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ERIOUS MAN
10년 만에 얻은 ‘치맥’의 여유
강지환은 원래 알고 있었다. 치킨은 맥주와 먹어야 제 맛임을. 하지만 ‘치맥’ 맛은 달랐다. 서른 여섯 살이 돼서야, 연기 생활 10년을 채우고야 ‘치맥’ 맛을 알았다.
A SERIOUS MAN
10년 만에 얻은 ‘치맥’의 여유
강지환은 원래 알고 있었다. 치킨은 맥주와 먹어야 제 맛임을. 하지만 ‘치맥’ 맛은 달랐다. 서른 여섯 살이 돼서야, 연기 생활 10년을 채우고야 ‘치맥’ 맛을 알았다.
"내 연기를 즐겁게 보긴 어렵다. 눈으로는 모니터를 보면서도 반응을 감지하려고 더듬이를 뽑고 있거든.” <경성 스캔들>의 선우완이나 <쾌도 홍길동>의 홍길동처럼 넉살 좋고 유쾌한, 군살 없는 감정의 소유자들은 강지환의 아바타가 아니다. 그가 연기한 캐릭터의 환영일 뿐. 강지환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진지하고 고민이 많은 사람이다. ‘대사가 있건 없건 대본은 꼭 지니고 있어야 되고, 잘 때는 머리맡에 두고 있어야 하는’ 강지환은 ‘항상 아이디어를 내야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를 혹사시킨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결코 스스로 편안해질 수 없는 남자다. 강지환은 연기를 마치고 나서도 항상 작품 주변을 서성였다. 드라마에 출연할 때면 잠에서 깨자마자 일종의 의식처럼 컴퓨터를 켰다. TNS사이트에 들어가서 시청률을 파악하고, 시청자 게시판과 팬카페의 동향을 살피는 건 자연스런 ‘일과’가 된지 오래다. “작품을 끝내면 후련해야 되는데 스코어가 잘 안 나오면 내 탓인가 싶다. 한두 살 먹으며 변하긴 하지만 아직까지 딱 떨쳐버리기 힘들다. 그런 성격을 가진 배우를 보면 그저 부럽다.”
<영화는 영화다>를 하고 나니 ‘까칠할 것 같다’는 말을, <7급 공무원>을 하고 나니 ‘빈틈이 많아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배우는 캐릭터의 탈을 쓰고 언제나 오해 받는다. 오해가 완벽할수록 캐릭터에 대한 완성도를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셈이다. 허나 그 오해들은 때때로 배우의 쓸모를 철저하게 가둬버린다. 로맨틱 코미디 혹은 약간의 액션이 가미된 또 다른 로맨틱 코미디, 강지환의 필모그래피 대부분을 가둔 장르의 창살. ‘처음에 <차형사>가 달갑지 않았’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어느덧 나이 서른 여섯의 10년차 배우가 됐는데, ‘언제까지 귀엽고 사랑스러운 로맨틱 코미디 배우’로 한정되는 것이 고민스러웠던 것. 하지만 ‘작품이라는 게 운때가 있고, 내 작품이라 들어오는 작품은 따로 있는 법’이었다.
강지환은 <차형사>의 대본을 처음 보고 ‘대사와 신이 살아있다’고 느꼈고, ‘최소한 망하지는 않겠구나’ 판단했다. 뚱뚱하고 더러운 잉여 형사가 말끔한 몸짱 모델로 거듭나는 과정은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몸은 남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말한다. “직업이었으니까 했지.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12.5kg, 차형사가 되기 위해서 강지환이 더하고 덜어야 했던 무게는 명확했다. 하지만 증량과 감량 사이에서 강지환이 체감해야 했던 고통은 측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잘 빼는 것만큼이나 잘 찌우는 것이 중요했고, 단순히 빼는 것이 아니라 탄탄하게 다듬는 것이었기 탓이다. ‘닭가슴살을 갈아 마시며’ 체중을 늘리는 건 차라리 애교였다. 촬영 스케줄의 7~80%를 소화하는 롤타이틀의 임무를 소화하는 가운데서도 정해진 기간 안에 살인적인 감량에 돌입해야 한다는 건 자기 학대에 가까웠다. 가장 힘든 건 ‘스트레스로 예민해진 자신의 눈치를 보는 현장의 분위기로 인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물론 강지환은 ‘더럽고 뚱뚱하고 비호감인 차형사를 밉지 않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이행했다.
‘노숙자들을 만나기 위해서 새벽에 영등포나 서울역을 찾고, 풍물시장이나 동대문에서 직접 의상을 구해 오는’ 고민을 마다하지 않던 강지환에게 있어서 최대의 고민은 ‘뚱뚱한 무대포 강력반 형사’를 완성할 핵심적인 설정이었다. 그 고민을 단박에 덜어준 이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파리지앵 정재형’. “그 분의 단발머리가 나한테 너무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사실 형사가 장발이라는 게 현실성이 떨어지는 걸 알면서도 그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결국 단발머리는 차형사의 트레이드마크로 얹혔다. <7급 공무원>으로 함께 작업했던 ‘신태라 감독과의 신뢰’가 돈독한 덕분이기도 했다. 신태라 감독은 ‘혼자 쥐어짜낸 뒤 나타나서 여러 버전의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강지환의 연기스타일을 잘 알고 있었기에 기다림은 어렵지 않았다. 심지어 <쾌도 홍길동>으로 한차례 호흡을 맞춘 바 있는 성유리를 상대배우로 추천하고 직접 설득한 것도 강지환이었다. 본래 적극적인 자세로 작품에 참여하는 강지환이지만 <차형사>는 분명 그에게 특별할 만한 이유가 있다.
“일을 접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정말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전국 400만 관객을 동원한 <7급 공무원>으로 경력의 정점에 오른 강지환은 하루 아침에 밑바닥으로 끌려 내려갔다. 전소속사와의 계약 분쟁에 휘말린 강지환은 만신창이가 되어 1년 여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배우’ 혹은 ‘공인’이라는 미명하에 ‘모든 것이 기사화’되고, ‘소송, 법정과 같은 단어로 배우의 이미지가 오염되는 상황’보다도 힘겨운 건 ‘외로움’이었다.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나름 자리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모두가 등돌리니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인정하기가 가장 힘들었다.” 좌절감만큼이나 갈망을 억누르는 것도 힘겨웠다. ‘묵묵히 때를 기다리던’ 그는 “업계 관계자들을 만나서 인맥을 쌓는 것보다 내 일을 확실하게 해내는 것이 배우로서 진짜 힘을 기르는 일임을 깨달았다.” 현재 강지환이 수많은 예능 출연 제의를 뿌리치는 것도 ‘연기적으로 정당한 인정을 받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다. 단순히 ‘작품을 성공시키겠다는 맹목적인 이유’로 영화와 무관한 입담을 과시하는 건 그에게 아물지 않은 상처를 헤집는 일과 같다.
“조급함이 앞서던 예전과 달라졌다. 내가 노력해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이제 ‘운명을 조금 믿게 됐다’고 한다. ‘내 작품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바꿔 말하자면 스스로 선택한 작품을 좀 더 믿게 됐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연기 10년차를 맞이하는 해에 만난 <차형사>는 그에게 ‘치맥’ 같은 영화다. 한때 해외의 고급 맥주가 진정한 ‘맛’이라고 믿었던 그는 이제 동네 호프집의 물탄 생맥주를 들이키는 일상의 ‘멋’을 알게 됐다. 연기 경력 10년 만에 찾은 최고의 선물, 그건 바로 ‘최선을 다한 만큼 어디 내놔도 창피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믿는’ 여유라고 강지환은 말했다. 심각하고 진지한 특유의 그 표정으로.
(ELLE KOREA 6월호 NO.236 'ELLE interview')
영화는 언제 처음 봤나?
올해 부산에서 처음 봤다.
크랭크업 이후로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영화가 개봉됐는데 기다려지지 않았나?
촬영하는 동안 감독님께서 모니터를 많이 못 보게 하셨다. 그래서 나 스스로도 너무 궁금증이 커진 상태에서 영화를 봤기 때문인지 새로운 면도 보이고 저 때는 내가 저런 감정으로 연기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선하더라.
제목부터 의미에 대한 호기심을 부르는 작품이다. 처음 시나리오를 접했을 때 어떤 감상을 얻었는지 궁금하다.
일단 색다른 이야기라 이걸 감독님이 과연 어떻게 표현해내실지, 그리고 만약 내가 메이를 연기한다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궁금증으로 시작했다. 항상 내게 들어왔던 시나리오와 너무 다른 류의 영화였고 기존에 내가 해왔던 캐릭터와 상반된 면도 있어서 그런 호기심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거 같다.
주지홍 감독은 연기적인 요구가 많은 편이었나?
시나리오 상에는 디테일한 설정이 많았지만 일단 현장에 나오시면 어떤 게 편하냐고 물어보시곤 했다. 배우들에게 가장 편안한 현장에서 가장 솔직한 감정을 끌어낼 수 있다고 하셨다.
한국에 온 메이는 고모에게 자신을 왜 미국으로 보냈냐며 따진다. 단순히 메이가 미국으로 보내진 것에 대한 불만을 고모에게 토로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미국 생활에서 겪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런 억울함이 발생한 게 아닌가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에선 메이의 미국 생활에 관해서 결코 묘사하지 않는다. 배우로선 조금 답답할 수도 있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시나리오 읽으면서 감독님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부분이 그 고모와의 대화였다. 일단 감독님은 메이 스스로 그게 고모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단지 고모에 대한 원망의 표출이 아니라 그 동안 쌓여왔던 아픔을 세상에 표출하는 것이라 하시더라. 그게 고모에 대한 원망으로 그려져선 안되니까 뻔한 오열 같은 신파적 표현이 동원돼서도 안됐다. 그런 감정을 잘 절제해서 보여주는 게 내 숙제였지. 그래서 이 신을 찍고 나서 다시 찍어보고 싶다고 얘길 드리니까 감독님은 이게 좋다고, 100%라고 하시는 거다. 그때 조금 아쉬웠는데 나중에 편집된 걸 보니까 감독님께서 만족하신 그 선이 맞았다는 걸 느꼈다. 메이가 미국에서 겪은 삶이나 양부모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감독님께 여쭤봤다. 그러니까, 지나치게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아닐지라도 학대나 홀대를 받고 자란 아이가 아닌, 보통 가정의 평범한 유년을 보낸 아이지만 항상 버림받았다는 아픔을 지닌 채 한국에 살아있을 부모를 생각하는 아이라고 말씀해주시더라. 남들과 다른 아픔 때문에 항상 스스로가 벽을 만들고 스스로 자신을 소외시키는 감정을 보여줘야 한다고.
메이는 상당히 히스테릭한 캐릭터다. 단순히 기능적으로 캐릭터의 성격을 만들어나간다 해도 그 정서에 스스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그렇게 히스테릭한 부분도 그렇지만 메이가 항상 가지고 있는 답답함이 나를 힘들게 했다. 메이가 어린 시절부터 느꼈던 답답함을 한국에 오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막상 와보니까 어떤 해결책이나 돌파구가 없다는 답답한 느낌이 연기를 하면서 점점 더 나에게도 전이된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감정이입이 되면서 가끔씩은 촬영이 끝나고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워도 그 기분이 해소되지 않아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나름의 노력도 있었을 텐데.
3일 동안 세트장에서 대사가 한마디도 없어서 말 한마디 안하고 계속 답답한 기분으로 연기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3일째 되는 날 너무 답답하더라. 어둡고 침침한 세트장에 있다 보니 밖은 햇살이 비치는 낮이라는 걸 망각할 정도로 메이의 감정에 빠져 있다 보니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졌다. 그래서 세트장 문을 박차고 햇빛 아래에서 30분 정도 앉아서 마음을 다스린 적이 있다. (웃음)
큰 사건들이 펼쳐지기 보단 두 남녀의 감정적 충돌과 교감이 중요한 영화였으니까 장혁 씨와의 호흡이 중요했을 것 같다.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는 아니지 않았나? 나름대로 친밀감을 형성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 같다.
회사가 같아서 오고 가면서 인사하는 사이이긴 했지만 그 전에 내게 약간의 선입견이 있었던 거 같다. 감성적인 부분보단 이성적인 부분이 강할 것 같다는 느낌? 마초적인 느낌도 강하다 생각했고. 그런데 실제로 함께 연기를 해보니까 감수성이 예민하고 작품에 대한 열의도 강하시더라. 초반엔 감독님이 장혁 씨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얘기해서, (웃음) 처음엔 되게 어색한 사이였다. 그런데 영화의 흐름처럼 점점 더 친해지다 보니까 내가 몰랐던 매력들이 하나씩 발견됐다. 개인적으론 장혁 씨의 재발견?
스스로가 장혁 씨에 대한 선입견을 지녔다 말한 것처럼 당신의 선입견을 지닌 누군가도 있을 거다. 특히 아이돌 가수 출신 연기자들에게 대중들은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최근 <무릎팍도사>에서 눈물을 보인 것도 그런 배경에서 얻은 상처란 생각이 든다. 대중들의 손가락질이 거셀수록 스스로 연기를 잘해나가야 한다는 책임이나 강박도 커질 거다.
예전엔 나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싶고 인정받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컸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연기가 정말 좋아지고 내가 연기를 할 수 있는 환경 자체에 감사를 느끼게 됐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날 보시는 분들도 약간 변화된 느낌이 보인다고 하시는 것 같다. 그 동안 내가 놓치고 있었던 부분이 이런 마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방영했던 <태양을 삼켜라>가 본인의 8번째 드라마 출연작이었다. 주연 캐릭터를 거듭 맡아오고 있는데 작품의 얼굴로서 전면에 부각되는 게 부담될 때는 없었나?
처음엔 처음이기 때문에 봐주는 게 있지만 한 작품씩 해나가면서부터 대중들의 비판도 더 날카롭고 냉정해지는 게 느껴진다. 그만큼 책임감도 커지는 것 같다. 특히 작품마다 6~70명 정도 인원들의 노고가 담기는데 나 하나 때문에 그 노고가 퇴색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책임감을 느낀다.
그 동안 브라운관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엔 익숙해졌겠지만 스크린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라 생소할 수도 있었을 거다.
일단 감독님께서 미묘한 감정선을 원하셨는데 아무래도 브라운관 연기에 익숙해지다 보니까 그런 연기는 뭔가 부족하거나 심심한 거 같고, 이 정도 표현으로 관객들이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도 약간 들었다. TV같은 경우 마음에 안 들면 채널을 돌릴 수도 있고 이런 저런 다른 일을 하면서 볼 수도 있지만 영화는 일단 스크린 크기도 그렇고 모든 관객들이 스크린에 집착할 수 있는 환경이 되잖아. 그래서 그런 미묘한 감정선도 캐치가 되고 느껴지는 것 같더라. 감독님께서 왜 나에게 저런 밋밋하다 느낄만한 감정선을 요구하셨는지 스크린을 보니까 알게 됐다.
드라마로 배우 경력을 쌓아왔으니 영화 현장은 처음이었다. 준비기간을 비롯해서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었을 텐데 어땠나?
일단 드라마는 엔딩을 모르고, 심지어 다음 회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 채 찍어야 되는 경우가 많아서 놓치고 가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게다가 대중들의 반응은 즉각적이라 배우입장에선 더욱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영화는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하고 계산한 상태에서 들어갈 수 있어서 배우에겐 보다 친절한 작업 현장이 되는 것 같다. 덕분에 내 스스로도 자신감이나 안정감이 있었던 거 같고, 다음 그림을 그리면서 연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더 좋았다.
드라마는 현장 분위기가 상당히 타이트하다. 반면 영화는 좀 더 여유롭게 진행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좀 더 안정된 느낌이 있었을 것 같다.
일단 스태프 분들의 마인드 자체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드라마 같은 경우는 어쩔 수 없는 환경이라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배우가 연기에 집중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 주는 건 의무적이라기 보단 당연시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마인드 자체가 달랐다. 스태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일에 대한 프로의식과 열정을 지닌 것 같다. 그런 부분은 존경하고 본받을만한 점이라 느꼈다.
사실 처음 무대에 섰을 때부터 본인도 프로로 대중 앞에 섰다. 그렇지만 바로 프로로서의 자각이 생겼던 건 아니었을 것 같다.
일단 나는 처음부터 대중들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그런 책임감을 가질 순 있었던 거 같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가수가 자신의 무대를 즐기지 못하고 연기자가 자신의 캐릭터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정말 프로답지 못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책임감이 기쁨이나 즐거움보다 앞서 있었던 거 같아서 그 어린 마음을 생각하면 조금 안타깝게 느껴지는 부분 중 하나다.
그 나이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해야 했던 부분도 많다. 뒤늦게 남는 아쉬움은 없나?
그 당시엔 그게 너무 익숙했고 당연했다. 겁도 많았고, 그냥 당연히 지나가는 게 편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놓치고 간 부분이 많다고 느껴져서 마음이 아픈 순간이 있다. 평범한 삶을 조금 더 즐기고 이 생활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싶기도 하고. 연기자로서도 그런 경험을 남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토끼와 리저드>는 운명적 관계를 되새겨 나가는 남녀의 여정을 그린 영화다. 과거 가수로서 데뷔했고 현재 배우로 활동하는 본인의 인생 속에서 뒤늦게 스스로 운명적이었다 느낄 수 있는 계기나 과정의 순간들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이 그 삶에서 얻은 상처를 견딜 수 있는 힘이 됐을지도 모른다.
포스터에 이런 문구가 있다. ‘사랑보단 상처가 익숙했던 그들, 서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연기를 시작한 이후로 연기가 내게 상처가 되기 시작했고 나의 아킬레스건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어느 순간 내가 연기의 참 맛이나 기쁨을 알게 된 과정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여전히 그걸 알아가는 과정이고 그 과정을 밟아나가면 어느 순간 정점에 이르는 시기가 오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은 이런 과정이 힘들다기 보단 오히려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면이 더 많아진 거 같다.
“왜 내가 네 손을 잡았는지 이제 알 것 같다”는 은설의 대사처럼 운명이란 뒤늦게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배우로서 살아가는 것도 결과론적으로 본인의 운명인 셈인데 그 상황 속에서 어떤 목표의식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신에게 연기가 어떤 것이냐, 라는 질문을 받으면 항상 연기는 나에게 운명과도 같은 존재라고 대답했다. 처음엔 정말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 다가왔고 이로 인해 이런 저런 시련을 받았기 때문에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벗어날 수 없게끔 상황이 이어졌다. 이젠 그 어떤 것보다 연기를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된 것 같아서 이런 게 운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연기에 대한 기쁨을 알고 내 길이란 확신이 생긴 만큼 내 스스로 연기를 즐기면서 보는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게 목표다.
인기라는 건 마치 때때로 버거워서 버리고 싶지만 결코 버릴 수 없는 메이의 짐과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데뷔 초부터 많은 인기를 누렸던 만큼 그 인기의 허와 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
너무 어린 시절부터,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인기를 얻어서 그런지 그런 인기에 대한 허와 실을 너무 빨리 알게 됐다. 그게 물론 나에게 중요한 건 안다. 다만 그게 삶의 목표가 되면 안 된다. 나한테 따라와주면 좋지만 따라와주지 못해도 너무 낙심할 일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연극영화학과에 진학했는데 원래부터 염두에 둔 선택이었나, 아니면 입시적 진로를 앞두고 결정한 문제였나.
솔직히 그 당시엔 학교에서 그때 내가 하던 것과 다른 부분을 배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너무 다른 분야를 배우는 건 쉬운 게 아니니까 연극영화과를 선택하게 됐다. 그런데 사실 학교를 갈 수 있는 기회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체계적인 공부도 하지 못했고 그런 부분을 놓치고 가야 했던 건 안타깝게 생각한다.
아무래도 현장에서 얻은 경험이 본인에게 실질적인 연기적 수업이 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만큼의 시행착오도 겪어왔을 텐데,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설 때 기분은 어땠나?
아마 카메라에 대한 공포가 없고 오히려 친밀감이 있다는 게 가수 출신 연기자의 장점이 아닐까. 반대로 우리 식구든, 멤버든, 매니저든, 익숙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해왔던 내가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수십 명의 스태프들과 몇 달간 동거 동락하듯 지내야 하고 그 기간 동안 생기는 다양한 트러블에 적응해야 했기 때문에 낯설고 힘들었다. 게다가 짧은 순간의 무대 공연에 익숙해 있던 내게 긴 호흡의 연기는 낯설고 힘든 일이기도 했다.
무대에선 짧은 순간에 에너지를 폭발시키면 되지만 현장에서는 에너지를 배분해서 끊임없이 방전과 충전을 거듭해야 한다.
가수가 무대에 서는 게 100m 달리기라면 연기는 마라톤 같은 느낌이다. 그땐 에너지를 배분하는 법에 익숙하지도 못했고 서툴렀다. 그래서 연기적으로도 들쑥날쑥 하고 논란의 여지가 생긴 거 같다. 기존에 그런 걸 배우고 어느 정도 인지가 된 상태에서 시작한 게 아니었던 만큼 하나하나 경험하면서 터득해 나가는 과정이다 보니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핑클’ 시절 덕분에 여전히 ‘요정’소리를 많이 들을 것 같다. (웃음) 그런 말이 지금의 당신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하나?
그 당시에 우리가 그렇게 불려졌다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론 아련한 추억이 되는 거 같다. 재미있다, 그냥. (웃음)
‘핑클’은 이제 당신의 삶에서 과거형이다. 그럼에도 당신의 현재를 말할 땐 항상 핑클이라는 과거에서 시작된다.
‘핑클’이 큰 존재였구나, 라는 걸 알게 되고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사실 예전에는 벗어나고 싶은 굴레였지만 지금은 ‘핑클’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감사한다. 덕분에 이제 ‘핑클’ 때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픈 욕심을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가수 생활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활동을 그만 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나?
핑클 활동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고, 가수 출신 연기자로서 끊임없이 비난을 받을 때마다 그런 고비가 있었다.
대중들의 비난에 항상 대응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심경을 토로하는 것도 간혹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최근에 <무릎팍도사>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는데 어쩌면 본인에게 비난을 던진 불특정다수의 사람들 중 그 영상을 통해 미안함을 품었던 이들도 있을 거다. 일일이 항변하거나 변명할 순 없지만 진심을 드러내는 것이 때때론 좋은 소통 방식이 될 때가 있는 것 같다.
한 번은 내가 아는 지인 분에게 이런 얘기들에 대해서 다 해명하고 싶다, 그랬더니 그 분이 저에게 말씀해주시더라. “이 직업을 가진 이상,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이슈가 되거나, 오해를 받을 수 있는 환경에 노출돼 살아야 한다. 그런 오해와 구설수와 각종 루머에 대해서 네가 모두 하나하나 해명할 수 있다면 지금부터 시작해라. 그러나 네가 해명하지 못한 그런 루머나 오해들은 사실이 돼버린다. 어떤 것을 선택할 거냐.” 내게 온 국민의 오해와 루머를 하나하나 해명할 능력은 없다. 그래서 때로는 침묵하는 법도 배워야 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진실은 분명 밝혀지는 것 같다. 만약 기회가 돼서 해명할 기회가 되면 해명할 수도 있고. 그리고 이젠 그런 지혜가 약간 생긴 것 같다.
‘핑클’ 시절 함께 활동했던 다른 멤버들도 다양한 분야에서 제각각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함께 활동을 시작했던 시절로부터 10년 정도 세월이 지났는데 지금 어떤 감회라 할만한 게 있을까?
항상 넷이었다가 혼자가 됐을 때는 각자 본인의 분야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치열하게 고군분투했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은 저마다 본인의 분야를 즐길 줄 아는 여유가 보이는 것 같고, 각자 분야에서 다들 인정받고 있는 거 같아서 좋다. 내가 제일 어려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자매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언니들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잘 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요즘 새로운 10대 아이돌 그룹이 많은데 그런 후배들을 보면서 예전 생각을 할 때는 없나?
나는 그 당시에 우리 팬들이 우리 노래나 이미지를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를 좋아한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그 어린 친구들을 보면서 단지 어리다는 것만으로도 신선하고 예쁜 매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물론 각자 개성도 뚜렷하고 재능도 뛰어나지만 그 나이 또래들만 누릴 수 있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어린 시절에 저런 모습이었을까, 생각하게 되면 새롭고 신기하고 그렇다. (웃음)
<토끼와 리저드>는 뒤늦게 찾은 운명적 상대에 대한 멜로다. 이제 데뷔 초에 비해 사랑에 대한 관념도 보다 깊어질 나이로 들어섰는데 운명적인 대상을 찾을 것까진 없겠지만, (웃음) 연애나 결혼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접근해 볼만한 나이가 됐다.
어릴 때부터 너무 특수한 환경 속에서 살아와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평범함을 추구하는 것 같다. 평범하게 사랑하고, 평범하게 만나고, 평범하게 살고 싶은, 그런 소망이 있다.
<황태자의 첫사랑>에서 차태현 씨와 호흡을 맞췄다. <토끼와 리저드>에서도 차태현 씨가 출연하는데 본인과 호흡을 맞추는 신이 없어서 마주칠만한 일도 적었을 것 같다.
사실 포장마차 신에서 같이 나오는 장면이 있었는데 감독님께서 은설과 메이의 감정에 몰입하고 싶으시다고 편집하셨다. (웃음)
지난 작품에 함께 출연했던 배우를 새로운 작품에서 만나는 건 본인에게 몇 안 되는 경험이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 만났다는 점도 특별한 감상을 주지 않던가?
20대 중반의 내가 만난 태현 오빠와 서른을 바라보는 지금의 내가 바라보는 태현 오빠는 참 많이 다른 사람 같더라. 그리고 태현 오빠도 이제 결혼했고 아이도 있는 만큼 보다 성숙한 느낌이 드니까 새롭기도 하고 그만큼 정감도 갔다.
방금 말한 대로 서른을 앞둔 나이인데 그만큼의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할 것 같다.
일단 20대엔 이런 저런 갈등이나 시련이 많았고 내 스스로 내 자신의 중심을 잘 세우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게 20대 때 겪어야 할 과정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어떤 목표가 생기고 중심이 잡힌다고 느껴지니까 오히려 30대가 좀 더 기대된다. 그 목표에 얼마나 근접할 수 있을까라는 기대감이랄까.
최근에 한 다른 인터뷰에서 장혁 씨가 성유리 씨를 교양 있는 여자라고 했더라.
(웃음) 워낙 장혁 씨가 교양이 있으셔서 나도 거기 발 맞추어 그런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노력했을 뿐인데. 동적인 부분보단 정적인 부분이 많이 보여서 그런 게 아닐까.
사실 아이돌 가수 출신이라 발랄하고 활발한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거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의외란 말을 많이 듣게 되진 않았을까.
요즘 인터뷰하면서 많이 느끼는 건 내가 되게 발랄하고 활발한 이미지로 많이 생각된다는 점이다. 내 스스로는 내가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드렸다는 점이 새로웠다.
메이의 히스테릭한 모습만 걷어내면 본인과 많이 닮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익숙한 감정이라 오히려 편하게 봤는데 보신 분들은 색다르게 보시더라. 이런 부분이 내겐 강점이 될 수 있겠구나 느꼈다.
<쾌도 홍길동>이나 몇몇 드라마에서 백치미적 캐릭터를 연기했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로 각인된 부분도 많을 거다. 어쩌면 정작 자신과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캐릭터들을 연기한 셈인데 자신과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기분은 어떤가?
그런데 내 안에 분명히 그런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친한 친구들은 그런 캐릭터들이 평소 생각하는 나와 닮았다는 얘기도 하더라. 상대적으로 어떤 성격이 부각되느냐 차이인 거 같다. 이런 저런 역할을 하다 보면 나도 잊고 있었던 성격들이 나온다. 결국 스스로의 재발견이랄까.
때때로 자신의 연기를 모니터하면서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모습들을 발견하는 순간도 있을 테고.
어제 영화를 세 번째로 봤는데 눈 모양이 신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오는 게 보였다. 각도에 따라서, 아니면 조명에 따라서 그렇기도 하고, 어떨 땐 조금 올라간 눈이 되거나 반대로 내려간 눈이 되기도 하고. 나도 몰랐던 그런 부분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저럴 땐 이렇게 하는 게 좀 이런 감정을 표현하는데 쉽겠구나, 이런 것도 알게 되고.
10년여 동안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으며 살아왔다. 어쩌면 그런 관심 속에서 짓눌리지 않고 살아남는 건 말 그대로 그 삶을 즐길 줄 알 때 가능할 것 같다. 그 삶 자체가 일종의 도피처가 되는 거랄까.
예전엔 사생활을 구속 당하는 느낌이 싫다는 막연한 감정이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내 사생활이라 할만한 게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일상 속의 내 삶은 딱히 스펙터클하지 않고 재미있다기 보단 지루하다. 그런데 연기를 통해 다른 캐릭터로 살아가는 인생의 기쁨을 느꼈기 때문에 이젠 기꺼이 다른 부분의 희생을 받아들일 의향이 생긴 것 같다. 그리고 이젠 마지막까지 지켜내고 싶은 사생활은 어느 정도 지킬 수 있는 노하우도 생긴 것 같아서 그 일상을 절충하는 게 가능한 것 같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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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개봉이다. 기분이 어떤가?
많이 긴장되지. 영화에 대한 반응이 좋지 않아도 문제지만 반응이 너무 좋아도 긴장된다. 최대한 담담해지려고 애쓰는데, 일단 지금은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얼마 전에 하늘 씨랑도 얘기했지만 차라리 개봉해서 1주차가 빨리 지났으면 차라리 좋겠다. 뚜껑은 열어보지도 않았는데 분위기만 좋으니까 이게 오히려 힘들더라.
시험 뒤, 성적표 받기 직전의 기분이겠다.
차라리 빨리 봤으면 좋겠다.
세 번째 영화인데 앞의 두 영화와는 기분이 좀 다르지 않을까. 나름대로 이만큼 넉넉한 규모의 예산을 가지고 촬영에 임한 영화는 처음이지 않나.
아직 상업영화니, 저예산영화니, 그런 차이를 제대로 느껴본 것 같진 않다. 처음 했던 <방문자>는 말 그대로 연기의 ‘연’자도 몰랐을 때 그냥 무작정 했던 영화고, 두 번째인 <영화는 영화다>는 지섭 씨가 3년 만에 복귀하는 상업영화이긴 했지만 김기덕 감독님이 제작자로 나선 영화이기도 했다. 나도 드라마만 하다가 영화로 옮겨 타는 정식 작품이었기 때문에 일단 잘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연기를 잘해야겠다. 내용 자체도 남자끼리 붙는 영화다 보니까 연기가 뒤지면 안 되겠다 싶더라.
드라마로 인지도를 쌓았던 만큼 영화는 일종의 도전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드라마에선 연기력 논란 같은 게 없었는데 영화에서 그런 게 나오면 어떡하나 걱정이 됐다. 캐릭터도 드라마와 완전히 상반된 캐릭터였기 때문에 무조건 잘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촬영을 끝내고 나서 분에 넘치는 상도 많이 받았지만 그런 긴장감이 강했기 때문에 개운한 느낌이 없었다고 할까. 카메라 앞에서 떨었던 생각밖에 나지 않고, 상은 다 남들 때문에 받았던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 느낌을 좀 덜어버릴 수 있는 뭔가를 빨리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는데 그게 <7급 공무원>이 됐다.
아까 카메라 앞에서 긴장됐다고 했는데 작품을 거칠수록 그 역시 많이 경감돼 간다는 걸 느끼지 않나. 혹은 어떤 작품이 한 순간 그런 계기가 됐을 수도 있고.
어느 순간 한 작품 찍고 나니까 확 편해졌다고 할 수는 없다. 말 그대로 매번 여러 작품을 하게 되면서 경험적으로 조금씩 바뀌는 거 같다. 계속 한 작품 해나갈 때마다 전 작품보다는 나아지는 건 맞다.
<영화는 영화다>에서 수타는 거칠고 남성적인 역할이라서 기존에 맡았던 캐릭터와 대비되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런 이미지를 연출한다는 것 자체에서 오는 쾌감이 있진 않았나?
그런 걸 느끼기엔 시간적으로나 많은 여건들이 너무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준비가 잘된 여유 있는 상태에서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거라면 신인상 받을 때 눈물이라도 흘렸을 텐데, 오히려 반대로 연기를 하는 도중에도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맞는 건지도 모르면서 조바심 내고 경직된 느낌이 강했다. 오히려 이제 <7급 공무원>으로 하고 싶은 걸 했다는 기분이 들어서 오히려 지금 시원하다. 이제는 영화 카메라 앞에서 떨지도 않을뿐더러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냈기 때문에 지금이 오히려 좀 시원해진 거 같다.
이재준이 손바닥을 오므렸다 폈다 하는 동작이 재미있더라. 그 외에도 캐릭터의 소심함을 대변하는 작은 동작들이 많았는데 그런 디테일한 설정은 직접 생각해 낸 건가?
맞다. 내가 다 만들었다. 이번 영화에서 대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60%면, 현장 애드립이나 분위기 파악하는 게 거의 3~40% 됐을 정도로 연구를 많이 해갔다.
원래부터 캐릭터의 디테일을 많이 설정하는 편인가?
특유의 손동작을 비롯한 애드립은 드라마에서부터 조금씩 해왔다. 그게 대본을 받아서 연기하는 주연배우의 의무라고 내 나름대로 생각한다. 작가가 쓴 대본을 대사로 받아들여서 읽기만 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뭔가 조금이라도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나 스스로가 그런 작업을 즐긴다. 나를 거쳐간 대본에 새로운 디테일을 가미하는 걸 개인 자신만의 연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성룡 영화 끝에 나오는 NG장면이나 오우삼 영화에서 매번 나오는 비둘기처럼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을만한.
방금 성룡과 오우삼을 말했는데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편인가?
액션 영화는 원래 좋아하지만 그보단 기존의 성룡이란 배우를 많이 좋아한다.
타격감이 느껴지는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편인가 보다.
아니, 그런 것과는 좀 다른 차원이다. 정말 어려서부터 성룡영화를 봤지만 단 한번도 재미없다고 느꼈던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성룡영화가 나에게 꿈과 희망이나 어떤 메시지를 줬다고 할 순 있는 부분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극장에서든 TV로든, 영화를 보는 2시간 동안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영화에 빠져서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는 그래야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드라마도 그렇고. 장르라던가 영화적 특성상 무언가 메시지를 담는 것도 좋지만 가장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서 선택한 영화는 말 그대로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7급 공무원>도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과 용기를 주는 영화라고 말은 못하겠다. 하지만 나는 <7급 공무원>이 말 그대로 편하게 웃으면서 즐길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서 찍었고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인 거 같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영화다.
사실 <7급 공무원>이 스토리가 훌륭한 영화는 아니지만 코미디로서의 장점이 그런 단점을 상쇄할만큰 탁월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코미디를 간과한 채 스토리를 지적하고 물고 늘어진다면 영화 대사처럼 ‘장난 한번 치니까 죽자고 덤벼드는’ 꼴이 될 거다. (웃음) 나는 일반관객과 함께 이 영화를 봤는데 관객반응이 상당히 좋다고 느꼈다. 일반시사에서 무대인사도 몇 번 한 걸로 아는데 혹시 상영관 분위기를 훔쳐본 적은 없나?
일단 여러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두 번 정도 봤다. 제일 처음에 했던 기술시사에서 스태프들과 같이 한번 봤는데 이게 웃어야 하는 영화임에도 반응이 너무 없어서 그 당시에 완전히 충격을 먹었었다. 그런데 다음날 신림동에서 이벤트 시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신림동까지 모자를 뒤집어 쓰고 갔었다. 거기서 조금 안심이 되더라. 다시는 죽어도 기술시사엔 안 가야지. (웃음)
왜 그렇게 다들 무덤덤했을까.
다들 아는 내용이기도 하고. 배우가 처음 영화 보면 자기 연기부터 보듯이 조명은 조명보고, 분장은 분장보고, 그렇게 관점포인트가 다르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런 광경을 처음 봤으니까 너무나 충격을 받아서 당시엔 밤에 잠도 못 잤다. (웃음)
이런 코미디 영화를 봐주는 관객이 웃지 않는다면 배우입장에서는 당연히 긴장되겠다.
배우는 관객들에게 보여지기 위해 연기를 하는데 그에 대한 반응이 냉담하면 작업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이겠지.
드라마부터 영화까지 줄곧 주연을 맡아왔다. 나름대로 입지를 다지는데 성공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주연이라면 작품 자체의 얼굴이니만큼 부담되는 부분도 없지 않을 거다. 그런 부담감에서 자유로운 편인가?
나는 엄청 심하다. 드라마 할 당시만 해도 시청률에 엄청 민감했거든. 아까 얘기했던 것과 좀 겹치는 부분이지만 말 그대로 사람들이 봐주라고 연기하는데 안 봐줘서 시청률이 낮으면 그것만큼 힘든 일이 없다. 그렇게 되면 일차적으로 떠오르는 게, ‘내가 연기를 못해서 그러나’, 아니면 ‘내가 스타가 아니라서 인지도나 없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닌가’,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예전에 아침드라마 할 땐, 방송 나간 다음날 아침 6시, 7시부터 ‘TNS’사이트 들락날락 거리면서 시청률을 확인할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썼다. 게다가 난 드라마 같은 경우 매번 운 없게도 30%넘는 드라마들하고 계속 같이 붙었다. <황진이>, <쩐의전쟁>, <뉴하트>, 다 30%넘은 드라마거든. 우리 드라마가 상도 많이 받고 절대 나쁜 작품이 아니었는데 매번 빛을 못 봤다. 특히 미니시리즈 같은 경우는 거의 밤을 새고 고생해서 찍는데 반응이 없으면 미친다. 뭐라고 말로 하기엔 그런 게 너무 힘들지.
작품에 대한 자부심이 크지만 성적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에 더 마음이 안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많이 안 좋지. 그런 상대적 박탈감으로 유독 힘들었지만 다행히도 <영화는 영화다>를 하면서 짐을 벗을 수 있었던 거 같다. 물론 <영화는 영화다> 하나뿐이라 이런 말이 우습긴 하지만 지금 <7급 공무원>반응이 좋다 보니까 그런 답답한 징크스를 한번 더 시원하게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바람이 큰 게 사실이다.
첫 영화가 신동일 감독의 <방문자>였다. 사실 국내에서 개봉이 불투명한 저예산 영화이기도 했고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없었나?
그 당시는 내가 뮤지컬을 끝낸 뒤 아침 드라마 같은 작품에서 조연이나 단역을 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그 뒤로 찾아주는 이도 없고, 일이 없더라. 오히려 조금 연기 맛을 보고 좀 더 해보고 싶어질 때부터 일이 끊기니까 그게 너무 힘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방문자>를 시작하게 됐을 당시에 연기에 대해서 고뇌했던 건 아니었다. 몇 개월 동안 일거리도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을 때 그저 주인공 오디션이란 말에 혹해서 오디션을 보러 갔었다. 내용 자체도 ‘여호와의 증인’이란 종교적 소재를 다룬다니 이게 재미있다고 느꼈겠나. 사실 처음엔 대본 내용도 잘 모르고 영화에 대해서 정말 아무 것도 몰랐다. 그냥 단지 주인공이란 단어 하나 때문에 연기가 하고 싶었고, 카메라 앞에 서고 싶었지. 처음엔 그런 좋지 않은 의도로 시작했다. 하지만 작업을 하게 되면서 나중엔 좀 변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대본을 열심히 파면서 연기하게 됐고 덕분에 <방문자> 막바지에 있었던 <굳세어라 금순아> 오디션도 통과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결과적으로 나에겐 좋은 작품이었던 셈이다.
배우로서 연기 욕심이 앞선다는 건 부끄러운 일은 아닐 거다. 그런 욕심이 자신에게 있어서 어떤 자양분을 얻는 계기가 됐으니까 결과적으론 양화라고 봐야지. 그런데 최근 몇몇 인터뷰를 보니 배우 이전에 특이한 경력이 있다고 밝혔더라. 우여곡절 끝에 회사에 입사했고, 전공도 그래픽 분야던데, 연기를 생각한 계기는 뭔가?
아버지께서 영화를 좋아하셔서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되게 많이 봤다. 교인들이 일요일에 교회 나가는 것처럼 나는 당연히 일요일은 극장가는 날인지 알았다. 아버지께서 항상 동네에 있는 동시상영극장에 가셨는데 아들이 하나뿐이다 보니까 항상 데리고 가셨지. 그렇게 자연스럽게 영화를 접했다. 사춘기 때는 멋있는 장면이나 여배우와의 키스 씬을 보면서 나도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곤 했다. 그런데 영화를 좋아하는 집안 분위기에 노출돼있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없어지지 않더라.
아버지께서 아들이 배우라는 사실을 좋아하시겠다.
많이 좋아하시고 뿌듯해하신다.
배우로서의 진로를 구체적으로 계획하게 된 건 언제인가?
군대 있을 때 생각했다. 뭔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봐야 나중에 나이를 먹고 그래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 군대에서 인생설계를 하면서 확고하게 정리가 됐다. 서른이 되게 전까지 20대를 내 꿈에 투자해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뮤지컬을 통해 데뷔했고, 드라마로 이름을 알렸다. 지금은 영화를 통해 인지도를 넓히는 중이다. 연기를 꿈꾸게 만든 계기가 영화였던 만큼 영화에 애착이 있을 것 같다.
뭐, 그런 건 없다. 그냥 중요한 건 배우, 연기였다. 지금 와서도 느끼는 건 드라마나 영화나 다양한 장르를 겪어보니까 작업환경이나 찍고 나서의 분위기만 다를 뿐이더라. 물론 영화 두 작품 해놓고 영화에 대해서 뭘 안다고 말할 수 있겠나. 단지 그냥 카메라 앞에 설 땐 마찬가지로 처음엔 항상 떨렸던 거 같다.
드라마와 영화는 제작 과정의 차이보다도 결과물의 감상 방식에 따른 차이가 두 매체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만든다. 영화는 아무래도 스크린으로 보는 만큼 브라운관을 통해서 자기 얼굴을 인식하게 되는 드라마와 판이한 감상을 줄 것 같다.
처음엔 짜릿했지. 솔직히 이런 느낌을 알게 된 건 <방문자>때보단 <영화는 영화다>기술시사에서였다. 스크린을 보는 동시에 웅장한 사운드가 들리는데 정말 짜릿했다. TV브라운관을 통해서 내 연기를 볼 때는 다른 집에 있는 사람들이 내 작품을 어떻게 보는지 모른다. 그런데 극장에선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웃음소리나 숨소리를 느끼면서 볼 수 있다는 게 정말 엄청난 매력인 거 같다.
자신이 만든 결과물에 대한 누군가의 반응을 살핀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는 일이 될 거 같다. 그런데 최근 인터뷰 기사에서 아나운서 양성 학원에 다닌다는 말을 했더라. 목소리에 대한 문제라도 느낀 건가?
드라마 할 때는 전혀 못 느꼈지만 <영화를 영화다>를 하고 나니까 발음이나 목소리 톤에 대한 지적이 조금씩 들렸다. 물론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으려 한다. 하지만 내게 시간이 있을 때 그런 부분을 조금만 보완하면 오히려 그런 측면을 내 장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래서 먼저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공부를 하게 됐다.
종종 대사를 할 때 목소리 톤이 급격한 하이톤으로 올라간다고 느껴지긴 하더라.
사람 목소리가 다 똑같을 순 없다. 물론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원하는 연기나 발음, 발성은 당연히 중요하지. 그런데 사람의 감정이 올라가다 보면 말 그대로 목소리가 갈라질 수도 있지 않나. 특히 연기를 표현함에 있어서 그런 부분이 자연스러움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모든 발음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게 연기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처음엔 목소리 기본톤이 하이톤이라서 내가 잘못된 건 줄 알고 무조건 고치려고 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신 시청자나 관객들이 그 의사만 제대로 알 수만 있을 만큼 너무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연기할 수 있으면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발음이나 발성이 좋은 ‘FM(Field Manual)’연기자도 많겠지. 나는 내 연기가 ‘AM’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많은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많은 종류의 배우도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많은 분들께서 지적해주시는 게 있고 그걸 내가 고치거나 다듬을 수 있다면 다음 작품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겠지. 딱 그 정도까지만 생각하려고 한다.
일단 대화를 나눠보니 당신이 상당히 조심스러운 사람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당신이 연기한 캐릭터들은 때때로 과감하다. <7급 공무원>의 재준은 소심한 듯 고집이 세고, <영화는 영화다>의 수타는 건방지고 자존심이 세다. 드라마에서는 때때로 뺀질거리는 캐릭터를 보여주기도 했다. 연기를 통해서 가끔씩 자신도 모르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경우를 느낀 적은 없나?
그러니까 ‘나에게 이런 면이?’ 이런 거다. 덕분에 내게도 배우의 피가 흐른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 같고. 물론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부분이 쉽게 보이는 대본이 잘 읽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배우는 연기변신이 필요하니까 쉽지 않을 것 같은 생소한 캐릭터에 도전하기도 하는데 솔직히 그만큼 겁도 난다. ‘내가 과연 이걸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막상 하면 하게 된다. 그러면서 내 자신에게 놀라기도 하고, 그런 매력 때문에 이 일을 놓을 수 없게 되는 거 같다. 오히려 같은 것만 계속 하면 물리겠지. 매번 작품을 선택할 때 저번엔 이런 역할을 했으니까 이번엔 다른 느낌을 얻을 만한 캐릭터를 선택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겁도 나지만 그걸 즐길 수 있는 거 같다.
<7급 공무원>은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서 배워야 되는 것도 많았을 거 같다. 펜싱을 하기도 하고, 말을 타기도 하고, 심지어 총 잡는 법이라도 익혀야 할 것 같고.
오히려 나는 다 배우지 않았다. 수지는 베테랑 요원이기 때문에 뭐든 잘해야 되니까 배우는 게 맞는데 재준은 뭐든 의욕만 앞서고 서툴러야 하니까 어설픈 그대로 보여주는 게 재준의 모습이라 생각해서 오히려 일부로 배우거나 연습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그 촬영장에서 타게 될 말이나 오토바이는 일단 연기를 위해서 경험만 해보는 정도로 타기만 해봤지. 그래서 많은 분들이 불안하다고 연습 좀 해야 되지 않냐고 하긴 했다. 그런데 일단 처음에 한번 접해보면 내가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느껴지지 않나. 한번 해보니까 현장에서 어설픈 상태로 어느 정도 가능할 것 같아서 일부로 배우지 않았다.
말 타는 장면의 어설픔은 연기가 아니었던 건가. (웃음) 나름대로 실제적인 캐릭터에 접근하려고 노력하나 보다.
어떤 캐릭터라도 그 인물의 희로애락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로 디테일한 작업을 하는 편이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에게 착한 부분이 1%라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까지 살리려고 노력하고 싶다.
캐릭터의 희로애락은 표현하려 애쓰는 만큼 본인의 희로애락도 잘 챙기는 편인가?
글쎄. 정작 나는 잘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마 그렇게 연기로나마 뭔가를 표현하려고 하는 게 아닐까.
<7급 공무원>의 이재준은 자신의 애인에게조차 신분을 속이며 살아야 한다. 반대로 자신은 연예인으로서 신분을 노출하고 살아야 되는 처지다.
개의치 않으려고 많이 노력하는 편이다. 내가 예능 출연을 하고 싶지 않은 건 일단 연기자로서 자기가 맡은 바만 잘하면 되지, 그런 곳에서 사생활까지 말해가며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받을수록 인기가 올라가지만 너무 사소한 거 하나까지도 노출되고, 전혀 뜻하지 않은 구설수까지 생기니까. 어떤 분들은 그런 게 다 관심의 표현이라고 말씀하시고 그만큼 좋은 점도 있지만 그런 덕분에 힘든 부분도 많다. 내 위치가 조금씩 올라갈수록 자유롭던 활동범위가 예전보다 점점 좁아진다는 걸 느낀다. 그러면서 이젠 밖에 노출되는 것도 최대한 자제해야 되고, 뭔가를 많이 해보거나 즐겨야 할 시기에 집에 혼자 있는 내 자신을 보면서 내가 꿈을 위해서 한 걸음씩 다가서는 건 맞지만 이렇게 사는 게 내 삶이 맞긴 맞는 건지 스스로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연기를 그만 두지 않는 이상 스스로 극복해내야 할 수 밖에 없다.
말 그대로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으니까 조금이나마 더 좋은 점을 찾으려고 노력해야지. 어쩔 수 없는 직업 특성상 많은 관심을 필요로 하는 만큼 책임져야 할 부분들이 많이 늘었다는 건 감내해야 할 사실이니까 원치 않았다 해도 내가 하는 일을 위해선 조금이라도 여유를 가지려고 한다. 이왕 오픈해야 되는 부분이라면 최대한 재미있게 즐겨보려고 노력하는 쪽으로 많이 바뀌는 거 같다.
그 동안 많은 여배우와 호흡을 맞춰왔다. <7급 공무원>에서 호흡을 맞춘 김하늘 씨는 예전에 미니시리즈 <90일, 사랑할 시간>를 함께 하며 이미 한차례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다. 예전에 함께 작품을 했던 상대를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확실히 편하지 않던가?
일단 상대방의 대사톤이 어떤 스타일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대본을 읽는 것부터 편하다. 그리고 리액션의 연기라고도 하듯이 상대방이 연기를 잘하면 내 부족한 부분까지 채워지고 내 연기에도 시너지 효과가 난다. 일단 김하늘 씨가 캐스팅됐다고 하길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단 안심했다. ‘김하늘’하면 이미 연기적으로 인정받은 배우니까. 두 번째는, 연기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하는 거니 처음엔 어색함이 있다. 그만큼 교감을 위해서 친해져야 한다. 그러려면 밥도 먹어야 되고, 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게 잘 안되면 연기할 때, 이 사람이 어떤 톤으로 준비해왔을까 궁금해도 물어보기조차 어렵게 된다. 그런데 하늘 씨와는 워낙 잘 아는 사이다 보니까 그런 과정을 몽땅 다 들어낼 수 있었다. 처음 만나자 마자, “내일 시간 돼? 대사 한번 맞춰보자.” 이런 말이 바로 나오는 거지. 그런 시간들이 축소되면서 조금 더 빨리 연기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당신과 김하늘 씨가 영화의 에이스라면 류승룡 씨와 장영남 씨는 조커와 같다. 조연배우들의 뒷받침이 그만큼 효과적이고, 안정적이었다.
류승룡 선배님과는 함께 붙어서 연기하는 경우가 많아서 많은 걸 느낄 수 있었다. 무전기로 대화하는 장면 같은 경우는 내 분량을 먼저 다 찍은 걸 선배님이 보고 거기에 맞춰서 연기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서로 연기를 맞춰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래서 본인이 준비해온 것들이 있더라도 그것들을 정해진 상황에 맞춰서 어쩔 수 없이 바꿔야 하는 경우도 많았을 텐데, 그럼에도 내 연기에 맞춰서 그 상황을 너무나 맛깔스럽게 살려주셨다. 주인공이 나오지 않는 씬에서 재미있는 톤이 이어진 건 다 선배들 덕분이었던 거 같다.
이재준은 상당히 고집이 센 캐릭터다. 상관에게 노트북 비밀번호도 절대 안 알려준다. (웃음) 그리고 <영화는 영화다>의 수타는 상당히 자존심이 센 캐릭터다. 재준과 수타는 그만큼 자기 욕심이 강한 캐릭터다. 당신도 어떤 욕심을 갖고 사는 사람인가?
욕심이라기 보단 목표를 위해 가는 사람이라고 하고 싶다. 쉽게 얘기해서 지금 내 위치는 주연배우를 맡고 있긴 하지만 톱스타도 아니고, 톱스타와 주연 사이에 있는 애매한 위치라고 생각한다. 연기나 스타성을 모두 지닌, 말 그대로 정상의 톱배우를 목표로 두고 있는 건 맞다. 이왕 연기자로 사는 거 당연히 정상에 서고 싶지. 정상을 판단하는 척도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나는 아직 내가 생각하는 수준에 못 다다랐기 때문에 그만큼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25살에 데뷔했으니 요즘 연기자들에 비해서 빠른 데뷔는 아니다. 어떤 불안함은 없었나?
있었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당시에 이미 계획이 있었는데, 서른 되기 전에 자리를 못 잡으면 연기를 그만 둬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대신 인생을 걸고 한번 해보는 것이니만큼 내 20대를 다 바쳐서 내 꿈을 펼쳐보자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나니까 서른이란 나이는 가까이 오는데 돈 한 푼도 벌지 못하고, 친구들은 다 하나씩 자리잡아가는데 난 앞날에 빛이 없고, 정답을 가르쳐주거나 어떤 얘기도 해주는 사람 없이 모든 걸 다 혼자 해야 된다는 걸 느껴서 정말 힘들었다. 다행히도 스물 아홉에 했던 <굳세어라 금순아>가 잘돼서 연기를 계속 할 수 있게 됐지만 그 당시 스물아홉이라는 나이를 앞두고 얼마나 많이 불안했겠나. 결과적으로 지금에 와서 잘 됐지만 중간에 정말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많았다. 막상 서른이 되면 어떻게 할까 고민도 됐고. 20대를 다 바쳐서 여기까지 왔는데 막상 계획대로 버리고 가자니 20대가 아깝지 않을까 싶은 거지.
서른이 넘었는데도 아직 연기를 하고 있으니 일단 성공한 셈이다.
일단 그런 셈이지. 하지만 지금부터 또 잘해야 된다. 꿈을 갖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다들 그렇듯이.
스스로 긍정적인 편인가?
글쎄, 그건 모르겠는데. 그건 아닌 거 같다.
근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예전에 회사에 입사해서 쓰레기통을 비웠다는 일화가 등장하던데, 그런 걸 보면 조금 무모할 정도로 용감한 면이 있는 거 같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단지 뭔가 해야 될 목적이 정해지면 거기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려고 조금 노력하는 편인 거 같다. 그리고 아까 말했던 것처럼 모르면 용감해진다. 회사 들어갈 때도 아무 것도 모르니까 제대로 내밀 학력도 없이 일단 날 써보라고 했던 거고, 심지어 뮤지컬 오디션 볼 때도 그랬다. 말 그대로 모르면 용감하다. 대신 또 하라면 절대 못하지. (웃음)
이제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으니까. (웃음) 사실 요즘은 연기를 전공하는 배우도 많은데 본인은 연기를 전공한 것도 아니었다.
연기학원도 다니긴 다녔었다. 하지만 내가 느낀 건 아무리 강의를 듣고 뭘 하는 것보단 현장에서 단역으로라도 대사 한마디 해보는 게 더 낫다는 거다. 이건 내가 나름대로 일궈낸 진리다.
지금까지 당신을 연기자로 키운 건 팔 할이 생활력이었나 보다. (웃음)
그러니까 못하면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지. 일일드라마하던 당시에도 잘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던 것처럼, 못하니까 열심히 해야 하는 것 같고, 모르면 용감한 거 같다. 만약에 내가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하거나 얼굴이 정말 꽃미남이라면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 그런데 내 생각엔 내가 뭔가 어정쩡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걸 다 완벽하게 메우기 위해서 더 열심히 하는 거고, 이런 성격이 장점으로 작용이 되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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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저널리스트 &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 13인의 감독 인터뷰집 <어제의 영화. 오늘의 감독. 내일의 대화.>를 썼습니다. mingun@nate.com by 민용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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