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성공을 꿈꾼다. 하지만 누구나 성공하는 건 아니다. 치열한 경쟁과 끝없는 노력을 통해 실력을 키우고 무대에서 이를 입증한 이만이 명성을 얻고 성공이란 단어를 거머쥔다. 80년대 동명작품을 리메이크한 <페임>은 성공을 꿈꾸는 청춘남녀의 스토리를 담보로 춤과 음악적 묘미를 발산하는 뮤지컬 영화다. 무엇보다도 80년대의 <페임>과 2009년의 <페임>은 대중문화의 시대적 변화를 통해 큰 차별점을 둔다.
알란 파커의 80년대 원작에서 들려진 타이틀 넘버 ‘페임(fame)’을 변주한 동명타이틀곡만으로도 새로운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페임>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대중문화적 패러다임을 적극 반영한 작품이다. 엠비언트 뮤직이나 일렉트로니카 사운드, 힙합 등 현대 대중음악의 패러다임을 비롯해 현대무용까지 포괄한 대중문화의 변이를 대거 활용한 <페임>은 80년대 원작과 전혀 다른 포장지를 활용함으로써 리메이크물로서의 차별화를 이룬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페임>은 뉴욕의 유명 예술고 입학 오디션에 무수한 경쟁률을 뚫고 입학한 학생들이 졸업하기까지의 진급과정을 서사적 줄기로 밀어간다. 오디션과 매학년 시기, 그리고 졸업까지, 이 모든 과정을 서사적 챕터로 구분한 <페임>은 학생들의 성장과 관계적 진전을 주요한 사건으로 다룬다. 그만큼 청춘의 감수성을 밑천으로 발생하는 다양한 인물 관계의 변화에서 비롯되는 묘미가 마련된다.
다양한 학생들의 단계적 성장을 지켜보는 묘미가 있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까닭에 집중력 있는 성장담을 그려내지 못한다는 건 <페임>이 성장드라마로서 약점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분절된 챕터로 구성된 입학과 진급, 졸업까지의 과정이 드라마의 진전을 방해하고,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이 서사적 압박에서 자유롭지 않은 듯한 인상을 준다는 건 일면 아쉬운 측면이다. 그럼에도 <페임>은 분명 뮤지컬 영화로서 즐길만한 순간들이 자리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빠른 컷으로 시선을 잡아 끄는 초반부 오디션 장면부터 즉흥적인 연주로 다양한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식당 시퀀스, 그 밖에도 무도회를 비롯한 다양한 가무의 향연이 곳곳에 배치되어 눈과 귀를 즐겁게 만든다. 특히 피날레를 장식하는 졸업공연은 분명한 볼거리다.
혈기왕성한 도전과 낭만이 깃든 예술고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생기발랄한 청춘의 일상을 그려나가며 에너지를 확보한다. 무엇보다도 <페임>의 덕목은 성취만큼이나 좌절의 과정을 간과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단지 성장하는 학생의 사연에 집중하기보다도 어린 학생들의 재능을 다스리고 바른 길로 이끄는 교사들의 진실된 표정과 솔직한 조언을 인상적으로 묘사한다. 프로 댄서가 되길 원하는 제자의 실력이 부족함을 냉정하게 조언함과 동시에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주는 교사의 얼굴은 경쟁의 본질이란 단지 누군가를 이겨내는 것이 아닌 자신에 대한 끝없는 극복임을 일깨운다. 단지 타인보다 위에 서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에 새로운 대안을 찾아나서는 여정이 바로 경쟁의 본질임을 깨닫게 한다.
무엇보다도 <페임>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공유할 수 없는 엄격한 교육문화와 자발적이고 여유로운 경쟁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란 점에서 특별하다. 타인을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경쟁은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결국 그 체제에서의 낙오는 좌절보단 새로운 도전을 낳는다. 줄세우기를 통해 성공하는 자와 낙오하는 자 사이에 선명한 금을 그어버리는 사회에서는 결코 꿈꿀 수 없는 낭만이 실로 부럽다.
인터뷰를 상당히 많이 했더라.
한 4~50개는 했을 걸. 진짜 ‘Breathless’야. 숨을 쉴 수가 없어. (웃음)
제법 유명인사가 됐다. 방금처럼 싸인을 요청하는 사람도 있고.(오픈된 1층 카페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가운데 싸인을 요청하는 팬이 있었다.) 좀 불편하더라. 밖에서 많이 알아보지 않는 게 좋지. 그런 걸 즐기는 분들도 있겠지만 나한텐 별로 즐길 거리가 안 돼. 물론 어느 정도까지는 기분이 괜찮았는데 너무 많아졌거든. 그냥 내가 살아가는 일상이 좋지. 시사회가 열린 극장 9백석에 8백 명 이상이 꽉 차있는 걸 보면 잠깐 ‘와!’하지만 뒤돌아 서서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이 다 길 가다가도 날 알아보는 거 아닌가 싶어지니까. 그래서 수염 깎고, 머리 길러야겠네, 이 생각만 하고 있다. (웃음) 물론 아까 그 분은 감사하지. 그렇게 부드럽게 들어오시면 좋거든. 그런데 거칠게 오시는 분들이 있어. 좋은 건 좋아도 싫은 건 싫은 게 인간의 속성이잖아. 아까 그 분은 날 불편하게 하지 않잖아. 그런데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있거든. 언젠가 관객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지겠지. 그때까지 짱 박히려고. (웃음)
일반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두 번 봤는데 매 번마다 관객 반응이 폭발적이더라.
서울극장 무대 인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극장에 갔을 때 확실히 느꼈다. 내가 누군가를 열광시키려고 만든 영화는 아닌데 이 사람들이 되게 열광하고 있다는 걸. 그러니까 한번쯤은 누가 뱉어내 줬으면 하는 이야기였는데 아무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그런데 누가 했어. 좀 나쁜 비유 같지만, 처음엔 불편한데 거기에서 내가 미워하는 놈을 누가 대신 때려주는 기분을 느끼는 거야. 그러면서도 자기가 직접 대하고 싸우면서 풀지 못하고 누군가가 대신해줬다는 게 약간 걸리는 사람도 있겠지. 어쨌든 <똥파리>를 보면서 대리배출이 된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은 거 같아. 누구나 쏟아낼 게 있는 만큼 쏟아내야 되는 거 같다. 굳이 아낄 필요도 없고, 있는 대로 쏟아내야 될 거 같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나온 영화를 보면 그 사람이 내 대신 뭔가를 막 쏟아내고 있는 거 같더라. 막 지르잖아. 에너지가 엄청난 배우지. 다 배출시켜버리잖아. 그냥 내 대신 뭘 뱉어주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개인적으로 되게 좋아한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엄청난 에너지를 담아서 연기하는 사람이다. 최근작인 <데어 윌 비 블러드>는 봤나?
그건 못 봤다. 사실 사람들이 모르는 <크루서블>보면서 미치는 줄 알았어. ‘신은 죽었다!’(포효하듯) 이러는데 죽겠더라고. 우리들이 가진 에너지보다 굉장히 큰 거지. 그 사람은 배우이기 이전에 배출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랄까.
자신을 위해 만든 영화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밝혔다. 하지만 그게 단순히 자전적인 영화라는 의미는 아닌 거 같다.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니지. 그 안에 내 마음이 다 담겨있다지만 내 얘길 이야기에 가져다 붙일 수는 없잖아. 내 개인적인 얘기를 영화에 그대로 투영한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그건 복사를 하는 거지.
만약 <똥파리>와 비슷한 경험을 지닌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고스란히 영화로 만든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거다.
그럼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증오로 가득가득 차 있겠지. 그걸 누가 보겠어.
그렇다면 자신을 위한 이야기라는 말의 의미가 어떤 범위로 활용된 것인지가 궁금하다.
자신의 이야기가 투영되지 않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있나. 일기를 쓰는데 남의 일을 쓰진 않잖아. 소설을 통해 완전한 픽션을 만드는 분들조차도 자신의 숨결들을 넣잖아. 그러니까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 나오고. 그렇게 자신의 일부가 차용된 거지.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살아온 삶과 환경, 주변의 친구들의 삶과 환경, 그리고 앞집이나 건너 집에 있었던, 내가 봤거나 들었고 그로 인해 느꼈던 것들이 다 들어있지. 그냥 내 마음은 한껏 들어갔다. 가족에 대해 싫다고 느꼈던 마음들은 다 들어갔지. 그렇다고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를 칼로 찔러서 죽였나, 아니면 내가 용역소에서 일을 했나. 그건 아니지. 단지 어떤 봐왔던 것에 완전한 상상력이 결합된 산물이지. 다만 그 안에 담긴 마음만 속이지 않으면 될 것 같다.
아까 말했듯이 일반관객과 영화를 두 번 봤다. 처음 볼 땐 나도 영화에 몰입하는 입장이었지만 두 번째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반응을 틈틈이 관찰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건 상훈이 욕설을 할 때 낄낄거리던 관객들이 바로 뒤이어 적나라한 폭력에 돌입하니 다들 ‘헉!’하더라. 상당한 충격을 느낀다고 해야 하나. 사실 영화를 보는 관객 대부분은 영화적 수위의 경험을 겪지 못한 사람들이라 그 폭력적 현장을 바라보는 생소함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상황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느낌이 들더라.
1부터 10까지의 레벨에 따른 수위 차이는 있겠지만 최소한 1정도를 안 겪어본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부모님을 통해서 이 세상에 나왔고 어떤 기간 동안은 부모와 살아야 한다. 그 과정이 항상 좋았던 건 아니라는 거지. 고마움도 있겠지만 분명히 부딪힘도 있었을 테고. 특히 한국에선 가족이 고마움보단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나. 개념상으로는 제일 가까워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제일 멀고 스스로를 제일 힘들게 하는 존재처럼 느끼곤 한다. 집이 부자고 가난하고를 떠나서 그런 개념이 발생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 있나? 외국 같은 경우는 성인이 되면 적절히 알아서 나가거나 내보내는데 한국은 움켜쥐고 있잖아. 내가 대신 무언가를 해야 되고, 아니면 해줘야 될 것 같고, 이상하게 갖지 않아도 될 부담감들을 지니고 사는 것 같다. 자유로워야 되는데 자유롭지 못한 거랄까. 왜 그렇게 살까. 나는 이제 독립한지 7년 반 정도 됐다. 진작 나왔어야 됐지만 나 역시도 용기가 없어서 늦어졌지. 어쨌든 당연히 나와야 되잖아. 부모님을 끌어안고 평생을 살 건가. 그래야 여자친구도 만나서 여자친구가 집에 올 수 있고, 야한 것도 하지. (웃음) 그게 삶이잖아. 물론 꼭 여자친구뿐만 아니라, 자기 일생에서 친구도 만나고 자기의 공간이 있어야 자기 삶에 대해서 고민도 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지. 중간에 누구 하나 없이 스스로 혼자 남게 될 때 들 수 있는 생각들이 있잖아. 그런데 집에선 문만 열면 가족인 거야. 연희 같은 경우도 (손가락을 작게 벌리며) 요따만한 집에서 꾸역꾸역 모여 사니까, 문만 열면 가족이 보여.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365일, 24시간 계속 따라오면서 보인다면 미치는 거지.
사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할수록 불행에 쉽게 노출되는 게 아닐까. 가난할수록 집도 좁아지고 그만큼 서로에 대한 간섭도 커질 가능성이 생긴다. 그리고 독립이 늦어질수록 가장은 자식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리고 자식들은 아버지의 경제적 능력에 대한 요구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 결국 경제력이 집안의 화목과 직결될 가능성이 커진다. 가난할수록 불화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지는 구조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가난을 방조하는 사회가 그 모든 불행의 배후일 수 있다.
물론 100% 가난이라고 할 순 없지만 개인의 가난보다도 이 사회가 가난했고 한국이 가난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이건 조금 다른 얘기일 수 있지만 일본에게 지배도 받고, 한국전쟁도 겪고, 그렇게 역사적으로 힘이 없어서 불행했던 나라였던 거지. 그러다 보니까 어느 순간에 아버지들은 가족을 먹여 살려야 되니까 계속 나가서 돈 벌어오는 기계가 돼버렸고, 엄마는 자기 삶의 정체성을 고민하기 이전에 자식들을 가르쳐야 하는 사람이 돼버린 거다. 자식 교육은 엄마, 돈 벌어오는 건 아버지, 그렇게 나뉘어버렸는데 사실 알고 보면 그런 임무를 마땅하게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 수 있는 거지. 그냥 같이 더불어 자유롭게 살면 좋을 텐데, 누가 누굴 가르쳐야 한다는 개념이 생기니까. 어쨌건 그래도 엄마는 자식들과 싸우건, 친하게 지내건, 부대끼면서 살기라도 하는데 아버지는 계속 돈 벌어야 되니까 나가서 사느라 가족들과 소통할 시간도 없지. 대다수의 아버지들은 좀 소통이 안되잖아.
<똥파리>는 그런 현실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 영화 같다.
내 가족 안에서 출발했겠지. 주변 친구들의 가족 이야기도 그렇고. 친구들과 중학교 때 가끔 술 먹고 그러면서 가족 이야기가 나오면 대부분 아버지 이야기가 나왔다. “난 싫어! 아버지가!” 이러는 친구가 있었는데 알고 보면 부모님이 이혼해서 아버지가 따로 나가서 살고, 그래서 미워하지만 한편으로 그리움이 있다. ‘애’와 ‘증’이 있지. 대개 그랬던 거 같다.
결국 부모를 부정해봤자 변하는 건 없다. <똥파리>의 증오도 결국 그런 깨달음에 도달하게 위해 증오를 묘사하는 영화가 아닐까.
아버지가 폭력의 괴물이다, 라는 게 아니라 이 사회가 그런 괴물을 만들었다는 거지. 아버지가 누굴 괴롭히거나 때리고 싶어서, 아니면 칼로 죽이고 싶어서 그랬겠어. 사회가 압박을 가하는데 사회적으로 약자이다 보니까 풀어낼 곳이 없지. 그게 이상하게 제일 편하고 쉽게 대할 수 있는 가족 안에서 풀어지는 거지. 사실 불쌍한 거야. 살아가는 숨통이 없으니까. 집에서 셋방살이하듯 소통도 안 되고, 가족으로서 대접도 못 받고, 그렇게 집에 와도 외로워지는 거지. 폭력적이지 않은 아버지들도 마찬가지고. 가장이라는 짐이 왜 아버지에게만 얹어져야 할까. 나는 네 어머니야, 나는 네 아버지야, 나는 당신의 아들이고, 너는 내 아들이야. 이런 구별을 통해 서로 의무를 얹혀주기 보다 좀 친구 같이 살 수 없을까, 라는 고민이 들더라.
상훈은 주먹질과 욕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사람이다. 아버지에 대한 깊은 증오만큼이나 그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단지 그 안에서 고립된 거다. 연희와 소통할 수 있는 건 연희가 그 증오를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 쳐주는 인물이기 때문이 아닐까. 결과적으로 상훈이 삶을 바꿔보려는 결심을 품는 것도 연희가 어느 정도 계기가 된 거라고 생각한다. 궁금한 건 눈 딱 감고 상훈을 위한 해피엔딩을 마련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신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는 거다.
만약 (결말부의 상훈이)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똥파리>가 <피와 뼈>처럼 됐을 거다. (웃음) 사실 그 자체가 내겐 화해가 되는 거지. 상훈이 죽었다는 건 단지 어떤 한 사람이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상훈이 사라짐으로써 당연히 사라져야 할 어떤 연결 고리가 끊어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끊어야 했을 어떤 고리를 이 지점에서 끊기 위해서 라이타 불로 상훈의 제를 지낸 게 아닐까라고,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던 건 아니다. 완성된 영화를 보고 인터뷰를 거듭하면서 계속 느껴지는 게 그렇더라. 결국 상훈을 죽임으로써 화해를 신청하는 거다. 이는 내가 서른 두세 살이 돼서 시나리오를 썼을 당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거 같다. <똥파리>는 2006년의 양익준이었던 셈이다.
결국 상훈은 당신의 마음 속에 있던 증오와 미움이었던 것 같다. 만약 그때가 아니었다면 <똥파리>는 어떤 이야기가 됐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만약 지금 이런 얘기를 한다면 다른 선택을 했었을 수도 있겠지. 이야기 구조가 완전히 바뀔 수도 있고. 어쨌든 내가 지금 <똥파리>시나리오를 다시 쓴다면 조금 변화된 이야기가 나오리라는 건 확실하다. 만약 그 이전에 썼다면 또 다른 이야기가 나왔을지 모를 일이고. 이제야 조금씩 이해도가 생기다 보니까 지금은 화해의 제스처를 취할 수 있는 거고 살가워질 수 있지만 만약 20대 사이에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면 더 무거워지거나 악랄해지고 아팠을 거다. 캐릭터 자체가 완전히 미운 사람들로 표현됐을 거고. 나도 이제 많은 고민을 해오면서 가족 개개인의 잘못이 절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거지. 내가 아버지를 미워했지만 사실 아버지의 뒤에는 사회가 있는 거니까 난 결국 사회를 미워하는 것과 같다. 가족을 둘러싸고 있는 아버지가 바로 사회인 셈이다.
<똥파리>는 어쩌면 당신에게 필요했던 비상구였을지도 모르겠다.
화장실이지. 그냥 다 뱉어버릴 수 있는 화장실. 그런데 지금 시원해, 이런 건 아니다. 그냥 난 만들어놨고, 관객들은 감흥을 받을지 모르겠지만 난 이걸 가지고 더 많은 고민을 해야 되겠지. 영화적 고민이 아니라 내 삶에 대한 고민을. 가족이나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살 것인가. 그게 <똥파리>이후에 내 고민이 되겠지. 그 고민이 얼추 끝나서 <똥파리>가 정리되고 다시 내 생활을 찾게 되면 그 다음부터 다른 영화를 고민할 수도 있을 거다. 당분간 아무것도 안될 거야. 지금은 그냥 무작정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야겠지. 내 영화는 순위에서 한참 밑에 있을 거니까 그런 거 개의치 않고 다시 하고 싶을 때 하면 되고. 난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똥파리>를 만든 게 아니라 단지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있었던 표현의 통로가 영화밖에 없었던 거지. 10년 동안 했던 게 영화니까.
“우물쭈물하는 새끼가 제일 싫어.”라는 대사가 인상적이더라. 내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다. 내가 너무 선택을 못해왔던 사람이라서 내 스스로를 위해 말하는 거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이 영화를 만들었어. 관객을 일단 배제해버렸으니 남은 건 나지. 그 다음이 내 주변 친구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 관객들, 이 사회, 순위가 그럴걸. 우물쭈물하면서 살지 말라는 1순위도 나인 거지. 내가 그렇게 살지 못했으니까. 예전에 여자친구 있을 때 어느 술집에서 술을 마실까 선택하지 못하고 40분 동안 끌고 다닌 적이 있었다. 겨울이라 덜덜 떨고 추워죽겠다는데. (웃음) 난 항상 선택이 느리다. 식당에서도 메뉴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사람은 항상 선택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데 선택하지 못하고 중간지점에 머무르곤 하다 보니까 항상 불안하고 어떻게든 해야 되겠다는 압박을 느낀다.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그런 걸 많이 느꼈다. 만식이를 좋은 놈으로 그릴까, 나쁜 놈으로 그릴까, 고민에 봉착한다. 그걸 한동안 오래 고민하면 답이 안 나와. 짧고 굵게 고민해야 된다. 좋은 놈으로 하자. 그럼 그 순간, 나쁜 놈은 없어지는 거지.
그 전에 “밖에서는 병신 같은 게 집에서는 김일성 같이 굴라 그래.”라는 대사도 기억난다.
원래 정인기 씨가 자기 와이프 때리는 연기하는 장면에서 원래 좀 더 이어지는 다음장면이 있었다. 상훈이가 “밖에서는 병신 같은 게 집에서는 김일성 같이 군다”고, 정인기 씨를 막 때리는데 와이프가 미친 듯이 맞는 남편을 위해서 상훈에게 울면서 그만 하라고 하잖아. 그 다음 장면이 있었어. 상훈이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여자를 구해준 거잖아. 그런데 이상한 거야. 너를 이렇게 폭행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을 내가 이렇게 패주는데 얘는 왜 막지? 그래서 쪼그리고 앉아서 그 여자도 뺨을 막 때리면서, “왜 그렇게 병신같이 사냐? 애들이 불쌍하지도 않아? 용기를 내! 용기를 내라고!” 원래 이렇게 소리지르면서 넘어가거든. 그런데 일단 내 연기가 좀 안 좋아서 잘렸지. 한참 딜레마에 빠져 있던 차라.
용기를 내라는 게 어떤 의미인가?
그건 이 세상에 사는 엄마들한테 하는 소리다. 엄마들은 선택을 못하면서 살아왔고 그 삶이 늪인 줄 알면서도 그 익숙함에 빠져버렸다. 맨날 너희 때문에 도망 못 간다고 핑계대지만 명확하게 생각하면 자식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못나가는 거거든. 물론 그것도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 까닭이지만 분명 선택할 수 못하고 사슬에 묶여있는 거지. 어머니와 대화를 오래해 보시면 알 텐데, 어머니도 자기가 제일 행복해야 한다는 걸 안다. 자식을 위해서 반드시 먼저 살지 않는다. 다만 가족이라는 익숙함에 빠져 있다 보니까 핑계를 대면서 나가지 못하는 거다. 정말 살기 힘들면 나가야지, 이혼해야지. 왜 굳이 붙어있으면서 힘든 상황을 연출하는데. 그래서 상훈이 부르짖는 거지. 용기를 내라고. 그러니까 그 우물쭈물하게 되는 순간에 제일 나약하고, 불쌍하고, 멍청해지는 것 같아. 일단 선택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거든. 이리로 갈까, 저리로 갈까. 지하도가 있고 지상이 있어. 둘 다 도착해서 만나는 지점은 똑같아. 그런데 어디로 가지, 망설이다 보면 결국 터널과 지상 사이의 돌기둥에 부딪혀서 사고가 나거든. 사실 내 경험담이다. (웃음) 내가 운전한 건 아닌데 한 사람은 지하로 내려가면 된다, 나는 지상으로 가면 된다, 그러고 있으니까 운전자가 어쩔 줄 모르더라. 진짜 부딪힐 뻔 했다니까. 막판에 그 친구가 알아서 꺾더니 가까스로 지하로 갔지. 상훈이 후반부에 선택한 것도 그거겠지. 마지막에 부딪힐 순 없으니까. 일단 내가 죽겠거든. 이제 조금 편해지고 싶은 거지. 막장까지 보고 나니 ‘아, 이제 이렇게 살면 안되겠구나. 좀 더 사람같이 살면 안 될까’라고 생각하겠지.
한강에서 상훈이 연희와 함께 캔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상훈이 자신의 진심을 유일하게 내뱉는 장면이랄까. 연희한테 ‘느그 부모는 잘 사냐?’라고 말하는 거. 은연 중에 비교해보고 싶었던 거겠지. 우리 부모는 이따위로 사니까. 연희 사정을 은연 중에 알 수도 있겠지만 자기가 잘 산다니까 한번 대충 떠보는 거지. 친구들끼리도 우리 집이 거시기할 때, 잘 사냐고 물어보잖아.
“부모한테 잘 해라.” 라는 말이 아이러니하게 들리던데.
지가 그렇게 못 살아왔으니까.
상훈에게 있어서 희망이 되는 대상은 형인이다. 때때로 상훈은 형인이에게 형 같기도 하고, 아버지 같기도 한 모습을 연출한다. 유일하게 자신의 폭력에 대해서 사과하는 대상이기도 하고. 최대한 지켜줘야겠다는 본능이 강해지는 대상이다.
상훈이 선택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처럼 어머니나 아버지도 선택을 못하고 살아왔는데 형인이마저도 선택을 망설이며 살고 있다. “플스(PS) 사줘, 말아?” 물어보면 대답을 못해. 근데 상훈이 가는 건 싫고, 그러면서도 사달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고. 상훈이가 볼 땐 그 모습에서 아마 자기가 느껴졌을 거야. 과거에 동생이 아빠를 말리러 가는 걸 그냥 지켜만 봤잖아. 그때 자기가 말려줬다면 어땠을까 계속 생각하게 되고. 그런 꼴이 보기 싫으면 말리던가, 차라리 집을 나가던가, 뭐라도 선택하면 되는데 그냥 계속 집에서 보고만 있어. 또 그러다 말겠지.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순간에 누가 죽어. 영재 뺨을 때리면서 ‘우물쭈물대는 순간에 네 주변에 있는 한 사람 죽어나간다’는 말을 하는 건 자기 마음의 연장이지.
상훈이 영재에게 보내는 감정도 미움은 아닌 느낌이다. 뭔가 자꾸 거칠게 배려하는 것 같다고 할까.
영재는 미워서 때리는 게 아니다. 그런 폭력을 행사하는 건 애를 죽이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거기서 나가고 싶게 만드는 거겠지. 여기로 오지 못하게, 이게 두려운 일이라는 걸 알게끔 하는 상훈의 제스처지. 미워서 때리는 거 같진 않다.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아.
상훈은 자신에 대한 보호 본능만 남은 존재다. 자신이 배출하는 혐오를 통해서 타인을 단절시키는 방식으로 세상에서 생존한다. 적도 아군도 모조리 패는 사람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연희만큼은 밀어내지 않는다.
비슷한 인간이라고 생각이 되겠지. 혼자 다니는 늑대들은 외롭다. 혼자 먹잇감을 사냥해야 되고 추운 겨울도 혼자 나야 되니까. 이런 놈이 돌아다니다가 같은 늑대를 만나게 된 거야. 얘네 둘은 안 싸워. 왜냐면 비슷하다는 걸 아니까. 그렇게 스쳐 지나갈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지. 어쨌든 뭔지 모르겠지만 자기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거야. 이복누나 같기도 하고, 죽은 여동생 같기도 하고, 형인이 같기도 하고, 왠지 나 같기도 하고. 교복 입은 X만한 고삐리고, 별로 가진 것도 없는 강해 보여. 악은 꽉 차있는데 한쪽은 껍데기가 다 벗겨져서 피가 질질 흘러. 이상하게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 있는 거지. 그냥 머리로는 설명할 수 없어. 마음으로 느끼는 거지. 나랑 비슷한 건 알아보잖아.
자식들은 자신의 부모를 부정하지만 어느 새 자신의 부모를 닮아간다. 자신이 혐오하는 것들을 부정하면서 어느 새 그와 닮아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똥파리>도 안 닮아가려고 발버둥치는 거는 방법이지. 발버둥이라도 쳐야지. 그래야 변화의 시작점이라도 생기지. 그런데 발버둥을 안 치니까 문제인 거야. 오리도 물에 떠있으려면 발을 굴려야 되는데, 우리는 발짓조차도 안하고 있잖아. 그조차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덮어놓겠다는 거지. 그 밑엔 진짜 징그럽고 무서운 게 있고 그걸 열어보고 소각을 하던, 어디 묻어버리던, 뭐라고 해야 될 텐데 그냥 가려만 놓는 거잖아. 어떤 제스처라도 취해야지. 나는 취한 제스처가 이 <똥파리>지.
상당히 강한 제스처다.
세게 풀지 않으면 똑같이 반복된다. 다시 똑같이 돌아간다. 연기할 때 뺨 때리는 장면 있잖아. 미안해서 대충 때리면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 돼. 한번에 때리라고 하잖아. 내가 뭘 풀어놨는데 대충 하면 다시 처음부터 해야지. 그러니까 세게 한번 내보내는 거지. 왜 우물쭈물해. 그냥 확 저질러버리는 거지. 한번씩은 다 선택하잖아. 그런데 가장 불편한 문제에 대해서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않아. 삶에 있어서 제일 많은 영향을 끼치는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한국에서 제일 중요한 건 가족이잖아. 그 안에서의 문제를 제일 먼저 고민하고 풀어야 되는데 그걸 놔두고 다른 걸 먼저 하고 있어. 그게 일단 해결이 돼야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자기 삶을 사는 거지. 계속 내 삶이 가족으로 인해 지배당하고 영향력을 받는데 어떻게 다른 삶이 가능해. 나는 이제라도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상훈을 단순히 기능적으로 연기한 건 아닌 거 같다. 본인의 잠재된 진짜 감정을 캐릭터에 쏟아낸 느낌이랄까.
당신도 화가 날 때가 있을 거다. 그리고 다들 여러 개의 본인을 갖고 있지 않을까. 나한테도 증오에 차 있는 양익준이 있고, 사랑 받고 싶은 양익준도 있고, ‘푸르나’를 보고 싶은 양익준이 있기도 하겠지. (웃음) 그렇게 수억만 개의 양익준이 있는 건데 그걸 다른 식으로 이야기하면 감정들이겠지. 양익준이 갖고 있는 감정들. 다만 평상시엔 상훈처럼 살면 안 되잖아. 하지만 그런 표현들을 하고 싶을 때가 분명히 있다. 버스 기사 아저씨가 핸드폰으로 통화하면서 버스 운전하는 걸 보면 상상으로, “날 죽일 셈이야? 이 XX놈아, 전화기 안 꺼!” 이러는데 현실에선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겠지. 그런데 그 상상은 가짜일까? 그거 진짜잖아. 평상시에 그렇게 발설하지 못할 뿐이지 정말 불쾌할 때, “야, 이 XX!”하고 싶잖아. 그런 진실된 상상을 영화 안에서 뿜어내는 거지.
상훈은 당신이 한번쯤 상상하던 상상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상훈은 당신이 평소에 드러내지 못했던 속내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예전엔 아버지한테 “왜 그랬어!”라고 얘기하고 싶었던 거지. “왜 그랬어요! 왜! 잘할 수도 있었잖아요!” 그런데 잘 하기 힘든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걸 이제야 좀 알게 된 거다. 이 세상이 잘할 수 없게 만들었으니까. 어쨌건 인간한테는 숨구멍이 있어야 된다. 내게는 <똥파리>영화가 숨구멍인 거고, 연기가 숨구멍이었던 거고. 아까 기능적인 연기가 아닌 거 같다는데 나 그렇게 안 한다. 그런 건 할 줄 모른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걸 할 뿐이지. 그래서 배우들에게도 연기에 대해서 어떤 언급도 안 하는 거고.
김꽃비 양에게도 들었지만 디렉팅을 전혀 하지 않았다던데. 왜냐면 내 영향을 주고 싶지 않거든. 그 사람들은 자기네 것을 표현하고 쏟아놓는 사람인데 내가 그 사람들한테 “이렇게 쏟아내 줘.”라고 하면 그 사람들 숨구멍은 어디 있겠어. 누구한테 지시 받는 표현은 재미없지. 만약 그렇다면 나도 영화를 찍을 필요가 없고. 캐스팅할 필요도 없고. 아역배우한테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달라는 말 절대 안 한다. 알아서 해야지.
예전에 연출했던 중편 <바라만 본다>에서도 연기를 겸했었다. 상훈은 자신이 연기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들어간 건가.
<바라만 본다>는 원래 어떤 친구를 캐스팅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워크샵에서 시나리오가 너무 이상하다는 얘기를 듣고 고민하다가 시나리오를 확 바꾸게 됐다. 그때 캐릭터가 변하더라. 그러다 보니까 그 친구에게 이 캐릭터는 좀 아닌 거 같았다. 그런데 주변에서 네 사랑이 투영된 이야기 아니냐고, 네가 해보라고 부추기는 거다. 나도 욕심이 없었던 건 아니었고, 결국 하게 된 거지. 하지만 <똥파리>는 아예 처음부터 작정하고 한 거였다. 하지만 다음엔 모르겠다.
클라이막스에서 약간 헷갈리는 점이 있다. 영재의 우발인지, 만식의 지시인지.
우발이다. 사실 그 부분은 서로 이해도가 조금 부족했던 부분이 있었다. 환이가 많이 연습하는 스타일이었다. 다른 인터뷰에서도 얘기했지만 집에서 너무 많이 고민해오고 그러길래 시나리오 보지 말라고, 시나리오에 빠지지 말라고 했지. 네가 하는 거니까 제발 그 캐릭터에 빠지지 말라고. 너라면 어떻게 할 건지 판단하라고, 네가 겪어왔던 환경이나 감정을 넣으면 된다고. 자꾸 생각을 통해서 제3의 것들을 만들지 말라는 얘기였지.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환을 캐스팅할 필요가 있나. 차라리 사람 죽인 사람을 캐스팅하지. (웃음) 그런데 환이가 연습을 많이 하고, 제가 볼 땐 자꾸 불필요한 것들을 많이 끌어오는 친구였다. 사실 나는 100% 우발을 생각했다. 그냥 휴지 달라고 해서 휴지 꺼내다가 망치를 발견했고, 망치는 자기 고참을 그걸로 때리니까 뺏어서 챙겨온 거뿐인데 그 때 손에 잡힌 거지. 그래서 내가 이걸 챙겨왔나, 멍해진 찰나에 상훈이가 돌아봐. 어떡하지. 아, XX! 이렇게 된 거지. 그런데 거기서 연출의 역량과 배우의 표현력이 관객에게 혼돈을 준 부분이 있다. 그건 인정한다. 좀 더 설명하자면 영재한테도 차곡차곡 쌓인 게 있으니까. 자꾸만 때리면서 우물쭈물하지 말라고 하잖아. 상훈은 얘를 내보내려고 했던 건데 영재한텐 그게 스트레스였던 거지. 사실 영재도 얼마나 불쌍해. 영재가 진짜로 상훈에게 그렇게 하고 싶었겠어. 세상에 부르짖고 싶었던 거겠지. “왜 나를 이따위로 만들었어. 왜 너는 나보고 병신이라고 해. 나를 좀 내버려둬!”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게 자신도 모르게 망치로 표현이 된 거지. 시간이 지나고 자신에 대해서 고민할 시간이 되면 엄청난 후회와 번민이 생길 거다. 누군가를 그렇게 해했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을 죽여서 시원하다고 생각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만약 영재가 계획적 지시에 따라서 이해하게 된다면 만식을 정말 악역으로 인지하는 셈이다.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전복되고 이야기에 대한 접근까지도 변할 수 있다. 결국 영화적 의도가 완전히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럴 땐 디렉팅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나.
준비를 많이 해오고 자기에게 확신이 없는 배우가 있다. 환이가 그랬던 부분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변해가고 있기 때문에 아마 다음 작품에서 자기 것들을 많이 보여줄 수 있을 거다. 시행착오의 시기는 누구나 있는 법이다. 그 땐 그 자유로움에 좀 부대껴도 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넘어가게 되면 대개는 자유로움에 익숙해지거든. 그런데 자유롭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 계속 힘들어지지. 자율성을 줬는데 자유롭지 못하면 어떻게 해. 항상 지시에 의해서 움직이다 보면 오히려 혼란에 빠지기 쉽다.
결말에서 영재를 보면 절망적인데 연희를 보면 한편으로 희망을 놓고 싶지 않다. 어쨌든 영화는 어떤 방향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퀘스천(question), 쩜쩜쩜(…)이다. 나도 잘 모르니까, 나도 그걸 생각하는 과정 중이거든.
결과적으로 어떤 식으로 방향을 설정해선 안 된다고 믿는 것 같기도 하고.
각자 선택하는 거지. 제가 계속 얘기한 것도 선택이잖아. 스스로 결정하고 우물쭈물하지 않으면 돼지. 이 영화가 무슨 답을 줘. 어떤 책이 누구에게 답을 줄 수 있나? 1 더하기 1은 2다. 그런 산수 문제 정도? 도덕 책이 답을 줘? 그렇게 살면 안 된다. 결국 어떻게 살까 제시를 해주는 것뿐이지. 거기서 선택을 해야 되는 거다. 히틀러가 히틀러의 독재를 선택한 것처럼, 양익준은 양익준으로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생각하다 보니까 <똥파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선택을 한 거고. 어떤 관객은 <똥파리>를 보고 진짜 짜증나서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 XX놈아, 한번 해야겠다.” 싶어서 했더니 의외로 아버지가 “시원하냐? 술이나 한잔 하자.” 그럴 수도 있고. (웃음) 그렇게 각자 선택을 하는 거지. 이 영화에 결말은 없다. 이 세상에 결말이 어디 있어. 내가 80살까지 살다 죽어도, 세상은 계속 돌아가지. 다만 최대한 우리가 고민해서 조금 더 환경이 나아지면 누가 편할까. 본인들이 편하겠지. 그렇게 본인들이 최대한 편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나갔으면 좋겠다는 거지. 우물쭈물하면 장기적으로 힘들어 진다. 그리고 나만 힘드나. 내 주변, 가족, 다 힘들어진다. 누군가는 선택해야지.
이 영화가 99%의 절망으로 가득하지만 1%의 희망이 있다고 생각되는 건 그 부분에 있다. 영화는 어떤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안에서 희망을 만들어야 하는 건 관객이다. 결국 영화 밖에 희망이 있다. 이 영화가 절망으로 가득함에도 일말의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믿는 건 바로 그런 고민을 부르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마주한 두 손바닥의 간격을 벌리면서) 세상의 규정이 이만큼이라면 언젠가는 이만큼 넓어질 수 있다. 증오가 희망으로 변할 수도 있고, 한 사람의 마음이 백 명을 움직일 수도 있는 거다. 나는 <똥파리>를 만들었고 누군가가 그걸 보고 난 이후에 그게 가능해질지 아무도 모르는 거다.
<똥파리>를 보게 된 어떤 관객 가운데 누군가는 영화 속의 현실을 자신의 체험처럼 간직한 사람도 있지 않을까. 영화를 통해서 자신의 과거나 현실을 목격하게 되는 사람은 어떤 면에서 충격을 얻지 않을까. 사실 내부에서 보는 것보다 외부에서 목격하게 될 때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나. 그 사람들의 관점에서 <똥파리>가 어떻게 비춰질지 궁금하진 않나.
나도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의 가족 안에서 살아왔다. 7년 반 전까지, 그러니까 20대 후반까지, 상황은 조금 달랐을 지 몰라도 뭐가 얼마나 다르겠어. 단지 내가 지금 얘기를 안 하는 건 이게 개인영화로 비춰지면 안 되기 때문이지. 개인사까지 드러낼 필요는 없잖아. 나는 영화로서 보여줬으니 된 거다. <똥파리>가 거짓말하지 않는 그런 영화로만 비춰지면 되는 거다. 내게는 내 개인의 영화고, 어떤 관객이 보면 그 개인의 영화가 될 수 있는 거고. 다만 그들이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고민하고 나는 나대로 상훈이라는 캐릭터를 보면서 반추하기도 하겠지. 나도 어쩌면 저렇게 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난 지금 좀 잘 살아오고 있어. 그런데 진짜 그렇게 된 사람들이 상훈을 본다면 그 사람들에게도 뭔가가 오겠지. 그럼 상훈이처럼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고 마음먹을 수도 있고. 그런 가능성이 충분히 내포되지 않았을까.
상훈은 대한민국 가족이라는 부조리한 조직에서 잉태된 최악의 괴물이기도 하지만 가장 불운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정도 차가 있을 뿐, 대한민국에서 아들, 딸이라고 불렸던 대다수의 마음 속엔 잠재적으로 상훈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국에 이런 가족 문화가 60%는 될 거라고, 물론 <똥파리>는 영화인 만큼 특정한 관계의 수위를 더 강하게 묘사했지만 대충이라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 그 정도는 될 거라고 했더니 누가 그러더라. 60%는 개뿔, 100%지! (웃음) 누군지 기억은 안 나는데 나보다 나이가 좀 더 있으신 분이 그러더라.
한국에서 자식으로 살아본 사람치곤 <똥파리>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겠지. 참 이상한 일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똥파리>라는 영화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행복한 사회일까 의문이 든다.
한 70%는 다운시켜야지. 완전히 없어지길 바라지도 않아. 그래서 여전히 엔딩에서 영재는 그런 일을 하는 거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영재도 그런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각자 그 이후를 살아가면 되는 거지.
오래 전에 했던 짧은 인터뷰를 보니까 <똥파리>이후로 연기와 연출 중 한가지 길을 선택하겠다고 했던데. 그건 그 기사를 쓴 기자 분의 자의적 해석이었다. 그냥 고민을 해보겠다 그랬지. 한번 해서 맛이 들렸는데 연기든 연출이든 그만 두진 않을 거다. 그냥 조금 더 두고 봤으면 좋겠다. 아니면 관심을 끊던가. (웃음) 그냥 내가 살아가면서 결정하면 되는 거니까. 누가 백마디 천마디 하지 않아도 난 이미 내 스스로 결정할 준비가 남들보단 조금 더 돼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똥파리>가 좋다면 <똥파리>를 좋아하면 되지, 나한테까지 좋아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는 것처럼.
50개관에서 개봉된다. 어쩌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둘 수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만큼의 제약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거 가지고 또 싸워야지. 돈 생기면 이제 지원받지 않고 내가 번 돈으로 영화 찍으면 되잖아. 그래도 모자라면 그때 또 만들었을 전세 빼지. (웃음) 한번 해 봤는데 두세 번 못 하겠어? 한번 해보면 자신감이 붙는다. 나에게 믿음도 생기고. 한 달에 백 만원도 없이 살아본 적도 있는데, 어떻게든 살겠지. (자지러지게 웃음)
<똥파리>는 아버지 세대를 부정하는 영화 같지만 결국 그 본심은 자신의 증오와 그로부터 자행되는 폭력을 극복해야 자신의 삶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다. 결국 그 선택은 각자 자신의 몫이다. 당신도 그런 선택을 통해서 여기까지 왔다. <똥파리>도 그 선택의 일종이었고. 그리고 그 이후로 당신에게 주어진 바가 있을 거다. <똥파리>라는 선택이 당신에게 남긴 건 뭔가?
좀 더 많은 가족과의 대화와 통화? 그리고 내가 자랑스럽다? 이렇게 내가 노출되는 부분에서 오는 장점도 있다. 부모님이 TV를 통해서 내가 여태껏 영화 했던 흔적을 보게 되면서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냐고 안쓰러워해 주시더라. 떨어져 있으니까 그리움을 알게 되는 거지. 같이 살면 그립지 않잖아. 그러니까 함부로 하게 되고. 조금 떨어져 살면 더 좋은 관계가 이뤄진다. 대신 한 달에 한두 번씩 자주 만나면 되잖아. 그 정도면 되지, 아닌가? 부모님 두 분끼리 같이 잘 사시고, 난 내 할일 하면서 여자친구 생기면 같이 잘 살면 되고. 다만 너무 안 찾으면 문제가 되지. 가끔씩 전화도 드리고, 찾아야지. 그렇게 살면 그리움도 적정하게 유지되고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많은 분들 빨리 자립하세요. (웃음)
자립한 1인으로서 자립하는 시기는 언제가 적당하다고 보나?
좀 없을 때 나오는 게 좋을 거 같다. 그래야 세상을 살면서 성장에 필요한 촉진제를 얻을 수 있는 거 같아. 어떤 부모님이 천억을 갖고 있어서 아들이 백억 갖고 나오면 그게 재미있나? 집에서 사는 거나 거기서 사는 거나. 한 천억 가지고 있으면 집이 한 천 평 되려나? 그럼 같이 살아도 되겠네. 저 멀리서. (웃음) 약간 모자라고 약간이나마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을 때 자립하는 게 제일 좋을 거 같다. 그런 과정이 있어야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탄력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자신만의 ‘비타민C’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어쨌든 영화는 어떤 직접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일단 당신이 원한 건 구체적인 대안에 접근하는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똥파리>가 무슨 답을 내리는 영화는 아니다. “이걸 이렇게 해라”라고 하는 건 골 빈 선생님이 하는 짓이지. 그림에 소질이 있는 친구에게, “너 그림에 소질이 있는 거 같은데 한번 배워보는 게 어때?”라고 제시할 순 있다. 그런데 주변에서, “배워, 그림 해! 너는 그림 해야 돼.”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할 필요가 있나. 가능성에 대해서 제시해주는 게 제일 좋지 않을까. 대신 희망을 줘야지. 사람이 잘한다 그러면 진짜 잘한다니까. 그런데 못한다 그러면 진짜 못해. “너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그러면 자기가 정말 괜찮은 사람인지, 사랑 받아도 되는 사람인지 고민을 한다니까. 그런데 “너 정말 X같이 생겼다. 너 정말 애가 왜 그러냐?” 그러면 정말 그 말에 빠져서 그렇게 된다니까. 희망을 줘야지, 사람한테. 이 세상도 X같은데, 니기미. (웃음)
적막한 스크린의 검은 여백 위로 제목이 등장하고, 등장인물을 명시하는 자막이 눈을 깜빡이듯 몇 차례에 걸쳐 뒤따라 나타나고 사라진다. 그러다 마치 감았다 뜬 눈 앞에 비춰지는 어떠한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쫓아가듯 영화는 시작된다. 상하좌우로 흔들리는 카메라 앵글과 숏을 채우는 인물간의 거리는 일정하되 두서가 없다. 제3자의 곁눈질이거나 무심한 응시처럼 담담하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기록적인 다큐멘터리의 시야로 위장된 극영화다. 시종일관 무심한 태도로 응시하는 관점이 발견된다.
재활원에 있던 킴(앤 헤서웨이)은 아버지 폴(빌 어윈)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언니 레이첼(로즈마리 드윗)의 결혼에 참석하기 위해서 집에 돌아온 그녀의 마음은 짐짓 무겁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이웃의 눈동자엔 모종의 경계심이 배어있고 그녀 역시 그 경계심을 온 몸으로 체감한다. 레이첼의 결혼을 위해 오랜만에 모인 가족 사이에는 짐작할 수 없는 이상 기류가 감지된다. 킴의 등장과 함께 집안의 공기가 달라진다. 감춰진 사연의 속내가 궁금해진다. 약물중독으로 재활원에 있는 킴의 과거행적에 대한 불안 정도는 쉽사리 짐작된다. 하지만 이야기의 진전 속에서 가족의 들추기 힘든 사연이 암시되며 양상은 또 한번 발전된다. 단순한 맥락이 예감되던 사연에 입체적 호기심이 형성된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다큐의 눈을 빌린 드라마다. 그 심연에 잠겨있던 사연을 들쑤시고 이를 통해 발생하는 갈등을 적나라하게 비추며 반목을 통한 화합의 여정을 묵묵히 지켜본다. 시종일관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는 <레이첼, 결혼하다>의 정서를 관통하기 위한 하나의 실험이다. 흔들리는 카메라 너머의 인물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심기적 불안을 공유하고 있다. 마치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그 위력도 짐작되지 않는 갈등의 도화선 속에서 위태롭게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고 다스린다. 고의성이 다분한 캠버전의 거친 입자는 <레이첼, 결혼하다>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수단이 된다. 그 설득력이란 상황에 대한 사실적 인지라기 보단 정서적 동감에 해당한다. <레이첼, 결혼하다>가 가족의 갈등과 화합을 그린 드라마가 아니라 때때로 가족이라는 구조적 실존을 고찰하는 실험극처럼 보이는 건 이 덕분이다. 캠 버전의 화질과 핸드헬드의 진동은 이를 위한 미장센에 가깝다. 혈연의 운명에 속박된 애증의 알고리즘이 뜨겁게 폭발하고 차분히 가라앉는 3일 간의 서사 속에서 은밀하고도 생생하게 관찰된다. 음악의 기능성 또한 탁월하다. 외부가 아닌 영화의 내부에서 직접 연주되는 음악들은 극적인 감정들을 적절히 보좌한다. 특히 갈등의 심화 지점에서 들리는 위태로운 바이올린 선율은 기능적 효과가 극대화된다. 그 모든 것은 극적이되 과장되지 않았고 진심이되 사실은 아니다.
킴과 레이첼을 비롯한 그네들의 가족은 자신들의 불행한 과거사를 시간에 떠내려 보내고 망각하려 하지만 가족의 재회는 결국 기억의 소환을 이루고 갈등을 촉발시키며 서로의 상처를 긁고 이내 파헤친다. 다만 <레이첼, 결혼하다>는 가족의 갈등과 화합을 명시하기 위한 단선적인 드라마의 노선을 택하지 않는다. 서로를 증오하듯 거친 언어를 내뱉던 가족이 종래에 서로를 다시 끌어안기까지의 과정에 돌발적인 변수들이 매복하고 예상의 범위를 수없이 벗어난다. 결혼은 이 모든 과정을 이끌어내는 수단이자 갈등과 위기를 봉합하는 계기가 된다. 가족의 일원이 결혼을 통해 새로운 가족을 탄생시키는 과정 속에서 기존의 가족들과 벌이는 일종의 갈등은 유기체의 잉태와 마찬가지로 통증을 동반한다. 이는 새로운 굴레로 떠나기 직전에 벌어지는 일종의 속죄양이자 대속과 같다.
레이첼과 킴의 갈등 사이에서 아버지의 상흔마저 벌어진다. 내면의 침묵에 진심을 숨겨두며 살아온 가족은 비로소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상대의 상처 역시 확인한다. 감춰둔 사연이 드러나는 동시에 갈등이 폭발하고 위기가 도래하지만 결국 그 모든 상처를 확인함으로써 서로의 통증을 이해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전형적이란 단어로 일축되기 쉬운 사연의 본질은 입체적 양식을 통해 간과될 수 없는 특이성의 너비를 확보한다. 결국 가족은 갈등의 반목을 통해 화합에 도달한다. 그 화합의 방식은 어떤 사과나 반성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혈연에 대한 담담한 수긍을 통해 완성된다. 그 성찰의 깊이에 도달하기까지 큰 공헌을 펼치는 건 역시 배우들의 뛰어난 열연이다. 특히 앤 헤서웨이는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진심이 확보된 눈빛을 갖추고 있다. 그녀에 대한 재평가를 가능케 한 연기만으로도 <레이첼, 결혼하다>는 단연 값진 수확이다. 물론 로즈마리 드윗과 빌 어윈, 데브라 윙거를 비롯한 대부분의 배우들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열연을 동반한다. 그 열연은 <레이첼, 결혼하다>에 진정성의 너비와 깊이를 확보하는 큰 자산과도 같다.
뜨거운 눈물보다도 묵묵한 이해 속에서 가족은 비로소 서로를 진심으로 감싸 안는다. 이해할 수 없던 애증의 장벽이 무너지고 깊은 이해가 가능해진다. 혈연이라는 구속이 비로소 연민을 넘어 사랑으로 거듭난다. 그렇게 가족은 새롭게 거듭나 다시 헤어지고 돌아선다. 서로에 대한 냉소를 걷고 진심의 온기를 확인한 채 그리움을 머금고 돌아선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단지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깊은 의미를 전달한다. 담담한 시선으로 얼어붙어 있던 본의가 따스하게 녹아 내린다. 갑작스런 도입과 달리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결말의 롱테이크에 이 영화의 진심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