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연이 처음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 건 1997년, <접속>을 통해서였다. 그녀가 <밀양>으로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건 2007년이었다. 정확히 10년 만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라는 빤한 수사의 진짜 주인이 된 게 말이다. 그녀는 그저 묵묵히 한발한발 작품을 내디디며 오늘에 다다랐다. 그녀가 또 한번 발을 내딛는다. <카운트다운>으로, 전도연이 돌아왔다.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이전에도 전도연은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다. 그녀는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누비며 자신의 스펙트럼을 넓혀나갔다. 백지처럼, 캐릭터의 색을 입었고, 리트머스처럼, 작품에 스며들었다. 그녀가 시작부터 자각이 뚜렷한 배우는 아니었다. “그냥 어리다 보니까 호기심이 많았을 뿐이죠. 처음부터 의식을 갖고 연기한 건 아니었어요.” 그녀를 각성시킨 건 <해피엔드>(1999)였다. <해피엔드>는 파격적인 노출신과 베드신을 요구하는 작품이었다. <접속>(1997)과 <약속>(1998)의 연이은 성공과 <내 마음의 풍경>(1999)으로 좋은 연기적 평가를 얻었던 여배우가 선뜻 집어들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다. “그런 결정을 하려면 제 자신을 납득시켜야 하잖아요. 남들 시선보단 내가 원하는 것에 더욱 귀를 기울기게 된 시기였죠.” 그녀는 표현의 한계를 부수고, 연기적인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임을 알았다. 결국 선택했고, 해냈다.
“언제부턴가 우등생처럼 빤하게 1등 해서 상 받는 게 당연한 배우로 여겨진 것 같아요.” 전도연에게 <밀양>(2007)은 ‘그런 빤함을 뒤엎어주는 작품’이었다. “너 연기 잘하는데, 그냥 연기를 잘 해.” 이창동 감독의 말은 전도연에게 ‘정곡을 찔리는 기분’을 안겼다. 당시 <너는 내 운명>(2005)으로 비평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전도연은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여배우였다. 이창동은 그런 그녀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다. 흠잡을 곳 없는 ‘정석적인 배우’ 전도연에게 그 이상의 연기를 요구했다. 그녀는 촬영 내내 온갖 의심에 시달렸다. 결과적으로 칸의 여왕이라는 수식어와 온갖 상찬이 뒤따랐다. 하지만 정작 스스로에게는 떨떠름한 일이었다. “뭔가 스스로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결국 제 자리였어요. 진짜로 달라졌다고 생각하면 나만의 비법을 가진 것처럼 잘난 척도 해보고 싶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니까요. 정말 모르겠어요.”
충무로는 여배우에게 척박한 땅이다.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전달받기란 드문 일이다. 그만큼 경쟁도 치열하다. 실력으로 우위를 점할 수 밖에 없다. 전도연은 작품 작업 중에는 다른 시나리오를 보지 않는다. 밀양에서 <멋진 하루>(2008)에 대한 제의를 받은 전도연은 서울에서 시나리오를 보고 작품을 결정하기로 했다. 비로소 모든 촬영이 끝났다. 그녀는 서울로 올라오며 새롭게 쌓여있을 시나리오들을 기대했다. 하지만 매니저가 건넨 시나리오는 단 하나, <멋진 하루>뿐이었다. “만약 시나리오가 별로였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거에요. 그래서 고마웠어요. 제가 좀 더 빨리 차기작을 선택할 수 있게 해줬으니까요.” 언론과 대중은 <멋진 하루>의 전도연을 주목했다. 칸에서의 수상 뒤 첫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욕심은 굉장히 많은데, 꿈이 없어요. 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있는 무엇이잖아요. 전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욕심이 많아요.” 목 아래까지 단추를 채우고 반듯하게 몸을 세운 듯한 <밀양>과 달리 옷을 살짝 풀어헤치고 느슨하게 누워있어도 좋을 것 같은 <멋진 하루>는 보다 여유로워진 전도연의 관록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작품이 끝나면 공허하죠. 무언가에 집중하다가 갑자기 하루 아침에 여운도 없이 끝나버리는 거니까. 돌이켜 보면 이 작품이 정말 마지막인 것처럼 보든 열정을 다 쏟아 부었던 것 같아요. 어쩌면 평소에 열정을 쏟아 넣을만한 게 없어서 그럴지도 몰라요. 결국 남는 건 작품이죠.” 그랬다.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전도연은 작품을 삼키듯이 쉬지 않고 연기해왔다. 결혼을 했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는 과정에서 데뷔 이후로 처음 2년여 간의 공백을 경험한 그녀에게 이제 연기란 무엇일까.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마음 써야 할 게 많아지니 연기가 더욱 절실한 것임을 알게 됐죠.” 그녀의 구미를 당기는 시나리오는 여전히 드물었다. 그 가운데, <하녀>(2010)는 일종의 오아시스였다. 한국영화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김기영의 <하녀>(1960)를 리메이크한 이 작품에서 전도연은 파격의 옷을 가벼운 깃털처럼 걸치듯 연기했다.
허종호 감독의 입봉작 <카운트다운>(2011)에서 팜므파탈의 이미지를 구가하는 전도연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시나리오를 검토했고, 출연을 결정했으며, 제 역할에 정진했다. 최근의 출연작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대중성이 두드러지는 스릴러물에서 전형적인 팜므파탈을 연기한다. 전도연의 변신이라는 수사가 으레 따라왔다. 하지만 그녀는 말한다. “변신을 목적으로 작품을 선택해본 적이 없어요. 그저 인물 안에서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기에 작품을 선택했고 그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죠.” 사람들은 그녀에게 묻곤 했다. 지난 번 그 곳은 험준한 봉우리가 아니었냐고, 완만한 능선이 아니었냐고. 하지만 정작 전도연은 다른 곳에 있었다. “여기 오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저를 내리막길에 내려놓기도 하고, 꼭대기에 올려놓기도 했지만 그건 제 자신과 상관없어요. 저는 항상 평행선을 걸어왔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언제나 일정한 걸음으로 연기적 보폭을 넓혀왔다. 길은 열려 있었고, 그저 걸어왔을 뿐이다. 그렇게 다시, 전도연은 발을 내딛는다. 또 한번 길이 열린다.
101번째 영화, 한국영화계에서 임권택 감독의 위치는 숫자만으로도 명확해진다. 하지만 능선처럼 굽이진 대한민국의 근대사를 돌아온 구도자의 발걸음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영화를 꿈꾸고 있다.
임권택은 영화를 '먹고 살기 위해서'시작했다. 18살의 나이에 기차값만 들고 홀홀단신으로 고향을 등진 소년은 부산에서 노가다판을 전전하며 밥벌이를 했다. 그러다가 인연을 맺게 된 군화장사꾼들이 남긴 군화로 장사판에 뛰어든다. 그리고 서울로 상경한 군화장사꾼들 가운데 영화일을 시작하게 된 몇몇 사람이 임권택을 찾았다. 오랜 전란을 지난 사람들이 황폐해진 마음을 영화로 달래던 시기였고, 영화는 좋은 돈벌이가 됐다. 그렇게 임권택은 또 한번 먹고 살기 위해서 서울행을 택한다.
잡역부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다 연출부 생활을 거쳐 비로소 감독에 데뷔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7년이었다. 1962년, 26살의 나이로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발표하며 첫 삽을 뜬 임권택은 그 뒤로 10년여 동안 50편에 달하는 영화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에 대해 누누이 부끄럽다고 고백하며 51번째 연출작 <잡초>(1973)를 자신의 두 번째 데뷔작이라 말해왔다. “내 자신이 나이 들어가면서 삶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가 되니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단 말이오. 미국 영화의 아류나 다름없는 영화들을 찍어대다가 점점 이러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생계의 수단으로서 영화를 생산해내며 감독이란 직업을 택했던 그가 비로소 자기 세계를 추구하는 예술인의 삶을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로도 부침이 끝난 건 아니었다. “군사정권 때 반공영화, 생활영화를 많이 찍었는데 정권이 원하는 소재를 영화에 담아내면서 마음 속의 걸림 같은 소리가 들렸지요. 정권이 원하는 국책의 지향점을 영화에 담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를 살았을 때의 이야기에요.” 그는 한국 근대사 위로 풍랑처럼 떠밀려 가던 국내 영화계 위에서 자신의 돛을 펴고 표류하듯 나아갔다. 물론 시대의 큰 흐름에서 완벽하게 이탈할 수는 없었지만 <족보>(1978), <짝코>(1980) 등과 같이 훗날 재평가된 수작들이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건 중요한 대목이다. 그리고 한국영화 최초로 베를린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만다라>(1981)는 구도자의 세계관을 지닌 임권택의 내면을 비춘 첫 작품이었다. 이는 한국영화가 세계에 알려지는데 큰 공헌을 남긴 작품으로도 일컬어진다. 국내에서는 에로영화 취급을 받았지만 <씨받이>(1986)의 주연을 맡았던 강수연이 베니스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도 발생했다. 승려들의 반발로 촬영 도중 제작이 무산된 <비구니>의 아픔이 있었지만 임권택은 <아다다>(1987)나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로 구도자의 길을 보다 깊게 모색했다.
<장군의 아들>(1990)로 흥행감독의 대열에 올라선 임권택에게 90년대에서 가장 중요한 이력이 된 건 아무래도 <서편제>(1993)였다. 백만 관객을 동원하며 당대의 ‘국민영화’가 된 이 작품은 그보다도 임권택에게 보다 확실한 길을 열어준 작품이란 점에서 보다 중요하다. <서편제>보다 앞서서 제작됐던 <태백산맥>(1994)이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무산됐다가 문민정부의 출범을 통해 가능해졌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과거 일본 유학 중에 좌익사상을 익혀서 집에 돌아온 삼촌으로 인해 가정이 풍비박산 나는 꼴을 봤던 그에게 이는 큰 시련이었다. “중요한 건 실제로 자기가 인생을 살면서 쌓아가는 직감적인 삶의 체험이고, 또 그런 삶 속에서 생을 바라보는 관점에 철이 들어야 한다는 것이오.” <서편제>는 험난한 근대사의 굴곡을 지나오며 영화적 수난을 감내했던 임권택의 깨달음을 대변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서편제>의 형제나 다름없는 <천년학>(2006)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퇴색되지 않는 장인의 면모를 확실하게 증명한다. 빛을 잃고 득음하게 된 여인의 소리가 논밭으로 변한 포구에 물을 채우고 비상학을 날리는 신비의 선경, 이는 <취화선>(2002)의 칸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만큼이나 값진, 유산과 같은 풍경이다.
“내가 99번째 영화까지 고만고만한 역량을 가지고 찍어왔는데 100번째 영화라 하여 그전보다 더 나은 괜찮은 영화를 만든다는 복안이 있을 턱이 없지 말이오. 그런데 어딜 나가도 100번째라 하니 부담스럽지 않겠소.” 그는 ‘100번째’라는 무거운 기념비를 빨리 내려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임권택 영화다운 것에서 벗어나는 작업”이었던 <달빛 길어올리기>(2011)는 어쩌면 그의 세 번째 데뷔작이라 불려도 좋을 작품이다. 처음으로 디지털 카메라 촬영을 시도한 <달빛 길어올리기>는 한지를 소재로 임권택이 완성한 또 하나의 ‘우리 문화 유산 발굴기’다. 하지만 극영화 속에 소재를 녹인 전작들과 달리 소재에 대한 기록성을 보다 중시한 다큐멘터리적인 요소가 차별성을 이룬다. “나 몰라라 하기에는 너무 소중한 것들이니까요. 그 시대적인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후대의 어떤 이가 나서서 우리뿐만이 아닌 세계 인류에게 다가가게 만드는 일이 생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고. 누군가가 이를 하고 있으면 나도 그만둘 수 있지 않겠소.”
그는 영화를 통해 삶을 꾸려왔다. 그리고 어느 날 감독으로서의 길을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50년 동안 감독으로서 굽이진 세상을 흘러왔다. “찍지 못하는 것보다도, 폐가 될까 걱정이지요. 가령 내가 영화를 찍다가 완성을 못하고 죽거나 갑자기 치매에 걸린다면 감독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임권택은 아직도 생의 끝보다 감독으로서의 끝을 고민한다. 거장, 장인, 거목, 그 거창한 수사들보다도 그에게 어울리는 건 현재형의 시제다. 그는 여전히 마르지 않고 흐르는 강물이다. 현역감독, 임권택은 여전히 영화를 찍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