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요리 요정’ 정재형
PLAYER ON THE TABLE
뮤지션 정재형은 기분 좋게 망가지는 법을 알았다. 드디어 조금 방송을 알게 됐다. 어느 정도 카메라가 익숙해졌다. 이젠 카메라 앞에서 요리도 한다.
발리에 서핑을 하러 갔다가 급작스럽게 맹장수술을 받게 돼서 살이 빠졌다던데, 맹장수술을 받았다는 것보다 서핑을 한다는 게 의외였다.
작년 10월부터 시작했는데 나도 이렇게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다. 몇 년 전부터 아는 후배가 해보면 좋아할 거라고 추천해서 생각만 하고 있다가 일단 수영을 먼저 배웠다. 그리고 수영이 어느 정도 능숙해질 무렵 (장)기하랑 부산에 놀러 갔다가 나만 하루 더 묵게 됐는데 뭘 할지 고민하다 부산에 있던 후배들한테 연락했고 서핑을 배우게 됐다. 지금은 컴퓨터에서 파도 그림만 봐도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서핑은 의외지만 요리는 어울린다. 올리브TV에서 진행하는 <정재형의 프랑스 가정식>을 제의 받게 된 과정은?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됐다. 작년에 방송 관계자와 저녁을 먹다가 프로그램 이야기가 나왔는데 만약 요리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면 프랑스 가정식을 할 수 있겠다고 했다. 거창하게 느껴지는 메뉴가 아니라 브라세리(brasserie)에서 먹던 소박한 가정식 말이다. 물론 그 당시엔 당장 바빠서 여건이 안됐다. 요리 프로그램을 해본다는 게 망설여지기도 했고. 그러다 이렇게 하게 됐다.
원래 요리는 즐겨 하는 편이었나.
파리에선 그랬다. 처음 도착하자마자 했던 건 아니었다. 시간도 없었고, 해봐야 계란밥 정도? 그렇게 1년이 지날 무렵 피부 질환이 생겨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식생활을 묻더라. 당시엔 육류 위주로 먹거나 인스턴트로 대충 때우곤 했다. 그러니 병이 나지 않겠냐고 묻는데 그럴 만했다. 그 다음부턴 매끼마다 샐러드를 만들었고 그렇게 시작했다. 파티에 초대되면 항상 레시피를 물어보곤 했는데 한번은 일본 친구들이 끓인 카레에 놀란 적이 있었다. 6시간 동안 양파를 볶아서 카라밀라이즈를 만드는데 요리도 하나의 창작이라고 느껴지더라. 음악처럼 남들을 즐겁게 만들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메뉴 선정 방식은?
<마스터 셰프> 출신의 박준우 씨가 감수를 도와준다. 지금은 10회 정도까지 대략적인 레시피를 정했다.
메뉴 선정에 개인적인 경험도 반영될까?
그래야 할 얘기가 생기더라. 그래서 하고 싶은 메뉴를 한 20가지 정도 뽑아놓은 다음에 가능하겠다 싶은 걸 추려낸다. 그런데 ‘블랑켓 드 포’처럼 손이 많이 가는 메뉴보단 ‘크래프 수제트’ 같이 간단한 메뉴가 반응이 좋다. 요리 프로그램에서 원하는 느낌을 배우면서 수정을 해나가기도 한다.
반응도 체크하나?
안 본다고 말할 줄 알았겠지만 챙겨본다! 그런데 이거 마케팅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적극적인 리뷰가 많더라. 직접 만들어서 사진을 올린 글을 보고 ‘오!’ 이러면서.
음악에 대한 반응을 접하는 것과는 기분이 다를까?
분명히 그렇다. 아무래도 내 음악과 방송에서의 이미지는 극과 극이기도 하고. (유)희열이가 그랬다. ‘굳이 중간 지점을 찾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떤 면에선 유일한 사람 아니냐. 그냥 형이 보여줄 수 있는 걸 예능에서 보여주면서 음악과 같이 가면 되지 않겠냐.’ 그런 것 같다. 내가 언제까지 방송을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흐르는 대로 가려고 한다.
뒤늦게 생각해보면 <무한도전> 출연이 큰 전환점이 된 셈인데.
물론 그 당시엔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어리둥절했지. 당시에 수많은 프로그램 출연 제안을 거부했던 것도 내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내가 원래 정리가 안되면 한발도 못 뗀다. 그런데 요즘 <정제형의 프랑스 가정식>은 좀 편하게 하고 있다. ‘편집을 잘해야 할 텐데’라고 생각하다 보면 불안하기도 하지만(웃음).
의외로 방송 활동에 적극적이란 인상이다. 가끔은 즐기는 것도 같고.
예능을 할 거라면 어설프게 하진 말자고 생각했다. 잘하겠다는 야심이라기 보단 최선을 다하자는 각오랄까? 물론 음악 활동을 해치지 않는 선을 유지하면서.
그런데 새 음반은 아직도 기약이 없나?
곧 영화음악 작업을 하나 시작한다. 사실 <무한도전> 이후로 고정 출연했던 방송이란 게 <유&아이> <불후의 명곡>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내가 음악 외에 다른 것에 신경 쓰다 보니까 정신을 못 차린 거다. 원래 써놓은 곡들이 있었고 한 2~3년 전에 음반을 냈어야 하는데 이제야 조금 진정이 돼서 시작해보려고 한다.
멀티태스킹이 어려운 편인가 보다.
멀티태스킹보단 또 다른 정재형들의 유닛 활동이라고 해두자(웃음). 어쨌든 마흔 살까지 음악만 보고 살았는데 내 인생에서 이렇게 한 발 뒤에서 음악을 해보는 건 처음이기도 하다. 사실 음악을 만들고, 가사 쓰고, 공연하고, 그 일정들은 생각보다 버겁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거다. 서핑이 그렇다. 서핑을 하다가 높은 파도가 오면 덜컥 겁이 난다. 나는 지금 아주 낮은 파도만 탈 수 있으니까. 그래서 잠시 멀리 떨어져서 낮은 파도를 기다리는 거다. 음반 활동은 내겐 큰 파도와 같다. 에너지를 비축해야만 한다. 그런데 최근에 아파 보니까 알겠더라. 기도를 하고 있더라. ‘잘못했어요. 음악 할게요.’ 음악을 미루고 있다는 데에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나 보더라.
그런데 한창 잘 활동하다가 나이 서른에 불쑥 파리로 유학을 갔다.
내가 원래 좀 ‘또라이’다(웃음). 사실 주위에서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나는 점점 이게 내 길이라는 걸 알게 됐다.
영화음악을 배우겠다고 유학까지 떠난 이유는?
사실 영화 음악은 그냥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베이시스 2집 즈음에 <마리아와 여인숙>이란 영화에 음악감독으로 참여했는데 극장에서 보니까 내가 너무 민망하더라. 아무 것도 없이 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럽 영화를 좋아해서 파리로 유학을 가게 됐다. 그렇게 2년 정도 공부해서 영화음악 과정이 끝나고 나니까 클래식 공부에 욕심이 생기더라.
9년이나 머물 거라 생각했나.
정말 몰랐다. 길어야 3년 정도? 밀린 공부를 하겠다고 갔는데 기간이 길어졌다. 사실 클래식을 전공할 때 가요를 하면서 교수님들로부터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유학 가서 영화음악 과정을 마치고 클래식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깨달았다. 나도 구분하고 있었던 거다. 그 뒤론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지금까지 음악을 배워왔던 기간보다도 음악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된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엔 음악 작업을 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꾸준히 영화 음악 작업 의뢰가 들어왔고, 현지 학교에 내야 하는 과제 작업물도 있었고. 돌아보면 30대가 음악적으로 가장 치열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자양분이 있었기 대문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도 있었던 것 같고.
아무래도 체류비가 적지 않았을 텐데.
내 음악감독비가 비싼 편이었다. 물론 잘 하니까(웃음)? <중독>에 참여한 이후로 여름휴가를 가본 적이 없었다. 방학 동안 작품 하나 하고 그 돈으로 파리에서 1년씩 생활했다. 그게 아니었으면 그 긴 시간을 감당할 수 없었지. <정재형의 Paris Talk>라는 책을 낸 것도 그런 결핍이 찾아준 경험이 아니었을까. 만약 베이시스의 정재형으로 늙었다면 지금과는 달랐겠지.
결국 9년간의 생활이 지금 큰 자산이 되는 것 같다.
남자는 5~60대에 정말 멋있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여러 가지 경험으로 나를 채워서 그 다음에 쓸 양분이 생긴다. 그렇게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파리 홍보 대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이적이 그러더라. ‘형, 쫌만 더하면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받을 수 있겠는데(웃음)?’
요즘 <정재형의 프랑스 가정식>을 보면서 방송이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다.
아마 <불후의 명곡>을 하면서 많이 배운 것 같다. 게스트도 많고, 단순히 <유&아이>처럼 진행과 게스트의 경계가 별로 없다. 완전 전쟁터지. 내가 던져주는 리드 멘트보다 중요한 건 게스트들의 대답이다. 그렇게 고생해보니까 조금 알겠더라. 꼭 ‘조금’ 알았다고 써야 한다(웃음).
<무한도전> 출연 이후에 이효리 씨와 진행한 <대학가요제> 당시엔 정말 심각했는데.
그때 (정)형돈이가 보고 그랬다. ‘다른 건 몰라도 형 옆모습은 눈 감고도 그리겠다! 무슨 측면 진행자냐. 카메라 좀 봐라(웃음).’
<정재형의 프랑스 가정식>은 혼자 진행한다는 점에서 부담은 없었을까?
녹화시간이 1회당 네 시간 정도인데 이게 레시피 프로그램이지만 재미있었으면 좋겠다는 의도도 기저에 깔려있어서 쉽지 않다. 그래서 녹화 전날엔 고민이 많았는데 그걸 안고 가니까 또 잘 안 풀리더라. 그래서 녹화장으로 향할 땐 되도록 발걸음을 가볍게 가져가려고 노력한다.
혼자 떠들면 어색하지 않나?
그래도 스태프들이 다 내 식구 같아서 편하다. 내 입장에선 시청자나 다름없기 때문에 스태프들과의 공감대가 중요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손이 많이 가는 요리를 하다가 손이 부족하면 ‘빨리 와서 이거 저어봐’라고 나도 모르게 말하는데 그러면 스태프도 나와서 젓고 있다(웃음). 친구들이랑 밥을 만들어 먹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한 입 프렌치’라는 유용한 코너도 있고, 생각보다 실용적인 프로그램이더라.
알차지(웃음). 사실 처음 준비할 때 제작진한테 다양하게 해보자고 코너 하나씩 짜오라고 쪼아댔다. 지금도 계속 그런다. 계속 아이디어를 달라고 닦달하는 중이다.
방송에 대한 적극성이 생겼다고 할까?
다 나를 위해서(웃음).
그래도 어느 정도 요리에 대한 자신감은 있었나 보다.
방송으로 보여주려니까 조금 버거울 때는 있지만 맛있게 만든다는 자신감은 있다. 그래서 ‘맛있다’는 말을 들어야만 만족스럽다. (김)동률이네 막내 동생이 파리에서 미술 공부를 하면서 종종 우리 집에 왔었는데 패션 계통에 있는 둘째 동생도 종종 파리로 출장을 오곤 했다. 한번은 우리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했는데 계속 맛있다고 그러더라. 사실 걔가 좀 무뚝뚝하거든. 나중에 헤어질 때 한 마디 하더라. 팁을 듣고 왔다고. 동률이랑 동률이 막내 동생이 정재형이 만든 밥을 먹을 땐 맛있다는 말을 열 번씩은 해야 한다고 그랬다나(웃음). 아니면 그 다음 요리가 안 나올 거라고. 스태프들이 와서 먹을 때도 “맛있지? 맛있지?”라고 계속 물어본다. 그럼 다들 맛있다고 한다(웃음).
김동률 씨가 제작진에게도 팁을 줬나 보다.
아마 소금을 줘도 맛있다고 할걸(웃음).
팬들로부터 음악요정으로 불렸는데 요즘은 요리요정이라고 불리더라. ‘요정’이 된 기분은?
예전에 <우리 집에 왜 왔니?>라는 영화 음악으로 인연을 맺었던 황수아 감독이 아이유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면서 연기를 해줬으면 좋겠다더라. 그런데 역할이 음악 요정이었다. 그래서 유희열이 공식석상에서 ‘음악요정이십니다’라고 소개를 하면서 음악요정이라고 불리게 됐다. 처음엔 민망했는데 점점 나를 친근하게 느낀다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물론 ‘요리요정’ 정재형이라는 타이틀을 붙일 때도 고민이 많았다. 사람들이 또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잖아. 지금은 그냥 ‘요리 요정님’하면 ‘왜?’ 그런다(웃음).
<밀리언셀러>라는 파일럿 프로그램에서 박명수 씨랑 작곡 대결을 한다던데.
다양한 사람들이 신청한 사연을 모티프로 작곡가들이 곡을 쓴다. 그리고 매회마다 PR해줄 가수에게 곡을 주는 건데 첫 회엔 주현미 씨가 나온다. 어쨌든 내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카테고리에 있는 분이 아니고, 트로트를 써야 된다는 점에서 신선하게 다가왔다. 개인적으론 내 상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연을 리터치해서 가사를 쓴다는 점에서 환기가 된 부분이 있다. 사실 지금까지 앨범 발매가 지연된 건 가사 쓰기가 힘들어서였거든. 아무래도 좀 고무적이랄까. 재미있을 것 같다.
유희열 씨나 이적 씨와 친분이 두터워 보인다. 두 사람도 예전에 비해서 예능 활동이 활발해지기도 했는데.
얼마 전에 (이)적이를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했는데 이렇게 서로 꾸준히 조명을 받을 수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다들 스무 살에 데뷔했던 친구들인데 아직까지 사랑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고마운 일 아닌가 싶어서.
음악적으로 비교했을 때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지?
예전엔 이런 질문하면 약간 머뭇거렸는데 요즘은 그냥 ‘내가 최고지(웃음)!’ 사실 그들의 작업을 보고 있으면 자극도 되고, 존경심이 생긴다. 그들이 음악을 파는 에너지는 남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니까. 정말 잘하는 아이들이다.
어쨌든 최고는 정재형이고?
내가 아이들이라고 부른다니까(웃음).
외모로 보자면?
하나는 맹꽁이에다가, 하나는 뱀파이어인데, 감히 누구랑 비교를(웃음)!
이효리 씨와 이상순 씨를 연결해준 장본인인데 본인은 결혼 계획이?
지금은 서핑과 결혼했다. 혼자 살아도 괜찮다. 나 하나로 충분하다(웃음).
(ELLE KOREA 2014 4월호 NO.258 'ELLE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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