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 her be healed
한혜진은 힐링의 홍일점이다. <힐링캠프>와 <26년>으로 치유의 아이콘이 됐다. 최근 그녀는 몇 가지 상실을 경험했다. 그녀에겐 스스로를 치유할 시간이 남았다. 물론 눈물이 필요한 시간은 이미 지났다.
처음 <힐링캠프> 출연이 결정됐을 때 ‘얼굴마담’일 거란 수군거림이 있었어요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리액션이나 몇 번 보여줄 거라 생각하셨을 거에요. ‘저건 또 무슨 조합이야(웃음)?’라는 반응도 있었고요. 그런데 전 그때 <굳세어라 금순아>에 캐스팅됐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사람들이 뭐라 해도 제가 아는 저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런 자신감으로 뛰어들었으니까요. 물론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됐지만 서서히 적응하면서 내 본연의 짓궂은 면을 내보일 수 있었어요.
진행자 세 분의 캐릭터가 밸런스가 확실해서 편안해 보이는 면도 있습니다
사실 예능은 선배님들이 기회를 주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곳이에요. 그런데 두 분이 계속 기회를 주셨죠. 제가 적응할 수 있도록 “한혜진 씨는 어떻게 생각해?” 이렇게 계속 물어보시고. 그 두 분이 배려해주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상상할 수도 없었겠죠.
처음 MC 제의를 받았을 땐 어떤 기분이었나요
일주일에 녹화 한번이면 영화나 드라마 스케줄과 병행할 수 있을 거 같았고, 막연히 재미있겠다고도 생각했죠. 야외 촬영 컨셉트라고 하니까 마음도 가벼웠고요. 그렇게 무작정 시작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겁 없이 뛰어들었구나 싶었어요. 녹화 초반엔 정말 집중해서 잘 들어줄 수 있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고 멍해져서 딴 생각에 사로잡히다가 질문할 타이밍을 놓치기도 했어요. 남의 얘기를 들어준다는 게 체력, 집중력, 지구력 싸움이더라고요.
일상적인 대화에선 들어주는 편인가요, 말하는 편인가요
잘 들어주는 편? 호응을 잘 해주는 편이에요.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것저것 말하는 경우가 많아요. 한번 물꼬가 트이면 말도 많아져요.
주로 질문을 받는 입장에서 질문을 하는 입장이 됐어요
지금은 대답하는 것보다 질문하는 게 더 쉬워진 거 같아요. 어떤 얘길 듣다 보면 질문하고 싶은 게 생각나요. 집중해서 듣다 보면 저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궁금한 걸 묻게 되죠. 묻는 입장이 되니 게스트들도 정신 없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세 MC에게 쉴새 없이 질문을 받잖아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 아니던가요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어떻게 이 분들과 앉아서 얘길 나누고 있지?’ 배우로서도 큰 재산이 될 거라 생각해요. 누군가의 삶을 압축해서 통째로 듣는 거니 소설이나 영화보다도 살아있는 간접경험이잖아요. 신기하면서도 감사하죠.
어쨌든 <힐링캠프>로 한혜진을 재발견했다는 평가가 많았어요
단아하고 조용하거나 새침데기 같은 역할을 많이 해서인지 실제로도 그럴 거라 생각하는 분들이 많았나 봐요. <힐링캠프> 이후로 개구쟁이처럼 보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대중적인 인지도도 확실히 높아진 거 같아요. <26년>을 만나고, 다양한 작품제의를 받은 것도 그 덕분인 거 같아요. 사실 <힐링캠프> 출연이 작품과 연결될 거란 생각도 못했죠. 예능이 무섭긴 무섭던데요.
<26년>은 원래 2009년에 <29년>으로 기획됐다가 투자 철회로 무산된 영화였어요. 출연을 결심하며 불안하진 않았나요
영화가 만들어지지 못하는 상황을 보면서 <26년>이 제겐 굉장히 짠하게 느껴졌어요. 5.18 희생자 분들, 유가족들, 광주 시민들, 그 분들의 입장을 대신해주고 싶었죠. 오히려 의미 있는 작품이 제 것이 됐다는 게 영광이었죠. 배우가 대중들의 마음을 치유해줄 수 있는 직업일지도 모르겠다는 깨달음도 생겼고요. 사실 ‘혹시 내가 힐링의 아이콘?’ 이런 생각도 조금 들었어요(웃음)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선 얼마나 알고 있었나요
사실 관심이 없었죠. 태어나기 전의 일이기도 했고.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 마음이 굉장히 뜨거워졌어요. 작품을 결정하고 나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는데 정말 충격적이었죠. 왜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했는지 의아하면서도 안타까웠죠. 결정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그 의미의 무게가 버겁진 않았나요
오히려 정반대였어요. 무거운 소재를 다루는 만큼 현장 분위기도 무겁고 책임감에 짓눌릴지 모른단 생각에 긴장했는데 막상 현장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배우가 된 이후로 처음 현장이 행복하다고 느낄 정도였으니까. 사실 그전까진 촬영 현장이 치열한 전쟁터 같았어요. 내가 알아서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니까. 그래서 작품을 대하는 게 피곤했죠. 그런데 <26년>은 촬영이 너무 기다려졌어요. 배우들이나 감독님, 스태프들과 마음이 너무 잘 맞아서 현장에서 큰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항상 웃고 즐기면서 촬영했어요.
<26년> 촬영 현장이 일종의 ‘힐링캠프’였나 봐요
어느 날 촬영 현장에서 의자에 앉아있는데 노을이 지고 있었어요. 여기가 천국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죠. 촬영 현장에서 그런 생각을 한 건 처음이었어요.
그 이전까지의 현장이 전쟁터 같았던 이유가 궁금하네요
이제 연기 10년 차에요. 처음엔 잘 몰라서 스트레스를 받진 않았지만 보고, 듣는 경험이 생기면서 연기에 대한 기대치는 많이 올라갔는데 정작 그 수준이 되질 못하니까 스트레스를 받게 돼요. 때론 잠이나 체력과의 싸움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저와의 싸움이에요. 자신과의 전쟁터였던 거죠.
배우란 직업에 회의를 느낀 적은 없었나요
이 분야에 있다 보면 도마 위에 올라갈 일도 많잖아요. 시청률, 스코어 경쟁도 해야 하는 직업이고. 저도 거기서 100% 자유롭진 못해요. 다만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노력하는 거죠.
<26년> 제작보고회에서 악역을 해보고 싶다고 했더군요
10년 동안 착한 역할만 했으니까 다른 면도 보여주고 싶어요. 제 안에도 악함이나 연약함, 부족함, 추함이 있어요. 그런 면들을 끄집어 내서 연기해보고 싶은 거죠.
자연인으로서도 보다 자유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겠죠
일상에서 표출하기 힘든 제 악함에 대한 갈증을 다른 방면으로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웃음).
한혜진의 악함이라니 상상이 안가네요
그래서 더욱 반전의 묘미가 있을지도(웃음)?
서울예술대학 영화과를 졸업했어요. 언제부터 배우가 되길 희망했나요
엄마의 영향이 커요. 계속 배우가 되라고 얘기하셨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성장하면 당연히 배우를 하는 줄 알았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오디션도 보고, 배우로 활동하고자 노력했어요. 그런데 잘 안됐죠. 하지만 그 수많은 낙오가 지금 와선 너무 소중한 경험이죠. 사실 엄마한테 고마워요. 저 혼자선 이런 삶을 꿈꾸지 못했을 거에요. 유년시절엔 소극적인 아이였고 낯을 많이 가려서 사람들과 말도 못했거든요.
지금은 어떤가요
연기를 시작하면서 억지로라도 적극적인 사람이 됐어요. 그리고 한혜진이란 이름을 사람들이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어요. 조금씩 자신감을 찾아가고 확고한 목표나 주관이 생기면서 더 자신 있게 생각을 얘기하고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게 된 거 같아요.
낯을 가려서 얻은 오해는 없었나요
예전엔 잘돼야 한다는 갈망이 컸는데 그래서인지 제 얼굴이나 눈매가 되게 매서웠대요. 그래서 감독님들이 신인 때 악역을 많이 맡기려 했어요. 욕심은 있고, 눈은 매서운데, 말은 없고, 애교가 있거나 붙임성이 좋은 것도 아니니까 오해도 많이 받았죠. 왜 이렇게 어둡냐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웃음). 목표를 조금씩 이뤄가면서 여유가 생기고 얼굴도 평안해지면서 저를 편하고 친근하게 느끼시나 봐요. 힐링의 여인이란 얘기도 들을 정도이니 정말 많이 달라지긴 했죠(웃음).
배우로서의 욕심이 컸나 봐요
갈증이 심했죠. 빨리 주연배우가 되고 싶었거든요(웃음).
어머니께선 왜 배우가 되라 하셨나요
그냥 좋아 보이셨나 봐요. 딸들 중 누군가가 배우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제가 제일 예쁘다고 생각했나 봐요(웃음). 예뻐야 배우가 된다고 생각하셨거든요. 지금도 배우란 직업을 높게 평가하세요.
사실 옛날 분들은 배우란 직업을 소위 ‘딴따라’라 부르며 무시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저희 형부(김강우)도 배우잖아요. 엄마는 언니한테도 그랬어요. 어떻게 네가 저런 신랑을 얻을 수 있겠냐며, 평생 감사하면서 섬겨야 한다고(웃음).
지난 해 12월에 부친상을 치르셨죠. 아버지께선 원래 지병이 있었나요
꽤 오래됐죠. 아버지께서 2000년도에 스트레스성 뇌졸중으로 쓰려지셔서 그때부터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셨는데 나중엔 저혈압이나 심장 문제로 수술도 하셨고요. 그 후유증이나 부작용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시다가 결국 이렇게 됐죠.
장례식 직후에 타블로 씨가 출연한 <힐링캠프>가 방송됐는데 장례식 이전에 녹화한 분량으로 알고 있어요. 타블로 씨가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를 할 때 함께 우는 모습이 안쓰럽더군요.
타이밍이 참 절묘했죠. 그 녹화할 땐 저희 아버지께서 위독하신 상태였지만 돌아가실 거라 믿고 싶지 않았어요. 가족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었죠. 중환자실로 면회를 갈 때마다 희망을 버리지 않았어요, 아버지 상태가 굉장히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어떤 끈이라도 붙잡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겉으로 멀쩡하게 녹화하고 그랬는데 타블로 씨가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할 땐 무너지더라고요. 그때 갑자기 아버지를 보내드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며칠 후 정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죠. 아버지께서 위독하신지 몰랐던 제작진도 뒤늦게 놀랐어요. 왜 얘기하지 않았냐고 하시면서 다들 마음 아파하시는데, 사실 하고 싶지 않았던 거죠.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마음이 좀 어떤가요
아직도 공허하고 어리둥절하죠. 아버지께서 여전히 병원에 계시는 것 같고, 그 빈 자리를 깨닫게 되거나 혼자 계시는 어머니 볼 때마다 쓸쓸해요. 몇 개월 지내고 나니까 비로소 큰 일을 치렀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소중한 사람을 떠나 보냈다는 게 실감나니까요. 아버지께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일찍 깨달음을 주시고 떠나신 거라고 생각해요. 누군가의 슬픔을 항상 함께 해주는 사람이, 어렵고 힘들 때 생각나는 사람이 돼야겠구나 생각했어요. 불과 몇 개월 안된 사이에 성숙해졌음을 느꼈어요. 아버지께서 일찍 안겨주고 가신 가르침이 제겐 큰 재산이자 밑거름이 될 거라 믿어요. 무엇보다도 그때 찾아주시고 힘이 돼주신 모든 분들에 대한 감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죠.
카메라 앞에선 개인적인 사정을 지우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해야 한다는 건 가혹한 일 같아요
배우도 다양한 상황 속에서 연기해야 하지만 예능 MC들은 언제나 웃는 얼굴로 앉아있어야 하잖아요. 참 어려운 일이란 걸 다시 한번 느꼈어요. 사실 부담도 있었어요. 내가 즐겁지 못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되면 많은 분들이 게스트의 얘길 듣기 보단 제 상황에 감정 이입하실지도 모르잖아요
개인적인 사정을 감춰야 하는 것과 반대로 불필요한 루머에 휘말리는 경우도 있잖아요. 잘 감당하는 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번에 아버지 장지에서 상복을 입고 있는데도 많은 분들이 반가워하시면서 사인을 부탁하시는 거에요(웃음). 그런 경험을 하면서 ‘그렇구나. 이건 이런 직업이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이런 상황을 인정하지 않으면 괴로울 수밖에 없겠죠. 부모님께선 제가 배우가 된 걸 굉장히 자랑스러워하셨어요. 아버지께선 그런 일들조차도 기뻐하셨을 거라 생각해요. 제가 사람들한테 사인해주는 걸 좋아하셨거든요. 그렇게 되는 거 같아요. 악성댓글에 시달리거나 지탄 받을 때도 있지만 이 직업이 그렇다는 걸 인정하자고. 그렇지만 그 외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충분히 누리면서 억눌리지 말고 살자고 다짐했어요.
기준이 명확하다거나 고집이 세다는 말 자주 듣지 않나요
저를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아요. 제 고집 꺾지 못한다고. 앞으로도 그럴 거에요. 직접 경험해서 옳다고 깨달은 것은 고집할 거에요. 물론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선 쉽게 인정하는 편이에요.
배우로서 자신이 선택한 작품의 흥행 결과에 책임진다는 건 조금 다른 문제일 수도 있겠죠
최대한 결과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해요. 제가 정말 흥행한 작품에도 출연했고, 그 반대인 작품도 해봤잖아요. 흥행한 작품을 해봤다고 해서 작품을 많이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오히려 작품을 하기 힘들어요. 잘 안된 작품을 했을 땐 빨리 돌파구를 찾아야 하니까 오히려 여러 작품을 해요. 결국 둘 다 장단이 있더라고요. 그에 따라서 갈 길이 있는 거고요. 어느 땐 막혀있는 것 같아도 어느 한 구석은 열려있어요. 그럼 오히려 쉬워지죠. 지금 내겐 이 정도만 열려있으니까 일단 이리로 가면 되겠다, 그런 상황이니까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저한테 활짝 열리는 길이 나오더라고요. 그럼 그때엔 신중하게 작품을 해보고 잘되면 더 열린 길로 가겠죠. 그러다가 입구가 줄어들면 줄어든 입구를 통과하면 돼요. 항상 그에 걸맞은 상황이 오니까 특별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요. 오히려 지나고 보면 재미있다고 느껴지기도 하죠.
일단 비관적인 성격은 아닌 거 같아요
그렇다고 낙천적이진 않아요. 어떤 상황을 항상 밝게만 받아들이진 못하니까요. 일단 걱정은 하죠. 그렇지만 이내 돌이키고 바꿔서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막혀있다면 내 것이 아닌 거고, 내 길이 아니니까 다른 게 오려나 보다. 이런 식이죠.
긍정적인 사람은 대부분 현실주의자에요. 현상태를 분석해서 긍정적인 돌파구를 찾는 편이니까
확실히 냉정한 면이 있어요. 어떤 상황에 맞닥뜨리면 처음엔 당황하다가도 침착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그리고 감정적으로 붕 떠있을 때 내린 결정들은 항상 일을 그르치더라고요. 감정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생각했을 때 항상 실수가 없고요. 하지만 가끔씩은 감정에 따라서 움직여보고 싶어요.
(ELLE KOREA 2월호 No.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