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과 함께 필름 뉴요커로 자리해온 마틴 스콜세지는 전세계 영화의 수호자다. 일흔에 다다른 나이에도 녹슬지 않는 열의와 애정으로 영화를 촬영하고 발굴한다. 언젠가 영화가 될 그 삶에 대하여.
“내 모든 삶은 영화와 종교에 머물러 있다. 어쩌겠나. 그뿐인걸.” 마틴 스콜세지의 유년시절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이었다. 뉴욕 맨하튼 동부의 리틀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스콜세지는 가톨릭계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밀집한 그곳에서 언제나 죽음과 맞닿은 폭력을 목격하거나 내몰리며 자라났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란 스콜세지에게 일종의 동아줄이었다. 영화란 그 ‘비열한 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꿈이었고, 그는 그 꿈을 향해 적극적으로 투신했다.
할리우드의 6~70년대는 영화광들의 시대를 맞이한다.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와 같은 흥행사들을 비롯해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브라이언 드 팔마 등 작가주의적인 성향의 감독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현대영화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영화학과 출신 세대들, 즉 아카데믹한 씨네필들이자 테크니션이었다. 뉴욕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스콜세지 역시 그 중 하나였다. 단편을 감독하며 연출자로서의 경력에 시동을 걸던 그는 이탈리아 이민자 가문 출신의 고백적인 작품으로 가속페달을 밟았다.
스콜세지의 데뷔작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1968)는 여성을 이분법적인 시선으로 대하는 카톨릭계 이탈리아 이민자 청년의 잠재적 폭력과 이중적인 심리를 다룬 문제적 수작이다. 스콜세지에게는 시대적인 공기를 파악하고 현상의 근원을 살피는 능력이 있었다. 1930년대 미국에서 강압적인 불평등 처우로 가난에 내몰린 노동자들이 무법자가 되어 벌이는 사건을 그린 <공황시대>(1972)를 비롯해서 <비열한 거리>(1973), <택시 드라이버>(1976), <분노의 주먹>(1980) <좋은 친구들>(1990) <카지노>(1995) 그리고 <갱스 오브 뉴욕>(2002)까지, 뉴욕의 이민자 출신 갱단들과 남루한 뒷골목 소시민들을 비춘 스콜세지의 카메라는 가난과 차별이라는 담보로 상환한 비극적 폭력성을 담아냈다. 무엇보다도 스콜세지는 그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해나가기 위해서 폭력 그 자체를 유전자에 새긴 듯 살아가는 비열한 갱단들의 이미지를 강렬하고 사실적으로 포착한다. 그 특별한 방식의 삶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해나가는 이 세계의 일부로서 편입시킨다.
스콜세지는 이주민들로 채워진 뉴욕에 깃든 폭력의 역사를 탐구해낸 작가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뉴욕이라는 도시의 이면들을 발췌해온 진정한 필름 뉴요커다. 1920년대 뉴욕의 사교계를 배경으로 그린 은밀한 삼각관계에 관한 <순수의 시대>(1993)는 시대극이란 점에서 이례적이나 유럽과 같은 뉴욕 사교계 문화의 풍경을 들춘다는 점에서 그답다. 무엇보다도 뉴욕 상류층의 향락을 살핀 이 작품은 미국의 근간을 이룬 그들 역시 대서양을 건너온 영국의 이주민이란 사실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주요하다. 또한 스콜세지의 이례적인 작품 <특근>(1985)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불분명한 정체성을 보다 확고하게 밀어붙인다. 우연히 만난 여인에게 끌려서 한밤중에 집을 나선 한 남자가 처음 마주한 뉴욕의 이방인 같은 여성들과 거듭 만나며 미궁과 같은 하룻밤을 보낸다는 내용의 이 작품은 좀처럼 제 정신으로 살 수 없을 만큼 혼란한 도시의 현실 그 자체를 패닉에 가까운 과장된 스토리텔링으로 녹여낸다.
<쿤둔>(1997)과 <비상근무>(1999)로 쇠퇴의 기미를 지적 받던 스콜세지는 다시 한번 폭력의 역사로 들어선다. 혹독한 뉴욕 이민자들의 역사를 그린 <갱스 오브 뉴욕>은 괴물의 탄생을 그린 영화다. 폭력의 도가니 속에서 안착한 갱단들의 비열한 정서를 그린 스콜세지의 초기작과 달리 폭력 속에서 생존을 터득하고자 본능적으로 체득해 나가는 폭력성, 즉 폭력의 계승을 그린다. 미국의 미스터리한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의 전기물 <애비에이터>(2004)는 뉴욕의 이주민들이 꿈꾸던 환상, 아메리칸 드림에 근접한 어느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진취적인 도전을 거듭하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듯 뛰어난 수완을 거둔 남자는 끝내 스스로의 욕망으로 자신마저 불사른다.
스콜세지에게 비로소 생애 첫 아카데미 트로피를 안긴 <디파티드>(2006)는 홍콩의 <무간도>(2002)를 보스턴의 풍경으로 변환한 그의 탁월한 접근 방식으로 점철된 작품이다. 비정한 정서가 짙게 드리운 <무간도>와 달리 비열한 거리의 물리적 폭력이 체감되는 <디파티드>는 명분을 중시하던 <무간도>의 인물들과 달리 사적인 지배욕으로 팽배한 사내들의 생존 전장으로 변환된다. 무간지옥의 윤회 대신 비열한 거리 위에서의 구원을 행하는 사내들의 정조는 태평양을 건넌 리메이크작의 진수를 드러낸다.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을 영화화한 <셔터 아일랜드>(2010)는 <케이프 피어>(1991) 이후 처음 연출한 장르물이다. <셔터 아일랜드>는 마치 생존을 위해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던 스콜세지의 괴물들이 끝내 분열증과 망상증으로 내몰려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되묻는 과정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방식으로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인물의 태도는 폭력을 관찰해온 스콜세지가 보다 적극적인 답변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보다 새롭다.
스콜세지는 끊임없이 자신의 녹을 닦아온 거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첫 가족영화이자 3D로 촬영된 작품인 <휴고>(2011)는 분명 의외의 선택처럼 보인다. 하지만 <휴고>는 가족을 위한 영화도, 3D영화로 만들어지기 위한 영화도 아니다. 뤼미에르가 촬영한 달리는 기차 이후로 움직이는 그림으로서 관람의 대상이 된 영화에 스토리텔링이라는 영혼을 불어넣은 영화의 진정한 창시자 조르주 멜리에스에 대한 내용이 담긴 원작은 스콜세지의 마음을 당길만한 것이었다. 특히 뤼미에르의 달리는 기차 영상을 비롯해서 다양한 무성영화의 레퍼런스들을 3D로 체험한다는 건 진귀한 체험에 가깝다. <휴고>는 움직이는 그림이 영화라는 예술이 되기까지, 무성영화가 오늘날의 디지털 3D영화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역사를 스크린에 집약시킨다. 영화 그 자체를 오마주한다.
스콜세지는 말한다. “영화는 역사다. 영화의 모든 흔적이 사라진다면, 우리의 문화와 우리를 둘러싼 세계, 그리고 각자 서로와 자기 자신을 향한 연결고리를 잃게 된다.” 70세에 이른 나이에도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하는 스콜세지는 전세계 필름의 발굴과 복원 사업에 힘쓰며 끊어진 필름의 역사를 이어나가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 그 자체를 스크린에 투영하며 대중을 영화라는 마술로 인도하고자 한다. 결코 녹슬지 않는 감각과 애정으로, 영화의, 영화에 대한, 영화를 위한 삶을 살아간다. 영화와 함께 하는 그 삶이 언젠가 영화가 될 것이다.
101번째 영화, 한국영화계에서 임권택 감독의 위치는 숫자만으로도 명확해진다. 하지만 능선처럼 굽이진 대한민국의 근대사를 돌아온 구도자의 발걸음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영화를 꿈꾸고 있다.
임권택은 영화를 '먹고 살기 위해서'시작했다. 18살의 나이에 기차값만 들고 홀홀단신으로 고향을 등진 소년은 부산에서 노가다판을 전전하며 밥벌이를 했다. 그러다가 인연을 맺게 된 군화장사꾼들이 남긴 군화로 장사판에 뛰어든다. 그리고 서울로 상경한 군화장사꾼들 가운데 영화일을 시작하게 된 몇몇 사람이 임권택을 찾았다. 오랜 전란을 지난 사람들이 황폐해진 마음을 영화로 달래던 시기였고, 영화는 좋은 돈벌이가 됐다. 그렇게 임권택은 또 한번 먹고 살기 위해서 서울행을 택한다.
잡역부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다 연출부 생활을 거쳐 비로소 감독에 데뷔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7년이었다. 1962년, 26살의 나이로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발표하며 첫 삽을 뜬 임권택은 그 뒤로 10년여 동안 50편에 달하는 영화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에 대해 누누이 부끄럽다고 고백하며 51번째 연출작 <잡초>(1973)를 자신의 두 번째 데뷔작이라 말해왔다. “내 자신이 나이 들어가면서 삶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가 되니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단 말이오. 미국 영화의 아류나 다름없는 영화들을 찍어대다가 점점 이러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생계의 수단으로서 영화를 생산해내며 감독이란 직업을 택했던 그가 비로소 자기 세계를 추구하는 예술인의 삶을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로도 부침이 끝난 건 아니었다. “군사정권 때 반공영화, 생활영화를 많이 찍었는데 정권이 원하는 소재를 영화에 담아내면서 마음 속의 걸림 같은 소리가 들렸지요. 정권이 원하는 국책의 지향점을 영화에 담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를 살았을 때의 이야기에요.” 그는 한국 근대사 위로 풍랑처럼 떠밀려 가던 국내 영화계 위에서 자신의 돛을 펴고 표류하듯 나아갔다. 물론 시대의 큰 흐름에서 완벽하게 이탈할 수는 없었지만 <족보>(1978), <짝코>(1980) 등과 같이 훗날 재평가된 수작들이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건 중요한 대목이다. 그리고 한국영화 최초로 베를린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만다라>(1981)는 구도자의 세계관을 지닌 임권택의 내면을 비춘 첫 작품이었다. 이는 한국영화가 세계에 알려지는데 큰 공헌을 남긴 작품으로도 일컬어진다. 국내에서는 에로영화 취급을 받았지만 <씨받이>(1986)의 주연을 맡았던 강수연이 베니스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도 발생했다. 승려들의 반발로 촬영 도중 제작이 무산된 <비구니>의 아픔이 있었지만 임권택은 <아다다>(1987)나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로 구도자의 길을 보다 깊게 모색했다.
<장군의 아들>(1990)로 흥행감독의 대열에 올라선 임권택에게 90년대에서 가장 중요한 이력이 된 건 아무래도 <서편제>(1993)였다. 백만 관객을 동원하며 당대의 ‘국민영화’가 된 이 작품은 그보다도 임권택에게 보다 확실한 길을 열어준 작품이란 점에서 보다 중요하다. <서편제>보다 앞서서 제작됐던 <태백산맥>(1994)이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무산됐다가 문민정부의 출범을 통해 가능해졌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과거 일본 유학 중에 좌익사상을 익혀서 집에 돌아온 삼촌으로 인해 가정이 풍비박산 나는 꼴을 봤던 그에게 이는 큰 시련이었다. “중요한 건 실제로 자기가 인생을 살면서 쌓아가는 직감적인 삶의 체험이고, 또 그런 삶 속에서 생을 바라보는 관점에 철이 들어야 한다는 것이오.” <서편제>는 험난한 근대사의 굴곡을 지나오며 영화적 수난을 감내했던 임권택의 깨달음을 대변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서편제>의 형제나 다름없는 <천년학>(2006)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퇴색되지 않는 장인의 면모를 확실하게 증명한다. 빛을 잃고 득음하게 된 여인의 소리가 논밭으로 변한 포구에 물을 채우고 비상학을 날리는 신비의 선경, 이는 <취화선>(2002)의 칸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만큼이나 값진, 유산과 같은 풍경이다.
“내가 99번째 영화까지 고만고만한 역량을 가지고 찍어왔는데 100번째 영화라 하여 그전보다 더 나은 괜찮은 영화를 만든다는 복안이 있을 턱이 없지 말이오. 그런데 어딜 나가도 100번째라 하니 부담스럽지 않겠소.” 그는 ‘100번째’라는 무거운 기념비를 빨리 내려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임권택 영화다운 것에서 벗어나는 작업”이었던 <달빛 길어올리기>(2011)는 어쩌면 그의 세 번째 데뷔작이라 불려도 좋을 작품이다. 처음으로 디지털 카메라 촬영을 시도한 <달빛 길어올리기>는 한지를 소재로 임권택이 완성한 또 하나의 ‘우리 문화 유산 발굴기’다. 하지만 극영화 속에 소재를 녹인 전작들과 달리 소재에 대한 기록성을 보다 중시한 다큐멘터리적인 요소가 차별성을 이룬다. “나 몰라라 하기에는 너무 소중한 것들이니까요. 그 시대적인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후대의 어떤 이가 나서서 우리뿐만이 아닌 세계 인류에게 다가가게 만드는 일이 생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고. 누군가가 이를 하고 있으면 나도 그만둘 수 있지 않겠소.”
그는 영화를 통해 삶을 꾸려왔다. 그리고 어느 날 감독으로서의 길을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50년 동안 감독으로서 굽이진 세상을 흘러왔다. “찍지 못하는 것보다도, 폐가 될까 걱정이지요. 가령 내가 영화를 찍다가 완성을 못하고 죽거나 갑자기 치매에 걸린다면 감독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임권택은 아직도 생의 끝보다 감독으로서의 끝을 고민한다. 거장, 장인, 거목, 그 거창한 수사들보다도 그에게 어울리는 건 현재형의 시제다. 그는 여전히 마르지 않고 흐르는 강물이다. 현역감독, 임권택은 여전히 영화를 찍고 있다.
좋은 사진엔 스토리텔링이 담겨있다. 시퀀스를, 씬을, 내러티브를, 스토리텔링을 예상하게 만드는 훌륭한 프레임이 된다. 그리고 사진을 찍다 보면 언젠가 알게 된다. 인물 사진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인물 사진이 어렵다는 건 인물과의 소통이 필요한 까닭이다. 어떤 풍경을 배려하는 완벽한 구도를 찾는다는 것과 조금 다른 차원의 재능이나 경험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색다른 프레임을 연출하거나 뷰파인더 너머의 공간을 발견하는 것과 다른 차원의 자질이 필요하다.
좋은 인물 사진은 아름다운 표정, 멋진 제스처를 연출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 이상을 전달한다. 마치 베어진 기둥 단면 나이테처럼 인물의 인생을 대변할만한 어떤 단면 그 자체가 된다. 모든 인물에겐 저마다의 드라마가 있다. 훌륭한 사진가는 그 인물의 드라마를 결정적 순간에 담아 영원히 보존한다. 유섭 카쉬(Yousuf Karsh)는 아마도 그런 사진가 중 한 사람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인물일 것이다. 그가 찍은 수많은 명사들의 사진엔 저마다의 드라마가 담겨있다. 벽에 걸린 얼굴들을 따라 걷다 보면 잔잔한 우아함에서 거친 격정을 아우르는 수많은 인물들의 다양한 삶을 넘나드는 느낌을 얻는다.
유섭 카쉬의 자화상 포트레이트
이번 전시회는 보스톤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유섭 카쉬의 빈티지 프린트(vintage print) 중 65점을 직접 공수해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여기서 빈티지 프린트란 작가가 직접 인화한 오리지널 프린트를 의미하며 사진엔 작가의 자필 사인이 있다. 사실 사진은 그림과 달리 필름을 통해 많은 복제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희소성의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필름이란 것도 결국 인화가 반복되면 그만큼 수명이 단축된다는 점에서 보존적 속성의 한계에 갇힌 물질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요즘은 은염사진 보다도 디지털로 출력되는 사진들이 대세를 이루기 때문에 빈티지 프린트의 희소가치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사진이든 그림이든 오리지널은 의미가 있는 법이다. 이번 전시회의 가치도 이런 점에서 분명 뜻 깊은 의미를 지닌다.
윈스턴 처칠, 오드리 햅번, 알버트 아인슈타인, 피델 카스트로, 파블로 피카소, 슈바이쳐, 테레사 수녀, 등. 분야를 막론하고 세계 각지의 유명 인사들을 필름에 담아낸 유섭 카쉬는 마치 그와 공존했던 20세기 명사들의 일생을 단 한 장의 이미지로 대변하기 위해 살아온 것마냥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유명 인사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건 분명 좋은 이벤트가 된다. 하지만 단지 그 얼굴을 구경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얻을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인생에 있어서 좋은 경험이 된다. 카쉬의 사진을 볼 수 있다는 건 누군가의 인생에 있어서 좋은 경험이 될만하다. 그의 사진이 인물의 인생 전체를 대변할 순 없는 건 사실이다. 그건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인물의 인생을 짐작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건 분명 대단한 업적이다. 적어도 카쉬의 사진은 그 이상에 도달한다.
이번 전시회가 재미있는 건 사진뿐만 아니라 사진에 얽힌 일화를 담은 텍스트가 함께 전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공휴일엔 쉽지 않겠지만 어느 정도 넉넉한 여유를 지니고 전시장에 들어선 이라면 엄청난 만족을 느낄 거다. 단지 햅번이나 처칠 사진 하나 구경하러 왔다면, 그리고 정확히 그런 식의 구경만 띄엄띄엄 즐기다 전시회장을 떠나버렸다면 헛것을 본 셈이다. 만약 작품을 들여다본 후, 그 텍스트마저 하나씩 곱씹을 수 있었다면 이 전시회를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카쉬의 사진이 대단한 건 그가 단순히 대단한 인물들을 찍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그 대단한 인물들에 걸맞은 사진을 찍기 위해 얼만큼 고심하고, 얼만큼 인물에 접근했으며 얼마나 대담하거나 섬세했는가를 눈 여겨 봐야 한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최선의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 아이디어를 동원하고, 인물의 심연을 이미지에 노출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대화를 시도했으며 궁극적으로 상대와의 심리적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 스스로를 얼마나 열고자 했는지를 볼 수 있다면 많은 감동을 느낄 것이다.
물고 있는 시가를 강제로 뺏어서 찍었다는 윈스턴 처칠의 으르렁거리는 표정과 흔들림 없이 우아하게 머무는 오드리 햅번, 총명하면서도 깊고 순수한 아인슈타인의 눈동자, 하이라이트와 암부가 선명하게 교차하는 파블로 피카소의 풍경 등, 어느 작품 하나도 쉽게 건너뛸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회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사진은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마음에 깊게 각인된 건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의 사진. 스페인 출신의 첼리스트 음악가인 그는 바흐의 ‘첼로 무반주 연주곡’을 발굴하고 끝내 하나의 완벽한 형태로 완성한 거장이다. 카쉬는 어느 여타의 인물들과 달리 첼로를 연주하는 그의 뒷모습을 필름에 담아냈는데 엄숙한 풍경 속에서 우아한 선율이 흐르듯 신비로운 한 컷이라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사진엔 기묘한 페이소스가 넘실거리는데 스페인 내전 이후, 프랑코의 독재정권으로부터 미국으로 망명해 살았던 파블로 카잘스의 삶을 떠오르게 한다.
파블로 카잘스
윈스턴 처칠
알버트 아인슈타인
파블로 피카소
마더 테레사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헬렌 켈러와 폴리 톰슨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그레이 아울
시베리우스
소피아 로렌
제시 노먼
이번 전시회는 당초 8일로 끝날 예정이었으나 15일부터 앙코르 전시가 재차 열린다 하니 기회를 놓친 이들에겐 반가운 소식이 될 것 같다. 클림트전처럼 네임밸류에 비해 수준은 형편없는 전시회가 있는 반면, 이처럼 명성만큼이나 내용도 흡족한 전시회도 있다. 가격도 클림트전의 절반가인 8천원 수준이다. 이 정도 가격에 이런 전시를 즐길 수 있다는 건 분명 대단한 혜택이다. 누구나 DSLR을 액세서리처럼 지니고 다니며 셔터를 낭비하듯 눌러대는 세상 속에서 카쉬의 한 컷들은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의 깊이를 선사한다. 인물에 대한 깊은 배려와 고심의 흔적이 역력한 그가 선택한 찰나에 담긴 인물들은 이로서 영원을 산다. 단지 얼굴이 아닌 인생을 기록한다. 당신에게 이 전시회를 권하는 건 그 때문이다. 당신은 한 장의 사진이 아니라 인물 자체를 만나게 될 것이다. 카쉬는 그것을 가능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