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나가 쓰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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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나는 작사가다. 김이나에게 작사는 하고 싶은 일의 영역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가사를 쓴다. 그렇게 살고 있다. 그래서 살 수 있다.
지금 작사 의뢰가 들어온 곡이 있나요?
오늘 당장 써야 하는 거 하나랑, 일주일 안에 써야 하는 거 하나 정도?
오늘 당장 끝내야 할 곡은 어느 정도 진전이 있나요.
집에 가면 시작해야죠.
가사를 쓰는데 뜸들이는 편은 아닌가 봐요.
그래야 잘 나와요. 초기에 그렇게 쓴 가사들이 잘 나와서 이렇게 해야 잘 풀린다는 걸 알았죠.
오늘 당장 써야 할 곡이 하나 있다는 말이 담담해서 되레 치열하게 들리네요.
그렇죠. 말은 이렇게 해도 치열하죠. 마감시간을 지켜서 원서를 넣어야 발표를 기다릴 자격도 생기니까. 치열함이 익숙해진 거죠.
<김이나의 작사법>은 가사를 제외하고 문장을 활용한 첫 결과물입니다.
원래 가수들의 복화술사였던 사람이 직접 말하는 입장이 되니 문체를 잡는 것부터 어려웠어요. 확신을 주면 안 된다는 강박 때문에 ‘하는 것 같다’란 식으로 쓰다 보니 초등학생 일기 같았거든요. 비유 없이 뭔가를 설명하는 것도 힘들었어요. 가사와 다른 영역이라는 걸 알았죠.
<김이나의 작사법>이란 제목으로부터 필연적 오해가 생기는 것도 같습니다.
사실 ‘작사’라는 단어를 제목에 넣느냐를 두고도 논의가 많았어요. 중요한 건 이게 ‘김이나의 작사법’이지, ‘작사의 정석’은 아니란 거였죠. 작사가 예술임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나라는 작사가에겐 그럴 수 있다는 거죠. 작사가를 시인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꼭 그렇진 않다는 걸 말하고 싶었고요. 무엇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책도 팔릴 거라 생각했고요. 그래서 다른 직업에 종사하시는 분들로부터 자신들의 일과 닮았다는 피드백을 받을 때 정말 기뻤죠.
10년 전부터 작사가로서 책을 쓰겠다고 생각했다니, 야심가처럼 느껴지더군요.
어릴 때부터 망상을 많이 했어요. 예를 들어서 음악을 듣다가 ‘내가 작곡가라면 얼마나 멋질까? 상을 받으면 수상 소감을 뭐라고 하지?’ 이런 식으로(웃음). 작사가가 된 뒤에도 비슷한 망상이 있었죠. ‘10년은 하겠지? 그럼 그 때 책을 내야겠다.’
작사를 한지 10년이 넘었고, 작사에 관한 책도 냈습니다. 망상이 현실이 된 셈이죠.
실패와 패배의 데이터도 굉장히 많을 거예요. 다만 그런 데이터를 남겨놓는 편이 아니에요. 재미로 점을 봐도 나쁜 얘기는 기억하질 못해요. 보통은 나쁜 얘기만 기억하게 된다는데, 저한테는 좋은 습관인 셈이죠.
때론 불편한 말도 기억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물론 개인적인 관점을 통한 발견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전달되는 평가일 땐 조금 달라요. 누군가 저에 대해 내린 평가라면 오히려 좋은 내용은 쳐내고 듣는 편이거든요.
’레프트윙’이나 ‘라이트윙’과 같은 축구 포지션으로 음반 제작 형태를 비유했더군요. 축구를 좋아하나요?
2002년 월드컵 이후로 오프사이드의 개념을 알게 된 수준이에요. 사실 남편이 축구를 좋아하는데 “저 사람은 왜 골을 못 넣어?”라고 물어보면 “저 사람은 골 넣는 포지션이 아니니까”라면서 설명해준 덕분에 포지션도 대충 알게 됐고요.
사실 그 비유 때문에 ‘작사가’를 제외한 ‘김이나’라는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궁금해졌거든요.
별 거 없어요. 그냥 게임 정도? 뭔가에 꽂히면 미친 듯이 파는 편인데 게임은 중독자 수준이 됐어요(웃음). 옛날엔 <스타크래프트>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꽂혔죠. 요새도 기본적으로 모바일 게임만 네 개를 돌려요. 피규어 모으는 것도 좋아하고, 덕후 기질이 다분하죠(웃음).
언제부터 게임을 즐겼나요.
8비트 컴퓨터 시절부터 했어요. 어머니께서 컴퓨터를 사주셔서 컴퓨터 학원에 다녔는데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것만 배웠죠. 회오리 모양의 그래픽을 만든다던가, 일기를 써서 저장한다던가. 컴퓨터로 할 수 있는 것 중에 유일하게 재미있는 건 게임밖에 없었죠.
좋아하는 것도 일이 되면 힘들다고 하죠. 음악이 지겹게 느껴질 때는 없나요?
항상 좋아하는 무언가가 생기면 항상 그 구조나 뒷배경이 궁금했어요. 그래서 옛날부터 좋아하는 음악이 있으면 베이스만 따라 들어보거나 연주 파트별로 나눠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여전히 들을수록 설레요.
책을 읽고 나니 작사란 창작이라기 보단 그 가사에 관계된 모든 이들을 위한 컨설팅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게 있어서 가사는 다양한 인간 유형에 대한 이야기에요. 작사가 혼자만의 세계관으로 작사를 커버하기엔 한계가 있죠. 물론 훌륭한 싱어송라이터라면 가능할지도 몰라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작사가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결국 가사에 담긴 진심보다 ‘가사에 담긴 진심이 어떻게 전달되는가’가 중요한 거죠.
가사가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닐 때도 있고요.
일반적인 발라드나 음절 수가 많은 미디어 템포의 곡들 같은 경우는 이야기의 작법처럼 가사를 쓰는 경우가 많지만 빅뱅의 ‘베베’나 엑소의 ‘으르렁’ 혹은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아브라카다브라’에선 서사보단 이미지나 리듬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가사가 보다 중요하죠. 가사 자체가 캐릭터가 되는 셈이죠.
한때 남편인 조영철 프로듀서가 작사가 아내를 밀어준다는 의심을 받기도 했더군요.
분명한 건 제가 이미 작사가로 활동할 때 남편은 음반 제작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도 아니었단 거예요. 저와 결혼한 후에 이 업계로 넘어왔죠. 물론 제 작사가 경력에 남편의 기여가 없었다고 단언할 순 없어요. 유리한 바도 있겠죠. 한편으론 가사를 제일 많이 고쳐달라고 요구하는 제작자이기도 하고요.
결혼하기 전에 남편이 음악 프로듀서가 되려 한다는 걸 알았습니까?
음악을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프로듀서가 될 줄은 몰랐어요. 저와 같이 작업한 첫 작품이 브라운아이드걸스의 ‘Love’였는데 그때만 해도 기획력이 있다고만 생각했지, 계속 할 줄은 몰랐죠. 본인도 자기가 이렇게 잘될 줄 몰랐대요(웃음).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 작사가로 나설 땐 불안하지 않았나요?
지금도 불안하죠. 그래도 저는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충분히 기다렸어요. 제가 회사를 그만 뒀던 시점이 아마 50곡 정도를 작사했을 즈음이었을 거예요. 곤두박질치진 않겠다 싶을 정도? 그리고 이젠 작사가로서의 감을 잃게 된다 해도 이 업계에서 어떤 형태로든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음반 비즈니스 종사자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뭘까요?
초등학생 시절에 ‘입영열차 안에서’를 부르는 김민우와 ‘추억 속의 그대’를 부르는 황치윤이 멋있었어요. 그런데 다른 노래를 부르거나 말을 할 땐 멋있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추억 속의 그대’의 작곡가가 윤상인 걸 알고 윤상 노래를 찾아 듣다가 전율을 느꼈어요. 그때 알았죠. 내가 멋있다고 느낀 게 음악 자체였구나.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매력을 만들어낸 이들이 있다는 게 놀라웠죠. 그걸 들여다 보고 싶었죠. ‘그 안에서 뭘 하길래 이런 게 나왔을까.’
결국 작사가가 돼서 윤상의 곡을 작업했습니다. 감회가 남달랐을 거 같습니다.
윤상 작곡가님께서 이런 말을 해주셨어요. “이 업계에서 너만큼 ‘빠심’이 대단한 사람은 못 봤다. 그래서 넌 잘 될 거야”라고. 너무 힘이 되는 말이었어요. 사실 가요에 대한 빠심이 창피하게 여겨져서 감춰야 된다는 강박이 있었거든요. 뭔가에 씌워서 날뛰는 느낌이니까요. 그런데 그 얘기를 듣고 나서 그게 제 능력이란 걸 알았어요. 훈련이나 연습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저를 다잡는 계기가 됐죠.
‘예술을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다만 좋은 일꾼이라고는 생각한다’는 문장은 작사가라는 직업에 대한 정의라기보단 김이나의 생존방식에 대한 정의에 가깝겠죠.
스스로 예술을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어떤 작사가에겐 독이 될 수 있겠죠. 하지만 저는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이게 내 안의 무언가로부터 길어 올린 완전한 창작이라기 보단 가수의 모형을 계속 복원하는 느낌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소진된다는 느낌을 받지도, 지치지도 않아요. 어쨌든 시간이 지나고 거품이 가라앉을 즈음엔 보다 분명해지겠죠.
거품이라면 유명세를 의미하는 걸까요?
맞아요. 다만 나쁜 의미로 발음한 게 아니에요. 맥주는 거품이 있을 때 마셔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작사가로서 성공했다는 모양새를 얻게 됐으니 지금이 하이라이트라는 말이죠. 그리고 조금씩 거품이 꺼지면 제 생존방식이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겠죠.
‘작사가 저작권료 1위’란 식의 홍보문구가 부각되기도 했는데, 부담스럽지 않나요?
띠지에 얼굴을 넣을 때부터 기분이 이상했어요. 사실 ‘인상 좋게 생겼네’ 정도의 호감만 얻어도 판매엔 유리하겠죠. 그런데 유명인사들의 추천글과 저작권료 1위라는 홍보문구들이 합쳐지면서 제 스스로가 저열한 상품이 되는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가수들을 더 이해하게 됐어요. 나보다 어린 애들이 끊임없이 이런 과정을 겪고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그만큼 스태프들도 큰 책임감을 갖게 된다는 걸 알았고요.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책에 일러스트를 직접 그렸는데, 그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 글이 낯설더라고요. 너무 진지하게 읽혀서 저 자신을 포장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이를 중화시킬 수 있는 만화가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죠. 개인적으론 이말년 작가의 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병맛’나는 느낌이 좋거든요. 그런데 편집자가 직접 그리면 좋겠다는 거예요. 처음엔 반대했죠. 지금은 좋은 선택이었던 거 같아요. 완전히 병맛 나잖아요(웃음).
병맛 코드에 끌리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요?
저한테 병신 같은 구석이 있기 때문 아닐까요(웃음)? 개인적으로 완벽하게 멋있게 보이는 건 솔직하지 못해서 그런 것처럼 느껴져요. 지나치게 완벽해서 되레 매력이 없는 느낌? 그래서 병맛 코드의 솔직함이 세련됐다고 생각해요. 그런 코드를 활용하는 작가들도 대부분 똑똑하잖아요. 대단한 능력이죠.
처음 김형석 작곡가를 만난 자리에서 작곡을 가르쳐 달라는 말을 한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생각보다 뻔뻔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웃음).
대단한 천재들에겐 드라마틱한 기회가 찾아오겠지만 평범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모양 빠지는 순간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해요(웃음). 솔직히 작곡가를 동경한 건 아니에요. 그저 음반 비즈니스에 입문하고 싶었죠. 그런데 눈 앞에 있는 작곡가한테 ‘음반 비즈니스로 입문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고 물어볼 순 없잖아요. 그 사람의 분야를 통해서 어필해야 하는 거죠. 저한테 작사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제가 작사가라서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 거예요.
김형석 작곡가가 작사를 권하지 않았다면 삶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다른 방식으로라도 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어디선가 A&R로 활동하고 있을 수도 있고. 다만 프로듀서는 아닐 거 같아요.
본래 작사가를 꿈꾸지 않았음에도 작사가가 됐듯이 살다 보면 생각지 못한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거예요. 혹시 지금 작사 외에 관심 있는 일은 없을까요?
인터뷰어? 책을 쓰는 중간에 잠시 기자를 인터뷰해서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항상 질문을 하고 누군가의 생각이나 사실을 전달하는 사람의 입장이 궁금하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많이 사라졌어요. 작사나 열심히 해야죠. 요새는 원고 기고 요청도 들어와요. 다 할 순 없지만 가능한 건 해보고 있어요.
(ELLE KOREA JUNE 2015 NO.272 'ELLE intervier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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