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같은 외모와 근육질 몸매를 지닌 헨리 카빌은 갈 수 있는 길에서 최선을 다해왔다. 그렇게 슈퍼맨이 돼서 날 수 있었지만 걷는 법을 잊지 않기 위해 역시 최선을 다하고 있다.
헨리 카빌은 정말 잘 생겼다. 만약 지금이 고대 그리스 시대나 로마
시대였다면 많은 시간이 지나 훗날 지금의 시대가 됐을 때 미술 입시 학원에서 헨리 카빌의 얼굴을 본뜬 흉상을 두고 데생 연습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헨리 카빌의 학창 시절 별명이 ‘뚱보 카빌’이었다는 게 짐작이나 되는가. “아이들은 항상 짓궂게 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관점을 갖게 해줘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
이 남자, 관대하다.
하지만 신은 헨리 카빌에게 관대할 생각이 없었나 보다. 브라이언 싱어가
연출한 <슈퍼맨 리턴즈>(2006)의 슈퍼맨 역으로
오디션을 봤지만 슈퍼맨 역에 낙점된 건 브랜든 라우스였다. 물론 이 작품이 혹평에 시달리며 흥행에 고전했던
걸 생각한다면 전화위복일지도 모르겠지만. 한편 <007 카지노
로얄>(2006)에 출연해 제임스 본드가 될 수도 있었다. 감독이었던
마틴 캠벨까지도 그가 제임스 본드를 맡는 것을 지지하며 스크린 테스트까지 진행했지만 영화사에선 조금 더 나이 든 제임스 본드를 원했고 결국 다니엘
크레이그를 선택했다. 반대로 나이가 많아서 출연이 불발되기도 했다.
<트와일라잇>(2008)의 원작자 스테파니 메이어는 <몬테 크리스토 백작>(2002)의 카빌을 보고 에드워드
컬렌 역에 적격이라 생각하며 그에게 역할을 주길 원했다. 하지만 결국
17세 역할을 맡기엔 너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캐스팅 선상에서 제외됐다. 그리고 이미
잘 알려진 대로 기회는 로버트 패틴슨의 것이었다. 카빌은 <해리포터: 불의 잔>(2005)에서도 로버트 패틴슨에게 기회를 내준 적이
있었다. <배트맨 비긴스>(2005)의 배트맨
역으로 거론됐던 건 오디션을 본 것도 아니었으니 앞선 사례들에 비하면 아쉬울 일도 아닐 정도다.
물론 그가 대단한 기회를 상실하면서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카빌에게
유명세를 안긴 건 영국의 문제적 왕이었던 헨리 8세를 다룬 TV시리즈 <튜더스>였다. 헨리 8세와 가까운 사이로서 그의 종잡을 수 없는 행적을 보좌한 찰스 브랜던을 연기한 카빌은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죽음을
맞이한 탓에 오랫동안 캐릭터의 명운을 지키기 힘들었던 이 시리즈가 시즌 4까지 진행되는 2007년부터 2010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남은 희귀한 인물로 등장했다. 그만큼 카빌의 인지도도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인상적인 역할은
아니었지만 매튜 본 감독의 판타지 로맨스물인 <스타더스트>(2007)와
우디 앨런의 코미디물인 <왓에버 웍스>(2009)에
출연하며 할리우드에서 경력을 쌓아나가던 카빌은 마침내 첫 번째 주연작을 얻게 된다.
그리스 신화를 배경에 둔 블록버스터 <신들의 전쟁>(2011)에서 신이 간택한 영웅 테세우스 역을 맡게 된 카빌은 특별한 주문을 받게 된다. 식스팩도 아닌 에잇팩을 만들 것. 금빛으로 반짝이는 화려한 의상과
미장센이 넘실거리는 영화적 분위기와 달리 시종일관 윗옷을 입지 않고 상체를 드러내는 신이 많은 작품에서 그의 몸은 단단한 근육으로 무장한 갑옷과도
같은 역할을 해야만 했다. 결국 체지방 6%대의 조각과도
같은 육체로 거듭난 그는 격렬한 액션신을 소화해 냈지만 심각한 혹평에 시달리며 기대 이하의 반응을 경험해야 했다.
게다가 이듬해에 공개된 액션 스릴러물 <콜드 라잇 오브 데이>(2012)에선 브루스 윌리스와 시고니 위버라는 쟁쟁한 베테랑 배우들과 함께 출연하며 기대를 모았음에도
신랄한 혹평에 시달리며 대중적으로도 좋은 반응을 얻기 어려웠다. 심지어 세계적인 평점사이트로 신선한
토마토와 썩은 토마토로 평점을 매기는 로튼토마토닷컴에선 신선도 5%를 기록하는 수모를 얻게 됐다. 하지만 다행인 건 이 작품들 이후로 카빌에게 큰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2011년, 카빌은 비로소
자신을 각인시킬 수 있는 역할을 제안하는 서류에 사인을 하게 된다. 과거 슈퍼맨이 되고자 했던 카빌은
결국 새로운 슈퍼맨 수트의 주인공으로 낙점됐다. 새로운 슈퍼맨 시리즈이자 DC 코믹스 세계관을 격발하는 첫 번째 실탄이라 할 수 있는 <맨
오브 스틸>(2013)에서 슈퍼맨을 연기하게 된 것이다. “슈퍼히어로의
신전에서 슈퍼맨은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언제나 존경 받는 캐릭터였다. 그가 빅스크린으로 복귀하는 과정의
일부가 될 수 있다니 영광스럽다.”
카빌의 말처럼 영화가 공개되기 전부터 영화화되는 슈퍼맨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지대했고 그 관심은 자연스럽게 카빌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카빌은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 “나는 슈퍼맨이다”라는 주문을 외우며 최선을 다해 역할에 몰두했다. 무엇보다도 신체적으로 슈퍼맨에 걸맞은 체형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흐트러짐이 없도록 만전을 기했다. 그건 단순히 캐릭터에 어울리는 육체적 조건을 만드는 것 이상의 작업이었다. “만약
내가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활보하면 사람들은 슈퍼맨이라 생각하며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책임감이 있다.”
사실 이런 책임감은 지나친 몰입이거나 과한 발상이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슈퍼맨과 같은 세기적인 아이콘을 연기한다는 건 결국 슈퍼히어로의 코스튬 이상의 상징성을 입게 되는 것이다.
<맨 오브 스틸>과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2016)으로 두 번에
걸쳐 슈퍼맨을 연기한 카빌은 새로운 시대의 슈퍼맨으로서 완전히 각인됐다. 마블의 <어벤져스> 격인 DC의 <저스티스 리그>를 영화화한 두 편의 작품도 예정돼 있다. 그만큼 슈퍼맨에 걸맞은 육체를 유지하고 그 이미지를 수호하는 건 프로다운 행위이자 각오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만 작품이 세간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가라는 문제는 배우가 책임질 수 없는 지점이니 배우로서
노력할 수밖에.
물론 카빌이 슈퍼맨 수트만 입는 배우는 아니다. 그가 슈퍼맨으로 분한
두 작품 사이에 공개된 영화 <맨 프롬 엉클>(2015)에선
섹시하면서도 능청스러운 스파이로서의 매력을 발산한 것을 보면 카빌의 야심이 단순히 빨간 망토를 두른 슈퍼히어로에 국한돼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많은 관객들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에 제작자들이 고용하길 원하는 이름 중 하나가
되길 바란다.” 카빌의 말이 단순히 대중에게 인기를 끄는 상업적인 배우가 되길 바란다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대중을
만족시킬 수 있는 연기를 통해 상업성을 인정 받을 수 있는 배우가 되길 원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그리고
올해엔 보다 현실적인 인물로서 스크린에 등장할 예정이다. 그는 이라크 배경의 전쟁드라마인 <샌드 캐슬>(2016)에서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군인으로서
두 발을 땅에 딛고 싸울 예정이다. 카빌에게 슈퍼맨이란 자신이 맡은 하나의 책임감일 뿐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질 수많은 책임감을 위해 마음을 비우고 있다. “할리우드엔
나보다 멋진 사람들과 나보다 나은 배우들이 있다. 나는 그저 그들을 따라잡으며 능가하는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심각하지도, 지나치게 낙천적이지도 않은 진지함, 헨리 카빌의 가능성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리부트’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재부팅’ 그러니까 컴퓨터를 다시 켠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다. 그러니까 영화를 리부트한다는 건 간단히 말해서 영화를 ‘다시
시작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리부트는 그 대상이 되는 원작이 깔아놓은 철로에 개량된 열차를 올려놓는 작업이 아니다. 열차뿐만 아니라 철로를 싹 갈아엎고 비행장을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작업이다.
변주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다만 그 시리즈의 정체성만은 유지한다. <배트맨 비긴즈>(2005)엔 배트맨이 있고, <맨 오브 스틸>(2013)엔 슈퍼맨이 있다. 제임스 본드가 없는 <007>시리즈가 존재할 리 없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시리즈의 미래를 보장하는 뿌리이자 줄기이며 잎이자 꽃이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할리우드엔 이미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차고 넘친다. 그들에게 새로운 숨을
불어넣을 장치가 필요할 뿐이다. 그것이 바로 리부트다.
언젠가 한번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듣는 건 필연적으로 지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듣지 못했던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그것이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였다면 더욱
솔깃해질 수밖에 없다. 배트맨이든, 슈퍼맨이든, 스파이더맨이든, 한결 같이 ‘태생의
비밀’을 안고 다시 돌아오는 것도 그래서다. 대부분의 리부트
영화들이 ‘프리퀄 무비’로 시작되는 건 다분히 전략적인 셈이다. 리부트의 대상이 되는 기존의 작품으로부터 해방돼서 새롭게 설계된 이야기 위에서 자유로운 전개가 가능하다. 이를 테면 <007: 카지노 로얄>(2006)이나 <스타트렉: 더 비기닝>(2009),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2011)과 같은 작품은 프리퀄의 형식을 빌려서
시리즈의 리부트를 시도하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서사의 발판을 확보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의 방향성을 탐색하고 구축한 뒤, 나아가버린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하는 노력보다도 손쉽게
검증된 이야기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인 방법론이다. 게다가 마블과 DC의 슈퍼히어로물들이 증명한 것처럼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존재만으로도 이룰 수 있는 이야기의 너비란 그야말로
우주처럼 넓고 광활하다. CG의 발달을 위시한 영상 기술의 발달도 리부트를 부채질한다. 과거의 기술력으론 표현할 수 없었던 이미지의 구현이 완벽하게 가능해진 시대에서 필연적으로 열악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영화적 이미지들을 놀라운 볼거리로 발바꿈시키는 것만으로도 리부트의 가능성은 보다 무궁무진해진다. 리부트
열풍은 좀처럼 꺼지지 않고 확장될 것이다. <터미네이터>를
비롯한 수많은 인기 프랜차이즈들이 리부트의 대열에 합류 중이다.
리부트 열풍은 영화계를 넘어서 TV시리즈까지 강타하고 있다. 내년에 방영될 예정인 <히어로즈> 시즌 5는 이미 기존의 시리즈를 리부트하는 방향으로 제작될
것이라고 발표됐다. 또한 고전 시리즈로서 인기를 모았던 슈퍼히어로물인
<플래쉬>도 새롭게 리부트될 예정이다. 또한
리부트 열풍은 영화와 미드의 경계를 넘어선 스핀오프 기획으로 진화 중이다. <어벤져스>의 성공에 힘입은 TV시리즈
<에이전트 오브 쉴드>가 기획된 것처럼 <다크
나이트>의 고든 경감을 주인공으로 둔 또 다른 <배트맨> 프리퀄 시리즈가 미드로 제작 중이다. 스크린과 TV의 경계를 허무는 크로스오버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어쩌면 새로운
시대가 리부트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