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거짓말, 한예리
강렬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던 한예리는 시종일관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생각을 발음해냈다. 다른 사람처럼 서 있다가 다른 사람처럼 말했다. 완벽한 거짓말 같았다.
2009년도에 만났을 땐 배우보단 무용수로서의 삶에 초점을 맞춘 인상이었어요.
연기를 하다 보니 모든 스케줄을 연기에 맞추게 됐어요. 체력적으로도 힘들어서 전공에 방해가 될 정도로 연기를 하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연기는 서른까지만 하려 했는데 스물 여덟 겨울에 이소영 대표님을 만났어요. 저라는 배우를 저보다 더 확신하고 계셨고, 이렇게까지 가능성을 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해봐야 할 것 같았어요.
결국 덕분에 여기까지 왔군요.
사실 대표님을 세 번 만나고 몇 달이 지나서야 연기를 하겠다고 했어요. 회사에 들어가면 무용을 못할 줄 알았거든요. 반대할 거라 생각했죠. 무용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저울질하게 됐죠. 하지만 대표님은 연기 외적으로 즐길 수 있는 장기가 있다는 건 배우로서 좋은 일이라고 권하셨어요. 덕분에 지금도 꾸준히 공연을 해요.
지금은 확실히 배우라는 직업에서 중력을 느끼는 셈이군요.
그럴 시기니까요. 이 일에 만족하는 한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어요.
‘재미있어서 하고 싶다’에서 ‘잘 해보고 싶다’로 바뀐 건가요?
좋아하다 보니 욕심도 생겼어요. 연기에 대한 진심을 확인한 셈이랄까요?
그만큼 연기에 임할 때 더 치열해지진 않았나요?
예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어요. 그저 감독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 제가 생각하는 인물과 감독님이 생각하는 인물의 차이가 크면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그 차이를 좁히기 위해 노력하죠. 가끔 감독님도 잘 모르실 때가 있어서 대화를 하며 함께 찾기도 하고요.
<최악의 하루>에서 김종관 감독님과는 어떤 대화를 나눴나요?
은희가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어요. 그리고 감독님께선 그게 늘 상대방에게 진심을 다하는 방식이라고 말했어요. 알고 보면 은희는 늘 진심인 거라고.
<최악의 하루>라는 제목처럼 은희는 최악의 상황에 내몰리는데 사실 최악의 상황으로 스스로를 내몬다는 점에서 정말 최악이죠. 그런 은희를 어떻게 이해하고 연기했나요?
'은희가 만나는 남자들이 원하는 은희는 누굴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들 각자가 원하는 은희를 표현해주고자 했죠. 그들이 생각하는 각자의 은희에 부합하기만 하면 된다고. 그래서 리액션만 해준다고 생각하고 연기했어요. 게다가 은희는 배우니까, 이미 거짓말하는 직업을 갖고 있잖아요.
결국 하등 나을 게 없는 남자들에게 맞춰주다 그들에게 지탄을 받는 쪽이 되니 정말 최악이죠.
사실 은희 같은 경우가 많을지도 몰라요.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상대에게 맞춰주기만 하는, 미숙한 연애를 할 때가 있잖아요.
일본배우인 이와세 료 씨와 영어로 대사를 주고 받았는데 그래서 특별한 건 없었나요?
영어를 잘 못하는 두 사람이 영어로 대사를 주고 받으니 오히려 편했어요. 더 집중해서 듣게 돼서 자연스러운 부분이 생겼죠. 리딩을 한번 했는데 감독님이 리딩을 다시 하지 말자고 하셨어요. 둘 다 영어를 잘 몰라서 '음...어...아?' 이런 제스처가 나왔는데 그 느낌이 너무 자연스러웠어요. 그런 반응을 기억하려 노력했죠.
<최악의 하루>는 8월쯤 개봉한다던데, 그 밖에도 개봉을 기다리는 작품이 많네요.
6월에 <사냥>이 공개될 거 같고, 장률 감독님의 <춘몽>도 촬영이 끝났으니 올해 안에 개봉하겠죠.
전주국제영화제는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가했어요. 심사 받는 입장에서 심사하는 입장이 됐네요.
마음 같아선 다들 뭐라도 하나씩 쥐어주고 싶었어요. 고생했을 게 보이니까. 영화제의 성격에 부합하는 영화를 선정하다 보니 제 취향과 무관한 선택도 하게 됐고, 그래서 재미있었죠. 서로 같은 작품을 선정할 땐 다들 보는 눈이 비슷하구나 싶기도 했고요.
얼마 전 칸국제영화제가 열렸는데 칸에 가보고 싶진 않나요?
가보고 싶죠. 대단한 영화제이니 기회가 생기면 좋겠죠.
결국 좋은 작품을 만날 기회가 중요하겠죠.
계속 한정적인 연기에 갇히지 않을 기회를 잡는 게 정말 중요해요. 하지만 기회를 얻는 게 쉽진 않죠.
조만간 김종관 감독님의 신작 <지나가는 마음들: 더 테이블> 촬영에 들어간다던데, 임수정, 정유미, 정은채 여배우 캐스팅이 대단하더군요. 게다가 노 개런티로 출연한다던데.
일단 시나리오가 재미있어요. 제가 나오는 부분은 정말 마음에 들었고요. 한 공간 심지어 한 테이블을 두고 인물들을 계속 바꿔가며 찍는 영화라니 재미있는 시도잖아요. 결과가 궁금해요. 이렇게 좋은 배우들과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다니 개런티는 중요하지 않았죠. 게다가 촬영분량이 총 6회차 중에 1회차 밖에 안되기도 하고요.
만약이란 말은 부질 없지만 지금의 관점에서 돌아봤을 때 서른 전에 연기를 그만 뒀다면 아쉬운 선택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랬다 해도 무용에 만족하며 살았을 거예요. 하고 싶은 걸 못 찾았다면 속상했겠지만 무용을 사랑하니까요. 게다가 그땐 제가 이렇게 살 거라 생각하지 못했어요
반대로 연기를 하길 잘했다는 생각은?
늘 하죠. 덕분에 좋은 경험을 하게 되니까요.
좋은 경험이란?
많은 사람을 만나 다양한 생각을 듣고, 얘기하는 것? 무용만 했다면 계속 무용하는 사람들만 만났겠죠. 그런데 연기를 하며 생각을 전환할 계기를 얻고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어요.
사람 만나는 게 부담스럽진 않나 봐요.
큰 부담은 없어요. 게다가 정리가 된다고 할까요? 내가 어떤 사람일지, 혼자 있으면 알기 힘들잖아요. 스스로 찾아내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타인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되는 사람인 거죠.
불편한 사람을 만나도 잘 견디나요?
그런 것 같아요. 적당히 잘 듣고 웃어주니까. 나쁜 습관이죠. 의사표현이 불확실한 거니까.
상대방에게 맞추려는 경향이 있나 봐요.
아무래도 무용을 할 땐 맞춰주는 편이었어요. 다수가 함께 무대에 올랐을 때 서로 배려하지 않으면 충돌하니까요. 그런데 영화 촬영장에선 많은 스태프들이 배우를 배려하니까 제가 맞추려 노력하지 않아도 돼요.
그런 경험에 영향을 받진 않았을까요?
의사 표명이 분명해졌다는 거? 예전보단 저에 대해 많이 묻게 됐어요. 영화 현장에선 내 관점을 정확히 전달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겨요. 그래서 분명한 생각을 전달하려 노력했어요.
촬영 현장 밖에서는?
음, 메뉴를 고를 때? (웃음) 예전엔 '먹고 싶은 거 하나 더 시켜'란 식이었는데 지금은 제가 먼저 어디 가자, 이거 먹자, 이러니까 친구들도 신기하대요.
그런데 정말 살이 찌지 않는 편인가 봐요.
사실 <육룡이 나르샤>하면서 많이 빠졌어요. 추위에 너무 떨어서. (웃음)
<육룡이 나르샤>는 첫 드라마 현장이었는데 어땠나요?
빠르게 진행되는 속도를 맞추는 게 중요했어요. 개인적으론 준비할 시간이 적어서 아쉬웠죠.
예상치 못한 등장이라 신선했는데 칼을 든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어요. 액션 연기에는 흥미가 있나요?
재미있을 거 같아요. 무용을 했던 게 도움도 됐고요. 기본적으로 쉽진 않았지만 최소한 기초부터 배우지 않아도 됐고, 어색하게 느껴지진 않았어요.
알아보는 사람이 늘지 않았나요?
늘긴 했지만 특별히 크게 신경 쓰이게 하는 분들은 없어요. 게다가 요즘은 다들 스마트폰을 보고 있으니 주변에 누가 있는지도 잘 모르잖아요.
SNS엔 관심이 없죠?
관심이 없기도 하지만 일단 부지런하질 못해요. 심지어 셀카도 못 찍고요. (웃음)
나이가 서른 셋이니 연애나 결혼에 대한 관심도 있을 텐데.
결혼보단 아이? 친구들과 모이면 '빨리 마흔 되기 전에 낳아야 하는 거 아냐?' 이런 얘기 많이 해요. 정작 남자도 없으면서. (웃음)
당연한 일일 수 있겠지만 아이를 낳고 싶은 특별한 이유가 뭔지 묻고 싶네요.
여성으로 태어나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경험이잖아요. 남성은 알 수 없는 그리고 아이를 낳지 않으면 여자도 알 수 없는 경험이니까, 특권과 같은 경험이라 생각해요.
해볼 수 있는 경험은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면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후회가 남더라도?
네.
(동방유행 JUNE 2016 VOL.9 'COVER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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