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을 모티프로 제작된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와 마찬가지로 속편임을 자처하는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 2: 신비의 섬> 역시 쥘 베른의 세계관을 토대로 영화적 세계관을 구상했다. <신비의 섬>이 그것. 그리고 <신비의 섬>의 프리퀄에 가까운 <해저 2만리>도 일부 차용됐다. 심지어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와 로버트 스티븐슨의 <보물섬>도 영화적 아이디어에 기여했다. 하지만 전작이 그러했듯이 속편 역시 이 모든 문학적 텍스트를 충실하게 재해석한 작품이라기 보단 쥘 베른을 비롯해서 이 영화에 차용된 고전들의 세계관을 방아쇠로 삼아 3D 롤러코스터를 쏘아 올리는 작품에 가깝다.
전작에서 출연했던 캐릭터의 등장을 통해서 시리즈로서의 연결고리를 잇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 시리즈라는 정체성은 딱히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일단 전작에서 지질학자 삼촌과 함께 우연히 지구 속 여행을 떠났던 숀(조쉬 허처슨)은 조금 더 성장했고, 그는 현재 새로운 아버지 행크(드웨인 존슨)에 대한 거부감으로 갈등을 겪고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보내진 모종의 신호를 파악하고자 노력하던 숀은 그것이 모스 부호임을 알아챈 행크의 도움으로 그 신호가 오래 전 실종된 할아버지(마이클 케인)로부터 왔으며 할아버지가 신비의 섬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그저 쥘 베른의 세계관을 코스프레한, 할리우드발 3D 롤러코스터다. 쥘 베른 소설의 행간의 의미 따위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으며 그저 쥘 베른의 상상력을 테마파크 디자인 용도로 활용한 상업적 기획물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영화가 차용한 고전의 제목들은 사실상 잊어도 무방할 정도다. 그만큼 영화에서 언급할 만한 건 3D 입체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롤러코스터 비주얼인데 이런 측면에서 이 영화는 즐길만한 수준의 볼거리는 된다 말할만하다. 거대한 도마뱀의 추격신이나 거대한 꿀벌의 비행신 등, 3D 롤러코스터로서 최적화된 재미를 갖춘 신들이 종종 등장하며 눈요기를 채운다.
각본은 치밀하지 못하나 영화는 딱히 이런 요소들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관객 역시 이성적인 관람 자체에 대한 욕망을 버릴 때 편해질 수 있는 작품처럼 보인다. 그저 영화의 가이드에 따라서 스크린에 구현되는 테마파크 적인 세계를 체험하는 용도로서 이해할 때 편한 영화랄까. 이는 결국 3D 롤러코스터적 체험에 흥미가 없다면 호기심은 일찌감치 접는 편이 낫다는 말이기도 하다. 거대한 공룡과 같은 오락적 스케일을 그리고 있지만 정작 상상력은 공룡 두뇌만큼 빈곤하다. <달나라 탐험>을 제시하는 예고적인 결말 역시 무리수처럼 보인다.
좀처럼 가릴 수 없는 매력으로 존재감을 발산하는 배우들과 달리 어떤 배우들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신비로서 마음을 사로잡는다. 에밀리 블런트, 바로 그녀가 그렇다.
매우 어린 나이부터 런던의 남녀공학 사립학교 ‘Ibstock Place School’에서 교육을 받던 소녀가 심각한 말더듬이 증세를 겪게 된 여덟 살부터였다. 교사였던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 엄격한 교육보다도 치유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갖은 방도를 동원해도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하지만 12살 무렵, 소녀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한다. 연극을 지도하던 한 교사는 그녀에게 지금까지의 목소리와 다른 악센트를 지닌 캐릭터 연기를 주문한다. 그녀의 불안은 따뜻한 격려로 녹아내렸다. “진심으로 널 믿는단다.” 이는 교묘하고도 영리한 처방이었다. 그 무대에 오른 이후로 소녀의 말더듬이 증상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소녀는 그 무대에서 미래를 만났다. 그 소녀의 이름은 에밀리 블런트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에게 불어온 바람을 그저 지나쳐 보내지 않았다.
사립학교의 삭막한 분위기를 견디기 어려웠던 블런트는 다양한 예술인재를 육성하는 2년제 식스폼 칼리지 ‘Hurtwood House’로 진학한다. 그곳에서 승마와 첼로, 보컬 등 풍부한 끼를 인정받기 시작한 그녀는 2000년 에든버러 축제에서 공연하는 블랙코미디 연극 무대에 발탁된다. 이 무대에서의 연기는 한 유명 에이전트를 사로잡았다. 헬렌 미렌의 에이전트이기도 한 켄 매크레디는 블런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녀의 공식적인 첫 무대를 마련한다. 사실 이는 대단한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말의 경력도 없는 신인을 대배우 주디 덴치의 상대역으로 무대에 올려 보낸다는 건 결코 쉬운 판단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블런트는 데뷔작 <로얄 패밀리>를 통해 이브닝 스탠다드 어워드의 신인상마저 거머쥐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성공적인 데뷔전 이후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한번 더 무대에 올라 연기적 재능을 입증한 그녀 앞에 TV의 러브콜이 이어졌다. 배우로서 경력의 입지를 마련한 것이다.
다시 한번 원점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하자면, 블런트는 10년이 조금 넘은 경력을 지닌 배우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블런트의 경력을 현시점에서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그녀는 분명 입지전적의 상승세를 타고 온 배우다. 물론 10년 여의 경력이 짧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그녀가 단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에서 앤 해서웨이를 향해 비아냥거리던 얄미운 동료비서 에밀리를 연기하며 갑작스럽게 세간에 얼굴을 알린 할리우드 조연배우의 성공사례는 아니라는 말이다.
블런트의 매력을 보다 제대로 설명하려면 그녀의 영화 진출작 <사랑이 찾아온 여름>(2004)을 통해야만 한다. 영국 아카데미를 비롯한 유수의 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얻은 이 작품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모범적으로 자라났지만 일탈을 즐기는 소녀 탐신 역을 맡은 그녀는 와이드한 스크린의 너비만큼이나 광활한, 자신의 숨겨진 매력을 마음껏 발산한다. 블런트는 이 작품으로 빼어난 첼로 연주와 승마 솜씨를 선보이는 기회를 얻었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건 이 영화가 블런트가 지닌 진정한 매력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도전적인 눈빛에 감춰진 나약한 심성, 대범한 행동성 속에 감춰진 자기보호적 본능, 반항과 굴종의 심리가 부조리하게 얽힌 캐릭터의 이중성을 표현해내는 건 영화의 완성도와 직결된 것이었으며 이를 완벽하게 소화해낸 블런트는 영화가 얻은 찬사를 고스란히 자신의 성과로 가져갔다.
이중성은 블런트의 캐릭터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분명 메릴 스트립과 앤 해서웨이의 영화였다. 그럼에도 블런트의 존재가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건 일단 비중을 막론하고 캐릭터들의 매무새를 잘 어루만진 각본과 연출의 힘일 것이다. 하지만 역시 배우들의 능력을 간과할 수 없다. 메릴 스트립의 압도적인 연기와 앤 해서웨이의 설득력 있는 면모가 이 영화의 구조를 지탱하고 있다면 블런트를 비롯한 조연들은 그 구조를 빛내는 장식과 같다. 악마 같은 편집장의 시중을 견뎌온 베테랑 비서 에밀리는 실수 연발인 신참 비서 앤디를 향해 냉소적인 눈빛을 날리지만 이는 끝내 편집장의 신임을 얻은 신임과의 역전된 처지 속에서 구겨진 자존심이 반영된 질투로 변모한다. 에밀리를 연기한 블런트는 냉혹한 사회 조직의 질서 속에서 자존심을 통해 스스로를 방어하다 끝내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한 여인의 심연을 특유의 눈빛으로 소화해냈다. 특히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에밀리가 남몰래 눈물을 쏟아낼 때 밀려오는 처연함은 좀처럼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의 고충을 연민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었다. 남편과의 반목을 이겨내기 위해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 여인들에게 천착하는 <제인 오스틴 북 클럽>(2007)의 프루디나, 성인이 되어서도 자립하지 못하는 열등감으로 방황하는 <선샤인 클리닝>(2008)의 노라 역시 켜켜이 쌓인 내면의 상처를 숨긴 인물의 내면을 통해 연민을 자아낸다.
대영제국의 황금기를 주도한 빅토리아 여왕의 로맨스에 주목한 <영 빅토리아>(2009)는 블런트의 새로운 면모를 선보인다. 이 작품은 여왕의 치적을 나열하는 대신, 우아한 왕실의 풍경 속에 감금된 여왕의 인간적인 로맨스에 주목한다. 그녀는 권력자로서 고독을 감내해야 하는 운명에 매서운 눈빛으로 맞서기도 하지만 사랑을 갈구하는 심약한 여인의 초상을 수용하며 보다 섬세한 감수성을 연출해낸다. 반대로 얌체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달콤, 살벌한 여인’ 로즈로 등장하는 <와일드 타겟>(2010)은 블런트가 지닌 발랄한 면모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자신이 죽여야 하는 여인에게 사로잡혀 버린 킬러의 딜레마를 우습지만 귀엽게 그려낸 이 영화에서 블런트의 백치미는 ‘귀여운 여인’ 그 이상이다. 가리거나, 드러나지 않거나, 쉽게 가늠할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 블런트의 매력은 정의될 수 있으며 그 사이에서 엿보이는 이중성의 면모가 때때로 그녀를 신비스럽게 치장한다.
때때로 <울프맨>(2010)이나 <걸리버 여행기>(2010)와 같이, 장르적 소품과 같은 작품 속에서 소모되는 시행 착오적 경험을 건너기도 하지만 블런트는 이제 영국과 할리우드를 오가며 활발히 활동하는 세계적인 배우다. 맷 데이먼의 운명적인 뮤즈로 등장하며 시종일관 뛰어다녀야 했던 <컨트롤러>(2011)도 그녀의 매력을 간과하고 있다. 하지만 온몸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현대무용수로서 신비로운 몸놀림을 연출하는 그녀의 면모는 운명에 맞서서 한 여인을 선택한 남자의 심경을 공감시키고도 남을만한 것이다. 심각한 말더듬이였던 탓에 말하는 대신 지켜봐야 했던 소녀였던 블런트를 전세계가 주목하는 배우로 도약하게 만든 것도 어쩌면 그 덕분일 것이다.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 신비로운 매혹의 뮤즈, 에밀리 블런트는 그렇게 자신만의 빛을 드리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