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특유의 동화적인 낭만을 품은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은 사랑스럽다는 단어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시킨다.
<겨울왕국>은 동화적인 세계관을 빌려서 특유의 낭만적인 해피엔딩을 구축하는데 능한 디즈니의 장기가 여실히 반영된 애니메이션입니다.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모티프로 둔 작품이죠. 하지만 원작과 기본적인 설정 자체가 다르며 이야기 양상도 완전히 판이한 작품입니다. 일종의 ‘참고작’에 가깝다고 볼 수 있죠. <겨울왕국>에선 사악한 ‘눈의 여왕’이 등장하지도 않고, 남매에 가까운 소년과 소녀 대신 자매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어둡고 우울한 원작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죠. 디즈니 특유의 낙관적인 낭만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입니다.
사실 선악의 구별이 뚜렷하고 결말에 대한 예감이 명확하다는 점에서 이야기적인 흥미가 뛰어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습니다. 하지만 캐릭터의 개성이 뚜렷하고 스크린을 채우는 이미지의 완성도가 그런 결점을 보완해주고 있죠. 특히 살아있는 눈사람 캐릭터인 올라프의 등장은 <겨울왕국>이란 작품을 보다 훌륭하게 이끌어내는
. 개인적으론 최근작 중에선 <겨울왕국>보다 <라푼젤>이 보다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라푼젤>보다 <겨울왕국>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훌륭한 뮤지컬 넘버를 만들어내는데 일가견이 있었던 디즈니의 저력을 보여주는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말이죠. <겨울왕국>의 OST는 역대 디즈니 클래식의 사운드트랙 가운데서도 손에 꼽을 만한 수작으로 회자될 겁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위키드>에서 초록 마녀 역을 맡은 이디나 멘젤의 킬링 넘버 ‘ Let It Go’는 이 작품이 지닌 최고의 자산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이 들 정도이지요.
무엇보다도 <겨울왕국>에서 흥미로웠던 건 디즈니가 자신의 세계관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공주와 개구리>(2009)부터 <라푼젤>(2011) 그리고 <겨울왕국>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성공적인 결과물을 연이어 내놓고 있는 지난 몇 년간의 디즈니는 낙천적인 해피엔딩의 강박을 넘어서 ‘지금’이라는 시제에 어울리는 감각과 철학을 반영한 작품들을 거듭 발표하고 있죠. 어쩌면 디즈니가 인수한 픽사의 브레인이었던 존 래세터를 디즈니의 총괄 책임자로 임명한 것이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동력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겨울왕국>은 익히 예상되는 왕자와 공주의 러브스토리로 극을 밀고 가지 않습니다. 특히 눈에 빤히 보인다고 믿었던 결말을 아주 살짝 비틀면서 대단히 참신한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죠. 디즈니 특유의 낭만적인 정서를 배반하지도 않고요. 자신의 세계를 참신하게 보존해냅니다. 그래서 <겨울왕국>의 결말은 정말 좋은 작법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공주와 개구리> 이후로 디즈니에선 대단히 운명에 함몰되지 않는 진취적인 여성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 역시 흥미롭습니다. 21세기의 디즈니가 찾은 마법의 비결은 여성이 아닐까 싶어요. 공주가 아니라 말이죠.
저는 지금까지도 초등학교 시절에 극장에서 <라이온 킹>을 봤던 기억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제 손을 잡고 직접 극장에 데려가셨죠. 아마도 어린 아들에게 보여줄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셨나 보죠. 그래서 만약 지금 저에게 어린 아들이나 딸이 있었다면 그 아이들의 손을 잡고 <겨울왕국>을 보러 갔을 겁니다. 좋은 작품을 보여주고 싶기도 하지만 분명 좋은 추억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면 착한 사람이 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니까요. <겨울왕국>만큼 사랑스러운 결정을 지닌 작품을 아이들과 함께 볼 기회도 드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픽사 애니메이션은 통통 튀는 ‘룩소 주니어’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이 꼬마 전구에 불이 켜지기까진 긴 시간이 필요했다.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좋아한 공주 메리다는 전통적인 혼인 관계를 강요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고자 마녀의 주술을 빌린다. 그 주술은 단순히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는 대신 어머니를 곰으로 만든다. 메리다는 사람들 몰래 곰으로 변한 어머니와 성을 빠져 나와 주술을 풀 방법을 찾아나간다. 픽사의 13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디즈니 특유의 동화적인 클리셰들을 극복의 대상으로 비트는 대신 그 고유의 감동을 과녁처럼 걸어놓고 일일이 적중시킨다. 지극히 순진해서 온전히 공감할 수 없는 몇몇 대목도 존재하지만 결국 마음을 울린다. 디즈니의 순수한 세계관과 픽사의 정교한 작법이 어울리며 디즈니 고유의 전통적인 감성을 새로운 기술로 계승한다. 픽사의 최고 브레인 존 래세터(John Lasseter)는 애초에 디즈니 애니메이터를 꿈꿨고, 한때 디즈니 애니메이터였다. 그가 지휘하는 픽사가 그린 그림이 디즈니의 그것과 닮아 보이는 건 우연이 아니다.
2006년 1월 24일, 디즈니의 공식 발표가 있었다. 74억 달러 상당의 거액으로 픽사를 인수하겠다는 것. 이 놀라운 소식은 1991년, 픽사의 장편 CG 애니메이션 제작 투자에 대한 디즈니의 결정에서 비롯된다. 당시 디즈니의 셀 애니메이션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CG로 장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는 건 일종의 허풍이었지만 픽사의 창립자 에드 캣멀(Ed Catmull)은 오래 전부터 그 날을 준비해왔다. 이미 단편 CG 애니메이션 <틴 토이>(1988)가 아카데미 최우수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을 수상했고, 디즈니의 <인어공주>(1989)나 <라이온 킹>(1994)의 부분 CG작업에 참여하며 투자 가치를 스스로 증명했다. 처음 두 회사의 관계는 디즈니의 일방적인 권한이 중시되는 주종관계에 가까웠다.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평단의 찬사 속에서 전세계적으로 3억 6천만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린 <토이 스토리>(1995)로 시작된 픽사의 역사는 곧 CG 애니메이션의 개척사가 됐다.
디즈니와의 계약 만료일인 2005년을 앞둔 2004년 초, 픽사의 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계약 연장 협상 중단을 발표했다. <토이 스토리> 이후로 <벅스 라이프>(1998), <토이 스토리 2>(1999), <몬스터 주식회사>(2001), <니모를 찾아서>(2003)로 승승장구했던 픽사였다. 그는 그 해 픽사의 4분기 실적 발표에서 픽사의 작품 배급을 바라는 메이저 배급사가 적어도 네 곳은 된다고 밝혔다. 다음날 픽사의 주식이 3% 올랐고, 디즈니의 주식은 2% 떨어졌다. 디즈니는 자사 영화 제작비의 45% 가량을 픽사의 수입으로 충당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CG 애니메이션의 반향에 밀려서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된 셀 애니메이션 제작 중단마저 선언한 상태였다. 디즈니는 내부적인 진통 끝에 당시 스티브 잡스와 반목하던 최고경영자를 해고했다. 일종의 신호였다. 인수 합병 논의는 곧 시작됐다. 마침내 미키 마우스는 룩소 주니어를 샀다. 사실상 무릎을 꿇었다.
픽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존 래세터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사업부의 수석책임자로 임명됐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디즈니 셀 애니메이션의 전통을 복원한 <공주와 개구리>(2009)와 <라이온 킹> 이후로 처음 북미 2억 달러 이상, 전 세계 5억 달러 이상의 흥행을 거둔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푼젤>(2010)을 기획했다. 존 래세터는 디즈니가 설립한 캘리포니아 예술학교, 일명 ‘칼아츠’를 수료한 뒤, 디즈니에 입사했다. 그리고 당시 디즈니의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덧없는 상실만을 체감하다 끝내 해고당했다. 존 래세터는 디즈니 재직 당시 자신이 구상했던 작품의 일부 배경의 CG 구현이 가능한지 자문하고자 에드 캣멀을 찾았었다. 에드 캣멀은 그가 당시에 보기 드물게 CG에 흥미를 지닌 애니메이터란 점에 주목했고 디즈니에서 해고당한 그를 픽사로 끌어들였다. 자신들에게 부족한 예술적 감각을 존 래세터가 채워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에드 캣멀은 일찍이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애니메이션 제작에 심취해있었다. 1970년대 초에 이런 생각은 대단히 앞서나갔거나, 그저 헛소리였지만 그는 뜻이 맞는 인재들을 규합해 나갔다. 뉴욕 공과대학 컴퓨터 그래픽스 연구소에서 결성된 팀은 <스타워즈>를 연출한 감독 조지 루카스의 ‘루카스필름’ 산하의 그래픽 부서로 편입됐다. 그곳에서 컴퓨터로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최적의 기술을 연구해나갔다. 그들은 회사 입장에선 낭비라 이해될 그 작업을 지속하고자 회사의 눈을 가리기 위한 기능적인 업무들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를 테면, 컴퓨터 그래픽과 관련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CG를 이용한 광고 비주얼 제작 따위의 일 말이다. 그 당시 이는 결코 매력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아니었다. 에드 캣멀은 쓸모 없게 보이는 애니메이터들을 고용하는 것에 끊임없이 불만을 표했던 조지 루카스를 설득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가능성의 조각들이 흩어지는 것을 수시로 막아야 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애플에서 퇴출당했던 스티븐 잡스에게 인수된 그들은 비로소 ‘픽사(PIXAR)’라는 이름을 얻었다. ‘영화를 찍다’라는 의미의 스페인어 ‘픽서(Pixer)’를 변형한 것이었다. 스티브 잡스 역시 마냥 관대한 투자자는 아니었다. 픽사를 500만 달러에 인수한 스티브 잡스는 10년 간 인수비용의 10배가 넘는 투자금을 쏟아 부어야 했으니 관대해질 수도 없었다. 다행인 건 그가 재능을 이해하고 지원할 수 있는 직관과 인내를 지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토이 스토리>의 성공가능성을 예견했고,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의 동료, 친구, 멘토였던 스티브 잡스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엔딩 크레딧에서 떠오르는 이 문구는 “우주를 깜짝 놀라게 하자”고 곧잘 말했던, 픽사의 오늘에 기여한 마지막 조력자에 대한 그리움을 전한다.
“예술은 기술을 변모시키고, 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준다.” 존 래세터의 말처럼, 픽사는 기술과 예술이 손을 잡아 이룰 수 있는 최상의 결과물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혁신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다. ‘브레인트러스트(Brain Trust)’는 이런 가치관을 대변하는 제도다. 작품을 제작하는 어느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벽에 부딪혔을 때, 브레인트러스트를 소집한다. 존 래세터, 앤드류 스탠튼(Andrew Stanton), 브래드 버드(Brad Bird) 등 픽사의 브레인들이 모인다. 그리고 토론한다. 의견을 피력할 뿐, 결정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결정은 소집을 요청한 당사자의 것이다. “예술은 팀 스포츠다”라는 픽사의 캐치프레이즈처럼, 그들은 창조적인 놀이에 창조적인 놀이터가 필요함을 잘 알고 있다. 누군가 즉흥적으로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내면 그 옆의 누군가는 그 아이디어에 그럴싸한 디테일을 붙이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한다. 소통의 가능성을 마음껏 열어둔다. 우리가 사랑하는 픽사의 애니메이션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런 사실은 하루 아침에 사라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팀이었던 픽사의 오늘을 안도하게 만든다.
<라따뚜이>(2007)에서 봤던 아름다운 파리의 전경, <월-E>(2008)의 황홀한 우주, <업>(2009)의 놀라운 비행, 그리고 <토이 스토리 3>(2010)의 심금을 울린 안녕까지, 우리가 픽사라는 이름 아래 만났던 그 사랑스러운 찰나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건 실로 다행이기 때문이다. 그건 예언자도 몽상가도 아닌, 실현가능성에 대한 의지를 밀고 나간 현실주의자들의 꿈을 통해서 완성된 현실이다. “말도 안 되는 무언가가 벌어진다고 생각할 때마다 실제로 일이 생길 것이다.” 에드 캣멀의 말처럼 픽사는 상상의 선을 긋는 대신, 그 선을 뛰어넘음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토이 스토리>의 그 대사처럼,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To infinity, and beyond!)”
솔직히 말해서 <라이온 킹>은 오늘날의 정교한 애니메이션의 기획력과 완성도에 비교하자면 떨어지는 물건이다.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의식한 효과와 예상 범위 안에서 머무르는 기승전결, 지나치게 단순해서 부조리한 은유적 세계관, 이는 결국 픽사와 드림웍스가 주도하기 전까지 애니메이션 왕국을 자처했던 디즈니 월드가 시대적 한계에 봉착하기 전까지의 영광과 한계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지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라이온 킹 3D>에서 눈여겨볼만한 건 고전 셀 애니메이션의 레이어가 컨버팅 3D 애니메이션으로 변환됐을 때, 셀 애니메이션의 레이어가 그 입체적인 공간감으로 구현되는 이미지의 목격이다. 3D 입체감과 탁월하게 결부되는 CG 애니메이션의 구현력에 미치지 못하지만 때로 그 레이어의 층위가 때때로 다른 차원의 입체감을 준다는 건 흥미롭다. 하지만 역시 세월무상이랄까. 때때로 호기심은 추억을 죽인다.
픽사 애니메이션은 언제나 통통 튀는 룩소 주니어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다. 픽사는 수많은 실패를 견뎌내고 얻어낸 이름이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최고, 그 이상이 됐다.
2006년 1월 24일, 디즈니의 공식 발표가 있었다. 74억 달러 상당의 금액을 들여서 픽사를 인수하겠다는 것.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디즈니와 픽사의 관계는 1991년에 시작됐다. 디즈니가 픽사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 자금을 투자하기로 결정하면서였다. 당시 CG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는 건 일종의 도박처럼 보였다. 하지만 픽사의 CEO인 에드 캣멀과 멤버들은 오래 전부터 그 날만을 고대해오며 모든 채비를 마련해갔다. 처음 두 회사의 관계는 투자사인 디즈니의 일방적인 권한이 중시되는 주종관계에 가까웠다. 하지만 디즈니의 권한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토이 스토리>(1995)와 함께 시작된 픽사의 역사는 곧 CG 애니메이션의 개척사가 됐다. 꿈의 왕국이라 불리던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들이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처럼 박스오피스에서 사라지는 사이, 픽사의 작품들은 꾸준히 자리를 지켜나갔다. 디즈니는 자사 영화 제작비의 45% 정도를 픽사의 수입으로 충당해내는 상태까지 몰렸다.
2004년 초, 디즈니와의 계약 만료일이 다가오자 픽사의 최고경영자였던 스티브 잡스는 계약 연장 협상 중단을 발표했다. 그는 그 해 픽사의 4분기 실적 발표에서 픽사의 작품 배급을 바라는 메이저 배급사가 적어도 네 곳은 된다고 밝혔다. 다음날 픽사의 주식은 3% 올랐고, 디즈니의 주식은 2% 떨어졌다. 디즈니는 내부적인 진통 끝에 당시 잡스와 반목하던 최고경영자를 끌어내리며 신호를 보냈다. 사실 디즈니 내부에서는 픽사가 자신들의 인지도를 넘어섰다는 징후를 곳곳에서 목격하며 심각한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인수 합병 논의는 곧 시작됐다. 그리고 마침내 미키 마우스는 룩소 주니어를 샀다. 사실상 영접이었다. 픽사의 창작적 중추 존 래세터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사업부의 최고창작책임자로 임명됐다. 래세터가 기획한 <라푼젤>(2010)은 <알라딘>(1992)과 <라이온 킹>(1994) 이후로 처음 북미 2억 달러 이상의 흥행을 거둔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됐다.
래세터는 원래 디즈니 애니메이터였다. 어려서부터 디즈니 애니메이터를 꿈꾸던 그는 디즈니가 운영하는 칼아츠를 수료한 뒤, 디즈니에 입사했다. 당시는 디즈니의 마법이 급속하게 힘을 잃어가던 시절이었다. 그는 디즈니의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덧없는 상실만을 체감하다 끝내 해고당했다. 과거 래세터는 구상하던 작품의 일부 배경의 CG 구현이 가능한지 자문하고자 캣멀을 찾았다. 캣멀은 래세터가 당시에 보기 드물게 CG에 관심이 많은 애니메이터란 점에서 감명을 받았다. 캣멀은 그를 불러들였다. 캣멀은 자신들에게 부족한 예술적 감각을 래세터가 채워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픽사의 전신은 루카스필름 산하에 있었던 하드웨어 그래픽 부서였다. 보다 명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CG애니메이션 제작을 목표로 그곳에 은둔해 있었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캣멀은 일찍이 컴퓨터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에 대해서 심취해있었다. 1970년대 초에 이런 생각은 대단히 앞서나갔거나, 그저 헛소리에 가까웠다. 그러나 자신과 뜻이 맞는 인재들을 규합해 나갔다. 뉴욕 공과대학 컴퓨터 그래픽스 연구소에서 규합된 팀은 조지 루카스의 루카스필름 산하의 그래픽 부서가 됐고, 애플에서 퇴출당한 잡스가 이를 인수하며 픽사라는 이름을 내걸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들을 지원한 어느 누구도 그들의 최종적인 목적지를 알지 못했다. 픽사의 탄생에 투자했던 잡스 역시도 마냥 관대한 투자자는 아니었다. 다만 끝내 그들의 재능을 이해하고 지원할 수 있는 직관과 인내가 있었을 뿐이다.
후에 픽사라고 불릴 스튜디오의 멤버들은 그 전신이 되는 회사에서 컴퓨터로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최적의 기술을 연구해나가며 자신들의 투자자나 인수자들이 원했던 일들을 수행해나가야 했다. 이를 테면, CG 구현을 위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개발한다던지, CG를 이용한 광고 비주얼을 제작한다던지, 그런 것들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술을 통해서 점차 살아있는 것들을 그려내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나름의 수익을 내기도 했지만 그들은 분명 매력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아니었다. 루카스필름 산하에 있었을 당시, 루카스는 쓸모 없는 애니메이터들을 고용하는 것에 끊임없이 이견을 표했고, 캣멀을 비롯한 멤버들은 그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며 가능성의 조각들이 흩어지는 것을 막아야 했다. 후에 이들을 500만 달러에 인수한 잡스는 10년 간 인수비용의 열 배가 넘는 투자금을 쏟아 부으며 때때로 조바심을 드러냈다. 다행인 것은 그가 재능을 보는 눈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토이 스토리>의 성공가능성을 예견했고,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가 오늘로 이어졌다.
최근 몇 년 사이 픽사 애니메이션들은 장족의 발전을 이뤄냈다. “예술은 기술을 변모시키고, 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준다.” 존 래세터의 말처럼, 픽사는 기술과 예술이 맞붙어 이룰 수 있는 최상품들을 대중 앞에 선보이는 혁신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다. 이는 성공적인 과정의 마련을 통해서 이뤄졌다. ‘브레인트러스트’는 픽사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제도다. 진행 중인 어느 작품의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창작적인 난관에 빠졌을 때, 브레인트러스트를 소집한다. 존 래세터, 앤드류 스탠튼, 브래드 버드 등 픽사의 아이디어 뱅크들이 그 자리에 참여한다. 그리고 토론한다. 그들은 의견을 피력할 뿐, 결정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결정은 결국 소집을 요청한 당사자의 것이다. “
예술은 팀 스포츠다.” 픽사의 캐치프레이즈는 그들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확실한 정의다. 각자의 재능을 더해서 최상의 완성도를 선사하는 것이 바로 픽사가 지닌 최고의 가능성에 가깝다. 누군가 즉흥적으로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내면 그 옆의 누군가는 그 아이디어에 그럴싸한 디테일을 붙이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접목시킨다.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고 자신의 의견을 마음껏 개진할 수 있는 시스템, 이는 픽사가 직책과 직위의 장벽으로 인한 소통의 한계 대신 상대에 대한 무한한 존중과 경의를 기본적인 덕목으로 삼고 있음을 잘 알려준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자신들의 가치를 대변하는 최고의 결과로 나아가는 방향임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감탄한 픽사의 애니메이션들은 이런 방식 안에서 탄생했다.
픽사는 그 이름을 지닐 수 있을 때까지도 성공을 확신할 수 없는, 심지어 하루 아침에 사라질 운명에 처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룹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는 생경한 것이다. 그저 공통된 꿈을 갈망한 이들이 모여 이룬 그 창작의 연대를 보존하겠다는 의지가 살아남아 이룬 결과에 가깝다. 그들은 예언자가 아니었으며 한때 몽상가로 치부되기도 했다. 결국 성공보다도 중요한 건 실현에 대한 의지였다. “말도 안 되는 무언가가 벌어진다고 생각할 때마다 실제로 일이 생길 것이다.” 캣멀의 말처럼 픽사는 상상의 선을 긋는 대신, 그 선을 항상 뛰어넘음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구축했다. <토이 스토리>의 그 대사처럼.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To infinity, and beyond!)”
벨기에 만화가 에르제의 24부작 어드벤처 시리즈 <땡땡의 모험>은 소년 저널리스트의 전세계적인 모험을 그린 작품이다. 1929년 어린이 신문에서 연재가 시작된 이 코믹 스트립은 1930년 첫 단행본 발간 이후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80개국에 번역 출간됐다. 대장정을 이루는 이 어드벤처 시리즈가 영화화된 건 사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두 편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비롯해서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전례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스크린 진입을 지휘하는 것이 스티븐 스필버그와 피터 잭슨이라는 두 대가라면, 게다가 그것이 퍼포먼스 캡처를 통한 CG 애니메이션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게다가 <틴틴: 유니콘호의 모험>(이하, <틴틴>)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첫 애니메이션 연출작이기도 하다.
퍼포먼스 캡처를 이용한 CG 애니메이션의 장점은 세심한 근육의 움직임까지 포착하며 실제적인 캐릭터의 감정을 새겨 넣을 수 있는 동시에 카메라가 쫓기 힘든 앵글의 한계를 뛰어넘는 애니메이팅의 표현력을 함께 얻어낼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디테일과 스케일을 함께 수확할 수 있다는 것. 평면 위에 그려진 세계 속을 활보하던 땡땡을 비롯한 다수의 캐릭터들을 양감의 세계로 이끌어내는 방식으로서 이는 유용해 보인다. 실사에 가까운 캐릭터를 구현하고 감정을 불어넣는 동시에 전세계를 비롯해서 달까지 착륙하는 땡땡의 모험에 효과적인 스펙터클을 가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는 원작을 스크린에 구현하겠다는 목적 이상의 성취에 대한 욕망으로 읽힌다.
<틴틴>은 영화화된 시리즈의 출항을 알리는 작품이자 스크린을 통해서 새롭게 재구성된 세계 자체를 안착시키는 시도로서의 야심을 품고 있다. 땡땡으로 알려진 틴틴을 비롯해서 모든 캐릭터의 이름은 영어권 이름으로 통일되거나 변형되고, 원작 시리즈 가운데 세 편의 에피소드를 엮어 넣으며 스토리텔링을 재단했다. 그런 의미에서 <틴틴>은 영화화된 시리즈의 초석을 다지고 본격적인 어드벤처 시리즈의 새로운 출항을 알리는 작품이다. 호기심을 동력으로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저널리스트 틴틴이 우연히 발견한 유니콘호의 모형을 통해서 새로운 호기심을 작동시키고, 모험을 펼쳐나가는 서사, 그 여정 가운데서 만난 선장 하독은 극적인 위트를 추가하고 버디무비의 활력을 부추긴다. 추리물이라는 장르 안에서 인과에 대한 서술적 강박이 때때로 미스터리를 식상하게 무너뜨리는 감은 있지만 어드벤처 장르 안에서 전시되는 비주얼의 쾌감이 그 빈틈을 압도적으로 메운다.
무엇보다도 <틴틴>의 가장 큰 성과는 퍼포먼스 캡처가 실사 촬영을 통해서 구현해내기 어려운 스펙터클의 맹점까지 밝혀낸다. 비사실적인 프레임의 사실적인 구현을 가능케 하는 표현력의 도구로서 퍼포먼스 캡처를 이용한 CG 애니메이션이 지닌 가능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증명하는 현재의 기술적 척도에 가깝다. 물론 <틴틴>은 완벽하게 언캐니밸리를 뛰어넘은 작품은 아니다. 실사와 유사한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주는 이질감의 불쾌가 <틴틴>에서도 발견되는데 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발전 속에 자리한 기술적 결함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균형이 맞지 않는 캐릭터 묘사로부터 기인하는 바도 크다. 이를 테면 실제 사람의 형상에 가깝게 변주된 틴틴의 외양과 달리 하독을 비롯한 몇몇 인물들은 애니메이션의 과장된 생김새로 구현되고 있는데 이런 묘사의 조합이 때때로 그 세계의 실제적인 풍경에 어울리지 않게 자리하고 있다는 감상을 부여한다. 이는 어쩌면 애니메이션의 양식을 처음으로 시도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의도적인 실험이 묵인하고 있는 고의적인 현상 같기도 하다.
어쨌든 <틴틴>은 어드벤처 장르물로서 극한의 체감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특히 후반부에 등장하는 원신 원컷 롱테이크 추격신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전형으로 회자될만한 성취에 가깝다. 고전코믹스 원작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해냈다는 새로운 의미와 함께 실사 촬영을 통해서 구현하기 어려운 스펙터클을 묘사해내는 기술적 수단을 자신의 것으로 개발해내는 테크니션 장인들의 면모가 반영된 새로운 전형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피터 잭슨과 스티븐 스필버그의 만남이라는 카피가 단순히 홍보용 문구로서 유용한 것이 아닌, 새로운 어드벤처 시리즈의 미래를 밝힌다는 점에서도 만족스럽다. 제작을 맡은 피터 잭슨과 연출을 맡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자리를 바꾼다는 속편을 비롯해서 피터 잭슨과 스티븐 스필버그가 공동 연출을 계획한다는 세 번째 속편까지, 트릴로지가 항해할 지도를 함께 들여다보고 싶게 만든다는 점만으로도 <틴틴>은 분명 탁월한 출항인 것이다.
<땡땡의 모험>을 잘 몰라도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이하, <틴틴>)을 즐기는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퍼포먼스 캡처를 동원한 <틴틴>은 원작 코믹 스트립을 영화화하겠다는 목적 이상의 성취를 얻어냈다. 언캐니 밸리의 한계가 간혹 목격되긴 하나, <틴틴>은 퍼포먼스 캡처가 실사 촬영으로 구현할 수 없는 스펙터클의 영역의 현실화와 비사실적인 프레임의 사실적인 구현을 가능케 하는, 표현력의 도구로서 얼마나 유용한가를 드러내는 현재의 척도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원작에 대한 호기심을 동하게 만드는 <틴틴>의 오락적 완성도 또한 탁월하다. 피터 잭슨과 스티븐 스필버그는 두 대가의 만남이란 카피가 단순한 홍보용 문구가 아님을 증명하는 동시에 시리즈로서의 미래를 밝힌다는 점에서도 만족스럽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관람 후, 자신의 애완견에 대한 기대치가 불필요하게 높아질 수 있다는 것. 틴틴 없이는 스노위도 없다.
미네소타의 작은 마을 무스레이크를 지나던 트럭에서 나무 상자 하나가 눈 쌓인 길에 떨어진다. 길을 지나던 소녀 린다가 호기심에 상자를 열어보곤 그 안에 있던 파란 앵무새 한 마리를 발견한다. 추위 탓인지, 두려움 탓인지, 몸을 웅크리던 앵무새가 소녀의 손길 앞에서 평정을 되찾는다. 블루라는 이름을 얻게 된 앵무새는 그 소녀가 어른이 되기까지 그 곁에 자리하며 편안하고 안락한 애완용 새로 길들여진지 오래다. 하지만 블루는 브라질의 리오 데 자네이루에 있다는 암컷 마코 앵무새 쥬엘과 함께 지구상에 단 한 종 밖에 남지 않은 희귀종 마코 앵무새라는 사실. 이를 전해 듣게 된 린다는 고심 끝에 마코 앵무새의 멸종을 막고자 블루를 데리고 브라질 행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블루가 만나는 건 블루와 한 쌍을 이룰 쥬엘만이 아니다.
픽사와 드림웍스의 양강 체제로 이뤄진 오늘날의 애니메이션 월드에서 호시탐탐 틈새공략을 노리고 머리를 드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이 있다. 지난 해 <슈퍼배드>를 내세우며 평단의 호평과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낸 유니버셜 스튜디오도 그 중 하나. 하지만 이에 앞서서 20세기 폭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아이스 에이지>시리즈를 성공시킨 블루 스카이 스튜디오가 있었다. 그리고 <리오>는 바로 그 블루스카이 스튜디오가 꺼내든 새로운 카드다. <리오>의 기획 전략은 <아이스 에이지>와 흡사하다. 고대 빙하기 시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그 풍경 안에 특유의 개성이 넘치는 동물 캐릭터들의 활약상을 그린 <아이스 에이지>와 마찬가지로 <리오>는 축제 활기로 가득한 리오 데 자네이루의 분위기 속에서 생동감 넘치는 동물 캐릭터들의 활약상을 채워 넣는다.
대부분의 성공적인 애니메이션들이 그러하듯이, <리오> 역시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의 활약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리고 동물 캐릭터가 주를 이룬 어느 애니메이션들과 같이 <리오>는 저마다의 동물들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캐릭터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면서도 의인화된 행위와 언어를 이식하며 어드벤처의 활기를 구현해낸다. 비행하지 못하는 마코 앵무새 블루가 짝짓기를 위해서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제 짝을 찾아 리오 데 자네이루에 도착해 벌이는 모험은 사실상 블루의 혼자 날기, 즉 홀로서기를 위한 필연적 여정과 같다. 그 과정에서 병풍이 되는 리오 데 자네이루의 풍경은 그 자체로 볼거리를 이루는 동시에, 위트 있는 활력을 채우기 위해서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것 또한 다채롭게 영화를 장식한다. 특히 극 중반부에 쥬엘과 함께 비행( 아닌 비행)을 하는 블루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 거대 그리스도상을 비껴가며 리오 데 자네이루의 풍경을 부감으로 펼쳐 보이는 모습은 장관의 엔터테인먼트다.
스토리텔링의 측면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완성도라 치켜세울 수는 없지만 <리오>는 자신이 지닌 최고의 장점을 최대로 극화시킬 줄 아는 이들의 최상품이라 할만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고대 빙하시대의 설원을 현대적인 감각의 애니메이션 소재로 차용한 <아이스 에이지>가 그러했듯이, <리오> 역시 세심하게 창작된 캐릭터들이 저마다 충실하게 제 역할을 해내며 엔터테인먼트적인 흥미와 활기를 배가시킨다는 하나의 영화적 목표로 도달해나간다. 무엇보다도 소소한 뒷골목부터 화창한 해변까지 리오 데 자네이루의 곳곳을 그려낸 <리오>의 풍광은 여행 욕구마저 자극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너무 착해서 합의적인 혐의마저 느껴지는 결말은 조금 아쉽지만 신나게 이륙해서 감동적으로 착륙하는 <리오>가 기술적으로나 감성적으로 보는 이의 안구를 정화시키고, 마음을 풍요롭게 채우는 애니메이션이란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게다가 등장 자체만으로도 눈에 띄는 ‘앵그리 버드’의 출연은 이를 눈치채는 이들을 위한 반가운 서비스 노릇을 톡톡히 해낸다.
스토리도, 캐릭터도, 픽사라는 이름 안에서 보기 드물게 이례적으로 단점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전작과의 개연성은 둘째치고, 스토리 라인 자체가 속편을 만들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게다가 <토이스토리 3>로 경이적인 속편의 가능성을 증명한 픽사이기에 <카2>가 더더욱 부족해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민폐 캐릭터를 지켜보는 것도 스트레스지만 우정이라는 단어를 활용하는 방식도 ‘픽사’답지 못하게 얕고 단순하다. 시리즈를 증명하는 기존의 캐릭터들이 새롭게 추가된 속편용 캐릭터에 비해서 매력적이지 못한 것도 안쓰럽다. 이와 무관하게 <007>시리즈를 연상시키는 리메이크적인 소품들과 이를 위해 개발된 캐릭터는 흥미롭게 즐길 만하다. 디테일부터 스케일까지, 탁월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비주얼은 감탄할만한 대목이다. 실패작이라 부르기엔 너무 박하고 범작 정도라 부를 수는 있겠다.
국수집을 운영하는 거위 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뚱뚱한 팬더 포가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던 용의 전사로 간택되어 세계의 평화를 지켜냈다는, <쿵푸팬더>는 쿵푸와 팬더라는 중화적 요소들을 결합시켜 이뤄낸 드림웍스의 새로운 성과였다. 그리고 <쿵푸팬더>의 성공을 이끈, 슈렉 이후로 가장 성공적인 드림웍스 프랜차이즈 캐릭터라고 해도 좋을 ‘쿵푸팬더’ 포를 앞세운 속편 제작은 불 보듯 빤한 일이었다. <쿵푸팬더 2>는 포복절도할 만한 재미로 무장한 전편의 기시감으로 인해 기대할 수 밖에 없는 작품이지만 언제나 속편으로 거듭해 들어갈수록 전편의 아성을 거침없이 깎아 먹어온 드림웍스의 전례를 생각했을 때 우려 또한 쉽게 거둘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드림웍스를 지탱하던 <슈렉>과 <마다가스카>의 기력이 쇠퇴한 마당에서 새롭게 부흥한 <쿵푸팬더>나 <드래곤 길들이기>와 같은 프랜차이즈의 싹을 가꿔나가는 것이 중요해진 드림웍스에 있어서 <쿵푸팬더 2>는 그들의 비전을 제시할 새로운 출발선이란 점에서도 주목할만한 대목이다.
얼떨결에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던 용의 전사로 지목되어 수련을 받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쿵푸로 진짜 세상을 구하게 된 포는 이제 진정한 용의 전사로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 나간다. 하지만 어김 없이 평화로운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당은 등장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포는 활약하며 또 한번 세상을 구한다. 매회마다 새로운 스테이지를 마련하고 새로운 악당을 상대하는 영웅의 업그레이드를 그리는 대부분의 영웅담들처럼 <쿵푸팬더 2> 역시 새로운 적을 마련하고 포의 새로운 활약을 전시해낸다. 하지만 이 작품의 강점은 팬더 포의 무용담보다도 이 뚱뚱한 팬더가 쿵푸의 고수로서 활약하는 과정 속에서 빚어지는 우스꽝스러운 행위의 전시에 있다. 진보하는 캐릭터의 능력을 구경하는 것보다도 어설프게 뒤뚱거리면서도 끝내 임무를 완료하는 팬더 포의 포복절도할 만한 활약을 지켜본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탁월한 묘미인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팬더 포, 그리고 그가 빚어내는 사건의 스케일을 넓히는 주변 캐릭터들의 존재가 이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셈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작품의 서사란 이 파괴력 있는 캐릭터들의 활동을 전시하는데 일조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물론 상투적인 클리셰를 지닌 성장드라마를 단순하고 명료한 드라마로 승화시킨 전편의 서사는 캐릭터의 매력을 탁월하게 설명해내는 가이드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쿵푸팬더 2>는 그런 전편의 성공에 힘입어 제작된 속편임을 가리기 힘든 작품이다. 등장만으로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포의 존재감은 분명 <쿵푸팬더>라는 프랜차이즈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만든다. 하지만 동시에 <슈렉>이 그러했듯이, <쿵푸팬더> 역시 긴 호흡을 염두에 둔 기획물로서 적극적인 창의력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오랜 청사진을 그리기가 쉽지 않을 것임을 예감하게 만든다.
새로운 적의 등장과 임무의 형성, 그리고 활약상의 전시까지, 속편으로서 예상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절차를 밟아나가는 <쿵푸팬더 2>는 서사적인 형태의 구축과 새로운 캐릭터의 마련에는 성공했으나 그 모든 것들을 자연스러운 흐름으로서 녹여내는 재주가 미흡해 보인다. 캐릭터가 발생시키는 위트와 성장드라마로서의 미덕이 조화를 이룬 전편과 달리 이번 속편에서는 캐릭터가 지닌 파괴적인 유머의 위력만이 거듭 확인된다. 물론 그 웃음의 파괴력만으로도, 그리고 그런 웃음을 발생시키는 캐릭터들의 치명적인 존재감만으로도 <쿵푸팬더 2>는 분명 여전히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한 오락물이다. 하지만 한 발로 작품을 지탱하는, 거대한 웃음을 통해서 서사적 결함을 덮어내려는 시도는 장기적으로 이 프랜차이즈의 비전을 염두에 둔다면 좋은 결과라 말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단적으로 말하자면 <쿵푸팬더 2>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출렁거리는 뱃살만큼이나 넉살 좋고, 식탐만큼이나 능청스러움이 하늘을 찌르는 팬더 포의 ‘미친 존재감’은 이 프랜차이즈의 생명력을 증명한다. 특히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는 대목은 선악의 대결로 점철되던 이 작품의 식상한 서사를 구원하는 일말의 은총과 같다. 특히나 앙증맞게 식탐을 자랑하는 어린 포의 출현은 그 자체만으로도 ‘완소’다. 전작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서사적인 긴밀함이 느슨해졌으며 인위적인 설정의 무리수가 엿보이기도 하지만 캐릭터의 매력은 여전하고, 웃음은 보다 강력해졌다. 눈에 보이는 장점은 극대화된 반면, 눈에 띄지 않는 기본적 요소들은 간과된 경향이 있다. 초식의 조화보다도 파괴력 있는 결정타에 의존한다. <쿵푸팬더 2>는 분명 90여 분의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 탁월한 오락물이다. 이 모든 우려는 곧 현재가 아닌 미래를 향한 것인 셈이다. 드림웍스의 지난 전례들로 인해 불가피하게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어떤 징조들 때문이랄까.
팔 하나와 몸통 밖에 남지 않은 여자 마네킹, 태엽을 감아 움직이는 장난감 물고기, 그리고 그들에게 (진짜 당신이 알아먹을 수 있는) 말을 거는 카멜레온 한 마리. 그는 연기자다. 그는 자신이 선 땅이 자신의 무대라 여기며 자신을 최고의 연기자라 자부한다. 그러나 곧 자신이 두 발로 딛고 선 그 땅이 안주할 수 없는 무대임을 깨닫게 된다. 사막을 관통하는 아스팔트 한 가운데에 내동댕이쳐진 그는 비로소 자신을 위해 마련된 그 에덴이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어항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떨어진 모하비 사막이 생전 처음 만난 생지옥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뜨거운 사막 위에서 거듭 되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하지만 뒤늦게 해답을 얻는다. “누군들 될 수 있는, 나는 랭고다.”
디즈니의 해양 어드벤처 블록버스터 <캐리비안의 해적>시리즈를 연출한 고어 버빈스키의 첫 번째 애니메이션 연출작 <랭고>는 카멜레온으로 환생한 잭 스패로우에 관한 영화이거나 <캐리비안의 해적>의 무대를 사막으로 옮긴 웨스턴 무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건 (잭 스패로우를 연기하던) 조니 뎁을 카멜레온 형태로 리모델링한 주인공 랭고를 비롯한 각양각색의 동물 캐릭터들이다. <캐리비안의 해적> 그 중에서도 세 번째 시리즈였던 <세상의 끝에서>에서 구체화됐던 잭 스패로우의 물음은 <랭고>에서 또 한번 반복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랭고의 물음은 잭 스패로우의 그것처럼 자신에게 맞아떨어지지 않는 세계에 대한 정체성 찾기의 반복이자 자문에 가깝다. 동시에 이는 연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어느 인물이 겪게 되는 정체성의 모순 그 자체와도 맞닿는다. 애초에 카멜레온이라는 설정 속에 조니 뎁을 녹였다는 것 자체가 의도적인 농담처럼 보인다.
수많은 동물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랭고>는 의인화된 캐릭터들을 관습적인 방식으로 수용하는 전통적인 애니메이션의 형태와 거리를 둔 특수한 작품이다. 명랑하고 귀여운 개성을 지닌 각양각색의 동물 캐릭터들이 의인화된 행위를 펼치는, 혹은 그 나름의 동물적 특성을 캐릭터의 개성으로 연결시키는, 오랜 애니메이션의 관습적 태도와 달리 이 작품 속의 동물들이 펼쳐 보이는 행위와 언어는 그들만의 독자적인 커뮤니티를 일찍부터 형성하고 있었던 고유의 풍경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이 단지 동물 탈을 쓴 사람들의 거짓 흉내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좀 더 발전시키자면 이는 동물들로 둘러싸인 하나의 가상적 커뮤티니의 세계, 혹은 평행우주를 염탐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귀엽거나 앙증맞기보단 거칠고 사나우며 메마른 웨스턴 세계의 비정성을 품은 이 애니메이션 속의 캐릭터들은 그 자체로서 역설적인 냉소를 뿜어낸다.
그 표면상의 이미지만으로도 <랭고>는 분명 웨스턴의 클리셰로 치장된 애니메이션이다. 쓸쓸한 사막지대 속에 자리한 낡은 풍경 속에는 미서부 개척시대의 정서를 온몸으로 간직한 억척스러운 풍경들이 갖은 형태로 그려 넣어져 있다. 선악의 대비가 불분명한 웨스턴 정글의 세계관 속에 놓인 인물들은 명확한 교훈적 의식으로 극의 기승전결을 밀고 나가지 않으며 끝없이 반복되는 소동극 속에서 발견되는 건 파란만장한 모험 속에서 우연과 필연의 여정을 거쳐 자아를 향해 달려들게 되는 도마뱀 랭고의 뚜렷한 여정이다. 그리고 이따금 튀어 나오는 허무주의적인 위트가 발견되고 인간 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부정할 수 없게 드러나며 아동적인 취향을 완전히 걷어낸 형태로 극이 진전된다. 이 자체가 이 애니메이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만들지만 동시에 이런 태도는 이 애니메이션의 정체성을 보다 강력하게 드러내는 일종의 역설적인 자아로 이 작품을 단련시킨다. 기시감과 미시감 사이에 정체성을 확보한다.
이 모든 특성을 비롯해서 할리우드의 VFX효과를 책임지는 ILM의 기술력으로 완성해냈다는 점 역시 픽사와 드림웍스의 왕중왕전이 펼쳐지는 애니메이션 월드에 새롭게 머리를 든 <랭고>의 특이점이라 할만하다. 물론 동화적이고 순수한 애니메이션의 기질을 박차버리듯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정서와 이미지로 무장한 <랭고>는 관객의 취향에 따라 명확하게 호불호가 갈릴 만한 작품인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 호의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건 이 작품이 할리우드 장르물들의 관습을 포용하면서도 그것을 끝내 뭉개버리는 태도로서 되레 진화적인 감상으로 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시감으로 범벅이 됐음에도 그 모든 이미지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며 단지 그것이 모호하거나 애매한 태도로서 감상의 뒤편에 남는 대신, 보다 적극적으로 호기심을 자극하고 감상을 진전시킨다. 할리우드 영화들의 관습을 대거 도둑질하듯 끌어다 차용하며 그런 관습적 전통들을 하나의 웃음거리로 만들지만 끝내 그 모든 가치들을 훼손시키지 않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개성을 설득시키며 이를 통해 색다른 위트와 문법들을 완성시켰다. 마치 장인들이 의도적으로 장난을 벌이고 있는, 심오한 소품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