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반세기 동안 을지로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자연스럽게 낡아가면서도 풍화되지 않는 활기를 지켜왔다. 그 활기에 새로운 감각이 수혈되고 있다. 을지로가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기계의 굉음과 마찰음, 비좁은 골목을 민첩하게 누비는 오토바이와 자전거들. 이른 아침 을지로의 시간은 피가 도는 혈관처럼 꾸준하고 성실하게 흐른다. 6.25 전쟁 이후, 목재, 철물, 공구, 미싱, 타일도기, 조명 등 갖은 분야의 제조업자들이 자리를 잡고 반세기 동안 뿌리를 내린 을지로는 고목처럼 자리한 가게들의 숲과 같다. 모세혈관처럼 어지럽게 이어지는 비좁은 골목마다 손으로 직접 쓴 간판들이 이어진다. 그 간판 아래로 부지런히 오가는 발걸음과 바삐 움직이는 손놀림을 통해 을지로는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고, 구하지 못할 것도 없는 곳’이 됐다.
그런 을지로에 최근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다양한 분야의 예술작가들이 을지로에 둥지를 트고 작업을 개진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작가들의 유입으로 색이 바랜 거리에 새로운 활기가 채색되고 있다. 그런데 작가들은 왜 을지로를 찾았을까. “작업실을 옮길 시기가 됐고, 더 큰 공간이 필요해서 찾다가 을지로로 오게 됐어요. 사실 을지로는 재료를 사러 자주 오던 곳인데 이곳에 작업실을 두게 되니 운송도 용이해졌죠. 따로 용달을 부를 필요도 없고 리어카만 끌고 가면 되니까요.” 지난 해에 이태원에서 을지로로 이전한 ‘길종상가’의 대표 박길종의 말처럼 을지로는 장르를 망라한 예술가들이 작품의 재료를 수급하기 위해 발품을 파는 곳이다. 설치 작품이나 가구 제작 등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길종상가가 을지로에 새롭게 자리를 잡은 것도 그런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아트디렉터인 염승일이 디자인 스튜디오 ‘플랫플래그(Flat Flag)’를 을지로에 연 이유도 동일하다. “원래 문래동과 이태원에서 작업실을 열었다가 을지로3가의 공동작업실에 들어간 뒤 재료 공급과 공정 작업이 용이하다는 장점을 알게 됐고 개인 스튜디오를 열기 위한 최적의 장소를 찾았습니다. 공업지대가 가까운 곳에선 일반적인 사무실을 열긴 어렵지만 작품을 만드는 작가에게 터프한 환경은 문제가 안 되죠.”
재료와의 접근성이 용이하다는 장점은 새로운 영감을 부여하는, 창작의 기회비용을 제공하기도 한다. “다양한 재료를 접할 기회가 늘어나면서 잘 모르던 재료를 알게 될 때고 있고 그런 과정을 통해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얻을 때도 생기는 거 같아요.” 박길종 대표의 말이다. 아트디렉터 염승일도 비슷한 목소리를 낸다. “재료나 도구를 바로 수급할 수 있는 환경에 머무를 수 있으니 적용이 가능할 것 같은 소재를 접할 때마다 시도해 보고자 하는 의지가 생깁니다. 그만큼 당장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이 생기는 거죠.” 크게 발품을 팔지 않아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됐으니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이는 창작열을 한 뼘 더 늘리는 기회로 호환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을지로에서 거리감이란 그 자체로 작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이 된다.
을지로가 주는 거리감의 장점은 단순히 을지로 내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서울의 중심지에 자리한 을지로는 어디서든 가깝게 올 수 있고, 어디나 가깝게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이자 인쇄소인 코우너스는 지난 해 소공동에서 을지로로 자리를 옮겼다. “사무실에서 디자인과 인쇄를 하지만 재단, 제본, 기타 커팅 등의 후가공은 거의 충무로에 있는 인쇄골목에서 한다고 보시면 돼요. 그래서 소공동에 있을 땐 충무로까지 택시를 타고 오갔지만 을지로에선 상대적으로 가까워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죠. 게다가 종이를 배송할 때도 가까운 지역은 퀵비를 받지 않고요. 여러 모로 비용이 절감된 셈이죠.” 코우너스의 공동대표 조효준의 말이다. 또 다른 공동대표 김대웅이 말을 보탰다. “아무래도 충무로는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라 찾아가는데 부담이 덜한 거 같아요. 그래서 후가공의 종류가 다양하니 작업에 어울릴만한 업체를 찾기 위해 예전보다 많이 돌아다닐 수 있었어요.” 플랫플래그의 염승일도 비슷한 장점을 느끼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레이저 커팅이나 3D 프린팅을 활용하고 있는데 을지로와 가깝기 때문에 여러 모로 좋습니다.” 결국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중심에서 오늘날까지 다양한 산업을 품고 우직하게 자리를 지켜온 을지로라는 거점 자체가 예술가들을 위한 보고가 된 셈이다.
을지로 디자인 예술 프로젝트
개인적으로 을지로를 개척한 작가들도 있지만 공적인 프로젝트를 통해 을지로에 정착한 작가들도 있다. 지나 2014년 서울특별시 중구청의 시장경제과에선 을지로의 경제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던 중 을지로의 공가를 조사했다. 그리고 이런 공가들의 활용방안을 구상한 뒤 업무계획수립을 세운 것이 2015년의 일이었다. 중구청의 지원을 통해 비어있는 건물을 젊은 예술가들의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파악된 공가의 건물주들과의 사업설명회를 열었다. 자신의 공간을 얻지 못한 젊은 예술가들에게 개인의 창작열을 끌어올릴 수 있는 작업실을 제공하고 이를 지역사회에 새로운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기회로 모색하자는 취지에서였다. 몇몇 건물주가 이에 호응했다. 중구청에선 건물주를 설득해 절반으로 조정한 월세의 10%만을 작가에게 부담했다. 보증금과 나머지 90%의 월세는 중구청에서 보장하는 방식으로 2년 계약을 보장하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을지로 디자인 예술 프로젝트다.
그런데 중구청에선 왜 을지로의 공가를 예술가들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킬 생각을 했을까? “을지로에는 없는 게 없습니다. 예술가들에게 필요한 재료나 기술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지역이라 그들이 선호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사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언젠가 이런 풍경이 사라지기 전에 더 많은 사람이 봐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요. 그래서 예술과 연계하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가 용이한 부분이 있으니 예술가들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주고 지역경제에도 이바지할 수 있는 사업이라 판단했어요.” 중구청 시장경제과 이하숙의 설명처럼 을지로에 예술적인 숨을 불어넣고 새로운 활기를 일으키겠다는 취지에서 추진된 프로젝트인 셈이다.
그리고 2015년 7월, 프로젝트의 1기 멤버의 입주로 시작된 프로젝트는 현재 2기 멤버까지 입주하며 다섯 개의 공간을 확보했다. 여섯 명의 작가가 모여 다양한 예술활동을 전시하는 예술창작공간 ‘슬로우 슬로우 퀵 퀵’을 비롯해 교육대학원에서 만난 미술학부 전공자 7인이 함께 뜻을 모아 감상 교육이나 체험프로그램을 통한 공동체 중심의 미술사업을 개진하는 ‘R3028’ 그리고 가구와 생활용품 제작 스튜디오인 ‘산림조형’과 을지생산이라는 브랜드를 육성하고자 하는 금속공예 스튜디오 ‘서클활동’ 등 다양한 결을 지닌 젊은 작가들이 을지로 디자인 예술 프로젝트라는 지붕 아래에 자리를 폈다.
가구와 생활용품을 디자인하는 산림조형의 소동호 작가는 이 프로젝트의 1기 멤버로서 어느덧 을지로에서 1년을 보냈다. 학생 때부터 찾았던 을지로에 새로운 작업실을 구하려던 찰나에 때마침 프로젝트 공고를 알게 됐고 지원하게 됐다는 그는 을지로를 찾은 여타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물리적 접근의 용이함과 재료 수급의 수월함에 만족하고 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주변에서 다양한 기술을 접하게 되면서 새로운 영감을 얻습니다. 바로 옆에 흔히 시보리라고 말하는, 냉면기와 같은 원형판의 형태를 찍어내는 사출 공정을 하는 집이 있는데 요즘의 대량생산 방식과 다른 수공업 방식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그런 기술을 활용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방식이 있다는 걸 알아도 직접 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런 기회에 숙련된 기술자의 도움을 얻어 보다 효율적인 작업방식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서울 안에서 금속공예 재료 수급이 유일하게 가능한 곳인 을지로를 학생시절부터 자주 찾아서 잘 안다는 ‘서클활동’의 조민정 작가 또한 을지로의 전통적인 기술자들과의 협업 구조를 큰 장점으로 꼽는다. “금속 공예 특성상 기술자와 함께 가성비를 살릴 수 있는 협업이 가능할 거란 판단을 했어요. 그리고 작은 스튜디오에선 큰 공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시제품 제작이 쉽지 않은데 주변에 큰 공정이 가능한 제조사들이 있으니 시제품 제작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죠.” 오랜 역사와 함께 기술을 연마해온 숙련공들이 즐비한 을지로는 젊은 작가들 입장에선 자신들의 창작열을 완성도 있게 구현해줄 원숙한 파트너와의 협업을 기대할 수 있는 이상향인 것이다. 물론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오랫동안 생업의 터전을 지켜온 기술자들을 설득하고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는 과정이 단박에 이뤄질 리 없다. 그리고 이미 시행착오를 겪은 젊은 작가들은 새로운 접점을 찾아가는 중이다. 서클활동의 이건희 작가 또한 그렇다. “지속적으로 소통하면서 협업을 해봐야 가능성이 확대될 것 같아요. 한편으론 숙련된 기술자들의 작업 방식을 관찰하는 과정이 현장 상황을 고려한 현실적인 디자인을 구상하는 계기가 되는 것도 같습니다.”
중구청에선 매년 을지로 일대의 조명 업체들과 연계한 ‘을지로 라이트웨이’라는 행사를 개최한다. 올해에도 11월에 어김없이 열리는데 을지로 디자인 아트 프로젝트에 입주한 작가들도 이 행사에 참여할 예정이다. 아무래도 지원사업에 참여하는 작가들이 의무감에 짓눌리는 건 아닐지 의심스러웠지만 작가들은 오히려 이를 새로운 기회로 여기고 보다 적극적이었다. “처음에는 의무감이 들었지만 점점 지역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생기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방향성을 찾게 되는 것도 같아요.” 실제로 소동호 작가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뒤 을지로에 많은 기여를 했다. 을지로 버스 정류장에 타일 도기 특화정류장 디자인에 참여했고, 을지로 투어 프로그램인 ‘을지유람’의 지도 디자인 작업을 도맡기도 했다. 소동호 작가와 함께 을지3호를 공유하는 이지성 작가는 더 큰 그림을 기대하고 있다. “을지로 기반의 창작자가 늘어난 만큼 그들을 묶을 수 있는 네트워크가 형성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마 올해 라이트웨이에서 어느 정도 실현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문분야가 각자 다른 만큼 서로의 재능을 나누는 활동을 조금씩 해나가야죠.”
을지로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로봇공학을 전공하고 영국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뒤 영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활동해온 정원석 작가가 국내로 들어와 스튜디오 ‘메이커원(Makerwon)’의 자리를 을지로로 낙점한 것도 접근성 때문이었다. “금속과 전자 관련해서 재료 수급이 용이한 동시에 매뉴팩처링이 가능한 곳은 을지로뿐이었어요. 영국에도 이런 곳은 없어요. 서울처럼 고도로 발달한 도시 한가운데에 매뉴팩처링이 가능한 지역은 전세계적으로 이곳뿐일 거예요.” 그의 말처럼 을지로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기 힘든 풍경이다. 언뜻 보면 낡고 황폐해진 슬럼가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살아 숨쉬는 공간이다. 오래된 역사성을 지닌 영토를 기반으로 켜켜이 쌓여온 기술의 집합소. 창작적인 영감을 부추기는 이야기와 창작을 구체화시키는 노하우가 자리한, 완벽한 유산이다. “일본 요꼬하마 시의 상점가인 모토마치는 장인들의 집합소 같은 곳이에요. 모토마치에서 만든 제품들은 도쿄의 유명한 상점가인 긴자로 유통되는데 그만큼 오리지널이라 인정 받는 브랜드가 된 셈이죠. 을지로로 그렇게 지역을 대변하는 브랜드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이하숙 씨의 바람이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녀와 같은 꿈을 꾸는 예술가들이 이미 을지로 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을지로라는 이름으로, 가능한 미래다.
(MorningCalm 09 SEPTEMBER 2016 'Contemporary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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