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eling her softly
친절한 소연씨는 이제 안다
오랫동안 김소연은 배우라는 현실에 급급했다. 그리고 잠깐의 공백을 거쳐 배우로서의 인생을 생각했다. 20세기부터 연기를 시작한 김소연은 21세기에 연기로 사는 법을 깨달았다.
김소연이 문을 열고 스튜디오에 들어선 건 1시를 건넌 시침이 2시 방향에 보다 가깝게 기울어질 무렵이었다. 그녀는 스튜디오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치는 촬영 스태프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느라 분주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도도할 것만 같았던 그녀였기에 의외라고 여겨지는 풍경이었다. 영상이든, 화보든, 피사체로 등장하는 대부분의 결과물 속에서, 그녀의 이미지란 차갑거나 냉정한 쪽에 가까웠다. 밝고 사랑스러운 콘셉트의 화보 시안을 본 그녀조차도 스스로 이렇게 말할 정도였으니까. “평소 잘 해보지 않은 컨셉트라서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재미있을 거 같아요.” 사실 그녀의 첫인상에서 느낀 친절함이란 단순히 ‘친절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지나치게 친절한 것’ 같아서 걱정될 수준이었다. 친절함이 몸에 배인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무례함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손쉽게 상처받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화보 촬영 후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처럼 말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친절해야 한다고 배우고 자라서 그냥 몸에 익었어요. 스스로 그래야만 편해진 거에요. 딱히 무언가를 바래서 그런 게 아니니까 특별히 상처를 받진 않는 거 같아요.”
지금은 공룡처럼 멸종해버린 언어지만 10대 스타들을 설명할 때 ‘하이틴 스타’라는 단어가 동원된 시대가 있었다. 그 당시 김소연은 대단히 주목 받는 하이틴 스타였다. 김소연이 처음 연기를 시작한 건 정확히 1994년, 중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공룡선생>이라는 제목을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10대에서 20대, 그러니까 지금 30대에서 40대 사이의 나이에 머무르는 이들은 웬만하면 기억할 만큼 인기가 많았던 작품이었다. 덕분에 김소연 또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방송 관계자들 사이에선 ‘중학교 3학년이 얼굴은 20대’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나이에 비해서 성숙한 외모를 지닌, 연기를 잘하는 배우로 일컬어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김소연은 일찍부터 브라운관에서 주연으로 발탁되는 기회를 누리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이는 독이었다. “제가 <예스터데이>라는 드라마에 출연했을 땐 고등학교 2학년이었어요. 그런데 20대 중반의 캐릭터를 연기해야 했는데 솔직히 그 감정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죠. 열심히 한다는 것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감독님께서는 불같이 화를 내셨고, 저 때문에 촬영이 힘들어지는 느낌을 받곤 했어요. 현장 자체가 무서웠죠. 마치 존재 자체가 민폐 같았다고 해야 하나.”
사실 당시만 해도 배우의 경력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주는 시스템이 전무했던 시기였고, 성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10대 배우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시기였다. 하지만 성숙한 외모가 성숙한 경험까지 보장해줄 순 없는 노릇이니까. 김소연이 실제 나이보다 많은 캐릭터들을 맡아 연기할 수 있었던 건 성숙한 외모로 주목 받은 덕분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런 상황에 적절히 대응해줄 만한 조언자가 부재했던 탓이기도 했다. ‘최연소’라는 수식어가 그녀 이름 앞에 붙는 가운데 하나 같이 “내 것 같지 않은” 경력들이 뒤를 따랐다. “마치 혼자서 100m 달리기를 하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 기분과도 같았다. 그런 그녀가 사라졌다. 2005년이었다. 3년 간의 공백이 말없이 이어졌다.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김소연이 말했다. “실수였죠.” 공백이 실수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 “아마 <가을소나기>라는 미니시리즈가 공백 이전에 마지막 작품이었을 거에요. 시청률이 너무 저조해서 스트레스를 받았던 차였는데 그 당시 중국 쪽에서 해외 활동 제의가 들어왔어요. 그래서 한번 해볼까 생각했죠. 문제는 제가 그 해외 활동에 대한 대단한 욕구가 없었음에도 그냥 해보겠다고 한 거에요. 특별한 야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게 됐고, 덕분에 한동안 붕 떠버린 거죠. 저기에도, 여기에도 제 자리라는 게 사라져버렸어요.” 그 3년 간의 공백기 동안 김소연은 영화나 드라마를 일체 보지 않았다. 마치 ‘빼앗긴 기회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봐도, 드라마를 봐도, 그 안의 인물들은 어쩌면 내가 연기할 수 있었던 혹은 내가 했어야 했던 캐릭터들처럼 보였다. 조급함마저 들었다. “어느 순간 캐릭터보다도 비중에 목매달게 됐어요. 활동이 줄어드는 만큼 작품 제의도 현저하게 떨어지면서 점점 중심에서 멀어진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만큼 눈이 멀어버린 거죠.”
그 어떤 고난도 과거형이 되는 순간부턴 추억으로 무르익기 마련이다. 김소연에게 그 3년여의 시간이란 가르침과도 같은 시기였다. “그러니까 결국 배우라는 직업이나 연기라는 기술에 대한 이해가 너무 없었던 거죠. 그냥 주어지는 기회였고, 그걸 따라가는 것 외엔 특별히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연기가 진짜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욕심도 없었던 거죠. 단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동굴 같은 공백에서 벗어난 건 미니시리즈 <식객>을 통해서였다. 마치 가라앉은 식감을 살려주는 에피타이저처럼, <식객>은 3년 동안 완벽하게 잊혀졌던 김소연의 존재감을 완벽하게 살려준 작품이었다. 그리고 김소연은 확실한 깨달음을 얻었다. 굳이 중심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 주연배우 자리를 고집하지 않아도 배우라는 직업을 이어나갈 수 있음을, 그럴 수 있음으로 인해서 보다 행복하게 연기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게다가 그녀의 나이도 어느덧 서른이었다. 일찍이 조숙하다고 일컬어졌던 외모가 진짜 성숙한 제 나이를 찾았다. 정신적으로도 그랬다. 비로소 자신의 캐릭터가 ‘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맞아요. 진짜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3년이라는 공백을 지나 김소연은 다시 예전에 그러했듯이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아이리스>, <검사 프린세스>, <닥터 챔프>, <대풍수>를 비롯해서 <체인지> 이후로 가히 15년 만에 출연한 영화 <가비>까지, 주린 배를 채우듯이 경력을 채워나갔다. 하지만 출발선과 결승선을 쉼 없이 오가는 단거리주자로서의 경력을 되풀이하던 과거와 달리 마라토너로서의 시야를 확보했다. “예전엔 그저 제가 연기를 잘해야 된다고만 생각했어요. 제 연기만 봤던 거에요. 하지만 이젠 작품이 보이고, 현장이 보이고,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됐어요. ‘페이스메이커’를 보게 됐죠. 저 혼자만 뛰고 있는 게 아니라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뛰고 있고, 저 역시 그들의 페이스메이커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단거리주자처럼 작품만을 보고 쳇바퀴처럼 달리던 시기를 지나 비로소 배우로서의 인생을 보게 됐다는 말이다. 작품을 통해서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즐길 수 있게 됐다는 말이다. “평생 연기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현장에 나간다는 게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죠.”
그녀가 새롭게 선택한 미니시리즈 <투윅스>는 <검사 프린세스>의 작가 소현경과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금까지 숱한 작품에 출연했음에도 같은 작가와 PD의 작품에 연이어 출연하는 건 처음이다. “일종의 ‘믿음’이라고 할까요. 그런 신뢰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어요. 사실 <검사 프린세스>를 통해서 왈가닥 같은 캐릭터를 연기한 건 처음이었지만 작가님이 캐릭터를 잘 잡아주신 덕분에 무리 없이 연기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투윅스>는 제의가 오자마다 주저하지 않고 선택할 수 있었죠.” 김소연은 <투윅스>에서 <검사 프린세스>에서와 마찬가지로 검사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철부지 검사의 성장드라마였던 <검사 프린세스>와 달리 <투윅스>에서 김소연이 연기하게 될 그녀는 다부지고 완강한 캐릭터라고 한다. <검사 프린세스>보다 비중이 작은 역할이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했다. “욕망은 사라지고 욕심이 생겼어요.” 김소연이 말했다. ‘얕은’ 욕망보다도 ‘깊은’ 욕심이 생겼다는 말처럼 들렸다. 더 이상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잘 모르는 찰나에 급급해서 뛰어다니기 보단 진짜 욕심을 품고 차근차근 걸어가는 법을 배웠다는 말이다. 물론 그녀는 20세기에도 연기를 했듯이, 21세기에도 연기를 하고 있다. 배우로서 살아간다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하지만 그 풍경 안에 머무르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인터뷰가 끝나고 카페를 나서기 전, 김소연은 사진을 함께 찍어줄 수 없느냐는 카페 종업원의 수줍은 요청에 활짝 웃으며 응답했다. 그리고 그 카페를 나가는 순간까지도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했다. 그 친절함이 더 이상 걱정되지 않았다. 그 친절함이 언젠가 그녀를 구할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이미 그랬을지도 모르고. 그런 생각과 함께 시계의 긴 바늘은 7시를 향해 닿고 있었다.
(ELLE KOREA 8월호 No.250 'ELLE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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