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장사 마돈나'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5.28 이해준 감독 인터뷰
  2. 2008.05.31 김윤석 인터뷰
  3. 2008.05.31 류덕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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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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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석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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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에 대한 감상이 궁금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리얼하게 나왔다는 걸 알겠더라. 특히 바짝바짝 붙여 찍은 클로즈업이 많은데 그런 것들이 우리 영화의 색깔을 잘 보여준다. 큰 화면에서 보니까 굉장히 세고 라이브한 날것의 느낌이 잘나와서 좋았다.

시사회 후 반응이 좋다. 평단은 물론이고 시사회를 본 일반 관객들도 호평이 많더라. 고무되지 않나?
아직은 그런 걸 편안하게 못 본다. 왜냐면 개봉을 하지 않았으니까 아직까진 긴장상태가 남아있기 때문에. 물론 이제 처음으로 약간 긴장이 풀리고 짜릿한 느낌이 왔던 건 기자시사 때였다. 기자간담회를 하면 기자분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떤 기운들이 느껴진다. 근데 그때 이 양반들이 제법 뿌듯한 걸 본 것 같아하는 느낌이 들어서,(웃음) 일단 합격이 됐구나. 일단 기분 좋구나. 관심들을 갖네, 싶었지. 그리고 VIP시사 때 동료들이 너무 좋아해주고.

최근 4편의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로 호평을 얻었다.
내가 작품 복이 좋은가 보다. 배우 한 명이 온전히 연기를 잘한다 해서 연기 잘한다는 말이 안 나오거든. <천하장사 마돈나>나 <타짜>나 <즐거운 인생>이나, 영화적인 퀄리티가 있고 분명한 내용이 있는 영화고 거기서 내가 맡은 캐릭터의 몫을 다했을 때, 온전히 연기력에 대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난 굉장히 운이 좋았지. 앞으로의 길이 부담스럽다거나, 사실 뭐, 난 이런 건 별로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나이가 30대도 아니고, 이미 40인데 생각해봤자 별 수도 없고.(웃음) 그냥 계속 주어지는 대로, 나에게 다가오는 좋은 배역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이 다시 생긴다면 좋을 것 같다.

부상이 있진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과감한 액션이 많았다. 특히 지금까지의 출연작 중 가장 격렬한 작품이기도 했고.
우리가 사실 실제로 다친 건 한번인데, (하)정우가 뛰다가 미끄러진 씬 있지. 그 씬은 실제로 미끄러진 거다. 그래서 정우가 찰과상 입은 거 외에는 한번도 다친 적 없다. 그래서 우리가 환상의 호흡이라고 사람들이 그러더라. 찍는 사람들도 보면서 놀라는 게, 우리가 싸우는 장면 봤겠지만 쉽게 말해서 사실 막싸움이잖아. 이건 완벽한 합을 짜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대충 30%정도의 큰 너비만 짜놓고 나머지는 즉흥이었거든. 거기서 이제 감독의 주문은, 정말 리얼하게 싸워달라. 근데 한군데도 안 다친 건 두 배우가 초긴장상태에서도 상대방을 배려하고 신뢰했다는 거지. 목을 조를 때도 보는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 조르는 것처럼 보여도 항상 여지를 남겨서 이 친구가 연기를 할 수 있도록 숨통을 튀어주고. 계속 그걸 반복했는데 우리는 서로에 대한 신뢰감만으로 게임 끝냈지. 일사천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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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는 상극이지만 배우들끼리는 호흡이 상당히 중요했다. 특히 서로 상대 캐릭터의 비중을 잘 보좌해주는 것도 중요했을 것 같은데 그런 면에 있어서는 하정우의 연기가 상당한 도움이 됐을 법하다.
하정우는 진짜 120% 이상 잘해줬다. 후배지만 정말 뛰어난 감수성의 소유자 아닌가. 이 친구는 매 순간 가식적인 연기를 정말 한 순간도 하지 않았다. 그 힘은 하정우라는 인간이 가진 어떤 정서의 힘일 것 같은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대단하지. 사실 난 옛날부터 하정우란 배우를 정말 좋아했다. 하정우가 찍었던 <용서받지 못한 자>와 <시간>도 보면서 한국남자배우 중에 저렇게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누군가 싶었거든. 그런데 지영민으로 캐스팅됐다는 얘길 듣고 속으로, 잘됐다! 만나고 싶었는데, 했지.(웃음) 그런데 하정우도 역시나 윤종빈 감독하고 사석에서 김윤석 선배님과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했다 하더라. 서로 잘 됐지.

신인 감독과의 작업이 부담스럽진 않았나?
일단 우린 감독을 만나기 전에 시나리오를 먼저 만난다. 난 일단 시나리오에 합격점을 줬다. 스토리가 굉장히 특이하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지문도 별로 없고 대사도 간결한데 그 사이의 여백에서 굉장한 게 보이더라. 그건 이 시나리오가 하루 아침에 완성된 게 아니라 정말 썼다 지웠다를 수십 번 반복한 정성스러운 시나리오라는 거, 이건 휴양지에 앉아서 쓴 게 아니라 정말 발로 뛰면서 오랜 기간을 통해서 만들어진 숙성된 시나리오라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이 시나리오를 감독할 사람을, 이 시나리오를 쓴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만나봤더니 역시나 한 작품을 임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의 모습이 느껴졌다. 신인감독답지 않은 소신과 직관력, 밀고 나갈 수 있는 힘, 그게 다 느껴졌다. 이 사람, 이 친구한테. 진짜 해보고 싶었지. 그래서 같이 해보자고 결심했고. 사실 <추격자>를 결정한 건 조금 일찍이었다. <즐거운 인생>을 하기 전에, 2006년도 12월 달에 이미 만나서 출연하기로 했으니까. 내가 잠깐 갖다 올 테니까 기다려라,(웃음) 그랬더니, 가능하다. 어차피 우리는 8월 달부터 들어가니까, 이러더라. 그래서 3월 달부터 5월 달까지 <즐거운 인생>을 찍고 돌아와서 <추격자>를 찍었지.

촬영에 난관이 많았을 거 같다. 대부분 밤 촬영이었고, 비 내리는 장면도 많았고. 게다가 대부분 인적이 있는 실제 공간을 이용했고.
로케이션 촬영이 많았지. 그래서 거의 야전이었다, 야전.(웃음) 사람들은 아마 밤마다 나타나서 저렇게 우리를 괴롭히는 저들은 누구인가, 싶었겠지.(웃음)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지만 고마운 에피소드도 많다. 어떤 분들은 밤에 추우니까 따뜻한 차를 보온병에 끓여와서 나눠먹으라고 주시기도 했다. 물론 본의 아니게 피해를 끼친 점도 있었고. 하지만 재미있었다.

영화에 대한 신뢰감이 돈독했기 때문에 수많은 고난을 감수한 것이 아닐까.
당연하지. 그렇게 피곤하게 달리기를 하고 나서도 그걸 붙여놓은 현장 편집본을 보면서, 잘 나오고 있다. 이 느낌이야, 이렇게 되니까. 고생했는데 막상 나오는 게 이상하면 그 때부터 바로 브레이크가 들어가는데,(웃음) 찍을수록 더 신뢰감이 생기고 나중엔 안돼, 한번 더 가야 돼, 서로 이렇게 되고, 이렇게 해서 만든 영화다. 이 영화가.

아까 말했던 하정우의 미끄러지는 장면은 <추격자>에서 명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우리도 보면서 놀랐으니까.(웃음)

특히 본인은 뒤에서 전력을 다해 쫓아가는 중이었을 텐데, 많이 놀랐겠다.(웃음)
움찔하고 놀라서 뛰다가 섰다. 어떡하지, NG인가, 생각하는데 벌떡 일어나길래 다시 뛰었지.

그런데 액션에서도 애드립이 있었나?
항상 120%준비해놓고 허물어서 그 허문데다가 즉흥을 집어넣었다. 그렇기 때문에 리허설이 굉장히 남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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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본능이 상당히 중요시됐을 것 같다.
그걸 요구했지. 그래야지만 처음에 이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본 생날것의 느낌을 담아낼 수 있다고 느껴서 우리도 동의했다. 즉흥이 주는 순간적인 부딪힘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파장을 안 놓치려고 노력했었다. 두 배우 모두다.

상당한 집중력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집중력 뿐만 아니라 끈기와 인내, 체력.(웃음)

매일같이 에너지를 쏟아내고 집으로 돌아갔겠다.
집에 못 들어가는 날도 있지.

그렇게 지쳐서 들어오면 부인께서 걱정하시지 않나.
밤새도록 작업하고 아침에 들어가면 일단 내방에 잠자리가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낮에 진공청소기를 못 돌린다.(웃음) 그 소리 때문에 깰까봐.

갑자기 <즐거운 인생>의 성욱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 고단함이야말로 김윤석이란 배우에겐 ‘즐거운 인생’이겠다.
그럼. 그리고 뭐 나만 고생했나.(웃음) 우리가 뛰는 걸 보고 사람들은 정말 저 배우들 고생했다고만 하지만 그걸 담아내는 사람들은 세배로 더 고생한다. 조명이야 뭐야 그 무거운 걸 들고, 그러니 우리가 힘들다는 말을 못하지. 정말 걔들 뛰는 거 보면 미치겠는데, <추격자>는 스텝의 승리다.

기교보단 뚝심이 느껴지는 영화였다.
화려한 기교 이런 건,(손을 휘저으며) 결국 이 영화를 버티게 하는 건 아날로그적인 센 날것의 힘, 끈기, 믿음, 이런 거였다.

일단 김윤석이라는 배우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그 이유가 <타짜>가 될 가능성이 많다.
<타짜>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덕분이기도 하지.

덕분에 악역 이미지로 많이 어필됐는데, 본인이 매력을 느끼는 악인의 이미지는 어떤 것인가?
인간은 다층적인 동물이잖아. 악역이라고 해서 골빈 짓만 하는 건 매력이 없지.(웃음) 나름대로의 자기 기준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정면으로 부딪혀서 자신만의 노하우로 이겨나가는 방법, 그러나 사람들이 봤을 땐 그것이 결국 좋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는 정도. 그 정도의 다양한 비하인드가 깔릴 수 있는 정도가 돼야 매력 있는 악역이지.

한편으로 악역을 선호하는 연기자가 아닌가라는 오해를 형성시킬 수도 있을 거 같다.
우리나라 시나리오 작가들이 악인은 굉장히 잘 묘사한다. 반대로 선인은 희한하게도 어정쩡하다. 그러니 아무래도 악인에 더 눈길이 가지. 디테일한 묘사부터 시작해서, 자기가 싫어하는 인물은 그렇게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나 봐. 그 이유가 뭔가 분석해본 결과, 소위 악인의 요건이 치사하고 이기적이고 야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본데 난 그게 넌센스라고 본다. 현대사회에서 안 그런 사람들이 어디 있나? 그런 건 악인이란 기준에서 빼야 된다. 모든 사람이 졸렬하고 치사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고 이걸 악인이라 적용했기 때문에 반대로 선인의 기준은 이런 게 없어야 되는 거다. 야비하고 치사하고 졸렬한 게 없어야 된다. 그걸 빼니 재미가 하나도 없어지는 거다. 난 현실성 있는, 땅바닥에 발을 딛고 사는 이 시대의 인물에 더 매력이 간다. 그러다 보니 선택하는 게 자연스럽게 소위 악역이라 지칭하는 과를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되지.

확실히 선한 캐릭터보단 악한 캐릭터들이 매력을 주는 경우가 참 많다.
리얼리티가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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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의 대립구도는 선과 악이 아니라 악과 악이다. 최악과 차악의 싸움이다.
우리식대로 쉽게 얘기하면 선을 넘지 않은 자와 선을 넘은 자의 대결이지. 시나리오를 보고 엄중호가 후반에 가서 도덕적인 성찰을 나타내거나 정의로운 인물로 변화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다. 그리고 그렇게 찍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 단지 선을 넘지 않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양심과 인간의 생명이란 존엄성에 대해서만큼은 포기하지 않은 놈이다. 그리고 지영민은 뛰어넘은 놈이고. 일단 이렇게만 놓고 가자, 그 대신에 2시간 동안 길을 가며 만나는 순간순간마다 발생하는 최소한의 코드를 모아보자, 거기서 이놈이 만나서 어떻게 변하는가, 어떤 현상을 일으키는가, 이렇게 열어놓고 갔다.

결국 엄중호의 심리적 변화가 상당히 중요한 관건이었다.
그 부분은 관객이 <추격자>와 의사 소통하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 부분이 억지스럽다거나 감동을 날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엄중호가 개과천선의 이미지로 그려지지 않아서 좋았다. 하지만 감정선을 유지하면서 미묘하게 변하는 심리를 표출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우리는 그냥 그것도 순서 없이 찍었잖아. 여건상 그렇게 될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5개월 동안 정말 끊임없이 대화했다. 대화를 안 할 수가 없다. 내 첫 촬영분량이 십자가 바라보는 부분이었다니까, 첫 테이크를 가는 게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장면이잖아. 아무 일도 겪지 않고 그걸 찍으라면서 눈빛으로 담아내라고 하니,(웃음) 그걸 하기 위해서 계속 대화하는 거지.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만약에 이해가 안 가면 두 번, 세 번 찍어보자. 그럼 마지막에 편집하면서 퍼즐을 붙일 때 맞는 조각을 선택하면 되는 거니까. 그러니까 시간이 안 걸릴 수가 없지. 5개월 동안, 85회 차 찍었다. 블록버스터야.(웃음) 제작비가 블록버스터는 아니고.

엄중호는 특정한 악인의 표상이라기보단 사회에 만연된 전형적인 악인이다. 하지만 지영민과 같은 최악의 존재가 그런 차악에 기생해서 은둔한다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악의 본질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악의 존재는 궁금하지 않았다. 물론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인간의 역사에 수많은 연쇄살인범과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얘들이 왜 이랬는지 누구 한 명도 나서서 밝혀본 적이 없고 늘 실패한다. 싸이코패스라는 게 원래 유전자가 이렇다고 하는데 그것도 정확한 게 없잖아. 보통 이론 같은 건 우리에게 필요가 없다는 거지. 문제는 이런 본능을 행동으로 옮겨서 실제로 해내는, 살인을 저지르는 걸 100%방치했던 이 시스템에 대한 문제에 <추격자>가 중점을 두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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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중호가 사냥개라면 지영민은 하이에나다. 숙련된 사냥개의 욕망과 방치된 하이에나의 욕망은 본능적이지만 근원적인 기질이 다르다.
두 사람 중 사회적인 때가 누가 더 많이 묻었냐고 모든 사람에게 물어보면 백이면 백 다 엄중호를 찍겠지. 지영민은 때가 안 묻어서 더 무서운 거다.

마치 나쁘다는 걸 모르는 어린아이의 잔인함처럼.
내 칼은 좀 무뎌졌다. 오래 써서. 하지만 얘는 너무나 신선한 칼인 거야.(웃음) 무섭지, 그래서.

혹시 본인이 지영민을 연기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처음에 내가 그랬다. 둘 중 아무거나 해도 괜찮다고. 난 내 식대로 표현했겠지. 정우와는 다르게.

만약 본인이 연기했다면 지금과 무엇이 달랐을까.
글쎄, 일단 하정우란 사람이 연기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긴 못 할 거 같다. 만약에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역시 이랬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래 버리면 그건 실례잖아, 실례.(웃음)

오래 전에 연기를 한번 접으려 했다가 동료들의 권유로 다시 재개했다고 들었다. 그 뒤로 혹시 다시 연기를 그만 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나?
없다. 한번 갔다 왔기 때문에. 막차다. 막차. 막차를 탔기 때문에 하차를 못해.(웃음) 배운 도둑질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이젠.

지금은 영화에 주력하지만 사실 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했고 거기서 오랜 경험을 축적했다. 영화의 중심에 선다는 것과 연극의 중심에 선다는 것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연극과 영화의 공통점은 종합예술이라는 거, 그 속에서 연기자라는 건 부품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뭔가의 중심에 서본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굳이 그 역할을 해나가면서 연극과 영화의 장르적인 어떤 흑백을 마땅히 얘기해야 한다면 연극은 정말 하고자 하는 얘기가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만의 즉흥적인 무대 위 상황에서 벌어지고 난 그 무대 위에 서 있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굉장한 연습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영화에는 연습이 없지만 연극에는 연습이란 것이 있고 그걸 통해 계속 본인의 연구를 거듭해야 한다. 왜냐면 희곡이 내포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캐릭터도 캐릭터지만 개인이 작품전체의 메시지 안에서 담당해야 할 역할이 연극에서는 굉장히 크다. 영화도 없는 건 아니지만 영화보다 훨씬 크지. 연극은 소위 슈퍼아줌마, 길가는 사람1 이런 게 없으니까. 반드시 필요한 몇몇의 인물들이 적확한 역할을 가지고 등장하고 거기서 다른 뭔가를 해버리면 균형이 흐트러지지. 그래서 연극이 잘 통제된 예술이라면 영화는 그런 면에서 더 열려있는 예술이고, 그런 부분에서 연기자가 임하는 차이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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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영화보다 연기자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건 연극 쪽일까?
난 둘 다 똑 같은 비중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영화는 뼈 속까지 그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게 있다. 눈빛 하나로 이 인물이 인생에서 느끼는 허탈함을, 슬픔을, 공허함을 표현해야 할 때 클로즈업이 들어오잖아. 연극은 그런 게 없지. 연극은 말로서 표현하지. 표현하는 방식에서 확연하게 구분이 가지만 그 나름대로 둘 다 굉장한 집중을 요구하는 거다.

연극 연출을 몇 번 했고, 대학시절에 극예술연구회에서 활동했었다. 차후 연출에 대한 계획은 없나.
연출을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쉬고 있으면 안 된다. 이렇게 쉬고 있으면 못 따라간다. 끊임없이 연출을 하고 준비를 해야 된다. 굉장히 많은 지식과 전문성을 요구하는 것이 연출이기 때문에. 내가 지금 연출을 놓은 게 몇 년이 되니까 다시 하려면 공백의 한 다섯 배 시간을 할애해야 된다. 연출은 세상에 대한 비전을 얘기해야 되고 세상에 대한 시각을 보여줄 수 있을 정도여야 하니까 공부할 게 너무 많다. 책 다 읽어야 돼.(웃음)

배우가 좋은 연출자를 만나는 것도 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나도 운이 좋은 편이고.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배우에게 기회도 따를 리가 만무하다. 나름대로 연기력을 인정받고 있는 요즘은 과거의 오랜 경험들이 좋은 자산이 됐음을 스스로 실감할 것 같다.
연극을 하면서 작품 분석에 매달렸다. 어떤 연극은 3시간 40분 공연하기 위해서 한 6개월 동안 연습한 적도 있었는데 그 6개월 중에 2개월을 내내 작품 분석에 바쳤다. 훈련극의 번역본이 마음에 안 들어서 원본을 가져와 아예 다시 번역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작품 분석을 통해 캐릭터를 바라보는 시각이 나한테 굉장한 도움이 됐다는 걸 느꼈지. 다른 건 몰라도 연기를 연극으로 시작했다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탄탄하게 나를 받쳐주는 좋은 계기가 됐으니까.

무대에서 활동할 당시 송강호와 친분이 두터웠다고 들었다. 송강호가 실력을 인정받고 주목 받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본인에게 좋은 자극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나중에 가는 자가 가질 수 있는 장점은 돌다리를 두드려볼 수 있는 여유가 좀 있다는 거지. 농담처럼 하는 이야기지만 정말 그래. 저랬을 때는 저렇게 되고, 저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라는 걸 (송)강호를 보고 느끼는 거지. (웃음)

함께 고생한 만큼 동료애가 돈독하겠다.
같이 고생했던 내무반 사람들과 말이 필요 없는 것처럼 그런 경험을 함께 했던 사람들과는 일단 가까워질 수 밖에 없다. 알고 있으니까. 힘들었을 때의 느낌도 알고 있으니까 서로의 심리상태도 잘 이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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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기했던 캐릭터의 골격이 마초였다면 정서는 아버지에 가까웠다고 본다. 그건 김윤석이라는 배우의 내면적인 정서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도 추측된다.
맞다. 아버지라는 정서가 난 강하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아버지의 모습이라는 거다. 남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 나이가 40이니까, 아버지의 모습이 언제나 남아있게 되지.

그건 실생활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미진이 딸과 밥을 먹는 장면이 있잖아. 아무것도 안 했다. 그저 딱 앉아있었고, 갑시다, 하더니 컷을 하는 거다. 그러더니 (나홍진 감독이) 저기, 선배님. (그래서 내가) 왜요? (그러니까) 아버지 같아요. (그래서) 나 아무것도 안 했잖아, 지금. (그러자) 그런데 아버지 같아요. (이래서) 아니, 내가 딸아이 아빠라는 걸 아니까 그런 거 아냐? (그러니까) 그래서 그런가? 하지만 그런 게 결코 보여선 안됩니다. 그랬던 에피소드가 있다. 그래서 (내가) 알았어. 야박하게 할게. 야박하게, 이랬지. (웃음) 그런데 이 나이 되는 남자와 그 나이 되는 여자애를 함께 세워두면 누가 봐도 피해갈수 없다.

그 장면은 딸에게 밥을 먹이는 아버지처럼 보일 수 밖에 없는 구도였다.
제3자의 시각에서 누군가가 객관적으로 봐도 아버지가 데리고 온 딸처럼 보이겠지. 남의 딸이라고 상상 못한다.

담배를 많이 피우는데 술도 참 많이 마실 것 같다.
당연하지. 우리는 모든 자리가 다 술이다. (웃음) VIP시사회 끝나고 뒤풀이를 커피숍 가서 하겠어? 술 한잔 하면서 얘기해야지.(웃음) 그리고 술 못하면 손해지. 그런 데서 캐스팅 제의가 들어오는데. (웃음)

술을 한번 마시면 어느 정도로 마시는 편인가. 끝을 보나?
우리는 노련하다. 노련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 선에서 딱 정리하지. 왜냐면 과하게 되면 내일은 먹을 수 없잖아. 그러면. (웃음) 이게 생활화되려면 그런 무모한 짓을 하면 안되지. 절제가 있어야지 말이야.(웃음)

최동훈 감독이 <타짜>에서 아귀를 맡긴 건 본인도 의외라고 했었다. 실제로 <범죄의 재구성>에서 이형사 역을 생각해본다면 차라리 유해진이 맡았던 고광렬 역이 더 적합했을 것 같기도 하다.
의외였다. 나는 사실 나한테 그저 짝귀 정도를 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귀를 하라는 거다. 그건 이 사람이 나에게서 뭘 봤다는 이야기거든. 아마 감독들 중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최동훈 감독일 거다. 물론 지금까지는. 나홍진 감독하고 5개월을 그렇게 보냈으니 이제 나홍진 감독도 알지 모르겠지만.(웃음) 어쨌든 이 친구가 그렇게 얘기했다면 뭔가 있다, 나한테 뭔가를 봤다, 이렇게 생각했고 그럼 오케이지. 사실 감독이 배역을 줬을 때 배우가 못해내면 둘 다 슬프잖아. 근데 해냈을 때는 캐스팅한 감독이나 출연한 배우나 둘 다 서로 탄탄해질 수 있는 판단이 되는 거지. 결국 빛나는 만남이 됐다.

<즐거운 인생>은 마치 놀면서 연기하는 느낌이었다.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도 오랜 친구처럼 보였고 여러 가지로 즐거운 추억이었을 것 같다.
난 성욱이란 역할을 굉장히 좋아한다. 힘이 쫙 빠져있는 그런 느낌, 실제 내가 성욱의 그런 상태를 즐기는 편이라서. 성욱이 나보단 더 우울한 편이지만 약간 나른한 듯한, 그런 몸 상태나 정신상태가 나랑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이준익 감독님하고 맨날 놀면서 장난치고.(웃음) 재미있는 작업이었지. 아쉬운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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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스스로도 상당히 편안해 보였다.
동료 배우들 중에 어떤 사람은 성욱이가 제일 좋다더라. 자기는 성욱이의 그런 모습이 내가 한 연기 중에서 가장 백미라고 생각한다고. 대중들에게 강렬한 캐릭터로 인식되다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었던 계기이기도 했지.

거의 한달 반 만에 베이스를 연마했다고 들었다. 어쩌면 연기보다도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우리 자랑이 아니라, 일단 세 배우가 다들 음감이 있더라. 나 같은 경우도 라이브 연주를 하는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란 작품을 계속 해봤기 때문에 악기와 친숙했고. 물론 지금은 이렇게 말하지만 그 당시 우린 정말 죽었었다.(웃음) 달리기는 그냥 뛰면 되지만 이건 머리를 써야 하기 때문에 사실 진짜 괴로웠지. 솔직히 웃으면서 손가락 다 부러뜨리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진짜 때려부수고 싶더라. 그런 좁은 곳에서 악보를 보면서 베이스를 뎅뎅거리는데 그것도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발전속도가 체감적으로 느껴지는 작업이라 더욱 절실했을 것도 같다. 진전이 안되면 그만큼 답답한 거니까.
딱 보면 누가 잘하고 누가 못하고, 누가 열심히 하는지 안 하는지 다 드러나는데 빼도 박도 못하지.(웃음)

아무래도 아귀 역할 이후로 인상이 강한 캐릭터 제의가 있었을 것 같은데 그 와중에 성욱을 선택한 건 사실 의외였다.
그 때 들어왔던 시나리오 중 <즐거운 인생>이 제일 좋았다. 내 맘에 들었지. 물론 그전에 <추격자>를 먼저 선택하긴 했지만.

결국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시나리오인가보다.
일단 시나리오 없이 감독을 먼저 만날 수는 없다. 사실 감독도 나한테 시나리오를 통해서 연애편지를 쓴 거 아닌가. 그 연애편지를 보고 이 사람을 만나서 연애를 한번 해봐도 되겠구나를 생각하지. 결국 시나리오지.

강렬함 속에서도 종종 드러나는 넉살이 유머스럽게 느껴진다. 코미디 연기도 해보고 싶지 않나?
<즐거운 인생>에서 성욱이란 애가 우울하고 어깨에 뭔가 얹혀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성욱이도 사실 말하는 거 보면 웃긴 놈이거든. 난 그 정도만큼의 코미디를 좋아한다. 드라마를 뛰어넘는 코미디는 체질적으로 그렇게 와 닿지가 않는다. 물론 개인적으로 코미디는 좋아한다. 우디 알렌의 영화를 보면 얼마나 웃겨. <브로드웨이를 쏴라>보면 ‘햄릿이 누구야? 우리 옆집에 사는 사람인가?’ 이런 대사들이.

위트 있는 코미디를 좋아하나 보다.
그러니까 어떤 만남과 만남이 주는 코미디. 둘 다 옳은 사람이다. 어느 한 사람이 이상한 건 아닌데 여기서 만났기 때문에 웃기는 거, 이런 것들이 재미있지.

상황의 아이러니 같은?
상황이 주는 코미디가 그렇지. 캐릭터가 주는 코미디보단.

지금까지 나름대로 강한 캐릭터를 많이 어필했고 이제 관객들도 점차 이를 인지하게 됐다. 그런데 본인이 지향하는 캐릭터는 뭘까?
난 아까도 얘기했지만 현실감 있는, 발바닥을 땅바닥에, 지금 여기 땅 위에 붙이고 사는 모습이면 된다. 그게 캐릭터를 육화시키는데 있어서 제일 기본적인 첫 번째 통과의례라고 생각한다.

현재 연기를 인정받고 있는 영화배우들 중 본인을 포함해서 연극무대 출신이 많다. 무대가 영화의 산실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그런데 현재 연극 무대의 환경은 상당히 열악하다. 근본적인 문제가 뭘까?
세계 어디에서도 연극이 혼자 올곧게 클 수 있는 나라는 아무데도 없다. 그러니까 프랑스나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연극에 국가적인 지원이 어마어마하지. 그 반면에 연극을 그렇게 많이 하면서도 지원이 어마어마하게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어떤 것보다도 연극은 종합예술의 제일 밑바닥, 초석이기 때문에 사회나 국가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장기적인 지원이 받쳐주지 않는 한, 일시적이고 단발적인 금액적 지원은 아무 힘을 실어주지 못한다.

장기적인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
그건 교육화와도 관계가 있는 거다. 교육적으로 초등학교부터 연극시간을 할애하면서 그런 인구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 끊임없이 국가적으로 지원을 해줘야 되는 거다.

과거 열악한 환경에서 연극을 했던 선배로서 지금도 그런 환경에서 연기를 하는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
정말 본인이 원했던 기회라는 것이 정면으로 왔다고 성급하게 나서버릴 수 있다. 기회가 정말 올 때까지 차근차근 준비하고 매 순간 정말 최선을 다해서 즐겨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걸 했다는 자부심을 잃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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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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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

류덕환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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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여우니까 조심하라더라.
나를? 왜지? 그런데 사실 그런 말은 많이 듣긴 했다. 여우 같다고. (웃음)

어쨌든 <우리동네>를 보고 나서 그런지 지금 마치 가면을 쓴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 같다. 평범한 외모가 오히려 가면처럼 느껴진다고 할까.
솔직히 지금같이 인터뷰하는 것처럼 내가 비쥬얼적으로 보여질 때만큼은 개인적으로 꾸미려고 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영화상 캐릭터로 류덕환을 보자면 특정하게 뭔가 떠오르는 게 없다는 게 내겐 조금 더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림그릴 때 검은 종이에 그리는 것보다 하얀 종이에 그리는 게 더 그림이 잘 나오는 것처럼. 어떻게 보면 메리트가 없는 게 단점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캐릭터를 잡거나 이런 부분들에서는 가끔 도움이 될 때가 있고 남들보다 접근이 더 쉬울 때도 있다. 물론 항상 쉬운 건 아니겠지만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내가 다른 사람들보단 조금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천하장사 마돈나>(이하, <마돈나>)의 동구처럼 <우리동네>의 효이같은 경우도 연기 이전에 캐릭터를 위한 어떤 준비가 필요했을 것 같다.
일단 <마돈나>때는 촬영 들어가기 전부터 감독님들과 약속을 했던 것처럼 살을 찌우는 게 일단 목표였고, 그 다음에 씨름을 익히고 트랜스젠더 분들을 만나면서 그들만의 여성적인 감성을 찾아내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동네>같은 경우는 뭔가 자꾸 따라 하고 싶지가 않았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싸이코패스들을 따라 하기 보다는 내 것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보편적인 모양새까지 무시할 순 없었을 텐데.
물론 그걸 만든다는 게 쉽지 않을뿐더러 대중성도 무시하면 안 된다. 내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내 나름대로의 싸이코패스를 했는데 관객들은 ‘저건 싸이코패스가 아니잖아’ 라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대중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외부적으로 보여지는 면에서는 분명히 싸이코패스적인 어떤 성격이나 표정, 행동 같은 것들이 나와야 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그런 걸 준비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효이라는 인물을 내면적으로 들여다봤을 때, 그의 성장 배경이나 어떤 전사(前史)들을 내 나름대로 조금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기존의 싸이코패스와 다른 점이 있다면 효이에겐 분명히 나름대로의 어떤 아픔이나 슬픔, 기쁨 같은 감정이 있다는 거, 태어났을 때부터 싸이코가 아니란 거다. 분명히 성장환경에 대한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 자극을 받았던 이유가 컸지.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나쁜 놈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싸이코패스라기 보단 손가락질했다가도 그 아픔이 어느 정도 이해되고 공감 받을 수 있는 싸이코패스가 되길 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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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초등학생이 할머니를 망치로 때려죽이고 나서 그게 잘못된 건지 모르더라는 사건 기사를 접했을 때의 묘한 감정이 생각나기도 한다.
효이가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그게 나쁘다고 생각을 안 하는 것에 대한 아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했을 때 그에게는 아픔인 셈이지. 그 아픔을 같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싸이코패스로 비춰졌으면 하는 바람이 컸던 거 같다.

항상 캐릭터를 준비하면서 자신만의 시나리오를 쓴다고 들었다. 효이의 시나리오도 썼나?
사실 효이란 인물에 대해선 쓸 수 없었다. 예전 같은 경우는 내 나름대로 그런 것들을 써나가고 그랬었는데 <우리동네>는 효이가 왜 이런 아픔을 가질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성장 배경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 인물이 어떠한 상황에서 자랐는가에 대한 것들을 내가 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단지 정할 수 있었던 건 효이에게 어떤 아픔이 있었을지, 그리고 왜 그래야만 했는지, 그리고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그게 전혀 악이라는 걸 모르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심정적 근거들, 그런 것들만 내가 정할 수 있었지, 얘가 어떻게 자랐고, 어릴 때는 어땠고, 누구와 만났고, 그런 것들을 내가 정할 수 없었다. 이미 시나리오상에 그런 다이어리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감히 그렇게 건드리는 걸 차마 할 수 없었던 거다.

이미 인과관계가 시나리오에 명백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사실 효이라는 인물의 정체를 감춰서 반전의 효과로 이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동네>는 이미 누가 범인인지를 알고 보게 된다. 이럴 경우에 영화의 스토리가 맡아도 될 몫을 배우가 떠맡아야 한다. 결국 <우리동네>는 배우에게 부담이 큰 작품이라고 생각되는데 본인은 어땠나?
난 항상 부담이 커야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조금씩 커지는 거 같다. 그 부담감 때문에 계속 파고들려는 집요함이 생겨서 더욱 노력을 하게 된다고 할까.

그렇다면 본인에게 <우리동네>는 좋은 자극이 됐을 것 같다. 그런데 범인이 누군지 알고 가는 상황에서 장르적 긴장감은 많이 떨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 역시 부담되지 않았나?
<우리동네>같은 경우는 방금 말한 것처럼 범인이 누군지 이미 밝히고 가는 상황이기 때문에 보기 전에 긴장감이 없지 않을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누가 살인을 저질렀고, 누가 범인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들이 왜 이래야 했고, 왜 이렇게 상황이 전개가 되느냐가 <우리동네>에선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다. 영화를 보면서도 누가 범인일까에 치중을 하는 기존의 스릴러 영화들과는 다르게 <우리동네>는 이 두 사람의 결말이 어떻게 끝날 것이며, 세 사람의 감정관계나 인과관계가 어떻게 엮이는지, 그 매듭이 도대체 어떻게 풀릴까에 더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긴장감이 중요했다. 솔직히 난 효이가 어디서 어떻게 살인을 저지를까, 여기서 누가 죽을 거 같다는 식의 긴장감에 그렇게 큰 비중을 두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오히려 비중을 두고 싶었던 건 인물간의 갈등과 관계가 어떻게 풀리고,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가는가라는 것들이었다.

효이는 사악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순수한 존재다. 너무나 순수해서 사악한 거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양면적 성향을 동시에 표현해야 한다는 것도 고민이었을 것 같다.
난 그게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누군가의 힘을 빌렸다.

누구 말인가?
그게 그 아역 친구다. 왜냐면 사실 내 능력이 좀 더 좋았다면 현재의 효이를 통해 내가 직접 그런 것들을 보여줬어야 되는데 난 거기까진 능력이 안되기 때문에 그 아역친구의 도움을 빌렸다. 영화상에서 아역 친구의 분량이 많진 않지만 꽤나 임팩트가 있다. 아역 비중에서 그 아이의 순수함과 살의를 갖게 된 동기 같은 것들이 모두 밝혀지기 때문에, 그 친구의 씬이 없었다면 내가 그렇게 효이라는 캐릭터의 양면성을 뚜렷하게 보여줄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류덕환의 새로운 발견이라는 말도 듣지 못했을 거다.(웃음) 그 친구(아역 시절의 효이)가 없었다면. 물론 떡볶이 집에서의 순수한 청년의 이미지 같은 것들도 있었지만 그건 어떻게 봤던지 간에 단면성이니까, 이 아이가 왜 아픔도 없고 살인을 저질러야 했는가의 동기는 내가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는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친구에게 더 의지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친구 덕분에 양면성이 또렷해졌다고 생각한다. 일전에 청룡영화제 때, 황정민 선배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밥상은 남들이 다 차려놨는데 스포트라이트는 내가 다 받는다고, 그거랑 비슷한 얘기다. 나도 다른 배우가 있었기에 그렇게 주목 받은 것뿐이지, 난 내가 혼자 다 했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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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결국 <우리동네>에서 류덕환의 밥상은 어린 효이가 고양이 목을 비틀 때 다 차려진 건가? (웃음)
내가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도 나오지만 그렇게 살인을 저지르는 긴장감의 출발점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거지. 외로울 때 항상 자기 곁에 있었던 고양이가 자기 손에 쥐어져 있었고 그 고양이를 죽였는데 이상하게 불쌍하지도 않고, 밉지도 않고, 자기가 무섭지도 않고, 그냥 단순한 쾌감, 혹은 그에 대한 어떤 즐거움만 있으니까. 그런 씬을 보여줬기 때문에 그 이후에 효이의 어떤 행동들이나 그런 사건들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관객들이 공감하게 되는 거라고 난 생각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선균이나 오만석 같은 배우들의 안정적인 서포트가 효이란 캐릭터를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건 아닐까.
일단 만석이형과 저 같은 경우는 분명히 살인마라는 세 글자를 건 비슷한 캐릭터를 연기했지만 다른 연기가 나왔다. 연기 스타일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건 캐릭터상의 문제다. 서로 연기를 하면서 대치했던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경주라는 인물과 많이 부딪히지는 않지만 마지막 씬에서 본격적으로 부딪히면서 긴장감이 팽팽히 도는 가운데 과연 누가 이길지 지켜보게 되는 건데, 어떻게 보면 내가 계속 쏘아붙이고 혼자 얘기하니까 마치 경주가 진 것처럼 표현됐다. 물론 둘의 긴장감은 끝까지 있었고 누가 효이를 죽인 건지는 결국 모른다. 효이가 자살했는지, 경주가 죽였는지 나도 모르고, 감독님만 아는 거겠지. 감독님께서 아직도 말씀해주시진 않지만 난 처음엔 경주가 그 힘을 못 이겨서 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까 왠지 효이가 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도 개인적으로 그 쪽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쏘아붙이던 효이의 모습 때문에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해지는 건 아닐까 싶다. 그에 반해서 선균 형의 연기는 일단 너무 편안하다. 사실 난 영화 보는 내내 너무 힘들었다. 내 연기를, 우리 영화 자체를 보면 항상 긴장되고 움츠려들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어깨가 여기까지 올라가고(어깨를 펴면서)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선균 형의 힘이 컸단 생각이 들더라. 그나마 관객들을 편안하게 해주시니까. 목소리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일단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연기 스타일을 갖고 계시니까. 나라도 저렇게 했을 거야, 나라도 저 상태에서는 저렇게 감정이 나왔을 거야, 라고 생각될 만큼 중립적인 입장을 너무나 잘 표현하셨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이 너무나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나왔다는 생각이 들더라. 효이가 굉장히 극단적이고 재신이 굉장히 스무드(smooth)한 역할이라면 경주는 그 가운데서 치고 받고 하는 인물이다. 그런 조합이 어떻게 보면 연기적으로 잘 맞았기 때문에 관객들이 긴장감을 갖게 되는 반면,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구도로 완성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효이가 자신 스스로에게 방아쇠를 당긴 것 같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난 효이가 전신주에 붙은 자신의 몽타주가 자신과 닮지 않았냐고 묻는 장면과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했다. 자신을 과시하는 듯한 이런 행위는 결국 누군가의 관심을 얻고 싶어하는 것이고 자학을 통해서라도 인정받고 싶다는 심리로 느껴졌다. 이는 한편으로 그 거리의 무관심을 조롱하는 행위라고도 생각했다.
자꾸 아역 때만 말하니까 내가 한 게 없는 거 같아서 좀 그런데,(웃음) 사실 아역 분량에서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엄마의 무관심 속에서 자랐고, 그래서 살아있는 동물들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아이의 모습, 그리고 소연이라는 여학생을 좋아해서 나름대로 관심을 표했지만 돌아오는 무관심, 그로부터 느껴지는 아픔들, 그런 주변 인물들로부터 보여지는 무관심한 아픔들로부터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몽타주 씬에서도 그렇고 자기가 살인자라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는 건 좀 더 관심을 받고 싶어했던 부분들이 컸기 때문인 거 같다. 그 타깃은 일단 경주였지만 그 외에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의 무관심을 하나씩 접하게 되고 그런 게 쌓이다 보니까 광기가 더욱 커진 것일지도 모르고. 그리고 동물 병원에서의 충동적인 살인도 명보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거다. 명보에게 거짓말로 소연이랑 살고 있다고 얘기했지만 그는 그녀가 죽은 것조차도 모르고 있지 않나. 자신이 관심을 가졌던 소연이에 대해서 상처를 받았던 건 정작 명보 때문이었는데 그런 당사자의 무관심이 충동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결국 효이의 그런 모습들이 무관심에서 출발한 셈이라고 봐도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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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전원일기>에 출연했었다는 사실은 몰랐다.(웃음) 연기 경력이 나이에 비해 상당하더라.
여섯 살 때부터 시작했다. 시작하게 된 동기는 내가 너무 숫기가 없어서 어머니께서 웅변을 시킬까 연기를 시킬까 고민을 하셨던 것에서 출발한다. 병적으로 숫기가 없었다고 하더라. 이 세상에 어머니와 할머니 말고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심했다. 그러다가 어떻게 아는 분을 통해서 소극장에서 연극을 배우다가 한번 대회를 나갔는데 심사위원으로 유인촌 선생님이 계셨다. 그런데 날 좋게 봐주셨는지 관심 있으면 오디션을 보라고 하시면서 어느 연락처를 알려주셨는데 그게 <전원일기>오디션이었다. 그래서 오디션 보고 어떻게 하다가 <전원일기>에 들어갔다. 그렇게 TV쪽을 들어가게 되니까 여기저기서 얘기가 나오고 그를 빌미로 다른 오디션 보고 하니까 <허준>이나 <왕초>같은 드라마도 나오게 됐다. 그러던 중, 영화 일을 몇 번했는데 그게 매번 잘 안됐다 개봉 못한 영화도 있었고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아지고, 그러다 보니까 난 정말 영화랑 안 맞나 보다라는 생각까지 했는데 <묻지마 패밀리>라는 옴니버스 영화를 하게 됐다.

‘내 나이키’ 편에 출연했던.
장진 감독님과 박광현 감독님과의 인연이 그때부터 시작이 됐다. 아마도 그때부터 시작된 거 같다. 어떻게 보면 조금은 무모하지만 배우라는 길을 택하고, 해야만 한다고, 해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던 게 <묻지마 패밀리>이후부터였다. 사실 그 전에는 내 주위의 아역배우들을 이겨야겠다는 열등감이 강했다면 그 때부터는 내 의지대로 해나가는 식이었던 거 같다. 그 이후부터 스스로 (필름있)수다 사무실 찾아가서 계속 인사 드리고, 돌아다니면서 나 장진 사단이라고 떠들고 다녔고 그러고 싶었다. 그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내 욕심이었고, 의지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부터 영화에 대한 애정이 조금씩 커졌던 거 같다.

하지만 결국 배우로서 확실히 각인시킨 건 필름있수다에서 제작하지 않은 <천하장사 마돈나>를 통해서였다.
<웰컴 투 동막골>하고 나서 <마돈나>라는 작품을 택했던 건 물론 내 욕심도 있었고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들도 있었는데 그 남들 중에 가장 첫 번째로 보여주고 싶었던 게 장진 감독님이었다. 장진 감독님한테 ‘저 이번에 형 도움 없이 영화 하나 찍었어요. 한번 봐주세요.’라고 한번 말하고 싶었었다. 그런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거 같다. 물론 지금은 이제 그런 특정한 누군가를 대상으로 하는 의지는 없지만 내 스스로가 해야만 한다는 의지가 마음속에 남아있다는 게 앞으로 중요한 거 같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 같은 건 크게 중요한 거 같진 않다. 어쩌면 지금까지는 그냥 어머니가 시키니까 했던 거 같고.(웃음) 이제부터 시작인 거 같다. 내가 이제 보여줘야 하는 것들, 조금 더 공부를 해야 하는 것들도 많고.

평소에 조승우 같은 연기자가 되고 싶다고 많이 피력한 것으로 안다. 여전히 조승우는 류덕환에게 이상형인가?
내가 조승우 형을 너무 좋아해서 <웰컴 투 동막골>(이하, <동막골>)당시에 (강)혜정 누나와 친분이 있으니까 몇 번 물어보기도 했었고, 매니저 형 아는 분들 통해서도 몇 번 인사도 드렸지만 친해지거나 그렇진 않았다. 너무나 친해지고 싶었었다. 대학교 시험 볼 때도 조승우 형의 '지킬 앤 하이드'를 가지고 종합 연기 준비도 할 정도로 애정이 너무 깊었었다. 언제는 한번 누가 (조승우와) 닮았다는 소리를 해서 난 정말 날아갈 정도로 기분이 좋았었다. 너무 행복했지, 그땐. 내가 좋아하고 우상으로 섬기는 배우를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 기분은 정말 어떻게 말을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한편으로 이젠 나도 나중에 내가 조승우 형을 닮고 싶어하는 것처럼 누군가 나를 닮고 싶게 만들고 싶다는 욕심 같은 게 오히려 지금은 더 큰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그분을 안 닮고 싶다는 건 아니다. 게다가 그걸 따라가긴 어렵겠지. 다만 그 분의 연기에는 그분의 스타일이 있고, 분명히 나만의 스타일도 있기 때문에 존경은 하지만 이젠 내 길을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조금 더 커진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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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엉뚱하지만 효이가 ‘나, 괴물이지?’란 대사를 할 때 <마돈나>의 동구가 했던 ‘나 장만옥닮지 않았어?’라는 대사가 생각났다. (웃음) 왜냐면 괴물이나 장만옥은 효이와 동구에겐 누군가에게 이렇게 인정받고 싶다는 어떤 구체적인 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류덕환은 배우로서 인정받고 싶은 어떤 구체적인 상이 있나?
음…글쎄. (골똘히 생각하다가)그들은 어쨌든 간에 둘 다 한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던 거다. 둘다. 오동구 같은 경우는 자기가 짝사랑하는 일본어 선생님한테 인정을 받고 싶었던 거고, 효이도 다른 사람이 아닌 경주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던 거다. 그런 것처럼 나 같은 경우도 인정받고 싶은 특정 인물 같은 부분은 분명히 있다. 그 인물들에 대한 심리 상태를 나에게 비교하자면 어느 한 특정인물한테 주목이나 인정을 받고 싶다기보단 내 자신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거 같다. 난 항상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고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내 자신을 충족하기 위해서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니까.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물론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나 지적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사실 그런 것들을 다 새겨듣지도 않는다. <마돈나>때도 안 좋다고 하셨던 분들도 있었고, 좋다고 하셨던 분들도 있었다. 사실 <아들>같은 영화를 찍었을 때는 내 나름대로 굉장히 무난하고 조용히 연기했다면 <우리동네>에서는 감정이 극단적인 상태로 치닫는 그런 연기를 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연기를 했을 때 칭찬이 더 많이 나온다. 솔직히 <아들>때 편안하게 연기했는데 이건 그냥 그랬구나, 하고 지나갔는데 <우리동네>같은 영화는 잘한다고 하는 모습들이 난 일차적으로 보여지는 어떤 시각적인 부분에 의해 내가 보여진다고 생각했다. 일단 겉모습을 통해 보여지는 것들, 표정이 굉장히 많이 나타난다거나, 연극적인 요소로 억지스럽게 표현한다거나, 이런 것들을 통해 인정받는다는 게 과연 정말로 내가 인정을 받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더라.

스스로를 아직 인정할 수 없다는 이야긴가?
사실 칭찬해줬을 때, 그런 것들을 굉장히 기분 좋게 받아들이긴 하지만 결국 내 자신으로서는 인정할 수 없을 때도 있는 거니까. 왜냐면 <우리동네>나 <아들>이나 <마돈나>나 <동막골>이나, 내가 임했던 연기의 자세는 똑같았다. 내가 어떤 연기를 하든 내가 노력한 부분에 대한 퍼센트 지수는 항상 똑같았다. 물론 내가 받았던 스트레스 같은 것들은 분명히 다르겠지만 내가 했던 연기적 태도는 분명 똑같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굳이 캐릭터가 뚜렷해야만 인정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내가 풀어야 할 숙제일 거다. 한편으로 다음 영화에서는 진짜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하게 가도 아, 류덕환 정말 연기 잘한다, 이번 영화 참 좋았다, 라는 얘기가 과연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해서 내 자신 스스로 한번 실험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그래서 그 특정인물을 굳이 정하자면 그건 다른 사람들이기보단 나인 거 같다. 오히려 나한테 인정받고 싶고, 내가 내 자신에게 죽어도 만족을 못할지라도 한번쯤은 만족할 수 있는 그런 연기가 나올 때까지 해보는 게 내 모습인 거 같다. 반대로 생각하자면 죽을 때까지 연기를 하겠다는 거지.

동구나 준석이나 효이가 아니라 그냥 류덕환이라는 자체로 인정받고 싶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럴 수도 있다. 내 본래의 모습을 최대한 배제하지 않고서 연기에 임했던 게 <아들>이었다. <아들>같은 경우는 반전에 대해서 좋다고 생각하시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게 별로 안 좋다는 지적도 많았다. 그런데 어쨌건 반전에 대해서 뒤통수 맞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았다. 난 오히려 그런 반응들이 내 개인적으론 굉장히 좋았다. 왜냐면 그 전 상황까지는 그만큼 승원형이랑 내 모습이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으로 보여졌기 때문에 그만큼 뒤통수 맞은 게 큰 타격이 된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부분들이 내 의도처럼 최대한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으로 비춰지길 원했고, 그 둘의 모습이 너무나 예뻐 보이길 원했었다. 어떻게 보면 <마돈나>나 <우리동네>와는 다르게 <아들>때는 최대한 그런 모습에 류덕환의 모습으로 다가가길 원했고, 류덕환의 모습이 조금 더 많이 보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게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통해서 내 나름대로 치밀하게 반전을 준비했었다. 앞으로는 내가 그런 연기를 했을 때도 <우리동네>나 <마돈나>를 통해 받았거나 받고 있는 어떤 칭찬들이 똑같이 나올 수 있는 그런 방법이 뭐가 있을지, 그런 것들이 내가 풀어나가야 하는 과제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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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서 여자가 되야 했던 동구처럼 류덕환은 살기 위해서 연기를 하고 있는 건가?
배우가 되기 위해서 사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살기 위해서 배우가 된다는 것보다는 배우는 나에게 너무 하고 싶은 낙인 거다. 내가 아까도 말했다시피 연기를 하면서 분명히 어려움이 없을 수는 없다. 스트레스를 비롯한 여러 가지 난관들을 계속 헤쳐나가고, 그런 과정들이 쭉쭉 나아가다가 결국 결과물을 봤을 때 느끼는 것들. 이번에도 하나 해냈구나, 100% 마음에 들진 않지만 오늘도 하나 해냈구나, 이런 감정들을 느끼기 위해서 계속 이렇게 하는 거 같다. 이런 것들을 말로 풀어내자면 내가 살면서 느낄 수 있는 어떤 즐거움 때문에 배우를 한다기보단 배우를 하면서 즐거움을 얻기 때문에 계속 이렇게 이 일을 하는 거 같다. 어떻게 보면 그게 내가 연기를 하는 정답일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즐거움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 계기는 뭐였나?
그러니까 그 정체성이라는 게, 옛날에 이휘재 씨가 하셨던 인간극장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래, 결심했어’ 뭐 이런 거? (웃음) 정체성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작품에 내 이름이 올라가는 걸 보는데 이 느낌을 한번만 더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마냥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짜릿한 것도 아니었고, ‘우와’도 아니었고, 경악도 아니었고, 그냥 이게 무슨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한번만 더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바로 나에게 영화에 대한 어떤 집요함이 생기게 된 계기인 거 같다. 물론 난 이러니까 배우를 해야만 한다고 내가 지금도 느끼고 있는 건지 잘은 모르겠다. 배우라는 이 한 단어가 제 이름에 붙여질 때, 배우 류덕환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때, 사실 난 아직 창피하다. 그건 아직 내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많이 배우고 있는 입장이니까. 물론 내가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직업상으로는 배우 류덕환이 맞겠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어떤 전문용어로 배우 류덕환이라고 불렸을 때는 난 아직 창피하다. 그렇기 때문에 난 배우라는 정체성을 앞으로도 계속 살려나가야 될 것 같다. 내가 이렇기 때문에 배우 류덕환이라는 정체성은 아직도 찾지 못했고 앞으로도 계속 찾아나가면서 만들어나가야만 할 것 같다. 내가 그 만족감을 언제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그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서 찾아나가야만 할 것 같다.

그렇다면 단순히 지수로 표시한다는 게 힘들겠지만 효이는 본인에게 몇 %의 만족이었나?
(골똘히 생각하다가)난 모르겠다. 사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이번에 <우리동네>를 보고 나서 그 때 찍었던 씬이 몇 테이크였는지 알 것 같더라. 영화를 보면서도 감독님이 몇 번째 테이크를 썼겠구나라는 걸 느낄 정도로 내가 너무 생각을 많이 했던 작품이었던 거 같다. 그래서 사실 영화를 보면서도 몇 번 테이크를 썼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물론 그렇게 테이크를 많이 간 것도 아니고 연기도 즉흥적으로 나왔지만 모니터를 이렇게 많이 본적은 진짜 처음이었다. 모니터를 계속 돌려서 보고 또 보면서도 하나하나 꼼꼼히 봤던 작품이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도 몇 번째 테이크를 썼는지도 알 것 같더라. 그래서 이번에 이 씬에서는 그 테이크를 썼으면 좀 더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굉장히 많이 하게 된 작품이었던 거 같다.

결과적으로 영화에 완벽하게 만족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인가?
내 자신에 대한 아쉬움이 있는 거 같다. 가령, 내가 왜 이 감정을 생각 못했지? 그러니까 영화 전개상 보다 보면 저 감정은 안 맞는 거 같다는 그런 느낌들이 있었다. 내 연기부분에서는 그런 것들이 있었고, 오히려 연기적으로 걱정했던 부분에서 음악이 비중을 많이 살려준 부분도 있었다. 음악이 깔리고 나니까 오히려 그 씬의 시니컬한 느낌이 더 살고, 그래서 조금 더 좋아진 부분도 있었다. 사실 내 연기 부분에 대해선 항상 나는 만족할 수 없는 거 같다. (웃음) <천하장사 마돈나>때도 그랬고. 내가 (신)하균 형이랑 조금 비슷한 성격인데 내가 찍은 영화를 두 눈 똑바로 뜨고 못 본다. 영화를 보면서도 계속 이렇게(손으로 눈을 가린 채로) 가리거나 중요한 장면 나올 때는 유심히 봐야 되는데 오히려 옆에 있는 사람을 본다. 어떻게 볼까, 어떤 반응이 나올까, 그런 것들이 궁금해서,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만족을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끝없는 소심함 때문에.

스스로를 자학하는 경향이 약간 있는 거 같다.
그런 게 조금 있다. 어쩌면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완벽주의자?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내가 자꾸 자학을 하는 거 같다. 예를 들어서 커피를 마시는데 커피의 농도가 딱 80%라면 그 80%에 맞춰야 된다. 누가 봐도 80%에 맞는 거 같다고 하는데, 내가 맛을 봤을 때 79%밖에 안 되는 거 같다면 그 1%를 만족하기 위해서 나는 계속 농도를 맞추려고 할 거다. 내 입 맛에 맞는 그 1%를 만족하기 위해서. 어떻게 보면 너무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을 통해 내 자신을 자학하는 것 같기도 하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 중 자학했던 사람이 많다더라.
아, 그런가? 그럼 좋게 받아들여야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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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야기해보니 여우보단 애늙은이 같다. (웃음)
애늙은이도 많이 들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전원일기>라는 드라마를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웃음) 너무 높으신 선배님들이다 보니까 난 정말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있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까 그런 것들이 계속 몸에 배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나에게 가르쳐주셨던 게 네가 인사를 했는데 저 선배님이 모르고 지나갔다면 네 인사를 모른 척하고 간 게 아니라 못 보고 갔을 수도 있기 때문에 너는 끝까지 인사를 해야 된다는 것. 그래서 무조건 나는 내 인사를 못 받았을 때는 내가 쫓아가서 인사를 해야 된다. 그런 것들이 지금까지 몸에 배어있다 보니까 촬영이 끝나고 나서도 스텝 한 분들한테까지 가서 인사하는 버릇이 생겼다. 어떻게 보면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여우라는 말이 나왔던 것도 상대방의 반응을 자꾸 생각하다 보니까 그런 것 같다. 말을 하나씩 커트한다거나 농담도 함부로 못하는 거 같고, 농담을 했을 때도 그 사람이 기분 나쁘지 않을까, 이런 것들을 자꾸 안으로 소심하게 생각하다 보니까.

너무 배려가 심하다 보니까?
좋게 말하면 배려고, 나쁘게 말하면 나 혼자 망상에 빠지는 거지.(웃음) 그러니까 얘기를 하다가도 가벼운 농담을 할 수도 있는데 제 딴에는 기분이 나쁠까 봐, 그게 어떻게 보면 칭찬의 의미일 수도 있는데 괜히 했다가 뭐야, 이사람, 이럴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혼자서 자꾸 상상을 하게 되는 거다. 그래서 말하면서도 자꾸 생각하게 되고, 이 정도 수위면 기분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따르기 때문에 여우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계속 조심스럽게 말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대선배님들을 통해 몸에 밴 습관이 눈에 띠어서 애늙은이처럼 보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아역 시절부터 쌓아왔던 연기적 학습능력, 즉 필모그래피가 지금의 연기적 자양분이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난 아역 때도 내가 아역 취급 받는 걸 싫어했다. 그래서 난 지금 아역 친구분들한테도 처음에 만났을 때는 무조건 존댓말을 쓴다. 어쩌면 내가 그걸 겪었기 때문에 그 친구들의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한다. 본의 아니게 기분 나쁠 때가 있다. 무조건 어리다고 해서 반말하고 그냥 너는 대기하다가 조금 이따 나오라고 할 때 나와,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말하고, 이런 부분들이 어떻게 보면 무시당한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최대한 배려해준다고 하는 게 일차적으로 나오는 말이다. 누구나 말을 통해 그 사람의 인격이 보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친해지기 전까진 존댓말을 한다. 무시당하는 것까진 아니라도 내가 이렇게 보이면 너무 약해 보일 수도 있겠다는 것들을 내 나름대로 소심하게 표현했겠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강하게 계속 쌓여왔던 거 같다. 그래서 주연, 조연 같은 걸 따진다기 보단 현장에서의 내 모습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고 난 언제나 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한 씬을 나오더라도 두 씬을 나오더라도 언제나 나는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주연급 배우로서 빠른 나이이기도 하다.
<우리동네>는 사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분량으로 따졌을 때 조연급이지만 난 내 마음속으로 항상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런 자신감을 잃지 않아야 내 연기에 대한 어떤 신조나 정확한 어떤 연기관 같은 게 흐트러지지 않고 갈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내 중심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아역 때부터 그런 생각이 쌓이다 보니까 주연, 조연, 단역 배우에 대한 개념이 다 사라진 거 같다. 누구는 주연, 누구는 조연, 또 혹은 누구는 단역, 난 이런 것들을 정해놓은 거 자체가 너무 싫었다. 물론 우리가 구분을 위해 배역을 나누겠지만 영화 일을 하면서 만큼은 주연이 조연이 될 수 있고, 조연이 주연이 될 수 있듯이 항상 누구든지 그 영화에 출연한 모든 배우들이 주연이라고 생각한다. 한 명이라도 빠졌을 때 영화가 완성될 수 없기 때문에 다 주인공이라고 생각을 한다. 물론 주연이 훨씬 더 많이 고생하고 그에 대한 대우도 물론 다르지만, 자신이 갖고 있는 신조만큼은 항상 주인공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을 어렸을 때부터 생각해왔기 때문에 지금도 주연이나 조연, 그런 거 생각 안 하게 되는 거 같다.

그런데 솔직히 난 스물 다섯은 넘었을 줄 알았다. 항상 연기를 보면서 스물 한 살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거지. 연기를 통해서 막연히 생각했던 나이와 실제 나이 사이의 괴리감을 알고서도 놀란 부분도 있다.
아~! 정말?

요즘 학교에서 연극 준비했다고 하는 거 같던데.
어제 끝났다. 어제 쫑파티도 했고. 그래서 지금 사실 상태가 별로 안 좋다. (웃음)

사실 그 연극도 졸업작품이라도 준비하는 건 줄 알았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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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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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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