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영의 인생 3막
POSSIBLE CHANGES
손태영은 지난 2년간 권상우의 아내이자 권룩희의 엄마로 살아왔다. 그녀는 지금 배우 손태영을 되찾으려 한다. 지난 2년이 지루하거나 불행했기 때문이 아니다. 보다 나은 인생을 위해서, 손태영은 가능한 변화들을 시도한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스튜디오의 창에 물방울이 맺혔다. 촬영을 마친 뒤, 손태영과 마주 앉아 무심하게 말을 떨어뜨렸다. “날씨가 좋았으면 했어요.” 손태영이 답했다. “비 오는 날도 나쁘지 않아요.” 다시 무심코 물었다. “비 오는 날 좋아하세요?” 그녀도 다시 답했다. “예전에는 별로였는데, 요즘은 좋더라고요.” 사소하지만 어쩌면 당연한 변화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한 가정의 주부가 되어 손태영이 보냈던 2년여의 시간. “2년 동안의 생활은 거의 똑같았어요. 룩희 유치원 데려다 주고, 친한 부부들끼리 가끔 모임도 갖고, 그냥 주부로서 보낼 수 있는 일상을 보내왔던 거 같네요.”
올해 3월, 손태영은 소속사를 옮겼다. 본래 남편 권상우와 같은 소속사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그녀였다. 일종의 출사표였다. 다시 배우 손태영으로 돌아오겠다는 선언이었다. “룩희가 이제 4살이거든요. 이제 유치원도 잘 다니고, 스스로 잘할 수 있는 일도 생기고 룩희한테 내 손이 조금씩 덜 가더라도 별로 불편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까 슬슬 내 직업을 찾아도 되겠구나 싶었어요.” 모든 삶의 기준을 아들 룩희에게 맞춘 엄마 손태영이 배우 손태영으로 돌아와도 되겠다고 생각한 건 역시 아들 룩희 때문이다. 출산 후 브라운관에서,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춘 손태영은 언제나 아들 룩희를 향해서 주파수를 맞추고 있었다. “종종 생각해요. 드라마라도 들어가면 룩희를 어떻게 하지? 아침에 옷 입히고 유치원 데려갈 준비는 어떻게 하지? 그런데 막상 오늘처럼 떨어져 있으면 그런 생각은 잠시 잊게 되는 거 같아요. 촬영 중간마다 통화 한번씩하고 애가 잘 있는 거 확인하니까 가끔씩 혼자 나와도 괜찮겠구나, 나 혼자 괜히 힘들게 생각했구나, 생각하게 되죠.” 손태영은 미스코리아 출신의 여배우라는 꼬리표를 오랫동안 달고 살았다. 그만큼 그녀에게서 떨치기 힘든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단아하고 지적이거나 도시적인 역할을 많이 했죠. 오히려 성격은 그 반대인데. 그래서 가끔 TV를 보면서 내가 주로 하는 역할이 아니라 정말 나와 닮았다고 생각하는 캐릭터들을 내 나름대로 따라 하기도 했죠. 내가 원하는 캐릭터를 정말 해보고 싶은데 현실이 그걸 알아주지 않으니까 답답한 면도 있고, 혼자 고민을 많이 했죠.” 작품 속 캐릭터들은 간혹 어떤 배우의 이미지와 성격마저 정의한다. TV나 영화를 통해서만 손태영을 본 이들 가운데 진짜 손태영을 아는 이는 없다. 손태영이 배우로서 활동한 기간은 10년이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결국 몸에 맞지 않는 역할을 입고 10년을 연기하듯 살아왔다는 이야기다. ‘원피스를 입는 것보다 스웨터나 티셔츠를 입는 게 더 편하고 친구들과 툭툭 건드리며 수다를 떨기 좋아하는’ 그녀에게서 세련되고 도회적인 이미지만을 소비하려는 현실은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편견의 감옥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 그녀의 사적인 연애 스캔들을 씹어 뱉은 가십성 기사들이 경쟁적으로 쏟아졌고, 악성 댓글들이 꼬리잡기처럼 이어졌다.
배우 생활을 접고 자신이 전공했던 무용을 다시 할까 고민하던 차, 매니저가 시나리오를 하나 가져왔다. <경의선>이었다. <경의선>의 한나는 공허한 마음을 스스로 달래고 사는 여인이었다. 손태영은 기가 막혔다. ‘내가 연기에 회의적인 상황에서 이렇게 어려운 캐릭터를 가져오면 나보고 연기를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하지만 <경의선>은 지금 손태영에게 있어서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동기부여를 만들어준 작품으로 남아있다. 자신이 바라지 않는 캐릭터를 연기하거나 자신이 바라는 캐릭터를 연기하지 못하는 이분법적인 상황을 벗어나서 그것을 바라건 바라지 않건 어떤 의미를 새겨주는 캐릭터가 있음을 알게 됐다. 분명 ‘성격과 맞지 않은 캐릭터’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 캐릭터가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제 입장에서 원하는 캐릭터가 있고, 저한테 주고 싶은 캐릭터가 있잖아요. 예전 같으면 그 작품이 좋다고 생각했을 때, 심지어 막연하더라도 캐릭터를 주는 대로 그냥 ‘할게요’라고 했죠. 하지만 지금은 원하는 것이 아니면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급할 게 없으니까요. 기다리더라도 내가 원하는 캐릭터를 하고 싶어요. 이대로 평생 못할 수도 있겠죠. 그래도 지금 다짐하는 건 조금이라도 더 나답고 사람들에게 나의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걸 하자는 거에요.” 여유가 느껴지는 말이다. 어쩌면 그건 세상에서 둘도 없는 자기 편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연예인으로 치면 조금 빨리 결혼했고, 그래서 말들도 많았던 것 같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플러스된 부분이 더 많다고 생각해요.” 인터뷰 중간중간에도 끊임없이 남편과 문자를 주고 받는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가정적인 남자’라 말한다. 평소 옷에 관심이 없던 권상우에게 전담 스타일리스트가 생겼다. 이제 은근히 자기 옷을 챙겨주기 바라는 남편이 그렇게 예쁠 수 없다. 화보 촬영이 있는 날이면 스타일링을 받은 뒤 부인에게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고 나서 아내가 만족해야 기분이 좋아지는 남편 얘기를 하는 동안 손태영은 정말 즐거워 보였다. 인생을 공유하고 미래를 약속한 진정한 파트너를 만난 것이다. 인생의 2막을 지나고 있다.
“3살 때였나. 어느 날 룩희가 TV를 보는데 아빠가 나온 거에요. ‘아빠가 나와!’ 그러길래 할머니가 ‘엄마도 TV 나왔어’ 말해줬죠. 그런데 룩희가 그러는 거에요. ‘아니야. 아빠만 TV나오는 사람이야.’” 섭섭함까진 아니더라도 룩희는 분명 손태영이 잊고 있던 시절을 흔들었다. 권상우의 아내로서 사는 삶도 좋지만 진짜 손태영을 잃어가고 있다는 고민도 중요했다. 때때로 지인을 통해서 권상우에게 보여주고 싶은 대본을 전해 받기도 했다. ‘권상우가 손태영 말은 듣는구나’라고 생각한다니 뿌듯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마음 한구석에 차오르는 물음표를 외면할 순 없었다. 생각했다. ‘일을 해야겠구나.’ “일하던 여성이 집에만 있으니 나태해지는 거 같았어요. 이대로 진짜 아줌마가 돼버릴 거 같고. 계속 활동하면서 내 스스로 자극도 받아야 스스로를 가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남편에게 말했다. “이제 나도 나가서 일한다.” 남편은 답했다. “그래, 해.” 누구보다도 손태영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남편 권상우였다.
손태영의 소속사 제이원 플러스의 대표 김효진은 다시 연기하고 싶다는 손태영의 말을 듣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냥 살아. 뭐하려고 힘들게 또 연기를 해.” 그녀는 손태영의 답변을 생생히 기억했다. “내 안에 열정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요.” 손태영은 ‘지금’이 절실한 시간이라고 한다. “이제 연기가 어떤 건지 조금이나마 알겠어요. 최소한 선배님들께서 연기하는 모습에서 드러나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건 다르잖아요. 이젠 조금 보는 눈이 생겼다고 할까.” 한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건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눈을 뜨는 일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성숙해진 단면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은 건 당연하다. 그래서 그만큼 조심스럽다. 다시 그저 손태영에게 주고 싶은 역할을 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인 셈이다. ‘액션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손태영은 지금 새로운 역할에 대한 허기를 느낀다.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에서 무서울 것도 없다. 바로 지금, 손태영은 인생의 3막을 열고자 한다. “일단 연기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연기적으로 인정받고 떠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창을 등지고 말하는 그녀의 뒤에선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풍경 앞에서 손태영은 ‘가능한 변화들’을 말하고 있었다. 그날 밤, 당연하게도 비는 그쳤다. (ELLE KOREA 8월호 No.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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