라서 그랬던 건 아닐까?
돌아가신 엄마가 ‘타이거맘’이었다. 엄마 앞에서 ‘못해요, 힘들어요’라고 하면 한대 더 맞았다. (웃음) 나를 강하게 키우려고 노력하셨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갈등도 많이 하고 섬세했지만 나한테만 그랬다. 유진이 엄마도 여장부는 아니지만 유진이는 끝장나게 압박한다. 결국 내가 보고 자란 엄마 덕분이다.
실제로 본인은 어떤 엄마일까?
아들은 자유방임형으로 키웠다. 아들이 일본 오사카로 유학을 가서 3년을 살았는데 한번을 안 갔다가 <종의 기원> 초고 쓸 때 처음으로 가서 밥을 해줬다. 하고 싶다는 대로 키웠다.
엄마가 되니 엄마가 이해되던가?
엄마는 나를 의대에 보내고 싶어했고 기어코 기어코 간호대라도 보냈다. 숨이 막혔다. 내 인생을 꽉 틀어쥐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내가 비뚤어지지 않은 건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려도 그건 보인다. 나를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 소설을 늦게 쓴 것도 엄마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이른 나이에 소설을 썼다면 간호사 시절이나 직장 생활의 경험이 없었을 테니 어떤 소설을 썼을지 모르겠다. 운명이라는 게 참 재미있다.
간호사 시절이 지금의 작가관을 만드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신경외과 중환자실에서 일했기 때문에 수많은 죽음을 봤다. 간호사들은 그런 죽음에 휘둘리지 않고자 애를 쓴다. 상처를 받으면 힘드니까. 하지만 내가 본 숱한 죽음들이 내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심지어 엄마도 내가 스물다섯 살 때 근무하던 중환자실에서 돌아가셨다. 간호사 생활 이후 이어진 심사평가원에서의 직장 생활도 소설을 쓰는 토양이 됐다. 그리고 간호학을 공부하며 생물학이나 해부학을 공부한 덕분에 신체적인 묘사가 가능하다는 장점도 얻었다. 작가로서 수고를 던 셈이다. (웃음)
아무래도 <종의 기원>은 세상으로 숨어들어온 악의 여운을 남긴다는 점에서 흉흉한 요즘의 세태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소설이 세상을 바꿀 순 없겠지만 세상의 불길한 징후를 보여줄 순 있다고 생각한다. <종의 기원>을 발표하고 시화호에 시체를 유기한 범인이 잡혔는데 소설 속 군도신도시가 시화호와 송도 신도시를 더한 가상도시라 조금 놀랐다. 살인을 저지른 범인의 얼굴에서 살인범보단 이웃집 청년 같은 인상을 느꼈다. <종의 기원>은 우리 주변에 악이 존재할 수 있단 여운을 남기는데 그런 사건이 발생해서 개인적으론 흥미롭게 생각했다.
영화 제목이 언급되는 작품이 많다. 이번에도 <시티 오브 갓>이나 <버킷 리스트>가 등장한다. 영화를 좋아하는 거 같다.
운이 좋은지 소설과 어울리는 영화가 곧잘 떠오른다. <시티 오브 갓>에서 뻐드렁니를 내놓고 깔깔대며 총질을 해서 사람들을 죽이는 꼬마가 나온다. 나는 그 모습이 웃겨서 웃었는데 옆에선 질색하더라. 화면에서 유혈이 낭자하게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나만 웃으니까 반응이 어긋난 거지. 그걸 싸이코패스의 단서로 인용했다. 물론 나는 싸이코패스가 아니지만. (웃음) 그런데 영화를 정말 좋아하지만 보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유는?
시각적인 정보는 깡패다. 그대로 주입돼서 잊혀지질 않는다. 만약 영화에서 갇힌 방에서 탈출하는 장면을 본다면 나중에 그런 장면을 쓸 때 그 이상의 묘사를 떠올리기 어렵다. 그러니 안 보는 게 상책이다. 극복하기 힘드니까.
자신의 평소 습관을 가져다 쓴 부분이 많은 거 같다.
싸이코패스에게도 습관이 있을 텐데 타인에게 빌려 묘사하는 데엔 한계가 있으니 내 것을 가져다 쓰게 된다. 유진이가 거짓말을 잘한다고 수없이 말하는데 생각해보면 나도 어릴 때 어머니한테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잘했다. 결국 소설은 작가를 벗어나지 못한다.
<종의 기원>은 끔찍한 여운이 남는 결말까지 악으로 그득한 작품이다.
트위터에서 이런 글을 봤다. 나홍진과 정유정 좀 만나게 해달라고. (웃음) 정말 끝까지 내몰긴 했지. 그리고 탁월한 악인을 그렸다기 보단 악의 존재를 정면으로 들여다 본 셈이다. 그러니 노망이 나지 않는 이상 싸이코패스를 주인공으로 둔 소설은 쓰지 않을 거다. (웃음) 다만 사회적인 악에 관해선 할말이 많이 남았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려는 행동이 악이라고 보는데 그런 관점에서 사회적인 악인은 언제든 튀어나올 거다.
<종의 기원>을 쓰면서 애를 먹은 만큼 끝나고 나니 후련하지 않았을까.
기가 드센 소설이라 감당하기 어려웠고, 유진이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하면 어떡할까 두려웠는데 소설을 탈고한 다음날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너무 큰 충격이 오니까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오게 됐다. 건강검진을 하러 2박3일 정도 병원에 입원했는데 느닷없이 밤중에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 한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실감나질 않는다.
<내 심장을 쏴라>와 <7년의 밤> 사이에 작가로서의 기질이 달라졌다. 언젠가 또 다른 전환점이 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올해가 등단 9년차인데 문인들은 보통 등단 10년차까지 신인이라고 본다. 결국 내년이면 신인에서 벗어나는 셈이니 프로로서 원숙한 세계를 보여줘야 한다. <종의 기원>은 신인으로서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고, 악인으로선 극단까지 그려봤으니 하나의 매듭을 지었다고 본다. 내 소설의 테마는 인간의 본성이라 할 수 있는데 인간의 본성엔 악만 있는 게 아니니까 아마 다른 형태의 인간 본성을 그릴지도 모르겠다.
혹시 차기작으로 구상한 이야기가 있나?
재난 소설로 구상하고 있다. 아마 사회나 국가가 개인을 망가뜨리는 상황을 그릴 거 같다. <28>이 자연재해를 다뤘다면 차기작은 인재를 다룬 이야기일 거다.
스케일이 큰 작품이겠다.
소설을 쓰려면 형식을 장악해야 하는데 아직 장악하지 못해서 요즘엔
생각이 많다. 이야기와 개요는 머리 속에 있는데 이 이야기가 어떻게 자리잡고 전개될지 고민 중이다. 아마 내 소설 중에선 최초로 판타지적인 설정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동방유행 July 2016 VOL.10 '방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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