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향의 도시라 불리던 광주에 아시아문화의 허브를 표방하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열렸다. 낮은 자세로 임하듯 자리하고 있지만 놀라우리만큼 꽉 찬 공간이었다.
2015년 11월 25일, 광주에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개관식이 열렸다. 2006년에 제정된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본격적인 사업이 추진된 이래로 10여 년 만에 구체적인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구 전남도청 부지를 포함해 무려 4만8천여 평의 너비로 조성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서울의 용산국립중앙박물관이나 예술의 전당보다도 넓은, 국내 최대 규모의 문화시설로 완공됐다. 하지만 지상에서 그 위용을 확인하긴 어렵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내려다 봐야 알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지상 아래에 설계된 지하 공간이다. 지하 공간에 조성된 대규모 문화시설이라 하니 지하로부터 실내 공간이 이어지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형태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모든 시설은 하늘이 올려다 보이는 너른 광장을 통해 연계된다는 점에서 루브르 박물관과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폐쇄적인 지하 구조 대신 뉴욕의 록펠러 센터와 같이 개방적인 선큰(Sunken) 광장의 형태로 설계됐다. 가까운 예로는 서울 삼성동의 코엑스몰 입구 연결로를 떠올리면 된다. 하지만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드높은 빌딩 아래 조성된 공간도 아니고, 단순한 통로도 아니다. “중간에 있는 큰 광장은 한옥의 마당 같은 것입니다. 가족들이 한옥의 마당을 통해 서로 연결되듯이 이 마당을 통해 사람들도 통하는 셈이죠. 하늘을 향해 뚫려 있으면서도 내향적인 공간이기도 하고요. 그럼으로써 아시아적인 공간이자 결국 한국적인 공간인 것이죠.”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설계한 재미 건축가 우규승의 설명처럼 이 광장은 시민들의 접근이 용이한 공간으로서 의미가 남다르다. 충장로와 금남로 일대의 지하상가와 이어짐은 물론 지하철과 연계돼 있고, 지역에서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리는 중심 번화가에 자리해 있다는 점을 생각하자면 이 너른 광장은 광주의 중정이나 다름없다.
무엇보다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지하에 건축된 건 광주의 역사적 배경과 깊게 연관돼 있다. “기억에 대한 문제가 중요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간직한 장소인 만큼 그런 기억을 어떻게 되살릴 수 있겠는가라는 고민이 있었죠. 전남도청 건물을 보존하는 것만으론 부족했어요. 이를 압도하는 큰 건물을 올려선 안되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이건 문화산업시설이기 때문에 과거에 집착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곤란했어요. 과거를 보존하면서도 미래로 연결할 수 있는 여건을 형성하는 게 관건이었습니다.” 건축가 우규승의 깊은 고민은 결국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구조적 깊이로 완성됐다. 실제로 지상에서 바라본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구 전남도청 건물을 제외하면 그저 너르게 조성된 평탄한 공원처럼 보인다. 이는 숭고하게 기록돼야 할 역사적 유물을 미래지향적인 문화 시설을 통해 떠받든다는 점에서 입체적인 의미를 낳았다.
“구글 사진을 통해 보게 된 광주는 회색이었어요. 녹지가 거의 없다는 걸 알았죠.” 건축가 우규승의 말처럼 광주는 녹지 조성에 인색한 도시였다. 천혜의 자연 경관을 품은 무등산이 가까이 자리한 탓일지 모르지만 편히 찾을 수 있는 공원이 부재했다는 건 아쉬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광주에 새롭게 이식된 허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낮은 곳으로 임한 주요 건물들 덕분에 평탄한 여백이 된 지상을 채운 건 만연한 초록이다. 다양한 나무와 식물들을 심고 산책로를 조성했다. 번화한 충장로의 상점가에서 길만 건너면 손쉽게 여유를 찾을 수 있다. 게다가 드넓은 풍광을 가리던 전남도청 일대의 주변 건물들이 사라진 덕분에 멀리 무등산까지 시야가 확보됐다. 도심에 새로운 옷을 입혔다. 도시의 색도, 풍경도 완전히 달라졌다.
아시아라는 이름으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다섯 공간으로 구별된다. 구 전남도청 건물을 활용한 민주평화교류원과 문화정보원, 문화창조원, 예술극장 그리고 어린이문화원까지. 민주평화교류원을 제외한 네 공간은 모두 지하에 기반을 두고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그 이름처럼 아시아문화를 위한 전당이다. 하지만 단순히 아시아문화를 관람할 수 있는 전시장이나 공연장의 기능만을 염두에 둔 공간은 아니다. “아시아 각지에서 수급한 자료를 토대로 아시아문화에 관해 연구하고 이런 연구 자료를 보관하고 공유함으로써 실질적인 문화 창작에 기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완성된 예술적 결과물을 보여줄 수 있는 무대를 갖춤과 동시에 이를 보다 넓은 세계로 유통할 수 있는 파이프 라인을 구축하려는 것이죠.” 문화창조과의 박종달 과장의 설명처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거대한 포부를 품고 있다. 이는 막연한 선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예술극장에 서른세 편의 공연을 무대에 올렸는데 이중에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직접 제작하거나 공동 제작한 열여섯 편이 미국, 영국, 독일, 스위스 등지에서 107회 정도의 공연을 펼칠 예정입니다.” 박종달 과장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의 개관작인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열병의 방>과 김지선의 <다음 신의 클라이막스> 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정보원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두뇌와 같다. 아시아문화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지식을 보관하고 널리 공유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특히 직접적인 실물 자원과 다양한 기록물과 영상 자료로 채워진 문화정보원의 라이브러리 파크는 그야말로 아시아문화 정보의 보고와 같다. 아시아의 근현대건축에 관한 자료들은 저마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주거 형태를 소개함으로써 아시아라는 이름 아래 존재하는 다양한 삶을 유추하게 만든다. 그리고 사진과 영상을 통해 그렇게 짐작한 삶의 실제 표정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아시아 각국의 현지에서 녹음된 소리를 듣고 실제적인 삶의 감각을 체험할 수 있다. 단순히 총합적인 자료를 보관하는 공간을 넘어 아시아라는 거시적인 영토의 곳곳에 자리한 미시적인 삶으로 관객을 밀어 넣는다.
이러한 과정은 우리가 속한 아시아를, 우리와 가까운 아시아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우리가 서양에 비해 동양의 문화예술을 등한시해온 경향이 있잖아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인접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고 예술적 가치를 일으켜 보자는 취지가 담긴 공간이에요.” 박종달 과장의 말처럼 우리가 잘 몰랐던, 어쩌면 크게 관심이 없었던 아시아를 향해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그리고 비로소 아시아의 공연예술과 퍼포먼스 아트, 크리에이터, 실험영화 등 다채로운 예술적 기록을 만나게 된다. 이곳이 비단 지식 전달의 목적에만 충실한 공간은 아니다. 벽을 따라 일렬로 이어지는 대나무 위로 은은한 자연광이 떨어지는 테라스 공간에선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거나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설비를 제공한다. 테라스 공간과 인접한 실내 창가엔 다양한 문화적 지식을 향유할 수 있는 도서들과 테이블이 길게 이어져 있다. 괜히 라이브러리 파크라 명명된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도서관과 공원의 융복합적 공간인 것이다.
문화창조원과 예술극장은 현재진행형의 아시아문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대면하게 되는 공간이다. 문화창조원은 인문과 예술, 과학의 경계를 초월한 영감을 이끌어내는 자궁이자 그로부터 잉태된 결과물을 세상에 드러내는 분만실이다. 일단 거대한 스케일과 경이적인 발상으로 점철된 세계적인 뉴미디어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통해 감각의 우주를 체감할 수 있다. 바닥에 깔린 거대한 스크린 위로 변화무쌍한 바코드 패턴을 흘려 보내며 그 패턴에 호응하는 EDM 사운드로 공간을 가득 메운 료지 이케다의 <테스트 패턴 [n°8]>은 그야말로 감각을 두들기는 극렬한 체험이었다. 반대로 아트+콤 스튜디오의 <RGB/CMYK 키네틱>은 기계의 움직임으로 우아함의 극치를 선사하는, 테크놀로지의 미학이란 흥미를 던진다. 동서양의 탈경계적인 발상을 제시하고, 신화적인 상상력으로 아시아 역사와 전통을 해석한, 인문학적인 고민이 깊게 배어있는 작품들도 만날 수 있다. 국내외 예술가들의 창작과 제작 연구를 지원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한 성과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란 점에서 미래지향적인 의의와 성취를 발견할 수 있는 전시관이기도 하다.
거대한 문이 압도적인 인상을 주는 예술극장은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가변형 극장이다. 극장 바닥은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구획으로 나눠져 무대와 객석의 위치와 형태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무엇보다도 완전히 개폐가 가능한 여닫이 문을 통해 실내 관객과 실외 관객 모두를 향한 쌍방향 무대를 연출할 수 있다는 점은 같은 공연을 보는 관객의 체험을 양방향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거대한 위용을 자유자재로 변형할 수 있는 극장 자체가 예술적인 인상을 준다.
지역과 미래로 소통
어린이문화원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가장 이색적인 공간이다. 유일하게 어린이들을 위해 특화된 테마파크다. 하지만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다. “어린이문화원은 국제교류, 창작 및 제작과 함께 전당의 3대 핵심사업입니다. 문화적 다양성을 체험하고 다문화사회에 대한 자연스러운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어린이극이나 음악극 형식을 빌린 창의적 교육과 다양한 체험 학습 기회를 제공하고 있죠.” 박종달 과장의 설명과 함께 왁자지껄한 아이들의 음성이 섞여 들렸다. 웃고 뛰놀며 자연스럽게 아시아의 문화에 익숙해지는 아이들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무엇보다도 이 공간은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면서도 자녀가 있는 지역민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아시아 문화의 보고가 되길 지향하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터전인 광주에서 자란 아이가 이곳에서 보고 경험한 것을 토대로 새로운 문화의 주역으로 자라난 결과를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숭고한 민주항쟁의 영토가 범세계적인 문화적 거점으로 거듭난다는 건 여러 모로 유의미한 사례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정비 중인 민주평화교류원의 역할이 중요해 보인다. 역사적 의미를 온 몸으로 안고 있는 구 전남도청 건물을 인계한 민주평화교류원은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 등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적 교류의 장이 되고자 한다. 역사를 계승하는 의미 이상의 성과가 더해진다면 가치는 더욱 무궁무진해질 것이다.
유럽에서 가장 큰 현대미술관으로 알려진 파리의 퐁피두 센터를 찾았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길게 늘어선 줄이었다. 도서관과 어린이 체험 공간, 독립영화 상영관에 입장하기 위해 퐁피두 센터를 찾은 현지인들의 줄이 미술관 입장을 기다리는 줄에 비해 압도적으로 길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여러 모로 퐁피두 센터를 떠오르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아시아문화의 스펙트럼을 전하는 프리즘이 되길 꿈꾸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진짜 살아 숨쉬는 공간이 되길 기원한다. 수많은 이들이 두 발을 딛고 서서 아시아를 보고, 느끼며 공감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호흡하고 사랑 받는 문화와 교류의 광장 같은 곳 말이다.
(MorningCalm MAY 2016 'Contemporary Korea / Asia Culture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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