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는 VR이다. 모두가 VR을 언급한다. 바람이 분다. 물론 이것이 판을 뒤엎을 바람인지는 알 길이 없다.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선 지난해 선댄스영화제에서 화제가 된 VR영화
<카타토닉>을 상영했다. <카타토닉>은 특별한 스토리가 있다기 보단 휠체어를 타고
괴기스러운 공간을 돌아다니며 소름 끼치는 광경을 목격하게 만드는 과정을 체험하게 만드는데 목적을 둔 호러 단편물이다. 이를 테면 테마파크의 귀신의 집 같은 거랄까. 특별히 마련된 휠체어에
앉아 안내에 따라 VR헤드셋을 쓰니 플레이 과정에 대한 선택을 묻는 문구가 떴다. 헤드셋의 전면부를 터치하니 영화가 시작됐다. 다른 세상이 시야에
꽉 찼다. 아니, 다른 세상이었다. 뭔가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기이한 풍경 속으로 내가 떠밀려가고 있었다.
긴장감이 엄습하면서도 호기심이 발동해서 주변을 자꾸 두리번거렸다. 앞서 영화를 본 여자가
상모 돌리듯 머리를 돌려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VR영화는 고개를 돌리면 그 시점에 해당되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관객이 시점을 결정할 수 있다. 신기해서 상모 돌리듯 상하좌우로
고개를 돌려 보게 됐다. 그런데 무언가 굉장히 끔찍한 것이 오른쪽에 있었는데 내가 왼쪽을 보고 있어서
지나쳐 버린 것 같다. 본의 아니게 긴장감 대신 내가 외면한 귀신의 쓸쓸함을 느껴버렸다. 게다가 영화를 보는 내내 시력이 0.5 정도 떨어진 것만 같았다. 화질이 선명하지 않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날 영화를 보는데 활용된 건 삼성기어VR인데 해상도가 좋지 않다는
지적이 담긴 기사가 적지 않게 검색된다. 콘텐츠의 가능성을 막는 기술적 한계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어쨌든 흥미로운 변화다. 아이맥스,
3D, 4D 등 새로운 관람 방식이 더러 등장했지만 VR영화는 완전히 새로운 체험이다. 그만큼 전세계 영화계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루카스필름 산하의 한 스튜디오에선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VR영화를 제작할 것이라 발표했다. 관객이
다스베이더가 등장하는 영화가 아니라 관객이 다스베이더의 시점으로 영화에 참여하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아이맥스(IMAX)사에서도 VR영화를 제작할 것이라 발표했다. 아이맥스사에서 만드는 VR영화이니만큼 기존의 VR기기에 비해 화각이 넓은 VR기기를 제공할 것이라 밝혔다.
VR영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기존의 영화산업에 몸담고 있던 이들만이
아니다. 지난해 구글에선 <헬프>라는 단편 VR영화를 발표했다.
간단한 테스트 영상 정도를 만든 게 아니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와 <스타트렉 비욘드>를 연출한 저스틴 린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으로 우주에서 날아든 괴물이 활보하는 도시를 1인칭 시점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작품이다. “시청자가 영화 속 공간에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어려웠다.” 구글과 함께 <헬프>를 제작한 콘텐츠 기업 불릿의 대표 토드 마커리스의 변이다. 그렇다. 영화란 감독의 예술이다. 감독이 결정한 시점에 영화의 의도가 담겨있다. 문제는 VR영화는 관객이 시점을 결정함으로써 영화의 의도를 완벽하게
외면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관객의 체험이 의도치 않게 영화적 실패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관객에게 360의 시야각을 열어줌으로써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건 VR영화가 지닌 현재 시점의 한계인 셈이다. 그리고 이는 과연 VR영화가 영화산업의 미래를 견인할 화두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모종의 답변일 수도 있다.
VR영화가 영화를 대체하는 미래일 것 같진 않다. 다만 VR영화는 하나의 장르를 자처할 수 있다. 1인칭 시점의 영상을 통해 관객에게 영화적 체험을 주입하려는 시도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극명한 오락적
장점을 품고 있다. 다만 VR영화라는 것이 보편화되려면 극장의
풍경이 달라져야 한다. 관객의 자리마다 VR헤드셋이 비치돼
있거나 3D입체안경처럼 상영관 출입구에서 관객에게 VR헤드셋을
하나씩 나눠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거대한 스크린이 아니라 각자의 머리에 쓴 고글을 통해 각자의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상영관에서 본 영화에 대한 기억은 제각각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극장에서 VR영화를 본다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홈비디오 시장 혹은 기존의 극장과 다른 형태의 VR영화관이라는
신종 사업을 통해 활로를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엔 VR영화를 볼 수 있는 VR시네마라는 영화관이 문을 열었는데 그곳엔
거대한 스크린 대신 저마다 자리를 잡고 영화를 볼 수 있는 VR헤드셋이 다량으로 배치돼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VR영화에 대해 이와 같이 말했다. “VR영화는 위험하다. 왜냐면 관객은 감독의 의도와 다른 곳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VR기술을 개발하는 한 회사의
고문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까 영화의 대가에게도 VR영화는
흥미롭게 다가오는 쟁점인 셈이다. 결국 VR영화는 그에 어울리는
기획과 결합됐을 때 완벽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런 의미에서 VR은 영화의 미래라기 보단 새로운 영토, 즉 신대륙의 발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