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사제들>을 보고 나서 설레발을 주체할 수가 없어졌다. 지쟈스 크라이스트. 어쨌든 본격 설레발 시작.
<검은 사제들>은 전율이란 단어의 의미를 명확히 체험시킨다. 사실 한국에서 이렇게 우아하고 강렬한 게다가 한국적인 엑소시즘 영화가 나올 줄은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검은 사제들>은 국내 장르물의 새로운 한 뼘을 정복한, 오롯이 홀로 선 수작이다. 무엇보다도 엑소시즘을 기반에 둔 오컬트 호러를 국내산 로컬 엑소시즘으로 건져낸 느낌인데 결과적으로 월척이다. 웹툰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장르적 느낌을 실사로서 설득력 있게 구현했다. 최후반부에 판을 살짝 키운다는 느낌은 있지만 딱히 거부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요즘 심심찮게 나오는 수입산 장르 코스프레물이 아니라 국내산 배양에 성공한 느낌.
무엇보다도 장르물에 성장드라마의 서브 플롯을 잘 녹였고, 캐릭터물로서도 상당한 매력이 있다. 전반적인 연출 리듬도 상당히 좋다. 특히 본격적인 엑소시즘 초반 신은 정말 매혹적이었달까. 빠르게 컷을 편집해 이어붙이면서도 슬로 템포로 카메라 앵글을 틀면서 줌인아웃을 거듭하는데 긴장감을 고조시키면서도 차분하고 세련된 리듬감으로 평온한 몰입감을 보장하는 느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 신만 떼서 계속 보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었음. 각본과 연출이 모두 괜찮은 인상인데 이 모든 것이 장재현이라는 신예 감독의 물건이라니, 이게 온전히 그의 역량을 뿌리 삼아 나온 결과물이라면 정말 그 이후를 닥치고 기대하겠다.
캐릭터 연출과 연기가 상당히 좋다. <검은 사제들>을 집에 빗대면 김윤석은 기본적인 골조의 틀을 잡아주고 강동원은 그 구조 안에 탁월한 풍경을 마련해주는 인상. 그리고 영신 역의 박소담은 그 풍경 안에 자리한 강렬한 소품. 사실상 캐릭터의 세기만으로 배우의 역량이 과대평가될 수 있는 배역인데 그 한계를 뚫고 스크린에 이름 석자를 박는 느낌. 그야말로 발견. 단언컨대 그녀는 새로운 바람이 될 것이다.
이미 알았지만 <검은 사제들>을 보고 백퍼 확신. 강동원은 그냥 그 자체로 장르다. 비현실, 초현실, 초자연은 다 강동원이란 이름 석자 앞에서 긍휼해진다. 강동원이란 필터를 거치면 판타지가 하이퍼 리얼리즘으로 걸러짐. 지쟈스 크라이스트 강동원느님. 앞으로 강동원의 모에가 되겠다.
최동훈의 <타짜>가 해운대 앞바다였다면 강형철의 <타짜-신의 손>은 캐리비안 베이다. 인공 파도에 휩쓸리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지만 결국 인공 파도는 인공 파도다. 애초에 기획되지 않았던 속편이란 맹점과 한계를 그나마 강형철이 잘 메우고 이어낸 인상이지만 태생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인상. <타짜>의 캐릭터들이 차, 상, 마, 포 같아서 저마다의 파괴력도 있고, 차가 판을 휩쓰는 압도감과 마가 차를 삼키는 쾌감도 있었지만 <타짜-신의 손>은 '졸'의 향연 같아서 실력이 평준화된 선수들의 싸움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졸'전임이 뚜렷해 보여 김이 새는 지점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속편인지라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하진 않아서 크게 아쉽진 않았지만 썩 만족스럽지도 않았다. 다만 러닝타임에 비해서 지루하게 느껴지진 않았다는 점에선 본래 품었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
때가 되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그것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처럼 따져 묻지 않는다. 그건 마치 누군가의 아들이나 딸이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실 대항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이 공명정대하고 명확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따져 물어야 한다. 하지만 역시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피곤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바로잡겠다고 나설 때엔 그만한 각오가 필요한 법이다. 어쨌든 아나키스트, 즉 무정부주의자란 말은 있어도 무정부인, 비국가인이란 말은 없지 않은가.
<남쪽으로 튀어>는 오쿠다 히데오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둔 작품이다. 그리고 원작처럼 어느 아나키스트 아버지와 그의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소설과 달리 아들의 1인칭 시점 대신 객석의 시점과 동일한 3인칭 시점으로 영화를 목격하게끔 만든다. 국민 같은 거 하지 않겠다며 주민등록증은 찢어버린지 오래이고, 당연히 세금도 내지 않는 최해갑(김윤석)은 <남쪽으로 튀어>의 핵심이다. 그는 이 영화가 존재하도록 이끄는 필요조건 같은 존재다. 무정부주의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연출하는 그는 한량과도 같지만 불의 앞에선 불처럼 뜨겁다. 그럼에도 최해갑 못지 않은 운동권 경력을 자랑하는 그의 아내 안봉희(오연수)는 그의 이상을 응원하는 강력한 아군이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이런 면모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하지만 미워하진 않는다.
<남쪽으로 튀어>는 일종의 계몽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 같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우화다. 최해갑의 삶은 객석을 찾은 관객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생경한 태도에 가까울 게다. 이는 단순히 캐릭터가 지닌 고차원적인 이상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태도로서 드러나는 삶의 방식이 그렇다. 누구나 불만을 가질 수 있지만 결코 실행할 수 없는 행위들을 최해갑은 한다. 불합리한 시스템의 오류를 순응하며 편하게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달아난다. 엄밀히 말하자면 최해갑이 선택하는 삶의 방식이란 자립에 가깝다. 투쟁이나 싸움이라기 보단 체제로부터의 독립이자 현대적인 사회제도로부터의 자립을 의미한다.
<남쪽으로 튀어>는 사실 그러한 삶이 행복하다고 설득할 수 있다면 보다 나은 영화다. 하지만 영화가 그럴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때때로 그러한 삶이 국가관에 길들여진 대부분의 삶보다 나아 보이고 행복하게 다가오는 풍경들이 목격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태도를 제시하고 권유하기 보단 일종의 전시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치열한 현실감보단 현실성을 염두에 두고 그린 이상에 가까워 보인다. <남쪽으로 튀어>가 계몽적인 영화라기 보단 우화에 가깝다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영화는 현실에 밀착하는 대신 현실을 연상시키는 어떤 상황들을 수집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기워 넣는다. 수집된 상황들은 대부분 권력화된 정책과 제도 안에서 발생하는 갖은 불합리들이다. 최해갑은 이에 저항한다. 그 저항은 대부분 통쾌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영화는 웃고 있지만 사실상 씁쓸한 이야기다. 영화는 나름대로 긍정적인 인상을 유지하지만 영화가 전시하는 비극의 강도는 사실상 현실의 파괴력을 따라잡지 못한다. 쉽게 말하자면 <남쪽으로 튀어>는 현실보단 이상으로 기운 영화다.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캐릭터의 결기를 지켜보는 재미는 유쾌하지만 사실상 영화가 제시하는 청사진이란 그리 희망적인 인상이 아니다. 현실에서 얻어지는 무력감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감상 또한 영화와 완벽하게 밀착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쪽으로 튀어>는 대한민국 국민 엄밀히 말하자면 서민들의 불만과 분노의 뿌리를 살피는 진단으로서 유효하다. 좀처럼 명확한 출처를 규정하기 어려워서 막연하게 분노를 삭히고 현실에 수긍하듯 살아가는 당신에게 어떤 근거들을 제시한다. 선동하기 보단 자각하게 만든다. 물론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자각해온 이들에겐 빤한 난장처럼 보일 가능성도 농후하지만.
확실히 캐릭터를 보는 재미가 쏠쏠한 영화다. 범상치 않은 존재감을 지닌 아나키스트 최해갑을 연기하는 김윤석의 캐릭터 소화력과 담담하고도 결연하게 최해갑을 내조하는 안봉희를 소화해내는 오연수의 의외성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역 배우들의 기똥찬 연기는 물론. 이처럼 저마다 살아있는 캐릭터들은 영화가 다루는 날선 소재와 논조를 유쾌하게 중화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소년은 세상에 관심이 없었다. 세상 또한 소년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소년은 어려서부터 가난했고, 엄마가 없었다. 어느덧 열여덟 살의 고등학생으로 성장한 소년은 가난과 소외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하지만 어느 날, 그 가난하고 소외된 소년을 향한 세상의 관심이 시작됐다. 완득(유아인)의 담임선생인 동주(김윤석)의 짧은 언어로. “얌마, 도완득!” 하지만 갑작스러운 관심이 완득은 귀찮기만 하다. 하지만 같은 동네, 그것도 심지어 건너편 옥탑방에 사는 담탱이는 퇴교 후에도 완득의 주변에서 그를 귀찮게만 한다. 그래서 완득은 기도한다. “제발 똥주 좀 죽여주세요.” 하지만 그 교회에서도 완득은 듣는다. 자신의 호를 지어준 담임선생 동주의 부름을. “얌마, 도완득!”
김려령의 동명 원작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완득이>는 타이틀롤 완득이에 관한 이야기다. 원작의 설정 일부에 작은 변주를 가하긴 했으나 <완득이>는 기본적으로 원작의 활자를 스크린에 세워 넣는 작업에 충실한 작품이다. <완득이>는 어느 한 가난한 소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그늘과 부조리한 편견을 살피고 들추는 작품이기도 하다. 밤무대에서 춤을 추는 꼽추 아버지, 얼굴조차 본 기억이 없는 어머니, 어려서부터 가난과 소외에 길들여진 소년이 세상을 외면하며 스스로를 방어하며 성장해 왔다는 것을 설명해내기보다도 그 과정을 짐작하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는 그러한 일련의 불행을 비추는 과정에서 감정적인 감상을 휘발시키고 객관적인 상황을 살필 수 있도록 감상을 유도한다.
영화의 주를 이루는 건 완득이와 동주의 관계다. 완득이의 일상에 빈번하게 침입하는 동주와 이를 괴로워하는 완득이의 관계적 변화, <완득이>의 드라마틱한 사연은 바로 그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살갑지는 않지만 솔직하고 진실된 담임선생님 동주가 조용하게 모나듯 살아온 완득이의 일상에 끼어들어가며 진심을 전달해내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꿈꾸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제자에게 꿈을 지도하는 스승, 그리고 차츰차츰 그 귀찮은 관심에 호감을 느껴나가기 시작하는 소년, 유아인과 김윤석의 탁월한 호흡이 만들어낸 캐릭터의 앙상블은 가히 탁월하다. 특히 촌철살인의 대화만으로도 유쾌한 동주가 사납지만 한편으로는 순진하여 속을 알 수 없는 완득이의 멘토가 되어서 그에게 세상으로 다가서는 법을 지도하는 과정은 시종일관 웃음기를 머금은 채 유쾌하게 진전된다.
<완득이>는 거대한 비극의 자질 위에 쌓아 올린 희극의 탑이다. 주인공인 완득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주변에 산재한 대부분의 이웃들은 역시 가난하거나 심지어 핍박 받는 이주노동자들의 가족이다. 다양한 민족적 구성원으로 이뤄진 다문화사회로 들어선 오늘날 한국 사회 안에서 영화가 여전히 편견과 부조리에 노출된 동남아 이주 노동자들의 삶을 다루는 방식에는 이해와 배려라는 기본적인 예의가 갖춰져 있다. 동시에 극적으로 구성된 그 모든 광경이 대단히 비극적인 현실성을 기반으로 두고 있는 결과물들임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그 비극적인 현상에 자리한 이들의 삶을 단순히 비극의 희생양처럼 단순화시키지 않는다. 가난과 소외, 편견과 멸시라는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연대하며 하나의 공동체를 완성하고 삶을 꾸려나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며 공감을 얻어내는 동시에 일종의 희망을 불어넣는다. 동시에 기본적으로 영화가 품은 코미디의 품질도 훌륭하다. 대사의 호흡, 캐릭터들의 어울림, 상황의 진전, 전반적으로 영화는 군더더기 없이 순탄하게 흘러가면서도 자신만의 고유적인 특성을 어필해낸다.
“가난해서 쪽팔린 게 아니라 가난해서 쪽팔리다고 생각하는 게 진짜 쪽팔린 거야.” <완득이>의 대사들, 특히 그 중에서도 동주의 대사들은 명확하고 현명하게 현실을 관통한다. 타인의 불행을 애써 위로하는 대신, 그 불행을 직관하고 그 불행이 결코 삶의 끝자락이 아님을 각인시킨다. 결국 <완득이>는 대책 없는 낙관으로 구제할 수 없는 불행을 위한 현실적인 처방에 관한 이야기다. 소외된 이들의 삶에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보다도 그 삶에 어떤 방식으로 손을 내밀어야 하는가라는 방향을 유쾌하게 제시한다. 물론 그러한 계몽은 완득이의 우직한 표정과 동주의 유려한 언변을 등에 업고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극의 중심에 놓인 완득이의 담담한 표정을 통해서 비극에 대한 자위적인 감상의 배출을 억제하는 대신, 역설적으로 웃음을 활성화시키며 그 현장을 꾸준히 응시하도록 유도한다. 완득이는 결코 울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관객에게 호소하지 않는다. 깨알 같은 웃음을 선사하며 끝까지 지켜보게 만들 뿐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그 비극 안에서도 성장하는 소년이 있음을, 살아갈만한 가치를 지닌 존재들이 있음을 자각하게 만든다.
물이 밀려오고 다시 밀려나간다. 상륙하듯 육지로 들이치던 바다는 잠자코 머물다 다시 수평선 너머로 끌려나간다. 대륙과 반도 사이를 메운 갇힌 바다는 해안선이 비좁다는 듯 육지를 넘보다 해수면 저편으로 사그라진다. 한반도의 서편, 중국의 동편에 자리한 황해는, 그래서 탁한 바다다. 끊임없이 육지를 꿈꾸듯 해수면을 밀고 올라오다 흙을 머금고 미끄러져 사라지는 바다는 탁하지만 아련하게 출렁거린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역할을 하는 입구와 출구를 제외하면 총 4개의 챕터로 구성된 <황해>는 마치 해수면으로 밀려들어오는 바닷물과 같이, 한국으로 밀항한 조선족 청년으로 인해 걷잡을 수 없게 전개되는 사건을 휘몰아치는 풍랑처럼 묘사하는 영화다. 탁한 해수면과 같은 현실을 묘사하는 영화의 끝에서 발견되는 건 그 밑바닥에 침전된 진한 농도의 드라마다.
연변에 사는 조선족 택시운전사 구남(하정우)은 한국으로 돈을 벌러 떠난 뒤 소식이 끊어진 아내로 인해 채무에 시달리며 마작까지 손을 댄다. 그런 그를 마작 업소에서 발견한 청부살인 브로커 면가(김윤석)는 그에게 한국에서 사람 하나만 죽이고 오면 모든 것을 해결해주겠노라 제안한다. 충무로의 신예 나홍진이 연출한 <추격자>에서 괄목할만한 연기적 호응을 이끌어냈던 하정우와 김윤석이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춘 <황해>는 <추격자>와 마찬가지로 두 배우의 연기적 면모만으로도 대단히 주목할만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외적으로 연기적 사투를 펼쳤다고 해도 좋을 지난 사례와 마찬가지로 <황해>에서도 두 배우는 가히 지독하다는 말을 온전히 긍정적인 수식어로 얻어낼 수 있을 만큼 경이적인 연기적 성과를 만들어냈다.
<추격자>와 달리 <황해>에서 두 배우의 출연비중은 동등하지 않다. 하정우가 연기하는 구남이 <황해>라는 영화를 긴 선처럼 이어나가는 캐릭터라면 김윤석이 연기하는 면가는 그 선의 시작과 끝을 관장하는 인물이다. 모든 사건 위를 달리는 건 구남이지만 그 사건을 구상하는 건 면가의 몫이다. 물리적인 출연량의 차이는 딱히 두 배우의 중요성을 가늠하는데 주요한 단서가 아니다. 중요한 건 그만큼 <황해>가 하정우라는 배우의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나는, 그리고 그의 가늠할 수 없는 여백의 내공을 상상케 만든다는 점에서 경이롭다. 동시에 김윤석이 만들어낸 끔찍한 세계-이건 단순히 어느 캐릭터를 넘어선 공포적인 세계에 가깝다.-를 마주한다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치는 기억이 될 것이다. 마치 괴물처럼 연기하는 두 배우는 <황해>에서 가장 눈에 띌 수 밖에 없는 장점이 될 것이다.
물론 <황해>는 단지 두 배우의 연기만으로 논할 수 없는 영화다. 나홍진은 탁월한 집을 지었고, 배우들은 그 위에서 좋은 포석이 되어 자리하고 있다. 156분에 다다르는 <황해>의 러닝타임이 길다고 느껴지지 않는 건 거친 이미지를 가득 품고 있는 이 영화가 감상을 지배할 만큼 가공할만한 리듬감 위에서 진행되는 까닭이다. 4개의 챕터로 구성된 <황해>의 내러티브는 문학적인 중후함을 지니고 있음에도 장르적인 흥미를 발동시키며 숨통을 죄는 서스펜스의 틈새로 종종 위악한 웃음의 틈새를 열어놓기도 한다. 살과 피가 튀는 잔혹한 이미지들을 더러 담고 있는 이 영화가 어느 장르영화들에 비해서 지나치게 앞서 나가는 잔인함을 묘사하고 있다고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해>는 폭력성의 강도가 만만찮은 작품이다. 이는 정형화된 장르적 연출에 대한 기시감을 거세함으로써 관객에게 충분한 감상의 대비, 일종의 안전거리를 허락하지 않는 까닭이다. 연출적인 긴장감을 조성하고 찌르고 베어내는 살육의 이미지를 전시하는 여타의 장르영화들과 달리 <황해>는 그대로 으깨고 곧장 찢어낸다. 어떤 대비감도 없이 폭력들이 고스란히 객석으로 전이되고 관객의 심리에서 체감된다. 실로 무자비한 폭력성이다. 이 지점에 대한 호불호와 무관하게 영화는 온전히 폭력성의 체감이라는 선상에서 리얼리티라는 쾌감을 일궈낸다.
<황해>는 풍랑처럼 휘몰아치는 서사의 리듬감과 거칠게 밀고 올라오는 연출력을 통해 관객의 감상을 지배하는 영화다. 사실 영화의 호흡이 급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황해>의 서사로부터 압박을 느끼게 되는 건 그 서사를 구성하는 이미지와 캐릭터들의 에너지 덕분일 것이다. 거친 조선족 사내들과 조직폭력배들이 더러 등장하는 탓만은 아니다. 이 영화는 한국적(인 현실이라고 믿어지는) 리얼리티를 온전히 믿게 만드는 사실적인 연출을 기반으로 영화가 만들어낸 모든 상들을 관객들에게 완전히 몰입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러닝타임의 너비를 심리적으로 압축해낸다. 물론 이 영화의 서사가 완벽하다고 말하기에는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결정적인 몇몇 단서를 전시하는 순간들은 우연에 천착하고 있으며 모든 인과 관계를 구성하는 캐릭터간의 심리가 명쾌하게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화는 자신의 에너지를 완전하게 이용하게 있다. <황해>는 스크린에서 출렁이는 그 에너지만으로도 관객을 압도해내고 있는 영화일 게다. 이는 <추격자>의 연장선상에서 나홍진의 야심을 더욱 세차게 드러내는 측면이란 점에서도 흥미롭다.
거대한 컨테이너 차량이 곤두박질치는 장면만으로도 <황해>의 스케일은 고스란히 증명된다. 그리고 <황해>는 자신이 담보한 폭력성을 단순히 거칠게 밀어붙이는 영화이기 이전에 탁월하게 설계되고 정제되어 연출된 액션신들로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영화이기도 하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에서 등장하는 카체이싱은 한국영화에서 두고 두고 회자될만한 시퀀스라고 장담해도 좋다. 또한 살인을 준비하는 구남이 현장을 둘러보며 이를 준비하고 사건에 맞닥뜨려 싸움을 벌이는 장면을 비롯해서 <황해>의 액션은 실제적인 체감을 가능케 하는 동시에 장르적인 긴장을 함께 전달한다는 점에서 탁월하게 위태롭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런 모든 이미지의 끝에 걸리는 감정적인 결과물은 실로 깊은 허무다. <황해>는 지금 우리가 발붙인 현실을 탁하게 바라보고 있는 어느 누군가의 시선에서 비롯된 결과물이 아닌, 실로 탁하게 어지럽혀진 현실을 스크린에 거대한 상으로 띄워 올린 것처럼 끔찍하다. 그 끔찍함이 <황해>의 본체다. 나홍진은 이제 서울의 골목에 드리운 피비린내를 넘어 한국이라는 세계를 채운 거대한 욕망이 내려앉은 암담한 밑바닥을 그려낸다. 그 밑바닥을 전전하는 이들에게 남는 건 지독한 느와르다. 현실은 탁하다. 그래서 슬프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아니면 체념하거나, 지독하고 또 지독하다.
고명한 피리를 불며 요괴를 잠재우던 표은대덕은 다른 세 신선의 실수로 요괴에게 피리를 빼앗긴 뒤,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세상으로 사라진다. 세 신선은 세상에 뛰쳐나온 요괴들을 잡기 위해 사라진 표은대덕과 피리의 행방을 좇고, 이를 위해 도사 화담(김윤석)에게 도움을 청한다. 신선들과 함께 요괴를 좇던 화담은 그 과정에서 전우치(강동원)와 맞닥뜨리게 된다. 설화적인 프롤로그를 밑그림으로 판타지의 자질을 채색해나가는 <전우치>는 이를 통해 토속적 비현실성을 현대적 시대상 안으로 이입해 나간다. 실존인물이라 전해지기도 하는 고전소설 ‘전우치전’의 신묘한 주인공 전우치를 발체해 현대적 배경에 이입한 <전우치>는 전통적인 영웅 캐릭터의 뼈대에 현대적 서사라는 살을 붙이며 ‘한국형 히어로무비’의 유형을 제시한다.
욕망이란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서로를 밟고 올라서려는 캐릭터들의 아귀다툼을 그려낸 최동훈 감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전우치> 역시 저마다의 욕망으로 맞부딪히는 인물들의 격돌을 그린다. 하지만 최동훈의 지난 두 전작이 복마전이었다면 <전우치>는 각축전이다. 두 전작이 저마다의 욕망을 향해 내달리던 캐릭터들의 힘겨루기였다면 <전우치>는 욕망을 안은 캐릭터의 롤러코스터다.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의 캐릭터들은 욕망의 패를 감추고 상대의 패를 읽어내기 위한 수싸움을 벌인다. 그들은 복마전의 말판 위에 놓여있다. 그 말판을 설계한 최동훈 감독은 능수능란하게 주사위를 굴리듯 캐릭터들의 일진일퇴를 연출하며 다채로운 캐릭터의 묘미를 한껏 활용한다. 비중의 크고 작음과 무관하게 캐릭터들의 개성을 드세게 살리고 이를 통해 영화의 스타일마저 단단하게 동여맨다. 두드러지되 모나지 않는 캐릭터 영화를 완성해냈다. <전우치>를 향한 팔 할의 기대감도이를 겨냥한다. 나열된 배우들의 이름을 읽어내려 가는 것만으로도 감상에 대한 군침을 돌게 만드는 <전우치>는 궁극적으로 이를 조율할 최동훈의 캐릭터 조율 실력을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인 물건처럼 보일만한 작품인 셈이다.
강동원이 연기하는 전우치는 매력적이다. 시대적 배경의 변화에도 곧잘 넉살 좋게 어울리는 전우치는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캐릭터처럼 과장된 제스처와 표정으로 비현실적 이미지를 축적하면서도 현실적 괴리감을 능숙하게 돌파해나간다. 단순히 그 캐릭터의 표현적 존재감만으로도 장르적 가능성이 구축되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문제는 그 주변부다. 중심에 박힌 캐릭터의 모양새는 명확하지만 그 주변부에 놓인 캐릭터들은 구심점이 흐리고 쓸모를 명확하게 얻지 못한 채 방치되거나 전시된다. 유해진의 초랭이는 적당한 수준의 위트를 자아내고 사연의 전환점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쓸모를 지닌다. 전우치를 상대하는 화담을 연기하는 김윤석의 표현력은 적절하나 선악의 기질적 변화를 설득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일방적이라 캐릭터 자체에 대한 흥미가 반감된다. 동시에 임수정이 맡은 서인경은 지나치게 장치적이며 세 신선은 <전우치>에서 제 구실 자체가 무력한 낭비에 가깝다. 특별출연으로 이름을 올린 백윤식과 염정아만큼의 설득력도 없다. 제 역할을 설득하지 못하는 캐릭터들은 그저 자리만 지킨다. <전우치>에선 최동훈의 장기라 할만한 캐릭터영화로서의 리듬이시종일관 엇박자로 삐걱거린다. 그저 캐릭터를 볼모로 서사적 노선을 거침없이 돌파해나갈 뿐이다.
현대도시를 배경으로 둔 무협판타지라는 점에서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연상시키는 <전우치>는 전자보다 적극적으로 토속적 설화를 차용한다는 점에서 보다 한국적인 판타지 장르로서의 토대를 마련했다 할만한 작품이다. 십이지신상을 모티브로 구상된 듯한 요괴들의 디자인이나 설화를 바탕으로 직조된 스토리는 판타지라는 외래장르와 보다 어울리는 장르적 접목을 시도했다 할만한 지점이며 어느 정도 성과를 인정받을 만한 구석이 발견된다. 지나치게 빠른 속도감을 구사하는 액션신을 따라잡기엔 숨이 차게 느껴지는 앵글의 잔상이 시야를 가리며 감상적인 묘미를 반감시키지만 전반적인 액션신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앵글은 공간감에 있어서 탁월한 시야와 반경을 제공한다. 심중한 여운을 남기고, 유연한 위트를 담아낸 대사들의 순발력도 빼어나다.
다만 그 요소들이 잘 어울리지 못하고 저마다 독립적인 빼어남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보인다는 게다. 마치 저마다의 음을 지닌 음표들이 악보로서 오선지에 배열된 채 화음을 이루지 못하고 제 음을 고집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기분 사이로 끼어드는 일말의 아쉬움을 떨쳐내긴 어렵다. 너무 많은 것을 쥐고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많은 것들을 흔들어 섞지 못해서 문제인 셈이랄까. 음표만 나열한다고 악보가 나올 리 없는 것처럼.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는 욕망이라는 게임판을 달리는 캐릭터들의 암투를 그린다. 최동훈의 장기는 상대의 패를 읽고 훔치는 다양한 캐릭터들을 다루는 능수능란함에 있었다.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면서도 전체적인 극의 분위기를 단단하게 여미는 캐릭터들의 조화는 최동훈의 장기를 여실히 증명했다. 그런 면에서 <전우치>는 핵심적인 기대감을 배반하는 작품이다. 강동원이 연기하는 전우치는 꽤나 쓸만하다. 그 존재감과 표현력만으로도 하나의 장르적 가능성을 보게 되는 기분마저 든다. 다만 주변부의 캐릭터를 다루는 손맛이 무뎌졌다. 구심점이 흐린 인물들이 쓸모를 명확히 얻지 못한 채 방치되거나 전시되고 그만큼 숫적인 산만함만 어지럽게 감지된다. 최동훈의 장기라 할만한 캐릭터영화로서의 장점을 만끽할 수 없다는 점에선 분명 아쉽다.
하지만 <전우치>는 최동훈이란 이름에 얽힌 기대감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르적 토대의 구축이란 점에서 성과가 발견되는 작품이다. 현대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무협판타지라는 점에서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연상시키는 <전우치>는 토속적 설화를 적극 활용하며 캐릭터를 완성하고 스토리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한국적이란 의미를 강하게 어필해낸다. 십이지신상을 모티브로 둔 요괴들의 디자인이나 설화를 바탕으로 직조된 스토리는 판타지라는 외래장르의 국산화란 이름에서 보다 어울리는 형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품는다. 지나친 속도감을 두르고 묘사되는 액션신이 시각적인 묘미를 반감시키지만 공간감을 구축하는 앵글의 포착력은 탁월하다 평할만하다. 심중한 여운을 남기고, 유연한 위트를 담은 대사들의 순발력도 빼어나다. 문제는 그 요소들이 잘 어울리지 못한 채 저마다 독립적으로 장기자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제자리를 찾지 못한 음표들이 악보로서 연주되지 못하고 제 음만 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기분 사이로 끼어드는 아쉬움을 떨쳐내기 어렵다.
이윤기 감독의 신작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촬영 때문에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국가대표> 이후로 4편의 영화에서 하정우란 이름이 보이더군요. 이미 촬영이 끝난 <페럴렐 라이프>를 비롯해서 현재 촬영 중인 <티파니에서의 아침을>, 그리고 나홍진 감독의 신작 <황해>와 전계수 감독의 차기작으로 예정된 <러브 픽션>까지, 정말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배우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웃음) 쉴 틈도 없어 보이는데 체력적인 부담은 없나요?
체력적인 문제는 없어요. 일단 저와 프로덕션끼리 서로 약속했던 부분만 잘 맞아떨어져서 계획적으로 촬영이 준비되고 이뤄지기만 한다면 스케줄은 물리적으로 전혀 무리 없이 돌아가니까요.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건 지난 캐릭터를 복제하지 않고 잘 변주해 나가면서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해낼 수 있는가라는 부분이죠. 배우로서 얼마나 소비되지 않느냐가 최고의 관건이랄까. 상업적인 설득력을 염두에 두면서도 기존에 있었던 영화보다 새롭거나 실험적인 프로덕션, 제작 방식을 생각하면서 작품을 선택하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러브 픽션>은 굉장히 새로운 영화에요.
어떤 점에서 말인가요?
대사의 템포나 리듬, 톤 자체가 굉장히 만화적이에요. 우리가 영화상에서 만나는 일반적인 캐릭터들의 대사 속도보다 2배 정도 빠르거든요. 과거 ‘하워드 혹스’의 작품이나, ‘우디 알렌’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의 대사만큼이나 빨라요. 그런 점에서 유니크(unique)한 면이 있죠. 지금은 제작이 딜레이(delay)돼서 언제 촬영에 들어갈지 미지수지만 분명히 언젠가는 꼭 전계수 감독님과 찍어내고 싶어요.
지금 찍고 있는 <티파니에서 아침을>로 이윤기 감독과 두 번째 만났고, 이미 <황해>를 통해 나홍진 감독과 두 번째 작품을 약속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윤종빈 감독이나 김기덕 감독과도 이미 두 차례씩 작업했죠. 한 감독과 다시 만나서 작업하는 경우의 장점을 그만큼 많이 느끼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물론 엄청난 신뢰가 생기죠. 전작을 통해서 지지고, 볶고,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고, 모니터를 통해서, 어떤 시간과도 바꿀 수 없는 많은 부분을 공유했으니까요. 감독이 창조해낸 세계와 내가 연기했던 인물이 있는 한편의 영화를 우리가 만든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젠 전반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서 베스트를 뽑기 위해 같은 단계에서도 더 위에 있는 문제들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거죠. 거두절미 할 수 있는.
나홍진 감독의 차기작은 언제 결정하신 건가요?
<추격자>를 끝내고 나서 나홍진 감독님과 윤석이 형하고 같이 또 다른 그림을 그려보면서 이런 거 하면 재미있겠다 싶었던 게 있었는데 그게 <황해>였어요. 작년 여름에 결정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생각해오면서 준비하고 있죠. 당장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부터 준비해야지, 하는 게 준비가 아니잖아요. ‘구남’이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감독님을 만날 때마다 얘기를 나눠가면서 장기적으로 자연스럽게 준비를 해나가는 거죠. 이렇게 하다 보면 1년에 많게는 주연작 3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지속적으로 몸을 달궈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한편으론 또 일상 안에서 몸을 식히는 것도 중요할 것 같고요. 배우로서 에너지를 끊임없이 소비하는 만큼 일상에서 재충전할 수 있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배우 하정우로서의 삶과 김성훈으로서의 삶에 분명한 차이를 두려고 해요. 예를 들면 연예인이 아닌 일반적인 친구들과 축구팀을 만들어서 조기축구회 아저씨들과 부딪혀보기도 하고, 그 사람들과 같이 밥도 먹는 건 그 안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죠. 3~40대, 많게는 50대까지, 지금의 남자들이 무엇을 얘기하는지, 무엇을 통해서 삶의 체증을 해소하는지 직접 느끼고 저도 30대 초반의 남자로서 같이 얘기를 나누다 보면 많은 것들이 리프레쉬(refresh)되는 것 같아요. 그만큼 발란스(balance)를 맞춰주는 게 가장 중요하고 이런 생활을 통해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다작을 하는 만큼 차기작 선택에 있어서 전작과의 캐릭터적 차별성이 중시되지 않을까 싶군요.
매번 다른 거 같아요. 어떤 배우가 ‘메소드(method)’ 연기를 한다 했을 때, 메소드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잖아요. 또 다르게 ‘스타니슬라브스키(Stanislavski, 1863~1938)’식의 연기를 할 수도 있고요. 자기의 경험으로 회귀해서 그 안에 놓인 자신만의 무언가를 끄집어내서 표현할 수도 있고, 연기 하나하나를 기술적인 표현 방법으로 구사하며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방법도 가능하죠. 우는 장면에서도 제 감정을 끌어올리기 보다는 철저하게 기술적으로 우는 연기 자체를 만들어내는 거에요. 이렇게 다양한 표현 방법을 염두에 두는 건 최소한 1년 이상의 장기적인 플랜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국가대표>라는 상업적 작품이 여름에 떡 버티고 있기 때문에 그 이전에 <보트>라는 저예산 예술영화를 찍어도 보완될 수 있는 측면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 조합을 생각하고 나니 더욱 큰 무리는 없겠다는 생각도 들고.
종종 보면 상당히 본능적으로 연기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분석적으로 연기에 접근한다고 들었습니다. 단지 캐릭터의 역할 뿐만 아니라 신 자체의 분석을 통해서 그 안에서의 역할 자체의 높낮이를 제한할 만큼 계산적인 연기를 한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감독의 연출 스타일에 따라서 연기적 표현 양식이 달라지는데요. 홍상수 감독님은 좀 예외적인 케이스지만, 윤종빈 감독님, 이윤기 감독님, 김영남 감독님, 다들 극사실적인 연출 방식을 선호하는 분들이잖아요. 그런 영화 안에서 배우가 해야 할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 일단 감독의 연출 스타일이 그렇다면 배우는 철저히 도구이자 오브제(objet)로서 관객들에게 그 신을 잘 설명하고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봐요. 감독들이 컷을 쪼개는 스타일에 따라서 종종 빈 공간이 많이 생기기도 하는데, 쉽게 얘기해서 마가 뜨는-일반적으로 촬영 현장에서 대사와 대사, 액션과 액션 사이에 시간적 공백이 생길 때 ‘마가 뜬다’고 표현한다.- 부분이죠. 그 부분에서 관객에게 얼마나 효과적인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봐요. 윤종빈 감독님은 원신원컷을 너무나 좋아하는데 종종 인물을 따라잡으며 팬(pan, 카메라를 좌우로 회전시키는 기법)을 하기도 하거든요. 그러면 팬을 하기까지 1, 2초 정도 마가 뜨는 장면이 생겨요. 그렇게 마가 뜨는 장면에서 감독이 원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내가 할 몫이 무엇이 있을지 생각하게 되는 거죠. 내가 그 안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는 것 같거든요. 캐릭터가 변질되지 않고, 스토리가 피해 받지 않게끔 시나리오 상에 명시되지 않은 애드립을 넣어줘도 될 것 같아요. 그 지점에서 내 개성을 조금 더 드러내는 것이 허용되는 것 같고요.
영화에 대한 이해가 없고서야 불가능한 작업이기도 하겠죠. 직접 찍은 단편 영화가 한편 있다고 들었습니다. 직접 카메라를 잡아본 연출적 경험이 연기적 관점에 작게나마 일조한 측면이 없을까요?
어떤 신하고 신을 유기적으로 연결해서 극적 흥미를 높이면서 찍고자 한다면 그 신에서 마지막 컷이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연기를 끝냈는지 신경 쓴 후에 그 다음 신의 첫 번째 컷을 구상하죠. 예를 들어서 완전 풀샷으로 끝나는 신이 있어요. 그 풀샷에 제 모습이 담겨있고, 그 다음 신에서 윤석이 형의 타이트 바스트나 타이트 클로즈업이 들어가요. 그럼 여기서 내가 어떻게 연기해줘야 윤석이 형의 타이트 샷이 잘 붙겠다 계산하는 거죠. 캐릭터의 연기를 떠나서 영화적 재미를 주는 극적 연출의 영역까지 고려하는 연기가 가능하면 더욱 극적으로 신이 넘어가는 효과가 생겨요. 아무래도 그런 걸 느낄 수 있었죠.
하지만 모든 연기가 정확하게 계산과 맞아떨어질 수는 없는 일일 겁니다. 때때로 그런 계산의 오차를 메우기 위한 본능적인 반응이 필요할 때도 있을 거고요.
영화 안의 신마다 초(初)목표가 있잖아요. 각 신마다의 흐름에 따라서 발란스를 맞추는 가운데서도 각 신마다의 초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 거죠. 계산적인 합을 잘 맞춰서 도달해야 할 신이나 장면이 있고, 어떤 건 그냥 현장에서 그때 그 기분에 한번 맡겨보자, 하게 되는 지점도 있는 거 같아요. <추격자>에서 심리 분석관과의 대질 신은 정확히 3번 째 촬영일에 가서야 촬영할 수 있었어요. 왜냐면 처음엔 그분하고 뭔가 톤이 안 맞았고, 두 번째는 제가 못했어요. 이상했거든요. 그 장면만큼은 계산하지 않았던 장면인데 그 전에 파출소에서, “안 팔았어요, 죽였어요.”하는 장면이나 그 다음에 이 형사가, “그 여자 어떻게 했어.” 물으면 정으로 찍고, 아킬레스를 따서 어쩌고 하는 장면, 그리고 여자 형사에게 냄새 비리다고 하는, 어떻게 보면 중요 포인트가 반복되고 있어요. 그래서 이건 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템포까지 계산하면서 연기했지만 마지막에 클라이막스 지점에선 어떤 계산이 설 수 없잖아요. 그래서 그건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래서 이건 그냥 현장 가서 내 느낌대로 찾아가서 해봐야겠다, 싶었죠. 계산대로 해보면 뭔가 너무 작위적이 될 거 같아서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너무나 흔한 취조 신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사실 꽃이죠. 스릴러의. (웃음) 그렇기 때문에 무모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 있게 내 필대로 가봐야겠다, 했는데 두 번이나 안된 거에요. 두 번째엔 감독님한테 정말 정중하게 오늘 못 찍겠다 사과드리기도 했죠. 한번 테이크를 갔는데 하고 나니까 너무 작위적이라 민망한 거에요. 그러니까 감독님이, “정우, 너 이제 어떻게 할래. 그만 찍을까.” 하시길래 마지막 한번 더 기회를 달라고 했죠. 결국 그 날 안 찍고 세 번째 날에 촬영장에 갔는데 사실 그날도 느낌이 별로 안 좋았어요. 몸 상태도 안 좋았고. 그런데 거기서 딱 느낀 게, ‘그래. 지영민도 지금 피곤하겠지. 그렇게 시달리고 밤을 새고 얻어터져서 지금 새벽 4시까지 왔는데, 지치겠네. 얘기하기도 싫겠네. 나도 연기하기 싫은데, 부담도 되고, 이걸 써봐야지.’ 했는데 통한 거에요.
<국가대표>는 시나리오도 보지 않고 작품을 결정했다고 들었습니다. 내심 걱정되는 바는 없었나요? 그런 지점과 비슷한 걱정은 있었죠. 시나리오 자체가 많이 거칠었거든요. 스토리는 분명하고, 어떤 상황인지는 알겠는데 그려지는 인물들이 많아서 그런지 조금 산만한 부분들이 있었고요. 하지만 김용화 감독님에 대한 100%신뢰가 있었고, <국가대표>가 상업영화로서 분명한 미덕이 있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어요. 그리고 예전에 스키점프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에 분명히 이 종목을 영화로 만든다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시나리오가 거칠긴 하지만 그걸 100배 이상 덮어줄 장점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처음에 감독님한테 시나리오를 받기 전에 이런 소재에 대한 얘기를 듣고도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판단했고요.
사실 <국가대표>는 하정우 씨가 찍은 첫 상업영화라 명명해도 될 것 같습니다. <추격자>가 5백만 관객을 동원하며 상업적인 인정을 받았지만 사실 <추격자>가 처음부터 그 정도로 대단한 인지도를 얻을 것이란 기대감에서 기획된 영화는 아니니까요.
(손을 모으면서) 그렇죠.
그런 점에서 <국가대표>는 전작들과 다른 연기적 접근성이 요구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김용화 감독 같은 스타일에서는 분명 달라져야죠. 일단 컷 수가 너무 많고 편집에 따라서 인물의 입체감이 너무 많이 달라지니까요. 그랬을 땐 최대한 표현을 자제하고 노멀하게 감정의 발란스를 유지해야죠. 일단 과잉수준으로 넘어서면 안 돼요. 이렇게 작품 색깔이나 연출 스타일에 맞게 변할 수 있다면 우려할만한 조건들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그런 점에서 애초에 상업영화임을 인지하고 작품에 들어간 영화는 <국가대표>가 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데요. 그런 이해가 연기에 미치는 영향력이 없었을까요?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국가대표>에서는 내러티브 위로는 절대 나오면 안 된다는 원칙이 있었어요. 철저하게 기능적인 역할이라 생각했죠. 다른 배우들을 위해서 희생했다거나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냥 앙상블을 위해서 노력했어요. 표면상으로 중심축은 저였지만 영화의 내러티브 안에서 인물의 변화를 표현하는 절반은 사실 방 코치의 몫이기도 했고요. 이런 발란스를 생각했을 때, 사람들과 부딪히고 갈등 관계를 그리는 각 신마다 수위조절을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었어요. 두 번째로 <국가대표>엔 유난히 바스트 샷이 많았고, 김용화 감독의 영화는 음악이 유난히 많은 편이기도 하고, 교차편집도 굉장히 많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조금 더 튀어 보여서 개성이 드러내면 굉장히 언발란스해질 것 같았죠. 그만큼 감정을 최대한 비워내려고 노력했어요. 장면에서 흐르는 음악이 제 감정의 옷처럼 입히게끔, 혹은 편집이나 영화적 장치들로 과장시킨 감정들이 저를 거치면 과잉이라고 보이지 않게끔 제가 서 있는 것, 제가 쳐다보는 것, 이런 행위 속에 담길만한 감정도 비워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최대한 덧붙이지 않으려고, 뭔가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프레임 안에서 후반 작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여지나 여백을 열어놓으려고 했고요.
<국가대표>는 연기 이전에 스키점프 선수로서의 자태를 몸에 익히는 작업이 배우들에게 먼저 요구되는 스포츠 영화입니다. 완벽한 기술력을 몸으로 전시할 수 있을 때 설득력 있는 연기도 가능한 영화니까요.
사실 스키점프라는 장면을 담아내기 위해 배우가 맡은 역할은 10%정도 뿐이었어요. 어차피 선수들이 스키점프 장면에서 대역을 맡았고, 배우들은 점프하기 전까지의 모습을 스키점프 장면에 잘 연결시키는 역할이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최대한 어깨 높이는 맞춰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스키를 들고 있는 모습이나, 부츠를 만질 때조차 어색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했죠. 점프복을 내 몸이 익숙하게 느끼도록 노력했어요. 그래서 직접 점프복을 갖고 다니면서 집에서도 점프복을 입고 러닝머신을 많이 뛰었고요. 심지어 부츠도 갖고 다녔고. 그런 생활적인 익숙함까지 일반관객들이 디테일하게 느낄 순 없겠지만 거기서 중요한 건 지금 배우가 선수로서 연기하는 것에 대해서 동기 부여를 주는 거죠. 결국 이런 게 대사 연기나 다른 부분에서 분명히 파급 효과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그것 역시 메소드의 기본적인 방식이죠.
그런데 사실 모든 연기라는 게 다 그런 거 같아요. 로버트 드 니로가 <택시 드라이버>를 위해서 3개월 간 택시 운전을 했다는데 그걸 하고, 말고에 따라서 과연 어떤 연기적 차이가 있었을까요. 제 생각에 제일 큰 차이는 그렇게 3개월을 했기 때문에 택시 운전자에 대해서 알 것 같다는 자신감과 확신이 생기고 연기적으로 더 확실한 표현이 가능하게끔 동기부여를 형성해주지 않았을까라는 거죠. 그런 심리적 요인이 가장 큰 효과라고 생각해요.
사실 <국가대표>의 밥은 전작에서 맡았던 캐릭터들보다 평면적인 캐릭터란 생각이 듭니다. 감정의 표현에 있어서도 보다 직설적인 느낌이 들고요. 사실 하정우 씨가 좀처럼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캐릭터들을 연기해온 덕분이기도 하고요. (웃음)
김용화 감독님의 훌륭한 점 가운데 하나는 매 장면마다 디렉션의 스타일이 다 다르다는 거에요. 감독이면서도 철저하게 관객의 입장에서 쇼트를 바라보고 있는 거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사랑하는 남자가 오랜만에 돌아와서 정말 행복해하는 여자의 표정을 비추는 쇼트가 있는데 감독이 처음에 여주인공한테 그 표정을 주문했을 때는 원했던 표정이 잘 안 나왔대요. 그래서 감독이 “당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성관계 후에 오르가즘을 느낀다고 상상해보고 그 표정을 한번 만들어봐라”. 그랬더니 여배우에게 기막힌 표정이 나왔다고 하죠. 그런 것처럼 김용화 감독도 매 적재적소마다 디렉션의 스타일이 달라요.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 현실적인 요소도 생기고, 배우가 자신의 연기를 끌어내게끔 움직일 수 있게 유도하는 거 같아요. 예를 들어서 <국가대표>엔 기존에 제가 했던 연기적 표현 방식들과 달리 감정이 굉장히 풍부해져서 간지러운 부분이 있죠. 마지막에 버스를 내린 뒤 공항에서 나와서 눈물 흘리는 장면이 있는데 사실 전 그러기 싫다고 했어요. 솔직히 너무 간지러웠거든요. 공항에서도 과연 그렇게까지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지, 처음에 감독님에게도 그렇게 질문했어요. 그런데 감독님께서 말씀하셨죠. “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많은 대중들은 이렇게 연기를 해줘야 터칭(touching)을 좀 받는다.” 그래서 납득이 했어요.
<추격자>나 <멋진 하루>처럼 두 명 정도의 인물을 중심으로 서사가 진전되는 영화는 배우들의 반응 하나하나가 묘미가 됩니다. 그러나 <국가대표>처럼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에서는 전체적인 조화가 중요하죠. 다양한 캐릭터들이 모여서 이루는 입체감이 관건이기도 하고요. <국가대표>를 보면서 <비스티 보이즈>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리더라는 역할 때문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런데 <비스티 보이즈>는 매니저로서의 느낌이라면 <국가대표>는 맏형 같은 느낌의 차이가 있었죠. 사실 현장에서 또래 배우들 가운데 실제로 맏형 노릇을 했을 거 같은데요. 선배로나 형으로서나 후배들을 지켜보는 입장이 어땠을지 궁금하군요.
같이 연기하는 친구들과 4~5년 정도의 나이차가 있었는데 그만큼 제 나이가 많은 거 같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비슷비슷한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같이 연기하는 친구들이 저를 선후배가 아닌 동료나 친구로 느낄 수 있길 바랬고요. 그들을 도와준다기 보단 편하게 같이 어울리려고 노력했어요. 도리어 그들을 더 높여주고,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조언을 한번 구해보기도 하려고 노력했죠. 어쩌면 <멋진 하루>에서 느낀 바가 많았기 때문에 저도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도연 누나가 저를 계속 서포팅(supporting)해줬다고 느꼈는데 제가 도연 누나로부터 느꼈던 걸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싶었거든요.
아무래도 본인이 경험했던 부분이라 더욱 그 중요성을 느낄 수 밖에 없겠죠. <추격자>와 <멋진 하루>의 하정우 옆에 김윤석과 전도연이라는 좋은 배우가 있었다는 사실이 어쩌면 정말 엄청난 기회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히트>에서 고현정 누나도 마찬가지였어요. 덕분에 어떤 캐릭터로 만나서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한다기 보단 자연스럽게 형, 누나, 하면서 인간적인 유대감을 형성하는 게 어쩌면 배우들의 앙상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키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죠.
하정우 씨 스스로도 자신과 가장 닮은 캐릭터는 <멋진 하루>의 병운이라고 밝혔던 것으로 아는데 정말 실질적으로 병운이 닮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 그래요? (웃음)
제스처라던가, 세세한 몸의 움직임 자체에서 발생하는 뉘앙스가 언뜻 병운을 연상시켜요. <비스티 보이즈>에서의 대사처럼 느낌이 있어요. (웃음) 그런데 사실 연기는 자신이 지니지 못한 것을 창작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자신을 고스란히 투영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자신이 모르는 것들을 연기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경우는 없었나요?
(손뼉을 치면서) 아! 지금 갑자기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데, 어쩌면 <국가대표>의 밥, <보트>의 형구, 그리고 대표적으로 <추격자>의 지영민, 이 세 인물은 사실 제 힘으로 연출해낸 캐릭터 같아요. 그리고 <비스티 보이즈><멋진 하루>는 그냥 저에게 있는 그대로 했던 거 같고요. 제가 요즘 채플린 얘기를 많이 하는데 <모던 타임즈>(1936), <위대한 독재자>(1940), <키드>(1921), 이런 작품들을 보면 채플린이 감독이기도 하면서 본인이 직접 그 인물을 연출하기도 하잖아요. 저도 그럴 수 있다면 되게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 그대로 캐릭터 자체를 하나의 창작으로서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해도 될 것 같군요. 사실 채플린은 방랑자적인 캐릭터를 계속 연출하고 사용해왔죠. 하지만 <라임라이트>(1952)같은 경우에는 그냥 있는 그대로 늙은 인간 채플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단 말이에요. 그랬을 때 이런 양면성이 공존해서 캐릭터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면 정말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전자의 부분은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고, 복제 논란이 많을 수 있을 거에요. 그래서 관객들이 그런 의미를 좀 알고 제 연기를 본다면 굉장한 재미가 있을 거 같아요. 감히 말씀 드려보자면 이 시대의 채플린, 이런 캐릭터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면 좋을 거 같아요. 짐 캐리가 <에이스 벤추라>같은 영화에서 보여준 재미난 부분들이 있잖아요. 그 배우의 어떤 한 부분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영화를 봤을 때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닐까요. 너무나 영화적인 캐릭터니까요. 도리어 저의 것을 보여주는 게 또 영화적일 때도 있고요. 그런 의미에서 <추격자>의 지영민, <보트>의 형구, <국가대표>의 밥 같은 경우는 저의 또 다른 다채로움이 반영된 캐릭터라는 점, 만약 그걸 알고 저와 제 영화를 보신다면 충분히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사실 <국가대표>의 밥은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점에서 <보트>의 형구와 교차되는 지점이 있는 캐릭터입니다. 이렇게 종종 지난 캐릭터와의 연속성이 느껴질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하정우 씨처럼 한 작품을 끝내고 바로 차기작에 들어가는 경우, 이렇게 전작의 캐릭터와 연관성이 존재하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 캐릭터적으로 기시감이 크지 않나요?
사실 제가 연기한 캐릭터마다 거의 다 비슷한 점이 있는데요. 전부 다 약간 방랑자 같단 생각이 들어요. 쉽게 예를 들자면 집이 없고, 가족이 불투명하고, 인물의 성장환경이 좀처럼 노출되지 않으면서, 그런 식으로 뭔가 여지가 있어 보이는, 개인적으로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면 재미를 느끼는 거 같아요. 영화를 찍을 때 저도 제가 재미있어야 연기를 할 수 있거든요. 만약 그런 연관성이 없다면 재미가 없을 거에요. 아니면 반대로 완전히 다른 뭔가가 있어서 느껴지는 재미도 있겠죠. 앞으로 다른 캐릭터를 만나보고 찾아 보면서 그런 재미를 열어나가다 필모그래피가 좀 쌓이다 보면 그 때 또 한번 정리해서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겠죠.
연기뿐만 아니라 피아노, 그림, 무용, 등 정말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고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관심은 호기심에서 출발하지만 적당한 관심에 머무르는 경우도 많죠. 그래서 어느 정도 자기 기준 안에서 적당히 성취를 이뤘다 싶으면 쉽게 만족하고 손에서 놓기도 하고요. 마치 이건 이 정도면 됐어, 라는 식이랄까요. 하지만 하정우 씨에게 연기는 아무래도 단순한 관심 이상의 욕망처럼 보입니다. 성취에 대한 깊이 자체가 다르다고 할까요. 어쩌면 다른 관심들이 그만큼 그 연기적 성취를 위해 할애되는 부차적 노력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다 굉장한 연관성이 있어요. 쉬운 얘기로 영화를 찍거나 배우로 살아가는 건 종합예술을 하는 거잖아요. 제가 그런 순수예술에 많이 기대고 영감을 얻게 되는 거 같아요.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어떠한 지점에서 더 이상 파고들지 않는 건 충분히 거기에 대해서 얻은 바가 충분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고요. 만약에 미술을 한다, 사진을 찍는다,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그 가운데서도 어떤 일부분에서만 영감을 얻어요. 어쩌면 그게 다 저를 치우치지 않게 하는 지점일지도 모르죠. 그러한 것들이 오로지 제가 연기를 하고 영화를 찍는데 집중할 수 있게 도움이 되는 것들이죠. 만약 주객이 전도돼서 제가 그 발란스를 놓치고 다른 것들에 빠져들면 일단 묘미는 있겠죠. 가치는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연기가 아닌 다른 분야에 치우치는 건 제가 생각하는 방향 안에서 빗나가는 부분이기 때문에 단지 그것들은 제가 계속 연기적으로 영감을 받고 재료를 얻을 수 있는 부분으로서 가치가 있어요.
사진을 찍는다고 하셨는데 왠지 풍경보단 인물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표정에서 느껴지는 다양성이 캐릭터의 내면을 표정으로 구사하는 배우에겐 좋은 영감을 부를 것 같거든요.
인물 사진을 굉장히 좋아해서 종종 사람들을 찍으러 가요. 많이 찍었고 많이 확보하고 있어요. 종종 어떤 인물들을 봤을 때 특이점들을 많이 발견하게 되는 거 같아요. 사실 배우가 가장 멋지게 보일 때는 그 배우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한테 연기적 영향력을 굉장히 많이 주셨던 대학 교수님한테도 그런 얘기를 들었거든요. 배우는 무표정의 힘이 제일 중요하다. <대부3>에서도 알파치노가 시칠리아로 넘어가서 아들의 연주를 회상하는 장면 있잖아요. 알 파치노는 아무 것도 안 해요. 선그라스 낀 얼굴로 무표정한 알 파치노의 얼굴에서 회상 장면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알 파치노 컷으로 돌아오면 안경 벗고 가만히 있죠. 아까 초반에 말씀 드린 것처럼 어쩌면 그 무표정이 그 회상 장면을 넣을 공간을 마련해주는 거라고 볼 수도 있고요. 어쩌면 무표정이라는 건 그 사람의 제일 솔직한 모습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얼굴의 안면근육을 다 풀고 가만히 있는 게 좋아요. 사진을 찍을 때도 사람들에게 최대한 무표정으로만 찍어달라고 얘기하기도 하고요. 그 사진들을 보면 너무 재미있어요.
어쩌면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얼굴을 발견할 때라고 할 수도 있겠죠.
맞아요. 사실 우린 어떤 강박 속에 있는 거 같아요. 그림을 그릴 때 사람들은 잘 그려야 된다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실사와 똑같이 그려야 된다라는 강박으로 이해해요. “그림 잘 그리세요?”라고 물어보면, “아, 그림은 젬병이에요.” 어떻게 보면 그림 자체가 그냥 자기 마음대로 그리는 거잖아요. 자기가 생각하는 자동차를 그리고, 자기가 생각하는 꽃을 그리는 건데, 어렸을 때부터 잘 그리고, 못 그리고, 에 대한 말도 안 되는 기준을 갖고 있는 거 같아요. 전 그게 말도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연기도 마찬가지 같아요. 분명히 모든 사람이나 모든 배우들이 자기만의 매력 포인트를 갖고 있는데 그걸 어떤 이상한 기준에 자꾸 맞춰가려고 하는 거 같거든요. 배우로서 어떤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선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자신만의 매력 포인트로 삼아야죠. 그림을 그린다면 제가 생각하는 그림을 계속 그려나가는 거에요. 그 안에서도 자신과 엄청나게 싸우게 돼요. 내가 그리는 이 꽃이 남이 봤을 때 꽃이 아닌 거 같은데, 이 색은 남이 보면 어딘가 대비가 맞지 않다고 말할 거 같은데, 생각하죠. 하지만 결국 그게 풀리게 되면 제가 원하는 걸 자유로운 의식의 흐름대로 그릴 수 있는 결과에 도달하게 돼요.
누군가의 기준을 쫓아가기 전에 자신의 기준에 따라 모든 걸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예. 그렇죠.
사실 전작들은 대부분 감정적 여운을 남기고 끝나는 경우가 많았죠. 그만큼 배우 스스로도 감정적인 해소를 느끼지 못하고 영화에서 빠져 나와야 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국가대표>는 결말의 스키점프 신을 통해 모든 감정을 증발시키는 느낌입니다. 배우에게도 그만큼 명확하게 감정을 해소해주는 쾌감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맞아요! 그랬어요. 그래서 그 마지막 장면을 너무나 좋아해요. 스키점프로 날아가는 장면이나 그 장면에서 나오는 음악이나, 뭔가 해소됐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감독님은 밥이 자기 인생에 통찰을 했고 모든 걸 받아들였다고 하셨는데 저도 개인적으로 이번 <국가대표>를 통해서 많은 걸 받아들인 부분이 있었어요. 밥이라는 인물을 만나고 나니까 제가 이전까지 연기한 캐릭터들은 너무나 방황하거나 방랑하면서 겉돌지 않았는지 고민하게 됐어죠. 이젠 좀 더 제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제대로 된 직업도 있는 캐릭터를 만나야겠다 생각도 들었고요. 어쩌면 그 장면 자체가 주는 속 시원함이 지금 저에게 어떤 쉼표가 될 수 있는 게 아닌지, 배우로서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는 건 아닌지, 인생의 1라운드를 정리할 수 있는 지점은 아닌지, 이런 생각이 들어요.
촬영 중에 큰 부상도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사실 그 마지막 장면이 촬영 때 살이 제일 많이 올라왔던 신이었어요. 살 퉁퉁 쪄가지고, 감독님께서 “너 때문에 컷이 안 붙는다. 어떻게 겨울하고 여름 사이에 8kg차이가 나냐.” 하소연하셨죠. (웃음) 제가 그때 팔이 부러져서 한달 반 동안 운동도 못하고 스트레스 받다 보니까 먹기만 했거든요. 그래도 다행인 게 그 솔트레이크 장면만 남았었죠.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하는 느낌이 있잖아요. (웃음)
<두번째 사랑>같은 경우는 미국에서 영어로 연기를 했고, <보트>에서는 일본에서 종종 일본어로 대사를 하기도 합니다. 사실 국내 배우가 타지에서 타국어로 연기를 하거나 자국어를 쓰는 외국배우와 호흡을 맞춘다는 건 흔한 기회는 아니죠. 어떤 면에서는 도전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되게 단순하게 받아들인 거 같아요. 일단 제가 새로운 경험을 마다하지 않는 거 같고요. 어쩌면 지금까지 무모하게 계속 추진해나가고 있었는데 이젠 다져나가야 할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경험을 축적해야 되고 이를 통해 뭔가를 더 학습해나가야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굉장히 웃긴 얘기일지 모르지만 나중에 뭔가 정말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를 위해서 지금 나이부터 계속 쌓아나가야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그런 새로운 경험들을 마다하지 않고 도전해 나가야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어요.
<국가대표>가 개봉했으니 이제 하정우 씨가 또 한번 떠나 보낸 작품이 됐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찍고 있으니 다시 새로운 작품을 맞이한 셈이죠. 이렇게 항상 영화를 보내고 맞이하는 시기가 짧은 만큼 전작과의 친밀감을 덜어내는 것이 새로운 작품에 임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관건이 아닐까요?
제 몸이 재료라면 재료를 달궈놓은 상태에서 또 시작할 수 있는 셈이니까 그것만으로 되게 좋은 거 같아요. 사실 저는 한 작품을 끝내고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는, 계속 이렇게 작품을 거듭하는 부분에 있어서 좋은 기억을 갖고 있어요. 옛날에 <카르멘>이라는 연극을 했었는데 그때 엄청난 상처를 받았었어요. 친했던 선배가 공연을 보고 나서 막말을 하는 거에요. “너 연기하는 거 보고 정말 실망했다. 난 네가 연기를 좀 하는 줄 알았는데.” 민망해서 쫑파티도 못 갔어요. 그때 연출자하고도 사이가 안 좋기도 했고, 어린 나이에 여러 가지로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죠. 대인 기피증까지 올 정도였어요. 그런 피해의식이 있었는데 그걸 풀어준 게 <고도를 기다리며>였어요. 그렇게 위축된 상태에서 소극장 공연 한번 재미있게 해보자는 동기들과 함께 무대에 서봤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에요. <카르멘>때 했던 고민과 막막함이 완전 풀렸어요. 아, 이게 치유가 되는 구나 싶었죠. 최주봉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작품으로 상처를 받으면 다시 작품으로 치유해야 된다. 대신 기 기간을 더 두면 안 된다.” 스키점프도 마찬가지거든요. 스키점프에서도 점프하다 넘어지면 코치가 바로 다시 가서 뛰라고 해요. 왜냐면 그 기억을 없애주려고. 매번 작품을 찍다 보면 슬럼프가 분명히 와요. 상처도 생기고요. 제가 알게 되는 실수에 대해서 쪽팔리고 부끄러워서 견디지 못할 정도로 힘든 지점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러면 늘 다음 작품에서 두 번 실수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러면서 다음 작품 찍다 보면 예전에 했던 고민들이 녹을 때가 있죠.
어쩌면 지난 고민들을 녹이기 위해서 끊임없이 다음 작품을 찾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사무엘 베케트가 <고도를 기다리며>를 쓴 기간이 보름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사랑하는 여자랑 몇 날 몇 일 섹스를 하다가 ‘아, 써야겠다’ 해서 제 방에 들어가서 몇 일만에 만들었다고 하죠. 베케트가 그랬듯이 잭슨 폴락도 필이 왔을 때 밤 새도록 그림 그렸다 하고, 그렇게 필이 올 땐 계속 하고 싶잖아요. 지금이 아무리 저에게 다지는 시기다, 그렇게 말하게 된다지만 그냥 지금 저는 너무 하고 싶은 욕망이 충만한 상태 같아요. 저한테 어떻게 이런 다작이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단순히 너무 하고 싶어서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거 같아요.
개봉을 앞두고 있는 기분이 어떤가요?
제가 VIP시사회 때 어느 누구도 초대를 못했어요. 어떤 평가를 받을지도 염려스럽고, 저도 그때에서야 처음으로 보는 거라서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못했죠. 그래도 최고로 인정받는 윤석 씨와 짝을 해서 그런지 보시고 난 분들께서 칭찬을 많이 해주셔서 조금 안심이 돼요. 그래서 이젠 다 돈 주고 보라고 하려고. (웃음) 5%정도 긴장감이 풀어지긴 했어요. 그래도 관객들이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니까 조금 겸손한 자세로 기다리는 중이죠.
스크린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도 상당히 오랜만일 텐데요. 그래서 더욱 특별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분에 대해선 생각할 수 없어요. 그저 어느 부분에서 연기가 좀 튀지 않을까 염려를 많이 했죠. 한두 군데 정도 캐릭터와 조금 어울리지 않게 해맑게 웃었다라고 할까? 저만이 알 수 있는 부분일 수도 있고. 남들이 몰라도 본인은 보이거든요. 아, 저기서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이런 게 있죠. 늘 보여요. 그래서 한번도 연기에 만족해본 적이 없기도 하고.
제작보고회 때는 데뷔하는 심정으로 연기했다고도 하셨죠. 아무래도 드라마 위주로 연기활동을 하다가 영화를 한다는 게 그만큼 부담이 되는 일이었나 보죠?
부담스럽죠. 이미 어느 정도는 다 보여준 느낌이고, 그만큼 다들 아마도 그럴 것이다라고 알고 있는 배우일 텐데 아무래도 스크린에선 괜히 달라 보여야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리고 역시 영화 촬영이 여러 방면에서 좀 더 섬세해요. 그래서 긴장을 받게 되는 것도 있고. 늘 어떠한 방면이든 이렇게 인터뷰를 하면 무슨 얘기할까 고민되는데 영화 얘기만 나오면 일단 마음이 신인 같아. 제가 신인의 자세로 찍었다고 하니까 사장님이 너무 농담처럼 얘기한대. 진짜라니까! (웃음) 이건 농담 아니에요.
신인이라는 단어엔 설렘과 부담의 중의적 의미가 포함된 게 아닐까요.
그렇죠. 그런데 사실 이번엔 너무 운이 좋았어요. 김윤석이란 배우와 같이 그냥 업혀가는 느낌이랄까? 거북이 등에 탄 느낌? (웃음)
김윤석 씨 때문에 영화를 선택했다는 말씀도 하셨죠.
제 연기가 대형스크린으로 보여진다는 게 너무 두려워서 영화는 거의 다 거절했어요. 그런데 <거북이 달린다>는 상대배우가 김윤석 씨라고 하니 너무 혹하는 거에요. 그러면 대본이라도 좀 봐야겠다 했죠. 그래서 처음으로 이종용 감독님과 미팅을 하게 된 거고요. 만약 윤석 씨 얘기 못 들었으면 대본도 안 봤을 거에요.
대본을 보고 나서 거절해도 상관없지 않나요?
제 입장에서는 대본을 보고 거절하는 게 실례라고 생각돼요. 자신의 작품이라면 누구라도 열과 성을 다하면서 뼈를 깎아가는 느낌으로 썼을 텐데 그걸 보고 나서 ‘저 안 해요’, 이러기는 미안하잖아요. 그래서 작품 자체를 못할 거 같으면 아예 안 봐요. 사실 영화는 워낙 제가 해보지 못했던 장르잖아요. 그리고 오래 전에 한번 했다가 혼이 났던 기억도 있고요. 그 이후로 작업도 철저해야 하고, 집중력도 요하는 작업이라 정말 잘하는 사람들이 영화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됐거든요. 그래서 어쩌면 <거북이 달린다>도 아예 안 봤을지 모를 일인데 윤석 씨가 출연한다는 말에 보게 된 거죠.
김윤석 씨의 이전 출연작은 얼마나 보셨나요?
<타짜>도 봤고, <추격자>도 봤어요. <추격자>는 남편하고 둘이서 제일 마지막 걸 봤는데 보고 나서 주차장까지 걸어 나오는 동안 너무 섬뜩한 거에요. (웃음) 사실 우리 애기 아빠도 영화를 좋아하는데, 남자 배우 둘 다 너무 매력 있다고 하던 기억이 생생해요. 그래서 이번에 같이 하는 배우가 ‘김윤석’, 그러니까 ‘정말?’ 되묻더라고요. (웃음)
좋은 연기자와 함께 호흡을 맞춰보고 싶은 건 연기자로서 당연한 욕망이겠죠. (웃음) 반면 이연우 감독은 <거북이 달린다>가 첫 번째 장편 입봉작입니다. 오랜만에 찍는 영화에 신인감독이라니 불안한 점은 없었나요?
저를 정말 편안하게 해줬어요. 사실 제가 프로포즈를 받고 한달 동안 이 핑계 저 핑계로 못한다고 했었거든요. 상대배우가 너무 좋아서 대본을 봤고 너무 작품도 좋았지만 그 땐 가족문제가 있었어요. 작년에 아이가 수능시험을 봐야 했고, 저도 개인적으로 쉴 기회가 한번도 없어서 좀 쉬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때였죠. 그래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못하겠다 그랬는데 그걸 한달 동안 다 받아주셨어요. 제가 촬영장에 적응이 안 될 것 같다니까 자기가 적응하게 해 드릴 거라고. (웃음) 사실 저는 그래요. 일을 하기 전에 사람을 보고 반하거든요. 그래서 작업이 재미있을 거란 생각이 분명히 있어야 일하기가 참 재미있으니까. 그런데 이연우 감독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젊은 사람이 정말 마음을 편하게 해줬어요. 그래서 제가 ‘원래 배우한테는 이런 건가요?’ 물어보니까, ‘원래 배우한테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게 영화’라며, ‘영화를 한편하고 나서 이 매력에 빠지면 다신 드라마를 할 수 없을 거라고, 그런 설렘을 많이 줬죠. (웃음) 윤석 씨와 함께 호흡을 맞추기 전에 이미 이연우 감독을 많이 믿게 됐고요. 좋은 사람들이 저를 이렇게 원한다니 같이 작업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죠. 그래서 그냥 한번 해봐야겠다 마음먹었어요.
그렇다면 왜 꼭 자신을 선택하려 하는지 궁금하진 않던가요? 이연우 감독님께 한번쯤 여쭤보셨을 것 같은데요.
물어봤죠. 대본을 보고 왜 꼭 이걸 제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냐고. 그런데 처음 한마디가 ‘예뻐서요’, 이래요. (웃음) 사실 그래요. 나이 든 아줌마한테 예쁘다고 하면 좋죠. 그래서 막 웃었지만 ‘그건 제가 썩 좋아하는 답은 아니거든요’. 그렇게 말했더니 어쨌든 저 아니면 안된데요. 사실 저 아니면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저 아니고도 다른 사람이 했더라도 충분히 다른 느낌의 조 형사 부인이 됐을 거에요. 그런데 그 쪽에서 견미리 아니면 안 된다, 라고 프로포즈를 하니까 저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 제가 보여줄 수 있는 조형사 아내가 어떤 걸까, 그들이 날 필요로 한다는데 도대체 날 어떻게 그리고 싶어하는 걸까, 내가 그걸 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이런 생각에 약간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죠. 그래서 시작하게 된 거고.
사실 대부분 시골의 아줌마를 연상한다면 조금 살도 찌고 느슨한 이미지로 묘사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런데 <거북이 달린다>의 아내는 오히려 그와 반대적인 이미지라 흥미롭더군요. 그 지점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은 없으신가요?
사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일상적으로 조금 더 변형을 줬어야 되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예를 들어서 다섯 살 연상이고, 생활에 찌는 아내라면 기미도 거뭇거뭇하게 올라와 보여야 되고, 머리도 좀 부시시한 파마머리로 갔어야 되지 않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건 우리가 너무 통속적으로만 생각해서 그럴지도 몰라요. 이 여자는 아이들 머리도 한 올 한 올 다 빗겨서 한 가닥도 새어 나오지 않게 딱 묶어주잖아요. 또순이 같이, 뭐 하나 흐트러지는 걸 못 보는 그런 느낌의 여자로 가면 어떨까 싶었어요. 좀 깐깐한, 깡 진 느낌? 제 나름대로 그렇게 바꿔보자고 했는데 조금 아쉬운 건 제 모습이 조금 고왔다는 거? 예뻤다는 게 아니라 조금 생각보다 곱게 보였어요. 사실 기본 메이크업만 하고, 라인 하나도 안 그릴 정도로 화장을 거의 안 했어요. 그런데도 화장기가 있어 보이는 게 좀 아쉬웠죠. 그래서 다음에는 저런 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봤어요.
본래 얼굴이 어디 갈 순 없죠. (웃음) 하지만 어쩌면 그건 자신만이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사실 그 동안 드라마에서는 세련된 도회지 여성의 이미지로 분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오히려 그런 캐릭터로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신선하다고 느껴지는 측면도 있었던 것 같고요.
그래도 더 평범해 보여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돼요. 체형 자체도 너무 슬림한 게 아닌가 싶고. 그래서 슬림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엉덩이에 속옷도 더 넣고 그랬는데도 영화로 보니까 조금 그렇더라고요. 개인적인 제 생각이 이래요.
결과적으론 그런 외모를 통해서 억척스러운 여자라는 공감대를 보여주는 게 관건이었을 것 같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억척스럽다’는 단어가 표현이 강하게 들려서 그렇지, 사실 다들 열심히 살지 않으면 어떻게 살겠어요. 이런 형태에서는 이게 맞고, 저런 형태에서는 저게 맞을 뿐, 각자 거기에 잘 맞춰서 살다 보면 다들 억척스럽게 살 수 밖에 없죠. 보통 아줌마들을 보고 억척스럽다고 얘기하는 건 어쩌면 그렇게 열심히 사는 아줌마들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도 사실 개인적으로 무능한 남편과 함께 사는 아내로서 그런 진심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사실 조형사가 주인공이라서 나중에 멋있어 지는 거지, 그게 실제 남편이라면 속 터져 죽을 거에요. (웃음) 생각을 해봐, 그게 무슨 형사야. 손가락 잘리고 들어오고, 무술 한답시고 어설프게 폼 잡는 거 보면 어처구니가 없죠. 정경호를 때리려다가 맨날 다른 곳을 찍잖아. 그래서 내가 너무 답답해서 영화를 보다가 (옆자리를 치면서) 진짜 남편한테 뭐라 그랬다니까. 정말 답답해서 저러고 살겠냐고. 너무 영화에 몰입한 거지. (웃음)
조형사의 아내야 말로 진짜 내조의 여왕이죠. (웃음)
진짜 그래요. 만화방에서 하루 종일 양말 뒤집어 가면서, 그런 여자가 어디 있어요? (웃음)
조형사의 아내는 아내이자, 엄마이며, 여자입니다. 단순하게 보이지만 섬세하고 복합적인 내면을 지닌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경험이 요구되는 캐릭터라고 말할 수 있겠죠.
굉장히 연기를 잘 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20대 초반인데도 4~50대 감정을 다 표현하는 친구들이 있죠. 그런데 사실 그 친구들도 몸에 밴듯한 느낌으로 이런 캐릭터를 연기할 순 없겠죠. 아무래도 저희 같은 나이의 배우들은 자신 자체가 그런 여자이기 때문에 그런 걸 의식할 필요가 없어요. 내 남편이 누워있고, 내 새끼가 내 앞에 와 있고, 내가 부업을 할 때, 리액션하는 행동들이 하나같이 일상이니까.
상대배우의 안정감이 주는 시너지도 있었을 거고요.
저희가 하루 만에 만화방에서 세 신을 다 찍었는데 마치 드라마 촬영하듯이 드르륵 찍어서 굉장히 편했어요. 어려움이 없었죠. 그만큼 윤석 씨가 잘 받쳐줬고, 잘 맞았다고 할까. 스폰지 같은, 아니, 그보다도 체형에 맞춰서 흔들리는 물침대? 라텍스 침대에 누우면 신체의 모든 부분이 다 채워지는 느낌이잖아요. 상대가 어떻게 하든 갭이 없게 안착을 해주는, 그런 느낌의 배우였어요. <거북이 달린다>에선 서로 사랑하는 분위기를 은연 중에 보여주지만 사실 사이 좋은 부부처럼 보이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다음에 또 기회가 생기면 심리적인 교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연기를 같이 해보고 싶은 배우였어요. 이번에는 정말 그저 거북이 등에 탄 느낌이었으니까.
영화에 대한 부담감을 적잖게 말씀하셨는데, 드라마와 비교하자면 어떤가요?
드라마는요. 오랜 시간 시청자들을 젖어 들게 해요. 그래서 처음엔 만약 영자로 시작을 했더라도 끝에 가서 견미리가 되죠. 오래하다 보면 다 제 화(化)되는 거죠. 제가 안 하고 다른 배우가 했다면 또 그 화(化) 되는 거에요. 그렇게 젖어 들어요. 제가 스크린이 무섭다는 건 농담이나 겸손한 말이 아니라 진짜 스크린이 무서워요. 드라마는 ‘쟤 왜 저래’, 그러다가도 그 다음 장면이 나오면 잊어버려요. 그리고 그 다음날 다시 잘하면 되죠.
드라마는 매회마다 만회할 기회가 있다는 점에서도 배우에겐 영화보다 좀 더 관대한 매체라고 할 수 있는 건 사실이죠.
그렇죠. 모니터를 꼭 하고 나서 이번 주 저 신에서 제가 너무 아니었더라도 다음에 만회할 수 있는 신이 있어요. 오늘 못했다면 내일 만회하거나 다른 신에서 강하게 임팩트를 주면 되고, 끝날 때쯤 평가를 한꺼번에 하거든요. 영화는 그게 아니잖아요. 영화라는 건 깜깜한 공간에서 2시간 동안 집중해서 보는 만큼 들통나거든요.돈 내고 영화를 본 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평가를 해버리기 때문에 만족을 못하면 한마디씩 꼭 하잖아요. 그런 순간순간의 평가가 다 오죠. 적어도 ‘누구 때문에’, 이런 소리 듣는 인물이 되고 싶지 않다는 거지! (웃음) 기왕이면 잘 봤다 소리를 듣고 싶죠. 그런데 오히려 연기가 너무 좋더라, 이런 말보단 전반적으로 다 좋았는데 그냥 뭐가 좋았는지 알 수 없을 때 저는 더 좋은 거 같아요. 너무 강해서 딱 보고 나면 뭐가 좋았는지 말할 수 있는 것보단 한번 생각해보게 만든다면 벌써 그 연기에 젖어 들었다는 거니까요.
드라마는 분절된 형태로 방영이 지속되는 만큼 연기톤의 변화도 어느 정도 수용되는 느낌이지만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적인 연기톤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장점과 단점이 있겠죠.
그런 것도 있어요. 그만큼 그 두 시간 동안 빠져들게 만드는 연기를 했을 땐 그 캐릭터에 젖어 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거 같아요. 이번에 <거북이 달린다>를 해보고 나니까 다음엔 발랄한 거 내지는 그렇게 삶에 찌든 억척이 아니라 나사 하나 빠진 듯한 느낌의 억척스러움을 해도 재미있을 거 같고. 그러니까 작품에 따라서 이런 생각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좀 다르죠. 영화배우들이 이런 것 때문에 영화 하는 구나 싶기도 하고.
브라운관에 비해 스크린이 크다는 점도 영화가 두려워지는 이유가 아닐까요.
그런 것도 있죠. 그러니까 결국 정말 잘해야 된다는 거, 공동작업인데 나 때문에 (한숨쉬면서)‘아~’, 이렇게 되진 말아야 되잖아요. 물론 어떤 일에나 그런 부담은 늘 있어요. 드라마에도 있고. 다만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두려움이 좀 더 큰 거죠. 그리고 스크린이 크기 때문에 드라마보다 좀 더 섬세한 연기가 요구된다는 점도 있죠. 드라마는 약간 생방송 같다고 할까. 드라마는 원투쓰리(카메라)로 순발력 있게 탁탁탁 넘어가잖아요. 그런데 영화는 서로 약속하고 다짐하듯 디테일하게 들어가니까 장르적으로 요구되는 연기가 다르죠. 그런 면이 드라마와 영화에서 연기를 한다는 장르적 느낌을 다르게 만들긴 해요.
어쩌면 <거북이 달린다>로 두려움이라는 허들을 하나 넘은 셈이라 말해도 좋겠어요.
남의 등을 타서 넘었죠. 솔직히! (웃음) 저 혼자 막 달려가라고 하면 두렵겠지만 너무 푸근한 상대를 만났고, 그 사람이 리드하는 대로 몸만 흔들어주면 될 정도로 편했으니까요. 정말 해피한 거죠. (웃음)
사실 그 동안 영화 제의가 없진 않았을 텐데 그 제의를 20년 가까이 뿌리쳤다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대단합니다. (웃음)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시나리오를 본 영화는 거의 없어요. 강제로 집까지 보내서 2~3개 정도 본 건 있지만 대부분 보기 전에 일단 거절부터 했으니까요. 바쁘다는 핑계를 댔지만 스크린이니까 자신 없었어요. 핑계가 아니라 정말 자신이 없었던 거에요.
자신에게 제의가 들어왔던 작품의 완성된 형태를 보고 나서 아쉬웠던 적은 없었나요?
있었죠. 있었지만 저보다 괜찮은 배우들이 대신 하셨기 때문에 훨씬 좋았다고 생각해요. 이건 드라마도 마찬가지에요. 드라마 제의가 왔을 때, 제가 못하겠다고 생각하면 과감히 못하겠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다른 분이 했기 때문에 진짜 좋아졌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땐 저도 기분이 좋아요. 그러면 전 그 감독한테 전화해요. 거보라고, 나 아니어도 너무 좋지 않냐고. 그건 진짜 필요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욕심이 없다기 보단 그게 시청자나 관객을 위한 진짜 배려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드라마가 아닌 영화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배우에 대한 시선이 달라짐을 느낀 부분은 없었나요?
저는 몰랐는데 사람들이 제가 영화를 했다고 하니까 굉장히 신기해해요. “이번에 영화 했지? 보러 가야지.” 이러면 “그래, 봐.” 이러면서도 보면서 뭐라 그럴까 걱정이 앞서요. 그리고 ‘뭐, 늘 저랬는데’, 이럴까 봐 걱정되고요. 배우로서 차라리 너무 다르게 느껴지는 건 좋아요. 그런데 ‘늘 똑같지’, 이러는 건 조금 섭섭하고 서운하죠. 제가 너무 많이 보여진 연기자이기 때문에 어떤 평가를 받을까 그런 것들이 좀.
사실 드라마에서 도시적인 이미지를 어필하는 경우가 많았죠. 그런 면에서 <거북이 달린다>의 시골 형사 아내는 그 이미지만으로 특별한 변화라 인지될 가능성도 적잖습니다.
제가 기존에 몇 년간 해왔던 캐릭터들이 야무지고 도시적인 느낌이 있었죠. 그리고 저는 모르겠지만 남들은 제가 사극에서 굉장히 무게감 있는 캐릭터를 맡았을 때 카리스마가 느껴진다고 해요. <거북이 달린다>에서 아내는 그런 면에서 다른 역할이긴 하죠. 장르를 옮겼기 때문에 시청자가 아닌 관객들이 제 연기를 어떻게 평가할지, 영화 계통에 계시는 분들이 어떤 평가를 할지, 그게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 그냥 기본적으로 저 정도는 할 줄 알았다, 이 정도만 돼도 전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가 아닌 다른 연기자가 했어도 윤석 씨가 잘 맞춰줬을 테고, 그만큼 다른 매력이 있었을 거에요. 저는 ‘나 아니면 안돼’, 이런 생각 별로 안 하거든요. 저희가 선택 받을 때, 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면 행복하긴 하지만 막상 스스로 돌이켜 보면 저 아니면 안 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색깔이 달라지긴 하겠죠.
캐릭터의 이미지를 통해 배우의 성격을 가늠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역할에 따라서 사람을 멀게 느끼거나 가깝게 느껴는 거 같아요. 예전에 제가 <인현왕후>라는 사극을 할 땐 모든 분들이 다 저한테 착하다고 했어요. ‘아, 착한 사람 왔네’, 그랬어요. 왜 착한지도 모르게 착한 사람이 됐죠. 그런데 <대장금>을 하고 나니까, ‘어휴, 미워죽겠어! 어쩜 그렇게 독하게 해!’ 이러고. (웃음) 그러니까 역할을 잘 맡아야 돼요. 요즘은 우리 애들도 그래요. “엄마, 이젠 그렇게 악역 같은 거 하지마. 사랑 받는 역할만 해.”
자제 분의 수능준비 때문에 <거북이 달린다>를 고사하려 했다는 얘기도 하셨죠. 그리고 지금 말씀하신 대로 악역을 맡지 말라는 자제 분들의 사소한 말이 어머니로서 마음에 걸릴 때가 있을 겁니다. 남들이 보기엔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작 본인에겐 큰 고민이 될지 모를 일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래요. 어쩌다 보니까 오래 일을 하다 보니 제 직업이 배우가 됐죠. 어느 순간에 제가 배우로 평가 받게 된 거에요. 직장인도 마찬가지잖아요. 자기가 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누군가 그런 사실을 평가해주겠죠. 내가 이 분야에서 최고가 돼야지, 이런 게 아니라 그저 연기가 좋아서 어느 날부터 지금까지 배우로서 앞만 보고 뛰었더니 다른 사람들이 너는 연기자라고 평가해준 거에요. 그런데 아이들이 크니까 아이들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저는 직업보다도 가정이 먼저라고 생각해요. 속된 말로 그런 거 물어보시잖아요. “일이 더 중요해요? 가정이 더 중요해요?” 대부분 둘 다 중요하다고 대답해요. 하지만 전 가정이 더 중요해요. 이상하죠? 사실 이렇게 얘기하면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제 일도 중요하지만 제 가족들이 제가 일을 하는 걸 행복하게 생각하고 그럴 때 제 일을 찾는 거지, 제 일을 하기 위해서 가족을 버릴 순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이젠 남편이나 아이들이 얘기하는 걸 조금씩 생각하게 돼요. 아이들이 조금 크다 보니까 점점 제 역할을 보게 돼요. 깍쟁이 같은 역할이라도 하면, 그런 역할 말고 집에 있는 평범한 엄마하라고. 그럼 이제 제가 설득을 시키죠. 악역이 있어야 주인공도 있고, 선악이 분명해야 드라마가 재미있는 거라고. 그런데 그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이들이 원하는 게 이렇다니 나도 조금 그렇게 해볼까.
가화만사성이란 말이 생각나네요. (웃음)
(웃음) 그럼요. 집안이 편해야 나와서 일도 잘되죠.
84년도에 탤런트 공채로 연기자로 데뷔했습니다.
84년 3월부터 입사를 한 걸로 됐지만 사실 83년도에 입사했어요. 제가 83학번이라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때 저는 연기의 ‘연’자도 몰랐죠. 원래 연예인에 꿈이 있던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때 저희가 가수 전영록하면 ‘와~!’하는 세대였는데 저는 그런데 무덤덤했고 오로지 무용밖에 몰랐거든요. 제가 한국무용을 전공했는데 오로지 무용만 생각하는 그런 아이였죠.
그런데 어쩌다 연기자로 입문하신 겁니까?
엄마가 우연히 원서를 갖고 와서 “얘, 한번 원서라도 내보자.” 그러시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 이런 거 내면 큰일나.” 그랬더니, “얘는, 네가 되겠니. (웃음) 그냥 사진 하나 붙이고 한번 내보자.” 그러시는 거에요. 그래서 머리 빤빤하게 빗고, 엄마 블라우스하고 언니 큐롯(Culotte)바지 입고, 구두 하나 신고, 그렇게 원서 사진 찍어서 하나 붙여 보낸 게, 1차, 2차, 3차 다 통과해버린 거죠. 제 수험번호가 3316번이었어요. 그때 한 6천명 정도가 지원을 했고, 스무 명 정도를 뽑았거든요. 남자 10명, 여자 10명. 그런데 됐어요. 그래서 방송국에 가니까 여자 10명 중에선 저 하나, 남자 10명 중에서 딱 한 명만 연예인의 ‘연’자도 모르는 친구였던 거죠. 있어요. 그 친구도 지금은 그만 뒀는데, 그 친구와 저만 카메라나 연기 경험이 없는 친구였어요. 남들은 다 연극이나 CF경험이라도 있었거든요. 방송국에서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면 다 어디론가 가요. PD중에 선배도 있고 그러니까 다들 찾아가는데 항상 둘만 그 자리에 앉아있어요. 만날 사람도 없고, 그러니까 그냥 앉아있는 거죠. 오리엔테이션에서 워크샵으로 작품을 하나 해보는데 암기력만 좋지, 연기는 어떻게 하는 지도 몰라서 헤맬 때는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닌가 보다 싶었죠.
그래도 어떻게 그만 두지 않고 계속 할 수 있었던 걸까요?
그땐 1년 전속계약을 해서 월급을 줘요. 한편 출연하면 5천원을 의무적으로 주는 거죠. 1년 동안 월급을 받고 이걸 하기로 했으니까 학교는 휴학했고 1년 동안 열심히 다녀야겠다, 싶어서 정말 열심히 했어요. 안 해본 역할이 없었거든요. 1년 동안 단 하루도 안 쉬었어요. 왜냐면 그땐 집전화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밤에 갑자기 전화하면 집에 있는 사람이 몇 명 안됐어요. 제가 항상 연락이 되는 사람 중에 껴 있었던 거죠. 그렇게 가면 뭘 시켰느냐, 더빙을 시켰어요. 그때만 해도 드라마가 대부분 후시녹음이었잖아요. 군중 박수, 이런 것까지 나가서 해야 되는 거에요. 초인종 ‘딩동’소리 듣고 ‘누구세요’, 이런 것까지 입맞춰서 이펙트를 넣어주고. 제가 사실 더빙의 천재에요. 그때 1년 동안 다 배웠거든. (웃음) 그리고 그 1년 동안 누가 가르쳐준 게 아니라 그걸로 제가 연기를 배웠죠. 그렇게 1년이 지나서 전속이 풀렸는데 365일 바쁘던 애가 이젠 일이 없는 거에요. 이걸 어떡해야 하나 싶었죠. (웃음)
그게 20년이 넘는 연기자 경력의 시작이었군요. (웃음)
만약 제가 하고 싶었던 무용을 계속 했다면 아마 사랑 받는 무용가가 돼있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분명한 건 제가 그냥 욕심이나 생각 없이 주어지는 대로 앞만 봤다는 거죠. 어떤 사심이 없었다는 거에요. 동기들이 주인공을 할 때 어쩌면 어린 마음에 아무래도 부럽기도 했겠지. 그런데 막상 질투하기 보단 내가 저기까지 가기 전에 일단 이걸 잘해야 될 거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이 지금까지 저를 연기자라는 자리에 있게 만든 거 같아요. 그리고 당시에 일에 욕심내면서 스타가 되고자 했던 하던 사람들은 지금은 오히려 다 없어졌어요.
사실 연기의 ‘연’자도 모르고 배우 생활을 시작했던 만큼 아무래도 처음엔 배우로서의 가치관이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 이렇게 연기자로서 삶을 지속하고 있는 만큼 배우로서의 자각이 자리잡았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점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그게 주기적으로 와요. 딱 십 년 된 해였는데 그 전까진 도살장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연기를 했거든요. 일단 대본을 받으면 너무 예민해지고 두려웠어요. 맨날 대본을 껴안고 잤죠. 한 십 년간 정말 일하는 게 즐겁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욕심도 없어지죠. 그런데 십 년 차엔 뭐랄까, 내 연기가 가짜구나 싶었어요. 그 때 45일 동안 연극을 하고 있었는데 매일 밤 무대에 서는 게 도살장에 올라가는 기분이었어요. 관객들 눈이 너무 무서웠고 미치겠는거지. 이건 가짜 연기인데, 이 연기를 갖고 매일 이 관객들 앞에 서는 게 옳은 일인가, 정말 몸살을 했죠. 그래서 그 연극이 끝나고, 그 다음에 들어온 드라마를 제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면 이 일을 그만 둬야겠다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때 아마 본능적으로 열심히 했을 거에요. 그 전까진 제 연기를 모니터할 생각도 못했거든요. 그래서 그 때부터 조금씩 생각했죠. ‘아, 그래. 너도 조금 가능성이 있는 아이구나.’ 그렇게 십 년을 넘겼어요. 그런데 또 한번 십 년 차가 되니까 또 그게 오더라고요. 예전에 <사랑공감>이라는 드라마를 할 때 그래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때 또 한번 느꼈죠. ‘아, 이게 또 나한테 오는구나.’ 정말 잘해야 된다는 느낌. 그걸 지내고 나니까 그 다음이 다시 좀 쉬워졌어요. 그래야만 마음이 조금 편해져요. 같은 일을 이십 년 정도 하니까 좀 익숙해지는 거 같아. (웃음)
그런데 <사랑공감>덕분에 상도 받았습니다.
덕분에. (웃음) 그런 것 때문에 용기를 얻어서 계속 할 수 있는 거에요.
지금 생각하면 인생이 아이러니할 것 같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로 자신의 평생을 보내고 있으니까요.
어느 날 밤에 문득 창가에서 제가 여태껏 어떻게 연기자 생활을 했는지 생각해보니 너무 우스운 거에요. 사실 이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버릴 수도 있었는데 어쩜 그렇게 싹싹 잘도 빠져 나왔는지, 어쩜 그렇게 잘 버텼는지, 참 아무 생각 없이 버텼네 싶어서요. 어쩌면 욕심이 없어서 버텨진 거 같아요. 최고가 돼야겠다, 연기를 잘 해야겠다, 스타가 돼야겠다, 이게 아니고 그냥 주어진 걸 한 계단씩 오르다 보니까 가능해진 거죠. 자기가 밑바닥부터 올라갔으면 몇 계단쯤 올라온 줄 알잖아요. 그런데 내려가는 건 쉬워요. 그렇게 어느 순간 딱 떨어지면 어떡해요. 그 괴로움을 참기 힘들죠. 그런데 학연이나 혈연, 지연이 없이 제가 이 일을 시작했다는 게 지금까지 오히려 저를 연기할 수 있게끔 해준 거 같아요. 한 계단 한 계단 밟고 올라가다가도 어느 틈엔가 인기 없이 내려올 때도 잘 내려와요. 그냥 툭, 툭, 툭 내려오면 되지, 뭐. (웃음)
스스로는 그렇게 자신을 과소평가하면서도 왜 자꾸 자신에게 연기적인 기회가 주어지는지 의아한 적은 없었습니까?
저는 우리 아이들한테도 이런 얘기를 해요. “지금 당장 최고가 되겠다고 생각하지 마라. 앞만 보면서 열심히 가다 보면 누군가 너를 최고로 만들어주고 있더라. 그걸 너 혼자 만든다고 생각하지마. 주변에서 함께 만들어주는 거야. 주변에서 너 최고야, 라는 소리가 나와야 최고지. 네 자신이 너 혼자 아무리 최고라고 해 봤자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네가 최고가 되겠니.” 지나고 보면 참 운 좋았다 싶어요. 저도 자신이 없는데 누가 저를 선택해주지 않았다면 그냥 사장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운 좋게도 누군가 늘 찾아줘서 행복하게도 늘 그 일을 하게끔 만들어줘요. 그래서 저는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순간순간 생각할 때마다 웃음이 픽 나요. ‘어머, 네가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연기를.’ (웃음) 사실 여기까지 왔다는 걸 늘 감사해요. <사랑공감> 때는 주인공을 맡고 상까지 받았지만 그 다음에 주연급이 아닌 조연급의 연기를 하니까 어떤 분이 저한테 그랬어요. 저보다 훨씬 스타였던 분인데, “야, 너 이제야 그런 거에서 벗어났는데 왜 그런 역할을 해?” 그러시는 거에요. 그래서 그랬어요. “저는 그냥 견미리니까요. 인기 있는 스타가 아니라 그냥 배우니까요.” 제가 그 맛을 한번 봤다지만 그거 아닌 다른 걸 또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냥 배우라면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지, 그 역할에 대해서 크기나 질, 양을 따지겠어요. 질이나 양은 제가 만드는 거죠. 5분을 나와도 5분 동안 제가 충실하면 아마 남을 거에요.
그런 생각들도 사실 당시엔 몰랐지만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그 과정에서는 알기 어려운 사실일지도 모르죠. 다만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고 나니 그런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시기가 오는 게 아닐까요.
십 년 지나고 이십 년 지나니까 이런 말을 하지, 십 년 차 되는 해에도 너무 아팠고, 이십 년 차 되는 해에 또 아팠고, 그래서 한편으론 두려워요. 제가 나이가 들어서 이런 두려움이 다시 오면 그 땐 어떻게 극복할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 때도 또 힘들어 지겠죠. 아마 그때마다 힘들 거 같아요. 그래도 그 때 아팠던 게 지금은 너무 많이 도움이 되니까 앞으로도 참아야겠죠.
나이에 따라 연기할 수 있는 역할에 제한이 생기기도 합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요?
아뇨. 그런 것보단 곱게 나이 들고 싶어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연기자는 너무 나이 먹어서 할 수 없는 역할도 있고, 너무 젊어서 할 수 없는 역할도 있죠. 참 맞추기 힘들어요. (웃음) 그래도 저는 주름진 얼굴이 친숙하고, 익숙하고, 사랑스러운 인상으로 비춰지고 싶어요. 그런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사실 사생활에 대해서 많이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편이 아닐까 싶은데요.
인터넷이 무서워요. 그런데 저는 어차피 공인이라 그런 무서움을 감수하지만 아이들이 크니까 그게 아이들에게 많은 피해를 줘요. 그래서 어느 때는 인터넷 사이트에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다 지워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죠. 걔들은 굉장히 괴로워하거든요. 그리고 차라리 있는 얘기만 하면 괜찮아요. 어느 때 보면 제 딸도 아닌데 제 딸이라고 올라와있을 때도 있다니까요. (웃음) 다만 기분 좋게도 예쁜 애들만 올라와있어서 다행이지. 내 딸보다 훨씬 예쁜 애들이야. 그냥 추측해서 올렸나 보죠. (웃음) 그런데 어쨌든 걔들도 불편할 거 아니에요. 제가 앞에서 얘기했듯이 저는 연기자일 뿐이지, 스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니까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서 이슈가 되는 게 별로 재미없어요. 그냥 저에게 주어진 걸 잘 하면 되는 거죠.
<거북이 달린다>가 본인에게 준 특별한 변화가 있을까요?
이제 영화배우가 됐으니까 영화 시나리오는 다 받아서 읽어봐야지! 이런 자신감을 줬어요. (웃음)
다음 드라마에 대한 기사가 벌써 났더군요. 주인공이라던데.
아, 그렇게 나갔더라고요. 사실 해볼까 생각하다가 안 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홍보가 먼저 나가버렸죠. 연령대가 조금 안 맞더라고요. 영화 개봉했으니까 이제 조금 더 쉬어야겠다 싶어요. 이렇게 몇 달 지나가고 찬바람 불 때쯤 다음 작품 생각해보려고요. 이번엔 좀 많이 쉬고 싶어요. 그런데 또 그러다가도 생선가게 아줌마라도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전 후딱 해버리니까요. 제 마음 저도 몰라요. (웃음)
충남 예산면 운곡리의 조필성(김윤석)은 한적한 시골에서 치안 유지보다도 집안의 경제난 해소가 더 고민스러운 한량 형사다. 만화방을 운영하며 남편의 쥐꼬리 월급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아내(견미리)의 바가지는 득달같고, 두 딸에겐 매일같이 면목이 없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행운이 찾아온다. 소싸움 대회를 주관하던 중, 불현듯 찾아온 예감에 아내의 통장을 훔쳐다 판돈을 걸자 열 배의 배당금이 쏟아진다. 하지만 행운은 곧 불운으로 돌변한다. 친구에게 맡긴 배당금을 찾으러 가던 중, 희대의 탈주범 송기태(정경호)를 만나고, 돈도, 자존심도 모두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그리고 추격이 시작된다. 거북이 달린다.
<살인의 추억>은 시골이란 정체된 정서의 공간에 스펙터클한 서스펜스를 채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추격자>는 추격의 대상을 숨기지 않고도 긴박한 추격전을 만들 수 있음을 (한국의 영화적 토양에서) 증명했다. 신분을 감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추격자>와 유사한 구도를 보유한 <공공의 적>은 형사로서의 제도적 처벌보다도 개인적인 복수심에 근간에 둔 주먹질을 연출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결말을 그린다. 앞서 나열한 세 영화의 공통분모는 무능한 경찰력이다. 과학수사를 운운하거나, 직감을 따라가거나, 혹은 불법을 자행하거나, 범인들은 항상 형사들을 제치고 능수능란하게 빠져나간다. 이는 <거북이 달린다>도 다르지 않다. 다만 여기서 ‘거북이’는 형사를 겨냥한 단어가 아니다. 구체적인 언어를 동원해 설명하자면 ‘시골’의 ‘서민’‘가장’형사다.
향토적 풍경을 바탕으로 축조된 수사물이란 점에서 <거북이 달린다>는 <살인의 추억>과 <추격자>를 연상케 하는 장르적 환경과 구조를 지닌다. 동시에 그 추격의 주체와 객체가 형사와 범인이라는 공적 신분을 벗어나 개인과 개인의 대결 양상으로 치닫는 피날레를 연출한다는 점에서 <공공의 적>이 떠오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거북이 달린다>는 앞선 세 영화와 활성화된 에너지의 유형이 다르다. 앞선 세 영화가 고체처럼 단단하게 응축된 서스펜스를 기본적인 영화적 질량으로 삼은 장르물이라면 <거북이 달린다>는 액체처럼 유연하게 출렁이면서 종종 넘쳐흐르는 방식의 코미디에 가깝다. 눈에 띄는 건 스토리보다도 캐릭터이며 전반적인 분위기보다도 순발력 있는 리듬이 관건이다.
서울에서 내려온 날렵한 탈주범과 그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시골의 느슨한 형사 사이엔 좀처럼 메울 수 없는 빈틈이 보인다. 공권력을 농락할 정도로 두뇌가 비상하고 운동신경 또한 발군인 송기태에게 조필성은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적수다. 이는 ‘토끼와 거북이’의 토끼처럼 방심하기 좋은 상대인 셈이다. (동화의 관계를 염두에 둔 제목처럼) <거북이 달린다>는 방심하는 토끼를 쫓아 달리는 거북이의 고군분투를 그린 영화다. 그리고 그 거북이는 시골에 사는 서민이자, 가장이며, 아버지다. 형사의 추격전이라기 보단 촌놈의 사투에 가깝다. 촌스럽고 느슨한 루저의 승리를 연출하기 위한 서사를 그린다. 이성적으로 직조된 것이라기 보단 감정적인 결과물에 가깝다. 그만큼 선악의 관계는 배제되고 개인적인 사연이 중시된다. 형사도, 범인도, 제 나름의 사연이 있다. 다만 그 사연의 비중이 다르고 그만큼 캐릭터에 대한 편애가 형성된다.
드라마틱한 감정을 주조하는 코미디로서 좀 더 효율성이 뚜렷한 <거북이 달린다>는 장르적 동선을 밟아나가는 덕분에 장르적 기시감을 부르지만 종종 느슨하게 풀리는 속도감을 활용해 유머를 발생시키고 드라마틱한 감정을 주조하는데 좀 더 효율성이 뚜렷한 작품이다. 장르적 비범함보단 평이한 드라마로서의 야심이 짙다. 추격전의 구도에 곁가지를 치는 가족주의의 감성으로 이뤄진 <거북이 달린다>는 지극히 단순한 내러티브를 지니고 있지만 종종 명확하게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함으로써 일관성 있는 리듬감에서 벗어나곤 한다. 하지만 연주력의 공백을 메우는 건 배우라는 악기다. 주연과 조연 가릴 것 없이 <거북이 달린다>의 캐릭터를 이루는 배우들은 제 역할에 충실하다. 특히 김윤석은 마치 악센트와 같은 강세를 찍으며 단조로운 이야기에 특별한 음색을 새긴다. 다만 대비를 이루는 캐릭터의 세기가 좋은 형태를 이루지 못해 종종 사연의 중심이 흐트러지는 인상이 감지되고 그만큼 결말부를 장식하는 쾌감이 약해진다.
그럼에도 <거북이 달린다>는 환경을 잘 응용한 코미디이자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한 오락영화다. 과하거나 부족한 지점이 눈에 띄지만 마이너스와 플러스의 총합의 균형이 적절하다. 무엇보다도 캐릭터가 얻는 마지막 성취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 촌놈을 위해 배려된 작위적 송가라지만 그 소박한 에너지가 온전히 전달되는 기분이다. 그 순박한 자질이 밉지 않다.