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배달 음식 전성 시대다. 집에서 미식을 즐길 수 있다니, 얼마나 편리한가. 하지만 그 식사가 과연 즐거웠던가?
주말마다 강림하는 귀차니즘 속에서도 꼬박꼬박 허기는 찾아왔다. 배는
고프지만 밥을 하긴 귀찮았다. 밥을 차려 먹은 뒤 설거지를 해야 하는 것도 귀찮았다. 나도, 아내도. ‘귀찮으면
나가 죽어야지’라던 어머니의 명언이 떠올랐지만 나가 죽기도 귀찮았고 배는 고팠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 배달의 민족 아이가. 그래서 한동안 새로 이사간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중국집을 찾아내는데 공력을 쏟았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고, 대략적인 리뷰를 살피고, 괜찮아 보이는 중국집에 전화해서 주문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가장 맛있는 중국집을 찾았다. 하지만 짜장면이 물렸다. 결국 내 입에게 미안해서 외출을 했다.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동네엔
괜찮은 식당이 많았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서촌에 살면서도 배달 유전자가 충만한 민족성에 의지하며 주말
끼니를 연명했던 지난 날이 문득 서글퍼졌다.
배달의 민족이란 말은 반쯤은 우스갯소리지만 반쯤은 틀린 말도 아니다. 이
땅에선 조선시대부터 일찌감치 음식 배달 문화가 있었으니까. 18세기 조선 후기의 학자인 황윤석의 <이재일기>에 따르면 냉면을 주문해서 배달해 먹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교방문화가 발달한 진주에선 관아의 기생들이나 부유한 가정집에서 진주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고도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06년에 창간한 일간지 <만세보>엔 음식 배달에 관한 광고가 게재되기도 했다. 그렇다. 우린 정말 배달의 민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배달의 민족의 역사가 꽃피는 전성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아침에도, 한낮에도, 한밤중에도, 새벽녘에도, 무엇이든 주문하세요. 배달을 해주지 않는 가게도 걱정하지 마라. 배달을 대행하는 업체가 있으니까. 전화를 걸 필요도 없다. 스마트폰 액정을 몇 번 터치하면 결제까지 손쉽게 되는 배달앱이 있으니까. 최근엔
전국 팔도 맛집의 음식을 당일 혹은 익일에 배달해주는 ‘미래식당’이란
사이트도 생겨났다. 목포의 민어회를 서울의 방안에서 받아 먹을 수 있단다. 배송비는 고작 3천원 정도. 세상
좋아졌다. 전국의 음식을 집에 앉아서 맛볼 수 있는 시대라니. 그러니까
내가 사는 그 집이 미식 문화의 미래라는 것이다. 항상 같은 식탁에 앉아서 다양한 식당의 메뉴들을 맛볼
수 있다는 말이다. 편리하다. 하지만 어딘가 허무하지 않은가.
누구나 식사를 한다. 연료를 채운다.
하지만 기름에도 등급이 있듯이 음식에도 등급이 있다. 맛있는 음식과 맛없는 음식이 존재한다. 채울 것이냐, 맛볼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식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일단 맛있는 음식 즉 ‘미식’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인가. 미식, 나, 로맨틱, 성공적? 아니아니, 그럴리가. 대부분의
사람은 홀로 식사하길 꺼린다. 혼자 밥을 먹는 ‘혼밥족’이 늘어난다 해도 삼삼오오 테이블을 채운 이들 사이에서 홀로 밥을 먹는 건 어색한 일이다. 그건 우리가 오래 전부터 밥을 먹는 행위만큼이나 밥을 먹는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밥만 먹고 사는 게 아니었던 거다. ‘어떤 밥을 먹을 것인가’라는 물음만큼이나 중요한 건 ‘어떻게 밥을 먹을 것인가’라는 물음이기도 하다. 식사라는 건 결국 ‘무엇을 먹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넘어서 ‘누구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먹을 것인가?’라는 다채로운 물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경험이다. 씹고, 먹고, 맛보고, 즐기는
미각적인 경험을 넘어서 말하고, 듣고, 웃고, 감정을 교류하는, 일종의 공감각적인 경험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찾아가서 만나고, 시간을 보내는 것, 식탁이 단지 음식을 올려놓고 먹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마주앉아서 시간을 공유하는 것임을 깨닫고,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식당에서 지불하는 돈은 단지 음식값만이 아닐 것이다. 시간과 관계를
소비하는 비용까지 포함된 내역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음식과 함께 소비한 경험에 대한 지불이라 이해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만큼 여유가 필요한 일이다. 집에서 음식을
만들고, 차리고, 먹고, 치우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식사를 하기 위해선 생각 이상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미식의 경전으로 꼽히는 저서 <미식 예찬>의 저자 브리야 샤바랭은 “그대가 무엇을 먹는지 말하라. 그러면 나는 그대가 누군지 말해보겠다”고 썼다. 우리는 때가 되면 선택한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그 선택에는 다양한 기호만큼이나 각자의 사정도
포함돼 있다. 아침 출근길에 김밥을 사가는 여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면서 김밥을 먹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음식을 씹으면서 우리의 시간과 일상도 함께 씹어 삼킨다. 포털사이트에서
‘야근’과 ‘야식’이란 단어를 함께 검색해보면 야근에 대한 괴로움과 야식에 대한 즐거움이 함께 쏟아진다. 야식이 좋아서 야근할 리는 없다. 야근해야 한다. 고로 야식을 먹어야 한다. 야식문화는 어쩌면 피로사회의 단면이다. 그렇다면 배달문화의 발달 역시 피로사회의 단면 어디쯤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바쁘고 고된 삶에서 여유 있는 식사란 사치다. 유럽의 어느 나라에선 서너 시간 동안 저녁을
먹는다는 것이 배달의 민족으로선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서너 시간 동안 저녁을 먹는 게 선진문화인가
아닌가가 중요하다는 게 아니다. 저녁을 먹는데 서너 시간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배달음식의 편의는 인정한다. 그리고 배달음식의 종류가 다양해진다는
건 식당을 찾아갈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도 다양한 미식을 즐길 기회가 늘어난다는 것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먹고 사는 재미를 포기해야 하는 아이러니라니, 배달의 민족으로 태어난 것이 죄라면
정말 죄인 것 같다.
밥이라는 거, 그냥 씹어 삼킬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맛없는 밥을 먹으면 맛있는 디저트라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새삼 내 혀에게 미안해졌다.
“조물주는 인간에게 살기 위해 먹기를 강요하는 대신 그것을 권장하려고 식욕을, 그것에 보답하려고 쾌락을 주었다.” 미식의 경전으로 꼽히는 <미식예찬>의 저자이자 저명한 미식 평론가였던 브리야 사바랭이 남긴 말이다. 여기서 쾌락이란 아마 미각을 의미할 것이다.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자연히 맛있는 것을 먹고자 하는 욕구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이 욕구란 것이 결국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일종의 혜택이란 의미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이 혜택을 잘 누릴 수는 없을 것이다. 혹은 그 혜택을 꼭 누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존재할 것이다. 그건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는 것을 강요할 필요가 없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회사 사무실이 이사하기 전, 그 부근에 점심시간마다 자주 찾던 식당이 하나 있었다. 흔히 밥집이라고 말하는 백반집 같은 곳이었는데 아마 몇 달 동안 그곳을 찾는 내내 순두부 찌개를 먹었던 것 같다. 나중에는 내가 순두부 찌개를 시킬 것임을 사장님도 짐작할 지경이었는데 한번은 함께 밥을 먹던 회사 동료가 말했다. “순두부 찌개 정말 좋아하나 봐.”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정답도 아니었다. 싫어하지 않을 뿐 정말 좋아하지 않았던 게다. 그런데 왜 맨날 순두부 찌개를 먹었던 것일까. 그냥 그게 편했다. 어차피 밑반찬이 매일같이 바뀌는 곳이고 찌개 역시 밥맛을 돋우기 위해서 곁들인 음식이라고 생각하면 뭐가 됐든 상관 없었다. 어차피 그 나물에 그 밥이니까. 물론 그 식당의 다른 메뉴가 형편없어서가 아니다. 대부분 먹을만했다. 나는 좀처럼 ‘맛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먹을만하다’ 정도라면 적당히 만족한다. 순두부 찌개는 먹을만했다. 내 기준에서 먹을만한 메뉴들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씹어 삼킬 수 있었다. 고로 어제 자장면을 먹었으니 오늘 자장면을 먹을 수 없다는 논리는 나와 무관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는 것처럼 오늘은 오늘의 짜장면이, 내일은 내일의 짜장면이 만들어지는 거다.
“지금 먹고 싶은 거 있어?”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는 건 그래서였다. 먹어야 한다는 본능은 강렬한데 먹고 싶은 무언가에 대한 욕구는 강렬하지 않았다. 서술어는 존재하는데 목적어가 부재했다. 뚜렷한 의지도 없었다. 사실 직장인이라면 필연적으로 일주일에 다섯 번씩 반복적인 고민에 당면한다. 점심시간마다 매번 무엇을 먹을 것인가라는 화두 앞에서 고민하기 마련이다. 만약 당신이 80세까지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당신은 29200번의 점심을 먹어야 한다. 하루에 식사를 세 번 한다는 가정 하에선 87600번의 식사를 해야 한다. 그만큼의 고민을 껴안고 살아야 한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피곤한 일이다. 결국 적당히 끼니를 때우자는 절충안이 득세하기 마련이다. 생존이라는 식사의 본질적인 기능성이 메뉴 선정의 패턴에 적극적으로 반영된다.
사실 내게 있어서 식사란 기본적으로 주유 혹은 충전과 다를 바 없는 행위다. 식사란 에너지 충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뇌에서 보낸 전기 신호로 인해 촉진된 위산의 분비가 발생시킨 위벽의 통증, 즉 우리가 흔히 허기라고 말하는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 씹고 삼키는 행위를 유도하기까지의 매커니즘의 결말에 해당된다, 결국 인간은 살기 위해서 식사한다. 다만 생존만을 생각하기엔 인생은 길고 먹을 것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맛있는 것을 먹길 바란다.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항상 최상의 맛을 느낄 수 없다면 적당한 포만감이 보다 중요하다. 신은 내게 세치 혀가 느낄 수 있는 쾌락을 선물했을지 몰라도 그것을 끝까지 추구할 끈기를 선물한 것 같진 않다. 하지만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입과 소화시킬 수 있는 위만큼은 확실히 선물한 것 같다. 그리고 세상엔 신이 선사한 혜택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신념을 필사적으로 추구하는 이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의 고민에 무임승차하면 된다. ‘머리칸’이든 ‘꼬리칸’이든. 그런데 대부분 그 고민의 주체는 남자보단 여자였던 것 같다.
사실 예전엔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들은 왜 항상 밥을 남기면서 케이크를 먹는 것일까. 분명히 배가 불러서 밥을 남긴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저 빵은 입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인가. 그때마다 그녀들은 말했다. 여자에겐 ‘밥 배가 따로 있고, 디저트 배가 따로 있다’고. 그러니까 한 조각 케이크를 맛보기 위해 그녀들은 그리 밥을 남겼나 보다. 생각해보면 그것이야말로 대단히 필사적인 행위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혜택을 누리고야 말겠다는 일종의 의지. 식사가 맛이 없었다면 맛있는 디저트라도 먹어야 한다는 의무감. 물론 그녀들은 식사가 맛있어도 디저트를 찾는다는 게 함정이지만 어쨌든 디저트 문화라는 건 보통의 남자들에겐 익숙한 행동 양식이 아니다. 남자 둘이서 카페에서 케이크를 나눠 먹고 있는 모습을 볼 기회란 흔치 않은 건 그래서다. 애초에 케이크를 먹기 위해서 위를 비워야 한다는 사고를 지시할 학습 유전자 자체가 남자에겐 희박하다. 결국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미식의 개화기를 열어주는 건 여자일수밖에 없다. 애인과의 데이트를 위해서 맛집을 찾고, 브런치를 먹고, 케이크를 먹고, 와인도 마시고, 아마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자를 통해서 미식의 개화기를 맞이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남자 누구냐고? 내가 그랬다.
잘못된 일반화의 오류 아니냐고? 글쎄. 물론 아닌 남자들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 남자의 팔 할은 그럴 것이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삼겹살이 이 땅의 외식 문화를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삼겹살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그것만이 내 세상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말이다. 남자들이 주도한 심심한 식문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건 분명 여자들이다. 결국 먹고 싶은 게 많은 여자들 덕분에 먹을 수 있는 것이 많아졌다. 사회적인 시각도 변했고, 남자들의 혀도 달라졌다. 여자로 인해 남자의 미각이 진화했다. 생각해보면 아담에게 선악과를 권한 것도 이브였다. 태초부터 미식에 대한 호기심이란 남자보단 확실히 여자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언컨대 여자가 미식의 미래다. 고로 나는 그녀들을 따라서 주유, 아니, 주문한다. 선악과라도 상관없다. 먹을만하니까 먹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