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밴드 시즌 2>가 시작했다. 놀랍게도 홍대를 주름잡는, 알만한 이들은 안다는 인디 밴드들이 죄다 나왔다. 저마다 열심히 연주하고 노래했다. 그 무대가 왠지 서글펐다.
<탑밴드 시즌 2>가 전파를 타기 시작한 건 5월 5일 토요일 밤 11시 25분경이었다. 트랜스픽션이, 슈퍼키드가, 몽니가, 칵스가, 데이브레이크가, 피터팬 콤플렉스가, 그리고 피아가! 홍대에서 공연 좀 보고 놀았다고 자부하는, 여름에 뮤직 페스티벌에서 좀 흔들어봤다는 선수들이 다 아는 그 이름들이 세탁기에서 막 건져낸 빨래마냥 줄줄이 걸렸다. 그 덕분인지 2회부터 5회까지 광고는 완판됐다고 한다. 소위 말하는 네임드 밴드들이 서바이벌 경연을 벌인다는 게 팔릴 만한 이슈이긴 했다. 그러나 시청률은 2%대에서 요지부동이다. 그럼에도 SNS를 비롯한 인터넷상에서 <탑밴드 시즌 2>는 뜨거운 감자였다. 프로그램의 완성도에 대한, 몇몇 밴드의 출연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심사 방식에 대한 갑론을박이 뜨거웠다. 기이할 정도로 그랬다.
큰 논란이 있었던 2회 방송을 보자. 방아쇠가 된 건 화제의 밴드 피아였다. 그들 역시 1차 예선을 거친 99팀 중 하나였다. 2차 예선에서는 한 조를 이룬 3팀이 경연을 벌인 후, 심사위원들이 논의 끝에 결정된 1팀이 3차 예선 무대에 오른다. 피아의 무대를 바라본 심사위원석에선 상반된 기류가 흘렀고 전선이 형성됐다. 신대철은 ‘그래도 피아’를 주장했고, 김경호는 ‘어째서 피아냐’고 반박했다. 신대철의 말처럼 ‘짜임새 있는 연주를 보여줬고, 못한 건 아니’었지만 유영석의 말처럼 ‘기대 이하’였고, 김경호의 말대로 ‘예전의 느낌과는 많이 달랐’으며, 신대철도 ‘보컬의 측면에서 압도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유영석이 ‘지금 피아가 떨어지면…’이라며 말꼬리를 흐리는 와중에, 김경호는 ‘논란이 될까 봐 그러는 거냐’ 받아쳤다. 끝판왕이라고 생각했던 피아였다. 단판 승부에서 전적을 끌어들여서 심사하는 건 엄연히 반칙이다. 백전백승의 챔피언이라도 방어전에서 한번 패배하면 벨트를 헌납하는 게 룰이다. 하지만 그 자리엔 챔피언이 없었다. 피아도 도전자였다. 패배보다 뼈아픈 건 탈락이었다. 이는 <탑밴드 시즌 2>의 딜레마를 환기시키고, 인디 밴드 신이라는 바운더리를 각성시키는 풍경이었다.
국내에서 인대 밴드라는 언어가 동원된 건 커트 코베인이 시애틀의 자택에서 산탄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날려버린 지 1년여 즈음 된 1995년 4월 무렵이었다. 홍대의 펑크 클럽 드럭에 모인 얼터너티브 밴드들이 커트 코베인의 사후 1주년을 추모하며 연주를 했고 정기적으로 공연이 지속됐다. 델리 스파이스, 언니네 이발관, 크라잉 넛, 코코어 등과 같은 밴드들이 등장한 것이, 그들에게 인디 밴드라는 언어가 통용된 것이 그 무렵이었다. 홍대를 본진 삼아서 그들만의 리그를 꾸리고 클럽 등지에서 공연을 펼쳐나가는 록밴드들에 대한 팬덤은 댄스 음악 일변도로 흐르던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분명 특별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인디 밴드를 정의할 수 있는 어떤 실체가 있었던가.
인디펜던트, 즉 ‘인디’라는 단어가 음악계로 유입된 건 대중화된 기성 장르와 대립적인 포지셔닝을 취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장르의 태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멤피스 로큰롤이, 뉴욕 펑크락이, 시애틀 그런지가 그랬다. ‘인디’라는 수사는 자연스럽게 마이너의 속성을 끌어안는다. 하지만 그건 전략적인 포지셔닝의 방식일 뿐, 태생적인 구분의 의미가 아니었다. 메이저 자본력을 설득하기 힘든 마이너 장르들이 최소한의 자본력으로 자신의 재능을 입증하는, 도전자로서 링에 오르는 시스템이었을 뿐, 극복해야 할 영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너바나가 평생 인디 뮤지션이 아니었던 것도 그래서다. 한국에서 인디 밴드라는 영역이 모호한 건 그래서다. 그건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마치 불가피한 한계처럼 보인다. 메이저로 진입하기 위한 시작점이 아니라 필연적인 마이너리티의 영역처럼 보인다. 인디 신의 스타 밴드가 된다 한들, 그건 철저하게 그 협소한 신 안에서의 이슈일 뿐이다. 피아를 안다면 인디 밴드를 알겠지만 인디 밴드를 모른다면 피아는 어쩌다 들어본 이름 정도나 될 것이다. 한 번 인디 밴드는 영원히 인디 밴드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어떠한 지향점을 모색할 수 없는 굴레이자 속박처럼 인식된다. 저항이나 도전을 위한 발판이 아니라 갈 곳을 잃은 미아들이 보호소에 귀속되듯 정처 없는 머무름이다.
<탑밴드 시즌 2>가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를 허문 건, <탑밴드>를 통해서 그런 기준 자체가 불명확할뿐더러 의미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홈페이지에 이를 공고한 뒤, 별다른 액션 없이도 소위 말하는 네임드 밴드들이 참여 의사를 밝혀왔다고 한다. 아마추어 신분으로 <탑밴드>에서 참여한 몇몇 밴드의 인지도나 몸값이 수직 상승했다는 소식 앞에서 인디 밴드로서 보낸 오랜 세월은 자연히 허망해졌다. 락 페스티벌 무대나 홍대 공연장에서 항상 마주하는 팬들만 보게 된다는 기분도 괜한 데자뷰가 아니다. 방송 출연이 얼굴을 알리고 이름값을 높이겠다는 단순한 욕망의 소산일지도 모르지만 새로운 관객과 대중에게 자신의 창작물을 어필하고 싶다는 건 예술가로서 당연한 갈망이다. 그들이 <탑밴드 시즌 2>를 선택한 건 그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향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자신들을 한 단계 도약시켜줄 발판이 필요했다. <탑밴드 시즌 2>가 좋은 발판인지 가늠하기 전에 그런 기회 자체가 절실하다.
이건 결국 인디 밴드라는 계층의 생존을 다룬 리얼리티 서바이벌이다. 2%의 시청률에 매몰된 ‘그들만의 리그’라 해도 그들의 갈증을 해갈해줄 새로운 무대가 그곳에 있었다. 14년 경력의 밴드 피아가 그 무대에 선 것도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명예로운 퇴장 따윈 기대할 수 없지만 일단 무대에 오르고 볼 일이다. 살아남아서 당장 오를 수 있는 무대를 확보하는 게 보다 중요하다. <탑밴드 시즌 2>가 환기시키는 건 바로 그런 절박함이다. ‘토요일 밤의 락 페스티벌’이라는 슬로건은 그 라인업만으로 무색하지 않다. 하지만 실상은 ‘헝거 게임’이다. 굶주린 밴드들이 모여서 경합을 벌이는 광경은 그러니 애처로울 수밖에 없다. 실상 그것이 인디 밴드들의 허기를 갈취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런 불합리마저 눈감게 만드는 허기를 외면하지 않길 바라는 건 그런 까닭이다. 지향점을 마련하는 것, 그것이 인디 밴드라는 실체 또한 마련할 것이기에. 인디 밴드들은 아직도 배가 고프다.
로버트 레드포드의 후원으로 시작된 선댄스 영화제는 재기발랄한 인디펜던트 필름들의 발굴터로서 각광을 받아왔다. 1월 19일부터 29일까지, 미국 유타주 파크시티에서 열리는 이번 영화제는 31개국에서 모인 110편의 영화가 저마다의 재능을 선보인다. 배우 출신 감독 마크 웨버의 신작 <The End of Love>(2012)와 김소영 감독의 <For Ellen>(2012) 등 27번째 선댄스 키드의 영광을 노리는 후보작들이 파크시티로 집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