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자라기 보단 방랑자에 가깝다. 맞선다기 보단 궁금해서, 김지운은 항상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정복자가 아니라 개척자로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삶을 산다. 그 여정을 즐긴다.
블랙코미디, 호러, 필름
누아르, 웨스턴, 싸이코 스릴러 등, 영화감독 김지운은 언제나 한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듯 매 작품마다 새로운 장르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결국 어떤 장르에든 김지운이라는 인장을 찍었다. “<달콤한 인생>은 내면으로 침전하는
영화였기 때문에 외향적인 영화가 떠올라서<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처럼 호쾌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시각적인 스펙터클은 좋았지만 밀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어서 밀도가 빽빽한<악마를 보았다>를 쥐어짜듯이 만들게 됐죠.그러고 나니 괴롭고 우울한
느낌이 강해져서B급 코드의 유머를 펼칠 수 있는<라스트 스탠드>까지 닿게 된 것 같습니다.항상 지금 내가 느끼는 모순이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거나 이를 바꿔보고 싶다는 욕망들이 다음 작품에 반영되는 것 같아요.”
김지운 감독은 국립현대무용단 창단 5주년을 기념하는 <어린왕자> 가족무용극에서 구성대본과 영상연출을 담당했다. 영화감독이 무용극의 연출에 참여한다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거다. 다만
그가 김지운 감독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영화계에서 이름 석자만으로 이목을
끌 수 있는 감독은 많지 않다. 김지운은 바로 그런 감독이다. 그런
그가 스크린에 영사되는 영화 대신 무대에서 펼쳐지는 무용극에 참여한다니 필연적으로 그 계기가 궁금했다. “2005년도에
안애순 예술감독의 무용극 <세븐 플러스 1: 복수는
가슴 아픈 것>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한
에피소드의 대본을 썼고, 영화에서 사용하는 특수효과를 무대 위에 구현했죠. 그야말로 잠깐 도와드린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기획 단계부터 참여하게 됐죠. 그러다
본격적인 연출 제안을 받게 돼서 전체 구성을 잡고 대본을 쓰게 됐는데 지난 2월쯤 올해 미국에서 진행하려
했던 작품의 스케줄이 꼬이면서 동시에 국내에서 100억대의 장편영화 의뢰가 들어왔어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어린왕자>
공연일자와 그 장편영화 크랭크인 날짜가 겹치면서 총연출은 포기하고 대본 구성과 영상 연출을 맡게 됐습니다.”
사실 김지운이 지금과 같은 영화감독이 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무대 덕분이다.
그는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그는 ‘영화를
더 잘 알고자 드라마의 기본부터 다지고 싶어서’ 연극과에 들어갔다. 유년시절부터
워낙 영화를 좋아했던 그에게 연극은 영화로 닿기 위한 디딤돌이었다. 연극배우의 길로 나아간 친누나 덕분에
연극과 가까워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알게 모르게 누나의 동료들과 친하게 어울릴 수 있었고
연극을 자주 보게 됐습니다. 당시엔 공연 자체보단 보헤미안처럼 자유로운 연극인들의 삶을 막연하게 동경하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그만큼 무대에 그렇게 무지한 편은 아니었단 말이죠.”
그렇다면 그에게 무대 연극이란 어떤 흥미로 다가왔을까? “제한적인
공간에 수많은 시공을 담아내야 하면서도 어떤 것은 생략하고, 어떤 것은 함축하고, 어떤 건 일부만을 보여주면서 결국 그 전체를 이미지로 연상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무대 미학에 어렴풋이 열광하고
감동했던 기억이 있어요. 본래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의 물질적인 보다 저런 제한적 환경을 미학적
상상력으로 채워나가고 박진감 넘치게 표현하는 무대미학이 훨씬 예술에 가깝다고 느꼈던 적도 있고요.” 이런
그에게 무용극은 또 어떤 흥미로 다가왔을까? “연극을 통해 표현성의 발생과 기원을 찾게 됐는데 무용에선
몸을 움직이는 가장 원초적인 행위나 기원적인 몸짓, 제의적인 동작이 춤의 형태로 어울려 보인다는 것이
흥미로웠던 것 같습니다.”
김지운 감독은 항상 자신이 연출하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직접 써왔다. 그런
의미에서 무용극 대본을 쓰는 건 익숙하면서도 낯선 작업이었다. “원작을 다시 읽고 새롭게 느껴지거나
말을 건다고 느껴지는 부분 그리고 우리가 ‘어린왕자’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내게 작용하는 느낌을 따라 써내려 갔습니다.” 물론 만만한 과정은
아니었다. “영화 시나리오처럼 구체적으로 써야 하는지, 시처럼
여백을 두고 써도 되는지, 헷갈렸죠.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그냥 스스로 제한을 두지 말고 쓰는 대로 써보기로 했어요. 세부적인 이미지가 떠오르면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추상적인 이미지가 떠오르면 역시 그대로 자유롭게 썼어요. 그런데
무용단원들이 워낙 자유분방한 구성에 단련된 덕분인지 일관성 없는 대본을 알아보기 쉽게 구성표도 만들고 장면 진행표도 만들어 오더군요. 마치 타짜들이 화투패 깔듯이.”
영화는 감독이 관객에게 보일 시점을 통제한다. 하지만 무대는 온전히
관객에 의해서 시점이 선택된다. 하지만 김지운 감독은 그런 차이가 되레 같은 방식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신기하게도 드넓은 황야를 배경으로 둔 와이드숏을 봐도 대형 화면 한쪽 구석의 작은 점 하나가
커다란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결국 영화의 쇼트 안에서, 무대 위에서, 무언가를 어떻게 배치하고 어떻게 힘을 안배하느냐에
따라 같은 결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영화는 다양한 쇼트와 시선으로 변증법적인 충돌과 관계로 신을, 시퀀스를 만들며 스토리와 감정을 정교하게 구축해나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대는 영화에서 보여진 다양한 조각의 쇼트들을 쭉 펼쳐놓고 끊어지지 않게 이어나가며 스토리와 감정을 구축해나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죠.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 영화와 무대극 사이의 이질감을 좁혀 나갈 수 있습니다.”
사실 지금 김지운 감독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가족무용극 <어린왕자>연출에 참여하는 동시에 오는 10월에 크랭크인에 들어갈 새로운 영화 <밀정>의 촬영을 앞두고 시간을 쪼개서 로케이션 헌팅이 한창이다. 일제
치하 독립군에 관한 이야기인 만큼 상해 등지에서의 촬영도 예정돼 있다. 해외 영화사들로부터 작업 제안도
심심찮게 전달되고 있다. 전세계적인 인기를 모은 SF 재패니메이션 <인랑>의 실사화도 그의 손에 달려있다. 그를 즐겁게 만들 물음표는 아직 무궁무진하다. “A부터Z까지 딱 떨어지게 계획하며 작업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들이 생겨야 점점 명확해지는
편이에요.배우가
들어오고,의상이
들어오고,공간이
생기고,그런 과정을 통해 점점 이야기가 맞춰져요.하루키의 말처럼 나는 프로그래머인 동시에 게이머인 셈이죠.어떤 결과를 프로그래밍하지만
게이머로서 더 좋은 아이디어가 주제로 굳어가는 과정을 즐깁니다.” 불확실한 여정 가운데
서있다는 것. 그것이 김지운을 나아가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