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설계를 하는 승민(엄태웅) 앞에 대학교 1학년 시절 알고 지냈던 동창 서연(한가인)이 찾아온다. 불쑥 나타난 그녀는 대뜸 제주도에 집 한 채를 지어달란다. 난색을 표하던 승민은 결국 이를 수락하게 되고 두 사람이 재회한 현재로 인해서 과거의 승민(이제훈)과 서연(수지)이 그들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삐삐로 소식을 전하고, 무스로 머리를 넘기고, 펜티엄 1기가 메모리가 대단하게 느껴지던, 90년대에 그들은 만났었다.
<건축학개론>은 그 누구라도 결코 지나쳐버릴 수 없었던 첫사랑이라는 아릿한 기억에 관한 소묘다. 무엇보다도 첫사랑을 환기시키는 로맨스물의 제목이 <건축학개론>이라니, 생경하지만 그만큼 강렬하다. 건축과 로맨스의 상관관계는 대학 새내기 남녀의 인연이 건축학과의 건축학개론 수업을 함께 듣게 되면서 설계된 데서 비롯된다. 태어나서 줄곧 서울에서 살았던 승민과 대학 진학으로 인해서 제주도를 떠나 서울로 올라온 서연은 서울 전도에서 한 점을 차지하는 정릉에서 만나 인연으로 거듭난다. 완벽하게 남이었던 두 남녀는 ‘건축학개론’의 수업을 함께 듣고, ‘정릉’에서 사는 덕분에 남이 아닌 관계로 발전한다.
<건축학개론>은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첫사랑이라는 한 순간에 대한 송가다. 그 배경이 되는 90년대의 풍경은 그 기억을 보다 아련하게 수식하는 미장센이다. 21세기에 이르러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들, 존재하나 점점 밀려나가는 것들 혹은 꾸준히 외면 받듯 주변에 자리하는 것들. “죽은 걸 되살려주는 거잖아.” 영화 속 대사처럼 <건축학개론>이 환기하는 건 우리가 지나온 혹은 지나쳐버린 어느 시절에 대한 기억이다. 영화 곳곳에 깨알 같이 박혀있는, 장치된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자리하며 그 시절의 공기를 채운 그 이미지들은 결국 그 시절의 한 기억을 완벽하게 재생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영화에 복무한다. 단지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지키고 재현함으로써 기억의 환기를 부추긴다는 것.
첫사랑이라는 필연적 비극을 그린 이 영화는 감정을 건축적으로 착실히 쌓아나간다. 호기심에서 시작되어 설렘으로 번지고, 애절하다가 문득 두려워져 끝내 피지 못하는 첫사랑의 기억. 그리고 10여 년을 훌쩍 넘긴 남녀가 각자의 사연을 안고 서로에 대한 인연을 증축해나가며 그 시절에 완성하지 못했던 감정의 도면을 다시 한번 따라가는 순간의 아릿함과 그 끝에서 마주할 아련함.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이라는 인류 공통분모의 기억을 통해서 노스탤지어의 공감을 한껏 자극하는 영화다. 다만 감상적이거나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적인 설계와 이성적인 시공으로 완성한 현재의 멜로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과연 그럴까. 하지만 확실히 “우리 모두는 분명 누군가를 첫사랑했다.” 사랑 받을 수 없었던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사랑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누구나 그렇게 ‘기억의 습작’을 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습작을 넘겨 새로운 기억을 그려낸다. 그렇게 쌓이고 쌓여 인생이 되고 삶이 된다. 우린 수많은 기억의 습작을 지나오고 지나치며 현실을 살고 있다. 그러니 누구라도 그 시절이 그리울 수 밖에. 현실은 언제나 완벽을 바라기에 치열하고, 과거는 그만큼 관대하게 기억된다. 그 그리움은 결국 현실에서 취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영원히 머문 시절로 보존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는 이별한 과거를 여운처럼 돌아보며 현실을 버틴다. <건축학개론>은 그 애잔한 노스탤지어를 향한 성숙한 인사다. 사랑할 수 없었던 과거를 되새기며 현실을 지키고자 사랑한다. 그 시절의 사랑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영화는 그 아련한 기억을 통해서 현실을 되짚게 만든다.
재테크를 위한 투자로 탕진을 거듭하다 남편과 이혼하고 딸의 양육권마저 빼앗긴 미경(김선아)은 봉순(이경실)과 이만(나문희), 은지(고준희)와 이웃이자 같은 곗돈을 넣는 사이다. 그런데 그들의 계주였던 미용실 원장 성혜란(임지은)이 곗돈을 들고 튀었다. 게다가 남편 없이 두 아이를 키우는 봉순은 아들의 수술비를 곗돈으로 충당하려던 차에 충격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결국 그들은 함께 곗돈을 찾아 떠난다. 단지 곗돈을 들고 달아난 성혜란이 잘 간다는 미사리의 카페를 향해서 무작정 간다.
곗돈 떼인 아줌마들의 억척스런 고군분투를 담고 있는 이 영화가 <걸스카우트>라는 제목을 달게 된 건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별반 까닭 없다. 게다가 그녀들은 ‘걸(girl)’이라 불릴만한 이들도 아니다. 물론 그것이 (역시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영화와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니다. 단지 그녀들의 연대가 어떤 조직적 슬로건을 머리말로 삼기엔 그리 조직적인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곗돈을 떼먹고 달아난 이들을 찾기 위해 막연한 단서 하나만 믿고 뭉친 것에 불과하다. 그 와중에 그녀들은 ‘걸스카우트’란 이름으로 자신들을 지칭하게 된 것뿐이다. 결국 <걸스카우트>에서 ‘걸스카우트’는 별반 의미 없음을 통해 그 연대의 가치를 재생산한다. 제 각각의 사연을 통해 여자란 이름을 잃어버리고 아줌마로써 억척같이 살아가야 하는 그녀들의 환경을 환기시키고 그 연대에 필연적 의미를 부여하게 한다.
20대인 은지를 제외한 30대 미경과 40대 봉순, 60대 이만은 각각 아줌마라고 불리는 여성이다. 억척스럽게 살아가던 그녀들에게 여자로써의 정체성은 아줌마의 삶에 매몰된다. 게다가 20대인 은지마저 죽은 아버지가 남긴 사채 빚을 떠안으며 빚 독촉에 시달린다. 그녀들을 괴롭히는 건 치열한 자본주의적 살풍경이다. 게다가 매번 재테크를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던 미경은 곗돈마저 떼이고, 망나니 같은 아들의 박대 속에서 숨죽이고 살아가는 이만도 삶이 순탄치 않다. <걸스카우트>는 이토록 삶이 만만치 않은 여성들을 한데 모으며 그들을 자연스럽게 연대시킨다. 고단한 삶에 억매인 그녀들은 세대차이를 뛰어넘어 여성이라는 굴레로 얽힌 사연 아래 정렬한다.
<걸스카우트>는 여성의 연대를 남성에 대한 적대감 혹은 열등감의 반대급부로써 배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연상시킬만한 것이기도 하다. 아줌마라는 이름 안에서 그녀들은 억척스럽지만 어머니란 이름 안에서 그녀들은 강인해진다. 삶의 피로를 남성에게 떠안길 수 없는 생계의 주체라는 점에서 그녀들은 고단하지만 굳세다. 나약한 여성상을 넘어 아줌마의 탈을 쓴 어머니의 강인한 모성을 두른 <걸스카우트>는 여성을 남성의 대리적 자아로 배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평가될만하다.
각각의 캐릭터에 집중하던 영화는 중반부로 넘어가는 동시에 긴박한 추격전으로 양상을 달리하며 호흡을 조절한다. 쫓고 쫓기는 활극 속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우여곡절은 매 순간 반전을 발생시키며 유연한 이야기적 묘미를 발생시킨다. 게다가 스타일리쉬한 화면전환과 재치 있는 상황 설정은 나름대로 특별한 감상을 남긴다. 물론 한바탕 시끄럽게 몰아치던 이야기가 다소 허탈하게 내려앉는 결말부는 진부한 감이 없진 않지만 그 말미에서 등장하는 풀스윙 이미지마저도 나름 구도가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도 억척스럽지만 살가운, 아줌마와 어머니라는 여성의 양면성을 통쾌하면서도 가볍지 않게 그려낸다는 점은 <걸스카우트>가 지닌 가장 큰 미덕이다. 이는 동시에 자신의 캐릭터를 진심으로 이해하려 노력했을 여배우들의 고군분투가 일군 성과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