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미디어 시대가 도래했다고 한다.
1인 미디어란 언어 그대로 1인이 미디어가 된 것을 의미한다. 이를 테면 파워블로거 같은 것이다. 웹을 통해 전지역적인 네트워크가
개설되고 편집과 제작이 용이한 개인 블로그 플랫폼 툴이 제공되면서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세상에 띄워 보낼 수 있게 됐다. 세상을 망라한 식견을 쥐고 있다면 충분히 털어낼 수 있는 창구가 생겼다. 그리고
이젠 자신을 영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시대다. 유투브, 아프리카 TV와 같은 동영상 사이트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의 SNS를 통해 자신의 끼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영상을 찍고, 보여줄 수 있다.
반대로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갖고 있다. 스마트폰에서 전화 기능은 옵션 중
하나가 된지 오래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핸드폰 광고는 높은 산에서, 먼 바다에서 통화가 잘 터지는가를 강조했다. 요즘의 스마트폰 광고는 대부분 카메라 화소가 얼마나 좋은지, 데이터가
얼마나 잘 잡히는지에 방점을 찍는다. 결국 잘 찍히는가 그리고 잘 볼 수 있는가가 지금 스마트폰을 고르는
기준이다. 결국 음성이 아니라 사진과 영상이 스마트폰에서 가장 핵심적인 화두란 말이다.
1995년도에 방영된 드라마
<모래시계>를 사람들은 ‘귀가시계’라 불렀다. 사람들이 <모래시계> 방영 시간을 맞춰서 집으로 귀가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때를
놓치면 방송을 보기 힘든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보고자 했던 방송을 찾아서
볼 수 있다. 재방송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결국 정확한
시간대에 TV 앞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스마트폰은 TV의 대안이 아니다. 그들에겐
리모콘으로 채널을 고르는 것보다 액정을 터치해 플레이 버튼을 누르는 게 더욱 익숙하다. 그곳엔 엄마, 아빠가 보던 TV채널과 다른 것이 있다. 먹방, 겜방, 톡방 등
개인이 직접 출연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말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공유한다. 자신이란
콘텐츠를 세상에 전파한다.
이들을 콘텐츠 크리에이터라 명명하는데 그들 중에선 연예인만큼이나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고 높은 수익을 올리는 이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올해 <동상이몽>에 출연한 BJ 대도서관은 자신의 월 수익이 오천만원이라고 밝혔다. 대도서관은 자신이 게임을 하는 영상을 중계하고, 그 영상을 보는
이들과 대화하듯 말한다. 즉각적인 대화가 가능하고, 실시간적인
콘텐츠 플레이가 가능하다. 채널에 소속된 개인이 아니라 개인 자체가 채널이 된다는 것, 이는 전통적인 TV 방송 안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이다.
연예인에게 매니저가 있듯이 대단한 팬덤을 지닌 콘텐츠 크리에이터에게도 매니저가 생겼다.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만든 콘텐츠의 배급과 관리를 담당하는 신종 사업인데 이를 멀티 채널 네트워크(Multi Channel Network), 즉 MCN이라고 한다. MCN 산업은 1인 미디어의 시대를 통해서 새로운 미디어의 흐름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이는 1인 미디어를 위한 매니지먼트이면서도 수많은 1인
미디어를 거느린 방송국의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트레저 헌터나 다이아TV, 메이크어스 등 1인 미디어 혹은 중소 규모의 제작자 집단을 거느린 MCN 산업을 전개하는 움직임이 심심찮게 발견되고 있다. 다만 이런
움직임이 결국 폭넓은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는 범대중적인 영향력으로 확산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아직
무르익지 않은 시장성과 휘발되는 재미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는 콘텐츠의 질적인 성숙 여부도 향후 MCN 산업의
청사진을 가늠하는 키가 될 것이다.
결국 우리 손에 쥐어져 있는 스마트폰이 1인 미디어의 향방을 좌우할
것이다. 흥미 있는 콘텐츠는 SNS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발 빠르게 전파된다. 1인 미디어 시대란 결국 스마트폰이란 디지털 디바이스를 통해 발견된 새로운 영토를
개척한 개인 창작자들의 서부시대다. 그 중에서도 영상 콘텐츠는 1인
미디어 시대의 패권을 가늠할 알파요, 오메가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당연히 주목하지 아니할 수 없다.
1인 미디어 시대가 도래했다고 한다.
1인 미디어란 언어 그대로 1인이 미디어가 된 것을 의미한다. 이를 테면 파워블로거 같은 것이다. 웹을 통해 전지역적인 네트워크가
개설되고 편집과 제작이 용이한 개인 블로그 플랫폼 툴이 제공되면서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세상에 띄워 보낼 수 있게 됐다. 세상을 망라한 식견을 쥐고 있다면 충분히 털어낼 수 있는 창구가 생겼다. 그리고
이젠 자신을 영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시대다. 유투브, 아프리카 TV와 같은 동영상 사이트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의 SNS를 통해 자신의 끼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영상을 찍고, 보여줄 수 있다. 반대로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갖고 있다. 스마트폰에서 전화 기능은 옵션 중
하나가 된지 오래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핸드폰 광고는 높은 산에서, 먼 바다에서 통화가 잘 터지는가를 강조했다. 요즘의 스마트폰 광고는 대부분 카메라 화소가 얼마나 좋은지, 데이터가
얼마나 잘 잡히는지에 방점을 찍는다. 결국 잘 찍히는가 그리고 잘 볼 수 있는가가 지금 스마트폰을 고르는
기준이다. 결국 음성이 아니라 사진과 영상이 스마트폰에서 가장 핵심적인 화두란 말이다.
1995년도에 방영된 드라마
<모래시계>를 사람들은 ‘귀가시계’라 불렀다. 사람들이 <모래시계> 방영 시간을 맞춰서 집으로 귀가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때를
놓치면 방송을 보기 힘든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보고자 했던 방송을 찾아서
볼 수 있다. 재방송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결국 정확한
시간대에 TV 앞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스마트폰은 TV의 대안이 아니다. 그들에겐
리모콘으로 채널을 고르는 것보다 액정을 터치해 플레이 버튼을 누르는 게 더욱 익숙하다. 그곳엔 엄마, 아빠가 보던 TV채널과 다른 것이 있다. 먹방, 겜방, 톡방 등
개인이 직접 출연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말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공유한다. 자신이란
콘텐츠를 세상에 전파한다. 이들을 콘텐츠 크리에이터라 명명하는데 그들 중에선 연예인만큼이나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고 높은 수익을 올리는 이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올해 <동상이몽>에 출연한 BJ 대도서관은 자신의 월 수익이 오천만원이라고 밝혔다. 대도서관은 자신이 게임을 하는 영상을 중계하고, 그 영상을 보는
이들과 대화하듯 말한다. 즉각적인 대화가 가능하고, 실시간적인
콘텐츠 플레이가 가능하다. 채널에 소속된 개인이 아니라 개인 자체가 채널이 된다는 것, 이는 전통적인 TV 방송 안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이다.
연예인에게 매니저가 있듯이 대단한 팬덤을 지닌 콘텐츠 크리에이터에게도 매니저가 생겼다.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만든 콘텐츠의 배급과 관리를 담당하는 신종 사업인데 이를 멀티 채널 네트워크(Multi Channel Network), 즉 MCN이라고 한다. MCN 산업은 1인 미디어의 시대를 통해서 새로운 미디어의 흐름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이는 1인 미디어를 위한 매니지먼트이면서도 수많은 1인
미디어를 거느린 방송국의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트레저 헌터나 다이아TV, 메이크어스 등 1인 미디어 혹은 중소 규모의 제작자 집단을 거느린 MCN 산업을 전개하는 움직임이 심심찮게 발견되고 있다. 다만 이런
움직임이 결국 폭넓은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는 범대중적인 영향력으로 확산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아직
무르익지 않은 시장성과 휘발되는 재미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는 콘텐츠의 질적인 성숙 여부도 향후 MCN 산업의
청사진을 가늠하는 키가 될 것이다.
결국 우리 손에 쥐어져 있는 스마트폰이 1인 미디어의 향방을 좌우할
것이다. 흥미 있는 콘텐츠는 SNS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발 빠르게 전파된다. 1인 미디어 시대란 결국 스마트폰이란 디지털 디바이스를 통해 발견된 새로운 영토를
개척한 개인 창작자들의 서부시대다. 그 중에서도 영상 콘텐츠는 1인
미디어 시대의 패권을 가늠할 알파요, 오메가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당연히 주목하지 아니할 수 없다.
바야흐로 배달 음식 전성 시대다. 집에서 미식을 즐길 수 있다니, 얼마나 편리한가. 하지만 그 식사가 과연 즐거웠던가?
주말마다 강림하는 귀차니즘 속에서도 꼬박꼬박 허기는 찾아왔다. 배는
고프지만 밥을 하긴 귀찮았다. 밥을 차려 먹은 뒤 설거지를 해야 하는 것도 귀찮았다. 나도, 아내도. ‘귀찮으면
나가 죽어야지’라던 어머니의 명언이 떠올랐지만 나가 죽기도 귀찮았고 배는 고팠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 배달의 민족 아이가. 그래서 한동안 새로 이사간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중국집을 찾아내는데 공력을 쏟았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고, 대략적인 리뷰를 살피고, 괜찮아 보이는 중국집에 전화해서 주문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가장 맛있는 중국집을 찾았다. 하지만 짜장면이 물렸다. 결국 내 입에게 미안해서 외출을 했다.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동네엔
괜찮은 식당이 많았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서촌에 살면서도 배달 유전자가 충만한 민족성에 의지하며 주말
끼니를 연명했던 지난 날이 문득 서글퍼졌다.
배달의 민족이란 말은 반쯤은 우스갯소리지만 반쯤은 틀린 말도 아니다. 이
땅에선 조선시대부터 일찌감치 음식 배달 문화가 있었으니까. 18세기 조선 후기의 학자인 황윤석의 <이재일기>에 따르면 냉면을 주문해서 배달해 먹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교방문화가 발달한 진주에선 관아의 기생들이나 부유한 가정집에서 진주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고도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06년에 창간한 일간지 <만세보>엔 음식 배달에 관한 광고가 게재되기도 했다. 그렇다. 우린 정말 배달의 민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배달의 민족의 역사가 꽃피는 전성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아침에도, 한낮에도, 한밤중에도, 새벽녘에도, 무엇이든 주문하세요. 배달을 해주지 않는 가게도 걱정하지 마라. 배달을 대행하는 업체가 있으니까. 전화를 걸 필요도 없다. 스마트폰 액정을 몇 번 터치하면 결제까지 손쉽게 되는 배달앱이 있으니까. 최근엔
전국 팔도 맛집의 음식을 당일 혹은 익일에 배달해주는 ‘미래식당’이란
사이트도 생겨났다. 목포의 민어회를 서울의 방안에서 받아 먹을 수 있단다. 배송비는 고작 3천원 정도. 세상
좋아졌다. 전국의 음식을 집에 앉아서 맛볼 수 있는 시대라니. 그러니까
내가 사는 그 집이 미식 문화의 미래라는 것이다. 항상 같은 식탁에 앉아서 다양한 식당의 메뉴들을 맛볼
수 있다는 말이다. 편리하다. 하지만 어딘가 허무하지 않은가.
누구나 식사를 한다. 연료를 채운다.
하지만 기름에도 등급이 있듯이 음식에도 등급이 있다. 맛있는 음식과 맛없는 음식이 존재한다. 채울 것이냐, 맛볼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식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일단 맛있는 음식 즉 ‘미식’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인가. 미식, 나, 로맨틱, 성공적? 아니아니, 그럴리가. 대부분의
사람은 홀로 식사하길 꺼린다. 혼자 밥을 먹는 ‘혼밥족’이 늘어난다 해도 삼삼오오 테이블을 채운 이들 사이에서 홀로 밥을 먹는 건 어색한 일이다. 그건 우리가 오래 전부터 밥을 먹는 행위만큼이나 밥을 먹는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밥만 먹고 사는 게 아니었던 거다. ‘어떤 밥을 먹을 것인가’라는 물음만큼이나 중요한 건 ‘어떻게 밥을 먹을 것인가’라는 물음이기도 하다. 식사라는 건 결국 ‘무엇을 먹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넘어서 ‘누구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먹을 것인가?’라는 다채로운 물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경험이다. 씹고, 먹고, 맛보고, 즐기는
미각적인 경험을 넘어서 말하고, 듣고, 웃고, 감정을 교류하는, 일종의 공감각적인 경험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찾아가서 만나고, 시간을 보내는 것, 식탁이 단지 음식을 올려놓고 먹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마주앉아서 시간을 공유하는 것임을 깨닫고,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식당에서 지불하는 돈은 단지 음식값만이 아닐 것이다. 시간과 관계를
소비하는 비용까지 포함된 내역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음식과 함께 소비한 경험에 대한 지불이라 이해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만큼 여유가 필요한 일이다. 집에서 음식을
만들고, 차리고, 먹고, 치우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식사를 하기 위해선 생각 이상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미식의 경전으로 꼽히는 저서 <미식 예찬>의 저자 브리야 샤바랭은 “그대가 무엇을 먹는지 말하라. 그러면 나는 그대가 누군지 말해보겠다”고 썼다. 우리는 때가 되면 선택한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그 선택에는 다양한 기호만큼이나 각자의 사정도
포함돼 있다. 아침 출근길에 김밥을 사가는 여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면서 김밥을 먹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음식을 씹으면서 우리의 시간과 일상도 함께 씹어 삼킨다. 포털사이트에서
‘야근’과 ‘야식’이란 단어를 함께 검색해보면 야근에 대한 괴로움과 야식에 대한 즐거움이 함께 쏟아진다. 야식이 좋아서 야근할 리는 없다. 야근해야 한다. 고로 야식을 먹어야 한다. 야식문화는 어쩌면 피로사회의 단면이다. 그렇다면 배달문화의 발달 역시 피로사회의 단면 어디쯤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바쁘고 고된 삶에서 여유 있는 식사란 사치다. 유럽의 어느 나라에선 서너 시간 동안 저녁을
먹는다는 것이 배달의 민족으로선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서너 시간 동안 저녁을 먹는 게 선진문화인가
아닌가가 중요하다는 게 아니다. 저녁을 먹는데 서너 시간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배달음식의 편의는 인정한다. 그리고 배달음식의 종류가 다양해진다는
건 식당을 찾아갈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도 다양한 미식을 즐길 기회가 늘어난다는 것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먹고 사는 재미를 포기해야 하는 아이러니라니, 배달의 민족으로 태어난 것이 죄라면
정말 죄인 것 같다.
울컥했다는 이가 한둘이 아니다. <무한도전>의 ‘토토가’가 잠자던 90년대의 감성을 건드렸다. 90년대 대중음악이란 지금 어떤 의미인가. 90년대 대중음악을 듣고
자란 세 사람이 모여 썰을 풀었다.
민용준(이하
‘민’)다들 <무한도전> ‘토토가(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는 어떻게 봤나?
김형석(이하
‘김’)재미있게 봤다. <무한도전>의 힘을 재확인하는 기분이었다.
배순탁(이하
‘배’) <무한도전> 다이어리는 특별히 홍보도 안 하는데 100만권이 팔린다더라(웃음). 사실 ‘토토가’에 나온 가수들 대부분은 2000년대 이후의 세대에겐 잊혀져 버린
가수들이라 할 수 있는데 일부로 그런 가수들만 섭외한 건지, 그런 가수들만 섭외된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기획의 승리라고 본다. 개인적으론 내가 그 노래를 다 기억하고
있어서 놀랐다.
민 뇌가 좀 더 싱싱할 때 들어서인지
몰라도 가사가 저절로 기억나서 따라 부르게 되는 게 신기했다.
배 윤도현이 <나는 가수다>에서 소녀시대 노래를 부를 때 가사가 외워지질
않아서 미치겠다고 했다. 확실한 건 요즘의 가요들과 달리 90년대의
가요엔 스토리텔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래 기억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민 ‘토토가’ 이전에도 90년대를
조명하는 기획이 있었다. <응답하라 1997>이나 <응답하라 1994>가 대표적이고, <나는 가수다>도 90년대에
발을 걸친 인상이었다. 작년에 발매된 김동률의 신보도 90년대의
노스탤지어를 건드린 것 같다. 이적이나 윤상 같은 90년대
싱어송라이터가 다시 주목을 받는 과정도 그렇고.
배 사이먼 레이놀즈라는 음악 평론가가
쓴 <레트로 마니아>라는 책이 있는데 레트로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한 책이다. ‘음악에 있어서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는가’란 식으로. 아무래도 레트로라는 게 과거의 소스를 재생시키는 거니까 먼 과거를 지나 가까운 과거가 레트로의 차례가 됐다고
봐도 될 것 같다. 80년대가 레트로의 대상이 됐던 시대를 넘어서 이젠 90년대가 ‘핫’해질 순서가
된 거 아닐까.
민 90년대 대중음악이란 것이 추억을 넘어 열광의 대상이 되는 인상도 있다. 그건
레트로와 조금 다른 현상 같다.
배 모든 세대마다 자기 세대만의
사운드트랙이 있겠지만 90대는 음악산업이 정점을 찍었던 해이니까 다른 시대에 비해 추억의 밀도가 훨씬
높을 수 있다. 아마 시절을 추억하는 수단이 음악일 수 있는 마지막 세대가 지금의 30~40대일 수도 있을 거 같다. 지금의 10대나 20대는 어쩌면 음악이 아니라 게임이 될 수도 있고.
김 생각해 보면 2000년대에 들어와서 음반시장이 망가진 원인으로 핸드폰을 꼽는 경우도 많았다.
사람들이 핸드폰으로 게임을 많이 하니까 상대적으로 음악을 듣지 않는다는 식이었지.
민 90년대에 대중가요라는 것이 대중문화 안에서 가장 큰 광장 역할을 했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던 세대들이 ‘토토가’를 통해 어떤 추억의
연대를 경험하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지금도 음악의 소비는 활발하게 이뤄진다. 다만 음반이라는 물리적 형태의 소유가 아니라 음원의 거치 형태라는 점이 큰 차이를 만드는 것 같다.
배 아무래도 경험은 물성을 통해서
극대화된다고 본다. 만지는 개념이 정말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90년대는 음반이라는 음악적 물성을 간직한 마지막 시대였던 것 같다. 음반이라는
물성을 경험해보지 못하는 이상 음악이라는 그리움 자체가 형성되긴 어렵지 않을까.
민 ‘토토가’ 이후로 90년대가 대중음악의 전성기였다는 말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배 부분적으론 동의할 수 있다. 모든 지표들이 그걸 증명해 주니까. 90년대는 대중음악이 문화 소비의
패권을 차지했던 시대였다. 지금은 그 패권이 영화로, 게임으로, 스마트폰으로 넘어갔지.
김 요즘은 음악을 통한 부가사업들이
보다 중요하다. 패션, 스타일, 마케팅, 일종의 종합선물세트로 기획된다. 90년대는 음악 자체가 주된 소비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음악이란 본질에 충실했던 시대였다.
배 사실 ‘토토가’에 나왔던 음악들도 90년대 대중음악신 안에서 일부가 되는 음악이었단 사실이 중요하다. 게다가 90년대는 모든 장르의 음악을 TV로 들을 수 있었던 마지막 시대였다. 고인이 된 신해철의 넥스트가 공중파 가요 프로에서 프로그레시브록을 연주하는 시대였다. 발라드나 댄스음악이 공존했고. 그런 면에선 확실히 회자될만한 가치가
있다.
민 사실 90년대에도 댄스 음악 일변도라 들을 음악이 없다는 비판이 상당했다.
배 ‘토토가’에 나온 가수들은 90년대에 큰 족적을 남긴 가수들이지만 아마 김건모나 엄정화 정도를 제외하면 당시에 진지하게 음악을 듣던 이들에게
대부분 욕을 먹었을 거다. 립싱크 논란도 심했고. 그런 면에서
90년대는 저렇게 좋았는데 지금은 너무 엉망이란 식의 태도는 지양할 필요가 있다.
민 90년대 음악이 향수가 된 건 그 시절의 음악 소비를 주도했던 세대가 나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문화 소비의 중심부에서 밀려났는데 ‘토토가’를 통해 자리를 찾았다는 감격이 서럽게
다가오는 지점도 있었던 것 같다.
배 지금의 30대, 40대가 대부분 그랬을 거다. 잠재돼 있던 문화 소비 욕구의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고 할까? ‘토토가’
다음날 음원 차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떤 식으로든 소비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선 긍정적이다. 그런데 주영훈 씨가 100억을 벌었다는 기사가 나온 건 진짜 어이
없더라(웃음).
민 음원 수익 분배 구조에 하등의
관심도 없으면서 기사를 쓴 거 같더라. 그냥 약 판 거지(웃음). 음원 수익이 작곡가에게 돌아가는 게 정확히 몇 % 정도인가?
김 한 4%? 90년대엔 음반이 100만장 팔리면 40~50억 정도 매출이 나왔는데 이젠 다운로드 100만 건이면 1억 수준일 거다. 게다가 스트리밍은 거저 주는 꼴이라 다운로드 수를
현저히 떨어뜨린다.
민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미국에서
아이튠즈를 통해 290만 건이 다운로드돼서 얻은 수익이 28억
정도 된다고 들었다. 그런데 국내에선 360만 건 정도가
다운로드됐는데 싸이에게 돌아간 수익이 6000만원 정도였다더라. 나는
내가 숫자를 잘못 본 줄 알았다.
김 가장 큰 문제는 투자하는 회사에서
유통을 하고, 제작도 하고, 음원 판매 사이트까지 운영한다는
거다. 게다가 미디어까지 갖고 있고, 정상적일 수 없는 구조인
거다.
배 완벽한 갑인 거지. 슈퍼갑.
민 음반시장에서 음원시장으로 넘어오면서
고착된 상황이다.
김 음악종사자들이 발 빠른 대처를
못했다.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사람들은 기업에 있고, 음악은
‘쟁이’들이 하니까(웃음). 물론 회사에서도 할 말은 있다. 망도 깔고, 시스템에 투자한 돈이 얼마이고. 하지만 문화사업이 1~2년 보고 가는 게 아니지 않나. 최소한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적절한 수익이 배분되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 정도는 가능해야 되는데 그런 개념이
전혀 없다.
배 그러니 부가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아이돌만 육성되는 거고, 다양성이 존재할 수 없는 시장이 된 거다. 그런 면에서 90년대는 음악 창작자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주어졌다는
면에선 괜찮은 시대였던 것 같다. 2000년대 이후론 그게 완전히 무너졌으니까.
김 심지어 당시엔 표절 문제가 불거지면
팀도 해체됐다. 지금은 듣기 좋거나 재미있으면 그냥 잘 넘어가는 것 같고.
민 그런데 팀 해체는 좀 가혹했던
거 같다.
김 그만큼 아티스트의 양심에 대한
가치가 중요하게 여겨진 시대였던 것 같다. 창작자가 표절을 했을 때 누군가가 손해를 본다는 물질적 개념보단
창작자가 거짓말을 해선 안 된다는 윤리적 가치관이 대중에게도 절대적이었던 거지. 대중음악이 그만한 가치를
존중 받았던 시대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민 그러고 보니90년대 대중가요는 싱어송라이터의
시대였던 것도 같다.
배 국내에서 싱어송라이터라는 말이
처음 쓰였던 게 90년대였다. 가수가 직접 작곡, 작사에 참여한 곡이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자기 음악을 직접
만들려는 아이돌이 많아진다는 건 긍정적인 거 같다. 단순히 기획사의 인형이 되고 싶지 않은 거다. 샤이니의 종현 같은 친구와도 대화해보면 음악 욕심이 어마어마하게 느껴진다.
김 90년대처럼다시 싱어송라이터가 중요한
시대가 됐다. 아이돌도 아티스트로 변모하길 원하고. 미국도 10년 전엔 백스트리트 보이스 같은 아이돌의 시대였지만 지금은 크리스 브라운 같이 재능 있는 싱어송라이터가 대세다.
민 90년대 아이돌과 지금의 아이돌의 차이는 그런 후천적 욕망에 있는 것도 같다.
김 사실90년대엔 프로듀서라는 개념이
희박했다. 지금은 기획사만의 색깔이라는 게 있지 않나. JYP는
섹시, YG는 힙합, SM은 팬시. 어쨌든 자기 색깔이 분명하니까 팬덤도 그렇게 형성되고 ‘안전빵’ 장사도 가능하다. 그런 색깔은 아티스트 개인이 아니라 회사 차원에서 기획해야 한다. 그래서
프로듀서가 필요한 거다.
배 결국 그런 시스템이 90년대로부터 잉태됐다는 게 중요하다.
김 그래서 3대 기획사의 수장 중 두 사람이 90년대 음악신에서 배출된 사람이란
것에 주목해야 한다. 사실 90년대엔 보편적으로 타당한 노래를
좋아했다. 내가 들어도, 네가 들어도 슬픈 노래. 지금은 그 사람만 할 수 있는 게 추앙 받는 시대다. 1:1의 문화인
거다. 예전엔 미국의 문화, 유럽의 문화란 식으로 구분했다면
지금은 그냥 싸이의 문화가 인정받는 거다.
배 확실한 개성이 요구된다.
김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한테
좋아하는 가수를 물어보면 빅뱅을 많이 답한다. ‘자기들만의 음악이 있어서’라는 게 이유다. 최소한 애들도 나름의 기준으로 아이돌을 판단한다는 거다. 아이돌이
난무하다 보니 소비자의 관점이 진화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민 ‘토토가’는 90년대 음악의 상품성을 창출하는 매대 역할을 했다는 점에선 괜찮은 쇼케이스였다.
배 아마 제작진도 이 정도로 흥할
줄 몰랐을 거다. 거의 장난처럼 시작된 기획이지만 <무한도전>이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김 미디어의 역할이 그거다. 가치를 부여해서 진열대에 올려 놓는 것. 대중들은 능동적이지 않다. 소수 매니아를 제외하면 대부분 수동적이다. 그걸 미디어가 건드려줘야
한다. DJ 정권 시절에 음원 수익 배분 구조를 국가에서 결정해버렸는데 실질적으로 음반시장 붕괴 이후엔
국내 음악산업 종사자들의 수익이 거의 사라졌다. 당장 먹고 죽을 것도 없어졌다. 그나마 돈벌이가 되는 아이돌을 양산해낼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됐고, 가요프로그램에서 20팀 중에 18팀이 아이돌로 채워지는 상황이 돼버렸다. 개인적으로 K팝이 롱런하려면 결국 다양성이 중요하다. 마이클 잭슨이 좋아서 미국 팝을 들어봤는데 다 마이클 잭슨 같으면 계속 들을 이유가 없지 않나. 결국 다양성을 끌어내야 한다. 생각해보면 90년대는 음악적 다양성이 폭발하는 시대이기도 했다.
민 음반과 음원으로 음악을 듣는
건 정말 다른 경험인 거 같다. 발품을 팔았다는 보상심리가 생기고, 이
음반의 기회비용을 생각했을 땐 그만큼 열심히 그 음반을 소비해야 한다는 심리가 동원된다. 감상의 밀도가
달라진다고 할까. 음원을 통해 음악을 듣게 되면 이런 과정이 어느 정도 상실되는 것 같다.
김 최근 삼성에서 ‘밀크’라는 음원서비스를
새롭게 공개했다. 기분이 우울하다고 클릭하면 알아서 노래들을 선곡해준다. 이제 내 컨디션만 알려주면 알아서 음악을 골라준다. 그렇게 편안함에
중독되는 거다. 그러면 결국 내 자아가 사라질 것 같다. 편리한
일이지만 사소한 불편함을 삭제했을 땐 경험을 통한 깨달음의 가능성도 같이 삭제될 가능성이 있다.
배 몸을 움직여서 뭔가를 해야 경험이든, 영감이든 발생하는 법인데 그런 몸의 움직임이 계속 지워지는 세대에겐 음악에 대한 기억도 얕아질 수밖에 없다. 내 몸을 움직여서 음악을 득템하는 과정들이 대부분 삭제되니까 음악에 대한 추억 자체도 희미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지금의 10대에게 음악과 연관된 자신의 이야기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겠다.
민 90년대의 음악 소비가 대화나 접촉 같은 아날로그 방식이었다면 21세기의
음악 소비는 데이터 송신의 디지털 형태로 이뤄진다. 음악을 듣는다는 본질적 경험은 동일하지만 그 과정의
형식과 소유의 방식이 달라지면서 기억의 유효기간도 확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토토가’가 어떤 불씨를 살린 측면은 있는 것 같다. 그걸 꼭 활활 타오르게 만들 의무는 없지만 이왕
살린 불씨라면 최대한 지펴보는 것도 의미는 있겠다. 최소한 유의미한 오락거리 하나는 발굴했다는 점만으로도
긍정적이고.
김 어차피 90년대 음악이 주류가 될 순 없지만 비주류가 된 음악을 재조명했다는 건 분명 좋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지난 시대에 대한 가치를 조명하는 시도가 거듭 이뤄져야 한다. 후세대가
봤을 때도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면 그게 유산이 되는 거니까.
배 우리도 ‘토토가’를 빌미로 90년대 이야기를 하려고 모였지만 요즘 얘기도 많이 했다. 결국 90년대라는 화두를 통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단 말이다. 그런 움직임이 더 활발해져야 할 것 같다. 그리고 90년대는 지금과 가장 가까운 과거다. 70~80년대도 소중하지만
지금과는 너무 먼 시대가 돼버렸으니까 90년대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도 같다.
김 90년대를 직접 겪은 사람들에겐 90년대가 현실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청소년들이 음악을 바라보는 태도를 우리가 지켜보는 상황이 아니라 그 아이들이 겪는 현실로서
이해하는 게 정말 중요할 거 같다.
음악 듣기는 간편하다. 터치 한 번이면 손쉽게 플레이된다. 비싸지도 않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음원 수익 분배가 공정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돌고 돌았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듣고 들어도
상관 없는 것처럼 돼버렸다. 어려운 게 당연한 게 됐다. 지난 7월 16일, 록 밴드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을 주축으로 한 ‘바른음원협동조합’이
출범했다. 뮤지션들의 음악적 권익을 보호해 주지 않는 현재의 대중음악 시장에서 뮤지션 스스로 생존의
길을 열어보겠다는 취지에서 설립됐다. 음악으로 돈을 벌기 힘들어진 뮤지션들이 자생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말이다. 뮤지션이 힘들어진 건 음악 시장 사정이 열악해서가 아니다. 음악 시장은 돈을 버는데 정작 음악을 만드는 당사자들의 수익이 보전되지 않기 때문이다. 노래 한 곡의 다운로드 가격은 600원이다. 가수나 연주자에게 돌아오는 저작권료는 5% 수준이다. 90%에 가까운 금액이 제작사와 유통사의 몫이 된다. 노래 한 곡을
만들고 팔면 100원이 남지 않는다. 게다가 스트리밍은 곡당 12원에 결제된다. 그 와중에 음원 서비스 업체들은 음원정액제 등을
통해 박리다매로 헐값에 팔아 치운다. 제값을 받아도 수익을 내기 힘든 구조에서 수익성은 더욱 바닥을
친다. 지난 2012년
12월, AP통신에선 그해에 전 세계를 뒤흔든 싸이의 ‘강남
스타일’의 매출에 관해 보도했다. 당시까지 ‘강남 스타일’은 한국에서만 360만
건의 다운로드 횟수를 기록했는데 이를 통해 싸이가 손에 쥔 돈은 6600만원 정도였다. 같은 기간 동안 미국에선 290만 건의 다운로드가 집계됐다. 그런데 미국에서 싸이가 음원 다운로드만으로 얻은 수익은 무려 28억원에
달한다. 이 심각한 괴리는 국내 음원 시장의 기형적인 구조를 여실히 드러내는 지표다. ‘강남 스타일’조차 이 정도니 다른 곡들의 음원 수익은 얼마나 처참할지
짐작조차 불가능하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일본의 다운로드 최저가격은 2237원, 프랑스가 1087원, 영국이 1064원, 미국이 791원
수준이다. 대한민국은 63원이다. 잘못 쓴 게 아니다. 결국 생산자인 뮤지션의 몫은 평균 10.7원 수준이다. 10원짜리 동전 하나 보기 힘든 요즘의 물가를
고려한다면 놀라운 일이다. 곡당 12원 수준인 스트리밍 서비스는
저작권자의 몫이 곡당 무려 0.2원이다. 100곡을 스트리밍해도 20원이 남는다. 어쩌다 이렇게 기형적인 음원 수익 배분 구조가 정착된
건가. 국내 음반 시장은 2000년 이후 급격하게 디지털
시장으로 이동했다. 사실상 벼랑 끝에 섰다. 인터넷 망의
급속한 보급과 함께 소리바다와 같은 P2P 사이트를 통해서 음원의 불법 다운로드가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음반 시장은 극도로 위축되기 시작했다. 때마침 터진 경제위기로 인한
소비 시장 위축은 얼어붙어가는 음반 시장을 향한 매서운 바람이었다. 침몰하는 음반 시장을 구출해 줄
대안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불법 다운로드를
막고자 음원을 초저가로 스트리밍 서비스에 공급했다. 망 사업자들의 플랫폼을 통해서 음악을 싸게 공급하고
유통시켜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키면 다시 음반 시장이 부활할 것이라고 믿었다. 순진했다. 음반 시장의 맥박은 나날이 희미해졌다. 그 사이에 음원 시장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디지털 디바이스의 기술 발달과 대중화로 인해 음원 시장 역시 급격하게 생활과 밀착해 버렸다. 문제는 구조와 의식이었다. 대형 음원 유통사들은 초기에 공급받았던
낮은 음원가에 맞춰 유통 기준을 정했다. 소비자들에게도 음원은 싼 가격에 즐길 수 있는 것이 돼버렸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손쉽게 음악을 다운받거나 스트리밍으로 들을 수 있다. 음반
판매량은 회복될 기회를 잃었다. 음반 한 장 가격이면 듣고 싶은 음악을 다 듣고도 남는 금액이었다. 언젠가부터 음악은 거저 들어도 상관 없는 것이 돼버렸다. 음악은
제작과 유통을 담당하는 망 사업자들의 수익을 위한 시녀로 전락했고, 음악 종사자들은 순식간에 재주 부리는
곰으로 둔갑해 버렸다. 이젠 음원 차트에서 선전하는 아이돌 스타를 대거 보유한 메이저 기획사들조차 음원
수익엔 특별한 기대를 걸지 않는다. 그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해외
진출이라는 옵션이 생겼지만 그것도 모두를 위한 은총일 리 없다. 그럼에도 음원 서비스 업체에서 차트
성적은 중요하다. 기대할 수 없는 음원 수익을 대체하는 수익 모델은 공연과 행사였다.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가 음악적인 주 수입원이 됐다. 결국
음원 차트 순위가 섭외 순위를 좌우한다. 행사장을 쫓아 전국 각지를 동분서주하는 가수들이 늘어났다.
최근 교통사고로 사망한 레이디스 코드 멤버들의 현실도 이런 시스템의 열악함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음악만으로 생존할 수 없는 기형적인 구조에서 빚어진, 러시안 룰렛
같은 비극이다. 음원값은 음원서비스사, 저작권협회, 음반제작자협회 등 음반 산업의 관계자들이 모여서 합의한 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승인을 받는다. 음악이 공공재도 아닌데 정부의 가격 통제에 따라야 한다는 건 의아한 일이다.
정부에선 음원 서비스 사가 40% 이상의 수익을 가져가지 못하게 막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눈 가리고 아웅이다. ‘바른음원협동조합’을 설립한 신대철은문체부 회의에 참석해서 직접적인 음악 종사자들에게 80%의 이익을 돌려줄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신탁 단체들과 합의하면 승인해 주겠다는 대답도 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런 식의 제안을 한 경우는 없었다는 이야길 들었다. 그러니까
사실상 정부에서도 제대로 관심을 기울여본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어쩌면 음악의 실제 주인들이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 기회를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른음원협동조합은 어쩌면 그 첫 번째 기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결국 ‘시장성을 확보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현재의 음악
종사자들이 불합리한 음원 수익 배분을 감당하면서 폭리를 취하는 대기업 산하의 음원 서비스 업체들에게 음악을 공급하는 건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바른음원협동조합의 노력으로만 가능한 변화도가 아닐 것이다. 음악이
음악을 살리지 못하는 땅에서 그리는 음악적 청사진이란 결국 신기루이거나 백일몽이다. K팝도, 한류도, 언젠가 흩어질 모래성이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아이폰을 사용해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아이폰을 쓰고 싶단 생각을 품을지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지금 쓰고 있는 아이팟 터치와 아이패드가 아이폰까지 갖고 싶다는 욕망을 잠재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플에서 새로운 아이폰을 출시한다는 소식엔 귀를 기울이게 된다. 반대로 안드로이드폰의 새로운 모델을 출시한다는 것에 대해선 내가 당장 스마트폰을 바꿔야 할 처지가 아닌 이상에야 특별히 관심을 가져보지 못했다. 현재 스마트폰 시장의 생태계 형성을 주도한 건 아이폰이었고 결국 애플이었다. 아이폰이 지금의 디지털 디바이스의 시대를 열었다. 애플워치에 주목하는 건 그런 생태계의 변화를 이끌 자질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애플워치의 등장으로 세상이 떠들썩한 것도 아마 그런 기대감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어쨌든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애플의 신제품이 발표되자 세간에선 갑론을박이 전개됐다. ‘혁신은 없다’라는 클리셰는 물론이고, 찬사와 실망이 장조와 단조처럼 구분됐다. 이번 발표에서 가장 큰 화두는 무려 ‘잡스의 철학을 버리고’ 대화면을 선택한 아이폰6가 아니라 애플의 웨어러블 제품인 '애플워치'였다. 애플빠든 앱등이든 애플이란 것이 사과가 아니라는 정보를 쥔 이들은 최소한 애플워치가 나올 것이란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삼성에서 출시한 갤럭시 기어라는 웨어러블 스마트 기어가 출시된 이후 빛의 속도로 관심 밖으로 날아가버린 것과 달리 애플워치는 발표 당일부터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다. 숱한 기사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이런 관심은 애플이란 기업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기대감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인상이다.
애플의 광고는 항상 라이프스타일을 강조한다. 자사의 제품이 얼마나 뛰어난 기능을 지니고 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만약 애플을 갖게 되면 얼마나 우월한 위치를 점할 수 있는지 훈계하지 않는다. 대신 애플을 쓰게 된다면 가능해질 ‘당신의 삶’을 제시한다. 아이폰을, 아이패드를, 아이팟을, 맥북을 쓰고 있는 사람들의 행복하고 여유로운 삶을 전시한다. 기계적인 설명으로 강박을 부여하는 대신 감성적인 접근으로 마음을 움켜쥔다. 누구보다 빠르고 선명한 스마트폰임을 강조하는 대신 이 똑똑한 기계가 당신의 삶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도구인지 시사한다. 남보다 나은 삶이 아니라 당신을 위한 삶을 어필한다. 결국 아이폰을 손에 쥔 것만으로 대단히 만족할 것이란 환상을 부여한다. 생각해보라. 빠른 속도와 선명한 화질을 지녔다고 자부하는 스마트폰은 해마다 수 차례씩 쏟아져 나온다. 그 빠르고 선명한 스마트폰은 얼마 못 가서 보다 느린 속도와 보다 흐린 화질의 기계로 전락한다. 패배한 기계를 소유한 꼴이 된다. 하지만 아이폰은 끝까지 아이폰일 뿐이다. 이미 대체 불가능한 만족감으로 지속된다.
그런 의미에서 애플워치는 애플이 시장에 침투하는 전략을 다시 한번 재확인시킨다. 애플은 애플워치가 아이폰을 대체할 수 있는 무언가라는 것을 강조하는 대신 이것이 너를 스타일리시하게 만들어줄 새로운 패션 아이템이라고 설득한다. 갤럭시 기어와의 뚜렷한 차이도 여기서 발견된다. 갤럭시 기어를 비롯한 안드로이드 기반의 웨어러블 제품들은 시계 형태의 ‘스마트폰’임을 강조했다. 이미 확립된 스마트폰 생태계의 피라미드 구조에 편입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애플은 애플워치를 스마트폰 기능이 있는 시계로 여기길 바라는 것 같다. 기존의 스마트폰의 생태계가 아니라 패션의 생태계에서 애플워치가 소비되길 바란다. 이는 기존의 애플의 행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폰이 라이프의 영역을 침투하고 장악한 것처럼, 애플워치를 스타일의 영역으로 침투시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제품을 판매할 시장을 장악하는 대신 자신들의 제품을 대체할 수 없는 생태계를 만든다. 기존의 시장에 선전포고를 하는 대신 새로운 시장을 선도한다. 이는 결국 애플이란 회사의 미래를 향한 의지를 넘어서 새로운 미래를 위한 방향성처럼 보인다. 물론 아직 불확실한 미래다. 다만 확실한 건 애플이 시장을 선도하고 있으며 생태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애플은 아이폰을 통해서 지금의 디지털 생태계를 위한 자궁 역할을 했다. 당장 애플워치의 청사진을 그리긴 어렵지만 최소한 애플워치에 대한 호기심은 충분히 장전됐다. 그것이 새로운 생태계의 변화로 이어질 것인 것 궁금하다. 애플의 경쟁자를 자처하는 삼성이 언제나 하지 못했던 그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