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 출연한 정은채는 뒤늦게 행운을 체감하고 있다. 물론 그 행운은 그녀 스스로 얻은 것이다. 혹은 이미 그녀에게 있었거나.
1년 전 즈음이었다. <여배우들>을 연출했던 이재용 감독이 새롭게 연출한 페이크 다큐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이하: <뒷담화>)의 촬영 현장에 정은채가 있었던 것이. 그리고 <뒷담화>에 게스트로 출연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사 PD는 촬영 현장에서 만난 정은채를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하: <해원>)을 준비 중이던 홍상수 감독에게 추천했다. 그렇게 홍상수 감독으로부터 연락이 왔고, 만났고, 첫 주연작을 얻었다. “홍상수 감독님의 오랜 팬이었어요. 언젠가 인지도가 쌓여서 한번 같이 작업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오리라 생각 못했죠.” 그렇게 촬영이 끝난 지 1년여 만에 개봉하는 두 영화의 개봉일은 우연히도 2월 28일, 개봉일이 같다. 나란히 베를린국제영화제에도 초청됐다. “<뒷담화>는 3일만에 3회 차로 촬영이 끝났어요. 그리고 홍상수 감독님 작품은 늘 촬영 회차가 얼마 안되잖아요. 이번에도 2주 동안 7회차 정도? 너무 금방 촬영이 끝난데다가 지난 3월에 촬영해서 벌써 1년 정도 시간이 흘렀는데 이렇게 엄청난 결과로 돌아올 줄 몰랐죠.”
사실 두 영화의 현장 분위기는 완벽하게 대조적이었다. <뒷담화>는 촬영 현장에서 사라져버린 감독이 모니터를 통한 ‘원격 연출’로 영화를 완성한다는 컨셉트의 페이크 다큐다. 단순히 컨셉트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촬영 현장의 배우들은 실제로 멘붕을 경험했다. “이재용 감독님이 배낭을 매고 혼자 미국으로 가셨대요. 촬영장에 감독님이 없으니까 나중엔 정말 모든 배우들이 실제로 패닉에 빠졌어요. 뭘 해야 될지도 모르는데 감독님께선 화상으로만 소통하시고, 그 와중에 화면은 계속 끊기고(웃음). 촬영 막바지엔 감독님이 강북 어느 호텔방에서 보고 있다는 루머도 돌았어요. 그래서 당했구나 생각했는데 또 어제 들어보니 정말 가셨다는 거에요. 아무도 못 믿겠어요(웃음).”
<해원>은 <뒷담화>와 다른 차원에서 신선한 경험이었다. 홍상수 감독은 촬영 당일 오전에 당일 분량의 시나리오를 집필해서 배우들에게 나눠주는 것으로, 실제 음주 연기를 지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당일에 어마어마한 대사량을 소화해야 한다는 걱정은 있지만 그 전날 밤에 뭐가 나올지 아무 것도 모르는 백지상태라서 오히려 마음이 편했어요. 마음을 비우고 현장에 가서 그 순간에 부딪히는 감정들과 분위기에 압도당한 채 촬영하는 거죠. 물론 어떤 관객들은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 속 캐릭터들이 실제 배우들의 모습이 아닐까, 저 대사가 애드리브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아요. 마음에 드실 때까지 대본대로 치밀하고 정교하게 찍으세요. 술 먹는 신에서도 수위 조절이 되지 않는다 싶으면 자제시키시죠.” 사실 이 모든 경험은 영화전문지를 정기구독할 정도로 영화를 좋아하는 정은채에게 일종의 확인이었다. “항상 주시했기 때문에 뜬금없거나 당황스럽기 보단 역시 듣던 대로구나 싶었죠.” 그녀에게 영화는 단지 좋아하는 것 이상의 진짜 취미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혼자 극장에 갔는데 그 느낌이 너무 좋았어요. 어떤 영화를 본다는 것보다도 혼자서 몰두하면서 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가 너무 즐거웠죠.”
그녀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데 익숙하다. 그건 8년간의 영국 생활로 인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녀가 4살이 될 무렵, 영국 주재원으로 발령이 난 아버지를 따라서 온 식구가 영국으로 건너가 2년을 살았다. 그녀에겐 기억도 가물가물한 시절이었지만 아버지가 기억하는 영국은 특별했나 보다. 중학생인 딸을 홀홀단신으로 영국 런던에 보냈으니 말이다. 덕분에 그녀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 땅의 가톨릭 계열 미션 스쿨에서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하며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거기서 배우로서의 꿈이 자라났다. “5년간 손바닥만한 기숙사 방이 제 모든 공간이었어요. 오로지 작은 컴퓨터 모니터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는데 문득 그 프레임에 들어가 살고 싶어졌어요. 배우가 되면 그 안에서 살 수 있잖아요.” 세인트 마틴 아트 스쿨에 진학해서 텍스타일 디자인을 공부한 것도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예술의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교 2학년 무렵 휴학계를 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잠재된 욕망을 더 이상 잠재워서만은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장 중요한 건 제 마음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한국에 돌아와 고향인 부산을 떠났지만 연고도 없는 서울은 런던보다 더 잿빛 같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배낭을 멘 채 지하철에 올라서 대학을 돌며 학생들의 단편영화, 졸업영화에 출연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연기가 역시 생각대로 잘 맞는 일임을. “내 마음이 확실해서 선택했다면 그게 잘못된 선택임을 알게 돼도 후회가 남진 않아요.” 그런 남다른 고집은 꿈 같은 경험으로 이어졌다. <해원>의 촬영장엔 그녀가 너무나도 좋아한다는 샬럿 갱스부르의 어머니인 제인 버킨이 나타났다. 한국에 공연을 온 제인 버킨은 홍상수 감독의 팬임을 밝혔고, 이는 <해원>의 촬영장을 방문하는, 영화에 출연하는 계기로 이어졌다. “서촌 뒷골목에서 제인 버킨을 만나니까 이상했어요. 꿈 같았죠(웃음).” 그녀가 동경하는 샬럿 갱스부르는 뛰어난 배우이지만 훌륭한 싱어 송 라이터이기도 하다.
밴드 메이트의 영화 <플레이>에서 빼어난 노래실력을 뽐냈던 정은채는 지금 미니 앨범을 준비하고 있다. “소속사 사무실에도 말하지 않고 프로듀서하는 친구와 같이 준비했어요.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진행했는데 어쩌다 보니 5곡이 완성됐어요. 만약 작은 공연장에서라도 노래할 수 있게 된다면 좋지 않을까 싶어요.” 재능이 많은 만큼 하고 싶은 일도 많다. 하지만 중요한 재능은 따로 있다. 연기란 것이 타인의 인생을 대신해서 살아보는 일이라 생각하면 그녀에겐 더없이 천직이다. “사람에 대한 호기심도 많고, 만남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요. 누군가 쉽게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들의 삶이 궁금해요.” 이국적인 외모에서 느껴지는 예민함과 달리 그녀는 시종일관 유쾌하게 웃으며 솔직하고 시원하게 생각을 늘어놓았다.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람이 좋아요. 이야기가 잘 통한다는 건 삶의 방식이나 취향에 있어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것들이 잘 맞는다는 거죠.” 그리고 말을 이었다. “연애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고 늘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유쾌하고 솔직한 잔향이 쉽게 흩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