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을 넘긴 여배우에게도 전성기가 찾아왔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변신이라는 단어로 수식될 수 있는 결과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헬렌 미렌은 지금 새로운 변신을 꿈꾸고 있다.
<더 퀸>(2006)은 각본가 피터 모건이 시나리오를 집필한 <라이벌>(2003)과 <특별한 관계>(2011)를 잇는, 토니 블레어 3부작의 징검다리가 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더 퀸>은 단도직입적인 제목처럼 영국 수상 시절의 토니 블레어보다도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한 관점이 보다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총리 선거가 보도되는 TV를 바라보는 여왕이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와 방 안에서 담소를 나누는 오프닝 시퀀스는 세상과 괴리된 위치에서 세상을 굽어보고 보살펴야 하는 여왕의 고독한 위엄을 생생하게 내비친다. 그리고 <더 퀸>에서 그 고독한 여왕의 내면에 깊은 경의를 바치도록 위엄을 부여한 건 바로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하사 받았던 ‘데임’ 헬렌 미렌이었다.
러시아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1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난 미렌은 6살부터 “고풍스럽고 전통적인 감각”을 지닌 배우를 꿈꿨다. 8살에 입학한 학교에서 시작된 무대 경험은 13살에 입학한 세인트 버나드 수녀원의 여자 고등학교에서 접한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통해 좀 더 구체화됐다. 하지만 엄격한 규율로 정숙을 강요하던 학교의 방침은 반사적으로 안티테제적인 성향이 강한 미렌의 독립성을 부추겼다. 또한 모델로 성공한 사촌 타니야가 <007 골드핑거>(1964)에 출연하자 그녀는 더욱 강한 자극을 얻었다. 하지만 딸의 바람이 부질없다고 믿었던 그녀의 부모는 딸에게 교육자로서의 길을 제시했다. 하지만 미렌의 시선은 부모가 제시한 길 위에 놓여 있지 않았다. 그녀는 부모 몰래 국립 청소년 극단의 오디션을 치르고 통과한 뒤,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관 위로 본격적인 삶을 펼쳐가기 시작했다.
NYT에 입단한지 2년 만에 런던의 올드 빅 극장에서 공연된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서 관능적인 연기로 클레오파트라를 선보인 미렌은 굉장한 반향을 일으켰다. 에이전트와의 계약이 성립되는 등, 그녀의 입지는 완전히 변했다. 2년 뒤, 왕립 셰익스피어 극단의 제안으로 극단을 옮긴 그녀는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에서 맡은 크레시다 역을 통해 나신의 육체로 무대를 장악했다. 노출을 불사하는 그녀의 도전적인 특성은 스크린 진출의 기회로 확대됐다. 호주의 해변을 병풍 삼아 누드를 드러낸 <에이지 오브 컨센트>(1969)는 그녀가 무대 위에서 펼쳐 보인 관능을 고스란히 활용한 작품이나 다름 없었다. 특히 에로티시즘의 거장이라 꼽히는 틴토 브라스의 문제작 <칼리귤라>(1979)에서 그녀는 광기에 빠진 로마 황제의 음란한 정부로 등장하며 악녀로서의 이미지를 공고히 다지기도 했다. “영국 배우 중 헬렌 미렌과 같이 전적으로 섹스 어필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에 대한 <가디언>지의 코멘트는 이런 경력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누드 신에 있어서 섹시함 따위는 없다. 더 불편할 뿐이다. 나는 옷을 벗고 있는 것보단 입고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미렌이 누드를 감행한 건 단지 그것이 자신의 연기적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교회 그림을 보길 원치 않는다. 그들은 발가벗은 육체를 보길 원한다.” 이런 생각처럼 미렌은 과감한 노출을 통해 대중의 주목을 얻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이를 성과로 매듭지을만한 목표의식이 있었다. “단지 괜찮거나 멋있게 보이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가장 훌륭한 것이어야만 했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육체마저도 연기적 완성을 이루는 방편으로서 활용할 수 있다는 의지와 확신이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빠른 성공을 얻어냈다. 하지만 미렌에게 “20대는 고문”이었다. “왜냐면 무엇이 돼야 하는지, 혹은 그 모든 게 잘 풀려나갈지도 알 수 없고, 소위 어른이 됐음에도 그 어떤 것도 배운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던 삶을 살아가고 있으나 때때로 그것이 진짜 자신인가라는 고민에 한 발을 담그고 있었다.
무대에서 출발한 대부분의 영국 배우들처럼, 극단에서 연기적 경험을 시작한 미렌에게도 셰익스피어는 밟고 건너야 할 연기적 토양이었다. “셰익스피어를 연기할 때, 관객들은 당신이 똑똑할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면 그들은 당신이 말하는 것을 스스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한때 악녀로서의 이미지를 구가했던 그녀의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심지어 그녀는 한때 자신이 활약하던 국립극장과 왕립 셰익스피어 극단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훗날 미렌은 이에 대해 고백했다. “권력의 제재에 타협하고 늘 올바른 행동만 하는 건 내게 매력적인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진실로 악명을 얻는 것”, 즉 스스로를 악명으로 위장하며 자유를 추구했다.
“미렌의 연기는 다른 배우들을 무대 밖으로 밀어낼 정도다.” 1974년, <레이디 맥베스>로 오랜만에 무대에 복귀한 미렌에 대한 이런 평은 그녀의 현실을 대변하는 바이기도 했다. 사실 미렌이 연기하는 캐릭터들에게는 하나 같은 간절함이 깃들어 있다. 과감한 노출 여부와 상관 없이 일맥상통하는 어떤 태도가 발견된다. 장소를 불문하고 아무 곳이나 드러누운 채 칼리귤라를 유혹하는 캐소냐의 음란한 욕망이 자신이 사모하는 한 남자를 향한 정열적인 표현에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건 그 결말부에 다다라 칼리귤라의 최후를 목격하는 그녀의 절규 때문일 것이다. 이는 그녀에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칼의 고백>(1984)의 애절한 결말부나 역시 <고스포드 파크>(2001)의 결말부에서 드러나는 절절한 고백신을 비롯해서 근작인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2009)의 결말부에서 묘사되는 애틋한 이별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녀가 연기한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결코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 보이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로 위장한 여인들의 연약한 심성이 담긴 눈물로서 결말을 맞이하곤 했다.
동시에 그녀들은 개인과 체제의 기로에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인물들이어야 했다. <더 퀸>의 엘리자베스 2세는 물론, 또 다른 영국 여왕을 연기한 <엘리자베스 1세>(2005)에서 그녀는 개인과 국가라는 경계 위를 방황하는 여왕의 연약한 이면을 묘사하는 동시에 여왕의 고뇌가 어떤 가십거리처럼 여겨지지 않도록 위엄 있는 표정과 자태를 마련했다. 모성애와 정치적 신념의 기로 위에 선 여인으로 출연한 <어느 어머니의 아들>(1996), 그와 반대로 망령이 든 국왕이자 남편을 대신해서 권력에 눈이 멀어 아버지를 내치고 왕권을 차지하려 드는 아들의 음모에 맞서는 왕비 역으로 출연한 <조지 왕의 광기>(1994)에서도 갈등 위를 떠돌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결코 달아나지 않는 강인한 면모를 담백하게 드러낸다.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1989)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부조리한 사랑에 대한 이해에 앞서서 자신의 감정에 대한 단호한 의지로 복수를 감행하는 여인으로서 확고한 의지를 연기한다.
최근작 <레드>(2010)에서 그녀는 여전히 새로운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임을 각인시켰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자태로 묵묵히 기관총을 연사하고 오래 전 헤어졌던 연인에게 낭만적인 입맞춤을 선사하는 <레드>에서의 모습은 그녀가 지난 날 보여줬던 수많은 노출보다도 되레 파격적인 동시에 아름답다. 최근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각색한 <더 템페스트>(2010)의 연출자 줄리 테이머는 말한다. “이런 환상적인 이야기들은 여자들을 위해 쓰여진 바가 없다. 그래서 헬렌 미렌과 같은 여배우가 이런 기회에 접근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 작업을 원했다.” 60대 중반의 나이를 넘긴 미렌이 지금 전성기 못지 않은 특수를 누릴 수 있는 건 그녀가 여전히 진화하는 현재진행형의 배우로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내 모든 야심은 질투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고백했던 미렌은 자신이 질투했던 이들 앞으로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또박또박하게 걸음을 옮기며 자신만의 족적을 남기고, 보폭을 넓혀왔다. 지금도 그녀는 꼿꼿하고 또박또박하게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스스로 꿈꾸던 “고풍스럽고 전통적인 감각”을 지닌 배우로서.
(beyond 2월호 Vol.53 'STAR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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